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흔히 쓰고 있는 휴머니즘이란 말은 원래 인문 과학의 수련을 통한 인간 교육 이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것은 르네상스시대의 사상가에 의해서 중세적 억압과 권위로부터 인간성을 되찾자는 뜻으로 쓰였다. 근대에 들어와서 유럽인들은 비로소 인간성을 되찾고 전정으로 자기자신을 발견하였다고 믿었다. 그들은 종교와 봉건 영주나 전제적 군주로부터 해방되었으며 과학기술의 발달로 자연의 재해들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근대인의 새로운 유형의 휴머니즘은 중세의 종교적 가치를 근대가 창출 해낸 과학적 가치로 대체시키는 과정에서 형성되었다. 근대인은 자연의 주인이 되었으며 과거 신이 가진 영역을 인간이 차지하게 되었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문제는 인간이 자연의 원리와 구조를 이해하는 데만 급급하고 자기 자신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을 게을리 하였다는 사실에 있다. 과학의 위력은 참으로 대단하여 실제로 놀라운 문명의 이기를 만들어 내었지만 이 도구들을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높은 인격과 교양을 동시에 제공하지는 못하였다는 것이다. 오늘날 비인간화 현상은 인간의 지적산물인 과학이, 그리고 과학이 낳은 여러 가지 사회 제도와 기계 기술이 인간 위에 군림하게 됨으로써 빗어진 현상이다. 그러므로 현대인의 시대적 사명은 과학의 본질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과학이 낳은 여러 가지 병폐를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도덕력을 기르자는 데 그 초점을 맡추고 있다.현대를 대중의 시대 라고도 하며 현대사회를 대중사회라고 부른다. 이 대중사회의 커뮤니케이션격인 매스컴은 어떤 일정한 정신내용을 담은 상징이나 기호를 기계적인 매개를 통하여 대량으로 무한정한 전달을 하는 과정이라고 정의될 수가 있다. 물론 이것이 현대 사회에서 여러 가지로 사용되는 것이 사실이나 그 중에서도 바안즈가 지적한 바와 같이 전근대적 고립성을 타파하고 지리적 거리를 단축시키며 새로운 심리적 태도를 만들어 내었고 새로운 사회적 및 문화적 문제를 야기 시킨 근대 기술 중에서 가장 뚜렸한 것 임은 중의 요구에 따라 예술이 오락에 묻혀 버렸으며 대중의 강제성에 많은 자유가 사라져 버렸다. 동서고금의 철인들은 그들이 처해있는 역사적 상황이나 사회적 구조의 여러 가지 불합리성을 지적하고 반항하며 갖가지 개선책을 제시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좀더 근원적인 문제, 즉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라는 질문에 더욱 많은 심혈을 기울였던 것이다. 그들이 철학사에서 찬연히 빛나는 인물로 남아있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지금으로부터 2천 6백 년 전에 탈레스는 순전 알고 싶은 욕망에 의한, 나무나 돌 혹은 눈에 보이는 것들에 대한 호기심이 아니라 인간을 포함한 우주 전체를 한데 묶어서 도대체 이 모든 것이 무엇으로 되어 있는지를 물었다. 그래서 탈레스의 물음을 철학의 시조라 부르는 것이다.소크라테스는 당시 아테네에서 난립하던 궤변에 대항하여 무지한 시민들을 깨우치는 것을 일생의 과업으로 삼았다. 이렇게 해서 철학은 만물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묻는 지식의 학문 으로부터 나 자신이 누구인지 혹은 어떻게 바람직한 삶을 살 것인지를 묻는 지혜의 학문 으로 변모된 것이다.소크라테스는 어떤 문제에 부딪혀서 관습이나 개인적인 감정에 의해 해결한 것이 아니라 합리적인 근거를 가지고 인간의 보편적인 이성에 입각해서 풀어보려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죽음과 같은 절박한 상황에 임해서도 자기 자신의 이익이나 영달을 위해 행위하지 않았고 자기의 행위가 객관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지의 여부를 물었다. 소크라테스의 윤리적 가르침은 그만의 특유한 것도 아니고 현실적으로 불합리한 내용도 많으며 객관적인 타당성을 갖추지도 못하였을 뿐 아니라 그 내용도 모호하기 그지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윤리학의 효시로 보는 것은 삶의 문제에 대해서 전적으로 종교의 권위나 시인의 영감같은데에 의존하지않고 이 문제를 오로지 지적인 차원에서 해결해 보려했기 때문이다.철학에 있어서의 윤리란 반드시 이론적 탐구이어야 하고 그런 의미로 우리가 보통 사물의 원리를 탐구할 때 물리라고 부르는 것과 비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였으나 그들과는 달리 윤리적 회의주의나 상대론에 빠지지는 않았다. 