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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문방송학] 미디어의 수용자 평가A좋아요
    序Couch Potato 라는 말은 TV가 등장하고 성장하여, 우리의 생활과 밀접하게 연결되기 시작하면서 나온 말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종종 TV의 폐해를 설명할 때 쓰이는 말이기도 하다. 물론 그 안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려는 사람들 혹은 의견들이 최근 있고, 또한 이러한 카우치 포테이토 族에 대한 분류까지 나오고 있다고는 하지만, 비만과 무기력함 등이 연상되는 이러한 모습은, 현재까지의 매스미디어에 우리가 너무 안일하게 대처하고 있음을 반증해주고 있다. 또한, 이들의 주체적이지 못하며 비역동적인 행동은 단지 주는 것만 받아먹는 비이성적인 행동으로서 지양되어야 할 모습이라고 생각된다. 특히 미디어의 발달로 생기게 되는 수많은 뉴미디어 컨텐츠는 인터렉티브 드라마나 VOD 등의 예와 같이 쌍방향성, 다시 말해 참여가 없이는 그 매체를 제대로 즐길 수 없게 된다. 물론 현재까지 이러한 쌍방향성의 미디어가 광범위 하게 확산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근 미래에 있어서는 그 비중이 지금보다 높아질 것이라는 예상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대중매체, 특히 그 중에서도 TV의 특징이자 장점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는 ‘수동성’을 고려해 본다고 하여도 다양한 미디어에 노출되어 있고, 또한 점점 더 다양한 미디어를 접하게 될 우리에게 위와 같은 수동적인 자세는 서 말의 구슬이 있어도 그것을 꿰지 못해 보석을 만들 수 없는 것과 같은 불이익을 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계속하여 급변하는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매스미디어라는 것을 항상 즐겁고, 유익하게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뉴미디어의 부적응이 줄 수 있는 문화 및 정보의 소외, 혹은 개인 발전의 저해를 피하기 위해, 우리는 매스미디어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 및 관점을 정립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정립된 관점을 견지하고 새로운 미디어의 시대에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本1-1 수용자 (수동적 수용자)우선 우리의 태도를 정립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커뮤니케이션 학의 수용자 분류를 검토해 볼 필요로 수동성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어원으로 보았을 때, 이것은 라틴어 ‘auditores’ 에서 파생되어 나온 것으로, 주지하다시피 청자들(hearers)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청각적 자극의 수용이 주가 되는 주체라는 것이다. 맥루한이 언급한 바와 같이, 청각이 중심이 되는 귀의 세계는 뜨거운 감각 과민증의 세계이며, 주어지는 정보에 극도로 민감해지는 수동적인 세계이다(McLuhan). 이러한 청각 자극의 수동적 특성은 다른 인간의 감각과 비교해 보더라도 드러난다. 즉, 청각을 제외한 나머지 감각의 수용 과정은 능동적인 행위를 포함하고 있는데, 예를 들어 시각을 보더라도 무엇인가를 보기를 원할 때 눈을 뜨거나 고개를 돌려서 봐야 하고, 촉각의 경우에도 느끼기 위해서는 우선 손 혹은 신체의 일부를 대상에 가져가야 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청각은, 손으로 귀를 막지 않는 이상, 들리는 것이다. 이처럼 수용자라는 개념에는 근원적으로 수동성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으며, 이런 상황에서 수용자가 제대로 수신하지 못하는 상황은, 송신자와 수신자 사이에 잡음(Shannon, and Weaver)이 끼여드는 상황밖에는 없다. 이러한 수동적 수용자의 의미는 초기 커뮤니케이션 학에서는 송신자의 입장에서 보는 수용자였다. 즉, 송신자가 마음만 먹으면 설득 가능하고 조종 가능한 힘 없는 대상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수동적 수용자라는 견해는 필연적으로 매스미디어의 강효과 이론들과 연결된다. 특히 탄환이론의 경우 이러한 수용자의 개념을 가장 잘 적용하고 있다. 쏘면 맞는, 오로지 미디어의 타켓으로서의 수용자를 설정한 이 이론에 있어서 수용자는 미디어의 메시지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며 또한 즉시 그 효과가 나타나게 된다. 또한 미디어의 폭력에 관한 이론에서도 관찰 학습 이론과 같은 경우, 미디어의 메시지를 그대로 수용하여 배운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관찰 학습이론은 수용자가 적극적이고 능동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고 생차별적으로 강하게 노출 된 것이 아닐까 한다. 또한 1938년 미국 라디오 방상 드라마인 ‘화성인의 침략’ 의 예는 탄환이론의 가장 적절한 예인 동시에 수동적이고 무지한 수용자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미국 CBS 방송의 이 프로그램 도중, 드라마의 일부로서 화성인이 침입했다는 긴급 뉴스를 듣고는 이것을 청취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실제로 화성인이 침공한 것으로 착각하여 큰 소동이 있었던 것을 볼 수 있다.2-1 이용자 (능동적인 수용자)하지만 위의 수동적 수용자의 논의를 뒤로 하며 점점 능동적인 사용자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이미 우리가 접하고 있고, 또한 앞으로 더욱 많이 접하게 될 새로운 인터렉티브 미디어 환경에서 이루어지는 행위의 능동적 특성을 강조하기 위해서는, 수용자 개념 대신에, 보다 능동적 의미의 이용자(user)라는 개념이 더 적합한 것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이용자라 명명할 능동적 수용자는 기존의 수동적인 수용자와는 달리 미디어의 내용을 평가할 줄 알고, 또한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존재이다. 이와 같은 이용자들의 능동성은 미디어를 받아들이는 태도와 해석에 있어서의 능동성이다. 그리고 VOD 와 같은 예와 수업을 통해 배운, 어떤 행동을 취해야만 진행할 수 있는 TV 프로그램은 미디어 자체의 이용에 있어서의 능동성의 개념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기계적인 활동으로서의 능동성은 엄연히 살펴볼 때 능동성이라 말하기 조차 힘들지도 모른다. VOD와 같은 예만 보더라도, 그것은 매체의 특성상 어쩔 수 없이 취해야 하는 행동일 수도 있다. 