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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간관계론
    1. 현대사회에서 인간관계의 중요성세상은 누구나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아닌 누군가와 서로 관계를 맺고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다.오늘의 사회, 바로 1990년대 후반에 있는 한국사회는 그 어느 시대보다도 빠른 속도와 다양한 사회변화를 경험하고 있다. 가정이 변화하고, 세대간의 관계가 변화하고 있으며 가치의 변화는 적응하기 어려우리만큼 혼미함을 나타내고 있다.물질문명의 범람 속에서 우리는 과거의 어느 시대보다도 물질의 풍요함을 향유하고 있으나 정신적으로는 가장 빈곤한 자아상실의 군상이라는 표현이 오늘의 현대인을 여실히 나타내는 것이다.군중 속에서 고독함과 소외감을 느끼며 불안과 갈등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현대인, 그들을 불안하게 하는 것은 확실히 현대사회의 급속한 변화에 그 원인이 있다. 특히 현대사회는 자라나는 어린이와 젊은이들에게 더욱 많은 고민과 불안을 안겨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오늘의 젊은이들은 템포가 빠른 사회변화의 현실 속에서 여러 가지 고민과 갈등에 직면한다. 그 중에서도 그들을 괴롭게 하는 가장 두드러진 고민은 이른바 정체(正體)의 위기의식이다. 내가 누구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리고 내가 가야할 곳은 어디이며, 나는 어디에 속해 있어야 하는가 하는 자기 인식을 찾으려는 고민이다.예전 우리들은 ‘인심이 좋다.’라는 말을 많이 듣는 민족이었다. 무엇이든 함께 나누고 도와주려고 했던 민족이 바로 우리나라 사람들이었다. 그것이 예전 우리나라사람들이 인간관계를 맺고 있던 모습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인심이 좋다는 말을 듣기가 어렵게 된지 오래다.현대사회는 교통과 통신기술의 발전을 빼고는 설명할 수 없다. 비행기, KTX등 발달된 교통체계는 공간의 제약성을 점점 약하게 해준다. 인터넷, 스마트폰으로 대표되는 통신기술의 발달 또한 시간의 제약성을 점점 약하게 해준다. 며칠이 걸려서 도착하는 편지를 기다릴 필요 없이 전송 즉시 도착하는 메일을 이용하면 된다. 요즘엔 일일이 확인해야 하는 메일을 넘어서 언제 어디서나 스마트폰만 있으면 바로 답장이 가능한 카카오톡을 사용한다. 공간의 제약과 시간의 제약이 사라지고 남은 편리성은 사람들이 만남과 관계의 소중함을 잊게 만드는 것 같다. 현대사회에서 인간관계를 잘 유지하려면 자신에게 필요한 인간관계의 기술을 습득하고 계발시켜 나가 원만한 인간관계의 소유자가 되어야 현대사회에서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2.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현상(특히 갈등, 스트레스를 중심으로)을 설명하시오.갈등이란 무엇인가?둘 또는 그 이상의 당사자 사이에 목표, 태도, 감정이나 행동의 불일치 혹은 반대가 일어나는 상황을 말한다. 모든 인간관계에는 갈등이 존재한다.조직 특성상으로 갈등은 목표의 불일치, 직위의 불일치, 명령체계의 불일치, 한정된 자원, 업무의 상호의존성 등으로 갈등이 일어날 수 있다.개인 특성상으로 갈등은 능력과 기술 차이, 성격의 차이, 인식의 차이, 가치와 윤리 차이, 감정의 차이, 의사소통 장벽, 문화 차이 등을 들 수 있다.※ 개인적인 갈등1) 개인 내부의 갈등: 한 개인이 다양한 욕구와 역할을 충족시키려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갈등① 좌절에 의한 갈등으로 성취하고자 하는 목표가 이루어지지 못했을 때 개인이경험하게 되는 갈등.② 목표 갈등으로 개인이 목표를 추구함에 있어 다양한 목표 관련 갈등으로예를 들어 임음은 높은데 작업이 위험, 좋은 직장 두 개에 동시 합격.
