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 중심의 디자인과 마케팅, 레고{28개 국에 48의 자회사를 거느린 거대 기업레고, 전세계어린이들에게 꿈과 무한한 상상력을 제공하는 이른바 레고 왕국의 역사는 지금부터 70여 년 전으로 거슬러 hdffkrks다. 1932년 올레 커크 크리스찬센니 덴마크의 빌룬드라는 도시에서 경제 대공황으로 인해 목수 일을 그만 두고, 아들과 함께 목각 인형들을 장난감으로 제조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본격적인 레고 완구의 태동이다 1934년 7명으로 늘어난 직원은 그리스찬센을 중심으로 목각 인형들을 통해 조금씩 성장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1940년대 후반 2차 대전 후 이들은 플라스틱으로 눈을 돌려 1947년 최초의 플라스틱 제품을 출시, 큰 인기를 얻게 된다. 50년대까지 나무와 플라스틱 제품을 동시에 생산을 이들은 1949년에 건축용 벽돌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블록을 개발하고, 오늘날 레고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현재 레고 는 4가지 제품군을 기본으로 생산된다. 생후 6개월부터 만 2세까지 영유아를 위한 레고프리모 와 취학전 아동을 위한 레고 듀폴로 , 레고의 메인 제품군인 초등한ㄱ생 대상의 레고시스템 그리고 중고생을 타켓으로 하는 레고 하이테크닉 이 그것이다. 최근 여아들을 대상으로 개발된 레고 스칼라 와 학교에서 필요한 다양한 학습 시스템과 교육자료에 대한 연구를 맡고 레고 닥타 도 인기를 끌고 있다. 레고의 브랜드 네임은 LEG GODT', 재미있게 놀다 라는 뜻의 덴마트어를 줄여서 만든 것으로 이는 레고의 가장 기본적인 컨셉ㅇ르 나타낸다. 기술의 개발과 디자인의 혁신에 의한 다양한 스타일과 색채, 아이템의 개발은 레고를 세계적인 완그 업체로 성장시킨 원동력이 되었으며 특히 최고의 품질을 지향하는 레고는 오늘날 불록 완구의 대명사가 되었다{레고는 처음 나무 장난감에서 시작되었다. 1958년 최초의 플라스틱 블록이 개발되면서 오늘날 레고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레고 로고의 변천 과정. 1973년 현재 사용되는 로고의 정식으로 채택되었다.레고의 디자인 전략 최고의 품질고 k안전]각 연령별, 단계별로 세분화되어 차별화된 전략을 추구하는 레고는 희미로운 디자인을 개발하기 위해 500여 명에 달하는 디자인 전문 연구 인력들이 레고의 디자인을 책임지고 있다. 발생가능한 모든 문제들을 철저히 검사한 뒤 비로소 소비자들에게 전달되는 레고의 제품들은 무엇보다 직접적인 소비자인 어린이들과의 커뮤니케이션ㅇ르 중시한다. 연령별로 직접 아이들ㅇ르 초청하여 합숙 기간을 거쳐 신제품에 대한 반응 등을 고나찰하는 것은 레고 디자인의 가장 중요한 과정이다. 연구 과정에서 이들은 무엇보다 최고의 품질과 안전성, 그리고 교육적인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제품을 디자인하기 위해 철저한 검사과정을 거친다. 5단계의 검사 과정 으로 거쳐 비로소 하나의 제품으로 완성되는 레고의 모든 제품들은 완벽한 자동화 시스템에 의해 블록이 마들어지고 수십 년 간 축적된 레고만의 몰딩 기술이 레고의 다양한 입체 모형을 생산하는 비결이다. 바로 최고의 품질과 안전을 생각하는 이들의 철저함이 오늘날 레고의 성공 비결은 물론이다환경을 생각하는 기업 정신레고의 모든 제품들은 무독성의 플라스틱 소재를 사용하며 어린이들의 미래를 생각하여 환경보존에 무엇보다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 특히 플라스틱을 폐기할 때 발생할 수 있는 호나경 오염을 최소화하기 위해 레고는 완벽한 재활용과 철저한 분리 수거를 실시한다. 포장 재질 또한 재활용이 가능한 특수 플라스틱 서재와 재활용 팩으로 제작된다. 환경을 생각하는 레고의 선진 기업 정신뿐만 아니라 이익의 사회 환원이라는 측면에서도 레고는 후한 점수를 받는다. 