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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순원] 황순원 연구
    건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014669 이승은1. 서론황순원 - 선비 정신과 인간 구원의 길황순원은 1931년 17세의 나이로 작품활동을 시작하여 현재까지 식민지 시대의 암울한 상황에서부터 해방의 어수선한 상황, 피비린내 나는 동족 상잔의 비극, 개발?군부 독재 시대의 사회 경제적인 변화를 두루 겪은 우리 현대사의 증인이며, 한국 현대문학사의 중심에서 영욕의 세월을 묵묵히 지켜본 선비이다. 그의 문학세계에서 중요한 주제는 부 의식의 상실과 전통 지향성, 이념의 갈등과 부조리한 현실, 소외와 인간 구원의 문제 등이다.세 가지의 주제는 어떤 의미에서 시대적인 분류를 포관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의 관심사는 대단히 폭 넓고 광범위할 뿐만 아니라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나고 있어서 그것을 시대적인 순서로 나누기에는 어려운 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시대적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주요 관심사는 비교적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문단에 등단한 시기부터 해방 전까지는 ‘부 의식의 상실과 전통 지향성’을 즐겨 다루고 있다면 해방 공간으로부터 전후 시기까지에는 ‘이념의 갈등과 부조리한 현실’을 즐겨 다루고 있다. 우리나라가 산업화 사회로 들어선 시대 이후에는 ‘소외와 인간 구원의 문제’를 즐겨 다루고 있다. 우리나라가 산업화 사회로 들어선 시대 이후에는 ‘소외와 인간 구원의 문제’를 즐겨 다루고 있다. 따라서 그릐 작품을 위에서 제시한 세 가지로 분류하여 살펴보려고 한다.2. 선비의 후예, 선비의 길황순원은 선비의 후예로 태어나서 선비 밑에서 착실히 선비 교육을 받고, 선비로 훌륭하게 성장했다. 황순원의 집안은 본관이 제안(齊安)이다. 그의 위로 조상은 효심이 극진한 순승을 비롯하여 선비의 기질을 순승으로부터 물려받은 염조, 그리고 조부와 부친에게로 이어진다. 자녀 교육에 남다르던 조부 연기(鍊基)는 자녀의 훈육을 위하여 노환에도 흐트러짐이 없이 고고하게 살다가 타계한 선비이다. 그리고 부친 찬영(贊永)은 교사 출신의 지식인이다. 그는 자식들을 모두 신식학교에 보내서 공부하게 했다. 영다. 그런데 그해 여름 방학을 즈음하여 귀국했다가 평양 경찰서에서 29일간 구류를 당한다. 죄목은 조선 총독부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시집 『방가』를 동경에서 간행한 점이다. 그해 1월 당시 일본 나고야 금성여자전문의 학생이던 양정길과 결혼하여 귀국했다가 당한 봉변이었다.같은 해 10월 신백수, 이시우, 조풍연이 주도하던 ≪삼사문학≫의 동인으로 참가하였다.1936년에는 와세다대학 제2고등학원을 졸업하고, 와세다대학에 입학하였다. 이때 동경에서 발행되던 ≪창작≫의 동인으로 참여하여 「도주」, 「잠」 등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5월에는 두 번째 시집 『골동품』을 출간하였다. 동경예술좌에서 간행한 이 시집에는 22편의 시를 수록하였는데, 사물에 대해 기지 넘치는 상상력을 만날 수 있다. 아울러 당대 현실에 대한 인식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다.와세다대학을 졸업한 다음해인 1940년 8월에는 소설을 쓴 지 3년 만에 첫 단편집 『황순원 단편집』(후에는 『늪』으로 개정되었다.) 이 작품집에는 당대의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젊은이들의 내면세계와 애정의 문제를 상당히 서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그해 여름 그는 인생의 동반자라고 할 수 있는 원응서를 평양에서 만났다. 그들은 해방 전 암담한 시기에 술을 마시면서 세상 돌아가는 형세와 문학 이야기로 울분을 삭이곤 하던 인생 친구였다. 일제의 조선어말살정책으로 발표할 길이 없던 소설을 열심히 읽고 들어주던 유일한 독자이며 청자가 바로 소주잔은 맞든 원응서였다.1941년에는 「별」을 1942년에는 「그늘」을 발표하였다. 이후 집중적으로 소설을 집필하였으나 일제의 조선어말살정책으로 작품을 발표할 기회가 없었다. 혼란스럽고 어수선한 도시를 떠나 1943년 고향인 평남으로 돌아간 그는 결코 좌절하지 않고 우리말로 작품을 꾸준히 집필하였다. 이때 쓴 작품들이 「기러기」, 「병든 나비」, 「애」, 「머리」, 「황노인」, 「세레나데」, 「노새」, 「맹자할머니」, 「물 한 모금」, 「눈」, 「독 짓는 늙은이」 등이다.생계와 작품에 대한 열정으로 많의 참담함과 어려움이 잘 나타나 있다.1953년 5월에는 단편 「학」, 「소나기」를 발표하고 9월에는 그의 두 번째 장편이 『카인의 후예』를 ≪문예≫에 연재하기 시작하여 다음해에 중앙문화사에서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이 작품은 해방 직후 북한에서 실시된 혁명운동, 지주 계급이 받은 탄압, 지주와 소작인의 갈등과 그들의 끈끈한 인간애 등을 형상화하고 있다. 그런데 상당 부분에 걸쳐 집안의 자전적인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 작품으로 그는 1955년에 아세아 자유문학상을 수상한다.1955년에는 서울고등학교를 사직하고, 세 번째 장편소설인 『천사』를 연재하였고 1957년에 그것을 단행본으로 묶어 제목을 『인간접목』이라고 바꾸어서 출간했다. 6?25의 민족적인 비극을 본격적인 장편소설로 담아낸 첫 작품이다. 1953년에서 1955년 사이에 씌어진, 전쟁과 전쟁 이후의 상황을 담고 있는 소설 14편은 『학』이라는 제목으로 묶어서 1956년 중앙문화사에서 간행하였다.1857년에는 경희대학교 문리대의 조교수로 취임하여 이 후 20년 이상 교수로 재직하면서 문학의 외길을 묵묵히 걷게 된다. 1958년에는 중편 「내일」과 단편소설이 5편 실려 있는 『잃어버린 사람들』을 출간하였다.1960년에는 장편 『나무들 비탈에 서다』를 연재하고 간행하였다. 