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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킹덤오브헤븐에 대한 비평 - 기독교 선교사적 관점의 해석
    학 번을 보면서- 기독교 선교사적 관점의 해석 -과목명학 년담당교수이 름제출일이 영화에 대해서 정리할 때, 나는 영화에 나오는 연기자들의 대사를 정리하면서 이것이 선교와는 어떤 관계가 있으며, 이 영화의 배경으로 나타나고 있는 십자군 전쟁과 선교는 어떠한 연관성이 있는지 비평하며 살펴보려고 한다.먼저 영화는 유럽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정복한지 100여년이 지난 후 전쟁과 굶주림에 시달리던 유럽인들은 부귀와 구원을 찾아 성지로 떠난다는 자막과 함께 그 중 한 기사가 아들을 찾아 돌아왔다는 내용으로 시작된다. 1184년 프랑스를 배경으로 시작된다.이 영화의 대사들을 살펴보면, 감독이 기독교와 다른 이교도들 간의 중심을 잡으려는 시도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님의 이름으로 불가능한 일들이 기독교 내에서 자행 돼 왔네말 그대로 ‘사랑’을 외치는 기독교 안에서도 서로 다른 종교를 인정하지 않고 대립하며 살인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데, 과연 살인도 주님의 이름으로 가능할까?결국 이 영화는 기독교과 이슬람의 종교전쟁을 다루고 있는 만큼, 감독은 서로 다른 종교에 대한 민감한 사안을 충돌시키려하지 않고 오히려 십자군 전쟁을 한 영웅의 모습에서 바라보기를 원했던 것 같다.하나님과 이교도들의 싸움이지 , 영웅은 더 나은 세상을 만든다 와 같은 대사들이 그런 면을 보여준다.그러나 기독교에 대한 기본진리에 대해서는 발리안의 아버지인 고프리 영주의 말을 빌어 분명히 이야기한다.- 신은 인간을 창조했고 원죄를 타고 태어났지그리고 고프리는 발리안에게 자신이 지은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한다.- 나도 많은 걸 잃었다. 예루살렘을 구원의 땅이라고 하지만, 내겐 이곳이 구원의 장소야 현재로선! 널 알고 있었다. 네 모친을 범했었다. 그래서는 안되는 거였지 난 영주의 형제였고 그녀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허나 겁탈한 건 아니었다. 내 용서를 받아다오 난 이벨린의 영주 고프리다. 예루살렘에는 내 군대가 있어 그곳에 네게 맞는 일이 있을거다. 함께 가주면 고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을 스스로 끊을 수 없기 때문이다.그 동생의 말에 분을 이기지 못한 발리안은 동생을 그대로 죽이게 된다. 그리고 큰 죄책감에 시달리게 되고 결국 십자군에 참여하기로 결심하고 예루살렘으로 떠나게 된다.- (발리안이 그의 동생을 죽인 뒤)사람을 죽였습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구원 받나요? 제 아내의 죄도 씻겨집니까?이 대사에서 우리는 구원의 문제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예루살렘에 가면 구원을 얻을 수 있냐는 발리안의 질문은 너무나 엉뚱하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십자가의 복음을 믿으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 물론 나의 삶의 모습도 변해야 한다. 하지만 주인공은 예루살렘이라는 그 지역이 예수님이 죽으셨던 곳이었기 때문에 그곳에 가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러한 질문은 잘못된 생각이다. 우리는 십자가의 복음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고 그것을 전해야 한다. 예루살렘에 간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한편 발리안은 자신의 살인을 인정하고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여기서 궁금한 점이 하나 생기는데, 과연 발리안은 자신이 원죄를 가졌다는 것을 인정할까? 아니면 살인한 뒤에 인정할까? 라는 것이다. 우리가 선교지에서도 복음을 전하게 될 때에도 가장 먼저 묻는 것이 원죄를 인정하느냐이다. 선교지의 많은 영혼들이 이 사실을 인정할 때, 복음이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발리안의 살인이 밝혀진 뒤) 사실입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전 살인을 한 죄인이에요- 누구나 다 죄인이야- (십자군의 한 병사) 이교도 학살은 죄가 이니오, 천국갈 선행이오이교도 학살은 죄가 아닐까? 난 죄라고 생각한다. 다른 종교의 사람들도 결국은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년에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였던 인질극은 정말 용서받을 수 없는 행동이었다. 이것에 대해선 훗날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이다.- 성지에 뭐가 있는지 아니? 새로운 세계, 유럽에서 미천했던 자도 거기선 큰일을 할 수 있지 그곳엔 신분의 차별이 지에서도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죄를 용서받아야 한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봐, 양심이 살아 있는 땅, 하늘의 왕국을... 기독교와 이슬람은 평화롭게 지내왔어, 우리왕과 살라딘의 공존이지, 그게 가능하리라 생각했었니? 가능해, 내 혈육은 너뿐이다 날 실망 시키지 마.이 영화에서 어쩌면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 생각된다. 기독교과 이슬람의 공존을 이 영화는 꿈꾸고 있다. 단순한 공존이 아닌, 평화적인 공존 말이다. 하지만 이 시대의 상황에서 볼 때 미국과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의 전쟁은 그 당시 십자군 전쟁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그렇다면 기독교와 다른 종교의 평화적인 공존은 가능할까? 