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순신 장군의『난중일기』를 읽고인류의 역사가 변해도 만고불변의 진리가 항상 존재하듯이 어느 국가이든, 어느 시대이든 이상적 사회를 위한 도리의 추구는 항상 절실하게 요구된다. 그것은 국가의 보전과 민족의 안녕을 위해 올바른 의식을 형성하는데 절대적인 가치의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만일 한 시대의 인물이 후대에 길이 기억되어 존경을 받는다면 그는 진정한 인간의 도리를 실천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관점에서 반추(反芻)해볼 때, 많은 역사적 인물 중에서 특히 어려운 국가적 위기 때마다 첫 번째로 떠오르는 인물이 바로 충무공(忠武公) 이 순신(李舜臣, 1545∼1598) 장군이다. 400여 년이 지난 과학문명 사회를 사는 지금에도 우리가 그를 기억하는 것은 남다른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정신으로 국가의 절대절명적 위기를 극복하고 나라를 중흥한 큰 공을 세웠기 때문이다.『난중일기』를 기록하기까지 한 이러한 위인의 모습은 어떠했을까?충무공(忠武公) 이 순신의 출생과 삶충무공 이순신은 1545년 4월 28일 한양의 건천동(乾川洞)에서 출생했다. 이 정(본관:덕수)과 초계 변씨 사이의 4남 1여 중 셋째 아들이었다. 같은 동네에 살았고, 평생 그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유 성룡(柳成龍)은 어릴 적 이 순신에 대해 이렇게 말한 일화가 있다.“이 순신은 어려서부터 담력이 컸고, 말 타기와 활쏘기에 유난히 능했다.”그의 아버지 이 정은 자신의 아버지(이순신의 할아버지) 백록이 중종(中宗) 조선 제11대 왕(재위 1506∼1544). 연산군 시대의 폐정을 개혁하였으며, 조광조 등의 신진 사류(士類)를 중용, 왕도정치를 시도하였으나, 지나치게 이상적인 개혁방법이 훈구파의 반발을 초래,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켜 신진사류를 숙청하였다. 이후 신사무옥(辛巳誣獄), 삼포왜란 등으로 정국은 혼미를 거듭하였다.때 기묘사화(己卯士禍) 조선 4대 사화 중의 하나. 조광조의 혁신 정책에 불만을 품은 남곤 · 심정 등의 훈구 재상들이 위훈 삭제 사건을 계기로 조광조 일파를 화로 이 사화가 일어난 해가 기묘년이었으므로 이를 기묘사화라 한다.에 연루되어 고충을 겪은 후, 아예 벼슬을 외면하고 산 인물이었다. 그리하여 아예 서울을 떠나 아내의 친정이 있는 아산의 백암리, 현재 현충사가 있는 방화산 기슭으로 이사하여 살았다. 다른 양반집 자제들과 마찬가지로 이 순신 또한 두 형과 함께 일찍부터 유학을 공부한다. 하지만 22살부터 시작한 무술이 그의 관심을 더 끌었던 듯하다. 당시 사회가 무(武)를 천시하는 분위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소신에 따라 무인으로서의 길을 택한다.이 순신은 이웃 동네에 살던 전 군수 방신의 딸과 21세에 혼인하고, 이 상주 방 씨 부인과의 사이에 3남 1녀를 두었다. 그리고 그에게는 한 명의 아내가 더 있었는데, 바로 무과(武科)에 응시하여 낙방한 후 얻은 해주 오 씨이다. 그녀와의 사이에는 2남 2녀를 두었다. 28세에 처음으로 무과(武科)에 응시했으나, 달리던 말에서 떨어져 낙방을 하고 만다. 하지만 4년 후에 다시 도전하여 병과 4등으로 급제하였고, 그 해 12월에 한남 삼수 동구비보의 권관에 임명되었다.3년의 임기를 오지에서 보낸 그는 35세에 서울로 돌아와 훈련원의 봉사로 재직한다. 이때 그에게는 한 가지 사건이 발생하는데, 다름 아닌 자신의 상관인 병조정랑 서 익이 제의한 부당한 인사 청탁을 거절한 것이다. 이에 서 익은 나쁜 감정을 갖게 되고, 후에 결국 보복을 당하게 된다. 이처럼 곧은 이 순신은 결국 서울 생활 8개월 만에 다시 충청병사의 군관으로 발령을 받게 된다. 그리고 9개월 후 전남 고흥읍의 발포(전남 고흥군 도화면 내발리) 만호로 수군과의 인연을 맺게 된다. 하지만, 서 익이 이 순신을 모함하는 장계를 올린 것으로 인해 결국 파면되고 만다. 그의 나이 37세였다.다행이 다음해 5월에 복직되어 한 동안 일 없이 지내다가 이듬해 5월에 다시 훈련원 봉사로 임명된다. 훈련원에서 14개월을 보낸 그는 함경도 남병사의 군관으로 북청에 부임했다가 3개월만인 10월에 경흥 건원보의 권관에 임명되583년 10월에는 여진족 추장 울지내(鬱只乃)를 잡는 공을 세우기도 했으나, 포상을 받기는커녕 이 일로 북병사 김 우서의 모함을 받는 황당한 일을 겪기도 한다. 같은 해 11월8일, 그는 아버지 이 정의 죽음을 맞이하나, 이순신은 이 비보를 다음해 1월에야 알게 된다. 이 소식을 듣고 그는 곧 고향으로 돌아와 3년 상을 치른다.탈상을 마치고는 사복시 주부로 임명되었다가, 서애 유 성룡의 추천으로 16일 만에 조산보 만호로 임명된다. 이듬해 8월에는 녹둔도의 둔전관을 겸한다. 그리나 여진족의 침입으로 많은 사상자와 포로가 생기자 지휘관으로서의 책임을 물어 첫 번째 백의종군을 명(命) 받는다. 이런 부분까지 보면 그는 그다지 탄탄대로로 잘 풀린 군인은 아니었다.1588년 1월 백의종군이 해제되었고, 6월에 다시 한양으로 돌아와 지내다가 이듬해 2월 전라감사 이 광의 부름을 받는다. 군관겸 조방장 자리였는데, 이것이 그가 상관에게 인정받는 첫 무대가 된다. 같은 해 12월에는 정읍 현감에 임명되었으며, 이때부터 온전하게 가장의 책임을 지게 된다. 그의 어머니와 두 형이 남긴 조카들과 한 집에서 살 수 있게 된 것이다.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592년 2월에 그는 진도 군사로 발령받는다. 그런데 임지에 도착하기도 전 가리포(완도) 첨사, 전라좌수사 등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는 승진의 단계를 무시한 발탁이었는데, 유 성룡의 강력한 추천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리하여 2월13일, 그의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자리인 여수의 전라좌수영에 부임하게 된다.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壬辰倭亂) 조선 선조 25년(1592년)부터 31년(1598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우리나라를 침입한 일본과의 싸움.