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관(日官)제도예로부터 하늘의 변화를 하늘의 뜻이거나 하늘의 명을 반영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던 옛 사람들은 하늘을 주의 깊게 관찰하였다.하늘을 받드는 일에 게으르지 않았던 그때 사람들은 제단을 만들어 여러 가지 제천의식을 하였다. 그래서 해와 달 그리고 별을 관측하여 시간과 계절의 흐름을 깨닫고 하늘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우리나라는 농경국가로서 비와 바람 등 천기의 변화가 지대한 관심사 중의 하나여서 천문관측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또한 하늘의 변화는 왕실과 백성들의 평안과 직결되는 신의 뜻이라고 여겨 항상 주의 깊게 하늘을 관찰하고 기록하였다.『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국조 단군(檀君)이 세웠다는 참성단(塹星檀)이 강화도 마니정(摩尼頂)에 남아 있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별(星)자가 붙은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라고 할 수 있다.지금도 이 곳에서 개천절(開天節)에 제사를 지내고 있는데, 이러한 사실은 우리 민족이 옛날부터 천문관측과 농경의 풍요로움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증명한다.별자리의 기본인 28수 중 그 하나인 기수(箕宿)와 연관을 가졌다는 기자조선을 시작으로 한 한국의 고대천문학은 먼저 고구려의 무덤에 그려진 별자리, 신라의 첨성대 등 여러 가지 유물을 남겼다.삼국시기 우리 선조들은 우주에 대한 관측에 기초하여 우주에 관한 넓은 견해와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천문기상관측을 위한 첨성대도 건설하고 과학적인 석각천문도도 만들었다. 그리하여 오랜 기간 천문관측을 진행하여 여러 천문현상들을 관측하고 기록에 남겼다.문헌자료에 의하면 고구려에서는 천문관측을 전문으로 하는「일자(日者)」라는 직제가 있었고, 백제에서는「일관(日官)」있어 해와 달, 별들에 대한 관측과 계산, 기록을 담당하였고, 신라에서는 누각박사(漏刻博士)와 천문박사(天文博士)들이 천문관측을 담당 수행하였다.『삼국사기(三國史記』에 삼국에서 혜성관측과 일식을 관측하는 것이 기록되어 있는데, 혜성(彗星)은 고구려에서는 10회, 백제에서는 15회, 신라에서는 32회나 관측되었고, 일식은 고구려는 기원전 114년부터 559년까지 445년 동안 11회, 신라는 기원전 54년부터 911년까지 965년 동안 29회, 백제는 서기 14년부터 592년까지 606년 동안 26회의 관측을 한 기록이 보인다.이러한 사실은 고구려, 백제, 신라가 독자적인 천문관측체계를 가지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고구려에서는 첨성대를 평양성에 두었다는 문헌기록들이 남아 있다.『세종실록(世宗實錄)』 권154 지리지 평양부에는 “성안에는 9개의 사당과 9개의 못이 있는데 9개의 사당은 바로 9가지의 별이 날아들어 간 곳이며 9개의 못 옆에는 첨성대가 있었다”는 내용이 보인다.또한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권51 평양부 고적조에는 “첨성대는 부의 남쪽 3리 되는 곳에 있다.”는 기록에서 고구려 첨성대의 존재를 확인 할 수 있다.경주의 신라 첨성대(瞻星臺)는 경주시 인왕동(慶州市 仁旺洞)에 자리잡은 동양 최고(最古)의 천문대(天文臺)로 알려진 석조건물로, 우리나라의 천문학과 기상학의 높은 수준을 잘 보여주고 있다.국보 제31호인 첨성대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신라 27대 선덕여왕(善德女王) 16년(서기 647년)에 백제인(百濟人) 아비지(阿非知)가 건립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세립질의 질 좋은 화강암으로 기단에서부터 높이 9.108m, 밑지름 4.93m, 윗지름 2.85m로 쌓아 만든 이 첨성대는 건축학적으로 정교하며 역학적으로 균형이 잘 잡히고 약 1천4백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에도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이 첨성대는 천문학적으로 볼 때 당시 천문학부문에서 지배하던 『천원지방』설에 따라 위는 둥근 몸체, 기초에는 네모난 지대석을 놓았고 그 대석 위로 돌을 모두 28개 층을 쌓아 천체의 별자리 28수를 나타내었다.몸체는 27단이나 맨 위의 정자석을 합치면 28단이고 기단석을 합치면 29단이며, 원주부(圓柱部)에 사용된 석재수(石材數)는 하층부터 27단까지 3백62개다.