그리고 같은 맥락으로 확장 시킬 경우 TV를 막연히 키고 채널을 고르는 것만으로도 능동적인 이용자라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결국 진정한 이용자의 의미는 수동적 매체에 대한 기계적인 능동성은 아니며, 오히려 전자와 같이 미디어의 메시지를 해독하고 그러한 행동을 통해 어떠한 효과를 가져갈 수 있는지로부터 능동적인 이용자의 개념을 적용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 생각된다경우 관찰 학습이론은 물론 수동적인 의미로서의 수용자를 전제로 하는 듯 하지만, 그 외의 의견이 분분하다는 것 자체만 보아도 알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같은 폭력을 접해도, 카타르시스 이론처럼 폭력성이 해소될 수도 있으며, 또한 그 스스로의 성향을 보강할 수도 있다. 물론 그대로 모방하는 경우도 있다. 이와 같은 폭력에 관한 미디어의 논의는 심리학적 차원이나, 무의식과 연결하여 그 원인을 살펴볼 수도 있지만, 같인 인간이라도 경우에 따라 그 태도가 달라지는 것을 볼 때 이러한 다양한 논의 자체가 사람들의 미디어를 접한 후의 행동과 태도, 효과에 있어서 다양성이라고도 또한 능동성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특징이 나타나는 것은 아닐지 생각해 볼 수 있었다.2-2 이용자의 예이러한 이용자의 예로서 먼저 초기의 의미로서의, 즉 수동적 미디어의 틀 안에서의 이용자의 경우, 우리가 VOD 와 같은 주문형 서비스를 이용하는 과정에 있어서의 행동을 예로 들 수 있다. 우리는 원하는 것만을 볼 수 있게 되었고 그것을 위해 우리는 능동적인 행동을 취함으로써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그리고 좀더 나아간 의미로서 위에서 살펴본 능동적인 이용자의 예는 이용과 충족이론의 예가 될 수도 있는 목적 지향적으로 미디어를 이용하고 있는 사람들을 그 예시로 들어보면 충분하리라 생각한다. 다시 말해, 사람들은 각각 자신이 원하는 프로그램을 보며, 그러한 사람들의 수가 다양하며, 또한 능동적으로 원하는 것만 선별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엇인가 즐길 것을 찾는 사람이라면 드라마 혹은 쇼 프로그램을, 정보가 필요하면 뉴스를, 그리고 생활정보가 필요할 경우는 아침방송의 생활 정보를 보기 마련이다. 그리고 또한 그들이 선택한 그러한 정보라 해서 무작정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드라마를 보며 사람들은 그 드라마에 대해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하는 것을 우리는 종종 볼 수 있다. ‘저 드라마는 현실성이 없어!’ 와 같은 말을 하는 것은 너무나 흔한 일이다. 그리고 또한 뉴스를 보면서도, ‘정다. 뉴미디어의 특징이라 볼 수 있는 광역화, 고속화, 쌍방향성, 다채널이라는 특징과 맞물려 스스로 미디어의 소비자 뿐만이 아닌 적극적인 공급자가 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용자들의 능동성은 이제는 원하는 컨텐츠를 보는 것과 같은 기존 의미의 능동성에서 벗어나, 그 틀을 깨고 있는지도 모른다. 원하는 것을 만들어 내고, 스스로 미디어를 제작하는 모습을 통해 이용자는 더 이상 이용자이기를 거부하며, 이용자와 제공자의 구분을 무너뜨리려는 모습이 뉴미디어 시대의 능동적 이용자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 하에서 더 이상 이용자라는 말은 사용될 수도 없을 것이라 생각된다. 지금까지 미디어 여건에서의 이용자는 이제는 미디어와 그 포함관계를 규정할 수 없는 성분의 하나로 바뀌는 지도 모른다.3-2 뉴미디어 시대의 이용자 모습의 예앞서 말한 이용자의 행위를 제한하는 한계를 찾아내는 예로 월드 와이드 웹을 단편적인 증거로 언급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월드 와이드 웹을 뉴미디어로 규정함을 전제로, 그 동안의 미디어에서 이용자가 결코 가질 수 없는 편성권을 이용자는 획득하게 된다.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컨텐츠를 찾아볼 수 있기 때문에 더 이상 매체의 편성에 개인을 맞추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단지 이용자는 능동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원하는 시간에 스스로의 ‘편성’ 에 따라 획득할 수 있게 되었고, 이러한 사실만으로도 이용자의 행위를 제한하는 틀을 깬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結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제는 능동적인 이용자의 시대이다. 그 동안 수많았던 수용자의 위치에 대한 논의는 새로운 미디어의 환경에는 적용되지 않는 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리고 새로운 미디어의 시대에는 수용자를 대체할 새로운 존재로서의 능동적 이용자가 존재함을 알 수 있다. 앞으로 더욱 발전하게 될 미디어에 있어서, 기존보다는 더욱 능동적인 이용자가 되어야 비로소 시대에 적응하는 인간형을 갖추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또한 이러한 능동성은 기존 미디어의 틀에 종속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만으로 6
    인문/어학| 2004.08.13| 6페이지| 1,000원| 조회(6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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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정조사] 조사방법론-연구디자인 평가A+최고예요
    1.문제제기최근 이슈가 되는 대학가의 문제들은 이전까지 우리가 접했던 것과는 사뭇 다르다. 80년대를 정점으로 몇 년 전 까지 이어져왔던 대학생의 학생운동(과격시위 및 집회)은 대학가의 큰 화두 중 하나였다. 한총련 의 집회와 같은 경우에 있어서 그 준비를 위한 장시간의 노력이나 일종의 축제와 같은 분위기들은 그러한 모습을 잘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대학가의 화두는 더 이상 학생 운동과 관련된 것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청년실업의 문제와 맞물려 위기의식을 느끼는 대학생의 모습들이 조명되고 있으며, 학생들은 개인의 일에 치중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분명 이와 같은 변화에는 원인이 있기 마련이다. 수업을 통해서 알게 된 이론에 따르면, 정부의 신뢰도가 낮고 효력이 강할수록 더욱 강한 이의계층 화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실제 행동으로 옮기게 될 가능성이 커지며, 또한 과격해질 가능성도 높다. 이와 같은 모델에 따르면, 현재 대학생의 모습은 異議계층으로 분류되기보다는 소외계층과 같은 모습이다. 즉 신뢰도도 낮으며 효능 또한 낮은 상태와 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되었다. 비록 과거의 시위행태가 민주화 및 정부부패 등과 관계 되어 있었음은 자명한 사실이지만, 현재 4%에 지나지 않는 우리나라 대학생의 낮은 대정부 신뢰도는, 신뢰의 하락만으로 지금과 같은 학생운동 부재의 양상은 설명하기가 어렵다는 생각을 갖게 해 준다. 