사실 나는 이 질문에 답을 하기가 굉장히 꺼려진다.이 때 왕의 후계자였던 기드루지앵이 등장한다. 사실 이 영화에서 기드루지앵을 악역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이 이 사람을 보았을 때는 모든사람이 부정적으로는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기독교를 다른 종교보다 가장 우월하게 이야기하기 때문이다.왕이 죽으면 이슬람교도는 이 땅에 발을 못 붙여 네 애비 같은 이단자들도 마찬가지지, 난 기드루지앵이다. 내 이름을 기억해둬, 내 얼굴도......- 아버지(이벨린의 영주)가 발리안에게) 적 앞에서 결코 두려워 말라 늘 용기 있게 선을 행하라 생명을 걸고 진실만을 말하며 약자를 보호하고 의를 행하라 그게 네 소명이다. (반지를 주며) 명심하라는 뜻이야 (검을 준다) 왕을 지켜드려라 왕이 죽으면 백성을 지켜줘.아버지는 죽기직전 발리안에게 그의 소명을 분명히 이야기해준다. 나는 이 대사를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의 소명을 다시한번 발견하게 된다. 생명을 걸고 진실만을 말하며, 약자를 보호하고 의를 행하라는 말이 선교사로서 갖추어야 할 소명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신부) 아드님 말고 신께 고하셔야죠, 죄를 회개합니까?- 아버지 고프리) 한가지 죄만 빼고 (죽는다)하지만 죽기 직전 고프리는 자신의 죄에 대해서 모든 것을 회개하지 않고 한 가지를 빼게 예루살렘으로 함께 떠나게 된다.예루살렘에 도착한 발리안은 그 노예를 풀어주게 된다.- 누구를 노예로 삼긴 싫다. 어서 가게- 노예) 당신이 죽인 분은 위대한 장군이셨소. 그 분 이름은 시리아의 머마드, 당신의 덕망은 적에게도 큰 귀감이 될 겁니다.이런 모습은 영웅적인 모습에서 너무 감동받은 부분이었다.예루살렘에 와서 발리안은 예수가 처형된 곳에 올라가게 된다. 그리고 예수가 처형된 곳에 아내가 맸던 십자가를 묻으며 이렇게 이야기 한다.- 당신은 지옥이 아닌 내 맘 속에 있어.너무 가슴 아픈 부분이었다. 자살로 인해 그 아내는 지옥에 갔을지도 모르지만, 발리안 자신에게는 사랑하는 아내가 늘 가슴속에 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그렇게 올라갔다 내려온 발리안에게 한 병사가 이렇게 묻는다.- 신을 만났나요?그러자 발리안은 이렇게 대답한다.- 아무 말씀이 없었소, 예수가 처형된 언덕에서도, 신은 날 버렸소- 어쨌든 이제 난 신앙을 잃었소- 신앙은 믿을게 못되요그에게 신앙은 정말 믿을 것이 못되는 것이었을까?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을 잃고 자신의 동생마저 죽였던 그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만이 구원할 수 있다는 신앙을 선교지의 많은 영혼들에게 심어주어야 한다. 만약 선교지의 사람들이 ‘신앙은 믿을 것이 못된다’라고 고백해버린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들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까? 한번쯤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폭력의 광기를 주의 뜻으로 합리화하는 자가 많죠, 너무나 많은 살인자의 눈에서 광기 어린 신앙을 보았소, 선행과 약자를 돕는 용기만이 참된 믿음의 모습이오, 의로움도, 주님의 뜻도 이 속에 다 들어있소, 매일의 행동이 당신의 선악을 결정짓죠.이 안에는 우리가 취해야할 믿음의 모습이 담겨있다. 예수님이 고아, 과부, 헐벗은자들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우리들도 선행과 약자를 도울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전쟁의 피해로 가난과 굶주림에 있는 아프리카의 영혼들, 그리고 북한의 영혼들이 우리가 용기를 가지고 다가가야 할 사람들이다.- 왕은 살라딘과 6년재 화친 중이오, 예루 당시엔 어쩔 수 없었다, 그런 건 안통하니 명심해.우리의 삶은 하나님께서 이끄신다. 다른 사람에 의해 조종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선교지에 나가라고 하시면, 그대로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변명이 통할 수 없다.- 좋아, 부친의 집인 이벨린으로 가게, 이젠 자네 집이네, 거기서 순례자의 길을 지켜주게, 특히 유대인과 이슬람을 보호해 주게, 예루살렘엔 모두가 환영일세, 단지 유용해서가 아니라 그게 옳기 대문이야, 백성을 지켜주게, 내가 무력해지면 그땐 와서 날 도와주게예루살렘 왕은 발리안에게 부친이 있었던 이벨린으로 가서 그곳을 지키라고 명령한다. 그러면서 모든 사람들을 보호하라고 이야기한다. 결국 이 이야기는 종교간의 공존도 가능하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유대인, 기독교인 모두 같은 사람이라는 것에 의미를 두어야 한다. 서로간의 종교가 다르다고 해서 헤치는 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Quas-sumus hoc pritis : 현재의 우리가 곧 너희의 미래이다.이벨린에 도착해서 발리안이 보았던 어느 집의 문구였다.이벨린에 돌아온 발리안은 그 지역을 개발하기 시작한다. 그곳에는 기독교 유대교 회교 각 종교인들이 함께 사는 곳이었다. 그 첫 개발로 우물을 파내기 시작하고 수로를 만들게 된다. 다음날 아침에 발리안은 기도하는 이슬람인들을 보게 된다.- 시빌라 공주) 이슬람은 늘 단합해요 한 마음 한 믿음으로 마호멧은 복종을 외쳤고 예수는 선택하라 했죠한편 살라딘은 발리안이 지키는 이벨린으로 침공을 하게 되고, 그들의 군대는 서로 싸우게 된다. 하지만 발리안의 군대는 살라딘의 군대에 밀리게 되고, 그는 죽음 직전까지 가게 된다. 그런데 적장은 그를 살려준다. 그 이유는 예전에 발리안이 그 적장을 노예에서 풀어줬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당신의 덕망은 적에게도 큰 귀감이 될 겁니다.’ 라고 말했던 사람은 노예가 아니었다. 그는 살라딘의 기사였던 것이다.- 우린 어떻게 되나?- 행한대로! 뿌린대로 거두리라,성경말씀대로 발리안은 뿌린대로 거두었던 것이이다.