    경영/경제| 2013.01.22| 3페이지| 1,000원| 조회(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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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한류문화
    과제: 올해의 문화트렌드 중 이슈가 되었던 것을 선정하고 분석하여, 그 문화트렌드가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자신의 생각을 덧붙여 작성하세요.K-POP과 가수 싸이의 SNS에 의한 신 한류 문화몇 년 전 드라마 ‘별은 내 가슴에’를 필두로 ‘겨울연가’, ‘대장금’등 국내 드라마가 해외에서 폭발적 인기를 끌면서 한류를 주도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또한, 영화와 K-POP등 다양한 대중문화가 국내뿐 아니라 외국에서 대한민국의 문화를 알리는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한류는 기획사를 통한 철저한 마케팅의 결과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드라마나 영화를 수출하고 그 나라의 TV를 통한 방영으로 알려지는 단순하고 사이클이 느린 구조였지요.그러나 신 한류의 급부상에는 유튜브, 페이스북, 트위터와 같은 소셜미디어가 유통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가수의 뮤직비디오나 신곡 발표등도 소셜미디어를 마케팅의 수단으로 적극 활용하면서 ‘싸이’와 같은 가수가 탄생할수 있었다고 봅니다.싸이의 새로운 앨범 제목은 이었습니다. 다의어로 사용된 이 제목이 제대로 폭발하며 대한민국 대중음악의 새로운 역사를 쓸 기세입니다. 이미 유튜브에서는 조회수가 5천만을 넘어섰고, 미국 언론들이나 대중들은 싸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합니다. 제대로 노는 자의 세상이 왔다는 점에서 싸이의 전성시대는 한 동안 지속될 것으로 보입니다.그의 인기를 실감나게 한 것은 미국을 대표하는 3대 프로 스포츠 중 하나인 프로야구장에서 보인 싸이에 대한 반응 이었습니다. 한인 밀집지역인 이기는 하지만 한국 선수가 출전하거나 한인 마케팅을 하는 상황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싸이의 인기는 대중성을 확보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싸이의 미국행은 이후 활동 가능성에 대한 타진이었다는 점에서 중요했습니다. 저스틴 비버라는 세계적인 스타를 발굴하고 키운 매니저와의 비즈니스를 위해 떠난 싸이는 자신이 얼마나 인기가 있는지 확인하는 자리가 되었을 듯합니다. 물론 싸이의 경우 새로운 음반 작업들과 꾸준한 공연으로 국내에서 꾸준한 인기를 얻고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런 그가 세계적인 존재감으로 주목을 받은 것은 의도하지 않았던 현상이 큰 몫을 차지했음을 부정 할 수는 없습니다. 싸이의 폭풍같은 인기의 원인에 대해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하지만 비급 정서의 세계화라는 점에서 대단히 흥미롭습니다. 이런 싸이 스타일의 세계화는 이후 현지 프로모션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이어지느냐의 문제일 것입니다.저스틴 비버 측의 적극적인 러브콜이 과연 얼마나 효과적인 프로모션이 될 수 있을지 궁금해집니다. 영어 버전의 ‘강남 스타일’이 어떤 효과를 얻을지 궁금하지만 더 이상 늦지 않은 시점에서 미국 진출이 가시화된다면 싸이의 성공 스토리는 충분히 가능 할 것입니다. 세계적인 공통분모를 찾았고, 하나의 흐름처럼 많은 이들이 싸이의 활동을 기대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의 다음 행보는 더욱 흥미롭기만 합니다. 대한민국 뮤지션 중 세계적으로 가장 성공한 존재가 조만간 등장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 싸이의 팬이든 아니든 모두가 행복해할 수 있는 최초의 세계적 팝 스타의 등장이기 때문이지요. 엘에이 다저스 구장에서 울려 퍼진 도 대단하진만 음악이 나오자마자 말춤을 추는 미국인들의 모습은 장관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사를 정확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이미 그들에게 이 노래는 흥겨운 일상의 곡으로 정착했다는 느낌을 주었으니 말입니다. 