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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랑스의 식생활문화 평가B괜찮아요
    ●들어가며문화라는 용어는 라틴어의 cultura에서 파생한 culture를 번역한 말로 본래의 뜻은 경작(耕作)이나 재배(栽培)였는데, 나중에 교양 ·예술 등의 뜻을 가지게 되었다. 영국의 인류학자 E.B.타일러는 저서 《원시문화:Primitive Culture》(1871)에서 문화란 “지식 ·신앙 ·예술 ·도덕 ·법률 ·관습 등 인간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획득한 능력 또는 습관의 총체”라고 정의를 내렸다.일반적으로 문화는① 구미풍(歐美風)의 요소나 현대적 편리성(문화생활 ·문화주택 등),② 높은 교양과 깊은 지식, 세련된 생활, 우아함, 예술풍의 요소(문화인 ·문화재 ·문화국가 등)③ 인류의 가치적 소산으로서의 철학 ·종교 ·예술 ·과학 등을 가리킨다.③의 경우는 독일의 철학이나 사회학에 전통적인 것이며, 인류의 물질적인 소산을 문명이라 부르고 문화와 문명을 구별하고 있다. ①과 ②의 경우는 문화가 없는 인류가 과거에 존재하였고, 현재도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그러나 현재의 사회과학, 특히 문화인류학에서는 미개(未開)와 문명(文明:高文化)을 가리지 않고, 모든 인류가 문화를 소유하며 인류만이 문화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문화란 인류에서만 볼 수 있는 사유(思惟), 행동의 양식(생활방식) 중에서 유전에 의하는 것이 아니라 학습에 의해서 소속하는 사회(협동을 학습한 사람들의 집단)로부터 습득하고 전달받은 것 전체를 포괄하는 총칭으로 쓰이고 있다.얼마 전 프랑스혁명을 주제로 만들어진 라는 영화를 다시 보게 되었는데 영화 자체의 주제는 쟌 다르크라는 19세의 여성이 민족을 위해 신앙을 바탕으로 우리네의 유관순과 같은 민족운동을 이끈 짧은 인생을 그려놓았지만 거기서 민중과 귀족 계층의 의식의 차이와 갈등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을 해보는 계기를 마련할 수가 있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민중과 지배세력간의 갈등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또 그러한 갈등의 물결이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만드는 계기가 되었고 또 변화 시키는 원인이었다고 생각한다.“베르사이유 궁정에는 화장실이심으로 식생활사에 대한 ‘질적 연구’가 다시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그러나 플랑드렝이 추구하는 질적 고급요리에 대한 ‘식도락가적 연구’는 과거 브로델의 표현을 빌리자면, ‘단기지속’의 과정만을 반영하는 극소수 상류계층의 제한된 식생활 형태이다. 장 루이 플랑드렝이 과연 브로델처럼 ‘브로델학파’를 형성할 만큼 크게 성공할 수 있을지는 아직도 미지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적어도 선진국이나 중진국에서)하루치 기본적인 열량 대사량을 지나치게 초과 달성한 오늘날, 너무도 풍요로운 사회에서 음식물에 대한 심미적인 질적 연구로의 ‘전환’은 너무나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 아니었을까?우리가 물질 문화사를 기술함에 있어서 항상 유념해야 될 사실이 있다면, 그것은 아날학파가 누누이 지적한 대로 귀족과 평민, 또는 노동자와 자본가 간의 빈부격차, 즉 사회경제적인 ‘불평등’현상이다. 이탈리아 경제 사가인 시폴라에 의하면, 인류를 ‘맬서스의 함정’에서 구출해 낸 양대 혁명은 바로 신석기시대의 농업혁명과 영국 최초의 근대적이고 지속적 경제성장의 원동력이 된 산업혁명이었다.사실상 최초의 원시인은 기아선상에서 허덕였다.