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을다녀오고나서..이름 : 김성진학번 : 4299586학과 : 경영학과과목 : 한국문화유산의 이해교수님 : 노종국 교수님제출일 : 2004. 11. 25휴대폰 알람을 잠결에 끄고 잠들었던지 시계를 보니 벌써 7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잠이 확 달아나는 것을 느끼며 정신없이 준비했다. 여러 가지 준비물을 챙기며 입학하고 처음으로 (진정한 의미의) 학술 답사임을 다시 한번 느꼈다. 거의 출발 시간에 맞추어 도착한 나는 아침공기의 차가움에 말년(4학년 2학기)에 조금 귀찮은 수업을 수강했던 것은 아닐까 하고 혼자 후회했지만 학기가 거의 끝나가는 지금은 정말 많은 것을 느끼고 알게 해 준 수업이라 조금 더 일찍 듣지 못한 것이 아쉬울 정도가 되었다. 수업 중 내용 중 가본 곳은 다시 가 보고 싶었고. 가 보지 못한 곳을 다음에 꼭 가겠다는 의지를 품게 했다. 개인 답사로 갔다 온 공주 경우에도 강의 들었던 생각이 나서 더 즐겁게 문화유산을 볼 수 있었던 것 같아서 좋았다.창녕은 동아리 모꼬지 때 가본 화왕산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가야고분, 신라의 척경비 동탑 등을 더불어 다양하고 풍부한 조선의 여러 유적이 있는 것을 알고는 우리나라인데도 관심이 없었구나 하는 반성을 했다. 여기저기 많이 놀러 다녔다고 생각했었는데 알맹이는 빼고 겉만 보고 온 것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한 시간 반 정도 관광버스를 타고 창녕 교동 고분에 도착했다. 오전이고 외곽지역이라 그런지 쌀쌀하기는 했지만 가야의 고분은 처음 보는 것이라 즐거웠다.계곡 마다 굽이 보이는 고분의 봉토들의 황금색과 가을 하늘의 색이 너무나 잘 어울렸다. 고분의 내부를 본 것을 처음이었는데 이미 도굴되어 있는 고분이라는 교수님의 설명에 어딘가 떠돌고 있을 이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이 어디 있을까 생각을 했다. 사실 학술적 예술적 가치가 있는 유물을 소장하고 싶은 마음(욕심)은 이해 못하는 것을 아니지만(?) 교과서적인 발언이 아니더라도 밝은 빛도 보지 못하고 이름도 모르게 사라지는 유물들이 안타깝게 느껴졌다.아라가야, 고령가야, 대가야, 성산가야, 소가야, 그리고 금관가야를 포함해서 6가야라고 알고 있었는데 솔직히 비화가야는 생소한 이름이었다. 수업을 듣지 못했다면 알지도 못하고 지나갔을 것이다. 삼국유사의 일연이 에는 금관가야, 고령가야. 비화가야, 아라가야. 성산가야를 5가야라 했다는 이견을 덧붙여 비화가야에 각주를 달아 ‘지금의 창녕’ 이라 말하고 있다. 창녕이 비화가야의 터전이었다는 근거이다. 6가야의 하나였던 비화가야의 역사나 문화의 대한 기록을 없다. 원래 가야사는 역사의 주변이었고 가야에 대해 아는 거라고 금관가야의 시조 김수로왕이나 김유신이 가야의 귀족으로 신라에 진골로 편입되었고, 일본과의 중개무역 등 손에 거의 꼽을 정도 밖에 지식이 없었다. 이런 생각을 하면 비화가야의 모습이 뚜렷하지 않고 유물이나 일연의 언급 외에 더 많은 정보가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러나 유물로서 비화 가야의 존재가 조금씩 들어나는 것 같아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래서 그런지 가야연맹은 더욱더 신비롭고 풀리지 않는 역사의 미궁과 같게 느껴진다. 무엇인가 더 있을 것 같은 상상과 호기심을 발동 시킨다 그렇게 표현해야 될까?고분양식, 고분축조과정, 고분내부모형교동고분 옆에 박물관을 둘러보고 고분 모형관에 들어갔다. 고분의 만들어지는 방법과 고분의 내부 모형을 볼 수 있게 되어 있어 좋았다. 특히 봉토의 흑색이 다른 점이 그 당시에도 팀을 이루어 조직적으로 축조한 것 같아 놀라웠다. 여기 저기 다른 곳에서 흙을 운반해서 각기 다른 작은 팀을 이루어 성과를 이루는 것이 지금과는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노예를 부려 일방적으로 노동을 착취하는 모습과는 사뭇 다른 것 같다. 