이 작품은 연재 당시 주인공을 자살하는 것으로 처리하였으나, 단행본으로 내면서 정신적 구원 가능성을 암시하는 것으로 수정하였다.1962년부터 1965년까지는 단편「일월」을 연재하였다. 이 작품은 『나무들 비탈에 서다』의 좌절 의식과 『움직이는 성』의 구원의 미학을 이어주는 교량적 역할을 하고 있다.활발한 활동과 원숙환 활동으로 그의 문학이 더욱 전진하던 시기에 그는 부모와 친구를 잃는다. 1972년에는 부친상을, 1973년에는 친구 원응서의 죽음을, 1974년에는 모친상을 당한다. 그러한 와중에도 그는 꾸준히 창작활동을 유지하여 여섯 번째 장편 『움직이는 성』을 출간한다. 이 작품에서 어둠, 슬픔, 고통 속에서도 현실을 극복하려는 긍수아비」, 「노새」에 잘 나타나 있다.「돼지계」는 당대의 가난하고 무식한 농민들의 삶을 그릴 소설로, 표제가 상징하듯이 돼지처럼 못사는 사람들의 집단에 대한 이야기이다. 먹기를 둘러싸고 벌이는 돼지들의 행태를 논물을 둘러싸고 서로 싸우는 어른들의 행태와 대비시키면서, 당대인들의 무식하고 빈궁한 생활상을 보여주고 있다.「허수아비」는 허수아비와 같은 존재인 폐병 환자 준근이 처한 열악한 현실이 사실적으로 드러난 작품이다. 준근은 생명에 대하여 미련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그러한 모습에 거부감을 드러내기도 한다. 자신의 극한 상황이 사진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음은 그들의 삶의 여건을 보여준 다음의 인용문에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 클 것이다.「노새」는 먹이조차 줄 수 없는 열악한 상황 속에서 노새를 좋은 값을 받고 팔아치우기 위하여 온갖 계략을 구사하는 노새 주인의 삶을 통해 식민지 자본주의의 일면을 보여준다.「불가사리」는 인신 매매의 악습과 그에 대항하는 젊은이들의 삶의 편린이 어느 정도 드러나 있는 작품이다.「사마귀」는 사마귀의 이미지를 통하여 등장인물들의 관계를 풍자적으로 서술하고 있다.궁핍한 식민지하에서 불안 의식을 털어 버리고 새로운 미래를 창조하려면 잃어버린 부권을 회복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선결 되어야 할 과제이다. 작가는 열악한 현실에서 서사적 자아가 부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모습을 그의 작품 곳곳에서 보여주고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황노인」(1940), 「독 짓는 늙은이」(1940), 「그늘」(1941), 「기러기」(1942) 등이다.「황노인」은 작가가 자신의 조부를 모델로 하여 새로운 인간형을 창조해 보려고 시도한 작품이다.「독 짓는 늙은이」는 열악한 현실 속에서도 자신의 일을 포기하지 않는 송 영감을 주인공으로 설정하여 그의 장인 정신을 부각시킨 작품이다. 이 작품은 젊은 조수와 함께 달아난 아내에 대한 분노를 삭이면서 아들 당손이와 더불어 살아남기 위해 독을 굽는 송 영감의 내적 갈등을 형상화하고 있다.「그늘」은 암울한 fggg말기에서부터 해방 직후까지의 참담한 시대상을 통해 민족의 수난사를 담고 있는 장편소설이다. 이데올로기적 문제를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식민지 시대와 해방 공간에 걸친 하층민들의 비극적 삶이 당대의 왜곡된 경제 구조와 무관하지 않다고 본 점과 파탄의 경지에 이른 농촌 경제의 참상을 드러내고 있는 점에서 우리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하다.단편집 『목넘이 마을의 개』에는 「술」, 「두꺼비」, 「집」, 「황소들」, 「담배 한 대 피울 동안」, 「아버지」, 「목넘이 마을의 개」등 7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이들 작품은 작가의 신변 체험적 소재를 중심으로 일제하와 해방기의 혼란한 사회 속에서의 동족간의 갈등과 대립의 모습을 담고 있다. 당대의 모순과 이념적 갈등을 투영한 작품으로 주목할 작품으로는 「황소들」과 「목넘이 마을의 개」를 들 수 있다.「황소들」에서는 공출에 대한 농민들의 분노가 지주와 사회적 모순에 대한 반발로 이어지고 있는데, 이를 통하여 작가의 현실 인식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다. 그렇지만 적극적인 대항 의지를 보여 주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 ‘황소들’처럼 묵묵히 행동하고 있는 인물들이 등장하고 있을 뿐이다.「목넘이 마을의 개」는 다른 어떤 작품보다도 당대 현실에 대한 비판, 화해와 공존에 대한 열망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이 작품은 1946년 5월 월남한 이래 그가 줄곧 관심을 가져온 당대의 사회상과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들의 삶을 그린 소설 중의 하나이다. 특히 비참한 삶 속에서도 같은 민족으로서의 동질성을 신둥이라는 개를 통해 확인하고 있는 점은 이념적 갈등이 가져온 민족의 비극을 치유하기 위해 그가 보여준 하나의 전망으로 보인다.「아버지」는 아버지의 삶을 통하여 당대의 민족사를 관찰자적 시각에서 조망하고 있는 작품이다. 그의 부친은 3?1운동 때 이승훈과 더불어 독립운동에 관여했다가 옥살이를 한 바 있으며, 해방 직후 수감 동지와 안국동에서 만나 ‘왜놈식의 무단정치가 이 땅에 다시 활개를 쳐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순원에게 해준 바 있있다.
