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에서 나타나는 여성의 억압된 리비도과 목:성과 문학학 번:200040651성 명:양 혁 준영화의 배경이 되는 19세기 영국 런던은 근대화가 일어난 도시이다. 빛의 도시, 즉, 이성이 지배하는 사회다.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혹은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자연을 적대시하고, 크리스트교의 금욕적 세계관이 만연하고 있는 시대이다. 이에 반해 트랜실바니아는 유럽의 변두리에 위치하여, 안개?어둠의 땅, 늑대의 울음소리로 표현되는 어둠의 세계, 즉, 야만적이고 이성의 법칙)에 벗어난 곳으로 표현된다. 드라큘라는 괴기한 모습을 하고 있고, 이성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행동을 하는 근대사회의 위험한 존재로 표현된다.) (드라큘라와 계몽의 변증법,207페이지)그러나 여기서 나타나듯이 드라큘라는 더 이상 이해할 수 없는 존재가 아닌 열정적 사랑)을 하고 있는 한 인물로 보여준다. 이런 열정적 사랑이야 말로 반근대적인 행위일 것이다.)여기서 나오듯 근대사회에서 자유연애가 있었지만, 동일계급안에서 한정된 아내를 선택하는 것이다. 이런 모습은 루시가 4명의 남자들 중에서 누구와 결혼할지 고민하는 부분에서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드라큘라와 미나는 계급 상으로 아주 많은 차이가 나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환생한 아내를 열정적으로 사랑한다. 이런 자유로운 모습은 근대사회에서 부의 축적의 개념인 결혼에 거스르는 행위이자 근대사회 이성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감정적인 행동일 것이다.드라큘라는 미지의 재료로 만든 묘약을 미나에게 마시게 한다. 이 미지의 묘약은 미나에게 전생의 기억을 되찾게 하고 미나의 억제된 리비도를 일깨워 준다. 드라큘라를 만나기 전에 미나는 기독교의 금욕적인 생활의 강요로 인해 자신의 성적욕망을 억제하고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 했다. 그런 미나를 금욕적인 생활에서 벗어나게 함으로 그 둘은 열정적 사랑에 빠진다. 이런 열정적 사랑은 사회의 질서에 위험한 존재이자, 이성의 시대인 근대사회에서 금기시해야하는 것이다. 열정적 사랑에 빠진 사람은 오직 사랑하는 대상을 맹목적으로 따르기 위해 이성과 자신을 버리는 모습을 보이는데, 그것은 광기라 봐도 무방할 것이다.이런 광적인 모습은 드라큘라에게 지배당하는 루시에게도 잘 나타나있다. 그녀는 욕망을 표현하는 유일한 사람이기 때문에 벌을 받는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드라큘라에 의해 감각적으로, 관능적인 음탕함으로 바뀌었다.) 이렇게 드라큘라가 루시의 성적욕망을 해방시켜줌으로써 루씨는 이성을 점점 잃어가고 남성을 유혹하기 시작한다. 죽기 직전에는 남성을 성적으로 유혹하고 피를 마시기 위해 광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녀를 죽이기 위해서는 목을 자르고, 심장에 못을 박아야한다. 즉, 이성인 머리를 감정인 심장과 격리시키고, 감정인 심장에 못을 박음으로써 완전히 루시는 이성과 감정이 격리되었다. 이런 의식은 이성을 중시하고 감정을 억제해야하는 근대사회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천년의 숨결 미륵사백제 무왕 대에 건축된 미륵사는 삼국유사에 의하면 미륵사상에 의해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81년 발굴 조사된 바에 따르면 폐찰된 시기는 임진왜란 때로 추청 되며 가람배치는 동양에서는 유일한 예로서 탑1기와 금당 한 채가 하나의 원을 이루고 그러한 원이 셋이 모여 구성된 배치인 3탑3금당 형식이다. 또한 미륵사지 석탑은 이 미륵사지 탑 안에 있으며 국보 제 11호로 지정되어 있다. 목탑을 그대로 돌로 옮겨 만든 느낌을 주는 이 탐은 현재 6층까지만 남아있으나 7층 이상의 탑으로 추정되며 반쯤 무너져 버린 것을 식민지시기에 일본인들이 볼품없이 시멘트로 보수하여 반쪽 탑의 형태로 전해지고 있다.