이 발발했다. 이순신은 그 해 1월 1일부터 노량해전에서 전사하기 직전인 1598년 11월 17일까지 7년 동안의 병영 생활을 몸소 보고 듣고 행한 대로 일기에 남긴다.1597년 10월 25일, 일본군 수백 척의 이동 정보를 접한 이순신은 명량 해협에서 대적하12척의 전선을 이끌고 출전했다. 명량 해협은 ‘울둘목’이라고도 불리었는데, 물길이 암초에 부딪혀 튕겨 나오는 소리가 매우 커 바다가 우는 것 같다고 ‘울둘목’이라 불린다고 한다. 이순신은 이러한 지형을 이용하여 새로 합류한 1척을 추가한 13척의 전선으로 일본 함대를 유인하여 이 해협에서 333척의 일본 함대 중에서 공식기록으로 131척의 전선을 격파하였다. 이를 명량 해전이라고 하며 이 해전의 승리로 조선 수군은 나라를 위기에 빠뜨렸던 정유재란(丁酉再亂) 1597년 8월 도요토미 정권 일본군이 임진왜란의 정전회담이 결렬됨에 따라 재차 조선을 침공하여 이듬해인 1598년 연말까지 지속된 전쟁.의 전세를 역전시켰다. 일본은 곤궁에 빠져 명나라 장군에게 뇌물을 보내어 화의를 꾀하였으나 이 순신은 이를 반대하였고, 이듬해 1598년 음력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일본의 무장 · 정치가. 오다 노부나가 휘하에서 점차 두각을 나타내어 중용되던 중 오다 노부나가가 죽자 원수를 갚음과 동시에 일본통일을 이룩했으며 임진왜란을 일으키기도 했다.가 죽어 일본군이 철수하게 된다.1598년 음력 11월 18일에 조선 수군 70여척, 명나라 수군 400척이 노량으로 진군했다. 군사는 1만5천명이었다. 다시 제해권(制海權)을 확보한 이 순신은 명나라 부총병 진 린과 함께 1598년 음력 11월 19일 새벽부터 노량 해협에 모여 있는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이 순신 장군과 명나라 도독 진 린이 이끄는 조 명 연합함대는 일본으로 빠져나가려던 왜군 500여 척을 상대로 싸워 하룻밤 새 그 절반가량인 200여 척을 격파했다. 200여 척 이상이 분파되고 150여 척이 파손돼서 패색이 짙어진 일본 수군은 잔선 150여 척을 이끌고 퇴각하기 시작했으며, 조 명 연합함대는 정오까지 잔적(殘敵)을 소탕하며 계속 추격하였다. 하지만 이 순신 장군은 관음포로 달아나는 왜군을 추적하다가 탄환을 맞았는데 치명상이었다. 그는 “싸움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결국 . 당시 도주하던 150여 척의 왜군 함선 중 100여 척을 나포하니 겨우 50여 척의 패전선만이 도주했다고 한다. 노량해전을 끝으로 7년 동안 조선에서 벌어진 임진왜란은 끝이 났다. 이 전투가 이 순신의 마지막 노량 해전이다.전사한 직후에 정1품 우의정에 증직 되었다. 1604년 선조는 그를 권율, 원균과 함께 선무 1등 공신 및 덕풍부원군으로 추봉하고 좌의정을 가증했다. 1643년 인조는 그에게 ‘충무’ 시호를 내려 충무공(忠武公)이 되었다. 1659년 효종 때 남해에 그를 기려 충무공 이 순신의 비를 세웠다. 1688년(숙종 14년)에는 명량대첩비가 건립되었고 1705년 현충사가 건립되었으며, 1793년 정조는 정1품 의정부 영의정을 가증했다.오늘날 100원 주화에 새겨진 이 순신 장군의 복식이나 이 순신 장군의 초상화 중 갑옷이나 전립이 아닌 관복 차림의 이 순신 초상화는 영의정의 예우를 갖춰 그려진 것이고 실제로 이 순신이 살아생전 그 복장을 입은 적은 없다.난중일기를 읽고충무공(忠武公) 이 순신은 천성이 강직하고 청렴결백하여 항상 흐트러짐이 없는 엄정한 모습으로 생활을 하였다. 이로 인해 관리로서 복무 중에는 간혹 상관과 동료들에게 오해를 사기도 했고, 심지어는 질투하고 모함당하는 일들이 종종 발생하였다. 그러나 예고 없는 돌발 상황에 처할 때마다 항상 당당한 모습으로 학문과 덕행의 실력을 보여줌으로써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그는 임진왜란 발발(勃發)을 예측하고 미리 대비하여 그 전년부터 거북선을 제조하고 군대를 정비하여 해상경비에 주력하였다. 그 증거의 일례로 임진왜란은 임진년 4월에 발발하지만,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그 해 정월 1일부터『난중일기』를 쓰기 시작했다는 것이 그것이다. 남다른 선견지명으로 전쟁의 조짐을 미리 파악했던 것이다. 그 결과, 옥포를 비롯한 당포 한산도 명량 등의 40여 차례의 해전을 매번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전쟁에 대비한 신속 정확한 대비와 현 상황의 정보 파악으로 작전하는 모습에서 충무공의 철저한 유비무환의 정신을 있다.
정의로운 나라를 위한 새로운 정의로운 사회로; 대통령의 철학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대한민국의 젊은 청년들이 이 나라를 ‘헬조선’이라고 부르기 시작하며 이민을 가고파하는 이들도 늘어나고 있는 추세라고 한다. 이 현상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조금씩이라도 나라가 좋아져 서민들이 살맛나는 세상이라는 느낌이 들면 좋겠는데 대다수의 사람들이 봐도 전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심지어 2014년 2월 서울 송파구 석촌동 단독주택 지하 1층에서 국민기초생활수급 지원을 받으며 살던 박모씨와 두 딸이 생활고로 고생하다 빈곤을 견디지 못해 결국 ‘주인아주머니께, 죄송합니다.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라는 메모와 함께 현금 70만원이 든 봉투를 남기고 세상을 떠난 사건은 세상에 남은 이들에게 막연한 슬픔과 충격과 먹먹한 미안함을 주었다.이처럼 수 년 사이 대한민국 청년들 사이에 널리 퍼져 일반명사화 되어버린 ‘헬조선’담론은 결코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2016년 10월 말부터 본격적으로 터져 나오기 시작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사건’은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대한민국 사회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그것은 한마디로 ‘재벌-국가 복합체’로 상징되는 수구 기득권 세력들, 즉 ‘내부자’들이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교육 ? 