그는 합리적인 방법을 통하여 인간의 이기심과 사회의 복지를 조화시킬 수 있는 불변의 윤리적 원리를 발견해 낼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플라톤에 의하면 세계에는 감각적 경험으로 알 수 있는 구체적인 사물들 외에 그 사물들의 이데아 혹은 형상이라는 것이 있다. 그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예를 들어 우리의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흩어져 살고 있다. 철수도 있고, 순이도 있으며 영희도 있다. 우리가 이들을 사람이라 부르는 이유는 그들에게 사람이라 할 수 있는 어떤 공통된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말을 할 수 있고 두발로 걸어다니며 이성을 가지고 생각하는 것 등이 그것이다. 사람은 생각한다 는 것은 그 이데아의 특징의 일부를 서술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사람의 이데아는 완전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야말로 사람의 본질이며 모든 개별적인 사람들로 하여금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하는 원인인 동시에 이유인 것이다.플라톤의 이데아는 모든 개별적 사물들을 규정하고 이것들을 포괄한다는 점에서 보편적인 성격을 띤다. 예를 들어 모든 인간은 인간의 이데아라는 공통성에 참여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한낱 주관적인 심리 상태의 표현이 아니라 현실적 세계의 피안에 존재하면서 사물을 움직이는 원인이며 원리라는 점에서 실재성을 가진다. 인간 행위의 원리나 규범도 선의 이데아에 의해서 규정된다는 것이다. 또 불완전하고 항상 변하는 모든 존재들이 궁극적으로 지향해야하는 완전하고도 불변하는 대상이기 때문에 이상성을 지닌다. 어떠한 인간이 진정으로 바람직한 임간인지는 인간의 이데아를 파악해야만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특징지어진 플라톤의 이데아 설은 이미 단순한 하나의 이론이 아니다. 그것은 삶 속에 파고들어서 삶의 방향을 설정하는 이념 혹은 인생관이기도 한 것이다.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이 도달한 지점에서 출발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그가 스승의 사상을 더욱 발전 시켰다거나 극복하였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것이다.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이 가지는 특징을 살펴보면 그는 모든 인간이 한결같이 추구하는 궁극적 목표가 무엇인지를 규명함으로써 목적론적 윤리설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또한 모든인간이 그러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함으로써 인간이 공통적으로 지니는 본질같은 것이 있다고 믿는다. 그는 인간에게 본질적인 것을 이성이라 규정함으로써 윤리적 행위의 지침이 이성의 법칙에 근거해 있어야 함을 시사해 준다.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은 합리주의적 지식의 체계 속에 윤리가 있는데 이를 거부한 일단의 학자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이다. 이들은 우선 지식 자체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다. 지식이란 바람직한 삶을 살기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으며 그것이 실제적인 목적에 얼마나 이바지하느냐에 따라 그 유용성을 인정받을 뿐이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쾌락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추구해야 할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이며 최고의 선이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쾌락은 오늘날 물질만능주의에 현혹되어 사치 풍조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즐겨 찾는 세속적 쾌락이 아니다. 