그러나 신라 황룡사의 두 배 규모의 미륵사는 우리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은 사찰이다. 고등학교 시절 내가 국사를 배울 적에도 미륵사보다 황룡사에 대한 공부를 더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단지 백제의 사찰이라는 것 외에는 별 다를 것 없는 우리에게 많이 남아 있는 사찰 일 뿐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규모는 우리나라의 최대 규모의 가람인 동시에 미륵사지 석탑은 우리나라의 첫 석탑이었다. 석탑의 나라에 세워진 첫 석탑은 내가 알고 있던 탑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 느낌은 석굴암의 실체를 알게 되면서 느꼈던 것과 비슷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의 유물들은 너무나 우리의 역사와 닮아 있었다. 너무나 많은 시련을 겪어 소실되기도 하고 엉망으로 보수된 모습이었지만 그 시절 어떻게 저렇게 큰 규모 훌륭한 모습의 석탑을 만들 수 있었을까....이다.또한 미니어쳐로 만들어진 미륵사의 모습은 그 시절 미륵사의 위상을 짐작하고도 남을 정도의 느낌이었다.백제 무왕시절 만들어져 임진왜란 때 소실 대기 이전 천년동안 미륵사는 우리나라 최고의 사찰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미륵사의 존재만으로도 우리의 불교문화가 얼마나 훌륭했는지 너무나 잘 보여주고 있다. 물론 현재 미륵사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복원된 동탑마저도 우리에게 시간의 흔적은 보여주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가지고 있던 복원의 이미지를 깨버릴 만큼 너무나 장대하고 아름다웠다. 목조형식의 이 탑은 첫 석탑인 만큼 매끄러운 모습은 아니었지만 백제의 다른 유물들처럼 큰 규모에 어울리지 않는 부드러움이 담겨 있었고 그 이후에도 현존하는 많은 탑들에 영향을 주었다. 아직까지도 서탑은 일제의 엉성한 보수에 의하여 흉물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우리의 역사이기에 안타까움이 더하는 것 같다.
석굴암에서 대해서는 그냥 유네스코 지정 문화재이고, 재건축을 잘못해서 안에 이슬이 심하게 고인다는 단편적인 부분만을 알고 있었다. 고등학교 때 한 번 수학여행으로 가봤지만 그냥 “돌부처가 있는 굴이구나”라는 생각만하고 대충보고 지나쳤다.근데 이번 VTR자료를 보면서 석굴암이 단순한 굴이 아니라 아주 정교하게 지어진 건물인 것을 알았다. 원래 석굴은 인도와 중국에서 유래되었는데 우리나라는 중국과 같이 약한 돌을 깍아서 만든 것이 아니라 단단한 화강암을 깍고 조립한 건물인데 돌사이가 1센치의 오차도 없었다. 이것으로 보아 석굴암이 얼마나 정교하게 만들어 졌는지 알수 있다. 지금의 석굴암의 모습은 옛날 우리 선조들이 만든 모습이 아니라 중간에 일본과 우리나라가 보수공사를 한 모습이다. 옛날 농민들의 반란으로 석굴암 앞부분이 부서진 것으로 추정되는 데, 그것을 일제시대때 일본이 자국의 위대함을 보이기 위해 석굴암을 전면 해체하고 수리했다고 기록이 남아있다. 그때 남은 사진자료만으로 옛날의 석굴암의 모습을 추정할 수가 있다. 그때 일본이 수리할 때는 그 당시 최신식 기술인 석굴암을 시멘트로 둘러싸고 입구를 만들었는데 모양이 꼭 기차터널 같은 모습이었다. 그 후로 석굴암에는 이슬이 맺기 시작하고, 그 후 우리나라에서는 그 이슬을 제거하기 위해 계속적으로 보수공사를 했으나 아직도 석굴암에는 계속 이슬이 맺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어떻게 석굴암이 삼국시대부터 근대까지 옛모습 그대로 남아있을 수 있었는지 궁금증이 생기게 됐다.그런 이유로 석굴암이 구조를 조사한 결과 아주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기하학적으로도 12당척이란 기준으로 만들어 졌다. 아주 만들어져 아주 정교하게 만들어 졌다고 할 수 있다. 다시 한번 우리 선조의 손재주에 감탄했다. 그리고 석굴암이 서양의 인공적인 건축물이 아니라 자연을 이용한 건축물이라는 점이 더욱 놀라웠다. 앞에서 언급한 적이 있는데 석굴암이 재건축하기 전에는 내부에 전혀 이슬이 맺이 않았다는 점이다. 그것은 석굴암의 주변 자연을 활용하여 바닥을 차게 하고 석굴암 주변을 흙으로 덮어 습기가 위로 가지 않게 하고 밑에 이슬이 맺게 하는 자연친화적인 건물이자 우리 조상들이 생활의 지해가 들어있는 건물이다.
