9.1 민중종교운동과 문학9.1.1 민중종교운동의 성격과 의의이제부터 다룰 시기는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 제2기이다. 임진왜란을 겪은 다음 17세기에 시작된 중세에서 근대로의 제1기가 최재우가 東學을 창건한 1860년(철종 11)을 계기로 해서 제2기로 바뀌었다. 제1기는 근대문학을 이룩하는 길을 스스로 모색하고, 제2기는 서양의 충격에 대응하면서 근대문학으로의 전환을 더욱 가속화한 시기이다.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의 두 시기가 서로 구별될 수 있는 것은 제3세계 여러 나라에서 확인되는 공통적인 현상이다. 그런데 우리는 제1기의 과업이 크게 성취된 다음에 서양의 총격이 닥쳐오고, 외세에 주체적으로 맞서면서 내부의 개혁을 이룩하자는 민중종교운동이 제2기로의 전환을 선도한 점이 남들과 다르다.민중종교를 포교하는 운동과 교단의 사회운동을 민중종교운동이라는 용어로 함께 지칭하기로 한다.민중종교운동의 여러 교단은 각기 자기네 敎祖의 개인적인 수련과 득도에 의해 엄청난 변혁이 시작되었다 하고 서로 배타적인 절대성을 내세우기도 하지만, 기본 교리에 뚜렷한 공통점이 있다. 공통점은 영향이나 차용의 결과이기 이전에, 그 시대 민중이 바라 마지않던 소망을 집약한 데 근거를 둔다. 오랫동안 할 일을 찾지 못해 방황하고 있던 인물이 어느 날 득도를 해서 인간만사에서 천지운행까지 꿰뚫어 알게 되었다는 것은 모든 문제를 일거에 해결하고자 하는 소망을 비약적으로 구현한 상징이다. 비약에 반드시 신비로움이 개제하니 종교를 일으켰다 하겠지만, 모든 교조가 문제 해결을 내세로 미루지 않고 현세를 혁신하겠다고 한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득도를 해서 포교를 하자 짧은 시간에 많은 신도가 모여들었던 것은 믿고 의지할 데가 필요했기 때문만이 아니고 세상을 혁신하겠다는 강령이 깊은 설득력을 지녔기에 그럴 수 있었다어느 교조이든지 억압·살육·원한으로 가득 찬 당시까지의 역사가 근본적으로 쇄신되어야 한다고 했다. 불행이 극도에 다다르면 반드시 반전이 있게 마련이라는 소박한 신념을 신비롭게 교리화해이 일어난 후에도 탄압이 더욱 가혹해져서, 지배체제와 충돌을 하지 않는 민중종교운동이라야 견디어낼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은 퇴조기에 유교나 불교에 의거해서 세상을 구하겠다는 움직임이 새삼스럽게 주목을 받거나 새로운 형태로 나타났다.유교의 재현은 여러 가지 모습을 띠었다 이항로 계열의 척사위정파는 세상이 그릇되고 나라가 위기에 처한 것은 오로지 성현의 가르침을 저버린 탓이라고 하며 정통을 수호하고자 했다. 이병현 같은 사람은 믿고 의지해야 할 종교가 있어야 하는 시대에 이르렀다고 보아 공자교 운동을 일으켰다. 하지만, 유교는 혁신되기 어려웠고, 종교로서의 요건이 부족했으며, 민족운동과 연결되지 않았다.「정역」은「주역」을 뒤집어놓은 전혀 새로운 易이며, 지금까지 잘못되어온 천지운행의 도수를 근본적으로 시정하겠다는 것이었으니 예사로운 책이 아니다. 1879년에 깨닫고, 1885년에 「정역」을 완성했다 한다.「정역」은 세 번째 역이라고 했다. 첫 번째의 역은 복희팔괘를 근거로 해서 이루어지고, 두 번째 역인 현전「주역」은 문왕팔괘를 기본 원리를 삼았는데, 그 사이에 시간이 많이 흘렸을 뿐만 아니라, 그 둘 다 천지운행부터 비뚤어져 있는 先天의 산물에 지나지 않기에 새로운 역이 필요하다고 했다.그런데「정역」은 한문으로 저술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말이 어렵고 뜻이 깊어 여간해서는 이해할 수 없다. 연구하고 풀이하려는 노력이 오늘날까지 계속되지만 본령에 이르지는 못한다고 한다.