동시에 작금의 현실은 대학생들의 효능(즉, 자신의 영향력에 대한 평가)을 포함한 그들의 경제, 사회학적 위상 변화로부터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닌지에 대한 의문으로부터 연구를 시작한다.2. 연구정향a. 개념정의먼저 학생운동의 정의를 살펴보면, 한국 학자들의 경우 학생운동은 대학의 정책이나 국가의 정책과 관련해서 학생들이 집단으로 일으키는 운동으로 정의하고 있거나 학생이란 신분적 특성을 갖는 결사체들이 사회에 대한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미치기 위해 전개되는 운동으로서, 학생들의 이상을 현실사회에서 구체화 시키려는 수 학생운동의 양상. 한편 Aron의 정의에 따르면 학생운동을 학생들이 갖고 있는 불만에 대한 상황개선 및 개혁을 시도하고자 학생집단들이 여러 가지 수단 등을 동원하여 구호, 선언문 발표, 집단행동 등으로 표출하는 일련의 연대행위라 규정하고 있다. Altbach는 정치적 색채를 띤 이념이나 이론에 따라 정해진 일련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학생들이 행하는 연대 행동으로 보고 있다. 이들의 정의를 종합해 볼 때 학생운동은 학교 내의 정책이나 사회적, 정치적 현실과 관련해서 학생들이 갖고 있는 문제의식, 사회적 이상, 갈등 등을 집단행동을 통하여 표출하는 본질적으로 변화를 지향하는 운동이라 규정할 수 있다.b. 학생운동 설명 이론이러한 대학생들의 학생운동을 설명하는 데에 있어서 주로 심리학적, 사회학적 방법이 사용되고 있다.먼저 심리학적인 요인으로 Feuer의 이론인 세대간의 갈등을 언급할 수 있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세대 갈등론적 접근 방법은 프로이드(S.Freud)의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오이디프스 컴플렉스 의 개념에 기초하여 젊은이들의 반항적 행동은 아들이 아버지를 증오하는 세대간의 갈등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오이디프스 컴플렉스 의 적용은 문제가 있다. 즉 이론적 근거가 되는 프로이트의 이론은 사실 자신의 내적 갈등이나 사회적 갈등을 해소 시키는 데에 있어서 소극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캘빈 s. 홀 프로이드 心理學. 즉, 프로이트의 이론 학생운동이라는 실천적 행동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하다. 따라서 이러한 Feuer의 이론을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수도 있다.다음으로 사회학적 요인이 학생운동을 설명할 수 있다. 사회심리학에서 제기하고 있는 학생운동의 발생요인에 관한 대표적인 설명은 상대적 박탈 이론이다. 이 이론은 행위자가 기대하는 가치와 실제 얻은 가치 사이의 차이에서 생겨나는 상대적 박탈감에서 사회운동이 형성되거나 지지된다는 가설을 제기하고 있다.(Gurr, 1970; Runciman, 1966). 이러한 입장에서속한 학교의 환경, 사회적ㆍ경제적 정의, 정치적 현실 등을 둘러싼 사회적 환경에서의 기대가치와 현실사이의 괴리를 느끼고 이를 타개하기 위한 방편으로 학생들은 저항적 행위를 꾀하게 되고, 기대가치와 지각현실 사이의 간격이 크면 클수록 학생저항은 더욱 격렬해지고 지속적일 가능성이 많다는 설명이 가능하다.c. 선행 연구 고찰가장 먼저 1970년대의 한국 학생시위의 성격을 밝히는 한 연구에서는{ 소광섭 1987年시위행위의 발생원인을 두 가지로 분석하고 있다. 우선 시위행위의 발생원인은 정치 참여 장치의 효율성과 정치 지도층의 대표성 및 능력에 대한 불신에 기인한다고 말하고 있으며, 또한 경제적 요인으로서 급속한 정부주도 산업화가 초래한 불공정한 부의 분배가 노동계층의 상대적 좌절감을 불러일으킴으로서 사회가 불안정하게 되어 시위가 빈발하는 원인이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또 다른 이전연구{ 이대우 1984年를 살펴보면, 80년대 당시의 대학생과 시위에 대한 요소를 자세히 분석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연구에서 시위참여는 급진성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으며, 또한 이러한 급진성을 형성하는 요소로서 가정의 생활환경의 비교열위, 현실참여문제에 대한 어려움(성적 및 당면과제)으로 인한 심리적 압박 등을 거론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이 외에도 대학생들의 학회활동이 사회참여 및 학생운동과 관련이 있다는 연구{ 박동범 진보평론 2003年와 대학의 구조와 연결하여 설명하는 이론 또한 발견할 수 있었다.d. 요약앞선 선행 연구를 통해, 이제 몇 가지의 이론을 도출해 낼 수 있다. 우선 첫 번째로 사회 경제적 박탈감이 심할수록 학생운동은 빈도가 높고 과격해진다. 를 설정해 볼 수 있다. 또한 이에 따르는 이론으로서는 첫째, 가정의 경제적 환경이 열악하다고 인식할수록 학생운동에 참여한다. 둘째, 당면과제에 대한 압박이 크다고 생각할수록 학생운동에 참여한다. 는 이론을 끌어낼 수 있다.3. 가설작성앞서 살펴보았던 선행연구의 논리는 학생운동을 설명하기에 좋은 이론들이라 생각한다. 그러 있다. 이 연구는 예전에 비해 학생운동의 빈도는 줄었다는 대전제 하에서 출발 한다. 그리고 선행 연구와는 다른 요소들을 추가시켜 보려고 한다. 즉, 대학생의 효능이 낮아질수록 학생운동은 줄어든다. 라는 전제하에 취업이 어려워질수록 학생운동은 줄어든다. 는 가설과 명문대 학생일수록 학생운동이 빈번하다. 는 가설을 세워보려고 한다. 그리고 여기에 기존의 경제 환경이 열악할수록 학생운동은 빈번하다. 는 가설을 다시 사용하려고 한다.4. 조작화위의 가설에서는 대학생의 효능이라는 대전제에 대하여, 취업과 명문대라는 틀을 사용하였다. 이와 같은 가설의 이유는 예전의 경우 명문대생의 위상이 지금보다 더 높았다는 생각을 해 보았기 때문이다. 즉, 현재는 10여 년 전에 비해, 대학의 정원 및 학과가 늘어나게 되었고 또한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의 수가 늘었기 때문에 같은 학교의 학생이라 하여도 이전에 비하여 평가 절하되는 경향이 있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거 명문대생의 경우, 졸업 후 취업이 보장되었다고 하여도 무방할 정도였던 것에 비해, 지금의 명문대 생들은 취업이라는 여건이 졸업 때까지 혹은 졸업 후에도 시원하게 해결되지 않은 경우가 많은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또한 과거 명문대생의 졸업 후 취업의 형태에서는 학점이나 토익점수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즉, 그들의 경우 졸업장만 따면 취업이 보장 되는 신분으로서, 대학생활 동안 자유롭게 학생운동에 참여할 수 있었다는 특징에 주목하였다.이러한 가설에서 바로 조작화 하기에 무리가 있을 추상적인 개념은 없어 보인다. 먼저 가정의 경제 환경에 대해서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학생 자신이 체감하는 가정의 경제 환경이다. 