종교 등의 모든 다방면의 사회를 통재로 농락한 것이었다.그 뒤에는 재벌 총수들과 그들 일가(一家)가 있었고, 자신의 일신만 생각하는 이기적이고 부패한 정치인들과 국회의원들이 있었으며, 또 그 뒤에는 검찰과 법원, 변호사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곁에는 수구기득권 세력과 손잡은 언론과 대학교수들을 위시한 지식인들이 있었으며, 무대 뒤 어둠 속에는 이득을 나눠가지려는 조폭들도 진을 치고 있었다. 또 한 켠, 국정원은 국가보안법을 손에 쥐고 무대 안팎의 모든 존재를 조용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들이 만들고자 했던 나라는 농민 ? 노동자 ? 여성 ? 빈민 ? 청년 ? 노인들의 고혈을 최대한 짜내 대기업과 재벌들의 배를 채워주면서도 그 주변에 떨어지는 떡고물을 계속해 주워 먹을 수 있는 시스템이 유지되는 나라였다.이러한 부패한 시스템을 철저히 파헤치고 조사해야 할 진실의 사각지대는 무궁무진하고 우리의 사회적 과제는 산처럼 쌓여있다는 점을 우리는 이번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사건’을 계기로 알게 되었다. 먼 과거로는 친일 잔재 세력의 부정부패, 매국 행위와 박정희 독재 시대 권력과 돈을 마음대로 휘두른 세력과 그 부역자들에 대한 진상조사, 전두환 군부독재정권에 항거하여 투쟁하다 희생당하신 민주열사분들에 대한 조사와 희생과정에서 억울하게 피해를 당하고 상처 입은 분들의 명예회복, 이명박 정권 시절 사 ? 자 ? 방 비리(4대강, 자원외교, 방산비리) 역시 명명백백히 밝혀져야 할 것이다.지금까지 언급한 사회 적폐세력 청산과제를 뿌리째 해결하려면 사태의 면밀한 파악에서부터 대안 제시까지, 장기간의 시간에 걸쳐 보다 근본적인 접근과 면밀한 조사가 필요한데, 지금까지 우리는 수구기득권 세력의 힘과 규모의 두려움 탓에 대체로 근본 대안을 회피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2016년 10월 이후 무려 1,500만 명 이상의 시민이 참여한 전국적인 ‘촛불시위’는 우리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제도권 정당이나 기득권 세력이 일반 시민들에게 요구하는 일방적이고 수동적인 태도를 벗어나 일반 시민들이 권력의 원천으로서 직접 집단 지성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점 때문이다. 촛불로 상징되는 집단지성의 힘이야말로 제도권 정당이나 기득권 세력이 휘두르는 ‘국가권력’의 폭력성을 넘어 진정한 국민세력의 힘을 보여주었으며 새로운 사회로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그런데 우리는 과연 촛불이 들불을 이룬 광화문 광장을 넘어 작금(昨今)의 ‘헬조선’이라 불리는 사회를 제대로 바꿀 수 있을까? 한 사회를 바꾸는 일을 개혁이라 한다면, 과연 우리는 대한민국을 어떻게 개혁할 수 있을까? 역사적으로 우리는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이 요구한 사회개혁, 1945년 이후 해방정국에서 조선 민중이 요구한 사회개혁, 나아가 1960년 4 ? 19 혁명(四一九 革命) 시기 민주 시민들이 요구한 사회개혁, 또한 1987년 6월, 소위 6월 민주 항쟁 이후 민주시민과 노동자들이 요구한 사회개혁 요구의 연장선에 서 있다. 그리고 우리는 어린이부터 노인층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 모든 남녀노소가 겪는 삶의 고통을 정직하게 직시하고 이를 제대로 해결해 나갈 사회적 과제 앞에 놓여 있는 것이다.모든 대한민국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기 위한 경로를 그 구조와 행위의 모든 측면에서 재설계하고 ‘헬조선’을 넘어 마치 우리가 비로소 꿈에 그리던, 누구나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새 세상을 맞이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정의로운 대한민국’이다. 그리고 바로 그 여정에서 우리는 ‘따뜻하고 정의로운’ 대통령을 원했던 것이다. 따뜻한 대통령이란 사회적 약자들이 겪는 고통에 공감할 줄 아는 사람이며, 정의로운 대통령이란 사회적 약자나 억울한 사람들이 생기지 않도록 사회 구조와 풍토를 일관되게 바꾸어 내는 사람이다.문재인?당선인이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으로 청와대에 첫 입성하는 장면을 지켜보며 만감이 교차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도 두 번째 청와대 입성이었고 문재인 대통령 역시 역할이 바뀌어 들어가는 두 번째 입성을 지켜보게 된 것이기에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자신의 뜻을 함께 펼칠 군주를 찾아 헤매었던 공자(孔子)는 어떤 이유로 13년이나 주유천하(周遊天下)를 했던 것일까. 그것은 자신의 이상을 군주의 권력 안에서 반드시 실행해야 만 그가 꿈꾸던 나라가 될 수 있다고 믿었던 이유일 것이다. 그의 이상 정치인 인(仁)을 기본 덕목으로 도덕 정치, 즉 탕평 ? 개혁 ? 실행을 위해 덕치주의를 실현하려 했던 것이다. 임금이?인격을 수양하고 극기하는 자세로 정치에 임해서 엄한 형벌보다는?백성들의 본성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펼치는 인정의 정치를 구상했던 것이다.?그 신념을 지키기 위해 도덕정치를 함께 실현할 군주를 찾았으나 공자의 제안은 누구에게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당시 중국은 춘추 전국 시대(春秋戰國時代) 후반기로써 부국강병책에 의해 힘으로 권세를 확보하려한 제후국들이었기에?덕치주의가 주목을 받을 리 만무하였다. 무력을 이용한 영토 확장과 권모술수를 써서라도 권력 유지에만 급급했던 혼란의 시기였다. 