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올란도를 보고...」우리는 모두 개인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남성 또는 여성의 모습으로 세상에 던져졌다. 그리고 세상 속에서 끊임없이 남 과 여 의 분리를 경험한다. 태초의 남녀 분리가 결국 생애 전반에 걸쳐 이어지는 것이다.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남성 또는 여성이기 이전에 우리 모두가 인간이라 이름 지워 졌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선천적 성에 의한 사회적 관념 때문에 인생이 일정한 틀 속에 갇혀야 한다는 것. 이것은 분명히 불합리한 일이다. 특히 어느 한 쪽의 성에게 열등한 위치의 과업들이 요구되어진다면 그 문제는 더욱 심각할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는 그러한 심각한 문제에 직면해 있는 실정이다. 우리 사회에 페미니즘 이라는 개념이 존재하고 이에 대한 끊임없는 논의가 행해지고 있는 것 또한 여성이라는 특정한 성에 대한 부당한 처우 때문 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는 아마 남성과 여성에게 생물학적 특성에 기인한 분리 이외의 모든 차별이 사라지는 날까지 계속 될 것이다.페미니즘 이란 여성의 권리를 획득하기 위해 결성된 운동으로 여권 신장론 과 그 의미가 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페미니스트들이 지향하는 바는 일상생활에서 문학작품에 이르기까지 지금껏 주인공이 되어 왔던 남성이란 자들의 여성에 대한 전횡과 억압을 더 이상 방관 할 수 없으며 이제 삶의 모든 영역에서 적어도 남성과 동등한 지위에서 사회적 기능을 분담하고 그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받으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페미니즘은 사실상 사회 전반에 걸쳐서 소외당해 왔음을 뒤늦게 깨달은 일부 자각 있는 여성들에 의한 문학이론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오랜 세월 동안 남성의 부속물로 취급되어 온 여성의 잃어버린 주체성을 찾는 일이 페미니스트의 역할이라면 영화 올란도는 그 역할을 충실히, 그리고 훌륭히 해냈다고 할 수 있다. 우선 200년은 남성으로, 200년은 여성으로. 인간으로서 불가능한 긴 여행을 하는 올란도를 통해 우리는 남성과 여성의 본질적 또는 종속적인 존재감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 이러한 불가능한 설정은 관객의 관심을 유발함은 물론, 동일인이 남성과 여성 모두를 체험해 본다는 측면에서 일종의 공정성 내지 신뢰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성은 바뀌었지만 결국 그들은-그들이란 말에 다소 어패가 있을지 모르지만-모두 올란도이고 이점은 관객에게 남성 또는 여성이라는 성 조건 이외의 모든 조건을 통제시킨 남자로서의 삶, 여자로서의 삶, 양자 모두를 탐색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줌으로서 특정한 상황이나 처우에 대해 보다 냉철하고 명확한 판단을 할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실험 시에 독립변인 이외의 모든 조건을 철저히 통제 시켜주는 원리와도 유사하다. 단지 다른 것이 있다면 시대적 조건인데 400년이라는 긴 시간의 흐름은 시대적 흐름에 대한 차별 개선이나 의식의 변화 등이 개입되지는 않을까 하는 노파심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시간의 설정은 오히려 관객에게 여성에 대해서만은 시대를 초월해서 적용되는 약자 논리 를 더욱 명확히 어필해준다고 할 수 있다.여기까지만 보아도-순전히 나의 견해였지만-영화 올란도의 치밀한 페미니스트적 관점의 표현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철저한 대비와 낱낱이 파 해침은 영화의 구석구석에서 더욱 절묘하게 나타난다.남성의 올란도는 일반적으로 사회에서 남성에게 요구되어지는 부와 권력 을 가졌었다. 반면 여성의 올란도는 마치 이 사회에서 요구하는 여성의 아름다움을 대변이라도 하듯이 매우 아름다웠다. 