학생들의 경우 자신 가정의 경제 규모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또한 이 연구가 학생들의 심리적인 면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체감하는 경제적 요소를 조사하는 것이 올바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명문대 생이라는 것은 따로 설문의 내용으로 포함하지 않고,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명문대인 서울 상으로 중간 등급의 대학 3개와, 수도권의 중하위권 대학 3개를 선택하여 비교하기로 하겠다. 또한 이러한 대학의 등급은 이미 조사되어있는 대학 종합 평가를 토대로, 마찬가지로 이미 조사된 사람들이 인식하는 대학 순위를 같은 점수로 반영하여 그 등급을 나누기로 한다. 그리고 취업에 대한 인식은 현재 취업에 대학생이 느끼는 어려움의 정도를 측정하기로 한다.5. 조사방법과 조사시행요건이 연구는 전국의 대학생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서울 및 수도권의 대학생을 기준으로 연구를 하는 것이, 지역적 요소 등이 제외된 적정한 비교가 되리라 생각한다. 총 조사인원은 900 명을 대상으로 한다. 즉, 3개 명문대에 각각 100명, 그리고 중위권 대학에 각각 100명, 하위권으로 분류되는 3개 대학에 각각 100명, 총 900명의 대학 3,4 학년을 대상으로 표본을 수집하며, 그 방법으로서는 설문조사를 채택한다. 또한 3,4 학년을 대상으로 조사하는 이유는, 취업에 대한 질문에 대하여 현실적인 답변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설문내용은 총 7문항으로서 첫 번째 학생운동의 경험에 대한 조사이다. 즉, 학생운동의 참여의 경험에 대하여 기수척도를 이용한 그 횟수를 파악한다. 또한 학생운동 참여에 대한 인식을 조사하려고 한다. 다음으로 가정의 체감 경제력에 대해서는 평정식 질문(최상, 상, 중상, 중, 중하, 하, 최하)을 사용하여, 대학생이 느끼는 가정의 경제력을 측정한다. 또한 한달에 소비하는 지출에 대한 서열척도를 이용한 설문을 실시하여 위의 체감경제력을 뒷받침하도록 한다. 마지막으로 취업에 대해서는 3가지 문항에 대한 설문을 실시한다. 첫째, 현재, 대학생의 취업이 예전보다 힘들다고 생각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매우 그렇다, 그렇다, 보통이다, 그렇지 않다, 전혀 그렇지 않다. 라는 평정 척도를 적용하며, 두 번째로, 당신은 졸업 후 자신이 희망하는 곳에 취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라는 평정식 질문을, 세 번째로, 현재 자신의 학교 학생의 취업상황이 좋은가? 라는 마찬가지다.
    사회과학| 2004.01.13| 5페이지| 1,000원| 조회(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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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랑스철학] 베르그송의 자유
    序철학사에서 자유에 대한 논의는 오늘날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베르그송 이전에도 여러 철학자들의 논의가 있어 왔다. 그러나 스피노자와 같은 경우 인간의 자유를 거의 부정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모든 것은 하늘에 쓰여 있는 대로……. 라는 그의 명제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허상으로 취급해 버린다. 18세기에 이르러서는 루소, 그리고 디드로와 같은 철학자들이 자유에 대해 좀 더 다양한 고찰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특히 디드로의 경우 초기의 결정론적 입장에서 자유를 고찰하였으나, 점점 그의 작품 안에서 자유라는 것을 기존과 달리 도덕성 등과 떨어져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의 마지막 소설 작품 (운명론자 자끄와 그의 주인)에서는 결정론적 자유의 한계에 대해 스스로 인정하고, 마치 이제 우리가 논하게 될 베르그송의 자유와 같은 행위로서의 자유에 대한 어렴풋한 인식을 하는 것을 볼 수 있기도 하였다. 이제 우리가 알아볼 베르그송의 자유가 어떤 의미에서는 진정한 인간의 자유에 대한 최초의 고찰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기도 하였다. 그만큼 그의 자유에 대한 논의는 이전과는 판이한 모습을 보여주며, 또한 이전에 대한 비판을 통해 자유의 개념을 새롭게 도출해 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1. 행위하라! 그러면 자유를 알 것이다.베르그송에게서의 자유에 대한 언급은 자유를 둘러싼 결정론과 비결정론의 대립에서 출발한다. 결정론 쪽으로 조금 기울어진 듯한 이 자유에 관한 논의는 자유의 모순개념을 필연으로 여김으로부터 기인되었다. 그러나 베르그송에게 있어서의 자유라는 것은 이 양자의 관점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새로운 관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논의의 시작에서부터 두 관점에 대해 반박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먼저 기계론을 비판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기계론의 주장은 세계의 모든 요소가 어떤 법칙에 의해 설명되며 인간의 의지 활동(물론 자유도 이 안에 포함된다.)도 필연적 법칙의 일부이므로 자유라는 것의 수행 주체로서 행위자가 배재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더불어 자유라는 것은 기계론에게 있어서는 환상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이어서, 베르그송은 역동론 - 즉 생명은 타자와의 적극적 상호 관계 맺음을 통해 자기 동일성을 확보하는 기능이라는 - 을 설명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두 의견, 즉 기계론과 역동론은 전자의 법칙과, 후자의 사실이라는 두 개념의 대립으로 발전하며, 이것은 다시 분석의 입장에서 자발성과 타성의 대립으로 발전한다. 그리고 또한 사물을 위에서 바라보는 관점과 아래로 내려다보는 관점으로 요약될 수 있으며, 베르그송의 경우 여러 분야에서 위에서 보는 관점을 견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자발성의 개념에서 타성은 나올 수 있으나, 그 역이 불가능하다는 근거를 듦으로서 자신의 관점을 뒷받침하고 있으며, 이것은 자발성을 부인한 기계론에 대한 비판이라고 볼 수 있다.그러나 위의 논의와 조금 떨어진 새로운 관점으로서의 베르그송의 자유는 지속 과의 관계(즉 베르그송의 저서 의식에 직접 주어지는 것들에 관한 시론 에서 이야기 된 지속의 개념)가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즉 물질과는 다르게 구분되는 생명 혹은 의식의 존재론적 구조를 드러내는 것이다. 