그리고 한편으로 색이 다른 흙에도 고대인들 나름대로의 신성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버스를 타고 몇분도 가지 않아서 내린 곳이 고등학교 국사 시간에 배웠던 청 경비였다. 그때는 비가 세워진 배경도 배우지 않았고 그냥 무작정 외우기만 했던 것 같다.창녕읍의 옛 이름은 비사벌이라고 한 다. 삼국사기에 진흥왕16년(555년) “정 월 비사벌에 완산주를 두었다” 는 기사 가 있다. 그리고 “화왕군은 본래 비자 화였으며 진흥왕 16년 주를 설치하여 하주라고 불렸다”는 기록이 있다. 이런 기록을 토대로 비화가야가 6세기 중엽에 신라에 합병되었을 거라고 한다. 그 후 6년 뒤 진흥왕은 새로이 영토로 편입된 창녕으로 행차해 점령지에 대한 새로운 정책을 밝힌다. 이때의 사실을 기록한 것이 창녕 진흥왕 척경비(拓境碑)라고 한다. 가기 전에 발표수업시간에 국보위에 새똥이 있다는 교수님의 말씀이 있었는데 역시 희미하게 흰색의 흔적이 보였다. 이렇게 우리의 유산이 방치되고 있다는 생각에 화가 났고 달라지지 않은 우리의 의식에도 많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관광지 여기 저기 버려진 쓰레기며 지키지 않은 공공질서 등을 생각하면서 언젠가는 이렇게 남아 있는 유산마저 어디론가 꼭꼭 숨겨두고 몰래 몰래 봐야 되는 것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 보았다.다음으로는 우리조가 발표한 창녕 석빙고로 갔다.교수님의 백(?)으로 석빙고 안에 까지 들어 갈수 있어 정말 기억에 많은 남는다. 처음에 는 사람들이 입구를 가려서 빛이 차단되어 들어가는데 상당히 애를 먹었지만, 조금씩 어 둠에 익수해져 석빙고 내부가 잘 보였다. 이 론적으로 알고 있었던 석빙고의 구조와 실제 의 내부를 보며 역사의 한 장소에 있는 듯한 생각이 들었다, 여기에 얼음을 저장하고 여러 가지 음식들을 보관했던 조선인들의 숨소리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어두운 석빙고 안에서 전통복장을 한 조선인들이 얼음을 보관하고 꺼내가는 상상을 했다. 어두운 공간 안에서 위의 공해는 빛 같이 보였다. 지금 누구나 언제든지 차가운 얼음과 상하지 않게 보관된 여러 음식들을 쉽게 냉장고에 꺼내 먹을 수 있지만 과거에는 이런 생활은 소수의 특권계층만 누렸고 그 다양성은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적었다. 인간이 음식을 저장하고자 했던 그때부터 시작된 빙고를 보며 편리해지 지금을 다시 한번 느꼈다.다음은 술정리 동탑으로 행했다. 때 마침 시골장이 서서 차가 동탑까지 가지 못해서 이 곳까지는 걸어갔는데 재래시장을 구경하며 걸어서 그런지 걷는 동안 지루하지 않고 재미있었다. 영화에서 보듯 직접 닭을 잡거나 염소를 파는 모습은 없었지만 재래시장 특유의 활기와 싱싱함이 느껴졌다. 삼국통일 후 8세기 중엽은 우리나 라 석탑의 형태가 완성된 시기라고 한다. 9 층, 5층, 목탑, 모전탑, 등 다양한 양식의 과 도기를 거쳐 삼층석탑 형식이 정착되고 아름 답게 정제되어 절정기에 다다른다. 그 중심에 있는 것이 불국사 삼층석탑인데 삼층석탑을 견주어 뽐내도 뒤지지 않는 석탑이 술정리 동삼층석탑이라고 한다. 비례미는 뛰어난 것 같지만 사실 그렇게 수려한 탑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국보로 지정된 삼층 석탑인데 가장 위층의 부분이 소실되어 있어 아쉬웠다. 주위에도 어수선하고 국보 문화재 대접이 너무나 소원했다. 아직 정미 과정중이라서 그런지 외국인 관광객에서 보여주어 자랑스럽지는 않을 것 같았다. 석탑 자체의 아름다움이 떨어지는 것 보다 국보급 문화재라면서 공토에 덜렁 버려져 있는 인상을 받았다. 관리센타 역시 다 무너져가는 건물에 너저분한 현수막으로 표시만 했을 뿐 밤에 누군가 굴착기을 이용해 훔쳐가도 이상하지 않을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