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1.난중일기를 통해본 임진왜란과 이순신-잘못 알고 있는 진실 파악2.난중잡록에서의 이순신3.선조실록4.선조수정실록-다시 쓰여진 이순신이식의「시장(諡狀)」5.이충무공전서-영웅이된 이순신6.박정희 정권 시대의 이순신-성웅화된 이순신맺음말머리말이순신, 그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어렸을 때 누구나 한번쯤은 이순신 위인전을 읽었을 것이고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 라는 말은 국민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다. 이순신은 임진왜란 때 오직 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충성심으로 전쟁에 임하였고 극적으로 나라를 살린 민족영웅으로 알고 있다. 이러한 사실이 이순신의 전부인 듯 그를 결점이나 약점 따위도 없는 완벽한 성인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이순신을 말할 수 있을까? 지금 TV에서 이순신에 대한 드라마를 방영하고 있다. 원균에 대한 재평가를 한다고는 하지만 이순신에 대한 영웅화는 여전히 심화된 듯 하다.한나라에서 영웅이 탄생되기 까지는 장기간 여론의 검증을 거친다. 여론의 검증이란 국가가 지향하는 정책 목표와 국민의 소망이 합해져 영웅을 결정하게 되는 절차를 말한다. 국민 여론의 검증을 받아 결정된 영웅은 국가가 위급한 상황에 처해 있을 때 국민을 단결시키고 이를 대처 할 수 있는 지혜의 원동력이 된다.) 이러한 절차를 밟아 탄생된 영웅이 바로 이순신이다. 나는 이 과제를 통해 이순신의 평가가 시대별로 어떻게 이루어 졌으며 우리는 그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한다. 아무런 비판의식 없이 이순신을 진정한 영웅으로 받아 들여도 되는지에 대한 의심을 가지고 본 과제를 서술해 나가도록 하겠다.1.난중일기를 통해본 임진왜란과 이순신①경상우수사 원균vs전라좌수사 이순신원균은 북변 국경지역인 조산만호로 있으면서 여진족 토벌에 큰 공을 세웠으며 오랑캐의 본거지인 시전부락을 공격하여 크게 용맹을 떨쳤다. 그런데 임진년, 왜병의 침입이 급박해 지자 조정은 원균을 북쪽 국경지대에서 남쪽 바다인 경상우수영에 급작스럽게 배치를 시켰다. 불전의 전공장계를 이순신이 혼자 올린 이후로, 그와 원균의 사이는 벌어지기 시작한다. 그것은 비단 둘만의 대립이 아닌 휘하 장령들의 사이 역시 벌어지게 만든다. 이순신은 그 장계로 인하여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고, 그 휘하장령들 역시 많은 이들이 당상관에 승품한 반면 경상우수영의 장령 중 당상관이 된 자는 겨우 두 사람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원균을 도와 혁혁한 공훈을 세운 이운용과 우치적등이 신통한 포상을 받지 못하여 크게 물의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들이 이순신에게 반발했음은 당연한 것이다.※1593년 2월 22일발포의 두배와 길포의 두 배가 명령을 하지도 않았는데 돌입하다가 그만 앝은 곳에 얹혀(좌초)) 적에게 습격 받 은 것은 참으로 통분하여 가슴이 찢어질 것 같다. 우후가 곧장 달려가 구해냈다. 경상좌위장과 우부장은 보고도 못 본체하고 끝내 구하지 않았으니, 그 괘씸함을 이루 표현할 길이 없다. 참으로 통분하다. 오늘의 통분함을 어 찌 다 말하랴. 모두 경상 우수사(원균)의 탓이다.※1593년 2월 23일경상우수사 원균이 와서 봤다. 그 음흉함을 이를 길이 없다.※1593년 2월 28일경상수사 원균의 군관의배와 가덕첨사의 사후선(척후선)등 두 척이 섬에서 들락날락하는데 그 짓거리가 황당했 다. 두 배를 붙잡아 매어 경상수사 원균에게 보냈던 바, 수사(원균)이 크게 성을 냈다고 한다. 알고 보니 그 본의 는 군관을 보내어 어부들의 목을 찾고 있었던 까닭이었다.※1593년 3월 2일이영남?이여념이 와서 원균의 비리)를 들으니, 실로 한탄스럽기 짝이 없다.※1593년 5월 14일영남우수사 원균이 나타나서 술주정을 부리니 배 안의 모든 장병들이 분개 하지 않는 이가 없다. 그럴 듯이 속이는 것을 말할 수가 없다.※1593년 5월 30일남해현령 기효근의 배가 내 배 곁에 대었는데, 그 배 안에 어린 색시를 태우고 남이 알까봐 두려워한다. 가소롭 다. 나라가 위급한 때를 맞았는데도 미인을 태우고 놀아나니 그 마음 씀씀이야 무엇이라고 말로 표현할 수가 없 해 볼 때 이미 수전에서 승전의 가망이 없게 되자 남은 방정들을 이끌고 일단 육지로 올라가서 그곳에서 육전을 시도 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는 지난날 그 수많은 해전에서 죽음 따위는 안중에도 두지 않던 용장이었다. 그가 칠천량 바다 기슭에서 최후를 마친 것은 불가항력이었지 결코 오늘의 통설처럼 구차스러이 도망가다가 적의 칼에 맞아 죽은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영의정 이덕형이 이순신과 원균의 공적을 조사하기 위해 현지인 남방에 내려가서 보고한 자료)를 보아도 현지인의 말처럼 원균은 구차하게 도망간 졸장은 아니었던 것 같다.⑥이순신의 죽음이순신의 죽음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의문이 제기되어 왔으며, 또 비교적 넓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이순신의 죽음이 통상적 의미의 전사가 아니라, 스스로 계획하여 택한 죽음이 아니겠느냐는 의문이었다. 거기에는 그때 그가 죽지 않았더라면 어차피 또다시 잡혀가서 김덕령)의 경우처럼 억울하고 욕되게 죽음을 당했으리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다시 말해 이순신이 전쟁에서 공이 커 이를 시기하는 자들에 의해 전쟁 후에도 자신의 목숨이 온전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직감하고, 일부러 마지막 전투였던 노량해전에서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이다. 난중일기에서 이순신 스스로가 죽고 싶다고 쓴 부분과 유성룡의 징비록에서 이순신이 갑옷을 입지 않고 싸웠다는 부분 등이 이 설을 뒷받침 하고 있다. 하지만 이순신과 함께 배에 타고 있던 맏아들 회, 조차 완, 군관인 송희립, 몽종인 김이 등이 어찌하여 이순신의 자살을 막지 않고 방관한 것일까? 그들은 이순신의 죽음을 방관하지 않고 오히려 살아서 은둔하기를 권하였을 것이다. 또 이순신 으로서도 이러한 권유를 거절할 수 있는 명분이 없었을 것이다. 이상의 이유 때문에 이순신의 자살 설은 모두 타당성이 없다고 생각된다. 그의 죽음이 통상적 의미의 전사가 아니라면, 그는 실제로는 죽지 않고 살아서 은둔 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이순신의 은둔 설은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죽은 것으으로 보아야 마땅할 것이다.3.선조실록①옥포 해전후※선조실록 27년 4월 23일경상우수사 원균은 전후 누차에 걸쳐 노획한 병기를 보내오더니 이번에 또다시 대소 조총 70여 자루를 보내왔 구나. 이로 미루어 볼 때 그 전공을 가히 알 수 있다.※선조실록 27년 11월 12일소신(정탁)이 남방에 가서 들어 보니 왜적들은 우리 수군을 심히 두렵게 여긴다 하오이다. 