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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성지역의 세시풍속 평가D별로예요
    개성지역의 세시풍속우리의 세시풍속은 거의가 농경생활과 관련을 가지고 있다. 고대에 오월과 농공을 마치고 가을에 하늘을 제사한 것이며, 십월을 상달이라 해서 일년 중에서 가장 높은 달, 즉 하늘을 제사하는 달로 여기는 의식이 있었으며 정초에 풍년들기를 예축하고 봄에 역귀를 예방하는 행위 등 세시풍속은 농경 생활을 위주로 하였기 때문이다. 즉, 생업에서 세시풍속이 영향을 받아 이루어졌다.생업은 먹고 사는 현실 문제이다. 사람은 생존하기 위해서 계절의 변화를 잘 활용하고 현명하게 대처할 필요가 있었다. 적기에 파종하고 적기에 거두어들여야 했다. 계절을 놓치면 1년 동안 헛수고를 하거나 소기의 수확을 거둘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계절에 맞추어 관습적으로 농작을 해야 했다. 이러한 필요성에서 생산양식에 맞는 생활양식인 세시풍속(세시풍속)을 이루게 되었다.◎ 개성지역의 풍속과 세시풍속개성은 고려의 수도로서 비록 조선시대에 들어 유수부로 그 격이 낮아졌다고 하더라고 고려시대에 불교에 바탕을 두었던 세시풍속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같은 성격의 유수부였던 강화와 수원과 광주의 세시풍속은 제도문화와 군사문화적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문헌기록에 의해 개성의 세시풍속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가. 『신중동국여지승람』「풍속」기자의 유풍이 있다. 송사에 의하면 고려는 기자의 풍습에 익숙하고 주몽의 옛 풍속을 따른다. 어질고 유순하며 살생을 싫어한다. 성품이 어질고 유순하며 살생을 싫어해 짐승을 잡아먹지 않는다.팔관회 : 팔관회는 신라 진흥왕 12년에 시작되었다. 고려 태조 원년 11월 유사가 말하기를 "전왕들께서는 매양 해마다 중동에 팔관재를 크게 열어 복을 빌었으니, 그 제도를 따르시기 바랍니다." 왕이 "내가 부덕한 몸으로 커다란 업을 지키게 되었으니, 어찌 불교에 의지하여 국가를 편안하게 하지 않겠는가"라 하고, 드디어 넓은 뜰에 윤등 할 곳을 설치하고, 그 옆에 향등을 나열하니 땅위에 가득한 광명함이 밤을 새웠다.또한 중국과 비슷하다 : 송사에 의하면 고려는 토지가 벼농사에 적합하며, 풍속은 중국과 비슷하다. 낙타, 물소, 노새가 없으며, 승려는 있지만 도사는 없다.쑥으로 떡을 만든다 : 송사에 의하면 고려는 상사일에 푸른 쑥떡을 소반상 음식의 으뜸으로 삼는다그네놀이 : 동상, 고려는 단오 날에 그네놀이가 있다.격구놀이 : 고려 때 무관 중 젊은 자와 벼슬아치 자제들을 미리 뽑아 격구를 익히게 하였다. 매양 단오절이면 구규 옆에 봉황장막 집을 짓고, 그 집 앞에서 좌우로 각각 약 200보쯤 되는 곳 한 가운데 구문을 세우며, 길 양쪽에는 5색 비단으로 부녀자들의 장막을 치고, 명화와 채색된 담요로 장식하였다. 왕이 장막 집으로 행행하여 구경하였다.사들은 성률을 숭상한다 : 송사. 고려에는 국자감과 사문학이 있는데 배우는 사람이 6천명이다. 공사는 3등급인데 왕성은 사공이라 하고 군읍은 향공이라 하며 타국인은 빈공이라 한다. 사들은 성률을 숭상하나 경성에 능통한 자는 적다.무릎으로 기어가 반드시 꿇어앉는다 : 동상. 자리를 펴고 오를 때에는 반드시 신을 벗고, 무릎으로 기어가 반드시 꿇어앉는다. 응답할 때에는 반드시 "예"라고 하며, 절하게 되면 답례하지 않는 일이 없다.사녀들은 흰옷을 숭상한다 : 동상.남자는 두건을 쓰고 여자는 머리를 딴다 : 동상. 