    인문/어학| 2005.05.19| 6페이지| 1,000원| 조회(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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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얀전쟁] 하얀전쟁의 상징성
    제목 ■■하얀 전쟁■■의 상징성한국 문학과 영상 탐색 국어국문 3년 014669 이승은월남 전쟁의 참혹함과 냉혹하고 비인간적인 사회의 일면을 보여준 영화 하얀 전쟁이 있다. 미국에서 먼저 ■■White Badge■■라는 제목으로 성공을 거두다가 한국에서 다시 ■■하얀 전쟁■■이라는 소설로, 다시 같은 제목의 영화로 이어졌다. ■■white■■, ■■하얀■■, ■■하얀■■의 반복이다. 제목에서는 작가가 하고자 하는 말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하필 참혹한 전쟁을 하얀 전쟁이라는 제목으로 사용하였을까. 나는 ■■하얀 전쟁■■이라는 제목에서 다섯 가지 중의적 의미를 발견하였다.첫 번째로 발견한 것은 ■■죽음■■이라는 것이었다. 서양과는 달리 동양에서는 죽음을 흰색으로 많이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 전쟁은 곧 죽음이다. 어떤 목적과 어떤 선의를 가지고 시작한 것이라 할 찌라도 서로 총대를 겨누며 어떻게 하면 잘 죽여서 승리를 할까를 고민하고 연구하고 작전을 짠다. 이 영화에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죽음이라는 것이 계속해서 뒤따르고 있다. 아군이던 적군이던 죽음은 계속 그들의 위협거리이고, 그들을 사로잡고 공포에 떨게 한다. 죽이러 전쟁에 참여한 동시에 죽이러 전쟁에 참여한 것이다.두 번째로 하얀색은 깨끗함과 무고함, 순수함을 드러낸다. 한국에서 평범한 인생을 살던 사람들이 전쟁에 참여를 하게 된다. 전쟁은 더 이상 이념다툼이나 나라간이 벌이는 국익을 위한 수단이 아니다. 영화에서 전쟁의 초점은 전쟁의 장본이이던 미국과 베트남과의 경제 및 이념관계가 아니었다. 거의 다루기조차 하지 않았다. 실질적으로 참여한 이들 역시 이러한 것은 관심도 없었다. 사랑하는 아내와 여자친구를 두고, 돈을 벌기위해서, 아니면 단순히 어떠한 새로움을 경험해 보기 위해서 그 참혹하고 냉정한 현실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들은 무고한 베트남농민들을 죽이고 괴롭히는 가해자이지만 더 큰 희생을 막기 위한 총알받이가 밖에 될 수 없었던 피해자이기도 하였다. 그들에겐 더 이상 이념이나 경제원리라는 더럽고 검은 존재가 있을 수가 없었다. 참혹한 전쟁이라는 현실 앞에 무방비로 밖에 놓일 수 없었던 하얀 존재였던 것이다.전쟁은 그저 멋있어만 보이던 남자의 낭만이 아니었다. 그들이 발을 디디고 있는 곳은 참혹한 전쟁의 한가운데에서의 실질적이고 냉혹한 현실뿐이었다. 그들의 어처구니없는 실수는 실로 무고한 사람의 목숨을 숱하게 죽음으로 몰았고, 실수는 또다시 더욱 비참하고 몰상식한 살육으로 이어졌다. 평범하기 그지없었던 그들은 이렇게 부조리한 전쟁 앞에 제정신으로 설 수가 없었다. 전쟁의 광기 앞에 그들도 광인이 되어 미쳐버린 것이다. 영화에서 한기주가 한 대사를 보자.■■전쟁은 너무나 거센 타성처럼 엄청난 힘이어서 그 소용돌이에 휘말렸던 인간의 영혼은 완전 분해가 되어 새로 조립하기가 힘들다.■■전쟁이 무고한 사람을 미치게 만든 것이다. 이것이 세 번째 하얀색의 의미이다. 하얀 마약과 같은 전쟁의 광기. 혼돈 속에서 미칠 수밖에 없는 살아남았지만 결코 행복하지 않은 생존자들.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그들에게 전쟁의 파편은 너무 크기만 하였다. 가정도 깨지고 그들의 정신상태도 피폐해질 뿐만 아니라 조각조각나 버렸던 것이다.
    인문/어학| 2005.05.19| 1페이지| 1,000원| 조회(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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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후문학
    ♥.1 전후문학의 개념2차례의 세계대전 직후에 각각 일어난 문학의 한 양상. 좁은 뜻으로는 제 2 차세계대전 후의 문학 경향을 가리킨다. 전쟁으로 인한 인간성의 상실?절망감?단절감 등이 작품들의 공통적인 정서로 깃들어 있으며, 전후파의 경향이 주된 특질을 이룬다. 특히 전후문학은 부조리문학(不條理文學)으로 대표된다. 참혹한 전쟁을 겪은 인간의 정신은 극도의 상실감과 무력감에 젖어들었으며, 도덕과 가치관의 상실, 무엇보다도 인간 자신들에 대해 깊은 회의를 품게 되었다. 그와 같은 전후의 상황 속에서 나타난 사상적 주류가 철학적 의미에 있어서의 <부조리>였고 문학은 그러한 세계적인 사조를 그대로 반영하였다. 특히 인간사회와 문명세계를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반사회적?반문명적 냉소주의와 인간생존의 무의미성, 진리에 대한 부정적 시각, 참혹한 전쟁 속에서 신의 존재에 대한 회의 등으로 허무주의가 세계적인 사상적 조류를 이루었다. 이러한 전후문학이 처음으로 일어나기 시작한 곳은 프랑스 문단이었는데, 프랑스의 전후문학은 새로운 시각과 방법론을 추구하며 전전파를 압도했다. 한편 일본의 전후문학도 태평양전쟁의 체험으로 새로운 방법과 의식을 기반으로 노마 히로시를 대표로 하는 1차 전후파, 다케다 다이준을 대표로 하는 2차전후파, 전쟁 후 안정기에 등장한 요시유키 준노스케 등의 제 3 신인들과 전후를 체험한 이시하라 신타로 등이 등장했다. 그 뒤 일본의 전후문학은 전후파의 새로운 방법론과 전전(戰前)의 민주주의 문학과의 종합, 발전이 주요 과제로 등장했다.♥.1-1 한국의 전후문학한편 한국은 광복 직후 정치적?사회적 혼란으로 이어졌으며, 일본이나 유럽의 경우처럼 직접적인 전후의식과 방법론은 나타나지 않았다. 다만 민족문학파와 프로문학파의 격렬한 투쟁만이 불안한 현실에 점철되었다. 더구나 이때는 광복 후의 혼란한 사회를 이끌 새로운 세대도 나타나지 않았고, 전전파에 속했던 김동리?황순원?서정주?유치환?조연현 등과 청록파 시인들의 활동시기였다. 따라서 이때의 한국문학을 전후문학으로 험과 새로운 방법론을 가지고 출발한 작가들이었다. 이들의 작품 대부분에는 전후문학의 공통적인 특징인 부조리의식으로서 폐허?절망, 정신과 영혼의 불구 등으로 일관된 세계가 묘사되어 있다. 이러한 한국의 전후문학은 남북분단과 동족상잔의 비극을 간직한 채, 하나의 조류를 이루며 연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80년대 이후로는 전쟁의 재조명을 위한 노력과 함께 남북통일의 염원을 담은 민족문학의 큰 주류를 이루는 작품들이 많이 발표되고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조정래의 《태백산맥》, 이병주의 《지리산》, 이태의 《남부군》 등을 들 수 있다.♥.2 전후시의 양상3년간의 전쟁을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으로 인하여 막이 내린듯 했지만 남과 북은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대치 상태에 놓이게 된다. 또한 전쟁 후 경제적인 궁핍과 독재 정치로 인하여 전후 50년대의 국민들은 참담한 절망감으로 살 수밖에 없던 시대였다. 이러한 시대적 아픔 속에서 문학은 오히려 스스로의 생명력을 발휘한다. 시단 역시 20세기 후반기를 향한 다양한 문학적 실험과 방법혼을 모색한다. 