의미를 부여하자면 27단은 선덕여왕의 27대, 28단은 기본 별자리 28수, 29단은 한달 29일을 의미하고, 3백62개는 1년의 일수(日數)를 상징한다.그리고 아래로부터 중간에 있는 네모난 출입구의 밑단까지는 마치 1년을 12개월로 나누듯 12개 단으로 쌓았고 그 위부터 출입구 높이까지는 1년을 4계절로 나누듯 4개 단으로 쌓았다.또한 대석(臺石)으로부터 높이 약 4.16m되는 곳에 정남(正南)을 향하여 1변의 길이가 약 1m인 네모난 출입구를 통하여 햇빛이 그 안벽에 비추는 그림자의 위치와 그 길이에 따라 시간과 절기를 대략적으로 알 수 있게 하였다.춘분과 추분에 태양광선이 첨성대 밑바닥까지 비추게 돼 있고 하지와 동지에는 아랫부분에서 광선이 완전히 사라져 춘하추동의 분점(分点)과 지점(至点)을 측정하는 역할을 한다.첨성대의 건축학적 연구는 재미교포 건축공학자 이동우 박사가 1972년 이래로 여러 면에서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데 그에 따르면 첨성대 설계자는 특이한 반곡선적 형태를 창안하여 축조시 구조적 안정성과 심미적이고 기능적인 요소를 고려했음이 찾아진다는 것이다.즉, 축조시 안정성과 완공뒤의 안정성을 특별히 고려하여, 1단에서 12단까지는 부드럽고 완만한 곡선으로, 13단에서 20단까지는 비스듬한 직선, 21단에서 23단까지는 경사된 직선과 수직 직선을 이어주는 이변곡선(移變曲線), 24단에서 27단까지는 수직직선(垂直直線) 부분으로 돼 있다.
2) 칠지도백제왕이 왜왕에게 하사한 철제 칼. 국립부여박물관 소장칠지도일본 나라 현[奈良縣] 텐리 시[天理市]에 있는 이소노가미 신궁[石上神宮]에 봉안되어 있다. 〈니혼쇼키 日本書紀〉 신공기(神功紀)에 백제가 왜에 하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길이는 74.9㎝로서 단철(鍛鐵)로 만든 양날 칼이다. 칼의 몸 좌우로 각각 가지칼이 3개씩 뻗어 모두 7개의 칼날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칠지도'라는 이름이 붙었다. 칼몸의 앞과 뒤에는 60여 글자가 금상감(金象嵌)되어 있고 그 외곽을 가는 금선으로 둘렀다. 칠지도의 명문은 이소노가미 신궁의 대궁사(大宮司)로 있었던 간마사도모[菅政友]가 1870년대에 처음으로 확인한 이래 지금까지 그 명문해석을 둘러싸고 여러 가지 의견이 나오고 있다. 칼의 제작연대를 비롯해 백제왕이 왜왕에게 헌상한 것인가 하사한 것인가를 둘러싸고 많은 논쟁이 제기되어 왔다. 특히 일본학자들의 자의적인 해석으로 인하여 고대 일본이 가야지역을 200년간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의 한 근거로까지 이용되었다. 최근의 명문해석에 의하면, 그 제작연대는 369년(근초고왕 24)으로 밝혀지고 있는데, 그 내용은 "태화(泰和) 4년 5월 16일 병오(丙午) 정양(正陽)에 100번 단련한 강철로 칠지도를 만들었는데, 모든 병해를 물리칠 수 있으며 편안히 후왕에게 나누어 마땅하다. (아무개가 이 칼을) 제작했다"라는 것과 "선세(先世) 이래 이러한 칼이 없었는데, 백제왕 치세에 기묘하게 얻었기 때문에 성상(聖上)의 말씀으로 짐짓 왜왕을 위하여 만든 뜻을 후세에 전하여 보여라"라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해석에 의하면, 백제의 우위를 명백히 해주고 있다. 왜냐하면 그 명문에는 백제왕의 '말'을 극존칭인 '성음'이라고 표현한 데 반하여 상대방인 왜왕에게는 경어가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또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내리는 명령형의 하행문서 양식으로 되어 있어 이같은 해석의 타당성을 뒷받침해준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볼 때 부월(斧鉞)이나 도검(刀劍)의 하사는 아랫사람에 대한 윗사람의 신표라는 성격이 강하다는 점을 주목할 때, 백제왕의 칠지도 하사 동기는 왜왕에 대한 일본열도 내에서의 일종의 대표권을 승인하는, 양국간의 종주·신속 관계를 설정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이는 백제왕이 그 권력범위를 확대하려는 데 근본 목적이 있었다. 한편 칠지도의 형상은 단군신화에 보이는 신단수와 같이 신앙의 대상을 도형화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백제왕권이 하늘과 연결되는 신성성, 즉 초월적인 권위 및 사방천하관(四方天下觀)이 반영되어 있으며 천손을 자처한 백제왕의 역할과 권위를 과시하는 주술적 성격의 성구(聖具)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칠지도의 일부로 생각되는 유물이 부여 군수리 절터의 탑기둥 구멍 밑에서 출토된 바 있어 주목된다.출처 : 다음백과사전 (http://enc.daum.net/)※ 백제의 칠지도(인용자료-편집)백제가 일본열도를 지배하고 있었던 여러가지 증거물 중에서 하나가 일본 나라현(奈良縣) 이소노가미신궁(石上神宮)에 있는 '칠지도'이며 칠지도의 성격에 대해서 알아 본다.이소노가미신궁에 소장된 칠지도(七支刀)를 는 백제로부터 신공왕후에게 내려진 하사품이라고 한다.칠지도의 한자명문의 내용은[이 칠지도는 이를 지닌 사람에게 어떤 날카로운 칼날이라도 피할 수 있는 힘을 준다. 이를 속국의 지배자에게 보낸다]라고 되어있다.칠지도※ 칠지도 명문 내장이고 그런 서열은 대왕 > 왕 > 후왕의 서열과 같은 것이다.*제(齊)- 왕에 해당함