야구장에 깜짝 등장하듯 대형 화면에 등장해 직접 말춤을 선사하는 싸이와 이에 열광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그가 어떤 방식으로 접근하느냐에 따라 대단한 성공이 기대됩니다. 이후 미국 방송에 직접 출연해 유창한 영어로 자신의 말춤에 대해 설명을 하고 함께 말춤을 추는 장면은 싸이 스타일이 제대로 미국 시장을 파고들고 있음을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유튜브에서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다는 이유로 미국 언론에 소개되고, 많은 유명 뮤지션들이 싸이에 대한 칭찬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제 이런 낯선 놀라움을 넘어 친숙한 재미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싸이의 진검승부는 지금부터 일 수밖에는 없어 보입니다.마카레나가 그랬고, 셔플 댄스가 그랬듯 단순한 반복 리듬에 걸 맞는 상징적이 춤은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자게 하는 듯합니다. 단순하지만 경쾌한 곡조가 우선 부담 없이 다가오고, 이런 편안함을 즐길 수 있도록 해준는 상징적인 춤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이들은 척이나 닮아 있습니다. 이 세계적인 사랑을 받았던 것 역시 단순하지만 명료한 리듬 라인과 이를 충분히 만족 시켜주는 셔플댄스가 있어서 가능했습니다. 외국인들이 싸이의 ‘강남 스타일’에 LMFAO의 뮤직 비디오를 믹스해서 올린 영상을 보면 전혀 이상하지 않다는 점에서 성공할 수 밖에 없는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프랑스인이 올린 ‘강남 스타일’ 영어 버전이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고, 다양한 플래시 몹시 하나의 유행처럼 세계 곳곳에서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흥미롭기까지 합니다. 미국을 중심으로 프랑스 세르비아, 스톡홀름 퍼레이드에도 울려 퍼진 싸이 열풍은 대단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한일 밀집지역이기는 하지만 파사데나 쇼핑몰에서 벌인 ‘강남스타일’ 플래시 몹은 아시아인만이 아니라 현지인이 다수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습니다. 미국 현지인들이 만든 패러디 영상이 큰 인기를 얻고, 리액션 영상이 하나의 유행이 되고 있을 정도로 싸이의 ‘강남스타일’은 광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전 세계인이 이용하고, 인기의 척도를 보여주는 유튜브에서 폭발적인 관심을 보인다는 점에서 싸이의 성공은 현재보다 앞으로가 더욱 크게 다가올 듯합니다. 싸이 스스로도 왜 이렇게 많은 이들이 자신의 곡인 강남스타일을 이토록 사랑해주는지 알 수 없다고 밝힐 정도로 의외성은 존재합니다.
    사회과학| 2013.01.22| 3페이지| 1,500원| 조회(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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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장조사론 과제
    과제 : FTA의 개념 및 배경, 왜 체결하는지에 대해 설명하시오.(1) FTA (Free Trade Agreements) 개념FTA란 국제지역주의(regionalism)의 한 형태로서 지역무역협정을 의미합니다. 자유무역협정(FTA : Free Trade Agreement)은 국가 간의 무역에서 관세를 크게 줄이거나 아예 없앰으로써 더 많은 종류의 상품들을 더욱 싸게 서로 사고 팔 수 있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전통적으로는 국가 간에는 관세와 그 외의 다양한 제약이 있어서 상품이 국경을 넘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이 자유롭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제약들을 없애거나 최소화해서 다른 나라와도 마치 같은 나라 안에서 물건을 사고파는 것처럼 자유롭게 하자는 것이 자유무역협정입니다.(2) 지역무역협정의 배경? 오늘날 세계경제는 두 요소 간에 팽팽한 균형을 이루며 발전하고 있습니다.- 첫째, 세계시장을 하나로 보고 글로벌시장으로 강력하게 움직여가는 힘- 둘째, 이 글로벌시장에 영향력을 갖고자 하는 사람들의 힘▶ 이 두 가지 요소가 팽팽하게 작용한 결과로 나타난 것이 바로 지역경제통합(RTA)이다.▶ 오늘날 세계통상의 특징은 이들 두 힘의 대표적 축인 WTO 와 RTA의 균형과 조화로형성되고 있음.(3) 왜 지역무역협정을 체결하나첫째, 글로벌화에 대한 자국의 이익을 대변할 창구 필요해서입니다.둘째, 다자간 협상인 WTO 협상에서 자국의 입장을 표현하기 위해서입니다.