미국을 비롯한 서구문화의 급격한 유입은 시에 대한 새로운 감수성으로 작용하였으며, 더군다나 1955년 1월에 창간된 『현대문학』과 6월에 속간된 『문학예술』, 1956년에 나온 『자유문학』은 이러한 시단의 다양한 욕수들을 수용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와 같은 순수 문학지 외에도 『사상계』, 『신태양』과 같은 종합지들도 문예면을 많이 할애하여 시인들의 발표 지면이 늘어났다. 이 밖에도 『시와 비평』(1956), 『신시학』(1959) 등, 1956년부터 1959년 사이에 발간되었던 시전문지로 이 시기 우리 시단을 풍성하게 하는 데 한 몫을 했다.따라서 신인 배출도 매우 왕성하여 박재삼, 박용래, 황금찬, 김혜숙, 황동규, 고은, 신경림, 박성룡 등으로 많은 신인이 배출되었고, 이러한 시류는 전쟁의 폐허를 딛고 새로운 문학의 르네상스를 위한 그 분위기가 충분히 조성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재편된 시단의 흐름은 크게게 되는 참여시 흐름의 새로운 돌파구를 열게 된다.♥.2-1 전통 서정시식민지 시대와 해방기의 어수선한 혼란 속에서도 굳건하게 시의 서정성을 지켜오던 전통 서정시 계열의 시인들은 여전히 활발한 작품 활동을 통해서 그들 나름대로의 미학을 전개하였다. 해방 이전 카프 계열로 삼아 왔던 순수 시인들은 김소월, 김영랑, 청록파 시인으로 이어지는 뚜렷한 계보를 이루며, 각자의 개성을 살리면서도 시의 리듬과 전통 서정의 아름다움에 비중을 주는 시인들이라 할 수 있다. 전후 시단에서도 서정주, 유치환, 신석정, 신석초, 박남수를 비롯해서 청록파 시인 등 전통 계열의 기성세대 시인들은 한창 왕성한 창작 의욕을 보인다.서정주 시인은 『귀촉도』(1948)를 통해서 전통적 서정 세계에 귀착한 후 「국화 옆에서」, 「無等을 보며」등의 시를 발표하며 자신의 시세계의 원숙한 경지를 이룩한다. 특히 「無等을 보며」에서는 전쟁 중 피난 생활을 하며 굶주리는 가난한 생활 속에서 비록 남루한 모습일 지라도, 속에 그며 있는 여름산 같은 청신한 마음이 중요하다고 말하며 변하는 세계 속에서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 시정신, 혼탁한 세계 속에서도 순수한 시정신의 가치성을 노래하였다.유치환은 한국 현대시에 보편적 정조로 자리 잡고 있던 여성적 어조와는 달리, 감각적 서정보다는 남성적인 웅혼한 정서와 관념적인 세계를 지향하면서 독특한 시의 경지를 이룩하였다.‘청록파’의 조지훈, 박목월 등도 순수 서정시의 세계를 늘 펼쳐나갔고, 특별히 박재삼은 김소워르 김영랑, 서정주로 이어져 온 서정시의 맥을 이어받아 전통 서정시의 물결을 이어받고 있다.♥.2-2 모더니즘 계열의 시해방기 우리 시단에 좌우의 싸움을 거부하고 새로운 문학 운동을 시작했던 ‘신시론’ 동인들은 1950년 ‘後半紀’로 이름을 바꾼다. 이들은 이후 전후 시단의 실험적인 모더니즘 시들이 출현하는 데 전초적인 역할을 했다고 본다. ‘後半紀’는 ‘청록파’ 시인들의 전통 지향적인 시를 비판하면서 현대적 감수성을 시에 불어넣고자 했다. 구체적으로 문명비판은 신이여」나 「자본가에게」 등의 시에서 전쟁과 현대문명 비판을 하고 있지만 그 깊이가 육화되지 않은 피상적인 인상에 머물러 그의 시는 크게 성공했다고 볼 수는 없다. ‘후반기’ 동인 중에서 초현실주의 기법을 차용한 조향은 위의 시에서도 아무런 연관도 찾을 수 없는 이미지의 병치, 독자적인 활자의 배치 등을 통해서 실험성을 나타내고 있다. 그 밖에도 이들 동인들은 도시주의, 추상성, 단절성과 같은 미학적 형태나 소외의식과 같은 미학적 자의식을 그들 시에 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들의 모더니즘 운동은 개별적 시인의 작품 성과와는 달리 1950년대 전후 시단에 실험정신과 새로운 문학적 감수성을 요구하는 데 교량 역할을 했다고 본다. 김규동은 50년대 모더니즘 시의 결산을 하고 있지만 그의 시도 현대의 도시적 이미지와 불안 의식의 피상성만 나타날 뿐, 다른 동인들이 갖고 있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김수영의 시는 처음부터 철저한 반전통주의로부터 시작했다. EK라서 그는 자연 자체를 하나의 완상물로 쓴 시가 없다. 그것들을 시의 소재로 삼을 때도 다만 하나의 소도구로만 작용한다. 그러나 김수영은 50년대 중반에 오면서 그가 모더니즘 운동 초기에 보였던 추상적이고 직설적인 결함들을 극복하면서 새로운 면모를 보여 준다. 어쨌든 ‘후반기’는 30년대 모더니즘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신인들 가운데 이러한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감성에 의한 새로운 언어를 통해서 자신의 시세계를 가지려는 경우가 생겨나기 시작했다는 점은 ‘후반기’ 동인회가 갖는 문학사적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전후시에서 이와 같은 실험 정신을 모색했던 시인들은 김춘수, 김현승, 송욱, 신동집, 김구용, 김종삼, 김광림, 김종길 등을 꼽을 수 있다.김춘수는 무의미 시라는 자신의 독자적인 시론을 통해서 시에 대한 언어 실험을 끊임없이 평친 모더니스트라 할 수 있다. 김현승과 구상은 전후 문단에서 형이상적인 존재 탐구의 시인으로 기록될 만하다. 김현승은 사물의 본질과6)에서 전후의 참상이나 영원성의 문제를 시의 주된 과제로 삼아 왔다.전후 시대는 이렇듯 젊은 시인들이 새로운 시적 감수성과 우리 언어의 실험적인 가능성을 모색하던 모더니즘의 세대이기도 했다. 이러한 문학적 풍토는 60년대 모더니즘의 새 경지를 구축할 수 있었던 밑바탕이 되었다. 또한 전후 시대의 이러한 문학적 풍토가 있었기 때문에 김춘수의 무의미시도 1960년대를 맞이하여 더 큰 날개를 펼 수 있었으며, 전봉건도 그의 시에서 끊임없는 실험을 거듭하여, 문덕수, 김춘수와 함께 1960년대 모더니즘시의 새로운 가능성을 예고한다.♥.3 6?25와 전후 소설50년대 문학은 전쟁의 포성과 함께 시작되었다. 흔히 국내에서는 ‘6?25 사변’, 국제적으로는 ‘한국 전쟁’으로 일컬어지는 이 전쟁은 3년 동안 지속되었는데, 그 파괴력은 엄청난 것이어서 한국인의 사고와 상상력의 기반을 근원적으로 바꾸어 놓게 되었다. 따라서 이 시대의 소설은 전쟁을 가장 지배적인 배경으로 삼게 되었으며, 그 주제 또한 전쟁의 파괴력과 그 폐허에서 찾게 되었다. 가족의 이산과 형제 상해, 기아와 실직, 정신 분열 등은 전쟁의 부산물로서 이 시대의 작가들이 즐겨 다루는 주제의 원천이 되었다.이 시기의 소설을 보면 이러한 사회적 변화와 고통의 인식이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기성 문단의 작가로는 김동리와 황순원, 안수길 등이 선편을 잡고 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전쟁을 기록하거나 보고하는 작품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른바 ‘종군 문학’이니 ‘전선 소설’이니 하는 것은 선지하의 현실적 필요성에 EK라 잠시 등장했던 것으로서 예술적 가치를 획득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50년내 소설은 전쟁의 폐허로부터 사회적 수습의 단계에 들어선 50년대 중반, 그러니까 『문학과 예술』, 『현대문학』, 『자유문학』 등 문예지와 『신천지』, 『신태양』, 『사상계』, 『새벽』 등 종합지의 발간과 함께 다양한 발표매체가 마현된 EO로부터 활성화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발표매체를 기반으로 활것이다.