고려에는 남자가 두건을 쓰는 것이 당나라와 같다. 부인은 땋은 머리채를 오른쪽 어깨로 드리우고, 남은 머리는 아래를 덮어 비단으로 묶은 다음 비녀를 꽂는다. 둘러 입는 치마는 겹으로 입는데 많이 입는 것으로 자랑삼는다『신중동국여지승람』「풍속」조의 내용은 주로 중국과 한국의 사서에서 인용하고 있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내용은 첫째, 우선 역사적 전통을 상당히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내용에는 비록 구체적으로 제시는 않았으나, 기자 이래의 유교적 전통과 고주몽의 고구려 유풍을 들고 있다. 둘째, 가축을 즐겨 살상하지 않는 불교적 인간성을 들고 있다. 셋째, 팔관회나 격구회와 같은 국가의 행사를 들고 있다. 넷째, 추천희 쌀과 콩을 합하여 470여 석을 조세로 거두어, 개성부 관리들의 녹봉과 칙사에게 제공하였던 까닭에 매우 부족하니 타읍의 곡식을 계청하였다.대체로 잡역은 모두 호구에서 나온다. 전결역은 매우 가볍지만 호구역은 자못 고되다. 남자는 10세를 넘으면 바로 행상을 업으로 하고, 여자는 토막집에 들어가 1년 내내 삿갓을 엮는다. 동남 하리에서는 대장장이 일을 업으로 삼았다. 날마다 남대문 안팎에서는 장이 열렸는데, 해가 뜨면 모였다가 아침 먹을 시간이면 파한다. 옛날에는 구리그릇으로 수를 헤아려 화폐로 삼았고, 그후에는 구리덩이나 쇳덩이로 무게를 달아 화폐로 삼았다. 지금은 돈으로 화폐 삼은 것이 마치 중국과 같아 백성들이 매우 편히 여긴다.고려 전성기에 개성 안에는 민가들이 빗살처럼 늘어서 있고 오정문 밖에서 뒤로 서강에 이르기까지 집들이 거의 서로 이어져 있었다. 한양으로 천도한 후 나날이 조락하고 쇠미해져 임진 이후에는 십중팔구는 줄더니 병자 이후에는 거의 남은 집이 없다. 평상시 중부를 2만여 호로 일컬었는데 지금은 4부 7면을 통틀어 겨우 1,200호이고, 그중 여자 혼자 사는 집이 380호이다.개성부 사람들은 장사로 업을 삼고 본전이 없으면 다른 사람에게서 대출 받아 그 본전을 돌려주고 이식을 취한다. 이식을 보면 맨손으로도 부를 이루고 이식을 이루지 못하면 밭과 집을 다 팔아 갚으니, 이 때문에 송사의 발단이 모두 빛 독촉하는 데서 생겨났다.정월 1일 여자아이들은 축국놀이를 하고 남자들은 투석전을 하였는데, 죽거나 다치는 것은 묻지 않았다. 이는 바로 고려의 유풍으로 투석전은 마땅히 금해야 할 바이다.15일에 남녀가 각기 횃불을 들고 높은 산에 올라 달을 바라보며 한해의 복을 기원하고 또한 달이 나오는 것이 이르고, 늦고, 높이 뜨고, 낮게 뜨는 것을 보고 한해의 풍흉을 징험하였다. 이는 곧 팔도가 똑같지만 횃불을 들고 복을 구하는 것은 이 고장에만 있는 일이다.4월 8일 관등이 가장 성했다. 아이들은 종이를 잘라 등각을 만들어 긴 장대 위에 걸어 높이 길게 말을 하며 슬피 호소하는 것이 다른 고장과 다른 것은 아마도 그 남은 풍습인 듯하다.12월 하순 뭇 맹인들이 나뉘어 무리 지어 밤을 타 북을 치며 두루 돌아다니기를 이르지 않는 곳 없었고, 쌀과 곡식을 구걸하며 새해 복을 송축하였는데 섣달 그름이 되어서야 그쳤다.고려 때에는 불교에 아첨하여 부모의 기일에도 중을 불러 불경을 외고, 반찬은 채소로 하였으니 이를 승재라 하였고, 아버지를 "고불"이라 불렀다.이곳의 여인들은 정결로 스스로를 지킨 이가 많았기에, 여염이나 천민이라 하더라도 개가하는 것을 부끄러워했고, 드나들 때에는 반드시 대로 만든 갓을 썼는데 손으로 쥐고 끈을 달지 않았다. 마땅히 피해야할 사람이 있으면 갓을 기울여 얼굴을 가렸으며 서로 대화를 나눌 때에는 '댁'이라고 칭하였다. 머리에는 기름을 바르지 않았고 얼굴에는 지분을 바르지 않아 질박하여 꾸미지 않은 것이 아름답게 여길 만 하였다. 