수십만 권의 장사를 자랑하는 빌룬드 센터에 건립된 무료 도서관과 교회, 레고랜드 호텔 등은 기업의 성공이 지역 사회에 미치는 다양한 혜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실례라 할 수 있다.토탈 프로모션을 전개하는 레고의 홍보 전략레고의 광고는 철저하게 타겟층을 고려하여 전개된다. 연령별로 분류된 소비자 군의 특성으로 파악하여 TV 및 인쇄 광고가 전개되며 TV고아고는 월드 와이드로 제작된. 주로 신제품위주의 광고가 대분분인 레고의 마케팅 강점은 4대 광고를 제외한 다양한 프로모션을 전개한다는 점이다. 기업이뉴의 사회 환원과 함께 기업 이미지 제고에 동시에 기여할 수 있는 대푸적인 이벤트로는 국제 레고상 이 있다. 이는 어리닝를 위하연 헌신한 개인 또는 단체에 매년 한화 약1억 4천만 원에 해당하는 상금을 수여하는 것으로 현재까지 전세계25개의 개인 및 단체가 수상했다. 95년에는 레고 코리아에 의해 추천된 한국의 색동회가 아시아 지역에선 처음으로 11회 국제 레고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이외에도 심장병 어린이 돕기 행사/백혈병 어린이 돕기 블록 쌓기대회 등 다양한 이벤트로 사회에 기여하는 기여는 한편 레고 이미지 고양에 주력하고 있다{현재 집행중인 레고의 잡지광고사업 다각화를 지향하는 레고현재 세계 130개국에 진출한 레고는 4개 대륙 중 덴마크, 스위스, 미국, 브라질 등5개국 자체 생산 시설을 갖춰 빠르고 경제적인 판매망을 확보하고 있다. 최고의 품질을 위해 공장 관리에 각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레고는 또한 사업 다각화에 주력하고 있다. 독립된 사업 영역으로 학교에서 필요한 학습 시스템과 교육 자료에 대한 연구를 맡고 있는 레고 닥타와 아동복, 시계, 가방, 등을 생산하는 라이센싱 사업, 그리고 1996년에 설립되어 소프트웨어, 필름, 책, 음악 등을 개발하고 판매하는 레고 미디어까지 레고의 영역은 한계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모든 사업의 기본 핵심은 어린이가 우리의 영원한 고객 이라는 점이며 그들을 위해 죄상의 품질과 디자인을 제공한다는 것으로 그것이 바로 레고가 세계화에 성공한 비결이다.
1931년 밀라노에서 출생하여 과학기술전문학교에서 건축을 전공한 알렉산드로 멘디니는 Ollo, Casabilla, Modo, Domus와 같은 디자인지를 출판하고 있다. 전위적인 디자인 세계를 펼치고 있는 그는 1973년 이탈리아 디자인에 반대하는 Global Tools Group을 세웠다. 1978년 Studio Alchimia와 협력하여 일상품을 새롭고 아이러니컬한 오브제로 바꾸는 eBanal Designu 을 전개했다. 건축 뿐만 아니라 가구, 제품, 인테리어까지 다양한 작업을 하고 있는 그는 1990년 동생 프란시스코 멘디니와 아뜰리에 멘디니를 설립하여 Groningen 박물관, 파라다이스 타워 등의 작품을 발표했다. 또한 Swatch, Alessi사의 desitn adviser로도 있었다{을 누가 했는지는 몰라도 ‘아!, 그 와인따개!’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와인따개의 이름은 ‘안나’이며, ‘안나’라는 이름은 안나를 디자인한 사람의 여자친구이름이었다.이처럼, 아이러니하면서 유머러스한 오브제를 제작한 디자이너는 디자인을 공부했다면 한번씩은 수업시간에 발표를 해봤음직할 이탈리아 디자인의 거장, 알렉산드로 멘디니다. 70년대 이탈리아 디자인, 건축잡지인 ‘Casabella’의 편집국장을 지내면서 모더니즘의 재구성주의가 가진 영웅주의적 성격을 신랄하게 반박하기도 했고, 이에 반해 ‘안나’와 같은 평범함을 가진 소품들을 제작하기도 했으며, 장식적 모티브를 활용한 작품을 선보이기도 했던 알렉산드로 멘디니는 국제적인 디자이너이며, 거장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다.얼마전 한샘 DBEW 국제 디자인 공모전의 심사를 맡아 한국을 방문했던 알렉산드로 멘디니. 그는 어느새 70년이라는 세월을 훌쩍 뛰어넘은 작은 할아버지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나, 그가 제시한 디자인의 시대적 역할은 다시 한번 되새겨볼만 하다.70년대초부터 알렉산드로 맨디니는 급진주의적 건축을 표방한 전문지 ‘카사벨라’에서, 전후세대를 지배했던 합리주의와 굿 디자인에 의해 초강력 파워를 가지게 된 건축가들을 비난하는 신랄한 글들을 발표하곤 했다.