한시를 토로해서 보완책을 삼는 데에 머물렀다. 「九九吟」이라고 한시의 서두가 이렇게 시작된다. 범속한 선비가 숭상하는 격식에서 벗어났기에 방랑음인 노래를 지어, 아직도 유학의 경전에 매달리고 있으면서 선천시대가 끝나는 줄 모르니 개탄 스럽다고 했다.김항이 「정역」을 통해서 말하고자 한 바는 후천개벽의 새로운 시대를 맞이해 세계사의 중심이 되는 조선이 모든 차별과 불행을 해소하는 평등·사랑·조화를 이룩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해 풀이할 수 있다고 하는데, 표현방법은 명쾌하지 못하다.「정부분 대원군의 실각과 더불어 역전되었지만, 민속예술의 발전은 위축되지 않았다.개인적인 취향이 표방하지 낳은 가운데 민속예술을 활성화하고 구비문학에서 새로운 창작이 이루어지는 계기를 만들었으니 반작용을 하기 어려웠다. 밑으로부터의 창조가 상승하거나 그 자체로 활성화되는 것이 돌이킬 수 없는 추세였다.9.2.2. 판소리의 상승과 변모민속예술 또는 구비문학의 여러 종목 가운데 판소리는 음악적인 세련성이나 문학적인 수식을 다른 어떤 것보다 잘 갖추어 출세를 할 수 있었다. 한편 하층민의 인기를 모으는 민중예술이면서 상층의 애호도 받는 이중적인 성격이 판소리의 운명을 결정짓는가는 상황에 따라서 달라지게 마련이었는데, 대원군은 판소리를 무척 즐기고 판소리광대를 고무해서 상승의 추세를 더욱 가속화 시켰다.박유전은 판소리 창법의 서편제를 창안한 사람이다. 그리하여 기교를 더욱 세련시키고자 한 노력이 대원군의 인정을 받아 무과급제를 했다 한다.판소리광대는 줄광대·땅재주꾼·선소리패·사당패와 그리 다를 바 없는 천인이었는데 엄격한 수련을 거쳐 세련된 악곡에다 유식한 사설을 얹어 부르는 재주가 특별하게 인정되어 신분사회의 위계질서를 뛰어넘을 수 있었다. 신분제도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이다. 열두 마당으로 늘어난 판소리가 여섯 마당 또는 다섯 마당으로 줄어들기 시작한 것이 그 무렵의 일이다. 판소리에는 ....타령 이라는 것과 ....가 라는 것이 있는데 타령은 상스럽다면 가 는 격조가 높다고 할 수 있다.···· 다섯 마당만 기본 종으로 채택되었고 나머지 것들은 이따금 불려지다가 마침내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충효·우애 등의 표면적 주제를 갖추고 있어서 판소리의 상승에 유리한 작용을 했고 장편이기 때문에 양반 취향의 격조 높은 문구를 삽입하기 쉬었다. 단 이 조건이 작품 전편의 성격을 결정짓지는 않았다. 을 위시한 판소리계 소설이 방각본 소설에서 커다란 위치를 차지하고 활자본이 나타나자 출간회수에서 가장 앞선 것만 보아도 상승을 거치면서 판소리의 인기가 확대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신속은 한동안 지난 시기와 거의 같은 방식으로 지속되면서, 그 내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1866년(고종 3) 3월에 왕비 책봉을 알리기 위해 유후조를 정사로 한 사신 일행이 청나라를 다녀왔을 때, 서장관으로 참여한 홍순학이「연행가」를 자제군관으로 동행한 유후조의 조카 유인목이「북행가」를 지었다.1861년에 영·불 함대가 북경을 점령해 청나라를 굴복시킨 지 5년밖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도처에 남아 있는 후유증이 홍순학에게는 긴요한 관심 거리였다. 청나라는 겉보기로는 아직 번영을 누리고 있었지만 실상은 기울어지기 시작했다.1876년(고종 13)에 일본의 위협에 굴복해 수호 조약을 맺고, 전과는 다른 양상의 불등평한 외교 관계가 시작되었다. 그 뒤에 일본에 간 외교관 가운데도 가사를 남긴 사람이 있으니 이태식(1859∼1903)이다. 