    인문/어학| 2008.12.17| 6페이지| 2,000원| 조회(5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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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네 신을 벗어라 를 읽고
    책명 : 네 신을 벗어라저자 : 로렌 커닝햄, 제니스 로저스/YWAM(국제 예수전도단)과 열방대학의 설립자 겸 총장저서 :벼랑 끝에 서는 용기하나님, 정말 당신이십니까?Why Not Women?역자 : 예수전도단출판년도: 1993.출판사 : 예수전도단PREVIEW이 책을 통해서 가장 눈에 띄는 단어는 아마 ‘포기’일 것입니다. 여기서 나타나는 포기란 부정적인 포기가 아닌 긍정적인 포기로서 이 책에 나타난 포기가 결국 복음을 전하기 위한 포기라는 것을, 그리고 세상 사람들과 반대 정신으로 살아가는 삶으로서 세상적인 것들을 포기하는 것을 우리는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차례보기포기할 때 주어지는 능력의 삶1. 온 열방에 이르는 길2. 맨발로 가라포기할 때 주어지는 축복의 삶3. 사랑하는 이들을 내려놓을 때4. 재정을 내려놓을 때5. 자기 자신을 내려놓을 때6. 명예를 내려놓을 때7. 감정을 내려놓을 때포기할 때 주어지는 승리의 삶8. 반대정신으로 회복되는 하나님 나라9. 모든 것을 이기고네 신을 벗어라Ⅰ. 포기할 때 주어지는 능력의 삶1. 온 열방에 이르는 길첫 장에서는 가장 중요한 단어인 ‘포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무엇이 진정한 포기라고 이야기 할까요?저자는 개인적인 권리를 포기해야만 진정한 포기라고 말할 수 있다라고 말합니다.더 나아가서 내게 있어서 가장 큰 권리인 나의 생명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생명을 포기하기란 상당히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긴다면 나의 생명은 조금도 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나의 생명을 포기했을 때, 나의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은 변화될 것입니다.2. 맨발로 가라여기서는 겸손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네 발에서 신을 벗는다는 의미(겸손)는 ‘종’이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종이 되었다는 것은 우리 또한 존귀한 존재라는 것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Ⅱ. 포기할 때 주어지는 축복의 삶3. 사랑하는 이들을 내려놓을 때여기서는 사람들에 대한 포기를 이야기 합니다. 즉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가족의 일원까지도 하나님께 포기할 때, 하나님께서는 또 다른 방법으로 축복해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포기할 때, 회복시켜주십니다. 우리에겐 용기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보다 조금이라도 더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라면 무엇이나 우상인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사랑을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비교해 보았을 때 마치 ‘미워’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우리는 그분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4. 재정을 내려놓을 때여기서는 재정의 가장 큰 원칙을 세우자고 이야기 합니다. 그것은 ‘주는 자의 복을 누리며 살자’입니다. 내가 비록 부족해도 다른 사람이 재정을 필요로 한다면, 부족해도 주자는 것이지요.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나타난 웨슬레의 재정정책을 한번 살펴볼까요?첫 번째, 많이 벌자.두 번째, 많이 저축하자.세 번째, 많이 주저 없이 주자.이 세 가지의 재정원칙을 기억합시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재정을 포기할 때, 그것은 정말 하나님께서 채워주십니다.5. 자기 자신을 내려놓을 때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 “하나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응답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집에 머무를 수 있는 권리도 기꺼이 포기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잘못이 아니다. 어느 한 사람이라도 멸망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성경에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로’는 명령이 있습니다.”“우리가 그 일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세상이 구원받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잘못입니다. 지구상의 어디에도 미국에서만큼 복음이 널리 알려진 곳은 없습니다. 당신에게는 부르심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이미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만약 당신이 지금 그곳에 머물러 있다면 하나님게 ‘하나님은 나를 지금 이곳에 머물도록 부르셨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당신이 지금 머물고 있는 그곳에 머물러야 하는 절대적인 부르심이 없다면 당신은 다른 어떤 곳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6. 명예를 내려놓을 때스코틀랜드 교회 목회자로 계시는 캠벨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나는 천국에서 유명하고 지옥에선 두려운 존재가 되길 원한다.”여기서는 순종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순종은 과연 어디까지 인가? 우리가 고민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7. 감정을 내려놓을 때이 장에서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내용이 나옵니다. 바로 용서인데, 용서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명령입니다. 선택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또한 용서의 감정은 용서의 행동 뒤에 따라 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선포만 하고 행동을 하지 않는 것, 우리는 날마다 용서한다고 선포하지만 돌아서면 행동은 그대로 한다면 우리는 진정한 용서를 경험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가장 큰 문제입니다.Ⅲ. 포기할 때 주어지는 승리의 삶8. 반대정신으로 회복되는 하나님 나라그래서 우리는 위에 나타난 것들을 포기함으로서 승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궁극적인 뜻인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 방법으로 이 책에서는 온유함을 말하고 있습니다.온유함이란 끊임없이 자신의 권리를 하나님께 순복해 드리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강한 성품의 한 특성입니다. 온유함은 자기희생, 자기 헌신입니다. 자기희생이 없는 하나님 나라는 있을 수 없습니다. 자기를 희생하고 헌신할 때 하나님 나라는 임할 것입니다. 세상과 반대되는 길을 우리는 걸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독후감/창작| 2007.10.23| 4페이지| 1,000원| 조회(1,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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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편 1편 발제 평가A좋아요