그녀가 여성이 되면서 모든 권력과 재산권을 박탈당하는 대신 남성들이 호감을 갖기에 충분한 아름다움을 얻는 것은 사회가 규정한 남성과 여성의 지향을 반박하기 위한 의도적 장치인 것 같다.여성이 된 올란도는 화려하다 못해 거추장스러운 옷을 입고 여성에 대한 편견의 틀에 갇힌 세상과 직면하게 되고 이러한 충돌은 그녀를 끊임없는 미로 속으로 밀어 넣는다. 이는 과거와 현대를 통틀어 여성이 여성이기에 겪어야 했던 무수한 시련과 역경을 함축적으로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미로 속을 줄달음질 치는 그녀는 어느새 초라한 행색의 보잘 것 없는 여인이 되어 있었다. 남성에게 종속되기를 거부했던 여자 올란도의 처참함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이 행색을 보면서 나는 가식과 허물에 둘러싸여 있던 세 명의 시인들을 떠올렸다. 겉으로는 여성을 존중하는 척 하면서 생각의 저편에서는 여성에게 온갖 야유와 조롱을 퍼붓고 있었던 시인들...지성이란 숭고한 것이라 아버지나 남편에게 의지하는 여자에겐 어울리지 않죠. 라는 시인들의 말에 올란도는 날카롭게 그럼 혼자 사는 여자는요? 라는 물음을 던졌었다. 그때 그들은 대답했다. 처참하죠.. 올란도의 힘든 모습은 마치 그 처참함을 확인이라도 시켜 주는 듯 했다. 그리고 결국 그녀는 한 남자를 만나 행복을 느끼게 된다. 그렇다면 여자는 남자 없이는 처참하다 라는 시인들의 말이 정말 맞았던 것일까?올란도가 만난 남자는 자유를 사랑하고 그를 위해 싸우는 패기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올란도에게 자신이 여성이라면 여행을 하며 자유를 찾겠다는 말을 함으로서 그녀를 행복으로 전율하게 한다. 결국 여자는 남자에게 종속된 존재라는 시인들의 논리를 자유라는 개념으로서 철저히 반박해 주는 것이다.이러한 반박에 이어 셀리 포터는 흔히 강하고 씩씩하게 여겨지는 남성들을 실체를 낱낱이 폭로하고 있다.달라진 것은 없다. 단지 성이 바뀌었을 뿐...불멸의 올란도가 깊은 수면에서 깨어나 여자가 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던진 한마디 말이었다. 하지만 사실 그는 몸이 남성에서 여성으로 전환되고야 비로소 사고를 전환한 것으로 여겨진다. 즉, 영화에서 많은 시사점을 안고 있는 위의 대사 역시 여성의 입장이 되고서야 차별에 대한 불만인 듯 여성으로서 겪게 될 역경의 암시인 듯 던질 수 있는 말이었다는 것이다. 남성으로서의 올란도는 결코 그러한 말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올란도 뿐이 아닌 어떤 남성도... 그러한 점에서 남성으로서의 삶이 앞서고 뒤에 여성으로 변하게 되는 영화의 영화의 스토리 구성은 탁월하다고 본다. 남성으로의 올란도는 지극히 남성적인 사고의 틀에 사로잡혀 있었다. 비록 주인공 틸다 스윈튼의 실제 성이 여자인 관계로 외형은 완벽한 남자의 모습으로 비추어지지 않았지만-적어도 나에게는-그는 보이지 않는 마음속의 귀퉁이에 남성이라는 존재에 대한 강한 자부심과 자존심을 지니고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은 배신당하고 돌아서는 약혼녀를 뒤로하고 냉랭한 눈빛으로 관객에게 쏘아붙인 남자는 자신을 따라야하는 거야. 라는 한마디 말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사샤를 소유하려는 강압적 집념과 마음속 두려움을 감춘 거짓된 용기 또한 전형적인 남성의 소유욕과 우월 의식 또는 용기나 의리에 대한 허영 등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이러한 남성 내면의 나약한 기질의 폭로는 그들이 신체적으로는 강하다고는 하지만 정신적인 면에서는 여자보다 우월한 위치에 설 만한 인믈이 못 된다는 것을 말해준다.탄탄하고 세밀한 소설 구성에 대비하여 볼 때 영화 올란도는 집약적이고 함축적인 기법을 이용하여 소설에서 추구하는 메시지를 충분히 전달하였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세련된 화면의 구도와 이색적이고 다각적인 장면들이 원작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색다른 무엇인가를 관객에게 선사하기도 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주인공 올란도가 돌발적으로 관객을 바라보며 내뱉는 대사 또는 지극히도 솔직하고 적나라한 표정들은 관객에게 이색적 느낌과 동시에 강한 물음을 촉발시킨다. 