    경영/경제| 2013.01.22| 1페이지| 1,000원| 조회(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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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평]원효스님 - 욕심일랑 벗어두고 걸림없이 살게나
    과제명 : [원효스님 - 욕심일랑 벗어두고 걸림없이 살게나] 윤청광 지음, 언어문화 출판사.11쪽부터 136쪽까지1) 요약신라 제 29대 태종 무열왕 2년, 원효스님은 지금의 경주 분황사에 머물고 있었다. 하루는 요석궁에서 한 시녀가 요석공주마마의 심부름으로 원효스님에게 옷 한 벌을 드리러 분황사로 찾아왔다. 대사를 모시는 시자승은 원효스님에게 다급하게 말하였지만, 원효스님은 그 시녀를 만나지도 않은 채 그냥 돌려보내며, 또한 그 옷을 시자승에게 입으라 하였다. 그날 원효스님은 시자승과 함께 분황사를 떠나 경주 남산을 향해 길을 떠나는 중 대안대사님을 만나게 되는데 그 분은 바로 한때 신라 불교를 이끌어 최고의 지위를 누린 원공스님이었다.그날 밤 원효스님은 대안대사의 법문을 들으며 많은 것을 깨달게 된다.다음 날 대안대사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원효스님과 시자승은 분황사로 돌아가지 않고 이 마을 저 마을 떠돌며 탁발로 끼니를 이어가고 있었다.그러던 어느 날 한 마을에서 원효스님과 시자승은 또 한 번 대안대사를 만나게 된다. 원효스님은 어미 없는 내 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젖동냥을 하고 오는 길이라는 대안대사의 말을 듣고 왕실불교, 귀족불교, 권세불교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통렬하게 꾸짖으며 걸인 차림으로 천촌만락을 누비고 돌아다니는 대안대사에게 숨겨놓은 부인이 있었고 자식까지 있다는 것이 큰 충격 이였기에 그 사정을 알아보기로 했다. 사실은 이러하였다. 대안대사는 예전에 묵었던 굴에 너구리가 들어와 살기에 너구리들에게 그 굴을 내어주고, 다른 굴에 거처로 삼았는데 원효스님을 길에서 만난 후 그 굴에 살던 너구리들이 궁금하여 다시 찾아와봤더니 어미를 잃은 너구리 새끼들만 굶어 죽게 생길 지경에 이르러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자기 자식에게 먹일 것처럼 하여 젖동냥을 하였던 것이었다.원효스님은 이때 대안대사의 걸림 없는 자비행을 보고 천촌만락을 떠돌며 가난한 백성과 함께 숨 쉬고 웃으며 부처님의 말씀을 나누는 대안대사야 말로 자신의 찾던 스승임을 깨달게 된다. 그 후 원효스님은 대안대사가 머물고 있는 바위굴을 떠나지 아니하고 대사와 번갈아 동냥젖을 얻어다가 너구리 새끼들을 키우고 있었다.하루는 원효스님이 칡뿌리를 캐어가지고 바위굴로 돌아왔는데 너구리 새끼들이 보이지 않았다. 대안대사는 시자승을 시켜 너구리들을 산속에 놓아 주었다.대안대사는 그동안 새끼 너구리들이 죽을까봐 거기에만 집착에 있어 편안해하지 못했다며 산 넘어 땅군 마을로 갔고, 원효스님은 시자승을 분황사로 돌려보낸 후 걸망을 챙겨 대안대사의 뒤를 쫒아 땅군 마을로 가게 된다.이 마을은 가난한 마을이여서 신라 제일의 학승으로 손꼽히며 분황사에 머물면서 왕실의 초대를 받아 왕족과 귀족들에게 법문을 설하던 원효스님이 찾아왔는데도 귀한 차를 내오지는 못하고 대신 곡차로 대접하게 된다. 분황사에서 더운밥만 먹고 지냈던 원효스님은 백성의 이러한 비천한 사정을 알 리 없었다.원효스님과 대안대사는 그 다음날 아침 일찍 땅군 마을을 떠나 탁발한 찬 밥 한 덩어리로 요기를 한다. 대안대사는 덕 높고 도가 깊으시다는 서라벌의 고승대덕들은 왕족과 귀족들을 위해서는 법회도 열고 백일기도도 하면서, 저 미천한 백성들을 위해서는 염불 한번 해주지 않음을 한탄해 한다. 원효스님은 대안대사에게 자신이 어떻게 해서 삭발출가 하게 되었는지 말하게 된다. 아무리 좋은 재목도 목수를 제대로 만나야 대들보로 쓰이는 법이라면서 대안대사는 원효스님에게 걸망을 챙겨 흥륜사를 떠나 영취산 반고사에 가서 낭지법사를 찾아뵈라고 명한다.원효스님은 지금의 경상남도 양산군 통도사가 있는 바로 그 영취산으로 들어가 반고사에 이르게 되지만 낭지법사가 출타중이라 만나지 못하였다. 