    과목:조 시편연구 발제시편 1편 연구교수:제출:연구자:========= 목 차 =========들어가며1. 본문 확정1). 한글판 성서들의 비교2). 번역 본문 확정2. 본문 번역3. 지리적인 배경1). 시냇가에 심은 나무4. 문학적인 배경1). 양식적 배경2). 문학적 배경3). 구조적 배경5. 본문 주석6. 신학적 메시지1). 하나님께 복을 받는 사람이란?2). 풍성한 열매를 맺기 위하여3). 어떠한 길을 걸어갈 것인가==============================들어가며시편은 신약성경과 쿰란 공동체에서 나온 문헌들을 통하여 볼 수 있듯이 구약성서 가운데 가장 자주 인용된 책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가 자신의 심경의 변화를 표현할 때도 시편 22편을 읊조리었고, 또 신약성서의 기자들은 예수가 일어났던 사건들이 성서의 말씀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입증할 때도 시편을 많이 인용함을 볼 수 있다. 즉, 그의 메시야성을 입증할 때나(시22편), 그에 대한 예언의 적중(마21:42, 시118:24)등에 인용되었다.이렇듯 신약의 경우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시편을 인용함을 볼 수 있고 시편이 성경에서 차지하고 있는 부분이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제껏 구약성서에 대한 연구는 주로 역사서와 예언서를 중심으로 진행되어 왔다.) 시편이 인간과 하나님과의 사이에서 인가에 의해 하나님께로 고백되어진 인간들의 말이요, 기도요, 호소라는 것은 이미 여러 학자들을 통하여 연구된 내용이다.흔히 책의 내용을 전체적으로 읽기 전에 맨 앞의 서문을 읽어봄으로써 저자의 의도와 그 책의 주된 내용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저자도 그러한 목적을 위하여 서문을 쓰게 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시편 1편도 시편 150편 전체를 대표하는 표제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시편 150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편 1편의 연구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본 발제는 이러한 연구의 목적을 가지고 히브리어 원어와 권위 있는 영어 번역서 등을 이용해 시편을 재구성하고, 그에 맞는 도 찾아볼 수 있다. 만일 이 두 개의 시편들이 (그것들이 수록되기 전에 서로 독립된 작품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시편에 수록되면서 최초로 한 작품으로 결합되었다면, 이러한 작업은 아마 시편 전체의 서문에서 두 가지 관점을 제시하려는 목적 때문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시편 1편은 지혜의 관점에서 나온 서문을 제공해 주고 있는 반면에, 시편 2편은 시편 전체에 대한 예언적 관점과 접근 방법을 제공해 주고 있다.)결국 시편 1편은 시편 150편 전체의 서시로서 이 세속에서의 인간의 바른 삶의 자세에 대한 가장 원론적인 교훈을 제시한다. 즉 본시는 창조자요 역사의 주권자로서 필연적으로 우리의 전존재를 결정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바른 삶의 자세의 여부가 선.악의 기준이며, 나아가 이는 단순한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전존재의 영복과 영벌을 결정할 유일한 기준이라는 구속사적 인생관을 의인과 악인의 실상을 대조시킴으로써 극명하게 제시해 준다. 특히 본시는 이런 심오한 진리를 의인과 악인의 상반되는 구체적 삶의 양식과 그 운명의 비교 제시를 통하여 단순 소박하게 선포함으로써 오히려 여호와 신앙의 정당성과 그로 인해 주어질 구원과 심판이라는 구속사의 기본 진리를 더욱 장엄하게 노래하고 있다.) 이러한 시편 1편이 “복 받은 자에 대한 찬양”으로 시작하는 것은 의미심장한 내용을 함축하고 있다. 그 첫 서두의 말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에게 행복을 약속해 주는 위로의 말이다. 시편 1편은 시편의 입구에 서 있는 하나의 표지판으로서 인생을 살아가는 길에 관한 분명한 안내 역할을 하고 있다. 아마도 시편의 편찬자는 독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고 그의 섭리를 신뢰하도록 하기 위하여 이 시를 시편의 첫 번째 자리에 오도록 배려해 주었을 것이다. 첫째로, 아마도 시편의 서론이 되려는 목적으로 저술된 것은 아닌, 이 시는 그 형식과 주제 모두를 결정하는 기본지침에서 볼 때 편찬자의 의도와 일치한 시이고, 그것에 따라서 이 시는 애써 복된 인생을 안내하고 교육하고 또 결단을 촉구하는 서게 되는 첫 걸음인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죄인’은 삶의 목표나 방법이 그릇된 자를 말하듯이 이에 견주에 생각했을 때, 의인의 길은 삶의 목표나 방법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이고 지금 당장에 결과는 내가 원하는 결과가 아니지만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정직하게 의인의 길을 걷는 것이다.조롱하는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며 ‘레침’의 원형 ‘루츠’는 본래 입을 삐쭉거리는 모양을 나타내는 단어로, 여기에서 ‘조롱하다’라는 의미로 확대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영어에서도 ‘scoffers' 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조롱하는 자’ 혹은 ‘비웃는 사람’으로 해석된다. 이들은 여호와의 진리와 공의를 조롱하는 자들이며, 나아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사는 자들을 비웃는 자들이다. ) ‘조롱하는 자들’은 앞서 언급된 ‘악한자’, ‘죄인들’보다 더 적극적인 죄를 말한다. 즉 조롱하는 자로써 의인의 길을 걷지 않는 사람들이 갖는 죄의 정상(The top)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소극적으로 악한자의 충고를 따를 정도인데 이것이 점점 몸에 베어나고 아무렇지도 않게 습관화 되면서 죄인들에 길에 서게 된다. 죄인들에 길에 서면서 삶의 그릇된 목표와 방향을 따르면서 결국은 하나님을 직접 조롱의 대상으로 삼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자들로 하여금 그러한 삶의 태도를 버리도록 종용하는 자를 말한다. 이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단의 전형적인 모습과 유사하다. 또한 ‘따르다’, ‘서다’, ‘앉다’라는 동사들도 점점 점진적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쉽게 말해서 처음에는 아무것도 모른 채 악한 자들이 하자는 대로 따라가고 그 자리에 서서 상황을 지켜보다가 괜찮겠다 싶으면 주저앉아 그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앉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야솨브’는 한 장소에서 오랫동안 거주하는 것을 의미하는 동사이다. 죄는 처음에는 달콤한 유혹으로 오지만 죄의 본질은 유혹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죄에 사로잡혀서 벗어나오지 못하게 한다. 이렇듯 그 뜻이 자신의 제2의 성품이 되어 자신의 생의 유일한 의미로서 자신의 생 전부를 채우도록 까지 자신의 전존재를 지배하도록 하라는 “경고”의 의미를 갖고 있다. 율법은 성서를 통하여 표현된 바대로의 하나님의 뜻의 본질적인 부분이다. 이것은 구약에서도 참이다. 