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평화 중재노력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에 유혈충돌이 계속돼 12일 하루에만 최소한 38명이 숨졌다고 AP 등 외신들이 이날보도했다. 이스라엘 군 소식통은 이날 이스라엘 북부 레바논 접경도시 키랴트 셰모나에서 팔레스타인무장 세력으로 보이는 무장괴한들이 부근을 지나던 차량을 공격해 이스라엘인 7명 등 최소 10명이 숨졌다고 밝혔다...” - 동아일보, 2002년 3월 13일 기사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지중해의 동해안 일대를 가리키는 명칭이다. 또한 이 지역은 현재 신문 국제 면에 아프가니스탄 지역과 함께 가장 많이 언급되는 지역이기도 하다.그렇다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어떤 이유로 해서, 언제부터 갈등을 빚고 있는가, 그리고, 현재 그 상황까지 알아보도록 하자.1. 분쟁의 역사적 배경B.C 13세기, 이스라엘 민족은 모세와 여호수아의 지도하에 이집트로부터 탈출하여 약속의 땅인 가나안(현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들어간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으로 들어간 비슷한 시기에 남부해안 지역으로 해양민족인 필리스틴(Philistine) 사람들이 이주하고 양 민족간에 영토 분쟁이 시작되는데, 이 필리스틴 사람들이 ‘팔레스타인(Palestine)’ 이다. 따라서, 바로 이 시점이 팔레스타인 분쟁의 시발점으로 볼 수 있다. 이후 B.C 1020년경, 이스라엘 민족은 필리스틴을 비롯한 가나안 원주민들을 제압하고 다윗왕의 통치 하에 통일왕국을 이루고 이름을 ‘솔로몬 왕국’ 이라고 했다. 이후 솔로몬왕 시대에는 찬란한 영화를 누렸으나 솔로몬이 죽은 뒤 이스라엘과 유다로 분열되었다. 그 후 이스라엘은 아시리아에(B.C 8세기), 유다 왕국은 신(新)바빌로니아에(B.C 6세기) 멸망당하였다. B.C 4세기에 알렉산드로스 대왕 군대의 통치를 받게 되었으며, B.C 1세기에는 로마제국의 지배 하에 들어갔다. 그 후, 636년 이슬람교를 바탕으로 뭉쳐진 아랍인들이 로마를 격파한 이후 팔레스타인은 오스만 투르크령 시대(1516~1917)를 포함, 이슬람교도들의 지배가 계속되었는데, 십자군 원정이 있었을 때 기독교도들에 의해 일시적으로 점령당한 기간을 제외하고는 아랍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지배되어 왔다.2. 중동전쟁세계 각지를 떠돌던 유대인들이 1800년대 말부터 `시온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을 시작하면서 갈등과 비극이 싹텄다. 구세주 예수를 죽였다는 이유로, 또는 뛰어난 상술을 지닌 하층 상인이었기 때문에 어느 곳에서나 핍박을 받던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의 시온산으로 돌아가자는 시오니즘에 크게 호응했고 하나 둘씩 팔레스타인 땅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유대인들의 이주는 필연적으로 그 땅에 살고 있던 아랍인들과의 충돌을 낳았고 1930년대부터 두 민족간의 폭력사태가 빚어졌다. 그러던 중 발생한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은 이스라엘 건국의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 유럽인들에 의한 대학살을 경험한 유대인들은 고향 땅인 팔레스타인과 미국으로 줄을 이어 이주했고 그들의 강력한 영향력을 이용해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 국가를 세울 것을 요구했다. 유엔은 1947년 마침내 유대인들의 이런 요구를 받아들여 팔레스타인 땅의 52% 지역에 유대국가를 세우고 나머지 48%에는 아랍국가를 수립한다는 분리된 국가건설방안을 제시했다. 예루살렘과 그 주변을 국제관리지역으로 남긴 이 방안은 미국의 영향력으로 유엔회원국 3분의2의 찬성을 받아 가결됐지만 아랍국가들은 이 계획에 강력히 반대했다. 1948년 5월14일 선포된 이스라엘의 독립은 곧바로 전쟁으로 이어졌다. 