거기에는 한 동자승이 있었는데 낭지법사는 한번 움막을 비우면 한달, 석달만에 오시기에 언제 오실지 모른다고 하였다. 원효스님이 낭지법사를 기다리던 닷새가 되던 밤에 산짐승들 우는 소리가 그날따라 유난이 크게 들려오던 것이었다. 사미승이 원효스님을 쳐다보며 이렇게 산짐승들이 유난히 울어대던 날에는 법사스님이 꼭 돌아오시곤 하셨다고 말하였다. 밤이 깊었을 무렵 느닷없이 밖에서 낭지법사의 목소리가 들렸고 드디어 원효스님은 낭지법사를 만나게 되었다. 원효스님은 낭지법사를 찾아오게 된 연유를 말씀드리고 가르침을 받고자 찾아왔다 말하였지만 낭지법사는 경?율?논 삼장을 통달했다는 흥륜사의 원효에게 새삼 따로 배울 것이 없다며 거절하였다.다음 날 아침 원효스님이 반고사에서 눈을 떠 보니 이미 낭지법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원효스님은 부지런히 산 너머 움막쪽을 향하여 걸음을 옮겼다. 원효스님은 그길로 단숨에 산등성이를 넘어 낭지법사가 계시는 움막 앞에 단정이 무릎을 꿇고 앉아 다시 한번 가르침을 받을 수 있도록 강청하였다. 원효스님은 첫날 낭지법사에게 도를 구하나 얻지 못하고 하는 수없이 움막에서 내려오게 되었지만 원효스님은 도를 구하는 일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 동한 수없이 읽은 경전과 율장, 그리고 수없이 되풀이하였지만 곧바로 도를 얻는 것이 아니었고, 곧바로 깨달음에 이르는 것도 아니었으므로 젊은 날의 원효스님이 고뇌는 말로 다 할 수가 없었다.원효스님이 영취산 반고사에 머물면서 끈질기게 낭지법사를 찾아서 도를 구하자, 그 지극한 구도열과 정성에 감복하여 원효로 하여금 초장관문과 안신사심론을 짓도록 지도해준다.원효스님은 낭지법사를 스승으로 존경하며 도를 구하고 있던 때에 반고사에서 의상스님을 만나게 된다.의상스님은 서라벌 황룡사에서 안함스님을 은사로 출가득도 하였고, 얼마 전 스승으로부터 영취산을 찾아가 효스님을 도반으로 삼고, 지스님을 스승으로 삼을 것을 당부 받았다고 하였다. 원효스님은 의상스님을 데리고 낭지법사의 움막으로 가면서 내심 낭지법사가 불호령을 내릴까봐 은근히 걱정하였다. 원효스님는 낭지법사에게 자초지종을 말씀드리며 의상스님이 원효스님보다 여덟 살 아래라 사형사제하기로 하였다며 허락을 요청하였다.낭지법사는 하나는 산으로 가고, 하나는 강으로 갈 것이라고 말씀하였지만 산으로 가건, 강으로 가건 원래는 한 뿌리니 상관없다하시면서 개천이 흘러들러 강이 흘러들고 하천이 흘러들어도 바닷물은 결국 한 맛임을 명심하고 일렀다. 원효스님은 의상스님과 더불어 낭지법사로부터 법화경의 강설을 들어 법화경에 담긴 뜻을 꿰뚫어 알게 되었다.그러던 어느 날 낭지법사는 원효스님과 의상스님에게 영취산을 떠날 때를 알려주게 된다. 열반경과 유마경을 통달하려면 은밀히 국경을 넘어 백제 땅으로 가서 고구려에 계시던 보덕화상을 만나야 한다고 한다. 부처님의 법에는 적국이 따로 없는 법 둘은 백제 땅으로 넘어가기 위해 며칠을 낮에는 산속에 숨어서 쉬고, 밤이면 발길을 재촉해서 보덕화상이 머물고 계신다는 백제 완산주 고대산을 찾아 헤맸다. 그러나 신라 첩자들이 승복으로 변복한 염탐꾼으로 몰려 군졸들에게 잡혔지만, 오히려 헤매지 아니하고 바로 보덕화상이 계신 곳을 찾아갈 수 있게 되었다.원효스님과 의상스님을 만난 보덕화상의 입에 자신을 찾아온 두 스님이 염탐꾼인지 출가수행자인지 어떻게 말하는가에 따라 그 두 스님이 극락과 지옥이 달려있었고, 다행히 보덕화상은 원효스님과 의상스님이 출가수행자임을 알아보고 군관들에게 풀어주라고 말한다.원효스님과 의상스님이 감사의 인사를 올린 후 보덕화상에게 법을 구하러 왔다 말하지만, 보덕화상은 잘못 찾아왔다며 양식이나 의복을 구하러 왔다면 조금은 나누어줄 수 있겠지만 자신에게는 나누어줄 법이 없고, 법은 스스로 닦아 스스로 지녀야 된다며 거절한다.다음날 원효스님은 걸망을 챙겨 떠날 준비를 해놓고 경복사 앞 개울로 나가 자갈을 가득 담아왔다 의상스님과 함께 예불을 드린 후 보덕화상께 하직인사를 올린 뒤 바가지에 가득 담긴 자갈을 보덕화상 앞에 바치는 것이었다.원효스님은 양식은 밥을 지어 먹어야 양식일 것이고, 부처님의 정법은 나누어 주고 전해 주어야 정법일 것이 온데 보덕화상님께서 양식 줄어드는 것을 염려하시고 부처님 정법이 줄어들까봐 근심하시기에 줄어들지 않는 자갈을 바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다. 이에 보덕화상은 웃으며 원효스님과 의상스님에게 양식도 축내고 부처님의 정법도 나눠 쓰자고 두 스님을 거두어 주었다. 그날부터 원효스님과 의상스님은 열반경과 유마경을 부지런히 배우며 수행하였다.다시 신라로 돌아와 교학을 더욱 깊이 참구하는 한편 이때부터 저술활동을 시작하였다.원효스님이 세속나이로 서른 네 살 되던 해의 일이다. 의상스님이 원효스님을 찾아와 당나라에서는 불교가 한창 떠들썩하다면서 함께 당나라에 들어가길 권유하였다. 