이 율법은 그 어떤 특수한 계명을 이행함으로써 그가 진 책임의 짐을 벗어 던질 수 있게 해주는 그런 어떤 특수한 계명을 통해서도 자신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또한 역시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요구하신 항구적 요구 즉 인간에게 부여된 개별적 행위들과 그의 전행적 모두를 통하여 자신을 나타내기도 한다.)하나님의 율법 안에서 누리는 즐거움이 끊임없이 솟아나온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응답하는 인간의 태도로부터 비롯된다. 왜냐하면, 그러한 응답의 태도는 하나님께서 내려 주신 의미와 가치를 인간의 삶 전반에 골고루 나누어 주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상은 경건한 자의 본질과 악한 자의 본질을 서로 대조시키고 있는 두 가지의 표상 속에 명료하게 정리되었다고 한다.)앞선 1절에서는 복 있는 사람이 취하는 삶의 태도를 삼중 평행 대구법을 사용하여 세 가지 소극적 측면으로 제시하였다. 이제 본절에서는 이와 달리 복 있는 사람들이 갖는 적극적인 측면을 제시한다. 이는 우선 여호와의 율법을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한글 개역 성경에서도 ‘오직’이란 표현을 사용하여 앞선 1절에 제시된 소극적 측면보다 본절에 제시된 적극적 측면에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사실을 암묵적으로 전달하지만 원문으로 보면 이러한 의미가 훨씬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즉, 본절 서두에 나오는 ‘키 임’에서 ‘참으로’, ‘진실로’로 번역이 가능한 ‘키’만 사용하여도 강조?강화의 의미를 전달하는데 본문은 여기에 ‘그러나 오히려’로 번역될 수 있는 ‘임’가지 추가로 사용하였다. 즉 본시 저자는 앞선 1절의 소극적 자세 역시 가치가 있고 중요하지만 본절에 나오는 적극적 태도가 더욱 중요하며, 이러한 적극적인 자세를 가질 때 참으로 복된 삶을 영의 하나이다.)1:4 악한 자들은 그렇지 않고 오직 바람에 흩날리는 왕겨와 같다.앞선 3절에서는 의인의 실상을 밝힌 데 이어 본 절에서는 이와 대조되는 악한 자들의 실상을 밝힌다. 여기서 시인은 복 있는 사람과 대조되는 부류의 사람을 “악”으로 칭한다. 그리고 복 있는 사람을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에 비유했듯이 악한 자들을 바람에 나는 왕겨와 비유하고 있다.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는 잎이 항상 푸르고 때마다 열매를 맺을 뿐만 아니라, 그 뿌리를 땅 속 깊이 내리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세찬 바람이 불어도 넘어지지 않는다. 이에 반해 겨는 산들 바람과 같이 약한 바람만 불어도 견디지 못한고 날아가 버린다. 이러한 대조적인 내용을 강조하고자 본시의 저자는 본 절에서도 앞선 2절에서 사용된 바 있는 ‘키임’이란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한편, 본문에서 ‘악인’에 해당하는 ‘하레솨임’의 원형 ‘라솨의(???)’는 1절에서도 사용된 바 있다. 이 단어는 선의 절대적 기준이 되시는 하나님의 기준에서 어긋난 악인으로 인정된 모든 사람을 나타내는 포괄적 단어이므로 본 절에서 ‘의인’,‘복 있는 사람’에 대조되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즉 이는 구체적으로 특정한 범죄를 저지른 범법자를 지칭하는 표현일 뿐 아니라 하나님을 떠나 사는 자, 곧 그 전반적인 삶이 하나님의 율법을 떠나 어그러진 방향으로 치우친 사람들 모두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이 단어가 1절에 나오는 ‘죄인’이나 ‘오만한 자’에 비하여 그 의미가 약한 단어라는 점에서 본다면 이러한 자조차 정죄를 받는다면 죄인과 오만한 자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는 의미까지 포함한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라솨으’로 규정된 자들은 복 있는 삶을 사는 의인과 달리 하나님의 공의에 의하여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물론 이러한 하나님의 공의의 완전한 실현은 최후 심판 날에야 이루어질 것이다.악인들의 삶은 4하반절의 간단한 직유를 통하여 간결하게 요약되어져 있다. 그들은 왕겨와 같다. 이 말은 추수기에 곡물들을 키질하는 것을 반영 하다.
    인문/어학| 2007.10.23| 22페이지| 3,500원| 조회(2,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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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웨슬리의 성화론 소논문 평가C아쉬워요
    목 차Ⅰ. 서 론Ⅱ. 본 론1. 성화란 무엇인가?1) 어원적 고찰2) 성화의 정의3) 성화의 특징2. 웨슬리가 말하는 완전 성화1) 죄의 극복2) 제한적 완전3) 웨슬리와 다른 주장들3. 완전성화에 대한 평가1) 긍정적인 측면2) 부정적인 측면Ⅲ. 결 론Ⅳ. 참고문헌I. 서 론사람들은 교회를 다니게 되면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받고 영생의 길로 접어드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우리는 이것을‘성화의 과정’이라고 한다. 성화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화의 과정을 통해서 하루빨리 하나님을 닮아가기 위해서 부단한 노력을 한다.하지만 성화는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 완전 성화 를 주장하는 웨슬리를 비롯한 그의 후계자들은 인간이 자신의 노력에 의해서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도 완전히 성화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그래서 여기에서는 성화란 무엇지에 대해서 학자들의 견해와 함께 알아보고, 웨슬리가 말하는 완전 성화 는 무엇인지 알아보고자 한다. 그리고 웨슬리의 완전 성화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무엇이며, 부정적인 측면에 대해서도 분석하고자 한다.II. 본 론1. 성화란 무엇인가?1) 어원적 고찰성화란 성서신학과 역사 신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중의 하나로 성경에는 1,000회 이상 나온다. 이 말은 신(神)과 연합함으로 가지게 되는 고결함이나 거룩함을 의미한다.)구약에서 「거룩하게 한다」(동사)는 「카다쉬」(? ), 「거룩함」(명사)은 「코데쉬」(? ), 「거룩한」(형용사)은 「카도쉬」(??? )이다. 「거룩하게 함」, 「거룩함」의 이 의미는 이 말의 근본적 관념이라고 볼 수 있다.)신약에서 성화를 나타내는 헬라어로 가장 중요한 단어는 하기아스모스(hagiasmos)이다. 이 말은 본유적 인 것이 아니라 외적인 행위의 결과를 갖게 되는 것을 말한다. 성화를 위한 행위를 의미하는 말은 동사형 하기아조(hagiazo)이며 이 말은 도덕적인 정결을 뜻하기도 한다. 명사형 하기오스(hagios)는 성도 (saint)란 뜻으로 신약성서에서 믿는 자를 일제되어 그들은 모든 구원적 은혜로 점점 더 고무(鼓舞)되며 강화되어 참된 거룩을 실행하기에 이르는바 참된 거룩이 없이는 아무 사람도 주를 보지 못할 것이다」(13장) 소요리 문답은 말하되 「거룩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의 역사이신데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좇아 온 사람이 새로워짐을 얻고 점점 죄에 대하여서는 능히 죽고 의에 대하여서는 능히 살게 되는 것이니라」고 하였다.)A. A, Hodge는, 성화는「성령이 온 영혼을 그것의 모든 심력(心力)들과 함 께 끊임없이 감화함에 의하여, 진리의 기구(器具)로 말미암아, 그가 신생(新生) 에서 심어들이신 거룩한 원소들과 성향(性向)들을 기르며 훈련하며 발전하며, 끊임없는 진보로 모든 죄악한 성향들은 극복되며 근절되고, 모든 거룩한 성향들 은 충분히 성숙되고, 이 은혜의 경험자는 즉각적으로 죽어 버리고 그리스도 안 에 완전한 인성(Manhood)의 키가 자라는 데까지 이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루이스 벌코프(Louis Berkhof)교수는 성화란 성령께서 죄인을 하나님과 특수 관계에 있는 인간에게 「거룩」이란 말이 적용될 때에, 하나님이 죄의 부패에서 깨끗게 하시며, 그의 전체성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갱신하여 죄인으로 하여금 선할 일을 할 수 있게 하시는 성령의 은혜로우시며 게속 적인 사역이다 라고 하였다.