불과 얼마 전까지 우리가 촛불을 높이 들고 소리쳤었던 대한민국의 상황과 사뭇 다르지 않은 시대라고 볼 수 있겠다. 13년 만에 돌아온 그는 시 · 서 · 역 · 예 · 악 · 춘추를 재편찬하여 이를 토대로 후학을 가르치는데 더욱 정진하게 된다. 결국 교육만이 그의 신념을 전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라고 여긴 것이다.?공자(孔子)를 추앙하던 이도 그렇지 않았던 이도 공자(孔子)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가 잘 드러나는 한 대목이 있다.어느 날 자로(子路)가 늦어져 성안에 들어가지 못한 채 석문에서 묶고 다음날,?새벽에 성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문지기가 어디서 오는 길이냐고 물었다. 자로(子路)가 공자(孔子)에게서 오는 길이라 대답하니 문지기가 말한다.???“공자,?안 될 줄을 번연히 알면서도 뚜벅뚜벅 행하는 그 사람 말인가?”후일 공자는 자신의 생에 대해 이렇듯?말했다.?‘나는 15세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서른 살에?뜻을 세웠고, 마흔 살에?현혹되지 않았고,? 쉰 살에?천명을 알았고, 예순 살에 진리를 이해했으며, 일흔 살에?이르러 어떤 마음이 찾아와도 법도를 넘어서지 않았다’??
김 구(金九) 선생님의『백범일지(白凡逸志)』를 읽고일제강점시절 혹한의 식민통치 하에 대한민국의 독립운동을 이끈 민족지도자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위인은 백범(白凡) 김 구(金九) 선생님일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가 우리나라를 침탈, 통치하며 우리 민족에게 수많은 만행을 저질렀던 식민지 치하시절 그는 우리나라, 우리 민족의 정신적 지주이자 대한독립운동의 구심점이었으며 그의 인생 70여년을 오롯이 조국의 자주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위인이었다. 그는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주요 직책을 맡으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후세대 교육이나 이념의 전파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행동으로도 많은 역할을 하였다. 심지어 미래에도 자신의 소원인 대한민국 독립을 위하여 투쟁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였다.백범(白凡) 김 구(金九) 선생의『백범일지(白凡逸志)』를 읽는 도중에 어느 순간, 괴롭고 힘든 상황에서도 자신의 안위보다는 민족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인생 전부를 바치면서 죽을 때까지 노력했었던 그의 희생적인 모습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삶을 살아가며 얼마나 절실하고 성실한 태도로 살아가야 단 한번 주어질 뿐인 삶을 가치 있는 삶으로 완성하고 다음 세대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겨지게 되는지도 알게 되었다. 남들이 다 넋을 놓고 있을 순간에도 치열하게 자기 성찰을 하고 앞일을 가늠하며 고뇌의 시간을 가져 이렇게 저렇게 엮인 인연의 사슬도 회한이 남지 않게 잘 가꾸어나가야 비로소 마음 편하게 이 세상의 여정을 마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백범(白凡) 김 구(金九) 선생, 지금도 후세에 존경받고 있는 이 남자의 삶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참 힘없고 딱한 나라에서 태어나 아주 작고 여린 빛이 사라져 어둠을 더듬어 앞으로 나아가야하는 그런 힘들었던 시대에 자기 한 몸을 불태워 민족의 앞길을 밝혀준 겨레의 등불이 되었다는 것이다. 사나이 가는 길 앞에 국가와 민족이 있었고, 매순간 일신(一身)의 안일보다 동족의 평안을 위하여 가시밭길을 걸었다. 누구보다도 시대가 요구하는 가치를 먼저 읽었고 그래서 그 험한 길을 앞장서서 걸었다. 한평생 동안, 한결같이 그렇게 꾸준히 걸어가 하얀 눈 위에 아름다운 발자국을 남겼다. 그래서 깨어있는 사람은, 그래서 눈이 밝아진 사람은 지금도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긴 시간은 무심히 흘러 지금까지 이르렀지만 사람 사는 세상은 김 구(金九) 선생의 시대나 우리가 사는 작금의 이 시대나 별반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다. 남북으로 분단된 한민족의 아픔이 있고 치열하고도 열악한 국제적 위상과 경제적 어려움이 지금도 우리 주변에 널려있다. 점점 팍팍해져 가는 생활상으로 서민들의 희망은 점점 줄어들고 그렇게 불투명한 앞날은 자라나는 청소년들과 사회진입단계의 청년들에게 무거운 짐이 되어 좌절을 맛보게 한다. 누가 이런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절망을 이기고 용감하게 자기의 시대를 극복할 수 있을지, 밝고 또 맑은 눈으로 이 시대를 기록하고 성찰하고 있을지, 또 백년 후에는 누가 우리시대의 영웅이 되어 난세를 이끌어 나갈 수 있을 것인지 궁금하기만 하다. 분명 조국의 어딘가에 제2의 백범(白凡) 김 구(金九) 선생이 자라고 있고 웅혼(雄渾)하고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싶다. 우리는, 아니 나는 조금 앞선 선배들의 희생과 고난이 방패가 되어주었기에 덕분에 굶지 않았고, 글을 배워 읽을 수 있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자유로운 주장과 바람직한 생각으로 희망이 있고 꿈이 있는 세상 속에서 많은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이러한 자유는 선인들의 피와 땀의 결실이며 적어도 보다나은 모습으로 나 또한 후세인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자산이라는 생각이 가슴 속을 뚫고 지나간다.