마침 원효스님도 당나라에 가서 공부하자고 여쭈려던 참이었다며 두 사람은 중국 당나라에서 새롭게 일어나고 있는 불교를 접하기 위해 두 번째 구도의 길을 함께 떠나게 되었다.그러나 첫 번째 국경 신라와 고구려의 국경은 무사히 통과하였으나 두 번째 국경인 고구려 국경과 당나라의 국경에서 고구려 순라군에게 붙잡히게 되었다.이번에도 첩자라는 누명을 쓰고 수십 일 동안 갇혀 있다가 평양성으로 압송되던 중 간신히 탈출하여 신라로 돌아왔다.그 후 의상스님은 다시 한번 당나라로 가기위해 원효스님을 찾아오게 되고, 세 번째 구도여행을 떠나게 된다. 이번에는 백제와의 싸움에서 이겨 당나라까지 뱃길을 터놓았기 때문에 쉽게 당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지만 당나라에 가던 중 장대같은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여 그만 방향을 잃고 헤매게 되었다. 두 스님은 억수로 쏟아지는 비를 맞아가며, 은신할 곳을 찾아 조그마한 토굴을 하나 발견하여 그 곳에 잠시 머물게 되는데 마치 지옥에서 헤매다가 극락에 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독후감/창작| 2005.11.18| 5페이지| 2,000원| 조회(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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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사] 입언의 글과 제자백가 평가A+최고예요
    입언(立言)의 글과 제자백가(1) 제자백가의 사회적 배경춘추시대 말기부터 전국시대에 걸쳐 독창적인 사상을 지닌 많은 학자들이 출현하였다. 이들을 일컬어 제자백가라 한다. 이러한 제자들은 동주의 겸병전쟁(兼倂戰爭)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사회의 격변, 곧 종족제도(宗族制度)의 파괴와 이에 따른 정치?경제의 성격변화 등의 와중에서 제각기 서로 다른 집단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는 것들이기 때문에 그들 사상의 표현방식도 그 집단의 성격에 따라 성향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입언의 글”이란 후세에 교훈이 될 만한 말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다. 이러한 글들은 명백한 논리의 표현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대체적으로 제자백가의 사상과 견해를 밝힌 글들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사상의 자유와 지식의 확대로 인해, 자신의 능력에 따라 습득한 지식을 이용하여 신분상승을 실현코자 하는 강력한 사회적 욕구가 분출될 수 있었다. 전국시대 각국의 경쟁은 자연히 부국강병의 추진으로 이어지고, 이에 따라 능력 있는 학자[士人]를 우대하는 풍조가 팽배하였다. 게다가 각국의 분립이 사상의 다양화에 크게 기여하고 있었다. 국가권력이 강력하면 사상과 학문을 통제하기 쉬워 다양한 사상의 발달은 어려운 법이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각 파의 학설이 쉽게 용인되었으며, 또 사실상 이것들을 모두 하나로 통일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의 정치적 혼란이 도리어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할 수 있다.(2) 제자백가의 분류제자백가는 춘추?전국시대에 새로운 사상을 창조하고 문화적 업적을 이룩하여 동양사상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여기서 제자라는 것은 각 학파의 대표적 인물을 가리키는 말로서, 유가는 공자와 맹자, 묵가는 묵자, 도가는 노자 등이 그에 해당된다. 또는 각 학파의 대표작을 가리키는 경우도 있다. 한편 백가라는 것은 각 학파를 가리키는 말이다. 사마담은 제자백가를 음양가, 유가, 묵가, 명가, 법가, 도가 총 6가로 분류한 최초의 사람이다. 다른 한편 유흠은 6가에다 종횡가, 잡가, 농이다. 그리고 그 예(禮)를 재는 잣대로서 중용[中]을 강조하여, 극단적으로 치우칠[狂] 것을 우려하였다. 또한 사회와 정치에도 강한 참여의식을 보여주었으니, 소위 정명(正名)이 바로 그것이다. 즉 명분을 바로 잡음으로써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우며, 아비는 아비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질 때' 비로소 공자가 꿈꾸는 이상적인 사회가 도래하는 것이다.