이러한 쾌락은 대부분의 경우 오히려 고통을 수반하기 마련이고 따라서 그가 강조하는 즐거운삶을 저해하는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스토아학파의 에픽테투스는 인간이 도달 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를 부동심의 상태, 즉 감정이 완전히 억제된 상태라고 말하고 이러한 경지야말로 인간이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는 혹은 신의 의지에 합일된 모습이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상태로 도달하기 위한 방법으로 에픽테투스는 교육을 제시한다. 그가 말한 교육이란 인간의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이며 이것은 소위 권내와 권외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함으로써 가능해진다. 이처럼 모든 사물과 현상을 우리의 능력 안에 있는 것과 밖에 있는 것으로 나누었는데 권내에 있는 것은 의지적인 활동으로써 의욕이나 욕망의 소산이며 우리가 책임을 져야 하는 부분이고, 권외에 있는 것은 사회적인 요소로써 재산이나 평판 혹은 육체나 양친 은총으로 가득찬 삶이다. 기독교 윤리관의 합리성이 경험적 증거나 논리적인 증명에 있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종교적 신앙에 근거를 두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윤리적으로 완전한 인격신의 존재를 받아들임으로써 가능한 윤리의 체계인 것이다.기독교의 가르침에서 최고의 덕은 지혜가 아니라 사랑이며, 용기보다는 인내가 더욱 높게 평가되고 절제를 넘어 오히려 금욕이 요구된다. 이렇게 하지 안으면 아우구스티누스가 호소하듯이 우리의 마음이 안정될 날이 없기 때문이다.스피노자는 기독교 윤리의 대전제인 인격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새로운 윤리관을 제시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을 구원의 윤리라면 우리는 그것을 해탈의 윤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스피노자는 신은 곧 자연이며 자연이 곧 신이다. 이러한 입장을 펼쳤으며 이러한 것을 흔히 범신론이라 부르는데, 존재하는 모든 것을 일컬어 신이라고 칭하기 때문에 예를 들어 돌이나 풀 포기 혹은 무수한 인간들이 곧 신의 일부라는 뜻이다.칸트에 의하면 자연과학은 인과의 법칙에 지배를 받고 있는 현상계를 설명할 수 있지만 자유의 법칙에 따라 행위 해야하는 인간의 도덕성을 설명하지 못한다. 인간은 자연의 법칙에 따라서 움직이는 동물이기도 하지만 그 법칙에 저항해서 행동하는 도덕적 행위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바람직한 삶이 무엇인지 규명하려면 자유의 법칙인 도덕률이 어떠한 것인지 먼저 찾아내어야 한다는 것이다.한편 밀에 의하면 인간은 이성적 동물로써 사회적 책임을 지고 다른 사람의 행복에도 관심을 쏟는 존재이지만 본질적으로는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의 쾌락을 추구하고 또 추구해야 하는 동물의 일종이다. 따라서 인간의 행위를 설명하는 방법은 자연의 법칙에 바탕을 두어야 하며 도덕적인 의무도 인간이 실제로 추구하는 행복의 성격을 규명해 냄으로써 밝혀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인간이 추구해야 하는 궁극적 목표로 설정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공리주의는 오늘날 윤리적다.
한국민속과 몽골민속의 비교1.맥족의 남하*북방과 만주를 잇는 할힌골에는 아주 오랜 옛날 맥(코리)족이 북방에서 내 려와 이곳에 잠시 머물렀다가 동남쪽으로 이동해 갔다는 할힌골 구전설화 가 전해지고 있다.*우리민족은 부여보다 휠씬 더 북쪽에 있는 지방에서 남하하였다.*맥족계 민족의 건국설화는 능력이 뛰어난 주몽이 지배세력의 미움을 사 지지세력을 이끌고 남하하여 나라를 세웠다는 내용의 주몽설화 이다.*기원전 2-1세기경 동아시아 패자인 한과 흉노 사이의 격전이 일어 양측의 인구 절반씩 상실하게 되는데 이는 맥족에게 남하의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맥족은 할힌골로 남하했을 가능성이 있다. 다른 길은 타브가치의 존재로 남 하에 장해물이 되고, 할힌골은 천혜의 목마장으로써 이지역을 거쳐 맥족이 남하할 경우 이후 전쟁에 매우 유리하기 때문이다.2.한국의 설화와 몽골의 설화*몽골설화인 알랑고아 설화를 보면 알랑고아의 아버지인 코릴라르타이-메르 겐은 인명이 아니라 명사수를 지칭하는 말로 주몽과 추상적으로 동일 인물 로 지칭해도 좋을 많큼 유사성이 많다.*[몽골비사]를 보면 코리족의 한 귀족이 지배세력과의 갈등 끝에 이동하여 코릴라르라는 새로운 씨족을 창건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코리족에서 지지세 력을 이끌고 남하하여 코리족의 한 나라임을 나타내는 고+구려[khori] 라고 자칭한 것이나 차이점이 없다.3.