의식상태라는 것은 질적 복수성을 취하는 것으로서 이것은 상호 침투성, 불가분성, 매순간 이질성의 계기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물질은 이미 생성의 세계와 단절되어 있는 것이지만, 의식 요소들의 경우 그 사이의 공백 이 개제되어 있지 않으며, 의식 상태의 상호 침투 관계는 시간의 차원에서 기억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로 인해 창조를 가능케 하는 과거의 보존, 즉 지속으로서의 창조적 진화를 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결국 실재하는 자아인 표층자아의 제반 요소의 인과성을 추정하는 것, 즉 지속의 세계에 인과율을 적용하는 것은 부당한 실체화를 범하는 것이라 지적을 하면서 기존의 이론, 즉 두개의 세계관을 비판하는 것을 볼 수 있다.또한 베르그송은 결정론과 비결정론의 논리 모두에 대한 반박을 전개한다. 우선 두 논리 모두, 어떠한 설명을 하고자하는 행위에 대해 결코 현시적이지 못하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결정론과 비결정론은 양자모두 사건후의 회고적 관점이나 결과론적 관점을 취할 뿐이다. 결정론의 경우 이미 아는 사실만을 통해서 어떤 현상에 대한 사후 설명을 하는 것이고, 비 결정론자들의 경우 행위 전에 몰랐던 것을 아는 체하는 논리적 기만을 통해 사후설명을 하는 것뿐이라는 차이밖에는 없는 것이다.결국 이러한 두 논리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베르그송이 말하는 것은 행위 이다. 행위와 함께 일어나봐야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자유라는 것은 인식이나 논증의 대상이 아닌 행위와 구체적 경험의 대상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자유에 대한 논리적 접근은 그 자체로서 사실을 변화시킨다. 결국 자유에 대한 논의는 파기된 채 자유는 행위의 대상으로서 남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가 자유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행위하라! 그러면 자유를 알 것이다. 라는 명제뿐인 것이다.2. 자유에도 주의 량에 따른 차이가 있다.베르그송에 따르면 우리는 지속하는 한 본질적으로 자유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베르그송의 자유에는 등급이라는 또 다른 측면이 존재하기도 한다. 우리가 일상에서 이미 경험하듯이 많은 경우에 있어서 우리는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본질적으로 자유이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존재하는 것이다. 자유라는 것, 이것은 바로 노력을 통해 도달하는 가치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일어난 행위와 일어나지 않은 혹은 일어날 수 있었을지 모르는 행위들과의 관계에서 찾는 것이 아니다. 바로 행위와 행위자들의 관계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즉 베르그송에게 있어서의 자유행위의 반대는 자동주의 즉 - 혹자는 자동주의가 무의식의 표출이라고도 말하는 경우가 있기도 하지만 - 의지나 주의의 개입이 없는 습관적 행위를 말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되는 그러한 자동주의이다. 이러한 습관의 본성은 자발성에 역작용하는 힘이며, 변화에 역행, 즉 시간의 본성에 역행하여 이루어진다. 습관적 행위 속에서 실상 우리는 자신의 안에서 사는 것이 자신 밖에서 사는 존재이며 스스로 행위 하는 것이 아닌 행위 되어지는 존재인 것이다. 이와 같은 습관적 행위를 베르그송은 전체적 자아에서 분할, 소외되어 있는 자아의 부분으로서의 표층자아, 즉 기생적 자아에서 우러나온 행위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자유행위는 이러한 부분적 자아가 아닌 전체적 자아로부터 우러나온 행위이며 내가 자유인가 아닌가의 문제라는 것은 내가 나인가 혹은 내가 아닌가의 자기 동일성의 문제와 일치된다.
    인문/어학| 2004.01.13| 4페이지| 1,000원| 조회(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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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랑스문학] 프랑스문학과 나
    프랑스 문학과 나!어릴적 읽은 세계명작동화들 속에는 분명 프랑스동화들이 있었다. 이제 잘 기억이 나지도 않지만 누구나 다 아는 파랑새 도 프랑스 동화였지 싶고 라퐁텐의 우화도 아마 이솝우화들과 나란히 끼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프랑스 라는 국적을 가진 문학으로 각인되지는 않았다. 그건 요즘 2-3살 난 아기들도 읽는 셍떽쥐뻬리의 어린왕자 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분명히 여러 번 읽었고 감동적인 작품이었지만 어릴적 난 그걸 굳이 프랑스 문학으로 이해하지는 않았다. 비로소 프랑스를 떠올리게 된 것은 아마도 교과서에 포함되어 있었던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 의 프랑스 만세 나, 아니면 별 의 프로방스 지방이라는 비음 섞인 프랑스어적인 지명에 이르러서였을 것이다.중학교 때 학생용 문고판 전집의 한 권이었던 스탕달의 적과 흙 을 읽었지만 그 당시 나에게 이 작품은 이게 무슨 고전이고, 명작이라고... 하는 생각만을 갖게 했을 뿐이었다. 그냥 난 이런 연애 얘기가 고전 으로 프랑스 명작 으로 분류되는 것이 아주 못마땅했었다. 고전 문학이라면 뭔가 숭고한 것, 철학적인 것에 대해서 쓰고 있어야 할 것이라는 당시 나의 강박관념, 혹은 기대 속에서 적과 흑 은 시대적 배경과 작품의 의의를 설명해 주려는 해설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가장 볼품없는 작품 중 하나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줄리앙 소렐이라는 당시 내가 보기에 그저 나쁜 놈 , 그렇지만 약간은 동정을 불러일으키는 인간의 출세욕과 파멸의 과정이 지닌 비극성을 나는 나중에 우연히 프랑스 영화 태양은 가득히 의 알랭 드롱의 눈빛 속에서 느끼게 된다. 꼬마 니꼴라 라는 책도 아마 그 때 쯤 읽었을 것이다. 이 책은 얼마전 유행했던 독일작가의 좀머씨 이야기 보다도 훨씬 재미있었다.중학교 3학년이 되어서 나는 영한대영문고 시리즈에서 앙드레 지드의 을 읽게 되었다. 영어공부를 하기 위해 읽는 영어로 된 에서 프랑스 문학을 인식한다는 건 무리였다. 그러나 또 한 권의 영한대역문고는 어쩌면 나의 의식 속에서의 첫 번이루어내는 분위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 때 이방인의 뫼르소를 보면서 느꼈었던 비극적인 파토스를 나는 의로운 변호사가 등장하는 영화 제이에프케이 를 보고 난 후 느꼈던 이상한 슬픔 속에서 회상해냈다. 케네디 암살사건의 진범을 밝히지만 그럼에도 패소할 수밖에 없었던 의로운 변호사와 태양을 보고 살인을 하는 뫼르소라는 완전히 질이 다른 두 인간에게서 나는 그들을 묶고 있는, 인간을 묶고 있는 굴레와 같은 것, 인간의 힘을 초월하는 더 큰 힘의 존재와 그것에 대한 인간의 저항을, 곧 인간의 실존적인 한계를 보았던 것 같다. 그러니까 이것이 중3인 내가 이방인을 읽으며 해설자의 도움으로 정리한 실존주의 였던 셈이다. 이 때부터 실존주의라는 말은 나에게 나만이 느끼고 있는 정신적인 반항과 남들과는 다른 나만의 세계를 표상하는 기호 같은 것이 되었다. 