이와 같은 정의들을 감안할 때 성화(聖火)란 인간의 심령 속에 있는 죄의 오염을 점진적으로 제거하여 완전 성결하신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도록 인간 의식과 함께 역사하시는 성령의 계속적인 활동이신 것을 알 수 있다.)3) 성화의 특징a) 중생한 성도가 온전한 성화를 지향하여 성장하는 과정에서 소극적인 면으로는 부패한 죄악의 옛 사람이 제거되고 죽어지는 것이며 이와 반대로 적극적인 면으로는 중생한 새 생명이 에수님과 연합을 이루어 예수님을 닮아가는 새사람이 되어지는 것이다.)바울이 로마서 6:6에서「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될 것이다.b) 성화는 전인에 영향을 주고 전 생활 영역에 영향을 준다. 성화가 내면적으로 심령 속에서부터 일어나지만 속사람의 성화에로의 성장은 육신의 모든 행동과 생활과의 인과관계를 가지고 행동에, 생활에 선한 열매를 맺게 되며 이것이 성화에로 성장하는 표증이 되는 것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믿음)이라(약2:26)했음같이 속사람의 성화가 이루어진 것과 비례해서 겉 사람의 행동과 생활의 변화도 일어난다.(롬12:1, 살전5:23, 롬6:12,13, 고후5:17) 성화는 지, 정, 의의 인격 전반에 영향을 준다.)c) 성화는 칭의나 양자와 같이 법적 지위 또는 신분상의 변화가 아니다. 성화는 신자 안에 현실적으로 일으켜지는 변화이다.d) 중생은 새 생명의 씨앗을 심는 일이라고 하면 성화는 그 씨앗이 성장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성장은 중생에서 시작하여 일평생 계속되는 것이다.e) 성화는 현세에서 완성되지 않는다. 영혼은 개인의 종말, 곧 죽음에서, 육체는 세상 종말 곧 부활에서 완성된다. 소요리 문답(37)은 「신자가 죽을 때에 그 영혼이 완전히 거룩하게 되어 즉시 영광에 들어가고 그 몸은 여전히 그리스도께 연합하여 부활할 때까지 무덤에서 쉬느니라」고 하였다. 성경은 이 세상에서 완전 성결을 자처할 자 없음을 가르치고(왕상8:46; 잠20:9; 롬3:10; 약3:2; 요일1:8), 도 반면에 이 세상 떠난 신자들은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 (히12:34) 흠이 없는 자들 (계14:5)이라고 말한다.)2. 웨슬리가 말하는 완전 성화(完全聖化, Entire Sanctification)이것은 더 이상의 필요 없는 완전한 성결이라는 말은 아니다. 또한 무죄(無罪)한 완전이라는 의미도 아니다. 중생 후에 오는 이차적 축복(The second Blessing)으로서의 성결이 성령의 은혜로 체험되는 것이 완전 성화인데 이 후에는 지속적인 성장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완전 성화란 무엇인가? 웨슬리가 말하는 완전 성화의 의미를 살펴보자.1) 죄의 극복생각과 죄 된 기질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성결이라 불렀다. 칼빈이 말하는 성결이란 하나님의 완전에 이르는 것이지만 웨슬리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란 마음의 할례로 신자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이루어지고 죄에 대한 승리가 가능한 제한적 완전을 성결이라고 불렀다.)2) 제한적 완전웨슬리가 쓰던 완전(perfection)이란 말 때문에 많은 오해가 있었고 비난도 받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사용하는 완전이란 말은 신적 완전이나 천사적 완전이 아니다.죄를 지을 수 없게 되는 무죄적 완전이 아니라 알고 있는 하나님의 율법을 고의로 범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죄를 극복하는 완전을 말하는 것이다. 웨슬리는 죄를 고의적으로 범하는 죄(the voluntary sin)와 무의식적으로 짓는 죄(the involuntary sin)로 구분하는데 인간의 연약성(infirmity)과 무의식적으로 짓게 되는 실수는 인간의지의 한계를 넘어선 것으로 어쩔 수 없는 죄라고 취급한다.웨슬리는 이와 같은 인간의 연약성 때문에 오는 제약은 죄로 취급하지 않고 이는 영화(glorification)시에만 해결될 수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웨슬리가 말하는 성결은 계속 완전을 향해 자라가는 점진적인(progressive)인 면을 내포하는 순간적인(instanteous) 경험을 말하는 것이다.)3) 웨슬리와 다른 주장들성화론은 웨슬리 신학의 중심이요, 그의 목회와 설교의 중심 교리였다. 종교 개혁자들(루터, 칼빈)은 현세에서의 온전한 성화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웨슬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통해 칭의의 순간적인 경험과 같이 성화의 두 번째 경험이 가능함을 주장했다. 두번째 은총의 체험이란 뜻에서 제2의 축복 , 제2의 은혜 , 두 번째 변화 , 온전한 구원 , 기독자의 완전 이라고 불렀다.) 온전한 성화는 바로 온전한 사랑 또는 순수한 사랑 이며 이 사랑 때문에 죄를 짓지 않게 되며,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다.3. 완전 성화에 대한 평가웨슬리 시대는 전반적인 무질서의 시대로 종교적,19세기 미국의 부흥운동을 거치면서, 은사보다 윤리적 실천과 성결 또는 열매를 목표로 강조하는 웨슬리의 완전 개념이 점차로 열매도 강조하지만, 봉사와 능력, 은사를 강조하는 오순절운동의 균형 잡힌 성령 세례론으로 발전하게 되었다.웨슬리는 완전의 체험에 대해 성령세례라는 말을 쓰는 것을 꺼렸다. 이 용어와 관련된 논쟁에 휘말리기를 원치 않았고, 성령의 열매 즉 완전한 사랑을 강조하려는 그의 뜻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웨슬리가 너무 윤리적인 면과 열매난 강조하고 은사와 능력 그리고 감정적인 면을 소홀히 하거나 강조하지 않은 것은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균형과 조화를 유지해야 한다.)1) 긍정적인 측면웨슬리의 완전 사상이 가지고 있는 긍정적인 면은 첫째 종합성이다. 믿음을 강조하는 개신교의 사상이 들어가 있고, 동시에 로마 카톨릭의 선행의 필요성이 강조된다.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정동 개신교의 입장을 포함하고 있을 뿐더러,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는 알미니우스의 사상이 들어가 있다. 교회론자들의 은혜의 수단이 들어가지만, 또한 신비주의자들의 내면적 은혜의 독특한 역사가 개재되어 있다. 보수와 진보, 개인 신앙과 사회 구원의 역사가 포함된다.둘째, 그의 완전 사상은 이론적 기독교를 체험의 기독교로 정립하였다는 데 의미가 있다. 죄의 극복의 문제, 사랑의 개념 등을 신학적으로 설명하려고 시도한 것이다. 이는 크리스챤의 윤리와 결부된다. 웨슬리는 이론적 기독교와 실천적 기독교를 병합하는 데 가장 큰 명수였다.)2) 부정적인 측면첫째, 성경적 배경에 있어서 완전의 개념이 미약하다는 것이다. 웨슬리는 시130:8; 겔36:25,29; 마5:48; 고후7:1등을 제시하나 이 성경구절들은 완전론의 구조 자체를 뒷받침하기에는 미흡하다.둘째, 체험에 있어서의 문제이다. 완전의 개념은 추상적인 것이기 때문에 눈으로 직접 볼 수 없고, 판단 할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과연 신자가 성화에 도달한 확실한 외적 증거가 있는가? 현대에 와서 오순절 운동에서는 방언을 성별 있다.