이집트, 요르단, 사우디아라비아, 시리아, 레바논 등 아랍국가들이 이스라엘의 독립 선포와 동시에 선제공격을 가함으로써 1차 중동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또 이스라엘의 건국과 함께 이곳에 살던 팔레스타인인 90여만명이 집단 탈출을 시도함으로써 팔레스타인 난민의 역사가 시작됐다. 이스라엘과 아랍국가들은 이후 3차례의 전쟁을 더 겪었지만 이스라엘이 번번이 승리해 한 때 영토가 독립당시의 8배까지 늘어났다. 특히 67년 6월5일 발생한 제3차 중동전쟁에서는 이스라엘이 6일만에 시나이반도와 요르단강 서안, 골란고원, 동예루살렘를 점령해버렸다. 유엔은 그 해 11월 결의안을 통해 이스라엘이 모든 점령지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했으나 이스라엘은 이를 묵살하고 점령지내에 유대인 정착촌을 지어 이곳이 자국영토임을 확인하려 했다. 점령지중 시나이반도는 79년 캠프데이비드협정에 따라 이집트에 반환됐으나 나머지 땅은 아직도 이스라엘이 차지하고 있어 분쟁의 불씨가 되고 있다.3. 현재의 상황4차례에 걸친 중동전쟁에도 불구하고 독립을 얻지 못한 팔레스타인들은 87년12월 집단적인 저항인 `인티파다'(민중봉기)를 일으켰고 팔레스타인민족평의회(PNC)도이에 맞춰 독립을 선언했다. 이 봉기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은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땅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하며 돌과 화염병을 던졌으나 이스라엘군은 무자비한 총격으로 진압, 1천여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인티파다 이후 폭력사태가 끊이지 않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평화를 모색하고 나서 93년9월 `땅과 평화를 교환한다"는 내용의 오슬로협정을 맺었으며 이후 최근까지 7, 8년이 넘는 기나긴 평화협상이 진행돼왔다. 이러한 화해의 분위기 속에서도 양측간에는 불미스러운 사태가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1994년 2월에는 유태인 정착민이 요르단강 서안 헤브론 사원에서 예배를 보고 있는 신자들에게 총격을 가하여 최소한 29명이 사망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또한 1994년 4월에는 이스라엘 북부 아풀라에서 이슬람 과격파들이 차량 폭탄 테러를 자행하여 8명이 사망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측은 1994년 5월 4일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 내 예리코 지역에서 팔레스타인 자치권은 인정하되 유태인 정착민 보호를 위해 이스라엘 경찰을 주둔시킨다는 협정을 체결하였다. 그에 따라 이스라엘은 1994년 5월 13일 가자지구 내 군사기지를 팔레스타인 경찰에 이양하였다. 1994년 7월 1일에는 아라파트 의장이 가자 자치지구에서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마침내 7월 5일 아라파트 의장과 각료들이 예리코 자치지역에서 취임식을 거행하고 자치정부의 수립을 공식 선언하였다. 그 후 1995년 9월 28일 양측간에 팔레스타인 자치 확대 협정이 체결되었으며, 1995년 11월 2일에는 이스라엘이 점령지 철수계획에 따라 요르단강 서안내 예닌 경찰서를 팔레스타인 측에 양도하였다. 1998년 10월 25일 '와이 협정'에 따라 이스라엘은 1998년 12월 요르단강 서안지역에서 1단계 철수를 마쳤으나 1999년 초 요르단강 서안에서 폭력사태가 잇따르자 철군을 중단하였다. 1999년 5월 평화공존을 공약으로 내 건 바라크가 이스라엘 총리로 당선된 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평화협상이 재개되고 양측은 9월 와이협정의 후속조치로 이스라엘 점령지역의 일부 영토에 대한 추가 이양에 합의하였다. 