죽을 때까지 부강한 나라보다는 우리민족의 자주독립을 이루고 높은 문화의 힘을 길러서 모두가 평등하게 자유를 가질 수 있는 나라가 되기를 바랐던 그의 행적을 보면 지금의 우리는 그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감옥에 투옥되었을 때 불효하게된 것 같은 자신의 모습을 보고 육체적 ? 정신적으로 고통이 있었다고『백범일지(白凡逸志)』의 기록으로 나타냈지만 당시에는 주변사람들에게는 오히려 더 위풍당당한 모습을 보였었던 그의 모습에서, 남들보다 높은 지위에서가 아니라, 가장 낮은 사람의 신분으로서 오직 조국의 완전한 독립만을 원했던 진정한 애국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하겠다. 이러한 그의 모습으로 비춰보아 자신의 호를 ‘가장 낮은 사람’이라는 뜻의 백범(白凡)이라 한 것도 ‘백정이나 범부(凡夫)라도 애국심이 다 자신과 같았으면 하는 바람’에서였다고 한다.민족의 독립을 위한 행적보다 그를 더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은 그의 사상이 아닌가 싶다. 그는 감옥에 투옥되어 있는 중에도 독서를 통해 자신의 부족한 점을 쉼 없이 채웠다. 당시사회의 정치사상과 사회변혁 이념으로는 유교 및 동학이 주도하고 있었는데 그는 감옥에서 신서적을 읽고 기존의 폐문자수( 閉門自守: 개항하지 않고 쇄국정책을 씀)하던 구(舊)지식, 구(舊)사상만으로는 구국할 수 없으니, 세계 각국의 정치 ? 경제 ? 산업 ? 사회 ? 문화 ? 교육 ? 도덕이 어떠한지 연구하고 부족한 점이 있으면 도입 ? 차용하여 우리 것으로 만들어 국가 정책과 민생에 유익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누군가의 가르침이 아닌 감옥 안에서 스스로 책을 통해 부족함을 알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할지 깨우쳤던 그는 정말 비범한 인물이었다.?“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하면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요.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세 번째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백범일지(白凡逸志)』의 마지막에는 ‘나의 소원’으로 당신이 무엇을 이루고자 했는지 짧게 정리하였는데 지금 읽어보아도 한 국가가 나아가야할 방향을 너무도 명확하게 나타내고 있음에 부족함이 없다. 그의 소원은 독립이고 또 따른 소원은 우리나라의 독립이고 세 번째 그의 소원 또한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 독립이었다. 그 이유는 정치 ? 경제적 사상, 종교 등의 가치는 일시적인 것이기에 변할 수 있어도 역사와 운명을 같이 하는 민족이란 완연히 존재하는 불변의 것이기에 민족만은 영원히 흥망성쇠의 공동운명으로 최소의 국가를 이루어 최선의 문화를 낳아 다른 민족과 서로 교류하고 서로 돕는 것이 김 구(金九) 선생이 믿었던 진정한 민주주의였다. 그 다음으로 그가 믿었던 이념은 자유였다. 종교나 사상을 통한 독재는 개인의 자유를 보장 할 수 없으며 언론의 자유, 투표의 자유, 다수결의 복종이 보장되었을 때 민주주의가 이루어질 수 있고 가장 높은 문화가 창출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최종적으로 그는 다른 나라의 강탈과 착취를 통해 부강한 나라가 되는 것보다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하고 높은 문화의 힘을 길러서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타자(他者)의 행복도 이루어지기를 원했다. 이러한 자유, 독립, 문화의 힘을 키우기 위해 선행되어야 할 일은 사상의 자유를 확보하는 정치 양식의 확립과 국민교육의 완비로 성숙한 인격체를 양성하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피에타(Pieta)』를 보고늦었지만 김기덕 감독의 영화『피에타(Pieta)』를 드디어 감상했다. 영화명인 ‘피에타(Pieta)’는 이탈리아어로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으로 르네상스 시대 조각가이자 건축가이며 화가인 미켈란젤로의 작품명 가운데 하나로 성모 마리아가 죽은 예수를 안고 있는 모습을 묘사한 조각상을 말한다.?전문가들은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으로 작품을 어느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 전반적인 느낌,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의 분위기가 확연히 다르다고 말한다.“성모 마리아의 표정은 순진무구한 동시에 처연해 보인다. 반면에 입을 반쯤 벌리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은 오랜 고통으로 인해 지쳐 있다.” 는 어떤 책의 감상평처럼 멀리서 보거나 밑에서 올려다볼 때 예수를 감싸고 있는 분위기는 고통의 모습으로 보이고, 성모 마리아의 표정은 비탄에 젖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하늘을 향해 벌린 성모 마리아의 왼손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시신 위로 시선이 내려오면 정해진 운명을 받아들이는 편안한 그의 미소가 보인다.” 바로 그것이다. 정면에서 작품을 바라보면 어색하다는 하느님의 아들과 어머니의 구도 역시 하느님의 시선, 즉 그들의 위에서 내려다보면 조화로운 것이다. 미켈란젤로의 시선은 신의 관점을 따른 것이다.이 영화는 이러한 미켈란젤로의 대작을 모티브로 만든 김 기덕 감독의 18번째 장편 영화로 2012년 제69회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나는 이 영화를 접하기 전에 이 포스터를 먼저 보게 되었는데 포스터의 성스럽고도 인상 깊은 느낌 덕에 영화를 보게 되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영화 속 장면의 느낌은 영화 포스터답게 성스럽지 않았다. 