{이후 그는 독자적으로 혹은 다른 작가들과 함께 가구, 장식품, 소품 등 이들의 우월성에 대비되는 소품들을 만들어내었다. 에토레 소트사스가 이탈리아 누보디자인의 의지주의적이고, 낙천적인고 천진한 면모를 대변한다면, 알렉산드로 멘디니는 작가 자신이 프로게토 인펠리체(Progetto Infelice, 밀라노, 1983)라는 제목으로 쓴 글에서 암시하듯, 누보 디자인의 비판적이고 부정적인고 불행한 얼굴을 구현했다.1976년 알렉산드로 게리레오는 급진주의 디자인 이론을 실제 작품으로 구체화할 기회를 만들기 위해 알레시 그룹을 창설하고, 1979년 멘디니가 이 그룹에 합류하게 되었다. 멘디니는 바우하우스 1컬렉션에 ‘Poltrona di Proust’라는 작품으로 참여했다. 이는 시대 양식풍 의자에 점표기법의 무늬를 넣은 것이었다. 그 이듬해, 멘디니는 알키미아 그룹의 요청을 받아 파올라 나본, 다니엘라 푸파, 프랑코 라기 등과 공동으로 대량 소지배들의 표면에 피상적이고 일화적이면서 장식적인 요소들을 첨가하여 ‘Oggeto Banale’컬랙션을 제작하였고, 1984년 알키미아는 멘디노그라프를 제작하였다. 이 기구는 점(혹은 얼룩), 깃발, 건축적 요소, 지그재그 등 멘디니가 즐겨 사용하던 디자인들을 틀로 만든 것이었다. 이는 환상에서 깨어나게 하는 디자인, 시작도 끝도 없으며, 스스로에 대한 설명없이 자유롭게 지속적으로 사고하려는 움직임 속에서 이루어진 디자인이다. 디자이너의 작업은 기호들을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일을 무심히 되풀이하는 일에 국한될 뿐이며, 그 와중에는 의미와 기능이 창출되기도 하는 것이다. 동일한 건축 문양이 어떤 때는 가구의 다리가 되었다가 테이블의 탁자가 되기도 하고, 장식용 모티브도 되었다가 메이크업 도구도 된다. 멘디니는 사물의 표면에만 개입할 뿐이었다. 대신 그는 모든 종류의 표면, 모든 영역에 관심을 가졌다.1982년 ‘Domus’지의 경영을 맡게 될 때까지 직접 경영했던 Modo 지는 건축과 패션, 그래픽과 디자인, 메이저와 마이너의 구분이 없는 예술 등 모든 종류의 비주얼 영역에서 작업하는 신개념의 건축가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멘디니는 건축, 보석, 미술, 사진, 미디어 등 영역의 구분없는 활동으로 현대적 개념의 영역간 이동을 예고했다. 그는 기존의 영역별 질서에 도전하였으며, 각 영역과 예술과의 관계도 재설정하였다. 이는 사물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다기 보다는 예술이 사물에 다가가게 하는 것, 예술을 하나의 사물로 다루려는 시도였다. 멘디니의 초기 그림들은 마치 채색 서랍장처럼 나무 위에 래커 칠한 것들이었으며, 이는 후에 가구나 사물, 건축 등 다른 분야에서 활용되었다.각 영역간의 관계를 나타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들이 바로 장식 모티브들이었다. 일반적으로 미술사에서 응용한 모티브(점묘기법, 서정적 압축법)들은 멘디니노그라프에서 볼 수 있는 모티브들처럼 단지 일회적 차원으로 끌어내려졌다. 어떤 모티브를 선택하느냐의 문제보다는 그 모티브가 사물의 표면, 즉 화폭, 신문, 사물, 가구, 건물 등의 공간을 어떤 식으로 점유하느냐가 더 중요해 보였다. 모티브의 유일한 목적은 주어진 공간 전체를 단일한 무늬로 최대한 신속하게 뒤덮어버리는 것이 되어 버렸다. 그래픽 아티스트들이 페이지 전체를 뒤덮는 기법을 칭할 때 쓰는 일명 올오버 기법이 그것이다. 알레시사의 주문으로 만든 화병 컬렉션의 이름을 100% 메이크업으로 정한 것은 메이크업이 가지는 피상적이고 표면적인 성격을 전체성(100%)과 연결하여 그 패러독스를 부각시키기 위함이었다.결국 알렉산드로 멘디니의 작품들은 현대 마케팅이 시장을 정복하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들을 암시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었다.# 알렉산드로 멘디니의 인터뷰 #현대사회에서 디자인의 초점은 무엇입니까?