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발견된 그들의 뼈에는 기아선이 여러 줄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태어나서 죽을 때 까지 여러 번 굶주려서 뼈의 성장이 그쳤다가 다시 계속되어 형성된 것으로, 마치 나이테처럼 뼈에 줄이 남게 된 것이다.그들의 생활은 사냥과 고기잡이와 채집을 통해 이루어졌으나, 그것은 매우 위험하고도 힘이 드는 노동이었다. 잠깐 먹을 것이 풍족했는가 하면, 곧 몇 달 동안 굶주리는 날이 계속되었다. 최초의 인류는 이처럼 자연과의 싸움에서 무력하고 비참했다.인류를 방황하는 사냥꾼에서 정착적인 농부로 바꾸어 놓은 신석기시대의 농업혁명 이후에도, 인류는 계속 기아라는 망령의 그림자와 끊임없이 싸워야만 했다. 프랑스의 가장 위대한 고전시대였던 17세기, 절대 궁정의 사치가 극에 달했던 태양왕 루이 14세 시대에도 기아는 있었다. 너무 굶주린 나머지 그만 실성하여 자기 어린애권위를 나타내는 유럽사회의 오랜 전통은 바로 중세 시기에 확립되었고, 16-17세기 초까지도 중세적인 취향이 요리에 직접 반영되었다. 16세기의 근대적인 식생활로 변화하는 움직임 역시 ‘중세의 용광로’에서 서서히 이루어졌다.○ 중세의 요리기독교가 사회전반을 지배하고 있던 중세시대의 요리는 종교적인 영향에 의해서 육류를 먹을 수 있는 날을 위한 요리와 금식, 사순절 등 고기를 먹지 않는 날의 요리 등 두 종류로 나누어진다. 고기 먹는 것을 금지한 날이 1년에 무려 절반 이상이나 되었고, 이 기간 중에 유일하게 허용되었던 동물성 식품은 달걀이나 우유가 아닌, 바로 ‘생선’이었다.중세인들은 금식일이나 정진일(精進日)이외에도 동물성 단백질과 지방분을 보충하기 위해서 물고기를 많이 먹었다. 생선은 고기보다 가격이 훨씬 저렴했기 때문에 서민 대중들의 애호를 받고 있었다. 훈제된 청어를 특히 좋아했고, 생선에 양념한 소스를 발라 구운 것은 신경통에 효험이 있다고 믿어졌다.그러나 중세 유럽에서 고기의 피를 제거하고 소금에 절인 육류식품의 경우 결코 불경한 음식이 아니었다. 사실상 중세에는 소금에 절인 고기가 전체 고기 소비량의 4/5를 차지했다.중세인들의 일상적인 식사에 대해 살펴보면 소득과 음식물이 상관간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다. 소득이 늘면 자연히 곡류보다 육류와 유제품, 달걀 등을 많이 먹게 된다. 이 당시에도 상류계급일수록 대체로 육식을 즐겼다.그러나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중세의 기본적인 음식은 빵(영주는 부드러운 흰빵, 서민은 거친 흑빵)과 뜬 숯불에 오랫동안 뭉근히 데워진 수프, 그리고 발효주인 포도주와 대체로 집에서 빚은 시드르(Cidre)라고 불려진 능금주였다.○ 귀족요리지금까지 중세인들의 일반적인 식사를 살펴보았지만, 중세 요리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귀족들의 식단을 빼놓을 수가 없다. 교회의 성직 귀족이나 제후들은 생일이나 기념적인 식사, 커다란 종교축제, 혹은 결혼, 그리고 십자군 출정 등을 위해 1년에 무려 150번이나 주연을 베풀었다 사용했던 이미 굳은 빵 조각까지 먹어치우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음식을 먹을 때 칼이나 스푼을 사용했지만, 그 때까지 포크는 등장하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랫동안 자기의 고유한 손가락으로 음식을 집어먹었다. 아직 냅킨이 발명되지 않았기 때문에 회식자들은 항상 길게 늘어진 식탁보를 음식 묻은 손을 닦는 데 이용했다.○ 귀족요리의 특징중세 귀족요리의 특징으로 몇 가지를 꼽을 수 있는데, 첫째로는 음식을 익히는 독특한 방식을 들 수 있다. 중세에는 음식을 익히는 방식이 네 가지밖에 없엇다. 굽기, 물을 많이 넣고 끓이기, 튀기기, 뭉근한 불로 오래 끓이기(스튜식)등이다. 여기서 현대 요리사들을 놀라게 하는 것은 고기를 로우스트로 굽기 전에, 물에 넣고 오랫동안 푹 끓이거나 삶은 방법이다. 