또한 의상과 분장들은 시각적 효과를 더해주어 보다 생생하고 명확한 이해와 몰입을 유도한다. 틸다 스윈튼이 본래 가녀린 여인이었던지라 남자 분장이 힘들었을 터인데도 영화에서의 남자 올란도는 이 점을 오히려 부각시켜 미소년적 이미지를 연출한다. 시대의 변화 또한 가발과 의상 등 모든 소품을 총 동원하여 리얼하게 표현되어 지는데 이는 영화의 실제성과 믿음을 확보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고 생각한다. 이렇듯 영화 올란도는 기존 평범한 영화들보다 훨씬 복잡하고 세밀한 연출을 필요로 했고 그것을 무난히 소화해 냄으로서 좀 더 수준높은 페미니즘 영화로 거듭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햄릿을 이해하고, 분석하자..영어영문학과 9812016 김현정Shakespeare의 4대 비극의 하나인 「Hamlet」은 그 매력이 너무 뛰어나 많은 사람에게서 관심과 주의를 끄는 작품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논의되어지는 작품이기도한 「Hamlet」은 세계문학 속에서도 관심의 대상이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많은 사람에게 매력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많은 학자들이 「Hamlet」에 대해서 여러 면에서 연구하고, 이론을 제시하고 비평가고 평가한다. 하지만 어떠한 이론도 이 거대한 작품인 「Hamlet」을 완전히 해석하지는 못한다. 「Hamlet」은 극 주인공 햄릿의 내적 상황의 움직임을 중심으로 이야기는 전개된다. 극중의 주인공의 비중은 매우 크며, 햄릿은 여러 학자와 독자의 관심 대상이여서, 여러 가지 면으로 성격이 정의 내려진다. 이 작품 속에서의 햄릿의 성격과 그의 내적 갈등과 혼돈, 그를 혼돈과 고민에 빠지게 하는 것들에 대해서 연구해보겠다.햄릿은 오늘날 현대인에게도 깊은 감동과 동감을 불러일으키며 변함 없이 인기를 얻고있는 작품이다. 이는 이 주인공 햄릿의 인간적인면, 즉 독자로 하여금 공감을 일으킬만한 보편적인 인간정서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주인공 햄릿은 그 작품 속의 한사람이지만 그것을 넘어 인간모두에게 적용되는 일반적인 성격의 소유자이기도 한다. 햄릿은 그를 바라보는 관중으로 하여금 충분히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인물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동감, 공감하게 만든다.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복수하려는 아들의 심정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상황이다. 햄릿은 우유부단의 대표자로고도 불릴 만큼 이 작품 속에서 갈등과 고민에 사로잡혀 있다. 햄릿은 생각이 너무 많아서, 또한 고민도 많고 갈등도 많아, 그래서인지 아버지의 복수를 하는데 있어서도 머뭇거리고 주저하는 면이 보인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 보면 꼭 우유부단하다고는 할 수 없는 어떤 결단력있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햄릿은 어찌보면 평범한 인간으로써 여러 다방면 양립될 수 없는 두 가지 부탁을 한다. 자기는 독사에 물려죽은 것이 아니라 현재 왕에게 독살된 것이라며, 천륜을 어긴 그 무도한 살인자에게 복수해 달라고 왕자에게 부탁을 한다. 유령은 그와 동시에 "어떻게 이일을 추진하더라도, 네 마음을 더럽히지 말라"(1.5.84-5)라고 부탁한다. 이두가지 명령은 도저히 양립될 수 없는 당부인 것이다. 증오와 저주의 마음을 품고 잔악한 살인행위로 복수를 해야하는 임무가 있는데, 동시에 마음을 더럽히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햄릿에게 주어진 이 비극적인 두 임무는 햄릿에게 혼돈을 주는 요소이다. 이 유령의 제시는 이 시대 인간상의 양면성을 보여주는 것인데 첫째는 벤데타(vendetta)로 가문간의 복수로, 영국 사회에 퍼져있었던 복수정신을 나타낸다. 다음의 "네 마음을 더럽히지 말라"는 르네상스의 정화정신으로 감성적 편중보단 이성적 판단을 존중하는 것으로 선행을 중시하는 정신이다. 이런 모순된 두 가지 부탁이 주인공 햄릿을 비극적 상황으로 접어들게 한다. 