알렉산드로 멘디니 : 현대사회에서 과거와 미래, 전통과 인터넷의 세계를 연결하는 것이 디자인의 초점이다. 도시, 주택, 사물의 세가지 차원에서 그 안에 생활하는 사람들이 긍정적인 감성을 지닐 수 있어야 하며, 활력적인 에너지가 흐를 수 있는 공간과 오브제, 환경이 제안되어져야 한다. 이를 제안하는 것이 디자이너의 일이고, 디자인의 초점이다.건축디자인에서 ‘모랄리티’를 말씀하셨는데, 이는 무엇입니까?알렉산드로 멘디니 : 어쩌면 우리 사회는 너무도 험악해져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가족생활에서 집이라는 것이 작업공간과 같은 기능도 제공해야 하지만, 공간 내에서 창출되는 상황자체가 정신을 채워주고, 명상할 여유를 가질 수 있도록 자연스럽게 이끄는 그 ‘무엇’이 모랄리티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외관의 디자인이거나 인테리어일 수 있으며, 동선이나 공간의 구성 등 어디에서든지 나타날 수 있다. 디자이너는 혹은 건축가는 내면을 채워줄 수 있는 가족간의 친밀성을 강조할 수 있는 그런 디자인을, 공간을 제공해야 한다.알레시에서 나왔던 ‘안나’ 디자인은 동양적이며, 그 기능적인 면이 유머러스하다. 동양의 문화를 즐기는가? 평소 어디서 디자인 소스를 얻는가?알렉산드로 멘디니 : 안나는 동양적인 것을 생각하여 디자인 한 것은 아니지만, 동양의 문화를 즐긴다. 동양 음악을 자주 듣는데,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리고 나는 정보 수집에 있어서 심하게 말하면 병적이다. 나는 신문, 책, 여행을 통해서, 사람들과 얘기하면서 어디에서든지간에 정보를 얻는다. 사실, 나뿐만 아니라 세상의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정보를 얻지않겠는가? 정보라하면 꼭 중요한 뭔가 몇몇만이 알고 있는 어떤 사실인 것같지만, 사실 우리가 생활하는 모든 것이 정보이고, 나는 이를 잘 기억하고, 나의 일, 디자인에 활용하고 있을 뿐이다.
8. 사상과 변천신의 설계도모든 전통에서 제기하는 기본적인 주제의 하나는 인간과 인간을 둘러싼나머지 자연과의 관계이다. 인간이 자연의 핵심인 일부인가 아니면 자연과는 별개로 그보다 우월한 것일까?이런 질문이 어떤인간행동이 정당한 것이고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인지를 사상가와 종교가가 판단하는 데 중요한 기준이 되어 왔다.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유럽인들의 사고방식의 기원을 고대 그리스 로마의 철학자들과 유대교로부터 물려받은 기독 교회 사상으로 추적해 볼 수 있다. 인류가 나머지 종속적인 자연을 지배하는 위치에 있다는 사상의 흐름도 있기는 하지만 소수 전통에 불과했다.인간중심적인 사고방식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에서 만일 자연이 불완전한 것이나 쓸모 없는 것을 만들지 않는다면, 자연은 모든동물을 인간을 위해 만들었다고밖에 볼수 없다 라고 말했다.스토아학파와 키케로는 미학적이고 공리적인 측면을 강조했다. 인간은 음식과 자원과 물건에 대한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자연을 개선해야만 한다.기독교 세계관의 탄생기독교가 부흥하여 4세기에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됨으로써 새로운 요소가 들어온다.기독교의 창세기 는 신과 인간과 자연세계에 대해 유사한 견해를 나타낸다.이신화에서도 동물들이 인간을 위해 창조되기는 매한가지며 초기와 중세의 기독교들은 아무 이의 없이 신이 동물과 모든 세계를 인간을 위해 준비했다는 유대인이 사고방식을 받아들였다. 12,13세기의 고전 사상가들에 의해 영향력이 커진 이 견해는, 중세유럽에 널리 퍼진 우주와 그 안에 존재하는 인간에 대한 이해의 틀을 제공해 주었다.16세기의 종교 개혁도 이러한 견해를 크게바꾸진 않았다. 칼뱅은 만물을 인간을 위해 창조하셨다 라는점을 강조했다. 