원균으로 말하면 사졸 들도 그를 잘 따르는 가장 훌륭한 장수이며, 이순신 또한 예사로운 장수가 아니더이다.※선조실록 36년 6월26일원균의 공은 이순신과 다를 바 없다. 그가 잡은 바 있는 적장의 큰 전선이 도리어 순신에게 빼앗겼다.원균에 관한 이러한 기록을 볼 때 원균은 이순신의 말처럼 비겁하고 포악하기만 한 졸장은 아니었던 것 같다. 원균은 이순신 못지않게 해전에 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전공은 지금까지도 이순신의 것이 되었다.②이순신의 하옥과 원균‘이순신은 나라를 위해 목숨 바쳐 싸웠지만, 원균의 모함과 시기에 선조30년(1957) 1월27일 통제사 자리에서 파직을 당하고 원균이 그 자리를 꿰찬다. 또한 조정의 무능함으로 이순신은 옥살이를 하게 되지만 원균이 칠천량 패전에서 비겁한 죽음을 당한 후, 다시 통재사에 복귀되어 위험에 빠진 나라를 살린다.’이것이 바로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원균의 모함과 시기는 무엇이며 조정의 무능함은 무엇인가? 조정은 단순히 그들의 무능함 만으로, 통제사를 옥살이까지 시킬 수 있었을까? 정당한 어떤 이유는 없었을까?먼저 이순신이 하옥되면서 내려진 네 가지 죄목에 대해 알아보겠다.그 첫 번째가 ‘남의 공을 빼앗은 죄’이다. 이는 앞에서 언급했던 옥포해전후 승전장계를 이순신이 단독으로 올린 것을 말한다. 이 장계는 선조25년(1592)5월10일에 작성되었으며) 그해 6월 을유일에 행조에 도달했다. 뒤늦게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원균은 따로 장계를 올렸으나 그 내용은 지금 전하지 않고 있다.두 번째 ‘남을 모함한 죄’이다. 이 역시 원균과 연관되는 것인데,하였으니, 이처럼 사람을 감복시킬 수 있었던 것이 어찌 우연한 것이겠습니까?국왕만이 백성으로부터 추앙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관념에 사로 잡혀있던 선조에게 ‘무지한 노약자에게까지 존경받는 이순신의 존재)는 선조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었다.선조는 당시 도체찰사였던 이덕형과 국방문제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원균을 다음과 같이 칭찬 하였다.※선조실록 34년 1월 丙辰원균이 전쟁에서 패한 후로 사람들이 그를 헐뜯고 있으나, 나는 원균이 용감하고 슬기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는 누가 한 가지 일을 잘하면 모두 그를 칭찬하고, 한 가지 일을 잘못하면 모두가 그를 비난한다. 원래 영웅은 성패를 갖고 논 할 수 없다. 원균은 내가 만나 보지는 못했지만, 당초 임진년에 이순신과 마음을 함께하 여 적을 칠 때 싸움이 벌어지면 반드시 앞장섰으니. 그가 용감히 싸웠던 것을 알 수 있다.이는 선조가 당시 상황에 비추어 어쩔 수 없이 원균을 칭찬 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이 글은 당시 원균의 기질을 잘 보여준다. 원균은 자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졸군이 아니라 용감한 무인이로서의 자질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에 대해 체찰사 이덕형은 ‘주위 여러 장수들이 모두 이순신의 막하여서 서로 의논하지 않아 원균의 세력이 고립되어 패했다고’하였다.4.선조수정실록『선조실록』에는 『선조수정실록』이란 것이 첨부 되어있다. 이것이 바로 이순신을 영웅화하고, 원균을 매도하는 역사의 원류가 되는 것이다. 임진?정유왜란이 종식 된지 45년이 지난 뒤인 인조 21년, 대제학 이식은 상소를 올려서 선조수정실록을 편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한 수정 실록은 그때까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는 상소문을 통해 ‘역사는 만세의 귀감’ ‘불공한 역사는 역사가 아니다’ ‘무망의 기록을 고쳐야 한다’ 는 등의 표현을 쓰면서 전대 사관들이 기록한 『선조실록』을 통렬히 비난하고 있다. 그러면서 조선왕조가 개국된 이후부터 엄격히 제도화되어오던 사초에 의한 역사편찬제도에 대하여, 그는 사초 없는 수정역사를 만들고삼았다”
페미니즘 역사의 재구성:가족과 성욕을 둘러싼 쟁점들국사학과200120084이선정2005.6.1서양 근현대사여러 가지 이름이 붙을 수 있겠지만, 20세기는 확실히 ‘페미니즘의 시대’였다.) 더군다나 21세기에 들어서 우리는 페미니즘이란 단어와 페미니스트들의 활동을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페미니즘이란 단어를 알까? 단어는 알더라도 페미니즘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 알까?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페미니즘의 일을 하면서도 그 일이 페미니즘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 조차 모른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을 접했을 때 나 또한 정확히 페미니즘이 무엇을 말하고 그 것이 어디서부터 일어났는지 알고 싶어졌다. 그래서 이 책을 선정해 읽은 것이다. 책을 빌리기 전 제목만 봤을 때는 재미있는 내용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했었다. 하지만 막상 책을 읽기 시작하니 그런 생각은 사라졌다. 페미니즘의 역사를 재구성 한다는 제목에서 보이듯 이 책은 페미니즘의 역사를 시대 순으로 정리하면서 그 시대에 따라 페미니즘이 어떻게 변해 갔는지를 말해 주고 있다. 그리고 그 밖에 우리가 알고 있는 페미니즘 문제를 다루고 있다. 형식은 논문을 실어 놓은 것이라 읽기 쉽지 않고 페미니즘이 서양의 역사에서 나온 것인지라 그 내용 또한 어렵고 전문적이다.책을 읽기 전 페미니즘의 뜻을 사전에서 찾아보았다. 이는 여성억압의 원인과 상태를 기술하고 여성해방을 궁극적 목표로 하는 운동 또는 그 이론)을 말하는 것으로 다시 말해 여성의 사회적·정치적·법률적인 모든 권리의 확장을 주장하는 주의 즉, 여권주의를 말한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페미니스트는 여권 신장 운동을 하는 사람들로 남성까지도 포함한다고 한다. 현재의 페미니즘 운동은 ‘공격적 페미니즘’이 일반적으로 페미니즘 이라는 이름을 달고 통용되고 있다. 즉 여성이란 존재를 남성과 적대적 관계에 놓으려는 것이 페미니즘 이라는 인식 중에 사회에서 통용되고 있는 것이다. 페미니즘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없는 일반 사람들은 다들 이렇게 생각 할 것이다. 하지만 페미니즘은 이런 공격적 페미니즘에 한정되어 있지는 않다. 자유주의, 사회주의, 동성애, 정신분석학, 실존주의, 생태 등등 페미니즘에도 여러 분파가 존재한다.이 책은 과천 연구실)에서 편찬한 것으로 총 다섯 편의 논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 는 페미니즘의 역사를 개관하는 형식으로 프랑스 혁명기의 여성들이 이후 영국의 차티스트 운동과 미국의 노예폐지운동에 이르기까지 여성운동을 이야기 하면서 처음 나타난 자유주의 페미니즘과 사회주의 ? 마르크스주의 ? 아나키즘의 페미니즘, 급진주의 페미니즘까지의 역사를 개괄하고 있다.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테일러와 밀을 사상적 토대로 하고 있다.