1) 풍납토성 (風納土城)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風納洞)에 있는 백제 초기의 토성터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1호로 지정되었다. 한강 연변의 평지에 축조된 순수한 토성으로, 남북으로 길게 타원형을 이룬다. 성벽의 길이는 동벽 1,500m, 남벽 200m, 북벽 300m 정도이며, 서벽은 1925년의 홍수로 유실되었다. 그러나 현재는 새로 제방을 쌓았으므로 서벽이 완전히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원래 경기도 광주(廣州)에 속했는데 행정구역 개편으로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었으며 풍납토성이라고도 한다.둘레 3,740m에 이르는 규모가 큰 평지 토성이었으나 현재는 2,679m 정도 남아 있다. 성벽의 표면은 잔디와 잡초로 덮여 있는데, 내부는 돌이 거의 없고 고운 모래로 쌓아 올렸으며, 외부의 경사면이 2단으로 축조된 흔적이 남아 있다. 북벽의 높이는 약 8m이고, 기초 부분의 너비는 약 30m이다. 동벽 외부가 깊어진 것은 축성용 채사(採砂)로 인한 것 같고, 동벽에 같은 간격으로 뚫려 있는 네 곳은 성문자리인 듯하다.1925년 대홍수 때 삼국시대의 청동제 초두(?斗)가 2개 발견된 뒤 토기 조각들도 많이 발견되었다. 1966년 토성 내 포함층(包含層)의 일부가 발굴되어 선사시대 말기에서 삼국시대에 걸친 토기와 기와의 분포를 알게 되었다. 1996년 토성의 동북쪽 구역의 조사에서는 지표 4m 정도 아래에서 원삼국시대에서 백제 전기의 집터를 비롯해 가락바퀴[紡錘車], 그물추, 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주민이 생활하던 주거지로 추정되며 한강유역에 있는 백제 유적 가운데 최대 규모의 토성 유적이다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 http://100.naver.com/100.php?id=19087 )※ 고대 토성속의 과학 - 풍납토성 댐공법으로 지었다백제의 초기 왕성으로 주목받고 있는 풍납토성이 현대의 댐과 견줄 만큼 견고하게 지어졌으며, 당시로서는 첨단 토목기술의 결정체인 것으로 밝혀졌다.국립문화재연구소의 신희권 연구원은 16일 "풍납토성중 두 지역을 99년에 발굴 조사한 결과 세계적으로도 높은 수준의 토목 기술이 사용된 것을 발견했으며, 댐 수준으로 견고하게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신 연구원은 18일 대전 한밭대에서 열리는 제1회 풍납토성 학술대회에서 이 같은 내용의 '풍납토성 축조과정'에 대한 보고서를 발표할 예정이다.서울 송파구 한강변에 있는 풍납토성은 둘레 3.5㎞, 높이 11m, 폭 40m 크기의 흙벽으로 지어진 토성. 기원전 1세기에서 3세기 사이에 지어졌으며, 초기 백제의 왕성인 것으로 알려졌다.이번 발굴에서 밝혀진 풍납토성의 건설 기술은 현대식으로 보면 내진 설계, 철근 콘크리트 공법, 방수 처리 등에 비교될 수 있을 정도다.발굴 결과 풍납토성의 흙벽 중 가장 밑바닥에는 평균 50㎝ 두께의 뻘흙이 깔린 것으로 밝혀졌다. 뻘흙은 매우 끈적끈적하고 질겨 건물 기반을 단단하게 다지는 기초 역할을 한다. 또 유동성이 있어 지진 등에도 쉽게 견딜 수 있다. 연구팀은 주민들이 뻘흙을 한강이 범람할 때 얻었거나, 바다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고 있다.신 연구원은 "약간씩 흔들리는 건물이 지진이나 태풍에 더 잘 견디는 것처럼 풍납토성도 뻘흙을 이용해 지진 등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 철근 콘크리트 공법과 비슷한 '목재-뻘흙' 기술도 사용됐다. 풍납토성의 가장 안쪽 흙벽은 나무로 직사각형 모양의 틀을 3단으로 만들고 그 안에 뻘흙을 넣어 강도를 높였다. 목재가 뻘흙의 보강재 역할을 한 것이다.특히 뻘흙은 유기물이 썩지 않도록 보호하기 때문에 적어도 1,800년 전의 토성 속 목재가 지금도 썩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우리 조상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흙벽의 강도를 높이기 위해 흙과 나뭇잎 층을 교대로 쌓는 기술도 사용됐다. 