    인문/어학| 2005.05.19| 5페이지| 1,000원| 조회(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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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효석] 이효석론 평가A+최고예요
    이효석론 건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3년 014669 이승은이효석론1. 작가 연보1907. 2. 23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창동리에서 출생. 부친 李始厚의 1남 3녀 중 장남.1910(4세) 서울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부친을 따라 서울로 이주.1912(6세) 가족을 따라 다시 평창으로 내려와 서당에 다니기 시작함.1914(8세) 평창공립보통학교 입학.1920(4세) 평창공립보통학교 졸업.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입학.1925(19세)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졸업.경성제국대학 예과 입학.고보 졸업 직전에 ≪每日申報≫에 콩트를 발효.1926(20세) 대학 예과 학생회지 ≪靑?≫을 비롯한 잡지 및 신문에 시와 콩트를 발표.1927(21세) 대학 예과 수료 후 법문학부 영어영문학과에 진입.교지 ≪文友≫를 비롯한 잡지 등에 계속 시와 콩트를 발표.1928(2세) 단편 「도시와 유령」을 발표하여 주목을 끌기 시작함.1930(24세) 경성제국대학 영어영문학과 졸업.1931(25세) 李敬媛과 결혼.총독부 경무국 검열계에 취직했으나 이내 그만둠.단편집 『露領近海』 출간.1932(26세) 함북 경성농업학교 교사로 취임.1933(27세) 구인회의 창립 회원이 됨.단편 「豚」 발표.1936(30세)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취임하여 평양으로 이주.단편 「메밀꽃 필 무렵」 및 「분녀」 발표.1938(32세) 숭실전문학교가 폐교되고 교수직 사임.단편 「장미 병들다」발표.1939(33세) 대동공업전문학교 교수로 취임.장편 『화분』과 단편집 『해바라기』 및 『성화』출간.1940(34세) 부인 이경원과 사별하고 평양 교외 기림리로 이사.1941(35세) 『이효석 단편선』과 장편『벽공무한』출간.1942. 5. 25 결핵성 뇌막염으로 별세. 향년 36세.1973 문화의 날에 금과문화훈장 추서.2. 이효석의 생애한국단편문학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남아있는 '메밀꽃 필 무렵'의 작자인 이효석은 평창출신의 문인으로 그에 대한 자료를 평창문화원발간 자료를 기초로 여기 소개코자 한다.그의 삶을 주요사건으로 나누어 기술하고 측면으로 돌아가면 우물이 있다. 말하자면 이생가는 전형적인 산촌의 반가라 할 수 있어서 운치가 잘 어울린 집이다. 이 집에서 효석은 산촌의 자연을 뼈마디에 새기며 8세에 이르렀다.1914년 8세때 외학을 하게되어 봉평에서 100리가 떨어진 군 소재지 평창공립보통학교 (현 평창초등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평창에서는 하숙을 하였는데 봉평집에 다니곤 했다. 이때의 교통수단은 우마차 아니면 도보가 고작이었다. 그러므로 효석은 봉평과 평창 사이 100리를 거의 걸어서 다녔다. 그래서 그 길은 자연 집에서 나와 남안리 마을을 거쳐 봉평천(흥정천)에 다다르고 여기에서는 좌편 강변에 있는 동리 물레방아를 만나게 되고 그 다음은 봉평천 징검다리를 건너 봉평의 성황당을 지나면서 봉평의 본 마을 창동리에 들어와 상가와 주점, 즉 봉평장터 걸리를 뚫고 시내를 빠져나오게 되는데 이중 충주집(훗날 '메밀꽃 필 무렵'의 작품 속에 나오는 주점)이란 주점도 지나왔었다.봉평시내를 빠져나와서는 장평까지 20리, 노루목고개('메밀꽃 필 무렵' 작품 속에 나오는 고개)를 넘게 되면 장평의 개울(동작품속에 나오는 개울)에 이르며 이 개울을 건너서는 장평 삼거리(한길은 봉평으로 가는길, 한길은 강릉, 하길은 평창길)에 닿게되고 장평에서 대화까지는 30리, 하장평, 재산, 재재(고개이름)를 넘어 신리, 상대화리, 대화로 이어진다.대화면의 대화거리는 곧 대화장터인데 이 거리도 효석이 걸어다녔던 길목이 된다. 대화에서 평창까지는 40리, 다시 이 길을 거쳐 평창 하숙집에 오게 된다. 6년 동안 효석은 이 100리 길을 왕래하였는데 그렇다며 효석은 이 길을 몇 번이나 걸어서 내왕했겠는가는 그 자신도 모르리라. 효석은 이 100리 길 속에서 자연을 배웠다.봄에는 꽃피는 동산구비를, 여름에는 들판에 깔린 오곡의 청파, 뜨거운 햇빛, 소나기, 숲의 청산들을 바라보며 가을은 자즈러지게 피어있는 메밀꽃밭을 지나면서 멀리 물들어가는 단풍산의 원경에 취하고 낙엽도 밟게 되며 겨울은 산촌에 내리는 눈을맞이하였고 산악 에서 지냈지만 그의 생리에 맞지 않아 곧 수송동 하숙으로 옮기고 그야말로 타관살이가 제대로 시작되었고 또 본격적인 공부생활도 자리를 잡게 되었다.학교에서 효석과 진오는 수재라는 이름으로 알려졌교 이때 벌써 두사람은 깊은 우정을 맺고 문학쪽으로 재질을 드러내 효석은 산문을, 진오는 시를 창작하면서 서로 평을 주고 받는 수학과정을 거치며 서구문학을 섭렵하기도 하고 자작소품들을 투고하기도 하였다.직업생활과 작품활동 가난한 가운데 직업을 구하였지만 이웃의 눈총, 또 스스로도 못마땅하여 경성농업학교로 직업을 옮겨 하향하다시피한 그였지만 작품에 대한 집념은 대단하여 중앙의 신문, 문예지, 월간잡지 등을 통하여 왕성한 발표를 해 나갔다. 가난한 와중에서도 이와 같이 문학에 있어서만은 정력을 다 바쳐 빈틈없는 작업을 하는 정열을 보였다. 이런 시기에 1932년 현민(유진오)이 경성을 찾아왔다. 그의 끊임없는 작품활동에 대하여 찬사를 주고 싶었던 것이며, 또 그의 생활근황을 직접 보고 싶기도 했던 것이다.뿐만 아니라 현민이 찾아오기 이전 장녀 나미가 태어났기에 이런 소식을 접하고 축하를 겸한 나들이기도 하였음을 짐작케 한다. 