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는 개인의 "자유"원리에 입각하여 여성과 남성, 즉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태어났다는 데 있다. 그러므로 이들은 여성과 남성, 즉 모든 사람의 능력차이라는 것은 문화적 학습에서 결과한다고 믿는다.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은 남녀 모두가 스스로 자유를 만끽 할 수 있는 시민권을 소유하고 있으며, 어떤 이유에서든지 사회가 이러한 개인적 자유를 막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의 궁극적 목표는 평등한 사회를 구현하는 것에 있기 때문에 남녀 모두가 법률에 저촉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선택의 자유권이 보장되기를 원한다.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은 자유주의적 페미니즘을 비판하면서 사적 소유가 존재하는 한 참된 기회균등은 이루어질 수 없다고 한다. F.엥겔스는 여성억압이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로부터 시작되었으며 자본주의가 바로 여성억압의 근원이라고 주장한다.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의 핵심은 가족이 여성억압의 기초 기제이며, 이 억압적인 가족 구조는 오직 사회변혁을 통해서만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들은 재산관계의 구조가 아니라 진실한 애정에 바탕을 둔 일부일처제를 이상적인 가족관계로 규정하였다. 여성문제를 계급문제의 하위문제로 생각하였다는 점에서 이 입장이 여성문제를 다소 경시하고 잇다는 한계점을 지적 할 수 있다. 즉 이들은 성 억압이란 계급억압 속에서 야기되는 것으로 간주하면서 계급해방을 통해서 성해방을 찾고자하였다.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1950년대와 60년대 미국의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자신들의 미래를 새롭게 형성하려는 의식에서 태동하였다.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은 남성이 하나의 계급으로서 여성을 지배하고 억압하는 사회구조에 관심을 둔다. 이들은 사회를 성적으로 계급화 된 억압구조라고 본다. 특히 사회내의 그 어떤 차별보다도 바로 성차별과 그 억압에 주목한다. 급진주의 페미니즘이 말하는 여성억압자란 바로 남성인 것이다. 또 다른 분파로 사회주의 페미니즘을 들 수 있는데 이는 따로 설명은 되어 있지 않지만 책의 뒷부분에 나와 있어서 정리해보았다.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1970년대에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들에 대한 반발로 제기되었다.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성문제에 무관심했고 또 오직 성적 편견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급진주의자들은 지나치게 생물학적인 성에만 관심을 두고 가부장제를 심리적 문화적 상부구조로만 본다고 비판하였다. 사회주의 페미니즘에서 보는 여성문제란 바로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또한 이들은 여성문제를 만드는 주체를 남성과 자본가로 상정한다.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여성을 억압하는 것이 오직 계급사회의 구조만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계급관계(자본주의)와 남녀관계(가부장제)를 살펴봐야 여성억압 현상을 보다 정교하게 밝혀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두 번째 논문은 유토피아 사회주의 페미니즘으로 첫 번째 글에서 혁명기의 페미니즘 부분을 더욱 심도 있게 쓴 글이라고 보면 된다.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을 계기로 페미니즘이 일어나면서 유토피아 사회주의 페미니즘, 생시몽주의의 여성들 그리고 1848년 혁명이후 여성 권과 노동권의 분열을 다루고 있다. 통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1세대 페미니즘’, ‘2세대페미니즘’이라는 용어법은 1세대 페미니즘 이전의 페미니즘을 역사에서 삭제 했다. 유토피아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새로운 사회에 대한 전망을 근거로 여성해방과 노동자 해방을 결합시킴으로써 여성해방을 사회변혁운동의 중심목표로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이런 시도는 실패로 끝나고 이후의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분리주의적 전망을 갖게 되었다. 2세대 페미니즘 또한 자유주의 페미니즘을 기원으로 삼음으로써 유토피아 사회주의 페미니즘을 삭제 하였다. 하지만 이후 새로운 세대인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에 의해 이 잃어버린 전통은 복원되게 되었다. 이 글에서는 유토피아 사회주의 페미니즘을 ‘노동권’과 ‘여성권’의 종합으로 해석한다. 즉 유토피아 사회주의 페미니즘에서 시도되었던 노동권과 여성권의 결합은 역사적 페미니즘의 분리주의적 전망을 극복하고 여성운동이 사회운동으로 부활할 수 있는 출발점을 확인 시켜주는 것이다.세 번째 논문은 1세대 페미니즘을 다루고 있다. 1세대 페미니즘은 테일러와 밀을 사상적 토대로 하는 자유주의 페미니즘으로 대표되는데 이것은 1세대 페미니즘이 혁명적 시기에 분출된 요구들을 제도 개혁을 통해 순치 하려는 자유주의적 개혁과정에서 출발함을 의미 한다. 이 글은 1세대 페미니즘의 틀에서 억압되었던 자유결합과 새로운 성적 윤리라는 쟁점을 재발견함으로써, 부르주아 개혁주의를 초과하는 전망이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독자적인 운동으로 성장한 1세대 페미니즘이 여성과 가족의 문제에 대한 진정한 대안일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투표권을 중심으로 결집한 여성운동이 대중운동으로써의 활력을 사회주의 운동에서 찾았지만 분리주의를 극복할 수 없다고 말한다. 다음으로는 사회정화주의 페미니즘이 제기한 남성의 성적지배 대한 비판의 제한성을 말하고, 결혼개혁과 성 개혁에서 제기된 가족과 결혼에 대한 대안을 검토하고 있다. 마지막에서는 가족의 변혁과 새로운 성적 윤리를 제기함으로써 공산주의 공동체를 구성하려고 했던 콜론타이의 시도에 대해 쓰고 있다.네 번째 논문에서는 2세대 페미니즘을 이야기 하고 있다. 1968년을 전후로 한 사회운동의 전반적 고양 속에서 출현한 2세대 페미니즘은 1세대 페미니즘에 비해 다양한 흐름으로 분화되고 이념적으로나 실천적으로 더욱 정교해지는 양상을 보이면서 1세대 페미니즘의 무성적 여성성과는 현저한 대조를 보였다. 1세대 여성운동이 사회운동의 보편적 범주 속에서 남성들이 지닌 권리를 똑같이 대우받을 것을 강조하고, 평등, 균등, 보편성을 강조했던 시기라면, 2세대는 여성이 남성과 해부학적, 성적, 심리적 측변에서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에 착안하여 차이와 다양성을 강조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통합보다는 분리를, 객관적 인식보다는 주관적, 분리주의적 인식의 중요성을 강조 했던 시기이다. 