흙층과 나뭇잎 층을 층층이 쌓으면 층 사이에 마찰력이 생겨 잘 미끄러지지 않는다. 흙벽이 밀리는 현상을 방지한 것. 이번 발굴 결과 풍납토성의 흙벽에는 10여차례나 나뭇잎과 흙층을 교대로 쌓은 것으로 밝혀졌다. 지금까지 이 기술이 사용된 건물중 가장 오래된 것은 4세기에 지어진 김해의 벽골제로, 풍납토성은 이를 1세기 이상 앞당긴 셈이다.또 흙과 나뭇잎 층을 교차로 쌓는 기술은 6~7세기에 지어진 일본 큐슈의 수성(水城)이나 오사카의 협산지(狹山池) 제방에도 사용돼, 한국의 토목기술이 일본으로 건너간 증거로 제시됐다.이밖에 연구팀은 각 성벽의 축조 방법이 조금씩 다른 점 등으로 보아 여러 집단이 성벽을 구간별로 나눠 쌓았으며, 풍납토성의 크기를 볼 때 당시 한국인들이 매우 정교한 측량술과 종합설계술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신 연구원은 "중국에서 시작된 단순한 토성 축조 기술이 한국에 건너와 풍납토성에 이르러스는 당시로서는 최첨단 기술로 화려한 꽃을 피웠다"며 "앞으로 발굴이 더 진행되면 조상들의 과학기술이 새롭게 조명 받을 것"이라고 강조했다.출처 : 최병두의 화학교실 ( http://www.chemmate.com/news/c11.htm )※ 참고용 보도 자료"풍납토성 백제 왕궁 일부인 듯"서울 송파구 풍납토성이 초기 백제의 왕성이었을 가능성이 한층 커졌다.지난해 9월부터 풍납토성내 경당연립 재건축아파트 예정지를 발굴하고 있는 한신대박물관은 25일 현장 설명회를 갖고 지하 4m 바닥 층에서 여(呂)자형으로 돌을 쌓은 대형 건물터를 확인했다고 밝혔다.이 건물터는 동서로는 16m가 최종 확인됐지만 남북으로는 지금까지 드러난 14m 외에 발굴대상 구역 밖의 인근 주거지 밑쪽으로 뻗어 있어 현재로서는 길이가 얼마인지 확인할 수 없는 상태다.이러한 건물 규모는 지금까지 확인된 것만 해도 경주 황룡사나 익산 미륵사지 같은 대형 절터를 제외하고는 삼국시대 이전 건물로는 최대 규모다.박물관 측은 건물의 규모나 목조 기와 건물임을 보여주는 전돌. 암키와 등의 출토유물로 볼 때 백제왕궁의 일부이거나 제사와 관련된 부속 건물일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또 이 건물터 옆의 큰 구덩이에서는 장신구로 쓰인 각종 유리구슬과 작은 원형 금판 1점, 동물모양 소형 토우 1점 등이 출토됐다.이처럼 왕궁 터로 추정 가능한 건물유구와 함께 각종 유물이 쏟아져 나옴에 따라 앞으로 풍납토성을 보존해야 한다는 여론이 더욱 고조될 것으로 보인다.이와 관련, 문화연대를 비롯한 시민단체들은 25일 발굴현장에 모여 '풍납토성 보존 국민연대(가칭)' 를 결성하고 풍납토성 보존을 위한 시민운동을 펴나가겠다고 밝혔다.박태욱 기자 2000년 04월 26일 29面(10版)KBS1 '역사스페셜' 주장, "풍납토성은 백제 위례성"서울 송파구 풍납동에 위치한 풍납토성에서 최근 1천5백년전 백제 유물이 다량 출토된 것을 계기로 이 토성이 화산폭발로 소멸한 고대 로마 폼페이처럼 일거에 사라진 백제의 초기 도읍지 위례성이란 주장이 브라운관에서 제기된다.
2) 황룡사탑※ 황룡사 창건불교를 공인한 신라는 진평왕과 그 왕비의 이름을 석가불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름과 같은 백정과 마야라고 하였다. 호국 불교를 전파하는데 힘을 기울여 사회통합력을 높이려 하였다. 이와 같은 신라 불교의 속성을 잘 드러내고 그 목적을 위해 지어진 절이 황룡사이다. 황룡사는 국가적으로 가장 중요시되었던 최대 규모의 절로 신라 3보인 장육존상과 황룡사 9층목탑을 지닌 가장 대표적인 호국사찰이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절을 처음 짓게 된 동기에 대해서 '진흥왕 14년에 월성의 동쪽에 새로운 궁궐을 짓고자 했는데 그 곳에서 황룡이 나타났기 때문에 절로 고쳐 짓고 절의 이름을 황룡사라 했다'고 하였다.황룡사 9층 목탑에 얽힌 이야기황룡사에 세워졌던 황룡사 9층목탑은 경주 분지의 모든 곳에서 바라 볼 수 있는 80여 미터의 거대한 탑이었다. 9층목탑은 중국의 당나라에 유학했던 자장의 건의에 의해 선덕여왕 14년(645)에 완성되었다. 자장이 당나라에서 유학 중에 한 신인(神人)이 나타나 "황룡사 호국룡은 나의 장자로 범왕의 명을 받아 그 절을 보호하고 있으니, 본국에 돌아가 그 절에 9층탑을 이룩하면 이웃 나라가 항복하고 "구한"이 와서 조공하며 왕업이 길이 태평할 것이요, 탑을 세운 뒤에 팔관회를 베풀고 죄인을 구하면 외적이 해치지 못할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한다. 자장은 신라에 돌아와 선덕여왕에게 건의하여 9층목탑을 세우고 부처의 진신사리 100알을 탑 속에 봉안하였다. 황룡사는 신라 최대의 호국사찰이었기 때문에 왕이 직접 참여하여 국가의 평안을 비는 인왕회(仁王會), 국왕 참석 하에 100명의 고승이 모여 불경을 강론하는 백고좌강회(百高座講會) 등이 통일 전부터 신라가 망해 가는 경애왕 말년까지 여러 차례 있었다.