    인문/어학| 2007.10.23| 10페이지| 2,000원| 조회(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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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존 힉의 다원주의 종교이해
    1. 존 힉의 종교 다원주의 이해종교의 다원성을 주장하는 이론인 '종교 다원주의'(宗敎 多元主義)라는 말은 서구에서 먼저 일컬어진 용어이다. 서구 사회는 오랫동안 유일 신앙에 근거를 둔 그리스도교가 주류를 형성해 왔으나, 지리상 발견, 산업 혁명, 시민사회의 형성 등의 요인에 따라 많은 변혁의 과정을 겪으면서 종교도 다원적인 상황에 있음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교통과 통신 수단의 발달로 인해 인류사회의 문화적 거리가 좁혀지게 되면서, 서구의 학자들은 그리스도교 이외의 동양 종교들을 접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동양 종교들이 지닌 가치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였으며, 또한 선교지에서 그리스도교 선교사들과 타 종교인들과의 만남과 대화의 과정에서 상호 타종교에 대한 인정이 불가피함을 인식하였다. 그리하여 1895년에는 시카고에서 세계의 종교 학자들과 종교인들이 모여 국제 종교인 대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60년 말부터 종교철학과 종교 신학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종교 다원주의라는 용어가 학문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다.)영국의 신학자 존 힉(John Hick, 1922∼)은 에른스트 트뢸치의 영향을 받고, 만물을 창조하신 하느님은 한 분뿐이며 모든 종교는 각기 다른 역사적, 문화적 전통 속에 형성되었기 때문에 문화 전통이 다양하듯이 종교도 다양한 형태로 이 하느님을 섬기고 있는 것이며, 현상적으로 "하느님은 많은 이름을 가진 것"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여기서 존 힉이 말하는 '하느님'은 그리스도 교인에게는 '하느님'이며, 유대교에서는 '아도나이,' 이슬람교에서는 '알라,' 힌두교에서는 '라마' 혹은 '크리쉬나'로 불리는 것으로서 이름은 다양하지만 궁극적 실재인 신(神)을 말한다.) 존 힉은 인간이 현상 세계에서는 하느님에 대해 '∼으로 체험'(experiencing as ∼)하므로 세계의 종교현상의 실상을 궁극적으로 규명하여 실재 자체이신 '영원한 일자'(The Eternal One)와의 관계로 탐구하는 '철학적 다원주의'(P요청한다. 존 힉은 신학의 패러다임이 종교 다원 현상을 맞아 종래의 그리스도교 중심적, 혹은 예수 중심적인 모델은 타종교와 대화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패러다임이므로 신앙의 보편적 모델인 신 중심적 모델로 패러다임의 전이(轉移)가 필요한데 이것을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이라고 하였다.) 종교 다원 상황에 대해 언급할 때 많은 빈도수를 가지고 인용되는 이 말은 신학적 사고의 변환을 말한다. 즉 중세 시대에 지구 중심적 천동설(geocentrisme) 입각한 사고방식인 프톨레마이오스(Klaudius Ptole-maios, 90∼168년경)적 사고로부터, 태양 중심적 지동설(heliocentris-me)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Nicolaus Kopernikus, 1473∼1543)적 사고로의 획기적인 전환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종교 영역에서도 과거에 그리스도교를 중심으로 하여 여러 종교들의 가치와 순위를 결정하던 사고방식으로부터, 그리스도교를 포함한 제종교들이 신을 중심으로 하여 존재한다는 사고의 획기적인 전환을 말한다. 그리하여 존 힉은 예수 그리스도교의 신성과 육화사건을 신화적 이야기로 전제하여 이에 대한 재해석을 요구한다.이처럼 종교 다원주의의 이론적 근거는 현대 민주 사회의 이론적 배경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현대 사회는 평등, 자유, 공동선, 대화, 협력의 가치가 존중되고 있다. 이것은 다양성(多樣性)과 상대성(相對性)을 전제로 한다. 이러한 현대 사회 속에서의 종교는 마치 경기장에서 경기하는 선수들처럼 똑같은 규율과 조건이 적용되기에 어떤 특정 종교를 특별한 것으로 대하지도 않을 뿐더러 모든 종교들에게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전제로 하자는 것이다.2. 존 힉의 신 중심적 다원주의신 중심적 다원주의(Theocentric Pluralism)는 종교간의 대화에 있어서 포괄주의 이론이 선험적 이론이라고 비판을 받게 되자, 다원주의를 하느님의 뜻으로 생각하며, 하느님은 구원적 중개자와 구원 수단들을 다양하게 마련하였다고 하면서 구원 방법의 다양성을 주장하게 구원 중개자들 중의 한 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신 중심적 다원주의의 태도는 하느님이 각기 개별 종교 전통 안에 살아가는 이들에게 각기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을 계시하시고 현현(顯現) 하신다고 보는 견해이다. 여기서 하느님은 모든 종교 전통의 궁극자(窮極者)가 된다. 하느님의 현현과 계시(啓示)가 각자의 문화권과 관습, 사고방식에 따라 각기 다른 모습과 다른 방법으로 나타나기에 여러 종교들은 하느님을 인식하고 신앙하는 방법의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태도이다. 그리고 하느님은 구원의 길에 있어서 그리스도와 같은 구원 중개자의 길을 여러 종교들을 통해 다양한 모습으로 제시하는 구도를 갖는다. 폴 니터나 존 힉과 같은 다원주의자들은 하느님은 한 분이면서도 그리스도교뿐만 아니라 힌두교와 불교 등 여러 종교들 안에서도 그리스도와 같은 구원적 역할을 다른 종교의 계시자(啓示者)들에게 다양하게 제시한다고 주장한다.)여기서 존 힉이 말하는 '하느님'의 의미는 유신론적인 의미를 초월하여 사용하는데, 그리스도교, 불교, 힌두교 등의 종교인이 다같이 지칭할 수 있는 분으로서, '하느님'(God)이라는 용어보다도 '영원한 일자' (The Eternal One) 혹은 '실재'(The Real)라는 말로 사용할 것을 제안한다. 