운주사를 다녀와서.....서울에서 버스를 타고 네 시간.... 광주 버스터미널에서 다시 두 시간 정도 버스를 타고 어가야만 운주사를 볼 수 있다. 아침 8시에 출발해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버스를 타고 가다보니 도착한시간이 1시. 점심만 재빨리 먹고 버스시간에 맞춰 나갔는데도 불구하고 3시쯤에야 운주사에 도착할 수 있었다.그것역시 운주사까지 들어가는 버스가 청룡열차와 비슷한 속도로 달렸기 때문 이었을 꺼다. 내 생전 그렇게 빠른 버스는 처음 봤던 것 같다. 덜컹거리며 질주하는 버스였지만 그래도 시골의 인심은 아직 존재하는지 가짜 승차권을 내고 탄 아주머니를 잡아내고 살짝 훈방조치만 취하시는 기사아저씨는 슬쩍 우리 입가에 미소를 띠게 했다. 버스를 타고 점점 시가지에서 벗어나고 인적이 드문 시내를 지나치면서 너무나 한적한 운주사에 도착했다. 내리고도 어리둥절해 어디로 들어가야 할지 해매고 있자 기사아저씨가 가던 길을 멈추더니 오른편으로 5분정도만 걸어 들어가라고 하셨다.겨울이라 쌀쌀한 날씨와 금방이라도 해가 질 듯한 하늘은 나에게 더욱 한기를 느끼게 했다. 그리고 그렇게 오 분정도를 걸어가자 운주사의 입구가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운주사를 접하게 된 건 지난번 사이버 강의에서였는데 운주사는 나에겐 충격 그 자체였다. 그래서 예전에 석굴암을 다시 접했을 때 보다 더 직접 내 눈으로 저곳을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아마도 그것은 우리가 항상 접해왔던 유물, 유적들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그것도 그런 것이 운주사에는 어떠한 거만도 존재하지 않을 만큼 소탈하면서도 미숙하고 따뜻하면서도 아기자기한 우리네 서민들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처음 들어가는 입구에서 입장료를 내면서 언제까지 봐야하냐고 물었더니 마음대로 있고 싶을 때까지 있으라고 했다. 거스름돈을 새 돈으로 주며 말하는 점원의 얘기를 들으면서 기분 좋게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도착했을 때가 세시쯤이어서 금방이라도 해가 질 듯한 하늘아래 입구를 지나 처음 만나게 된 불상들은 조금 추워 보이는 모습으로 그렇게 벽에 기대어 서있었다.동영상속에서의 운주사의 불탑들은 굉장히 따뜻한 느낌에 아기자기한 인상을 주었지만 겨울날의 해가 그렇듯이 어둑한 분위기 속의 불상들은 외로워 보이기도 평화로워 보이기도 하는 것이 마치 지금의 이 분위기를 스스로 즐기는 듯 고독해 보였다. 역시나 크리스마스와 절이 어울리지 않기 때문인지 한산한 가운데 앞에는 스님들이 종종걸음으로 걸어가고 그 뒤를 누렁이 졸졸 따라가는 모습이 꽤나 정겨워 보였다. 그리고 쭉 늘어서 있는 탑들과 길 가장자리마다 기대어 서있는 불상들.......탑들은 생각 외로 규모가 컸고 동영상에서 보다 더욱 투박스런 모습이었다. 탑들의 모습은 역시나 우리가 역사책에서 봤던 탑들과는 너무나 달랐는데 너무나 대담한 탑들의 모습은 현대미술 연상시킬 만큼 모던한 느낌마저 들게 했다. 단순한 모양에 기하하적인 문양들...... 불상들은 담백한 얼굴과 아기자기한 느낌을 가지게 했다. 동영상에서 볼 때 미완성의 느낌을 받았다면 실제로 봤을 때는 어떤 한사람의 습작들을 쭉 나열한 듯 한 느낌이었다. 거친돌을 아무렇게나 쌓아 올린 탑, 넓적하고 동그란 호떡모양의 돌을 쌓아 올린 탑, 크기가 다른 솥 네 개를 차례차례 쌓아 올린 탑 등, ‘까르르’ 하며 절로 미소를 머금게 하는 그런 재치를 느끼게 하는 탑들의 모습이었다. 그런 맘들이 전해져서일까...... 가는 곳곳마다 사람들이 쌓아올린 조그마한 탑들이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천천히 탑들과 그리고 불상과 친해지고 나서 삼존여래불과 공사바위를 보러 산으로 올라갔다. 올라가는 길이 험해서 왜 이런 곳에 제대로 된길을 만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힘들게 힘들게 올라가고 보니 나무로 만든 계단이 옆쪽 길로 나있었다.