찰주본기(擦柱本記)에는 경문왕 때인 872년에는 탑을 헐고 다시 세웠다고 하며, 총높이가 225척[80m정도(40m 정도였다는 설도 있다)]이었다고 하는 황룡사 9층목탑은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벼락을 자주 맞아 여 염원을 신라인 모두에게 심어 주고, 세상의 인정을 받고자 대역사(大役事)를 벌인다. 바로 황룡사(皇龍寺) 9층탑의 건축이다.황룡사 9층탑은 선덕여왕 14년 645년에 대국통(大國統)이었던 자장(慈藏)이 건의하여 건립된다. 설계와 건축은 백제가 목조 건축술이 발달되어 있었던 터라 신라 조정의 초청으로 백제에서 건너온 당대의 장인 아비지(阿非知)가 맡아 2년동안 걸려 황룡사 경내에 세웠다. 원래 신라가 황룡사 탑을 9층으로 쌓은 것은 신라가 반드시 복속하고자 한 신라의 9적(九敵)을 각 층으로 쌓아 부처의 힘(佛力)을 빌어서라도 제압하고자 한 것이다(1층은 일본, 2층은 중국[한족] 3층은 오월[황하이남] 4층은 탐라[탁라] 5층은 응유[중국 강서 동쪽] 6층은 말갈 7층은 글안[단국] 8층은 여진[여적] 9층은 예맥을 상징한다. 신라가 황룡사 9층탑의 9적에 백제와 고구려를 넣지 않은 것도 비록 지금은 치열하게 싸움을 하고 있다지만 결국은 민족이 같은 한 갈래로 본 것이다).무엇보다 이 탑은 신라 국민들의 정신적인 단합과 무장을 통해 백제 및 고구려와의 통일전쟁에서 이겨 신라의 이름 아래 한민족이 통일되기를 부처에게 빌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서라벌의 신라인들은 누구나 아침저녁으로 이 탑을 바라보면서, 그러한 염원을 빌었다. 아울러 자신과 가족의 안녕과 평화도 빌었다. 생각해 보시라. 이 거대한 탑을. 나무로만 만든 이 탑은 아홉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높이가 70미터가 넘었기 때문에(80미터에 이르렀다는 주장도 있음) 서라벌 어느 곳에서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리고 층층이 나름대로 부처의 가르침을 나누어 담고 현세 신라의 번영과 영광도 함께 기리고자 했다. 남아 있었더라면 아마도 한국 문화재 중에서 손꼽히는 자랑꺼리가 되었을 것이다. 그후 이 탑은 절 중의 절로 꼽히던 황룡사와 더불어 신라인의 정신적 구심점 역할을 하게 된다. 서라벌의 신라인이든 지방에 살던 신라인이든 한번은 성지순례하듯 황룡사를 들르게 된다. 국민 누구나 쉽게 실천할 수 있는 생활목표이자 배출함으로써 사회 최상층을 이루고 있었으며 국민들의 정신적 지주로서 역할했던 것이다.또한 사찰(절)은 농토와 재산, 많은 부역민과 신도를 데리고 있어 막강한 실력도 갖고 있었다. 아울러 이 탑은 자장이 밝힌 대로 신라야말로 이미 석가 이전에 여러 부처가 황룡사에서 설법하여 부처의 나라가 되어 있고 부처와 깊은 인연을 갖고 있으니 만큼, 신라에 의해 삼국통일이 이루어 져야 하며 그럴 것이라는 신라의 염원을 정당화한 상징으로 여겨진 것이다. 또한 원광도 신라가 부처의 나라이니 만큼 신라를 해치는 무리는 부처의 이름아래 죽여도 마땅하다는 신라의 행동 및 전쟁의 명분을 세운 것이다.이러한 시절 불교와 불법불승의 현세적 구현으로써 늘 눈에 보이는 현실적 구심점으로 세워진 것이 황룡사 9층탑이다. 이제 우리가 다시 그 탑을 세우자. 고증과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가능하면 원형대로 세우되, 더 크고 높게 그러면서도 더 과학적이게 지어 오늘에 되살리자http://chunma.yu.ac.kr/~m0015182/korea/hwangryong_tower.htm※ 황룡사 9층 목탑불교를 공인한 신라는 진평왕과 그 왕비의 이름을 석가불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름과 같은 백정과 마야라고 하였다. 그들은 왕이 곧 부처라는 관념의 불교, 즉 부처인 왕을 중심으로 나라를 지킨다는 식의 관념으로 불교를 전파하는데 힘을 기울여 사회통합력을 높이려 하였다. 이와 같은 신라 불교의 속성을 잘 드러내고 그 목적을 위해 지어진 절이 황룡사이다. 황룡사에 세워졌던 황룡사 9층목탑은 경주 분지의 모든 곳에서 바라 볼 수 있는 80여 미터의 거대한 탑이었다. 황룡사는 국가적으로 가장 중요시되었던 최대 규모의 절로 신라 3보인 장육존상과 황룡사 9층목탑을 지닌 가장 대표적인 호국사찰이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절을 처음 짓게 된 동기에 대해서 '진흥왕 14년에 월성의 동쪽에 새로운 궁궐을 짓고자 했는데 그 곳에서 황룡이 나타났기 때문에 절로 고쳐 짓고 절의 이름을 황룡사라 했다'고 하였는다. 궁궐을 짓차 가람의 금당에 모시니 금당이 너무 작아 다시 금당을 지었다 한다.9층목탑은 중국의 당나라에 유학했던 자장의 건의에 의해 선덕여왕 14년(645)에 완성되었다. 