유일한 위치를 인간에게 부여해 준 유대 전통에 따라 기독교 교리는 매우 인간중심적인 세계관을 만들어 냈으며, 그것은 이후 모든 유럽의 사고방식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유대 사상과 기독교에도 예외는 있었다.그것은 인간은 신의 창조의 관리인으로서 신을 대신하여 그의 피조물을 보살필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이러한 혁명적이었던 사상은 교단내에서 많은 반발을 일으켰으며 지난 수십년간 환경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그의 의견이 부각되기는 했지만 기독교 신념의 전반적인 구조 안에서는 소수 의건에 불과했다.17세기 말 작가 레이가 쓴이라는 책에서 인간은 여전히 신에 의해 어떤 동물보다 높이,특수한 위치에 놓여 있었고 자산들에게 유익하도록 자연 세계를 사용할 수 있었다. 자연세계에 대한 간섭과 수정은 피조물을 개선하려는 신의 계획의 일부로 여졌다.자연은 원시저이고 야수적인 상태가 아니하 인간에 의해통제되고 빚어질 때가 죄선의 상태라는 사상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었다.과학적 자연관의 등장17세기 저술의 중요한 가운데 하나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와 신의 작업을 완성하는 인간의 역할에 대한 강조였다.르네 데카르트는 에서 측정하고 헤아리는 데 수학적인 방법과 부분을 통해서 전체를 알아내는 분석 과정을 적용하는 과학적인 방법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신은 여전히 그의 세계관의 중심이었으며 인간도 자연을 지배할수 있는지성과 영혼을 소유했다는 점에서 여전히 그의 구도 안에서 특수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그후 200년 동안 신의 이미지는 위대한 설계저로서, 신이 설계한 거대한 기계를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인산이 할 일이며, 인간은 신에게서 부여받은 지적인 능력을 통해 그 일을 할수 있다는 견해가 일반적으로 받아즐여졌다.미국의 경제학자 캐리는 자구는 거대한 기계로서, 인간의 목적대로 만들어지도록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다 라고 했다.베이컨은 우주는 인간위해 만들어 졌지만 인간은 우주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라고 적었다.에서 인류로 하여금 신에 의해 인간에 주어진 자연에 대한 권리를 되찾도록 하라. 라고하고 그 권리를 찾을수 있는 방법으로 점점 폭력적인 언어가 사용된다.변화하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18세기 전반기에 출판된 찰스 다윈의은 인간의 기원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키면정통적인 창조설을 무너뜨리는 고도의 경쟁 사회에서의 생존에 유리한 형질의 자연 선택이라는 개념을 제기했다. 서스펜스에게 모든생명은 적자생존 을 위한 투쟁이다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서 자연과 투쟁해야한다. 그 과정에서 사다리의 최상계단데 적합함을 보여준다.칸트는 지상에서 유일하게 오성을 가진 존재인 인간은 정말로 자격 있는 자연의 군주이다.인간은 자연의 궁극적인 목적이 되기 위해 태어났다. 라고 썼다.존 스튜어트밀은 에서 자연에 대하여 자연의 힘은 종종 인간의 적으로 나타나며 인간은 힘으로든 지혜로든 그것과 싸워야 한다 고 역설했다.진보 개념의 출현이상에서 우리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유럽인의 사고 방식이 수세기를 두고 강하게 이어져 왔음을 알수 있다.고대 사회에는 진보란 개념이 없었다.15,16세기의 사상가들고 그들의 시대는 문화뿐만 아니라 시민들의 미덕이나 용기도 그리스 로마 시대에 크게 못미친다고 생각했다. 지적인 틀 안에서 인간의 [역사를 꾸준한 진보의 역사로 분다는 것은 불가능했다.과학지식이 쌓이고 기술이 일정하게 진보하던 17세기 말이 되어서야 역사가 쇠퇴하기 보다는 진보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18세기에는 미래에 대한 낙관주의 와 모든 영역에서 필연적인 진보에 대한 믿음이 두드러지게 된다.