이 곳의 이미지가 그렇듯 그저 사람의 발걸음으로 만들 길로 온 것이구나 생각하니 피식하며 웃게 됐다. 그리고 앞을 보니 커다란 바위가 시야를 막고 있었다. 어딜 봐야할지 몰라 무작정 공사바위 위로 올라갔다. 공사바위에 올라 탑들이 널려있는 운주사를 바라보고 있자니 이 곳에서 돌을 캐던 조각가의 마음을 떠 올릴 수 있었다. 누가 이곳에 이렇게 많은 탑들을 쌓아 올려는 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그저 이 곳에서 돌을 캐고, 캐다 힘들면 이렇게 이 곳에서 하늘을 바라봤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공사바위를 들러보고 내려오자 밖이 깜깜해지기 시작했다. 조급한 마음도 들고 바로 와불을 보러가는 길에 네 개의 솥을 올려놓은 듯한 탑을 만나게 됐다. 정말 재미있는 곳이다. 곳곳에 이렇게 재미있는 이야기가 가득하니... 이게 바로 천불천탑이 느낌일까... 쉴 틈을 주지 않는다. 또한 혹 누군가가 비장한 마음으로 이탑을 새웠을 지라도 1000년이 지나 우리에게 이런 따뜻한 느낌을 가질 수 있게 한다면 세상 그만한 예술가가 어디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민족의 구심점, 민족의 애환우리나라의 문화재들은 많은 수난을 겪었다. 그리고 지금도 겪고 있다. 특히 일제 강점기때, 일본이 우리나라를 식민지화 시키기 위하여 우리나라의 문화재들을 회손시키거나 일본 중심으로 재건축했다. 이런 모습은 우리나라의 궁궐인 경복궁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특히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에도 불에 타버린 적이 있었다. 그 후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일제에 의해 조직적으로 훼손되는 수난을 겪게 된다. 조선총독부를 건립하면서 홍례문과 주위의 행각, 영제교 등이 철거되었다. 또 ‘시정 5년 기념 조선문산공진회’를 경복궁에서 개최한다는 핑계로 경복궁의 중요 전각 몇 채를 제외하고 대부분들의 전각들을 헐게 한다. 조선물산공진회는 일종의 산업박람회로 '낙후된 조선이 한일합방후 일본에 의해 눈부시게 발전을 했다'는 일제의 왜곡된 선전장으로 활용되었다. 하지만 그 내용을 보면 우리나라의 소개보다 일본의 기업을 소개하는 공간이 더 많았다. 또한 동궁은 일본요정에 팔려 일본으로 옮겨가는 등 수난을 겪기도 한다. 이렇게 일제가 경복궁을 회손시킨 모습은 아직도 곳곳에 남아있다.그리고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으면서 흥례문과 그 일대가 완전히 철거된다. 원래 경복궁은 관악산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일제시대 때 조선총독부를 3.5° 옆으로 기울여 지어서 지금의 광화문이 남산을 향하고 있다. 일제시대 때는 남산에 신궁이 있었다. 이것은 우리의 혼을 말살시키기 위해 만든 것이다. 이렇게 일본은 경복궁을 조금씩 변형시키면서 경복궁의 제모습을 완전히 잃게 만들었다.하지만 일본만이 경복궁을 회손시킨 것은 아니다. 해방된 후에도 우리나라가 경복궁을 지키려는 노력이 부족하였다. 일제가 만든 건물들을 그대로 방치하거나 아님 다른 이름을 걸어 재활용 했다. 이렇듯 우리나라는 일제가 경복궁을 회손시킨 건물들을 그대로 사용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우리나라가 경복궁 관리소를 경복궁 안에 지어 놓으므로 경북궁의 미관을 회손시켰다. 지금은 경복궁 복원의 일환으로 많이 복원되고 있지만 아직도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많다. 하지만 우리의 불감증이 더 문제일 것이다. 우리들의 인식에는 아직도 우리나라의 문화재의 손실에 대한 경각심이 부족하다. 경복궁 내에 잔디밭을 그냥 보기 좋다는 이유로 경복궁을 찾고 있지만은 원래 그곳에 있던 전각들을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이다. 이제부터라도 우리들은 아름다운 우리 문화재의 현실을 정확히 알고 보존하는데 힘써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