자장이 당나라에서 유학 중에 한 신인(神人)이 나타나 "황룡사 호국룡(護國龍)은 나의 장자(長子)로 범왕(梵王)의 명을 받아 그 절을 보호하고 있으니, 본국에 돌아가 그 절에 9층탑을 이룩하면 이웃 나라가 항복하고 구한(九韓)이 와서 조공하며 왕업이 길이 태평할 것이요, 탑을 세운 뒤에 팔관회를 베풀고 죄인을 구하면 외적이 해치지 못할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한다. 자장은 신라에 돌아와 선덕여왕에게 건의하여 9층목탑을 세우고 부처의 진신사리 100알을 탑 속에 봉안하였다. 황룡사는 신라 최대의 호국사찰이었기 때문에 왕이 직접 참여하여 국가의 평안을 비는 인왕회(仁王會), 국왕 참석 하에 100명의 고승이 모여 불경을 강론하는 백고좌강회(百高座講會) 등이 통일 전부터 신라가 망해 가는 경애왕 말년까지 여러 차례 있었다.발굴 과정에서 나온 금동사리함 안팎에 새겨진 찰주본기(擦柱本記)에는 경문왕 때인 872년에는 탑을 헐고 다시 세웠다고 하며, 탑을 다시 세우면서 철반(鐵盤) 위에 작은 석탑 99개를 안치하고 각 탑에는 사리 한 알과 네 종류의 다라니를 넣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총높이가 225척[80m정도(40m 정도였다는 설도 있다)]이었다고 하는 황룡사 9층목탑은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벼락을 자주 맞아 여러 차례 수리하였다고 한다. 신라 멸망 후에도 황룡사는 고려 왕조에서도 깊은 숭상과 보호를 받았으며 9층 목탑의 보수를 위하여 목재까지 제공받았다. 그러나 1238년(고종 25) 몽고군의 침입으로 목탑은 물론 일체의 건물이 불타버렸다.9층목탑의 건축 총감독은 백제의 장인 아비지가 담당하였는데, 아비지가 처음 찰주(刹柱)를 세우던 날 백제가 망하는 꿈을 꾸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주변의 구한(九韓) 즉 말갈, 고구려, 백제, 왜 등의 침범을 막기 위해 지은 것이라는 내용이 {삼국유사}와 {찰 대답하기를 "보리를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하였다. 신인은 그에게 절하고 나서 다시 묻기를 "그대의 나라에 무슨 어려운 일이 있소." 하니 대답하기를 "우리 나라는 북으로 말갈에 연하고 남으로는 왜국에 이어졌으며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가 번갈아 국경을 범하는 등 이웃 나라의 횡포가 자주 있사오니 이것이 백성들의 걱정입니다." 하였다. 신인이 말하기를 "지금 그대의 나라는 여자를 왕으로 삼아 덕은 있어도 위엄이 없기 때문에 이웃 나라에서 침략을 도모하는 것이니 그대는 빨리 본국으로 돌아가시오." 하였다. 자장이 묻기를 "고향에 돌아가면 무슨 유익한 일이 있겠습니까." 하니 신인이 말하기를 "황룡사의 호법룡은 바로 나의 큰 아들이오. 범왕의 명령을 받아 그 절에 와서 보호하고 있으니 본국에 돌아가거든 절 안에 구층탑을 세우시오. 그러면 이웃 나라들은 항복할 것이며 구한이 와서 조공하여 왕업이 길이 편안할 것이오. 탑을 세운 뒤에는 팔관회를 열고 죄인을 용서하면 외적이 해치지 못할 것이오. 다시 나를 위해서 경기 남쪽 언덕에 절 한 채를 지어 함께 내 복을 빌어주면 나도 또한 그 은덕을 보답하겠소." 하고는 옥을 바친 후 이내 형체를 숨기고 나타나지 않았다. 에 이르기를 종남산 원향선사에게서 탑 세울 까닭을 들었다고 했다.)정관 17년 계묘 16일에 자장법사는 당나라 황제가 준 불경불상가사폐백 등을 가지고 본국으로 돌아와서 탑 세울 일을 임금에게 아뢰자 선덕왕이 여러 신하들에게 이 일을 의논하니 신하들이 말하기를 "백제에서 기술자를 청해 데려와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이에 보물과 비단을 가지고 백제에 가서 청해 오게 하였다. 이리하여 아비지라는 공장이가 명을 받고 와서 나무와 돌을 재고 이간 용춘(혹은 용수)이 그 역사를 주관하였는데 거느리고 일한 소장(小匠)들은 200명이나 되었다.처음에 절의 기둥을 세우던 날에 아비지는 꿈에 본국인 백제가 멸망하는 모양을 보았다. 아비지는 마음속에 의심이 나서 일을 멈추었더니 갑자기 천지가 진동하며 어두워지는 가운데 노승 한하기를