한국, 몰골민속의 유사성1]우리민속과 몽골의 민속은 샤머니즘이 바탕을 이룬다.2]의식주는 살고있는 환경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기마의 편의를 위해 상의와 하의가 분리된 옷차림을 갖는다. 우리나라의 저 고리와 바지가 이에 속한다.*여인들의 주름진 치마는 중국의 그것과 구별되는데 이는 기마를 하기 위한 방편에서 나온곳이다.*외투가 한국이나 몽골이나 무릎 아래로 내려가는 일이 없다는 것 또한 기 마를 하기 위함이다.*신발창이 얇고 또 신발 끝이 위로 올라가는 것도 기마에 관게된 옷차림이 라 할 수 있다.*오늘날 한 무릎을 꿇는 여자들의 예법이나 색동 저고리와 같은 의상은 동 몽골지방에서도 전통이 되어 내려오고 있다.*탕을 위주로한 요리 체계를 가진 몽골이나 한국은 바비큐문화를 가진 돌궐 유럽, 튀김 문화를 가진 중국과 큰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고대 몽골에서는 술렝이라는 것으로 아침 식사를 하였는데 이는 한국인이 흔히 즐기는 설렁탕을 가르키는 말이다 설렁탕의 간은 파와 소금으로만 하 는데 이 조미법은 몽골의 전통이다.*몽골인들은 고기를 먹을 때 갈비를 가장 선호하는데 전세계적으로 갈비를 즐겨 먹는 민족은 한국과 몽골에서만 관찰되고 있다. 뿐만아니라 여름의 보 신제로 몽골에서는 흑염소를 사용하는데 이 또한 한국과 같다.*한국의 일부 학자들은 몽골의 겔이 한국의 움막과 매우 유사한 기원을 가 지고 있다고 말한다*반다지는 잦은이동에 대비하여 물건을 간단하게 넣을 수 있는 가구로 유목 민족의 대표적인 용품인데 한민족은 1960년대까지 반다지를 사용했다 이는 경재적인 이유 보다도 전통적인 양식에 따른 것으로 보이며 이 반다지의 문양이 두나라간 매우 유사하다.3]출생과 결혼과 사망의 습속 등에 관한 비교이다.*태아를 독립된 인격체로 간주하고 태어나자마자 한 살이다.*제주도에 남아있는 습속처럼 요람에다가 키운다*몽골에서도 인제라고 표현되는 혼수물을 가지고 시집가는데 이는 한국처럼 죽을 때 까지 신부의 소유물로 남는다.*시댁을 위한 시드쿨과 시댁의 어른들에게 바치는 예물인 에무스겔도 가져 오는데 이들은 혼수물과 달리 소유권이 시댁에 있다. 이와 같은 습속은 한 국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몰골에는 광의의 친죽을 뜻하는 말은 사돈이란 칭호다. 코빌라이칸이 고려 의 출렬왕에게 딸을 출가시키고 고려를 사돈의 나라라고 부른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고대의 한국과 몽골은 형이 죽은 후 형수를 아우나 종형제들이 계승하는 유습을 가지고 있었다.*사망하면 살던집에서 염을 하는데 먼저 머리를 북으로 다리를 남으로 하는 데이는 한국에서도 준수되고 있다.4]놀이, 춤, 금기등에 대한 비교이다*몽골에서도 씨름과 제기차기 윷놀이가 널리 행해지고 있다.*몽골인들도 우리못지 않게 춤을 좋아 하는데 한국춤과 마찬가지로 어깨 춤 이 많다. 가락 또한 우리의 전통음악과 다를게 없다.*몽골인들은 술을 마시기 전에 손가락에 술을 찍어 공중에 세 번 튕겨 올리 는데 이는 우리의 고수레와 별반 차이가 없다.*인가를 방문할 때는 반드시 약간의 선물을 지참한다 그리고 문지방을 밟으 면 안된다. 주인이 손님을 위해 음식과 술을 올리면 손님은 그것을 다먹은 뒤 가야한다.*까마귀는 흉조고 까치는 길조로 여긴다.몽골인은 족보를 생명과 같이 중시 여긴다. 동양에서 족보를 중시여기는 민 족은 사실 몽골과 한국 두 나라뿐이다.한민족의 기원과 형성에 관한 북방기원설1.기원전 7세기부터 서기1-2세기사이의 동아시아 정세*한민족은 혈통적으로 몽골로이드계 인종에 속한다. 이들이 유라시아의 동부 지역에 자리잡은 시기는 대략 3만년전으로 간주되고 있다.*B.C.1500년 무렵에는 극단적인 대륙성 기후가 유라시아지역에 급습하여 이 시기부터 각 지역의 집단 간에 생존을 위한 격전의 역사가 벌어지게 되었 다.*춘추전국시대에 와서 북방세력들은 중원의 제후국의 강대화에 따라 합병이 나 쫓기는 상황을 맞는다. 특히 북방과 지리적으로 닿아 있는 북방제후국들 은 장성을 쌓고 북방민족에 대한 공략에 적극적이었다.*북방공략은 B.C.3세기 중엽을 기점으로 공세에서 수세로 전환하게 되었다. 전국말기 중원은 진의 급속한 대두로 북방보다는 내치에 더욱 열중하게 되 었는데 이때 북방은 흉노라는 거대 세력에 의해서 통일되어 갔다.*북방의 패자 흉노와 중원의 진의 대립은 할거 세력들이나 독립된 타 세력 은 제한된 지역내에서 운신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 놓았다. 부족이동 세력판도의 변화가 일어나는 시점도 이들 간에 벌어지는 쟁패의 결과에 따 라 인위적으로 만들어 질 수밖에 없었다.*초원과 중원의 통일세력간의 쟁패는 B.C. 215년 진나라의 선공으로 흉노군 을 격파하고 오르도스를 장악하였다. 진시황 사후 다시 흉노군에게 점령되 어지고 북방을 통일한 흉노는 한과의 일대회전을 벌여 승리한 후 한이 매 년 정기적으로 물자를 공납한다는 조건으로 화친조약을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