이런 분리주의적 실천은 1세대 페미니즘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글은 먼저 2세대 페미니즘의 배경이 되었던 동반자적 가족형태의 위기와 성혁명의 이데올로기에 대해 말하고 가족의 위기와 성혁명이라는 조건 속에서 미국을 중심으로 출현한 2세대 페미니즘의 출발과 쇠퇴를 개관하면서 2세대 페미니즘 내에서 성욕을 둘러싼 쟁점을 검토 하고 있다. 그리고 2세대 페미니즘의 쟁점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성욕에 대한 사회주의 페미니스트의 접근의 함의와 한계를 살펴보면서 그 속에서 가족형태의 대안과 실현의 조건을 생각해 보고 있다. 하지만 여성해방과 성혁명의 결합을 시도했던 2세대 페미니즘은 결국 여성 억압의 현실적 토대인 역사적 가족형태에 대한 맹목으로 인해 반쪽짜리 페미니즘에 그치고 말았다.
서양 근현대사『민족주의는 반역이다』를 읽고국사학과 200120084이 선정우리는 현재 민족)이란 울타리 안에서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민족은 어느덧 우리의 삶속에 깊이 내재 되어 있다. 요즘 일본의 교과서 왜곡문제나 독도영토 분쟁문제에 대해 한국사람 이라면 누구나 할 것 없이 분개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많은 시위를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일본 전체가 주장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일본 전체에 대해 반일감정을 표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민족이란 개념 하에서 우리라는 관념에 사로 잡혀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반만년 유구한 역사의 단일민족’이라는 말을 자주 들어왔다. 이 말에 대해 아무런 비판 없이 수긍하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대다수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당연시 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과연 민족의 개념을 아무런 비판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가에 대해 의심을 해봐야 할 것이다. 민족이 우리가 알고 있듯이 반만년동안 지속되어왔던 개념인지 그리고 우리가 믿고 있는 단일민족이 정말 정당한 표현인지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이 책은 이러한 의문을 해결 해 주고 있다. 그와 더불어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진정한 민족주의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책의 부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저자는 ‘신화와 허무의 민족주의 담론을 넘어서’ 민족주의를 바라보고자 한다. 책의 제목만 보면 다소 도발적인 느낌이 들지만 책의 내용은 그리 도발적이거나 직접적이지 않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단일민족의 유구한 역사 속에서 뿌리 깊게 자리 잡은 민족에 대한 '신화적 이해' 혹은 '규범적 인식', 그리고 그로 인한 민족주의에 대한 무조건적이고도 맹신적인 집착에 대해 도전한다. 민족주의는 고정불변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을 만들어 가는 '운동'이라는 점을 부각시킴으로써 '민족주의는 더 이상 체제를 옹호하는 권력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건설을 기약하는 반역의 이데사를 재구성하였다. 기존의 민족주의 연구 방향이었던 ‘원초론’이나 ‘도구론’, ‘객관주의’나 ‘주관주의’ 등 민족주의의 고정관념을 넘어 변화무쌍한 행로를 밟아 온 민족주의의 궤적을 추적하고 있다. 나는 이전에 민족주의와 관련된 저서를 읽은 적이 있다. 민족주의가 무엇인가에 대해 공부 하면서 읽은 에르네스트 르낭의 「민족주의란 무엇인가」와 비교 했을 때 이 책은 르낭의 저서와는 확연히 다른 점을 가지고 있다. 르낭의 책은 민족을 기존 연구 방향의 하나인 ‘원초론’과 ‘도구론’의 방식 중 어느 것이 민족을 구성하는 중요 지표가 되는가에 대해 서술 하고 있다. 그는 그의 저술에서 민족을 객관적 지표에 따라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인 지표에 따라 구분될 수 있다고 역설하고 있다. 알자스-로렌지방을 예를 들어 민족의 구성은 단순한 언어, 지리등과 같은 객관적 지표가 아니라 그 지역의 사람들의 생각 즉 자신들이 프랑스 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지역민들의 사고가 우선이라는 것이다. 나는 르낭의 저서를 읽은 후 민족주의를 과연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을 했던 기억이 있다. 그 문제에 관해서는 답이 쉽게 내려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본 저서는 이러한 차원을 뛰어넘어 서술 하고 있다.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민족주의의 개념을 통해 우리가 믿고 있는 민족에 대한 관념을 타파 하려고 하는 것이다. 두 번째 논문인 ‘한국사 학계의 민족 이해에 대한 비판적 검토’는 한국사에 대한 민족주의적 해석의 문제를 검토한 글이다. 저자는 이 글에서 민족주의 사학이 민족적 형식을 강조한 나머지 민족을 초역사적인 자연적 실재로 전제함으로써 역사학을 신화의 영역으로 끌고 갔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그 결과 민족주의 사학은 식민지에 대한 저항이라는 측면과 함께 근대 민족국가를 표상하는 정치적 기능을 담당해 왔다는 점에서 사실상 정치권력과 동반자적 관계를 유지해 왔다고 말하고 있다. 즉, 민족주의는 순수한 민족주의의 역할을 한 것이 아니라 권력과 맞물려 각 시대마다 권력의 편에 서서 권력을 옹호해 왜, 어떻게 다른 이데올로기와 결합하느냐가 중요하다. 여기에서는 마르크스주의와 접목될 때 드러나는 갈등과 긴장의 양상을 사상적 관점에서 정리하고 있다. 첫 번째 논문인 ‘마르크스-엥겔스와 민족문제’에서는 민족문제를 이해하고 또 민족주의를 수용하거나 배척하는 마르크스주의의 기본 전제들을 마르크스와 엥겔스로 거슬러 올라가 점검 하고 있다. 두 번째 ‘마르크스의 제국주의론과 아일랜드 민족문제’는 1992년 미국의 한 좌파 잡지에 게재한 것을 재 수록한 글로 그 잡지에서 벌어진 님니와 르위, 트레버소간의 논쟁에 참여하는 형식으로 집필되어있다. 저자가 박사학위 논문에서 민족문제에 대한 마르크스의 논리가 3중의 구조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하였는데 이 3중의 구조를 이해하지 못한 채 추상적 차원의 분석에 치우친 님니가 경제 결정론 혹은 근본주의적 해석으로 흘렀다면, 현상 분석에만 관심을 기울인 트레버소와 르위의 주장은 정치적으로 기울었다는 것이 저자의 비판 핵심인 것이다. 