이에 따라 2000년 3월에는 이스라엘 정부가 요르단강 서안의 땅 6.1%에서 철군하는 계획을 승인한 바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에 핵심쟁점에 대한 타결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핵심쟁점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게 양도하는 영토의 범위와 시기, 이를 바탕으로 한 팔레스타인의 독립국가 선포 시기 및 예루살렘 문제 등이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에게 요르단강 서안 땅 66%를 양도하고 일단 팔레스타인 독립 국가를 세우는 대신 동 예루살렘의 지위문제 등은 추후 논의하자는 제안을 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동정 없는 세상"을 읽고…….200135125 역사교육과 김경준성의 과학 시간에 리포트를 처음 받고는 제일 먼저 떠오르는 문학 작품은 고등학교 때 읽었었던 한국 단편소설이었다. 학교에서 추천해서 읽었는데 의외로(?) 야한 장면에 웃어가며 읽었던 기억이 아직까지 기억에 남아 있었던 것 같다.그런데 근대의 문학작품에 나오는 성(性)보다는 현대문학에 나타나는 성이 요즘의 세태를 잘 나타내고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얼마 전에 우연한 계기로 읽게 되었던 동정 없는 세상 이 생각났고, 다시 읽고 나서 책을 잘 골랐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내용을 살펴보면, 주인공 '나'는 이제 막 수능을 치렀으나 대학 같은 데는 별로 가고 싶지 않고 꿈이 있다면 오직 여자친구 서영과 '한번' 하는 것뿐인, 피 끓는 십대다. 스물 전에 '나'를 임신한 것이 틀림없는 엄마는 헤어 디자인 연구소장으로, 집안에서 유일하게 경제능력을 갖춘 인물이다. 삼촌은 명문대 법대 출신이지만 직업은 백수고, 아빠는 없다. 이 소설은 여자친구와 주인공의 성 관념에서 오는 혼란과 갈등, 그리고 그것의 해소를 위해 노력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남자인 주인공의 입장에서 살펴보면, 주인공은 본능적인 것, 주변의 친구들의 이야기와 인터넷의 음란 정보를 통해 섹스에 대한 욕구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여자친구인 서영 이는 다르다. 아직은 하고 싶지 않다는 말로 주인공의 요구를 한마디로 거절한다. 남자의 관점과 여자의 관점이 서로 다르다는 것에서 기인하는 것 같다. 이후 두 사람은 계속해서 서로의 관점차로 갈등하고 그 사이에 의견이 좁혀져 주인공이 말하는 한번 하는 단계가 된다.이 이야기에서 성행위 장면은 한번 반쯤 나온다. 여느 날처럼 주인공이 한번 하자 라고 말했을 때, 이유는 모르겠지만 여자친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여러 군데 여관을 돌아다니다 한곳에 들어가게 된다. 서로 처음 겪는 일이라 어색해 하며 몇 가지 시행착오를 겪는다. 주인공이 여자친구의 스웨터를 벗기는 것도 힘이 들고, 청바지와 브래지어를 벗기는 일도 어려워 결국 여자친구에게 부탁을 한다. 결정적으로 가장 큰 문제는 책의 표현을 빌리자면, 입구 자체가 미로 인 것이었다. 주인공이 포르노에서 봤을 때는 다들 대충 잘 찾았는데 직접 하려니 어디가 어딘지 몰랐고, 결국에는 여자친구가 그냥 옷을 입고 끝나게 되었다. 남자는 매우 아쉬워했지만, 여자친구는 버스는 지나갔다면서, 매몰차게(?) 거절한다. 결국 시행착오로 한번 할 기회를 놓쳐 한번이 아닌 반 번이 된 것이다.이 후에 여자친구의 집에 컴퓨터를 고치러 갔을 때, 주인공에게는 한번의 기회(?)가 더 찾아온다. 지난번의 경험 덕분인지 진행과정이 수월했고, 입구 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한번 하게 되었다. 그 뒤에 주인공의 생각이 나오는데, 열정과 쾌락, 신음과 교성은 모두 포르노 안에서의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자신의 몫으로 남은 것은 적막과 씁쓸함과 외로움과 허전함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전에 가졌던 섹스만 하면 어른이 된다는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Ⅰ. 사관과 역사철학역사를 보는 관점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사람들은 주로 역사철학 과 역사관 이라는 두 가지의 용어로 이야기한다. 역사철학은 역사의 근원적인 문제에 어느 정도 접근해 보자는 의도에서 나타난 학문분야라고 말할 수 있다. 역사철학 이란 말은 볼테에르(1964-1778)가 제국민의 풍습 및 정신론(1756) 에서 처음 사용한 조어였다. 역사관 이란 사관철학 이란 용어에서 유래되었다. 