5) 환두대도과거 선조시대는 특권층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 바로 劍이기 때문에 검에 담긴 그들의 정서와 혼은 지대하였을 것이라 본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는 지배자의 권력을 나타낸 환두 대도로 신분에 맞는 장식이 가미된 화려한 모습을 보인다. 환두 대도에는 다양한 장식이 가미되어 그 명칭이 부여되며 다양한 규격의 길이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경남 창녕 교동에서 출토된 가야시대의 환두대도는 전장이 74.0cm로 나타나고 있으며 경남 합천 옥전에서 출토된 다른 검의 규격은 전장89.0cm로 조금 더 크다. 또한 신라지역이었던 경북 경주 안강에서 출토된 전장 85cm의 환두대도도 나타나며 또 백제지역의 천안 화성리에서 출토된 전장이 80.9cm의 규격등과 같이 각기 다른 규격의 다양한 칼이 발견되고 있다.이렇듯 다양한 문양과 장식 그리고 규격에 따른 변화에 따라서 그 무기의 활용법과 착용자의 신분도 드러나는 것이다. 환두대도는 실전성과 의장적 성격이 강한 무기로 대두되며 그 사용법은 전하여 지고 있지 않다. 특히 중요한 것은 환두대도에는 古銅이 없다. 古銅이란 칼 손잡이에서 칼 몸을 잇는 중간에 손목의 보호대 역할을 하는 중요한 것인데 각종 환두대도를 볼 때 ?古銅이 들어가 있는 환두대도는 아직껏 나타나고 있지 않다. 환두대도의 검파 부분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것이 약간 돌출된 형태를 ?보이고 있는 것이 있다. 이런 종류 외에는 전혀 古銅이 나타나고 있질 않다. 그러므로 환두대도는 신분적 권력의 부산물로 여겨지며, 의장적 성격이 강한 기물로서 전하여 지고 있는 것이다.환두대도는 단순한 무기로서의 기능뿐만이 아니라 정치권력의 의미도 가지기 때문에 손잡이와 칼집 등에 매우 화려한 장식을 하여 신분적 상징의 의장품으로 애용되기도 하였다. 환두대도에는 素環頭大刀, 龍鳳紋環頭大刀, 三葉環頭大刀 등 다양한 종류의 환두대도가 있으며 이 순서는 대체로 사회적 지위의 서열과 일치한다. 이러한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칼집 테두리에는 금, 은, 동판을 입히거나 상감 기법을 이용하여 매우 화려 하게 장식하였다.?또한 環頭大刀에는 한쪽으로 날이 있는 것과 양쪽 다 날이 있는 것 두 가지로 구분이 된다. 三國時代의 환두대도는 특유의 양식으로 발전되어 매우 화려한 紋樣과 透彫, 透刻한 金屬工藝의 미적 극치를 잘 나타내고 있다. 특히 三葉環頭大刀는 朝鮮時代 寅劍의 紋樣에까지 영향을 미쳐 寅劍의 柄部環頭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한편 中國에서는 漢 代에 만들어져 漢兵刀 또는 한수도로 분리되었으며 우리 나라의 경우 三國時代에 가장 기본적인 무기로 사용되었다. 삼국 시대 지배자의 권력을 나타내는 환두대도는 ?鐵劍으로서 다양한 의장적 성격을 띠고 많이 나타나고 있으며 환두에 새긴 紋樣과 入絲 그리고 형태에 따라서 검의 종류를 달리하여 名稱이 부여된다. 龍鳳環頭大刀는 環頭의 고리 앞에 單龍, 單鳳의 형태를 조각하여 劍盤과 환두고리에 입사 투조한 문양으로써 명칭이 부여되었다. 單龍環頭大刀 에도 환두의 고리안에 單龍의 머리 부분을 조각한 劍盤 테두리와 環의 고리 안에 선적인 回文을 투조하여 입사 공예의 화려한 단면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환두대도의 문양과 장식적 요소에서 뛰어난 당시의 金屬工藝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특히 환두대도에 입사 투조한 장식을 보면 기하문, 운문등 구름을 상징하는 여의두문, 당초문등을 볼 수 있으며 흘러내리는 매듭이 달려 아름다운 곡선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문양들 외에 용, 봉황, 삼엽등의 각종 문양이 환두의 고리 부분에서 많이 시문 되어 나타나고 있다. 三葉은 새의 나는 모습으로 볼 수 있고 새와 나무등이 모티브가 되는 토착적인 문양과 용, 봉황, 당초문등의 전형적 中國式 紋樣이 혼용되고 있음을 이시기에 볼 수 있다. ??당시 長劍이 보편적 무기였으나 환두대도처럼 고급스런 장식과 ?또한 古銅이 없다는 것은 전투용이 아니고 완전한 의장품임을 시사한다.삼국 시대에 이르러 방어 무구 뿐만 아니라 공격용 무기도 철제로 바뀌었다.특수 무구와 무기의 소유가 제한되고 남자 무덤 부장품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된다. 이 때의 무기 중의 하나가 환두대도이다.환두대도는 손잡이 끝에 둥근 고리가 있는 칼을 말한다. 이 둥근 고리 안에 장식 유무를 가지고 그 종류를 구분한다. 아무 것도 없으면 소환두대도, 세 잎이 벌어진 모양이면 삼엽환두대도, 둥근 고리 세 개를 품자형(品字形)으로 이어 붙였으면 삼루환두대도라고 명명한다. 그리고 장식대도의 경우에는 고리 안에 용이나 봉황을 제작하여 삽입하고 있는데, 그 형태에 따라 용환두대도(단룡, 쌍룡), 봉환두대도(단봉, 쌍봉), 용봉환두대도 등으로 분류한다.이러한 환두대도의 경우, 백제와 가야는 소환두대도→봉황문 장식대도→용문장식 환두대도의 서열이 있었으며, 신라는 삼엽환두대도 →삼루환두대도 →용문장식 환두대도의 서열 순이 있음을 보여준다.삼엽무늬 장식의 환두대도도 경주의 돌무지덧널무덤, 지방의 큰 무덤에서 많이 출토되었으며, 삼루 무늬 장식 환두대도보다 출토양이 많으며, 중형의 무덤에도 부장되어 있다.