아무튼 효석은 여기 경성농업학교에서 3년간(1931~1934초까지)을 있었는데, 이 기간동안 경제적 궁핍을 무던히 겪으면서도 거기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창작의욕에 불탔던 것이다. 이 때에 쏟아져 나온 작품량은 일생의 3분지 1에 해당하는 분량쯤 되었다 하고 질도 순수했음이라 한다. 이 당시 문학의 분류는 정리가 미비하였는데, 소설 그것도 단편소설의 범주를 열어놓았다고 할 수 있다.이런 가운데 다시 직장을 옮기게 되었으니 평양의 숭실전문학교였다. 그 때가 1934년, 그가 28세가 되던 해이다. 그는 이곳에 가서도 창작의욕을 잃지 않았다. 창작, 수필, 서간논평, 번역 등 여러 방면에서 작품을 다루고 작품 게재지 또한 다양하게 취급되었다. 등단의 위세로서가 아니라 중견작가로서의 발돋움을 해 가는 그이 이름은 경향을 막론하고 명성을 날려갔고 따라서 문명깐씩이었고 게속 작품 쓰기에 힘을 쏟았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1921년부터 1932년까지 11년여간 경성농업학교 및 숭실전문학교에서 재직하는 동안 그의 작품은 거의 쓰여졌다고 할 수 있으리라 만큼 왕성한 면을 보였던 것이다.⑵ 병과 사1941년 35세 되던 해에 뇌막염으로 자리에 눕게 되고 계속하여 큰 수술을 받는 곤욕을 치루었다. 그 와중에도 작품은 계속 발표되었으나 병은 그를 가만히 두지 않고 1년후인 1942년 36세가 되는 5월에 다시 눕게 되었고, 5월 6일에는 평양도립병원에 입원하였고, 5월 10일에는 치유될 수 없는 형편에서 퇴원하여 귀가하게 되는 불행을 맞이하게 되었다.혼수상태 무의식의 나날과 시간이 흐르다가 결국 25일 하오에 별세하고 말았다. 시신은 화장되었으며 유해는 엄친에 의하여 당시 부모가 사시던 곳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고등골 산가에 안장하게 되었으나 그 후 용평면 장평리 영동고속도로변 산록으로 묘소를 이장 하였다.3. 이효석의 생활과 성격가산의 평소생활은 검소하고 단조로운 편이었다고 한다. 성격은 외유내강한 편이었으며 정감이 넘치고 단정한 몸가짐으로 고상한 성격을 지닌 신사였다고 한다.집에서는 자상하고 온화한 일면을 보이는 반면 엄격한 일면도 있어서 상대적인 입장에서는 어려웠다고 한다.산책을 즐기고 기지가 넘치는 말도 잘하며 기분이 좋을 때는 피아노 연주에도 일가견을 보여 예술가적인 기질을 풀어냈다고 한다. 그러다가 작품구상을 한다든지 작품 쓰기에 들어가면 몰아경으로 매달 리는 집념에 사로잡혔다고도 이야기된다.그는 유년시절 산과 들 바람같은 자연 속에 살아왔기에 그 감정은 풀잎마냥 여리고 또 깨끗하여 그 성격 그대로 성년이 되어서도 작용, 선비형 몸체를 유지했다고 함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런 때문이었는가는 몰라도 그의 작품 경향도 섬세하고 서정성이 깊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가족간은 화목하였다고 하나 늘 독보적 외톨이의 세계를 끌어안고 명상과 그리고 작품속에 살았다는 것이 정확한 일면이라고 한다. 또 그는 京城과 鏡城 , 평양 마련하였고 신문에 시와 꽁트를 발표하기도 하였다.대학시절에 그는 시와 꽁트를 발표하였고 1927년 최초의 본격적인 소설이라 할 수 있는 「주리면… -어떤 생활의 단편」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그가 습작기에 발표한 시들은 서구의 시풍을 닮아 있어 세련된 감각은 있으나 그 내용과 정서가 뛰어난 작품들은 아니었으며, 여러 편 발표한 꽁트들도 형식의 완결성이나 내용의 풍부함이 부족한 작품들이었다.② 동반자 작가)시절이효석은 단편 「도시와 유령」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이 작품을 비롯한 초기의 여러 단편은 정치적 지배 이념이었던 사회주의 사상을 나타내고 있어 그는 '동반자 작가'로 불렸다. 그는 1931년 첫 창작집인 『노령근해』를 발간함으로서 자신의 프롤레타리아 이념을 추구하는 문학적 지향성을 뚜렷이 보여주었다.이 시기의 대표적 작품으로는?「도시와 유령」: 현실에 대한 독자의 각성을 촉구하는 선전 선동성이 잘 나타난 작품.?「프레류드-여기에도 한 서곡이 있다」: 프롤레타리아 이념을 마음에 두고 쓴 마지막 작품이며 이데올로기 선전에만 치중하던 모습에서 벗어나 인물 행동의 동기를 객관적으로 제시하려는 작가의 노력이 두드러진 작품 .⑵ 인간과 자연의 탐미 - 경성시절① 이데올로기를 벗어나 세계로대학을 졸업한 이효석은 생활의 어려움을 겪다가 함경북도 경성으로 내려가 경성농업학교 영어교사로 취임했다. 그 후 이효석은 프롤레타리아 문학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다소 여유 있는 생활을 하였다. 이 시기의 여러 작품에는 표면적으로 사회주의 이념이 주로 등장하고 있으나 심미주의적 요소도 보여 당시 그의 심리적인 갈등의 모습을 볼 수 있다.사회주의 이념이 등장하고 있으나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거나 회의적인 시각이 잘 드러나 있는 작품들?「오리온과 능금」: 사회주의 운동을 매개로 만난 남녀가 운동보다는 애정에 더 관심을 기울이는 작품?「주리야」: 약혼자를 둔 채 가출하여 좌익운동을 하는 '주리야'가 사상적 공감보다도 시각적 호감을 중시하며 남성을 작품
    인문/어학| 2005.05.19| 5페이지| 1,000원| 조회(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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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악장] 악장의 전반적 특성