관객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포스터 같은 메시지를 담고 있기는 하지만 표현방식은 아주 불쾌하게 신경을 거스른다. 그래서 그 불편한 감정을 가까스로 억누르면서 영화를 보게 되었는데 작품을 감상하고 난 후 김 기덕 감독이 전하려고 하는 메시지를 되짚어 생각해보면 딱 포스터 이미지 같은 내용이다. 이야기 속에는 지저분한 거리 속에서 추악한 돈에 집착하고 숭배하는 개잡놈이란 욕이 절로 나오는 한 남자가 등장하고 그 남자를 향한 복수의 감정을 품고 접근하였다가 연민의 감정으로 변하는 한 여자가 있다.?영화의 줄거리는 끔찍한 방법으로 채무자들의 돈을 뜯어내며 살아가는 남자 이 강도. 피붙이 하나 없이 외롭게 자라온 그에게 어느 날 엄마라는 여자가 불쑥 찾아온다. 여자의 정체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하며 혼란을 겪던 강도는 그녀가 자신의 엄마임을 받아들이며 태어나 처음 자신을 찾아온 그녀에게 무섭게 빠져들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여자는 갑자기 사라지고, 곧이어 그와 그녀 사이의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두 남녀의 잔인한 비밀이 드러나게 된다.(1) 영화의 비극은 과연 누구의 잘못인가?청계천에 있는 세운상가 상인들은 궁핍한 경제상황으로 어쩔 수 없이 이 강도에게 돈을 빌려 쓰게 되고, 돈을 갚지 못하게 된 그들은 결국 불구가 되어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운명을 맞게 된다. 사고무탁(四顧無託) 고아로 태어나 사랑받지 못하고 자라 얼음같이 차가운 이 강도 또한 아무 거리낌 없이 그 사람들을 불구로 만들면서까지 돈을 받아내는 악랄한 불법 채권 추심업자로 살아가고, 그 때문에 상구를 잃은 엄마 또한 피해자인 것이다. 이러한 영화가 보여주는 불행한 인생들은 과연 누구의 잘못일까?(2) 극 중에 나오는 동물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영화에 나오는 동물들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것들은 모두 인간에 의해 사육당하고 희생당하는 동물이라는 것이다. 닭은 닭장, 토끼는 토끼장, 장어는 수족관에서 길러진다. 그런데 우리는 닭이 닭장에 갇혀있다고, 그들이 사육당하고 있다고 깨닫고 있을까? 토끼는 토끼장 안에서, 장어는 수족관 안에서 사육당하고 있다고 느끼고 자각하고 있을까?사실 우리가 사육하고 필요에 따라 섭취하고 있는 동물들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우리들 인식 속에서 그냥 ‘먹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에 생명이 짓밟혀지는 잔인한 장면들도 그것이 전혀 잔인하다고 인식하지 못한다. 닭이 공장에서 도축되는 과정을 본 적이 있는가? 그 과정은 그야말로 공장화되었다고 표현할 정도로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눈뜨고 보기 힘들 정도의 잔인한 과정으로 진행된다. 수 천, 수 만 마리의 닭들이 컨베이어 벨트 위 궤도에 올려 옮겨져 털이 벗겨지고 일괄적으로 목과 다리가 잘린 후 먹기 좋은 크기로 포장된다. 이처럼 최종적 포식자인 우리 식탁에 올라올 때는 그것이 깔끔하게 포장된 모습만을 보여주고 있으니 그것과 그 과정에 대해서 우리는 무엇이 잔인한지 전혀 알지 못하고 너무나 당연하게 우리의 식품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사실 영화 속 이 동물들은 포식자들을 위한 일방적인 희생을 치르고 있는 세운상가의 ‘청계천 상인’들을 의미하며, 보다 넓은 의미로 이들은 우리나라의 근대사에서 급격한 근대화 산업을 이루기 위해 수많은 희생을 치러냈던 ‘우리’를 나타내기도 한다.요즘은 사회계층 내 부(富)의 편중이 심화되어 나타나고 있는 부익부빈익빈 현상이 더 심해지고 돈이 없으면 좋은 중학교, 좋은 고등학교를 진학할 수 없고, 명문대학교를 입학하기는 더더욱 힘들어지고 있는 세상이다. 설령 명문대학을 입학했다 하더라도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않다면 학자금 대출로 학비를 충당할 수밖에 없으며 그렇게 대출을 받으며 학기 중 생활을 마치고 졸업하고, 직장을 구하고, 결혼할 때가 되면 1∼2억의 채무는 너무나 당연하게 멍에를 맨 소처럼 우리 등 위의 삶의 무게로 올려 지게 된다. 이처럼 이 영화는 자칫 조금이라도 기계 작동에 오류가 생기면 상반신 마비로 인해 불구가 되거나 목숨을 잃을 위험에 처한 노동자들의 목숨을 담보로 보험금을 미끼삼아 청부사채업을 하는 이 강도와 악덕 사채업자들은 채무자들에게 굴욕과 모욕을 안기면서 상징적으로 막강한 권력을 앞세워 횡포를 부리는 상위 1%의 빼앗는 자, 즉 거대 자본가와 그들에게 억압당하는 99%의 아우성치며 빼앗기는 자, 즉 힘없는 민초들의 모습으로 양분되는 현대 신자유주의(Neoliberalism , 新自由主義) 경제시스템을 비판하는 듯하다.영화 속 이 강도의 대사 중 “돈을 빌려 쓰고 갚지도 않으면서 ‘어떻게 되겠지’하고 생각하는 놈이 쓰레기 아냐.” 라는 말이 나온다. 현실을 직시하자면, 슬프지만 그 말도 틀리지는 않다. 적어도 자유시장경제 시스템의 유지와 규제완화가 중시되는 신자유주의 경제를 표방하는 지금 우리 세계에서 돈은 알파이자 오메가, 시작이자 끝이다. 영화 속 비닐봉지에 담겨졌다가 바닥에 떨어져 버둥대는 뱀장어의 모습이 지금 우리의 처지와 같다고 느꼈다면 그것은 단지 나만의 착각이었을까? 고로 영화 속 닭장과 토끼장, 수족관 등이 상징하는 것은 우리의 생명을 최소한 연명하게끔 해주지만 결국 우리의 자유를 억압하는 시스템이며 다른 말로는 ‘자본’, 또 다른 말로는 ‘빅브라더(Big Brother)’ 라고 할 수 있겠다.(3) 정말 그가 원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이 강도가 사실 원한 것은 세상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한 ‘돈’이 아니고 그렇다고 여자의 육체도 아니다. 그저 엄마가 열심히 자기를 위해 뜬 스웨터, 즉 태어나 아직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따뜻한 엄마의 사랑을 받고 엄마의 사랑을 입고 싶었을 뿐, 극 중간 중간에 그것을 증명하는 장면이 많이 등장한다. 애기들과 풍선 모자를 쓰고 같이 노는 장면, 엄마 품에 안겨 잠들려고 하는 장면, 무의식적인 자위행위, 어리광부리지만 엄마의 말을 잘 듣는 장면 등 모두 엄마의 사랑을 갈구하는 이 강도의 순수한 모습이다.