세 번째 논문인 ‘로자 룩셈부르크와 민족문제’는 흔히 평가되는 것처럼 룩셈부르크가 민족 허무주의자는 아니었다는 점을 밝힌다. 또한 그녀가 제시한 자치론은 문화적 자치의 차원을 넘어서 정치, 경제, 사법, 문화 등을 포함하는 상당히 포괄적인 것이었으나 그녀의 전집에 누락되어 있고 외국에 번역되지 않은 탓에 서구 학계의 주목을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프롤레타리아 근본주의나 국제주의를 원칙적으로 견지 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임을 말한다. 이러한 사실은 그녀의 감수성을 무디게 만든 요인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민족주의적 동원 체제로 전락한 제3세계의 인민주의에 대한 소중한 비판을 제기한다는 점에 주목할 만하다. 마지막 논문인 ‘사회주의 민족 이론과 민족문제’는 소수 민족의 자유와 이해를 도모하면서도 궁극적으로는 국제주의적 공동체로의 통합을 지향했던 레닌의 고민이 현실 속에서 어떻게 왜곡되고 또 벽에 부딪쳤는가를 보여준다. 2부분에서는 마르크스와 엥겔스, 로자 룩셈부르크의 민족주의 이론의 한계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3부는 동유럽의 민족주의에 대한 세편의 글이 실려 있다. 첫 논문 ‘동유럽 민족운동의 구조와 논리’는 동유럽의 민족운동을 민족 과거에 대한 낭만적 이상화와 비합리성으로 무장한 반동적 운동으로 규정한 연구를 비판하면서, 민족주의를 관념의 힘으로서가 아니라 운동으로 파악했다. 두 번째 논문인 ‘동유럽 현실 사회주의의 체제 변혁과 반전’은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 이후 동유럽 사회가 겪고 있는 체제의 변화 과정을 역사적 맥락에서 고찰하였다. 마지막 논문 '폴란드 사회주의 운동사 연구의 변화 양상‘은 폴란드 사회주의 운동사의 모든 쟁점을 점검하는 형식이 아니라, 사회주의와 애국주의 혹은 국제주의와 민족주의적 해석이 빚는 미묘한 긴장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사회주의 운동사를 개관하고 있다. 폴란드 지역에서 상당 기간 연구하고 돌아온 저자의 경력답게 책의 상당 부분을 폴란드의 민족주의 및 사회주의 역사를 분석하는 데 할애하고 있다. 폴란드를 비롯한 동유럽의 민족주의가 사회주의 운동과 결합하고 떨어져나가는 과정이 어떻게 전개되었었는지, 그것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는지를 꽤 길게 서술하고 있지만 학술 적인 내용인지라 쉽게 이해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동유럽의 민족주의를 논하면서 우리의 민족주의와 동유럽의 민족주의를 어떻게 두고 봐야 할지에 대한 논의가 없어서 내용을 이해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는 아쉬운 점이 있다. 그래도 사회주의 정권 시절의 폴란드 역사학을 비판하면서 말했던, 정파의 이해관계에 따라 변하는 역사 해석에 대한 비판은 귀담아 들을만하다.마지막 4부에 해당하는 “에필로그”에는 두 편의 에세이를 담고 있다. ‘사회주의 거대 담론의 틈새 읽기’는 저자가 폴란드에 체류하면서 사회주의의 거대 담론과 민중의 일상적 삶 사이의 간격과 괴리의 체험을 바탕으로 사회주의 거대 담론의 수면 아래에서 민중의 일상적 삶을 관통하는 민족주의적 기제들을 ‘신문화사’)의 시각에서 정리한 것이다. 마지막 에세이인 ‘이념의 진보성과 삶의 보수성’은 같은 시각에서이름으로 노동을 동원하는 정치권력의 음험한 메커니즘)에 눈을 감고 심지어는 친화력을 느꼈다는데 있다고 지적한다.이 책은 단순히 민족주의에 관심이 있다고 해서 읽을 만한 책은 되지 못한다. 본서의 제목이 다른 민족주의를 다룬 책들과는 다를 것이란 생각이 들게 하는데 책의 내용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책을 읽다보면 다소 어려운 점을 발견 하곤 한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민족주의에 대해 반역이라는 명제를 달고 비판해나가기 때문에 쉽게 와 닿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논문들을 실어 놓은 책이라 대중적이지 않고 학술적이기 때문에 기본 지식이 있는 상태에서 읽는 것이 더 좋을 듯싶다. 책의 2부분과 3부분의 내용은 우리에게 다소 어려운 마르크스주의와 동유럽의 역사에서의 민족주의이기 때문에 한번 읽는다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1부분과 4부분은 좀 더 우리에게 친숙한 내용이 쓰여 있기 때문에 그보다는 쉽게 이해 할 수 있다. 이 책을 통해 가장 많이 생각한 부분은 바로 머리에는 진보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고 가슴에는 일상적인 보수성을 지니고 있다고 한 부분이었다. 아무래도 앞 부분의 글보다는 맨 마지막장의 에세이 형식이 쉽게 와 닿았던 것 같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1부분의 두 번째 논문인 한국사 학계의 민족에 대한 비판에 관한 글이다. 이는 역사학을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 여도 한국 사람이라면 충분히 관심을 표할만한 소재를 취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식민지라는 비정상적인 상황 속에서 식민지 국가는 '적'이고 민족은 '우리'라는 개념의 쌍이 탄생한다. 해방 후 분단 상황은 민족의 신화적 마력이 더욱 강화되어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로서 국민들에게 부과된 무조건적 명령이자 사회적 규범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배태된 한국의 민족주의는 자연스레 우리에게 관념적이고 신화적인 존재로 자리매김 하게 되었다. 민족이 무엇인지, 민족주의가 무엇인지 정확히 인식하지도 못한 채 어느새 민족이란 말에 감화되어 배타적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배타적 민족주의가 만연다.