여기에서 사관 이란 역사에 대한 견해, 해석, 사상, 관념 등의 의미하고, 막연히 역사를 보는 눈 또는 역사의식의 광범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결국, 사관이란 인류역사 전체를 통일적으로 관찰하는 하나의 사고체계를 갖춘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를 어떤 입장에서 바라보느냐 하는 것이 사관이다.사관의 종류에는 크게 목적론적 사관, 이원적·신정적 사관, 헤겔의 관념론적 사관, 유물 사관, 법칙 사관, 문명 사관 등이 있는데, 우리나라와 같이 식민통치를 경험한 나라에서는 지배국 의 식민 사관과 피 지배국 의 민족주의 사관이 나타난다. 여기서는 우리민족이 일제시대 이후부터 가지고 있는 민족주의 사관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Ⅱ. 민족주의 사관1 머리말{ 한영우 著, 한국민족주의역사학 p. 1 참조1905년 을사조약 을 계기로 민족주의 라는 사조가 우리나라 전체에 퍼져서 항일구국운동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으며, 이것을 바탕으로 하여 새로운 역사학이 성립되었다. 민족주의 역사학 이 성립된 것이다.민족주의 사학은 국권이 상실되었던 일제시대에 가장 극성했지만 8·15 해방에서 지금에 이르기까지도 기본적으로는 민족주의 사학이 현대사학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민족주의 사학은 각 시대의 역사적 과제가 달라지고 학문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끊임없이 성격이 변화해 왔다. 뿐만 아니라, 같은 시대에 있어서도 민족을 해석하는 기준이나 이용하는 방법론, 자료선택에 따라서 역사해석체계(歷史解釋體系)가 다양하다.2 조선후기에 나타나는 민족주의 역사학의 배경구한말, 일제시대에 나타나는 민족주의, 즉 민족주의사학을 잉태하고 준비해 가는 과정이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3 1910년대의 민족주의 사관 : 민족사학의 성립우리나라 근대역사학의 성립은 대부분 신채호의 역사학으로부터 그 기원을 잡고 있다. (신채호를 우리나라 근대역사학의 확립자로 보려는 점에서는 대부분의 학자가 견해를 같이한다. 그러나 그 성립 시기에 있어서는 신채호의 편찬을 기점으로 보는 구한말설과, 이를 근대역사학의 태동기로 보고 1920년대에야 비로소 근대 민족주의적 역사학이 성립되었다고 보는 1920년대 설이 있다.) 그러나 애국계몽주의 역사학으로부터 근대역사학으로 전환하는 데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박은식의 역사의식과 역사서술이다. 여기서는 신채호와 박은식의 역사학에 대해 주목하고자 한다.신채호는 박은식의 역사학을 계승하되, 그의 역사의식에서 볼 수 있었던 한계를 극복하고 이론적으로 우리의 근대적 역사학을 완성시킨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초기 민족사가들의 이른바 영웅중심의 사학은 신채호에 의해 선행되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신채호는 1910년을 전후하여 「수군제일이순신전(水軍第一李舜臣傳)」,「을지문덕(乙支文德)」,「동국거걸최도통전(東國巨傑崔都統傳)」을 저술하였다. 이는 1906년「이태리건국삼걸전(移太利建國三傑傳)」을 역술하며 우리 국사상의 삼걸로 을지문덕·최영·이순신을 역사의 주체, 변혁의 초월적 존재로 파악하여 서술한 것이다. 그는 영웅은 세계를 창조한 성신(聖神)이며 세계는 영웅의 활동하는 무대 라 믿었다.단재 사학의 출발은 기존 사서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그가 김부식 등 전통사가 이래 구한말 에 이르는 사가들에 의해 민족사가 탕잔(蕩殘)되었다고 통렬히 비판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신채호의 비판의 대상이 된 것은 국내뿐만 아니었다. 그는 일본과 중국의 기록도 참 조선사 가 아니라고 하였다. 즉 조선사에 대한 중국의 기록은 그들의 자존성으로, 일본의 기록은 그들의 정치적 침략야욕으로 고의적으로 왜곡한 것이란 지적을 했다. 따라서 중국찬에 착수한 것이었다.