「논어」는 공자의 말과 그의 제자 또는 그때 사람들과의 대화 등을 적어 놓은 것으로 앞뒤로 별 연관이 없는 짧은 글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공자의 제자 또는 재전(再傳) 제자들이 자신의 견문을 기록한 것이어서 모두 말이나 대화를 사실 그대로 옮겨놓으려고 애쓴 흔적이 뚜렷하다. 그 때문에 어떤 다른 고대의 문장보다도 당시의 어체에 가까운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글 뜻이나 논점은 분명하나 대부분의 말들이 아무런 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장에는 표현이 간결하면서도 풍부한 뜻을 담고 있다.2. 맹자(孟子)맹자는 공자와 그 제자들의 사상적 영향을 받은 인물로서, 당시 유행했던 사상논쟁에서 상당히 과격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인(仁)과 예(禮)를 강조했던 공자와 비교해 볼 때, 이미 맹자의 시대에는 국가적인 구조정립이 이루어진 상황이었기 때문에 예(禮)보다는 강력한 사회규범이 필요해졌다. 따라서 맹자는 공자의 사상을 한층 발전시켜 인(仁)과 의(義)를 말했다. 맹자는 사람이 태어나면서 이미 '인의(仁義)'를 선천적으로 지녔다고 생각했으며, 이러한 그의 논리는 성선설(性善說)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 성선(性善)을 단련하는 방법으로,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제시하였다. 또한 맹자는 그의 왕도사상(王道思想)과 혁명론(革命論)으로 유명하다. 자고로 군주는 왕도(王道)를 행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면 비록 왕이라 해도 방벌(放伐)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논리는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 등 동아시아의 왕조변천에 막대한 영향을 끼쳐 왔다. 그러나 상당히 '혁명적'인 맹자의 논리도 실은 당시의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도(道)는 무(無), 즉 기존의 '공허'개념과는 다른, '현상적이고 상대적인 성격을 가지지 않는다'는 의미의 무(無)이기도 하다. 매우 난해한 이야기지만, 그의 도(道)는 '도(道)'로서 파악되는 순간 이미 도(道)가 아니며, 그가 말하는 무(無) 역시 유(有)의 반대로서의 무(無)가 아닌 것이다. 오히려 유(有)를 포함하는 무(無)가 노자가 생각하는 무(無)의 개념이다. 노자에 의하면 우리들의 가치판단은 모두 상대적인 것이 된다. 어느 한 쪽이 있을 때 비로소 다른 한 쪽이 존재하는 그런 관계, 즉 상생(相生)관계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극단적이거나 부자연스럽다면 결코 오래 갈 수 없다. 오히려 '자연스러운 태도로 방관하는 듯하면서도 일을 잘 꾸며나갈 수 있다'는 것이 노자의 논리이다. 이처럼 모든 허식의 작위를 버린 상태인 소박함, 그 자체가 바로 노자가 추구하는 도(道)이며 자연(自然)인 것이다. 노자가 이상을 실현하는 방법으로서 생각했던 개념들은 크게 무위자연(無爲自然)과 허정무욕(虛靜無欲), 그리고 겸하유약(謙下幼弱)으로 요약될 수 있다. 어떤 일에서나 작위를 쓰거나 무리하지 말 것, 이것이야말로 그의 가장 기본적인 처세술이자 정치술이다. 실제로 노자의 사상은 고도의 통치술로 이용되었으니, 한대(漢代)의 황노술(黃老術)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그의 사상은 은자?은거의 사상으로서도 널리 퍼져나갔을 뿐만 아니라 후대 도교에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2. 장자(莊子)노자의 학설을 가장 잘 계승하고 발전시킨 인물은 장자(莊子)이다. 보통 노자의 사상과 장자의 사상은 일반적으로 '노장사상'이라 하여 동일한 사상인 것처럼 여겨지지만 자세히 살펴 보면 다른 점이 있다. 예를 들어, 노자는 정치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항상 천하를 다스리는 술(術)에 대해 말하고 있으나 장자는 그렇지 않아서 단지 개인의 '마음을 편히 하고 삶을 보존[安心立命)]'하는 데에만 관심을 두었다는 것, 또 노자는 정치의 술(術), 처세의 술(術)을 역설하기 시행한 것으로 유명한 이회, 신료들을 통제?