계속되는 실존주의 집중탐구의 과정을 통해 나는 공부를 게을리하는 것을 스스로 합리화했다. 모범생과 실존주의는 안 어울리기 때문에. 실존주의는 떨어지는 성적 정도는 과감히 경멸할 줄 아는 성숙한 지적 자세에 대한 아이콘이자, 조야한 중학교 세계로부터 거리두기를 할 줄 아는 자의 허영 어린 제스추어가 되었다. 그렇지만 어쨌든 당시 나의 실존주의에 대한 집착은 단순히 이런 자기비판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좀 부당할 수도 있을만한 진지함을 가지고 있었다.이방인 을 읽은 뒤 거의 그것과 동시에 쓰여졌다는 에세이 시지프스 신화 를 읽었다. 내가 읽은 책 속에는 시지프tm 신화와 부조리에 대해서 쓴 작가의 에세이들이 실려 있었다. 이 책은 나에게 이방인 못지않은 충격을 주었다. 굴러 떨어지는 돌을 계속해서 밀어올려야 하는 시지프스에게 내려진 저주의 비극성과 부조리함과 철학적 자살 과 키릴로프 속에서 느꼈던 인간의 부자유와 그것을 벗어나기 위한 선택으로서의 자살은 당시 나의 실존주의=반항 공식의 정점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나의 실존주의=반항 공식을 무너뜨리는 키에르케고르와 세스토프의 순종적인 실존주의를 (나중에 알기로는 유신론압한 일도 없다. 그렇지만 실존주의와 부조리가, 그리고 얼핏 스쳐가던 니체의 신은 죽었다 라는 명제가 나의 종교적인 의식에 (사실 거의 무의식에) 약간의 부담이 되었던 것 같다. 그 당시 니체의 말은 나에게 다른 어떤 컨텍스트도 없이 그야 말로 신은 죽었다 라는 신성모독의 선언으로 이해되었다. 그것은 분명히 매력이 있었다. 태양 때문에 사람을 죽인 뫼르소의 충동만큼이나, 어쩌면 그것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카뮈의 철학적 자살 에 소개된 키에르케고르와 셰스토프, 그리고 야스퍼스라는 사상가들의 신을 긍정하려는 노력에서 더 큰 감동을 받았다. 신을 증거하려 하면 할수록 신이 존재한다는 증거를 부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 그건 곧 이 세계의 원리와 합리성을 긍정하고자 하면 할수록 나타나는 부조리의 다른 표현이었다. 그런 노력의 극단에서 불가능을, 신의 부재를, 부조리를 포용하는 듯이 보이는 이들 사상가들은 사실 독단적인 니체보다 아름답게 여겨졌던 것 같다. 결국 불가능한 것, 부조리를 위해 최후에 남겨진 신의 존재라는 단순한 생각은 이후 나의 신앙의 바탕이 되었다. 신은 곧 인간을 위해서, 인간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이라는 비당파적인 신앙은 사실 교회라는 지독한 당파주의에 배치되는 것이긴 했다.이처럼 카뮈의 이 에세이들은 나에게 많은 정보를, 정확히 말하면 책과 작가의 목록들을 제시했다. 키에르케고르, 셰스토프, 야스퍼스, 니체, 도스토예프스키 등등. 동시에 이 즈음 학교 국어 선생님이 소개해주신 원로철학자 김형석씨가 쓰신 영원과 사랑의 대화 , 고독이라는 병 등의 에세이를 알게 되었다. 나에게 그 에세이는 유신론적 실존주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설교집 같은 것으로 읽혔다. 그의 책 역시 나에게 많은 도서 목록을 남겼다. 하이데거, 칸트 등등이 위의 목록에 더해졌다. 집에는 철학전집이 하나 있었다. 대개의 목록의 철학자들의 책이 다 거기에 있었다. 세로로 된 글씨에 한자가 곳곳에 있고 열심히 노력해보았으나 읽을 수는 없었다. 그들 모두의 책을 다 지금까지의 작품들과는 배경이 다르다는 사실과 사막의 더위가 아닌 북국의 안개 같은 몽환적인 느낌이 남아있다. 좀 지루한 일인칭 독백의 웅얼거림도 남아 있다. 그리고 전락 이라는 작품은 내게 성서 속의 더러운 여인에게 돌을 던지려는 사람들을 책망하려던 예수님의 모습과 그의 말 너희 중 죄없는 자가 그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와 함께 내 머리 속에 기억되어 있다.까뮈의 독서를 지나서 자연스러운 수순인 듯 나는 사르트르에게로 가려했다. 작가에 대한 해설이나 살존주의에 대한 간략한 해설들 속에서 사르트르의 구토 는 이미 꼭 내용을 아는 듯한 작품이 되어버렸다. 근데 우연히 집에서 구토 를 찾던 나는 지식인을 위한 변명(?) 인가 하는 책을 발견하게 되었다. 지루했다. 내가 그 때까지 알고 있던 실존주의와 너무 거리가 멀었다. 이건 도덕 교과서, 아니면 삐딱한 윤리 교과서였다. 그 당시까지 나는 카뮈와 사르트르의 좌파성이나 또 그들이 후에 결별한 것 등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사르트르의 구토 역시 언젠가 다시 건드려 보았지만 그것 역시 왜 그런지 좀 더 지루하게 느껴졌다. 카뮈에게서와 같은 드라마틱한 것이 좀 부족해서인지. 결국 나는 사르트르를 끝까지 읽지 못했다. 나의 실존주의에 대한 표면적인 탐닉은 여기서 끝이 났다.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한 가지만을 보았다. 나에게는 불완전한 실존주의가 남았다. 그 뒤로 실존주의 철학자들을 다시 읽을 생각은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 재수를 하면서 니체의 저작들을 몇 권 읽어본 것과 도스토예프스키의 키릴로프를 찾아 악령 을 읽은 것이 당시의 목록 중의 유일한 것들이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책을 읽는 일은 점점 더 드물어졌다. 다른 읽을 거리들을 (일본만화 등등..) 찾아냈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동안 나는 그 어떤 프랑스 문학 작품도 접해보지 않았다.대학에 입학해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내가 불어과에 입학했음에도 불구하고 수업시간에 다룬 이방인 외에는 별다른 작품이 생각나지 않는다. 대신 나는 프랑스 현대철학자들의 책에 광기라는 이름이 붙여질 수 있다는 푸코의 통찰력은 감동적이었다. 이어 나는 푸코에 대한 간단한 연구서적을 보았고 그 과정에서 들뢰즈, 가타리, 바르트, 데리다, 크리스테바, 보드리야르, 더 나아가서는 바타이유에 이르는 학자들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그들의 이름이 들어간 책이 눈에 띄면 꼭 한 번씩은 펼쳐보았다. 물론이 당시 함께 펴 본 책 중에는 움베르토 에코의 푸코의 추 도 있다. 푸코의 추 의 푸코가 미셸 푸코가 아닌 것 정도는 알고 있는데도, 에코의 코 가 한 번 더 연상작용을 강요한 탓인지 나는 푸코에 대한 책들을 읽는 과정에서 푸코의 추 를 읽고 말았다. 흥미있는 책이었다. 대신 에코에 대한 소개를 통해 기호학이라는 말을 알게 되었고 이는 후기 구조주의와 그것을 선행하는 구조주의자들의 이론과 사상에 대한 입문서들을 이해하는 것을 도왔다. 이렇게 후기 구조주의자들의 철학입문서를 읽다보니 구조주의 철학자들에 대한 입문서로 진행되어 갔고 역시 이들의 이름들과 아울러 몇몇 유명한 철학자들의 이름을 아우르는 목록이 생겼다. 이들을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내가 이들을 읽을 이유도 없었다. 이제 반항이나 지적허영이 나를 합리화해줄 수는 없었다. 그런데도 이들의 사상은 흥미로운 부분이 있었다. 잘 이해하지 못함에도 하나하나의 화두처럼 던져지는 그들의 키워드는 나에게 프랑스 철학에 대한 경외심 같은 것을 심어주었고 처음으로 내가 프랑스와 프랑스의 문화를 공부하고 있다는 것에 만족감을 느끼게 해 주었다. 물론 프랑스어로 그들을 읽지는 못하고 또 앞으로도 그건 불가능할 듯이 보이지만. 특히 그들의 글은 다른 느낌을 자유롭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해가 가지 않아도 지유롭고 문학적이라는 느낌을 나는 보드리아르의 시뮬라시옹 번역문을 읽으면서 느꼈다(!). 데리다의 해체 에 관한 논문들을 모아놓은 해체 라는 책 속의 백색신화 라는 에세이가 유난히 마음에 들었다. 이미 닳아버린 동전의 부조를 통해 닳아버린 은유를 말하고 그러한 은유의 상투성, 혹은 자동성의 었다.