「한국독립운동지혈사」는 1884년의 갑신정변부터 3·1운동 직후인 1920년까지를 서술한 것으로 「한국통사」의 속편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 박은식 자신은 조국의 독립과 일본의 패망을 확신하면서도 진정한 광복사가 아니라 독립운동사로서 저술함에 유감을 표하고 있다. 그러나 독립에의 강한 자신감을 피력하면서 독립이 된 뒤 이 책을 광복사로 인정하여도 좋을 것이라는 소감을 피력하였다. 이로써 볼 때 박은식의 저술은 1864년부터 1920년까지의 한국근대사를 최초로 체계화한 것으로, 또한 이를 통해 독립사상을 크게 고취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특히 본서는 통계를 이용한 역사서술이 독특한데, 이 통계자료는 지금까지 근대사, 독립 운동사를 서술할 때 그대로 원용되고 있는 아주 중요한 자료이다.4 1920년대의 민족주의 사관1920년대에 들어 민족사학계는 커다란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3·1운동의 결과 식민지배 정책을 근본적으로 수정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일제는 이른바 문화통치를 표방하였다. 그 결과 외형상 고등의 기만적 형태이기는 하나 언론과 문화활동에 대한 강압을 완화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민족사학도 1910년대의 것을 계승하여 민족주의적 색채를 보다 강렬하게 발하게 되었다. 반면 실제에 있어서 민족사학계는 일제의 조직적이고 총체적인 한국사 왜곡에 대응하여야 할 보다 큰 시련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 결과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지 못하고 일제의 식민사학에 참여하는 일부의 한인들이 나타나 이른바 타협적 민족사학 이 전개되는 왜곡적인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1920년대에 국내에서는 남궁억·권덕규·최남선·이능화·안확 등이 중심적으로 활동하였으며, 국외에서는 신채호의 정열적인 역사연구가 계속되었다. 이 시기의 단재의 저술로는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草)』(1920년 완성, 1924∼1925년「동아일보」연재).「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1923),「조선사(朝鮮史)」(1924),「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1931년「조선일보」연재),이를 전후한「조선다.역사란 무엇이뇨. 인류사회의 아(我) 와 비아(非我) 의 투쟁이 시간부터 발전하며 공간부터 확대하는 심적인 활동의 상태의 기록이니, 세계사라 하면 세계 인류의 그리되어온 상태의 기록이며, 조선사라면 조선민족의 그리되어 온 상태의 기록이니라…….그리하여 아 에 대한 비아 의 접촉이 번극(煩劇)할수록 비아에 대한 아 의 투쟁이 더욱 맹렬하여 인류사회의 활동이 휴식될 사이가 없으며 역사의 전도가 완결될 날이 없나니 그러므로 역사는 아 와 비아 의 투쟁의 기록이니라.{「조선상고사」總論(「단재전집」上.p.31.)이 정의는 관념론적이기는 하나 역사발전의 합법칙성을 추구하였고, 근대 민족국가의 형성 과정에서 겪어야하는 냉엄한 생존경쟁의 국제현실을 반영한 내셔널리즘적 역사인식을 체득한 점에서 단재 신채호는 민족사적 국사상(國史像)의 정립자라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5 1930-40년대 민중적·신민족주의적 사학국내 민족주의 세력은 3.1운동 이후 일제가 문화정치를 표방하자 타협적 세력과 비타협적 세력으로 나뉘어져 갔다. 실천적 관점에서 보면, 타협적 세력을 민족주의세력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것은 문제가 없지 않다. 하지만 민족주의세력의 분화와 운동론 의 실체를 파악한다는 의미에서 타협적 민족주의세력을 먼저 살펴보자.민족개량주의세력 또는 부르주아 민족주의 우파로 불리는 타협적 민족주의세력의 정치사상과 운동론은 자강운동론 에서 출발하여 1910년대에 선실력양성·후독립론으로 나타났다. 그들은 실력양성론에 근거하여 신교육의 보급, 구 관습 개혁을 토한 신문화의 건설, 산업발전을 통한 민족자본의 양성 등을 실천과제로 설정했다. 실력양성론은 조선사회의 근대화 란 측면에서 한정적 의미를 지닌다고도 볼 수 있으나, 민족 해방운동론의 측면에서는 독립을 부차적 과제로 설정함으로써 1920년대 초반 이후 일제식민지 지배 권력에 대해 타협적이며 개량주의적인 문화운동으로 나타날 수 밖 에 없었다. 