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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 버터플라이
    「M 버터플라이」를 보고“모든 수용되는 것은 수용자의 양식에 따라 수용된다”라는 라틴 격언은 학문 일반에 폭넓게 적용될 수 있다. 지식과 권력 사이에 존재하는 은밀한 거래를 무시하더라도 이념형이라는 사고의 틀을 가지고 접근해 나가는 각종 분과 학문은 이미 특정 부분을 취사 선택함과 동시에 특정 부분을 삭제하거나 은폐한다.미적 표상으로서의 동양을 강조하거나 숭배하는 태도 역시 이런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가라타니의 지적이다. 그의 논리에 따르면 미적 대상으로 추앙하는 것은 반대로 과학적 대상으로 내려다보는 일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깔보고 무시하는 것과 특정 부분을 부각시켜 추켜세우는 것은 일종의 동어반복이라는 것이다.사실 미적인 쾌의 대상으로 동양을 인식하는 태도는 동서양에 대한 기계적 이분법에 빠져 있는 파시스트의 태도에 비한다면 진일보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면죄부를 줄 수는 없는 이유는 그러한 인식이 미적이라는 이름으로 현실 속에서 엄연히 존재하는 개개인을 무시하고 왜곡하는 기능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왜곡은 또다른 이름의 파시즘이고 소극적 형태의 변종 식민주의와 같기 때문이다.「M. 버터플라이」의 등장인물인 르네의 경우를 보면, 그가 적극적인 노력의 결과로 중국의 미적 가치를 인지해 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오히려 발전/저발전, 가르침/배움, 동적/정적 등과 같이 소박한 수준의 이해에 머물러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그의 인식 차원은 피상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다. 그것은 중국의 미적 전통에 대한 그의 이해 수준이 낮았고 진지하게 접근하려는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것은 도수가 맞지 않는 안경을 쓰고 사물을 바라볼 때, 정확하게 초점을 잡을 수 없는 것처럼 그가 쓰고 있는 안경으로는 중국을 제대로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초래한 결과이다.이런 르네의 태도는 극중 상대역인 송릴린과의 대화에서도 쉽게 드러난다. 송릴린이 열연한 오페라를 보고 동양 여인의 순수한 희생이 감동적이라고 표현한 것이나, 아름답다고 말한 것을 가지고 그가 동양을 미적 대상으로 한정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서양인들이 가지고 있는 무의식적이고 간편한 느낌을 표현한 것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동양의 코드를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동양을 해석하는 것은 엉뚱한 결과를 낳거나 일반적인 수준의 평이한 결과를 낳을 뿐이다. 르네의 동양에 대한 왜곡된 이해는 종반부에 제시된 비극적 자살의 근본적인 원인이 된다고 보인다. 르네는 가라타니의 말을 그대로 옮기면 괄호 묶기에 의해 발견된 것을 타자 그 자체와 혼동하고 마는 실수를 범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이처럼 서양인에게 나타나기 쉬운 것이 동양에 대한 일종의 환타지(fantasy)가 아닐까 한다. 르네는 “나에게는 동양에 대한 영상이 있어요”라고 말한다. 여기서 본인을 파국으로 이끈 왜곡된 이미지는 아름답고 추억할 만한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사실 르네가 갖고 있다는 영상에는 사랑이 매개되어 있기 때문에 스스로는 객관적으로 그 영상을 해부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다른 대사를 들어보면 그의 영상은 동양 여성에 대한 왜곡된 성적 이미지와 맞닿아 있기 때문에 수정되어야 할 부분이며 비극의 단초인 것이다.서양의 지도편달을 받아야 하는 미개발된 거대한 땅, 중국은 아직 미숙한 처녀와도 같다. 르네가 사랑한 송릴린 역시 아직 남자를 모르는 처녀이며 르네는 그런 그녀를 가르침을 기다리는 순진한 여학생 같다고 생각한다. 송릴린은 “동양은 언제나 강한 자에게 매력을 느낀다”고 화답하며 강함과 정복의 주체인 서양과 르네를 일치시켜 다시 한번 환타지를 강화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송릴린 이외 스치듯이 지나가는 르네 다른 백인 여성과의 혼외정사 장면이 무미건조하고 기계적인 행위로 묘사되는 반면 송릴린과의 사랑이 꿈꾸듯 묘사되는 것 역시 환타지를 강화하는 기제로 등장하고 있다. 남녀 관계에 있어서도 동양인과 서양인은 전인격적인 일대일의 만남이 아니라 상하 수직적 관계이고 어느 한쪽의 완벽한 투항이 이루어진 이후에야 온전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영화에서는 송릴린이 “당신께 나의 부끄러움까지 모조리 드렸어요”라는 투항의 말을 전한 후에야 둘 사이의 관계는 급진전하게 되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사실 르네가 송릴린에게서 동양의 미적 가치를 추출해 냈다고 까지는 보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백보 양보해서 그의 행동이 괄호 묶기를 거친 것이라고 본다면, 영화의 몇 가지 장면들은 쉽게 이해될 수도 있다. 