    인문/어학| 2004.01.13| 5페이지| 2,000원| 조회(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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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문학] 디드로의 운명론자자끄
    序운명론자 자끄 라는 디드로의 작품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지고 있다. 뽀므레 부인, 르 펠르티에 씨, 퐁디셰리 시인, 자끄의 전 주인 대위 등에 대한 열정의 문제와, 또한 그와 이어지는 천재의 테마, 그리고 주인과 노예에 대한 테마, 페미니즘과 상대적인 도덕관에 대한 테마 등에 대한 디드로의 생각을 말해주며 우리에게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의 진정한 주제는 작품의 제목 Jacques le Fataliste et Son Maitre"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운명론에 대한 철학적 고찰이라고 생각한다. 즉, 운명론과 결정론, 그리고 자유의지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해 주고 있다. 작가는 이러한 사상들을 작중 등장인물을 통해서 그리고 혹은 작중에 개입하여 다루면서, 각각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간접적으로나마 피력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모든 것은 높은 곳에 쓰여 있는 대로 라고 수없이 반복하여 말하는 자끄의 모습에서 보이는 운명론의 모습, 그리고 스스로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자동인형과 같은 주인의 모습을 토대로 우리는 운명론과 자유의지, 그리고 결정론에 대한 디드로의 생각을 엿볼 수 있고, 또한 우리 스스로도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1. 운명론, 결정론, 자유의지이 작품을 통해 디드로가 말하고자 했던 자유의지와 운명론, 결정론에 대한 논의에 앞서, 작품에 나타나는 위 사상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을 짚고 넘어가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한다. 가장 먼저, 운명론이라는 개념을 우리는 표지에서부터 접하게 된다. 이러한 운명론이라는 것은 숙명론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 개념으로서, 작품 속에도 그 이름이 등장하는 스피노자의 개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모든 그의 철학의 귀결점이라는 것은 신 이다. 운명론에서 결국 자유로울 수 있는 유일한 존재, 즉 필연적으로 자유로운 존재는 신 밖에는 없다는 것이 그의 사상의 핵심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운명론 안에서 인간은 신이 짜놓은 어떠한 법칙-그 법칙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 신의 뜻이다. 그리고 인간의 선택과는 상관없이 신에 의한 결과로 귀착되는 것이 이와 같은 운명론이다. 즉, A, B의 두 갈림길에서 어떠한 것을 선택하던 간에, 신의 의도가 C로 정해져 있었다면, A를 선택하는 경우도, 그리고 B를 선택하는 경우도 결국은 C에 도착하게 되는 것이다.다음으로 생각해 볼 결정론이라는 개념은 언뜻 운명론과 구별이 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 그 차이는 매우 크다. 결정론의 핵심은 자연의 법칙, 혹은 인과율의 법칙이라는 말로 대표된다. 원인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결과가 나오는 것이 바로 결정론이다. 예를 들면, 이 작품에 나오는 자끄의 여정 그 자체가 결정론적인 모습을 띄고 있다. 아버지의 구타로 인해 군 입대를 하게 되고 그 후 총알 한 발에 의해 부상을 당한 결과 농가의 부인에게 구조되며, 그 후 의사의 집으로 가게 되고, 다시 강도를 만나고, 그로인해 선행이 알려져 데글랑 성에 초대되며, 결국 드니즈 와의 사랑으로까지 연결되는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여정에서 총에 맞지 않았다면, 혹은 강도를 만나지 않았다면 자끄는 그의 말대로 드니즈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즉, 모든 요소가 원인이 되어 드니즈 와의 사랑이라는 결과를 갖게 된다. 결국 인과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앞서 운명론을 말할 때의 예를 다시 사용하자면 A를 선택했을 경우 C가 되도록 정해지는 것이고, B를 선택했을 경우 자연의 수많은 인과 법칙에 의해 D가 되도록 정해져 있다는 말이다.마지막으로 자유의지에 대해서는 위의 사상들과는 다른 관점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자유에 대한 논의는 사실상 오래도록 철학의 주제였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대부분의 철학자들의 저서에 자유에 대한 언급이 있어왔다. 자유는 운명론, 결정론, 비결정론 등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개념이다. (물론, 운명론의 경우 자유라는 것은 신에게만 허락된 것일 뿐이다.) 다시 말해, 자유라는 것은 운명론과 결정론에 대립되거나 비교가능한 대상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이 작품을 통해 볼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자유는 위의 말로 대변되는 자유와는 사뭇 다르다.2. 작품을 통해 나타난 디드로의 운명론, 결정론, 자유의지이 작품을 통해 디드로는 가장 먼저, 운명론에 대한 비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즉, 스피노자의 철학에 대해 반박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자끄에게 스피노자의 철학을 가르쳐 준 대위에 대한 묘사를 통해, 작가는 그가 현실 초월적인 면을 갖추지는 못함을 지적하고 있다. 즉, 그가 믿는 운명론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친구와의 결투와 같은, 경쟁과 광기 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대위의 행동은 다분히 현실적이다. 즉, 운명론은 그에게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못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자끄와 사형집행인의 말의 에피소드에서도 작가의 비판을 엿볼 수 있다. 