타협적 민족주의세력은 1920년대 중반부터 독립을 포기하는 자치운동론을 내세움으로써 민족해방운동 대열 끝내고 파시즘체제를 강화시켜나갔다. 특히 세계공황의 여파로 궁지에 몰린 일본이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 등 침략정책을 본격화하면서 식민통치는 더욱 혹독해졌다. 1930년대에는 독립운동전선에도 이데올로기의 분화와 갈등이 첨예화되고 있었다. 1920년대를 통해 타협적인 성향을 나타내던 민족주의자들은 대부분 친일화되었으며, 사회주의사상의 도입에 따른 공산주의운동은 코민테른과 연결되면서 소작쟁의와 노동쟁의를 통해 확산되고 있었다. 이러한 공산주의운동은 민족독립운동진영 내부에 좌·우익의 갈등을 심화시키고 있었다.이 시기에 우리 역사학의 흐름은 크게 세 줄기로 나누어졌다. 첫째는 진단학회(震檀學會)를 중심으로 순수 아카데미즘을 표방하면서 역사학의 전문화와 문화사로의 영역 확대를 최우선의 과제로 삼은 실증주의사학의 흐름이다. 둘째는 사적 유물론을 우리 역사에 도입하여 적용하려 한 사회경제사학이며, 셋째는 일제와의 타협을 거부하는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을 중심으로 1920년대 민족주의사학의 정신을 계승한 민족주의사학이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해방 이후 신민족주의사학으로 발전해갔는데 1930년대와 1940년대의 정인보·안재홍·문일평 등은 바로 민족주의사학의 흐름을 이어간 인물들이었다.6 해방 후∼1950년대 민족주의 역사학1945년 이본제국주의의 패망과 함께 전 민족이 그토록 소망하던 주권을 회복하였으나, 한반도는 남북분단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남한만 하여도 좌우익이 나뉘어 사상적 투쟁과 갈등을 겪게 되었고 기반이 약한 정부정책에 국민들의 경제적 환경 역시 최악이었다. 따라서 독립을 성취한 기쁨도 잠시이고 새로운 불안감과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러한 환경에서 일부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광복 이후 우리가 나아가야 할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역사인식을 내놓았다. 그 가운데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이 바로 신민족주의이다. 안재홍·손진태·이인영·조윤제 등을 대표로 하는 이들 신민족주의 학자들은 광복 후 당면과제인 통일 민족국가를 건설하고 민족구성원.
무덤과 부장유물무덤이란 시체나 유골을 묻은 곳을 의미한다. 처음에는 단순한 시체처리 방식이었으나 공동체 생활로 인간적 감정을 가진 이후에는 추모의 의미로서 조형물을 만들게 된 것이라 생각된다.구석기 시대의 무덤은 유적은 남아있지 않으나 다른나라의 경우를 비교해 보면 간단한 토광묘인 것으로 추정된다. 신석기 시대에는 석묘가 존재하였으며 인위적 시설이라는데 의미가 있다.청동기 시대인 고조선-삼한 시대의 무덤양식은 크게 5가지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석관묘는 매장부를 얇은 판석으로 짜맞춘 목판 모양의 무덤으로 석관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석곽묘는 토광을 파고 바닥에 돌을 깔고 나무로 천장을 덮고, 그 위에 돌을 쌓아올린다. 지석묘는 고인돌이라고도 하며 그 양식을 크게 북방식, 남방식, 개석식으로 나눌 수 있다. 옹관묘는 주로 남부지역에 분포하며 항아리에 시체를 넣어 매장하는 방식이다. 토광묘는 전통적인 무덤양식으로 땅을 파서 시체를 묻는 방식이며 그 양식에 따라 순수 토광묘, 목곽 토광묘, 석개 토광묘 등으로 나뉜다.▶우리나라에서는 청동기 시대의 무덤에서부터 부장 유물을 볼 수 있는데, 크게 토기류, 의기류, 무기류, 거울 등이 있다. 우선 토기류는 무문토기로 토기의 색깔은 적갈색으로 바닥의 형태는 평저형이고, 낮은 온도에서 구워져 흡수성이 강하고 경도가 낮다. 석기류는 간돌검, 돌살촉 등이 출토되며 청동기는 청동기 유입기의 유물과 한국적 특성을 띠는 유물 두 시기로 나눌 수 있는데 대체로 무기류, 말갖춤, 거울 등이 있다.고구려의 무덤은 크게 적석총과 봉토분으로 나눌 수 있다. 적석총은 지면을 고르고 1m정도의 단을 쌓고 목관을 안치한 후 돌을 계단식으로 쌓는다. 