서양 근현대사냉전체제의 등장과 전개1.들어가는 말우리는 현재 세계화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이 세계화란 말은 세계가 하나라는 의미로 통용된다. 그리고 또한 우리는 전환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말을 흔히 듣는다. 전환이 시대라는 말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산업사회가 탈 산업사회로 전환하였고 문화적 측면에서도 모더니즘의 시대가 지나고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가 이미 도래 했다. 그러나 국제정치 측면에서 전환의 시대는 냉정의 시대가 끝나고 세계는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새로운 시대를 우리는 탈냉전기라고 부른다. 탈냉전 기는 과도적인 시대이며 냉전 이후의 시대가 앞으로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날 것인지 누구도 정확히 예측할 수 없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또 탈냉전기가 무엇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국제정치를 50년 이상 규정해온 냉전이 무엇인가를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냉전이라는 용어는 미국의 평론가 W.리프먼이 저술한 (1947)이라는 논문에서 비롯되었고, 미국의 재정전문가이며 대통령의 고문이었던 버나드 바루크가 1947년 의회토론에서 이 용어를 처음 사용하였다. 냉전은 말 그대로 ‘찬 전쟁(cold war)’, 다시 말해서 실제적 전투행위가 없는 전쟁의 상태를 의미한다. 즉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자유진영과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공산진영 간에 형성된 50여 년 간의 갈등 상황으로 설명될 수 있다. 냉전은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간의 이념갈등의 성격을 가지며 세계가 미국과 소련이라는 양대 강대국을 중심으로 나뉘어 작동하는 양극체제)로 특징지을 수 있다.이 글에서 냉전체제가 등장하게 된 전후의 국제정치 환경을 이해하여 냉전의 등장배경을 설명하고 냉전이 유럽과 아시아에서 어떻게 성립하고 전개 되었는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냉전체제의 특징을 이념?체제적 측면, 군사적 측면 그리고 사회?문화적 측면의 고찰을 통해 국제적 냉전체제의 본질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2.냉전체 내에서 소련에 대한 대외정책의 방향에 대해 여러 가지 의견이 주장되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미국과 소련은 국제 문제에 있어서 정면으로 충돌하는 사건들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독일 분할점령문제, 폴란드 문제에 대한 얄타협정의 해석을 둘러싼 견해 차이, 이란에서의 소련 군 철수 문제 등 두 강대국 간의 중요한 이해관계가 걸린 사항들에 있어서 잦은 마찰을 빗게 되었고 양국의 관계는 틀어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국제정세는 미국 외교관들로 하여금 소련의 침략적 팽창정책을 우려하고 경계하는 보고를 하게 만들었다. 1946년 여름 트루먼 대통령은 그의 특별보좌관 클리포드에게 미?소 관계 보고서를 만들어 제출할 것을 명령하고, 클리포드는 10만자에 달하는 극비 문서인 「미?소 관계(American Relations with the Soviet Union)」를 작성하여 1946년 9월 24일 트루먼 대통령에게 제출하였다. 그는 이 보고서에서 “소련은 자본주의 국가를 궁극적으로 파괴시켜 모든 국가를 공산화시키려 할 것이므로 미국은 소련의 침략행위와 팽창정책을 저지하기 위해 군사력을 강화해야 하며, 미국은 모든 약소국을 보호하고 원조하는 것을 주요 정책으로 삼고, 소련의 위협으로부터 모든 국가를 보호하기 위해 세계경찰국가의 임무를 담당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었다. 또한, 모스크바 주재 외교관이었던 조지 케넌은 본국에 보낸 전문을 통해 소련이 역사적으로 가지고 있는 팽창주의적 성향을 경고하고 미국이 소련의 팽창에 대비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 전문은 1947년 7월 미국의 저명한 시사지 《포린 어페어스(Foreign Affairs)》에 'X'라는 필명으로 「소련 행동의 기원」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는데, 여기서 케넌은 “소련 공산당과 그의 정부는 소련 밖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소련의 내적 필요에 의해 해석하고 있다. 마르크스의 도그마는 불안전의 요인이다.”라고 소련을 평가했다. 케넌과 클리포드의 대소련 정책에 관한 보고서는 미국의 냉전기 외교정판단되었다. 유럽의 상황이 악화되기 전에 미국이 유럽에 대한 종합적인 경제원조 계획을 전개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마침내 1947년 6월 5일 국무장관 조지 마샬은 하버드대학 졸업식 연설에서 유럽의 “매우 심각한 경제적, 사회적 그리고 정치적 혼란 상태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유럽에 “자유로운 제도들이 존재할 수 있는 정치적?사회적 상황의 조성을 위한 경제의 부흥”을 촉진하여 한다고 제의했다. 미 의회는 유럽부흥계획의 첫 해분으로 40억 달러의 지출을 승인했으면 1952년까지 총액 120억 달러의 원조가 이루어졌다.마샬 플랜은 성공적인 경제원조였고, 그것은 서유럽의 공업 생산과 투자유발에 공헌했으며, 서유럽 경제의 정상화를 가져왔다. 물론, 마샬 플랜 서유럽의 경제회복에 크게 기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미국의 경제에도 도움이 되었다. 마샬 플랜은 서유럽이 미국 상품을 대량으로 주문하고 구매하는 결과를 낳았고, 이에 따라 서유럽에 대한 미국의 무역과 투자 역시 크게 늘어났다. 그러나 마샬 플랜은 순기능 못지않게 역기능도 있었다. 유럽은 미국의 경제 원조에 의존하게 됨으로써 정치적 약점을 갖게 되어 정책 선택의 제약 받게 되었고, 이후 마샬 플랜의 경제원조가 군사원조로 변질되면서 동서진영의 대립을 가져와 유럽의 분단을 고착화시켰다.3)소련 봉쇄정책1947년 7월 《포린 어페어스(Foreign Affairs)》에 조지 케넌이 작성한「소련 행동의 기원」에는 “미국의 소련에 대한 정책은 소련의 팽창주의 경향에 대하여 장기적이고 인내심 있는, 그러나 강력하고 결코 방심하지 않는 봉쇄정책이어야 한다.”는 미국의 대소 봉쇄정책의 기조가 담겨져 있다. 케넌의 봉쇄정책 논리는 전후 미국 외교정책의 기본 토대가 되었고 마샬 플랜을 비롯해 북대서양조약기구의 창설, 한국전쟁 개입. 아이젠하워 독트린, 월남전 개입 등으로 이어지는 미국 외교정책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적용되었다. 봉쇄정책의 요지는 만약 소련이 그의 영역이 아닌 다른 지역, 예를 들어, 그리스, 터키, 서베를린 등에 진출해] NATO조약내용中 -이 조약에 참가한 국가는 미국, 영국, 프랑스, 벨기에, 네델란드, 룩셈부르크, 덴마크, 아이슬랜드, 이탈리아, 노르웨이, 포루투갈, 캐나다 등 12개국이다.이 조약은 소련이 베를린을 봉쇄한 상황에서 체결된 것으로, 만약 소련과의 전쟁이 일어난다면 유럽 국가들이 미국에 대해 원조해줄 것을 의미하는 군사조약이었다.그러나 나토 창설의 의미는 이제 미국이 유럽에 대해 경제적인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군사적인 측면에서도 유럽을 지배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2)아시아에서의 냉전체제 성립과 전개과정냉전의 세계사적 전개는 유럽에서 동아시아로, 그리고 다시 한반도로 이어져 끝내는 한반도 전쟁으로 터지고 말았다. 이런 맥락에서 전후 동아시아, 특히 일본과 중국문제는 한반도 전쟁과 관련되지 않을 수 없다. 미국과 소련의 경쟁과 갈등이 발화점을 향해 타오르다 한반도에서 내부적인 요인들과 복합적으로 작용해 결국 전쟁으로 폭발한 것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1)일본 문제소련은 유럽에서 독일의 산업화와 재무장을 가장 큰 위협요인으로 본 것처럼 동북아시아에서 일본의 부흥과 재무장을 가장 경계했다. 