모든 것이 하늘에 쓰여 있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자끄 조차도, 말이 사형대로 계속 올라가는 불길한 현상에 대해 무덤덤할 수 없는, 고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자끄의 행동을 통해 작가는 모든 것은 하늘에 쓰여 있다. 는 운명론이라는 것은 실상 우리의 일상에서는 어떠한 해결책도 줄 수 없는 무기력한 사상일 뿐이라고 간접적으로 말해주는 듯 하다. 결국 쉴 새 없이 자끄의 입에서 나오는, 혹은 가끔은 주인의 입을 통해서도 나오는 모든 것은 높은 곳에 쓰여 있는 대로……. 라는 말은 현실적으로 아무런 자유 의지를 실현시킬 수도 없으며, 또한 말뿐인 무능력한 사상이라고 조롱하는 것과 같다고 느꼈다.작가는 이러한 숙명론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결정론적 입장을 나타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작품을 통해 그 결정론적인 구조와 인물의 모습을 보여주며, 그러한 결정론을 통해 자유 의지에 대해 말하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미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유기적으로 사건과 사건들이 만나는 이 작품의 구조에서부터 작가는 결정론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사형집행인의 말을 탄 자끄의 일화를 통해 그러한 결정론 적인 을 통해 나온 결과 였을 뿐이다. 즉, 어떠한 일이라도 일의 사후에 살펴보면 모든 세상의 요소들과의 인과에 의한 것이라는 결정론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결정론은 얼핏 보이는 것과는 달리 자유에 대한 부정과 이어지지는 않는다. 자끄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자끄가 말로는 숙명론을 말하며, 또한 결정론의 틀 안에서 행동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자끄의 자유로운 듯 보이는 모습을 보아 왔다. 작품의 초반부에 나오는 강도들을 제압하고 나온 후의 자끄와 주인과의 여관방에서의 대화는 자끄의 자유로운 면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저기 높은 곳에 충분치 않다고 쓰여 있으면 충분하지 않은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후에도 자끄는 그가 행동하는 데 있어서 운명론의 탈을 쓴 자유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와는 대조적으로 말로는 자유의지를 표방하는 주인의 모습은, 자동인형과 같은 기계적인 인물로 묘사됨을 볼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작가는 너무나 주관적인 자유의지라는 개념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그러면 작가가 말하는 자유란 무엇인가? 디드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퐁디셰리 시인의 에피소드에서와 같이 자기에게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결정론적인 성격의 것들, 그는 재능이 없다는 것을 파악하고 그 안에서 행동함으로서, 즉 결정론의 인과관계를 인식함으로서 자유-퐁디셰리 시인의 경우 시를 쓰게 되는 자유-를 획득하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스스로의 철학의 관점이었던-즉 디드로가 이미 가지고 있던- 결정론적 철학에 덧붙여 그러한 결정론의 구조 안에서의 자유의지를 보여주고 있다.3. 작가의 생각에 대한 나의 견해자끄는 자유롭다. 그러나 개인적인 견해로는 그것은 결정론에서 나온 자유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작가가 말하는 결정론에서의 자유는 항상 사후 개념이라는 것이 문제시 될 수 있다. 이러한 사견은 많은 부분 베르그송의 철학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베르그송의 저서 의식에 직접 주어지는 것들에 관한 시론 에서 베르그송은 결정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단지 결정론의 자유개념이 비 결정론자들의 지적에 비해서는 덜 가식적이라고 말한다. 비결정론자의 경우 사실 그들도 자유에 대해 사후개념에 불과 하는 가치판단을 하면서도, 그것이 사전에 이루어진 것이라는 자기기만을 하고 있다는 베르그송의 의견에 동의함을 기초로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결정론의 자유 또한 옳은 것은 아니다. 베르그송의 자유의 개념대로 자유란 행위와 연결된다. 자유롭다고 생각한다고 자유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즉, 분명 자끄는 자유롭다. 그러나 그는 자유롭고자 생각하고 선택하는 자유인이 아니다. 그는 앞에서 말했듯이 운명론이라는 말을 중얼거리며 행동을 한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습관이 아니다. 말은 습관처럼 하고 있으나, 그의 행동은 자유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디드로의 경우 자끄를 통해 표현하고자 한 자유라는 것 사실 베르그송이 말한 자유와 같은 것이 아닐까 한다. 단지 아직 작가는 이러한 자유의 개념에 대해 글로 혹은 이론으로 정리하지 않았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즉 어렴풋이나마, 자유라는 것은 그의 철학의 결정론과 다르다는 것을 이 작품을 통해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다. 자끄가 자유롭다는 것은, 결정론의 인과를 인식했기 때문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그는 행동한다. 행위를 함으로서 자유로운 것이다. 그러나 자끄는 행동 후에 자신의 행동을 항상 운명론으로 해석하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어색함을 느낀 것도 사실이 아닌가? 분명 자끄의 행동과 그의 말은 모순 된다고 느꼈다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반면 주인의 경우 어떠한가? 베르그송의 자유에서 하나의 개념을 더 끌어오자면, 그가 말한 자유행위의 반대개념이 바로, 자동인형이다. 그리고 이 automatism 은 우리가 이미 주인의 행동을 통해 볼 수 있다. 자끄의 말을 듣고 있거나, 코담배를 하거나 시계만을 반복적으로 보는, 즉 습관의 인간에게 자유 행위라는 것은 없다. 즉, 이미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자유라는 것은 행위의 문제이기에 더 이상있었다.
    인문/어학| 2004.01.13| 5페이지| 1,000원| 조회(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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