봉토분은 돌로 쌓은 현실을 봉토로 덮은 것인데 벽은 회를 칠하거나 판석의 표면에 벽화를 그렸다.▶고구려는 고분 구조가 석실모양이 주가 되어 파괴, 도굴되기 쉬웠다. 나·당 연합군에 멸망한 왕조인 까닭에 이미 그 때부터 도굴을 당하여 남아 있는 유물이 적은 편이다. 그러나 평양 청암리의 부장품과 태환이식이나 세환이식등의 장신구이외에도 여러 장신구와 호우총에서 발견된 고구려 명문이 있는 청동분은 신라에 끼친 고구려의 영향을 알 수 있다.백제는 수도의 변천에 따라 무덤의 양식이 다르다. 먼저 한성 시대에는 적석총과 봉토분으로 나뉜다. 적석총에는 고구려처럼 돌로만 쌓은 것과 내부를 흙으로 채우고 표면을 돌로 쌓은 두가지 형태가 있다. 웅진시대에는 적석총이 소멸되고 석실분은 장방형의 형태를 띤다. 중국의 영향을 받은 전축분도 만들어지는데 무령왕릉이 대표적이 예이다. 사비시대에는 석실분이 주류를 이루며 천장양식이 다양하게 나타난다.▶백제의 부장유물에서 용원리 고분군은 백제 초기의 움무덤 137기와 돌덧널무덤 13기등이 확인되었다. 다량의 퇴기 및 철기등의 유물이 출토되고 배제 토기가 다량 출토됨(백제 특유의 검은 간토기와 계수호가 출토). 돌덧널 무덤에서도 토기외에 금동제 단봉문 환두대도, 금동제성시구, 마구류가 출토되었다.가야시대의 대표적인 묘제로는 횡혈식 석실묘가 있다. 주로 구릉지대에 조성되며 구덩이를 파고 돌을 쌓아 벽을 만들고 그 안에 관을 안치하고 뚜껑을 덮고 봉토를 덮는 양식이다.▶가야의 부장유물은 고령 지산동 고분군에서 대가야 특유의 부장 유물과 주인 외의 인골이 출토되어 순장의 형태를 볼 수 있다. 대성군 고분군은 동복 파형동기, 통형동기 등의 청동기와 벽옥제옥장등의 옥류와 구슬류, 철기류가 출토되었고 또, 철제 띠를 두른 인골이 출토되었는데 이는 이 지역의 지도자적인 위치에 있었음을 보여 주며, 후대의 금동관도 같은 역할을 한다. 복천동 고분군은 군사조직 및 정치사회의 구조를 구명할 수 있는 철제 갑옷이 다량 출토되었다. 유자이기는 다분히 수장층 또는 지배층을 상징하므로 각 지방에 있어서 독립적인 수장권력을 의미하며, 철정은 고대에 있어서는 강력한 통치의 수단이 되는데 규격이 경주와 뚜렷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신라의 대표적인 묘제는 적석 목곽분으로 가야의 횡혈식 석곽묘와 달리 평지에 조성되었다. 적석 목곽분은 구덩이를 파지 않고 목곽속에 목관을 안치하고 목곽 상부에 돌을 쌓고 그 위에 봉토를 덮는 형식이다. 규모가 대체로 크며 경주의 평야지대에 집중 분포되어 있다.▶부장품으로 특이한 것은 구정동고분군에 무덤바닥에 긴 쇠창을 깔아 부장했다는 것이다.월성로 고분군은 고구려(연유토기)와 가야(나팔모양의 굽은 토기)의 문물이 발견되고, 일본 토기도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활발한 국제 교류를 알 수 있게 하는 유적이다. 안계리 고분군에서는 유리잔이 발견되었고 천마총은 천마도를 비롯한 여러 가지 유물이 발견 되었으며, 금관총도 금관을 비롯한 여러 유물이 발견 되었다. 황남대총은 남분 북분에서 서로 다른 성격의 부장품이 발견되었는데 남분은 남성 북분은 여성의 것으로 추정된다. 계림로 고분군은 서역과의 교역관계를 알 수 있는 장식보검, 금장귀면장식 등이 출토, 토우가 붙은 항아리에서 당시의 민속신앙이나 풍습 또는 생활상을 알수 있다.통일 신라 시기에는 규모가 작은 석실분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인다. 당시 유행하던 불교의 영향과 함께 왕권강화로 인한 귀족세력의 약화 등이 이유로 보인다. 그리고 고분의 입지가 구릉으로 바뀌었는데 이것은 풍수지리의 영향으로 보인다. 그리고 골호가 많이 출토되었는데 이것은 불교의 융성으로 화장법이 유행한 것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왕릉은 소형화되었지만, 중국의 천자릉을 축소한 것 같은 형태로 발전하였는데, 십이지신상을 조각한 병풍석, 난간과 복도, 분구 네귀의 석사자상, 귀수와 이부를 갖춘 능비, 문·무인석, 화표석 등을 배치한 것이 바로 그 것이다. 통일신라 왕릉의 기본형식은 고려와 조선시대의 왕릉에까지 계속되는 한국식왕릉의 시작이라는데 의의가 있다.