이런 모순된 가치관 속에서 극심한 심리적 갈등을 겪는 것이 햄릿이 복수실행을 제대로 옮기지 못하는 이유중 하나이기도 하다.햄릿은 그가 속한 사회와 사람들과의 단절감을 느끼고, 그 단절감 속에서 가치의 혼돈 속에 빠진다. 아버지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부족한 클로디어스의 즉위와 어머니의 성급한 재혼, 더욱이 아버지의 동생과의 재혼, 그는 더럽고 추한 죄악이라 여기며 그에 대해 분노하고 그런 세상에 대해 혐오하고 경멸한다. 햄릿은 이 사회에서의 「진실한 사랑이란」의 문제에서도 대립한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이 그렇게 쉽게 무너지고 어머니가 클로디어스와 재혼하는 것에서, 사랑에 대해 실망하고 분노한다. 햄릿은 자신과 어머니 사이의 관계가 무너진 것에서 보다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의 무너진 관계에 대해서 그는 이해하기 힘들어하고 분노한다. 햄릿은 사회에 대해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시각을 갖는다. 그는 이런 자신의 이상적인 윤리에서 벗어난 사회로부터 고립과 소외감을 느낀다.여 그의 내면의 갈등과 혼돈으로 표현되고, 결국 사회 전체의 혼돈과 파멸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의 복수는 단순한 개인적인 복수의 차원을 넘어서서 사회전체의 잘못된 가치에 대한 대립양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햄릿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소외된 고독한 존재가 되어간다. 아버지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이 보여준 불성실함이 자신이 사랑하는 오필리아에게서도 마찬가지로 확인된 것이다. 햄릿은 이런 자신의 고독한 마음을 독백으로서 관중들에게 표현하는데, 이것은 단절된 대화 속에 식어가는 정속에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을 투영시키기도 한다. 햄릿이 느끼는 갈등과 고통에서 우리는 본질적으로 인간이 현세에서 겪어야한 존재의 고독성을 찾을 수 있다. 햄릿의 이러한 고독 속에서 그는 다른 사람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질 수 도 없는 상황이다.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결과를 예측하기 힘은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햄릿이 처한 불확실한 혼돈의 상황에서 그는 갈등한다. 먼저 햄릿은 유령의 존재에서 처음부터 확신을 한 것은 아니다. 그는 물론 눈에 확인이 된 유령이지만 유령의 정체에 대한 확신이 없다. 유령이 한 얘기를 믿기 전에 그는 먼저 확실한 증거를 필요로 했던 것이다. 이런 면에서 햄릿은 성급한 행동자가 아니라는 그의 성격을 엿볼 수 있다. 햄릿은 클로디우스의 만행을 알게 된 후에 곧바로 클로디우스에게 달려가서 복수를 하지는 않는다. 그는 복수의 적절한 기회를 잡으려 한다. 그가 클로디우스를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았을 때, 그는 클로디우스가 기도하는 것을 보고 복수를 지연한다. 기도 중에 죽으면 영혼이 구원된다는 생각이 그의 복수를 막은 것이다. 어떤 학자는 이런 햄릿에 대해서 그를 너무 지나치게 사색적이고 담대성이 없는 인물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혹자는 햄릿이 삶에 대한 비판 의식이 너무나 예리해 행동이 미처 못 따랐다는 비관론을 주장하기도 한다. 햄릿의 이런 면 때문에 학자들은 그를 우유부단의 대표자로 부르고 그는 생각이 너무 많은 것이 문제라고 지적에 옮기지 못하는 것일까? 학자들은 햄릿을 나약하고 우유부단한 감상주의자로 보며, 그의 연약함과 우유부단함 때문에 복수가 지연 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학자들의 해석은 다양하다. 이 복수의 문제는 어떤 행동의 선택에 있어서 이러한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문제를 고민하고 갈등하는 동기를 부여하는 극적 상황이라 할 수 있다. 