삼루환두대도는 경주의 대형 적석목곽분과 대구·경산·창녕·양산·부산 등 신라 지방의 큰 무덤에서 출토된다. 칼자루에는 금동판 또는 은판에 비늘 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신라 중앙 정부는 지방의 수장층들을 포섭·지배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무늬가 장식된 칼을 하사하고, 지방의 수장층들은 칼을 하사받아 그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삼기도 하였다.용봉환두대도는 환두부 표면과 칼자루에는 하늘을 나는 두 마리의 용이 서로 얽혀 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거나, 비늘 무늬가 있는 경우, 은을 상감하여 연꽃무늬·당초무늬·주작무늬 등이 장식되어있다. 용환두대도는 백제와 신라의 가장 큰 무덤에서 나오며, 특히 무녕왕릉에 부장된 것을 중시할 때, 왕들이 패용했던 칼이었음을 보여준다.이러한 환두대도는 실전에 사용되는 무기의 성격보다 사회 서열을 나타내는 위의구이며, 왕·귀족·수장 또는 군사지휘자 등을 상징하는 장식 칼이었다고 할 수 있다.소환두대도삼엽환두대도삼루환두대도용봉환두대도함안 도항리 6호경산 임당 C1-1호동래복천동 10‘11호합천 옥전 M3호단룡환두대도쌍룡환두대도단봉환두대도쌍봉환두대도공주 무녕왕릉출토지미상합천 옥전 M3호경주 안강환두대도는 형식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 대략 5가지 정도로 분류할 수 있는데 소환두대도, 삼엽문환두대도(삼엽환두대도), 삼루문환두대도(삼루대도), 용봉문환두대도, 규두대도 등이다.소환두대도(素環頭大刀)는 민고리자루칼이라고도 하며 가장 간단하고 단순한 형태이다. 즉 고리가 자루에 달려 있으며 고리 안에는 아무런 장식도 달려 있지 않다. 북한 사회과학원에서는 고리에 끈(또는 술)을 달아 풀어지지 않도록 손목에 감아 사용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중국에서는 고리에 오색 끈(또는 술)을 달아 화려하게 보이도록 장식을 했다고도 한다. 기원후 7C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사마르칸트의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에는 고구려 사신으로 추정되는 두 명의 사절이 보이는데 두 명 모두 환두대도를 차고 있으며 칼코등이 보인다.??????http://www.orientarch.uni-halle.de/에서 따옴.고구려 추정 사신들삼엽문환두대도(삼엽환두대도)는 고리 자루 안에 세 잎사귀 모양의 조각이 들어간 것을 지칭하며 이런 종류의 환두대도는 중국 집안 지역과 북한 그리고 한반도 중남부에서 출토되어 발견된 예가 있다. 특이한 점은 고구려의 경우 상당히 실용적인 것을 강조한 것으로 생각되며 이것은 장식대도가 한 점도 출토되지 않는 것에서 유추할 수 있다.삼루문환두대도(三累文環頭大刀, 삼루대도三累大刀)는 고리자루 세 개가 맞물려 品자 모양을 하고 있으며 이것은 한반도 남부 쪽의 신라 가야 백제 문화권에서 발견되고 있다. 그래서 추정하는 사람에 따라 이러한 유형의 환두대도는 장식적인 측면이 강해 지방 귀족 세력에게 내려준 위세품의 일종으로 보기도 한다.???????????????????????????????????? http://myhome.hanafos.com/에서 따옴.??????????????????????????부산 복천동 고분군 10, 11호분 주곽 출토 삼엽(左) 및 삼루문 환두(右)??용봉문환두대도(龍鳳文環頭大刀)는 칼자루 고리 장식에 용이나 봉을 조각한 것으로 용과 봉이 함께 조각되기도 하고 각각 따로 조각되기도 한다. 용 한 마리만 조각되었을 때는 단룡문환두대도 봉 한 마리만 조각되었을 때는 단봉문환두대도라고 지칭한다. 그리고 용이 두 마리 일 때는 쌍룡문 봉이 두 마리일 때는 쌍봉문환두대도라고 한다. 이 용봉문환두대도는 피장자의 권위가 가장 큰 것으로 해석되는 유물이며 대표적인 것으로는 충남 공주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단룡문환두대도가 있다.???http://bingoimage.naver.com/에서 따옴.공주 무령왕릉 출토 단룡문환두대도규두대도는 칼자루가 각이 진 모양으로 되어 있으며 둥그런 구멍이 간단하게 나 있는 형태를 띠고 있다. 규두대도는 일본 남부에서 특히 큐슈를 중심으로 다수가 출토되었으며 한반도에서는 전라남도 나주를 중심으로 출토되었다. 그래서 규두대도는 마한(馬韓) 세력의 위세품(威勢品: prestige goods)으로 여겨지기도 한다.한국과 일본의 환두, 규두대도 (http://www.nonsanmuseum.net/에서 따옴)이 밖에 도깨비가 새겨진 귀면문환두대도가 있는데 이것은 벽사의 상징으로 생각되며 특수한 형태로 여겨지고 있다.그렇다면 이러한 환두대도의 의미는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