존 힉은 그리스도교의 예수 그리스도의 배타적 유일성 주장이 종교간의 대화에 있어서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제거하고자 하였다.) 힉은 그리스도의 유일성은 니케아 공의회와 칼케돈 공의회에서 결정된 예수의 신성(성부와 동일 본질이며, 참 하느님이시오, 참 인간이신 분)을 지나치게 형이상학적이며 존재론적으로 해석한 것이기에 이것은 다원적 시대에는 알맞지 않은 개념으로 생각했다. 존 힉에게 예수는 신을 중심으로 전적으로 자유로이 헌신적인 삶을 살았던 위대한 분이셨다. 하지만 초대 교회 신자들은 예수를 흠모한 나머지 그에게 메시아,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부여하였으며, 특히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개념 속에서 '육화' 개념이 유일회적인 것으로 로 본다. 그러나 힉은 이 '육화'를 그 자체의 진실성이라기보다 그리스도 신자들의 예수를 통한 신과의 접촉점을 표현하기 위한 상징적, 신화적 표현으로 이해한다.)그러므로 힉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예수가 모든 인간을 위한 삶의 규범이 되며 다른 구세주를 필요치 않는다고 본다. 이런 의미에서 힉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인정하지만, 그것이 이 세상의 모든 다른 그리스도가 있을 수 없다는 배타적 독점성에는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는 나의 주님이다'라고 한 것은 연인들 사이에서 '나는 당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예쁘다'는 고백과 같은 논리로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연인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당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예쁘다고 말했다고 해서, 그 연인이 과연 이 세상에서 가장 예쁜 것은 아니듯이,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는 나의 그리스도이시다'라고 한 것이, 과연 이 세상에는 다른 그리스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이런 의미에서 힉은 종교 다원 시대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께 대한 신앙의 유일성을 고백하면서도, 타종교에서의 그리스도들의 존재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으며, 이러한 그리스도들을 통해 실재 자체이신 '하느님' 혹은 '신'이신 분에게로 향하는 신 중심적 다원주의로서, 모든 종교들은 동등하게 대화하고 협력하여 인간 발전을 가져오게 하자는 취지를 볼 수 있다.)3. 종교 다원 상황 속의 그리스도교의 과제종교다원상황에 대해 그리스도교에서 대처하는 태도는 다양하게 있어 왔다. 교회중심적 배타적 태도는 자신의 신앙심에는 헌신적이고 열렬한 태도를 보이지만, 타 종교인들과 대화할 수 없는 너무 편협한 구원관을 갖는다. 그리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다양성 안에서의 일치'(Unity in the Diversity)를 추구하고 있는 가톨릭교회는 그리스도 중심적인 입장을 취하면서도 타종교의 가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포괄주의적 입장을 보여주고 있으나, 종교 다원주의자들은 이것을 가톨릭교회의 우월적 사고방식에 수 있는 논거는 없기에 종교를 대등한 관계로 놓고 논해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폴 니터, 파니카 등 일부 개방적인 신학자들은 그리스도 중심적 구원관에서 신 중심적 구원관을 제시하였다.4. 존 힉의 신 중심적 다원주의에 대한 비판하지만 신 중심적 구원관에 있어서도 그리스도교와 타종교와의 만남은 먼저 외형적으로는 하느님 중심으로 대화를 시도하지만 결국 하나님의 구원적 의지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궁극적이며 결정적으로 나타났다고 보는 것이 양보할 수 없는 입장이기에 결국 그리스도의 절대적 구원 중개 역할이 관건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신 중심적 세계관속에 그리스도의 규범적 역할을 탈피하려는 노력에서 종말론적 전망에서의 하느님의 통치 패러다임과 성령중심주의적 패러다임이 제시되었으나 이 두 모델도 역시 그리스도와 완전히 분리되어 논의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즉 그리스도는 종말에 하느님의 통치에 있어서도 중심에 계신 분이며, 성령은 또한 삼위일체로 계시는 성부와 성자의 성령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타종교와의 대화에 있어서 어느 모델을 택하든지 그리스도가 항상 연관되며 그 대화의 중심과 핵심에 위치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가 타종교와 대화할 때 그리스도라는 인물이 갖고 있는 인류 구원의 절대적 충만성을 하나님의 통치와 성령의 작용 및 현존과의 관련성에 있어서 타종교인들이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를 과연 어떻게 설득시킬 수 있느냐가 과제로 남는다고 볼 수 있다.)5. 결 론종교 다원주의는 기독교를 유일한 참 종교가 아닌 여러 종교 가운데 하나로 간주한다. 그렇다면 존 힉의 종교 다원주의의 문제점과 결정적인 오류는 무엇인가? 그것은 성경의 진리와 일치하지 않으며 원칙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있다. 성경을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않는 데서 반 성서적인 종교 다원주의가 일어났다. 따라서 종교 다원주의는 비성서적인 것이 가장 큰 문제점인 동시에 오류이다. 그것은 인도주의적인 관점에서 출발하여 이성적 방법으로 문제 해결을 시도한 끝에 그리스도와 교회 밖에도 구났다.
    인문/어학| 2007.10.10| 5페이지| 1,000원| 조회(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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