마이클 샌델의『정의란 무엇인가』를 통해 본 시장경제사회 문제1. ‘시장경제사회’의 문제2017년 3월 10일 금요일, 대한민국 제 18대 대통령이 사익추구를 위해 헌법 농단 및 다수의 하위법률위반과 공적 권력을 직권남용(職權濫用)했다는 재판소의 판결에 의해 탄핵되어지고, 온갖 탈법과 위법이 아무렇지도 않게 횡행하는 현실 속에서, 법을 준수하며 착하고 바르게 사는 것이 오히려 해가 되는 막장 사회의 단면이 어느 일순간 우리 대한민국사회에 나타나고 있는 실정이다. 문제의 핵심은 지금 이 순간에도 온갖 형태의 패악이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고, 이러한 분위기가 사회 저변으로 확산되어져 가고 있는 실정에 심지어 이를 당연시 여기는 이들까지 늘고 있다는 심각함에 있다하겠다.이처럼 사회전반에서 인식되어져 있는 정의에 대한 가치는 퇴색해져 가고 정의의 수호와 부패척결을 향한 갈망적인 요구의 손길은 끊임없이 증가하여 1,500만 시민이 촛불을 들고 일어나기도 했었던 그때, 도덕적 딜레마에 허덕이는 혼란스러운 선택의 기로에서 우리는 어떠한 가치판단을 가지고, 무엇이 합리적이고 철학적인 선택이며 인간을 더욱 인간답게 만드는 길인지 그 누가 자신 있게 대답해 줄 수 있을까?우리의 눈을 멀게 하고 귀를 막게 하며, 양심도 사랑도 우정도 생각하지 않게 하는, 결국 인간을 물욕(物慾)의 노예로 만들어버리는 배금주의사상(拜金主義思想)이 만연해진 현대 자본주의 시장에서 마이클 샌델은 그의 저서『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자본주의 시장 체제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는 시장은 좋은 삶과 사회공동체주의를 실현하는 데 한계가 있으며, 도덕적 한계가 존재한다는 점을 강하게 주장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시장은 ‘공정함’을 포함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시장은 공정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침묵하며 때로는 불공정하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때때로 시장가치는 사회공동체의 가치, 규범 및 공공선(public good, 公共善)을 침해한다. 사회공동체의 가치를 보호하기 위해서 우리는 시장의 한계를 정확하게 알아야 하며, 시장으로부터 사회공동체를 보호해야 한다. 시장은 재화를 생산하고 부(富)를 창출하는 효율적인 제도이지만,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장은 가족 ? 윤리 ? 교육 ? 환경과 같은 전통적 가치를 파괴한다는 것이다. 그는 ‘시장경제’는 괜찮지만, 시장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시장경제사회’는 문제라고 지적한다.그가 말하는 ‘시장경제사회’는 시장적 사고가 삶의 모든 부분을 장악하여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왜곡하는 사회이다. 그는 ‘시장경제사회’ 현상을 설명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의 한 탁아소에서 실제로 일어난 예를 든다. 이 탁아소의 최대 고민은 부모들이 때때로 정해진 약속시간보다 늦게 아이들을 데리러 왔기 때문에 교사들은 무작정 부모들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탁아소는 부모들이 지각하면 벌금을 받기로 하였다.그런데 탁아소가 벌금을 매기기 시작하자 예상하지 못한 사태가 벌어졌다. 기대와는 달리 지각하는 부모들의 수가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늘어났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교사들을 대하는 태도도 변했다. 벌금을 도입하기 전에는 지각한 부모들은 교사에게 폐를 끼친다고 생각하여 미안함과 죄책감을 가졌지만, 이제는 그런 태도가 사라지고 당당해졌다. 이러한 현상의 원인으로 부모들이 벌금(fine)을 요금(fee)으로 생각하게 되었다고 진단한다.‘벌금’과 ‘요금’은 그 성격이 다르다. 벌금은 도덕적 반감을 불러일으키지만 요금은 그렇지 않다. 요금은 도덕적 판단이 개입되지 않은 그냥 ‘가격’이다. ‘가격’은 시장에 속한다. 따라서 탁아소에 요금을 매기는 시장논리가 도입되면 교사와 부모, 아이들 사이의 관계와 태도가 변하는 것이다. 부모들이 탁아소 교사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것은 자기 자녀들의 교육을 맡긴 부모로서의 미덕을 발휘하는 것이고 공공선(public good, 公共善)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탁아소의 벌금제도 도입은 이러한 미덕과 가치, 공공선을 버리고 ‘시장경제사회’로 진입하는 것을 의미한다.마이클 샌델은 시장논리가 어떻게 인간과 인간관계를 왜곡시켜 ‘시장경제사회’로 몰고 가는가를 다양한 예를 들어 설명한다. 자녀가 책을 읽으면 돈을 주는 부모나 자녀의 학교 입학식이나 졸업식에 참석하지 못한 부모가 그들에게 선물을 사주는 것, 선물을 물건이 아니라 돈으로 주는 관습, 공공의 사물을 광고로 사용하고 돈을 받는 행위 등 여러 가지 예를 들어 현대사회가 ‘시장경제사회’로 진입했다고 주장한다.2. ‘통 큰 치킨’ 논쟁에 대하여이러한 ‘시장경제사회’의 한 예로 한 때 사회적 이슈가 됐었던 롯데기업의 ‘통 큰 치킨’이 있었다. 완전시장경제를 옹호하는 이들은 ‘통 큰 치킨’의 시장 내 등장은 시장경제의 자연스러운 현상이기 때문에 외부 주체가 개입하여 가격을 통제할 수 없다는 주장을 한다. 이에 반해 시장의 가격 규제에 찬성하는 이들이 생각하기를 대기업들이 가격을 내리는 이유는 가격경쟁을 통해 영세업자들을 시장에서 퇴출시키기 위한 전략이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되면 결국은 대기업이 그 시장을 독점 ? 