소련은 1905년 러?일 전쟁에서 패배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일본을 매우 위협적인 존재로 인식했다. 소련은 일본을 크게 경계했지만, 일본 문제 처리에 개입할 역가 별로 없었다. 소련이 유럽에서 독일을 제압하는데 상당한 역할을 했지만, 아시아에서 일본을 물리치는 데는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 얄타회담에서 소련은 일본의 쿠릴 열도와 사할린 섬 남부를 얻게 되었지만 그 이상의 발언권을 갖지 못했다.전후 미국은 일본을 통치했을 뿐만 아니라 적국이었던 일본을 자신들의 동맹국으로 만들어 버렸다.2)중국 문제트루먼은 중국이 미국의 동맹국으로 유지되길 원했다. 중국 내전당시 미국은 중국의 국민당 정부에 경제?군사 원조를 계속 제공했다. 그러나 소련은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에서 공산당을 도와줄 의도가 별로 없었다. 오히려 국민당의 장개석과의 관계를 강화하려고 했다. 심지어 미국과 소련진영의 갈등은 단순한 국가간의 이해관계의 갈등이 아니라 사회체제상의 차이, 이념간의 대결이었기 때문에 그 차이는 더욱 해소되기 어렵고 뿌리가 깊은 것이었다. 그리고 미국과 소련은 더 많은 국가를 자신들의 영향력의 범위 아래 두기 위하 마샬 플랜, 봉쇄정책, 공산위성 국가 수립 등의 군사적?경제적 원조, 군사적 실력행사나 전복활동을 펼쳤다.2)군사적 특징냉전체제를 특징짓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미?소간의 군비경쟁이다. 양 진영은 끊임없이 군비경쟁을 강화해왔다. 미국과 소련의 군사비 지출은 서방 및 중국, 일본에 비해 양적 면에서 압도했고, 지출액도 냉전의 심화에 따라 크게 증강되었다.1949년 소련의 독자적인 원자폭탄 제조와 실험 성공에 따라 핵무기 시대가 도래 했지만, 냉전 초기 양국은 핵무기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방법보다는 육?해?공 전력을 증대시키는데 역점을 두었다. 실제로 1950~1953년 중 미국의 지상군 규모는 3배로 커졌고, 나토는 공군력에도 엄청난 군사비를 지출하여 1953년에는 약 5,200대의 항공기를 보유하게 되었다. 소련 또한 스탈린 사망 후 주코프가 대대적인 군대개편에 착수하여 단위부대들을 보다 기동성 있고 치밀하고 강력한 부대로 개편하고 대포를 미사일로 대체하는 등 소련군의 공격작전 능력을 증강시켰으며, 방위예산의 대부분을 방어적?공격적 공군력 증가에 투입했다.동?서간의 군비경쟁은 특히 해상에서 그 경쟁이 극명하게 나타났다. 2차 대전에서 각광받는 전투세력으로 인정받았던 해군은 1945년 이후 군사비 삭감과 국방부 통합으로 인해 압력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에서 육?해?공 합동 상륙작전과 항공모함을 기지로 한 공습작전의 재등장으로 서방의 해군력의 민첩한 활용에 대한 재평가 이루어지면서, 해군력의 증강이 이루어졌다. 미국 해군은 거대한 신형 항공모함을 건조하고 핵무기를 적재한 공습폭격기를 보유하게 되고, 장거리 탄도미사일 발사능력을 갖춘 핵추진 잠수함의 건조를 추진하였다. 영국 또한 기동성이 뛰어난 특공 항공모함을 보유했
역사와 역사인식한국의 과거 청산-친일파 청산에 대해..제출일: 2005.6.9학과: 국사학과학번: 200120084제출자: 이 선정1.들어가는 말올해는 과거 청산을 둘러싼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진 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정권이 교체 되면서 과거사법이 상정되었고 얼마 전 과거사법이 통과되었으니 말이다. 과거사 청산의 문제는 일제시대, 박정희, 전두환 시대 등 그 폭은 한군데에 국한되어 있지는 않다. 하지만 우리가 현재 가장 시급한 문제는 일제시대의 과거 청산일 것이다. 교과서 왜곡 사건을 비롯하여 독도분쟁 등으로 인해 현재 한?일관계가 악화되고 있다. 몇 일전 베타경제 수역에서 조업하던 우리나라 어선이 일본경찰에게 잡혀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더 악화되어 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도 나왔었다. 이런 상황 하에서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명확히 하는 작업이 필요 할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일제시대의 과거를 청산해야 할 것인가 말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는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나라를 빼앗긴 채 살아가야만 했던 시대에 대한 과거의 철저한 반성 없이는, 다가올 미래도 우리에겐 절대 낙관적이지 않을 것이다. 역사가 진정 가치 있는 것은 과거를 통해 앞으로의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해주기 때문이다. 친일에 대한 기억은 들춰내기 너무나 아픈 기억이지만 한편으로는 분명하게 드러내고 반성하고, 책임져야할 일이다. 더군다나 친일파의 후손들이 당대는 물론 후대에까지 사회의 주류층으로 자리 잡고 있고, 일제에 몸과 정신을 팔아 얻은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대대로 물려받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이런 의미에서 이 글에서는 친일 청산에 대한 입장을 정리해보고 친일 청산에 대한 나의 생각을 정리 해보고자 한다.2. 과거 청산의 의미과거 청산이란 역사전환기의 사회정의에 관한 문제이다. 과거 청산이 훗날 새삼 논란되는 까닭은 사회발전과 역사변화에 따라 지난날의 과오를 청산해야할 당위적인 필요성이 증대되고 또 이를 처리할 수 있는 조건과 역량이 비로소 뒤고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은 것이 불행 중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또하나의 이유는 한·일 양국의 인종적 또는 문화적 뿌리가 같다는 점”이라며 “이 때문에 한국의 민족문화가 일제 식민통치 기간을 거치며 더 성장·발전·강화됐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그는 “일제 식민지배가 한국인의 성장·발전 의욕을 크게 자극해 한국인의 문명화에 크게 공헌했다”며 식민지배를 미화하는 일본 우파를 능가하는 주장을 폈다. 그는 특히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수준 이하의 좌파적 심성이 드러난 대표적 사례”로 꼽은 뒤, 사죄와 배상 요구는 “일본을 나락에 빠뜨리려고 하다가 오히려 먼저 떨어지는 사악하고 어리석은 일”이라고 주장해 피해 당사자과 관련 단체의 큰 반발이 예상된다. 그는 “전쟁 중에 군인들이 여성을 성적 위안물로 이용하는 것은 일본만이 아니며, 그것도 일시적이고 예외적 현상이었다”며 “그렇게 많은 수가 아니었는데도 그런 치욕을 받았다는 노파를 데리고 나와 과장된 사실을 내세우면서 몇 번이나 배상금을 요구하는 게 고상한 민족의 행동이라고 할 수 있느냐”고 비난했다. 