    Ⅰ. 서론지금까지의 악장에 대한 체계적, 통계적인 연구는 매우 부진한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이에 대하여 학자들은 그 원인을 목적하는 바나 노래의 내용이 명백하기 때문에 이 방면의 연구가 부진하거나 외면당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고 지적하고 그 원인이 역성혁명의 합리화에 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있다.다. 바꾸어 말해서 통치체제의 급진적인 변혁에 따라서 야기될지도 모를 민심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출발한 목적문학이기 때문에 문학성이 약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악장은 당시 과도기적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전대와 후대간의 국문학적 양상이 집약되었다고 볼 수 있으므로, 국문학의 맥락을 파악하는데 있어 중요한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겠다.우리는 앞으로 개념과 명칭부터 이의 연원과 시대적, 사회적 배경을 알아보고 내용적?형태적 특징까지 악장의 전반적 특성을 알아볼 것이고 이에 따라 악장이 미치는 문학사적 의의를 찾아갈 것이다.Ⅱ. 본론1. 악장의 개념과 명칭악장(樂章)은 궁중의 여러 의식과 행사 및 연례, 즉 나라에서 거행하는 공식적인 행사에 소용되던 조선 초기의 송축가(頌祝歌)를 말한다. 주로 조선 건국을 찬양하고 제왕(帝王)의 위업을 찬양하는 내용의 노래이다. 악장(樂章)이란 본디 중국에서 국가의 행사에 사용하던 공적인 음악의 노랫말을 가리키는 것이었으나 시가문학사에서의 악장은 조선조 초기에 궁중의 행사나 연회의 음악에 맞추어 노래했던 시가들을 가리킨다. 또한, 악장(樂章)은 고려 경기체가(景幾體歌)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아 이루어진 특권계급의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특히 조선 초기 종묘제향(宗廟祭享)시 주악(奏樂)할 때 부르는 특정한 노래가사를 한정해서 아송문학(雅頌文學), 송영가(頌詠歌), 송축가(頌祝歌), 송도가(頌濤歌), 송시(頌詩)등의 명칭으로 부르기도 한다.2. 연원오늘날 일반적으로 말하는 좁은 의미의 악장은 조선 왕조의 창업과 번영을 송축하기 위하여 15세기에 주로 만들어진 궁중 악가(樂歌)를 가리키지만 넓은 의미로 볼 때 악장은 고대 국가 성립전해지지는 않지만 고려 시대에는 전통 음악인 향악과 중국계 음악인 당악(唐樂)이 궁중악으로 함께 사용되었고, 민간 가요의 궁중악화(宮中樂化)의 현상도 활발하여 다수의 악장이 창작되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受天靈符 寵綏多方 德合三無 功超百王 地厚載物 其大無外 立我蒸民 萬世永賴(수천영부 총수다방 덕합삼무 공초백왕) (지후재물 기대무외 입아증민 만세영뢰)燕及後昆 承玆積累 於萬斯年 恪修祀事 有儼其壇 有淑其馨 惟恭奉幣 我祀孔明(연급후곤 승자적루 어만사년 각수사사) (유엄기단 유숙기형 유공봉폐 아사공명)첫째 것은 고려 때 쓰인 것으로 태조 왕건의 치적을 찬미하며 종사가 영원히 이어지기를 기원하고 있는 일종의 종묘악장이고, 둘째 것은 조선 초기, 樂을 갖추어 땅의 후덕함을 찬미하고 만년토록 복이 있기를 축원하는 내용의 악장이다. 살펴보면 형식이나 내용의 핵심에 있어서 고려의 것과 조선의 것과 거의 비슷하다. 이는 중국의 악부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는데 다음으로 중국의 교묘가사를 살펴보자.厚地開靈 方壇崇祀 達以風露 樹之松梓(후지개영 방단숭사 달이풍로 수지송재)句萌旣申 芟祚伊始 恭祈瓷盛 載膺休祉(구맹기신 삼조이시 공기자성 재응휴지)정제된 4언 8구체인 이 시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중국의 사직신께 만물이 번성하고 풍년들기를 기원하고 있는 중국의 교묘의 여러 가지 사회적 모순을 시급히 해결하고 동요된 민심을 수습하여 절대적인 왕권을 확립한 가사이다.이를 통해 조선 초기 악장은 갑자기 나타난 시형이 아니라 고려악장에 그 연원을 두고 발전해 왔으며, 더 소급하여 중국의 악부인 교묘가사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2. 시대적?사회적 배경 - 유교사상과 예악사상고려말의 혼란기에 신흥사대부들의 추대 형식을 빌어서 역성혁명으로 건국한 조선왕조가 우선 해결해야 될 당면과제는 고려의 여러 가지 사회적 모순을 시급히 해결하고 동요된 민심을 수습하여 절대적인 왕권을 확립하는 일이었다. 조선왕조는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통치이념을 불교에서 유교로 바꾸고 정치적 쇄신을 꾀하는 한편 전제개혁의해 새로운 사회적 가치 질서로 등장한 예악은 왕도정치를 위한 치국의 기본강령(基本綱領)으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당시의 혼란한 체제변화의 상황에서 사회질서를 확립하고 들뜬 민심을 융화시키기 위한 유교입국의 정치이념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예악이었던 것이다.)또한 조선왕조는 기존 체제를 부정하는 역성혁명의 당위성을 유교의 정치이념인 천명론(天命論)과 명분론에서 찾고 있다. 즉 이성계의 등극이 여말의 신흥사대부들에 의하여 비록 선양의 형식으로 이루어지기는 했으나 정통성을 잃은 창업(創業)이 명백한 이상, 이러한 약점을 정상화하기 위한 대안이 바로 천명론과, 시대적 상황에 부응하기 위한 역사적 필연(必然)이라는 명분론(名分論)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조선의 건국 이념은 그 정통적 시비(是非正統的)에 있어서는 자가당착(自家撞着)의 열세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에 역성혁명의 합리성을 선양하는 데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또한 대외적인 명분을 확립하기 위하여 국제관계 개선에 힘썼으며 태종(太宗) 즉위와 더불어 명으로부터 왕권을 인정받자 이란 새로운 악장을 지었고, 후에 세종(世宗)이 즉위하여 명(明)으로부터 왕의 인가를 받자 변계량(卞系良)은 이라는 악장을 지어 송축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이와 같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따라서 유교적 통치이념에서 출발한 것이라면, 그 통치에 따르기 위한 질서의식(秩序意識)과 행동규범이 곧 예악이다. 