콩드로세 후작은 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그는 인간의 잠재력과 무한한 진보의 가능성에 대한 신념을 피력하고 있다.낙관론은 19세기에 유럽이 이룬 물질적인 진보로 인해 정당화되는 듯했다. 어느때보다 많은 인구를 부양할수 있었고 도시와 새로운 도구가 생겨나고 산업화가 진행되었다. 이러게 진보를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생 시몽, 콩트, 스펜서와 존 스튜어트 밀 등의 사상에서 중심을 이룬다. 인간의 역사는 부족 사회, 봉건 사회, 자본주의 시회를 거쳐 궁극적으로는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의 승리로 귀되는 진보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19세기 말 진보의 개념이 대중문화의 일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모든 변화는 곧 진보라는 무언의 가정에 유럽인들의 사고 속에 뿌리박게 되었다. 19세기경 유럽인의 사고방식에서는 종교적인 요소가 많이 사라지기는 했으나, 2000년간 계속된 기독교적인 사고 방시과 그 이전의 전통과 유대교의 영행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유럽인들의 사고 유형에 통합되어 그들 세계관의 기초를 이루었다.비기독교 세계의 자연관중국의 도가 사상은 각 개인 내에서나 사회 내에서의 힘이 균형이라는 개념을 강조 한다. 양자 모두 자연세계 내에서 균형 있고 조화로운 방식으로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우파니샤드와 자이나교등 인도의 종교들은 전혀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을 고통당하는 세계의 일부로, 윤희와 재생을 통해 계속되는 존재의 주기에서 헤어나야만 할 존재로 보았다. 인간은 이 고통의 주기에서 벗언라 수 있는 드문 기회를 잘 이용해야만 한다는 것이다.기독교가 발생하기 수천 년 전에 발전한 동양 종교 전통의 세계관은 자연 세계와 인간의 관계를 덜 호전적인 것으로 본다. 인간은 더 큰 전체의 작은 부분에 불과하며, 그들을 구별해주는 지적, 영적 능력은 개화하는 목적으로 유도되어야 하고, 인간이 다른 동물들의 생명을 앗아 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자원의 유한성을 무시한 고전 경제학오늘날 인간 사회가 환경을 대하는 태도의 중심에는 경제적인 사고가 자리 잡고 있다.이것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현대적인 시각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요소가 되었다.토지나 노동, 자본이 모두 자유로운 시장 원리에 의해통제되며 그에 따르는 다른 기구들이 준비된 사회는 19세기에야 비로소 출현했다.최초의 정착 집단은 사회 성원들간의 식량 재분배에 의해 유지되었으며, 대개 사제나 전주민을 대표하는 세속 지도자들이 이를 대행했다. 고대 사회와 최근 수세기 이전까지 세계 각지이 모든 사회는 작은 집단을 이루며 자급자족했다. 사회는 대개 농경 사회였고 교역은 지배층을 위한 사치품에 주로 국한되어 있었다. 중세 유럽의 봉건사회에서 토지를 처음으로 교역하기 시작했다. 수세기에 거쳐서 매우 점진적으로 토지 시장이 형성되었다. 각 물품들 사이의 정해진 관계에의해 시장이 이루어졌으므로, 이익도 가격 차이가 아니라 물품의 회전에서 발생했다.1100년경 유럽에서는 교역이 확대되어 상인수가 늘어나고 은행이 발달했고 토지 시장도 꾸준히 증가했으며 노동력도 사고 파는 상품이 되었다.하지만 여전히 교역 국가통제, 노동력 시장도 임금이 제한되고 이동의 자유도 제약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회적인 태도도 이윤을 추구하는 경제 행위에 압박을 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