주도하게 되어 가격을 올리기 용이하게 된다. 결국 소비자들은 일시적으로 이익을 보는 것 같지만 장기적으로는 손해를 보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외부주체로 하여금 시장 내 가격을 통제하여 영세업자를 보호하는 것이 장기적인 관점에서 공공의 이익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개인의 선택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유주의는 ‘통 큰 치킨’에 대해 찬성한다. 사회공동체주의는 공공선과 미덕을 앞세워 ‘통 큰 치킨’에 반대한다. 곧 자유주의는 ‘통 큰 치킨’은 저렴한 단가로 식품을 공급할 수 있는 생산자의 권리와 그것을 사먹을 수 있는 소비자의 권리를 옹호하고, 사회공동체주의는 영세상인의 생존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이런 논리는 상대적으로 저렴하게 판매되고 있는 ‘E마트 피자’나 재래시장의 생존을 위협하는 ‘대형 마트 휴일제’에도 적용될 수 있다. 사회공동체주의자들은 공공선(public good, 公共善)의 관점에서 이 문제들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마이클 샌델은 시장의 가격경쟁을 때에 따라 규제할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하지만, 이것을 정당화하는 논리의 주체는 공리주의(utilitarianism, 功利主義)가 아니라 공동체주의다.3. ‘시장경제사회’ 에 대한 해결책마이클 샌델이 시장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시장에 대한 불신은 높다. 그는 시장의 생산적 활력과 역동성이 인간의 경제적 환경을 개선하는 데 필요한 물질적 부(富)의 생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주지의 사실은 인정한다. 또한 우리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재화의 생산과 분배는 시장에 맡기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믿는다. 심지어 마이클 샌델의 저서『정의란 무엇인가』도 시장에서 판매되었다. 시장이 없었다면 그는 자신의 사상을 전 세계에 알리고 엄청난 명성과 경제적 이익을 얻지도 못했을 것이다.그러나 그는 시장에서 지켜져야 할 도덕성을 강조하면서 시장이 가져야 할 한계를 설정한다. 즉, 시장논리, 곧 수요와 공급의 논리가 적용되어야 할 영역과 그렇지 않은 영역을 명확하게 구분한다. 시장이 우리에게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는 데는 대단히 효과적이지만, 시장의 논리가 적용되지 않아야 할 영역이 분명하게 존재하며, 여기에 속한 것은 사고팔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시장은 도덕적 한계를 가져야 하기 때문에 그가 설정한 경계를 넘어 시장의 논리가 적용될 때 공정성이 파괴되고, 타락현상이 일어난다고 경고한다.그는 시장의 도덕적 한계를 설정함으로써 돈으로 ‘사고 팔 수 없는 것’들을 제시한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주장하고 있는 것은 ‘사고 팔 수 없는 것’들이 아니라, ‘사고팔아서는 안 되는 것’들이다.「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서 ‘우선 탑승권’, ‘대리 줄서기’, ‘교도소 감방 업그레이드’, ‘인도인 여성의 대리모 서비스’, ‘미국으로 이민하는 권리’, ‘멸종 위기에 있는 코뿔소를 사냥할 수 있는 권리’, ‘자녀의 명문대 입학 허가’ 등을 사고팔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들은 실제로 시장에서 거래가 행해지고 있는 것들이다.마이클 샌델은 시장에서 사고팔아서는 안 되는 것들이 존재한다는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공정성’과 ‘부패’를 말하며 대학 입학허가를 예로 든다. 대학 입학허가를 사고파는 것이 공정성을 해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입학허가를 금전으로 구할 수 있는 부유한 사람만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에 부자의 자녀에게 입학을 허용하는 것은 사회적 ? 경제적 불평등을 영구화한다고 우려한다. 대학 입학허가 거래가 부패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 주장의 근거로 대학의 가치와 품위 훼손을 제시한다. 대학교육은 학생이 진리를 추구하고, 직업을 갖도록 교육 받고, 학문적 ? 과학적 탁월성의 증진, 인도적인 교육과 학문의 발달, 시민사회의 덕성 교양과 같은 이상적 가치의 실현이다. 그런데 대학 입학허가서를 금전으로 사고파는 것은 이러한 이상을 부패시키는 것으로 곧 매매가 재화의 성격을 변질시킬 수 있다는 주장이다.그러나 시장에서 사고팔 수 있는 것이 절대적 기준에 의해 정해지는 것은 아니다. 과거에는 시장에서 거래되지 않았던 것들이 오늘날 거래되는 것도 있고, 실제로 거래되던 것이 거래의 대상에서 제외된 것들도 있다. 과거에 상호부조의 형식으로 처리되었던 것이 오늘날에는 시장에서 처리된다. 오래 전 전통사회에서 있었던 혼례나 상례, 농경사회에서 의례히 행해졌던 품앗이 등은 시장에서 거래되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은 예식장이나 장의사, 인력시장을 통해 이것들과 관련된 서비스들이 시장에서 거래되고 있다. 과거에는 노예시장에서 노동인력으로 노예를 사고팔았지만, 오늘날에는 노예시장이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 시장에서 사고파는 대상들은 대체로 사회적 관습에 의해 결정된다. 노예시장의 소멸은 인권과 같은 보편적인 가치가 확산되면서 사라진 측면도 있지만, 사회 환경이 변하여 노예가 더 이상 생산적으로 효율적이지 않아서 자연스럽게 사라졌다고 볼 수도 있다. 노예의 소멸은 사회의 발달과 더불어 신장된 인권과 함께 사회경제적 효율성이 작용한 결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