아직 냉동법이 발명되지 않았던 시대에 고기의 표면에 생길 수 있는 미생물을 미연에 방지하고 고기의 맛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서(우리는 중세의 치와의술이 매우 초보적이고 낙후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만 한다.), 또 고기와 국물을 한꺼번에 얻기 위한 일석이조의 효과 때문에 이런 이중적인 조리방법을 사용했다고 볼 수 있다.둘째는 오늘날 독일식 요리에도 많이 남아 있는 그 ‘새콤달콤한 맛’을 추구하기 위해서 설탕과 소금을 함께 넣어 조미하는 ‘혼합식’요리방법을 들 수가 있다. 설탕과 소금을 사용해 단맛과 신맛을 동시에 추구하는 혼합식은 소금과 식초, 설탕을 사용했던 중세의 음식물 보관법과 매우 깊은 연관이 있다. 이는 오늘날 극동요리와도 매우 흡사하다.셋째는 중세의 가장 특기할 만한 사항으로 향료를 대량으로 사용한 요리방법을 들 수가 있다.브로델은 중세 유럽인들의 ‘향료에 대한 광기’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좀더 익살적인 표현으로, 프랑스의 18세기 백과전서는 ‘스페인 사람들은 그냥 놀며 빈둥거리는 것만큼이나 바닐라향을 좋아한다.’라고 비꼰 적이 있다. 14세기 몽카셍수도원의 라틴 문헌 법규를 보면, ‘이 수도원에서는 매주 6온스 가량의 후추가 수도사들에게 배당된다.’라고 규정되어 그 구체적인 내용으로는 서민적인 요리의 모방, 여러 가지 중세요리법에 대한 포기, 또 새로운 식생활 미학의 등장을 들 수가 있다.어떤 이는 17세기 근대적인 요리혁명이 1세기 후에 발생한 프랑스 대혁명에 견줄 만큼 매우 혁신적이었다고 주장을 한다. 17세기 요리혁명의 골자는 음식의 ‘자연스런 맛을 최대한 살리자’는 것이었다. 그 당시에 혁신적인 요리가는 향신료의 대량사용을 중지했고, 향신료 대신에 풀이나 국소적인 양념, 또는 겨자를 선호했다. 자연의 맛을 그대로 살리기 위해 왕실이나 영주, 부유층의 대저택에서도 과거에 식초나 소금에 절여 보관한 음식, 건조 훈제식품의 소비가 많이 줄게 되었다. 음식의 원래 맛을 존중하기 위해 중세의 이 중식 요리법도 이제 자취를 감추었다. 중세 일류급 요리사들의 ‘병기고’를 가득 채웠던 과거의 요소들이 후대에 이르러 거의 버림받게 되었다. 이런 현상은 유럽 전체의 미식가들이 극찬해 마지않은 새롭고 독창적인 프랑스 요리의 탄생에 박차를 가했다. 이렇게 해서 프랑스인들은 근대요리를 개발했고, 그 기원을 바로 17세기 요리혁명과 결부되어 있다. 이 당시에는 교통수단이 개량되었고, 마차나 우차가 마음대로 다닐 수 있는 도로들이 많이 증가했다. 그러나 수송비는 여전히 비싼 편이어서 대도시로 운반된 식품의 운송비가 식품의 원가를18세기의 화려한만찬 루이14세의 경우는 거의 매일 연회 등으로 많은 돈을 낭비했고, 신하들에게도 이런 절제 없는 무위도식의 생활을 적극 장려했다. 왕 자신이 음식을 적게 먹는 경우에도 연회에 모인 사람들이 포식하는 모습을 구경하기 좋아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배가 불러도 굶주린 사람처럼 식탁에 그대로 앉아 있어야만 했다.상회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소금에 절인 생선은 이미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이었고, 산지에서 금방 도착한 생선이 새로운 시대의 요리법에 부응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근대적인 요리의 서곡이었으며, 자기 집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의 산물을 금세 식탁에서 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의미했다. 그러나 음.
    인문/어학| 2003.05.03| 11페이지| 1,000원| 조회(1,7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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