한국의 그림 정리우리나라의 선사시대 그림으로는 대표적으로 바위그림과 농경문 청동기를 들 수 있다. 먼저 바위그림은 바위의 표면에 주술적 의미가 있는 그림을 그린 것으로 각종 동물, 인물, 배 등이 새겨지는 동물그림과 동심원문 등 기하학적 무늬를 새긴 도안화로 나누어진다. 농경문 청동기는 의기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종교적 의미의 새그림과 농사짓는 인물 등이 그려져 있다.삼국시대의 그림 중에서 고구려의 그림을 살펴보면, 고구려는 삼국 중에서 가장 일찍 중국의 회화를 받아들여 발전의 토대로 삼은 나라이다. 그러면서도 고구려 특유의 힘차고 율동적인 회화성을 가미시켰다. 고구려의 벽화고분은 벽면에 회를 칠하거나 혹은 바로 벽면에 벽화를 그렸다. 고구려의 벽화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초기의 벽화는 대체로 4∼5세기 전반에 그려진 것으로 주로 인물풍속도를 그렸다. 대표적인 벽화로 안악 3호분의 묘주 부부도를 들 수 있다. 중기의 벽화는 5세기경에 그려지며 삶에 대한 기록적, 설명적 요소가 많이 나타나는데 자연히 풍속화적 성격을 띤다. 대표적으로 무용총의 무용도와 수렵도를 들 수 있다. 후기는 6세기 후반∼7세기 전반의 것인데 사신도가 벽화의 주류를 이룬다. 이것은 불교적 요소가 쇠퇴하고 도교적 색채가 강해졌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전 시기보다 세련되고 힘차며 채색도 더욱 선명하다.백제의 회화를 살펴보면, 백제의 회화는 중국 남조의 영향을 많이 받아 백제 특유의 유연하고 부드러운 느낌의 양식을 형성하였다. 또한 일본의 고대 회화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회화자료가 많이 남아있지 않으나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두침, 청동잔에 새겨진 문양, 동탁 은잔, 그리고 공주 송산리 6호분과 부여 능산리 고분에서 발견되는 벽화로 백제의 회화를 짐작해 볼 수 있다.신라의 회화는 천마도, 기마인물도, 서조도 등의 공예화로 살펴볼 수 있는데, 고구려의 영향을 많이 받은 듯 하다. 그 외 에도 벽화 고분이 발견되어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음을 재확인 시켜준다. 힘찬 고구려의 회화나 부드러운 백제의 회화와는 달리 신라의 회화는 사변적인 느낌을 준다.통일신라 시기에는 성격을 달리하던 삼국의 화풍이 서로 조화롭게 통합되었을 것이다. 통일신라 시기의 유일한 회화 작품으로는 변상도 하나만이 전해질 뿐이다.삼국시대와 통일신라 시기에 화원들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회화가 고려에 와서는 왕공 귀족과 선승에게까지 펴져 화가 계층이 넓어지고 소재도 인물, 초상, 산수, 영모, 화조 등으로 다양화되는 경향을 띠었다. 또 화원을 양성하고 화사를 관리하던 도화원을 설립하였다. 초상화는 주로 제왕, 공신, 기타 사대부들의 초상을 그렸고, 인물화는 유연한 선묘를 위주로 해서 그렸다. 산수화는 우리 나라에 실제로 존재하는 경치를 대상 삼아 그려진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외에도 불교, 유교, 도교 등의 종교화도 많이 그려졌다.조선시대에는 왕조 통치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시각매체로서와 문인사대부의 미술로 즐겨 그려졌다. 특히 사대부는 그림을 상호간의 감흥교류와 심의 표출 및 심성수양의 매체로 삼았다. 개국 초부터 도화원을 확장·설치하고 화원들을 조직적으로 양성했던 조선시대에는 산수화, 사군자 계열을 중시했으며, 인물화, 풍속화, 화조화 등은 상대적으로 경시했다. 조선초기의 회화 경향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안견의 화풍으로 안견은 이전의 전통을 섭렵하여 여러 대가들의 장점을 참고하여 자신의 화풍을 형성하는 토대로 삼았다. 그 중에서도 북송의 곽희파 화풍과 남송의 마하파 화풍이 특히 중시되었는데 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또 다른 화풍으로 강희안의 화풍을 들 수 있는데 안견이 자연이나 산수를 중심으로 그림을 그렸다면, 강희안은 인물이 중심이 되고 산수는 배경이 되는 그림을 그렸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강희안의 를 들 수 있다. 마지막으로 16세기 전반의 이상좌의 화풍이 있는데 이상좌는 산수화·인물화에 모두 능하였고, 산수화에서는 마하파 화풍을 적극 수용하였다. 그외에도 조선초기에는 이암, 신사임당 등의 영모도, 초충도 등이 그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