정절 또한 기특하여 이 때문에 여자 혼자 사는 집이 많았다.서리는 양가의 자제를 가려 뽑아 삼았는데 6방으로 나누되 호장은 없었고 두건과 복장은 경리와 같았다. 관례를 치르지 않은 관리들은 아리라 하였고, 통인이나 공생이란 이름은 없었다. 조예는 역이 부과되지 않았고 한정과 그 외 다른 노비들은 역이 할당되었다. 이예는 보솔이 있었다.4부에는 총관을 두었는데 백성들 가운데 글을 아는 자로 삼았다. 그 아래 서원을 두었고, 7면에는 권농과 감고를 두었다. 강변에는 관령 한 사람을 두어 어염과 노젓는 역을 주관하였다. 대동 유사 2사람을 가려 정하고 백성의 재산의 빈부로써 그 순서를 정하여 18등급으로 하였다. 달마다 호를 세어 쌀을 거두었고 백역에 대해서는 공가로부터 그 값을 쳐주었다. 사신에 제공되는 것은 부사를 설치하여 부사 안에서 사창 대동창에서 받게 하니 백성들이 매우 편히 여겼다. 유생과 관속들은 이중에 들어있지 않았다.기병과 보병이 242호인데 일·월·영·칙 4자로 군대를 통솔하였다. 기병은 제립을 헤아려 자론과 청교에서 파발이 되고 나머지는 상번이하고, 10월이면 뱅어를 진상한다. 설탕, 메밀, 여뀌꽃, 산자 등은 모두 이곳에서 만든 것으로 나라 안에서 명성이 자자하다.개성부는 비록 외방에 있지만 관직을 두고 나누어 놓은 것이 서울의 아문과 같다. 당상들은 관청에 나아가 청사를 함께 논의하였다. 관직은 녹봉이 있었으나, 집은 스스로 생계를 유지했으니, 주군에 관청의 공수전을 두었던 것과는 다르다. 사신이 갈 때에는 다만 음식으로 대접할 뿐이었다. 부사를 맞이하고 보내는 예에서 백성들은 부관들에 대해서나 성주나 화민의 칭호는 없었다. 시대가 지날수록 풍속이 말단으로 흘러 아첨하는 기풍이 습관이 되었다. 명종 말년 한 문사가 처음으로 성주라고 불렀는데, 이에 잘못된 예가 시작되었다. 또한 성석린 이래로 이름나고 가문 좋은 공경들이 유수가 되어 은택이 사람에게 미쳐 끝내 잊혀지지 않을 자들이 많더라도 그들이 덕을 칭송하는 비를 세웠던 일은 없었는데 선조 초년에 심수경이 비를 세우자 이로부터 그 후로는 잇달아 비를 늘어 세웠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돌덩이를 선생안으로 삼는다"라 하니 비웃는 말이다.나라 초기에 부관들의 임무는 매우 중요했다. 성석린은 삼판부사였지만 끝내는 영의정이 되었다. 아울러 주공과 같은 성인으로서 오히려 낙읍의 가르침을 부지런히 하였으니 하물며 다른 사람에 있어서이랴, 비록 국초의 어려움만 같지는 않지만 어찌 신중히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선생안은 옛 아전들의 기억에서부터 나와 기록함에 빠진 것이 많고 그 순서 역시 문란하지만 일단 옛 안에 의거하여 기록한다. 이것은 사간원의 제명과 같다. 후세의 사람들이 장차 이를 지적해서 일컫기를 "아무는 어질며, 아무는 현명하고, 아무는 어리석으며, 아무는 바르고, 아무는 사악하며, 아무는 탐욕스럽다"라 할 것이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이 내용에는 앞의 문헌과는 달리 거의 직접 관찰한 내용을 중심으로 풍속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풍속의 내용 가운데에서 매월의 세시풍속을 적은 책으로는 첫 문헌인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있다.
    인문/어학| 2001.12.13| 7페이지| 1,000원| 조회(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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