제어하는 '술(術)'을 강조한 한(韓)의 신불해(申不害), 그리고 신하가 군주에 복종하는 것은 군주의 세력이지 결코 그의 덕행이나 재능 때문이 아니라고 하여 '세(勢)'를 강조한 신도(愼到), 그리고 진(秦) 효공(孝公)을 도와 2차 걸친 강력한 개혁을 단행하여 이후 진(秦)의 통일기반을 제공한 상앙, 역시 법가(法家)로 유명한 인물들이었다.2.한비자(韓非子)전국시대 말기는 한창 평화와 통일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한 시기였고, 그 현실적인 방안으로서 부국강병, 그리고 전쟁에 의한 합병이 중시되던 시기였다. 이런 때, 한비자는 기존의 여러 법가사상들, 즉 술(術)?세(勢)와 법(法)을 통합하여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지배를 추구하였다. 법(法)과 술(術)?세(勢)를 통합했다는 것은 법치(法治)의 운영방법으로서 술치(術治)와 세치(勢治)를 병용해야 한다는 뜻이다. 즉 민(民)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법(法)이 필요하고, 관리를 부리기 위해서는 술(術)이 필수적이기 때문에 법(法)과 술(術), 그리고 세(勢)는 제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기본이라는 것이다. 그가 생각하는 법치(法治)의 기본은 철저하고 엄격한 상벌(賞罰)을 통해 '사적인 것을 배척하고 공적인 것을 이롭게[排私利公]' 하는 것이었다.이처럼 한비자가 집대성한 법가사상은 이후 진시황(秦始皇)과 이사(李斯)에 의해 실현되어, 진(秦)이 춘추전국시대의 분열상황을 극복하고 최초로 중국을 통일하는 기틀이 되었다.그러나 진왕조가 단명한 후 한대이래 법가는 유가에 밀리게 된다. 그 이유는 '교화'나 '위민(爲民)'의 이상이 없다는 데 있다. 법치를 강조하고 있지만 법에 의한 통치의 정당성 또는 합리적 근거를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에, 난세를 극복하는 데에는 어느 정도 적합하나 안정 국면에 적용하기에는 부족하였던 것이다.묵가(墨家)묵자(墨子)묵가(墨家)를 제창한 묵자(墨子)는 일찍이 유가의 학설을 배웠으나, 유가의 형식주의와 불평등성에 반대하여 묵가를 세웠다. 예컨대 공자는 어리석은 군주)와 공손룡(公孫龍)의 사상제자백가의 사상 중에는 우주만물과 인간문제에 대한 광범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학파가 많다. 그런데 그와는 대조적으로 가장 현실적인 문제를 다룬 학파도 있으니, 논리를 구사하는 명가(名家)와 군사문제를 다룬 병가(兵家), 그리고 외교술을 내세운 종횡가(縱橫家)를 꼽을 수 있겠다.그 중에서도 명가(名家)는 논리를 주제로 언어와 사물의 개념[名]과 사실[實]을 중시하였다. 본래 중국의 언어가 한 단어씩 끊어지는 고립어인지라, 어형(語形)의 변화도 없고 고정된 품사도 없다. 따라서 언어를 구사할 때 융통성과 직감에 의한 요소가 많으며, 그에 따라 논리적인 엄밀성이 크게 떨어지는 편이다. 즉 주로 비유?대우?연쇄?연상 등의 수법을 구사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적확한 추리로서 올바른 판단을 구하고 새로운 지식을 창조하는 태도가 부족하였다. 이 때문에 통상적으로, 중국에서는 논리적 표현이 서툴렀으며, 철학의 기반이라 할 수 있는 논리학이 그다지 발달하지 못해 왔다고 말한다. 그러나 전국시대, 사회적 격변과 특히 국가간의 외교, 사상논쟁 등의 격화로 논리학이 발달하기 시작하였다.이들 명가 중에서 유명한 이로는 혜시(惠施)와 공손룡(公孫龍)을 손꼽을 수 있다. 혜시의 논제는《장자(莊子)》에서 소개되고 있는 소위 '역물십사(歷物十事)'이다. 즉 모든 사물에 대한 객관적인 진리를 부정하고 오직 인간의 주관성에 의해 진리가 결정된다는 것으로, 예를 들면 하늘과 땅은 같은 높이에 있고 산과 연못도 같은 높이라는 것이다.그 다음, 공손룡은 '백마는 말이 아니다[白馬非馬]'라는 주장으로 유명하다. 일반적으로 '백마는 말'이라 하지만, 제대로 따져 보면 올바르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백마라는 개념의 범위는 좁고, 말이라는 범위는 넓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은 궤변론자들이다. 그러나 단순히 궤변으로만 보는 것은 옳지 못하다. 혜시는 사물[實]의 상대성?가변성을, 그리고 공손룡은 명(名)의 절대적?불변적인 측면을 찾아냈으며, 이는 어디까지나 논리학의 발전이라 할 수.
    인문/어학| 2004.05.08| 9페이지| 1,000원| 조회(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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