극의 초반부터 햄릿은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사건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 고민하는 인물이었다. 햄릿의 복수를 지연하는 행동을 우유부단하다고 여겨왔지만, 이는 개인적인 복수뿐만 아니라 사회적 정의를 생각하는 그에게 주어진 개인적, 사회적 정의를 생각하는 그에게 주어진 개인적, 사회적 상황이 얼마나 불분명하고 혼란스러운 것이었는지를 보여준다. 결국 복수라는 개인적인 문제에서 비롯되는 햄릿의 내면 갈등과 혼돈의 과정은 가식, 거짓, 불신, 왜곡된 권력, 등으로 인해 부패하고 혼돈스런 사회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면 햄릿은 매우 저돌적인 행동을 저지르기도 한다. "나를 막는 자는 단칼에 베어 버리겠다"(1.5.85)라고 말하고 칼을 휘두르고 주저 없이 폴로니우스를 죽이는 그의 행동은 우유부단한 사람이 하는 행동도 말도 아니다. 그의 행동은 때로는 강직하고 저돌적인 면이 있다. 어떤 학자는 클로디어스의 영혼의 구원마저 용납하지 않는 햄릿의 태도를 보고 복수극의 주인공으로서의 잔인성을 발견한다. 그도 복수의 충동이 끓어오르면 이처럼 잔인한 모습을 얼마든지 드러내는 인물이다.햄릿은 우유부단한 인물이라기 보단 그의 상황과 배경이 그를 그런 상황으로 끌고 갔다고 할 수 있다. 햄릿의 눈앞에선 인간의 이성적 판단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며 그는 그런 상황 속에서 갈등하고 혼돈에 빠진다. (1.5.189-90)"세상이 온통 사개가 무너져버렸어-오 저주받은 액운이여, 이 몸이 세상을 바로잡기 위하여 태어났다"는 대사 속에서 그는 신의 임무와도 같은 숙명적 임무에 자신을 묶어두는 절대주의적 사고에 사로잡힌다.우리는 햄릿이 연 한다는 비유적 의미를 함축하며, 이는 또한 가식과 진실의 주제를 강조하기도 한다.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3.1.56(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이 구절은 가장 많이 논의되고 가장 유명한 구절이며 동시에 가장 많이 잘못 해석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 부분에선 가장 심도 있게 복수의 문제를 명상한다. 햄릿은 여기서 연극의 문맥과는 다소 거리가 있을 지도 모르지만 죽음에 대한 숙고를 보인다. 죽음은 어쩌면 인간의 고난을 해결하는 최상의 방편임에 틀림없지만, 인간은 어느 누구도 어떤 경우에도 인간의 생명을 빼앗을 수 없는 것이다. 타살은 고사하고 자살도 용납되지 않는다. 그런 이유로 견디기 어려운 고통들을 겪으면서 신음하며 살아야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세상의 온갖 괴로움과 고통, 갈등들도 죽음과 함께 다 잊혀진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을 확신할 수는 없다. 죽음의 세계는 아무도 경험한 사람이 없는 불확실의 세계이다. 그리고 사람들, 그리고 물론 햄릿에게도 죽음 이후의 삶이 햄릿에게는 불안하고 불확실한 것이다. 죽음은 불확실과 혼돈의 극치이다. 이것을 극복하는 것은 세상의 혼돈과 불확실을 극복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햄릿은 사는쪽 죽는쪽 어떤 쪽도 바로 정할 수 없는 그런 상황에 놓이게 된다. 햄릿의 내적 갈등과 혼돈은 그가 처한 극중 상황 속에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그는 이런 잘못된 세상과 맞서 계속 싸워야 할 것인지, 아니면 난폭한 운명에 굴복하여 세상을 하직할 것인지 고민하고 있다. 이러한 햄릿의 고민과 갈등은 자신의 의지와 능력에 대한 불안감과 혼돈스런 내면세계를 반영하는 것이다. 햄릿은 그의 힘으로 이런 힘든 잘못된 세상의 흐름 앞에서 과연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고민하는 것이다. 그는 남편과 아내, 형과 아우간의 사랑마저 없어져 버리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느니 차라리 그 모든 짐들을 벗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햄릿은 어느 쪽도 선택할 수 없다. 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