예악은 전통적인 유교사회에 있어서 유교적 이상정치(理想政治)를 실현하기 위한 행동규범으로서 이것이 없는 성리학은 단지 추상적인 관념론에 불과할 뿐 그 실행의 장을 잃게 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해서 조선왕조에 있어서 유교는 왕조창업의 철학적 기반이 되었고 정치적 이념을 성리학에 두고 있으며 그 이념을 구현하기 위한 행동양식이 곧 예악이었던 것이다. 공자도 논어(論語)에서 ‘법으로 이끌고 형벌로써 다스리면 백성들이 빠져나가되 부끄러움을 모를 것이요, 덕으로 이끌고 예로써 다스리면 부끄러움을 알고 또한 착하게 된다.’라고 말함으로써터 유교의 근본사상으로 자리잡고 있었으며 또한 예악을 통하는 가운데 인간의 조화된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정도전 역시 에서, 예악을 통해서 지악(知樂)과 정치(政治)의 안정을 가져올 수 있다고 강조하였고, 태종(太宗) 2년에 예조에서 상소하는 가운데 음(音)을 살피면 악(樂)을 알 수 있고 악(樂)을 살피면 정치를 알 수 있으며, 바른 소리는 사람을 감동시켜서 순한 기운에 응하게 하고 간교한 소리는 사람을 감동시켜서 역한 기운에 응하게 한다고 하여 음악을 통한 악(樂)에 관한 언급을 하였다.이와 같이 조선왕조의 초기에 있어서의 예악사상은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유교사상 구현을 위한 수단으로써 뿐만 아니라 우주의 이치를 조화와 섭리로 이끌어 가는 근본사상이었던 것이다.3. 작자와 계층악장은 주체와 대상이 한정되어 있고 작품 내에 비교적 고정된 이념마저 설정되어 있었다.악장의 중심 담당층은 여말에 정치 세력으로 등장하여 조선왕조를 건국하고 그 기틀을 확고히 다져나간 신흥사대부와 후예로 조선 초기 핵심 관료층이다. 대표 작가로는 당시 권신(權臣)이면서 문(文)의 흐름을 부도하고 있었던 정도전(鄭道傳), 하륜(河崙), 변계량(卞系良), 권근(權近), 윤회(尹淮) 등이었으며, 악장을 향유한 계층도 주로 특권 귀족층에 한정되어 있어 진정한 국민문학으로 성장하기에는 결정적인 취약점을 지니게 되었다.4. 악장의 형태적 분류조선 초기 악장은 표기형태 및 특성에 따라 크게 한시체악장, 한시현토체악장, 국어체악장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⑴ 한시체악장한시체악장은 조선 초기 악장의 중심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4언구 중심의 시경체(사언체)와 장단구 중심의 초사체가 대표적이었다. 그 중 주류를 이루었던 시경체 등의 중국 시가형의 정통 악장보다 오히려 우리말 시가의 영향을 받아 이루어진 후렴구 형식의 한시체악장들에 더욱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다.⑵ 한시현토체악장한시현토체악장은 처음에 한시체로 창작되어 전해 오던 악장들이 악곡에 맞추기 위한 음한시현토체악장으로 바뀐 것으로 보아 한시현토체악장은 훈민정음 창제와 때를 같이해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⑶ 국어체악장사실 한시체악장에 현토를 하여 그 율격이 점차 우리 노래다워지기 시작한 것이 한시현토체악장이라고 한다면, 거기에 적당한 감탄구와 반복구를 첨가시켜서 더욱 우리노래다운 한시 형태를 갖춘 것을 국어체악장이라고 볼 수 있다. 국어체악장은 각종 연회에서 주로 당악과 향악으로 불린 노래의 우리말 가사로서, 작품의 수는 많지 않으나 그 형식은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연장형식과 분절형식이 지배적인 구조화 원리로 작용하고 있다.국어체악장의 주요 형식은 고려속요체, 경기체가체, 신체(우리말)의 셋으로 대별될 수 있다. 경기체가체의 《상대별곡(箱臺別曲)》,《화산별곡(華山別曲)》,《연형제곡(宴兄弟曲)》등은 경기체가로서의 장르적 성격을 그대로 지키고 있지만, 《신도가(新都歌)》,《유림가(儒林歌)》,《感君恩)》등의 고려속요체는 고려속요의 일반적인 장르적 특성은 일치하는 경향이 있으나 작품세계는 전혀 다르다. 《신도가(新都歌)》의 경우 시행 사이에 ‘아으 다롱디리’라는 고려 가요류의 여음을 넣은 단형 가요의 형태를 취함으로써 이 시기 고려속요체의 과도기적인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과 같은 신체 형식의 경우는 연장과 분절이라는 장르화의 원리는 그대로 따르면서도 속요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전혀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 내고 있는데, 이는 훈민정음의 제정을 분수령으로 하여 우리 시가문학사상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가장 완결된 형태의 서사시적 악장이라고 할 수 있다.5. 내용조선 초기의 악장들은 궁중에서 사용된 것이기에 개국의 호방한 기상을 드러내면서 왕조의 무궁한 번영을 기원하고 축복하는 목적을 지녔다. 이것은 조선의 억불숭유정책의 일환으로 유교에서는 예악의 교화적 기능을 특히 중시하였기 때문에 조선조의 악장은 전반적으로 강렬한 이념성과 교훈성을 보인다. 이러한 맥락에서 악장은 교술적인 시가연대
    인문/어학| 2005.05.19| 6페이지| 1,000원| 조회(6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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