한 교수는 “한국의 좌파세력이 적대시해 싸우는 상대는 한국 사회의 이른바 기득권층인 보수세력이며, 이들은 대부분 일제 치하에서 항일독립운동보다는 크든 작든 일본에 협력한 자들이었다”며 “이들을 모두 친일파로 추궁해 정치적으로 무능화시키고 좌파세력의 장기집권을 가능하게 하려는 것이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의 목적”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민족문제연구소(이사장 조문기)는 이날 ‘한승조 교수의 일제 찬양 망언과 광태를 강력 규탄한다’는 긴급논평을 내어 “삼일절이 며칠이나 지났다고 일제의 식민지배를 찬양하고 친일청산을 극렬히 반대하는 소리가 들리는가”라며 “제국주의의 침략과 전쟁을 찬양하고 극단적 가부장제와 맹목적 반공주의·파시즘의 논리로 무장한 그는 학자라기보다 21세기에 되살아난 친일 파시스트와 다름없다”고 비판했다.②친일파 김완섭 "독도 일본에 돌려줘라" 망언[고뉴스특별한 저항이 없었던 것은 바로 그러한 정치적 성격 때문”이었다고 강변했다.이 외에도 창씨개명 등 일본의 민족말살 정책에 대해 “일본인과 조선인의 차별, 구별, 격차를 없애 동등하게 하려 했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오 교수는 이전에도 ‘반일한국에는 미래가 없다’, ‘치맛바람’, ‘한일합방에의 길’ 등 일본을 찬양하고 한국을 비하하는 내용의 책을 꾸준히 출판해 왔다. 특히 ‘치맛바람’은 표절 논란에 대한 공방이 계속되고 있는 전여옥 한나라당 대변인의 저서 ‘일본은 없다’에도 등장한다. 전여옥 대변인은 이 책의 ‘오선화라는 한국여자’라는 챕터에서 아사히 TV에 나온 오 교수를 본 후 느낀 점과 이후 그가 저술했다는 ‘치맛바람’이라는 책을 본 뒤의 소감을 상세히 나열했다. 전 대변인이 자신의 글을 도용했다고 주장하는 재일 르포작가 유재순 씨는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일본에서 한국을 매도해 유명인이 된 오선화라는 여자의 베스트셀러 ‘치맛바람’을 알고 보니 5명의 일본인이 나눠썼다는 점을 취재하게 됐는데 이를 전여옥 씨가 도용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일본 극우세력들은 오선화 같은 친일 한국인들을 이용, 자신들의 주장을 일본과 한국에 널리 알리려 하고 있다”며 “친일 한국인들은 일본 우익과 함께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④"위안부 80%, 몸팔이 생계 유지 창녀"[한국일보 2005-04-14 10:48]군사평론가인 지만원씨가 "최근 TV에서 보이는 위안부 할머니들이 지나치게 건강하다"면서 매주 수요 집회에 나가고 있는 할머니들이 진짜 위안부가 아닐 가능성을 제기해 파문이 일 것으로 보인다. 또 "종군위안부 가운데 '진짜 일본군위안부'를 가려내는 일이 얼머나 어렵겠느냐"면서 "(종군위안부들이) 대개는 '노인이 돼서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당한 건 사실이다'라며 우기는 경우가 많다"고 주장해 논란이 예고된다. 그는 13일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린 '위안부 문제를 해부한다(상)'라는 제목의 글에서 이같이 밝히고 "위안부는 엄격히 3가지로 구분돼 있지하기만 한다면 그것이 진정 올바른 방식의 과거사 청산일까. 역사가의 시름은 깊어져만 간다”고 글을 마쳤다. 이 교수는 지난해 쓴 한 논문에서도 "한국의 국사교과서가 지난 40년간 일제가 토지의 40%를 수탈하였다고 가르쳐 온 것이 사실이 아니다"면서 국사 교과서에 기술된 일제의 수탈상은 검증없이 인용된 '신화'라고 비판한 적이 있다. 그는 지난해 11월 발표한 '국사 교과서에 그려진 일제의 수탈상과 그 신화성'이라는 논문에서 일제때 일본인이 취득한 경지는 조선 전체의 10% 전후였으며, "쌀 '수출'과 '수탈'을 구분하지 않고 사용해 '일제가 한반도 쌀 생산량의 42%를 수탈했다'는 '신화'가 등장했다"고 주장했었다. 그는 또 지난해 9월 한 TV토론에 출연해 “정신대를 조선총독부가 강제로 동원했다고 누가 주장하나. 정신대 관련 일본 자료를 보면 범죄행위가 권력만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조선인) 민간인도 참여했다”고 주장해 큰 파장을 몰고 온 적도 있다./ 이주영 기자(2)친일 청산에 대한 의견 - 찬성① "지금 시기 놓치면 과거청산은 영원한 미궁에 빠지게 된다"[인터뷰] 민간인 학살 문제에 꾸준한 관심 갖고 활동해온 김동춘 교수 2004-08-21우리 역사의 오랜 염원이자 과제였던 '과거청산과 진상규명'이 현실로 다가왔다. 노무현 대통령이 광복절 축사에서 "포괄적 과거청산"을 언급한 이후로 정치권을 중심으로 과거청산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되었고, 최근 부친의 친일 경력으로 인해 열린우리당 신기남 의원이 의장직을 사퇴하는 것을 계기로 사실상 과거청산에 대한 정치권의 합의가 이뤄졌다.그러나 실질적인 과거청산과 진상규명이 이루어지기까지는 상당한 진통이 따를 것으로 예상된다. 일제 강점 시기부터 시작될 광범위한 과거청산의 범위부터가 그렇고 아직도 현존하고 있으며 상당수가 우리사회 권력층으로 자리잡고 있는 가해자 그룹의 거센 저항도 상당한 시련으로 작용할 것이다.바로 지금, 왜 우리가 과거청산을 해야만 하는지, 근원적인 당위성을 비롯해 과거청산의 원칙과 방향은 어떻 작업인 것이다. 이는 국민들의 공감대가 있어야 가능하다. 나는 피해자가 아닌데 무슨 관계가 있나 하면서 왜 저들이 저렇게 떠들까 하면서 무관심 할 수 있다. 하지만 자기가 피해자가 되고 나서 그제서야 알면 늦은 것이다. 바로 지금을 놓쳐서는 안된다."②대학가 “친일 잔재 쓸어내자”[2005년 03월 18일 17:47:58]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과 독도 영유권 주장 등에 맞서 대학가에 친일 잔재를 청산하자는 운동이 강하게 벌어지고 있다. 연세대 민주노동당 학생위원회는 18일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친일청산이 중요하다”며 “이달 말까지 학내의 친일파 명단을 조사해 발표하겠다”고 밝혔다. 학생위원회는 이 대학 백낙준 초대총장을 대표적인 친일 인사로 지목하고 “대동아 전쟁을 옹호하고 학생들에게 총칼을 들 것을 부추기며 일제에 충성했다”고 비난했다. 이들은 교정의 중앙도서관 앞에 세워진 백 초대총장의 동상을 철거하기 위해 오는 21일부터 서명·모금 운동을 벌일 계획이다. 또 친일 의혹을 받고 있는 유억겸 전 연희전문학교 교장의 이름을 딴 ‘유억겸 기념관’의 명칭 변경도 학교측에 요구키로 했다. 박이정엽 학생위원장(24·경제4)은 “현재 학내 인사들의 친일 행적 자료를 수집 중이며 이달 말까지 그 명단을 공개해 정확한 평가를 내리겠다”고 말했다.한편 연세대가 일본 극우단체로부터 기부받은 학술기금으로 ‘아시아연구기금’을 세운 사실이 알려져 학내 친일 행적과 함께 반드시 청산돼야 한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이 대학은 1996년 일본 극우단체인 일본재단으로부터 ‘한·일협력기금’ 75억원을 지원받았으나 돈의 성격에 관한 논란이 일자 ‘아시아연구기금’이란 법인을 별도로 설립했다. 이 아시아연구기금은 문제의 한·일협력기금 75억원과 국내 지원금 5억여원으로 설립됐으며 매년 20명 이상의 국내 학자들에게 연구비를 지급하고 있다. 이 대학 조모씨(26·인문학부4)는 “아시아연구기금이 일본 극우단체로부터 받은 돈으로 세워졌다는 점에 놀랐다”며 “학내 친일인사의 행적을 공개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