이태식은 주일 공사관의 참서관으로 일본에 가서 1년간 머무는 동안에 견문한 바를 1902년에 가사로 읊고「유일록」이라고 이름지었다.그 가사는 일본이 예의범절을 모르는 금수의 나라라고 보아 100여 년 전의「일동장유가」와 같은 관점을 나타냈으며 생활의 모습을 관찰한 항목도 비슷하다. 전통적인 대일관을 지닌 작가가 원하지 않게 일본에 외교사절로 가서 일본의 모습을 비판적인 관점에서 다루면서 정신적인 우위를 견지하고자 했다.국내 여행의 견문을 다룬 기행가사는 전과 다름없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창작되었으나 대부분 명산이나 명승지를 찾아 놀면서 소회를 풀었다는 내용이고 새로운 경험을 반영한 것은 흔하지 않다. 다소 색다른 작품을 찾는다면 조희백(1829∼1900)의「도해가」가 있다. 전라도 함열현감으로 재직 중이던 작자가 1875년(고종 12)에 조운선으로 세곡을 운반하는 것을 지휘해 임지를 출발해 서해를 건너 강화도까지 이른 일을 한문 일기로 적고 다시 가사로 읊었다. 그런 일은 전부터 있었지만 가사의 소재로 삼은 것은 이 작품이 처음이다.울릉도 개척을 다룬 정래기(1835∼1896)는 원래 경상도 경주 사람이었는데, 두 번이나 상처를 는 노론 벌열층 중 정원용(1783∼1873)이 두드러진 위치를 차지했다.영의정으로 있으면서 철종을 옹립하고 철종이 죽고 고종이 즉위할 때까지의 공백기를 관리했으니 왕조의 기둥이었다고 하겠으며 폭넓은 교양을 갖추고 대가의 풍모를 보여주었다.조두순(1796∼1870)은 고종 추대에 공을 세우고 대원군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영의정에 올라 경복궁 중건 때 도제조를 겸하고, 천주교 탄압에 앞장섰다. 세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는 위기의식은 가지지 않았으며, 정통 한문학의 품격과 진폭이 유지될 수 있게 하는 것을 자기 소임을 여겼다. 노론이 정통을 온통 장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고, 다른 당파에서도 그 나름대로의 대응책을 마련했으나 파장이 확대될 조건은 아니었다.한편, 소론 쪽에서는 명분론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어 정통 한문학의 체질 개선을 더욱 적극적으로 시도했다. 이유원(1814∼1888) 이 그렇게 하는데 특히 소중한 구실을 했다. 경색된 관념을 버리고 안팎의 정세에 대해서 융통성 있게 대처하려고 했다. 문학 창작에서는 악수비의 전통을 확장하는데 특히 힘썼다. 많은 글을 남기고 를 저술한 가운데 주목할 만한 작품이 적지 않다.한시가 지체를 가늠하는데 소용되는 고답적인 문학에 머물지 않고 소재나 표현을 우리말 노래에 근접시켜 하층과 공감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는 조선 후기 동안의 각성을 더욱 고양시키고자 했다. 45수에서 시조를 한역했으며, 16수에서는 잡가류를 받아들이고, 을 지어 판소리를 다루는 데까지 나아갔다. 그런데 그런 방향에서 상하의 문학이 통합될 수 있기에는 사태가 너무 급박했다. 안팎의 도전 가운데 밖으로부터 닥친 것이 더욱 문제가 되었다. 양이의 정신적 물질적 침투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정통을 재확인하는 강경한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는 척사위정의 주장이 큰 설득력을 지니게 되었다.그 선구자인 이항로(1792∼1868)는 성리학의 의리론에 투철한 산림의 거두로서, 세태의 변화를 용납치 않는 척사위정의 논리를 엄정하게 세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