베이징에서 정치, 군사적인 목적을 가지고 정보 수집 활동을 하는 르네와 송릴린을 보기 위해 베이징 극장을 찾아가는 르네 사이에서 보이는 괴리감을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이다. 제국주의의 이익을 위해 중국을 이용하는 활동과 중국의 다도를 즐기는 활동이 병행될 수 있는 이유는 후자가 심미적인 것으로 승화되면서 전자의 모순을 희석시키고 있기 때문이다.르네가 송릴린을 제외한 나머지 중국인들에게 무관심한 것, 때로는 그들에게 무례한 것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심미주의가 제공하는 환상과 망각은 그것의 테두리를 넘어선 영역에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상하관계에 기반한 행동을 쉽게 허용한다는 것을 르네는 보여주고 있다. 르네가 문화혁명의 홍위병을 보면서 적이 당황했던 것은 심미적 대상의 범주 바깥에 위치했던 일반 대중의 폭발적이고 능동적인 면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수동적이고 정적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에서 새로운 특성을 발견했기 때문이라는 말이다.이처럼 비서양인을 지적, 도덕적으로 열등한 인간으로 간주하는 것 이상으로 지적, 도덕적으로 열등한 그 타자를 미적으로 숭배하는 것 역시 타자를 종합적으로 올바르게 이해하는 데는 장애가 된다. 지적, 도덕적 판단을 의도적으로 제외한 후 발견되는 것을 그 자체와 혼동하는 실수를 범하기 쉽기 때문이다.
    사회과학| 2003.12.17| 3페이지| 1,000원| 조회(5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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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감상문] 무진기행 평가A좋아요
    매우 절친하게 지내는 한 선배가 있다. 그는 술을 좋아하고, 신촌 블루스의 '바람인가 빗속에서'를 즐겨 듣는다. 그는 힘든 일이 있거나, 삶이 비루해지거나,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으면 어디 크게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음침한 술집으로 기어들어가 신촌 블루스의 노래를 신청해 놓고 맥주를 들이키며 나를 불러내곤 한다. 그 술자리는 오로지 그와 나 뿐이어야만 한다. 나른하게 비비적대며 망가지기에는 나는 딱 좋은 상대이기 때문이기도 하려니와, 솔직히 그런 모습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게 되면, 십중팔구 무슨 고민 있냐고 무어올 것이 뻔하고, 그는 그런 질문을 귀찮아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에게 묻지 않는다. 나도 술을 좋아하고, 신촌 블루스의 '골목길'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선배가 '胎'라는 술집으로 나를 불러내어 우리는 반쯤 풀린 눈으로 신촌 블루스의 노래를 연달아 감상하고 있었다. 나는 그 술집에 가면 정신이 몽롱해지고 마는데, 그 술집은 쾌쾌한 담배 연기보다 향내가 진동을 하는 술집이기 때문에 그렇다. 거참 묘한 분위기이다. 술집이름은 탄생을 의미하고, 겉치장은 마치 어머니의 자궁 속으로 기어들어가는 분위기를 연출하면서도, 냄새는 죽어서 맡는 향내를 내 뿜고 있으니 말이다. 나는 이 향내가 싫다. 7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검게 차려 입고 장례식에서 흠뻑 취해 정신없이 사흘을 치러 냈던 마취제와 같은 향내의 매퀘함이 아직 머릿속에 남아 있기 때문이리라. 어쨌든 난 결코 그 술집에서 신이 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럴 때면 항상 조용하던 선배가 여전히 나른한 눈빛으로 나에게 말을 걸어오기 시작하였다.하영아, 넌 무진에 가봤냐?무진? 무진이 어딘데?나도 몰라.전남 어딘가에 있는 거 아닌가?그럴지도.근데 거기는 왜?거기는 안개가 많이 낀대.갑자기 안개는 왜?내가 지금 무진에 있는 건지, 서울에 있는 건지 모르겠다.…그 선배는 우울해질 때마다 『무진기행』을 읽는다고 한다. 왜 하필이면 『무진기행』이냐고 묻자, 『무진기행』을 읽어서 싸고 있는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의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 내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 버릴 수가 없었다.사람들은 어떤 장소에 의미를 부여하고 신성시하는 경향을 가진다. 그런 의미에서 무진은 매우 신비로운 곳이고, 음침한 곳이기도 하고, 태초의 어머니의 자궁과도 같은 곳이다. 무진의 안개는 모든 것을 잠들게 하고, 감추고, 적시는 것이다. 또한 안개는 인간을 고독 속에 빠지게 한다. 주변의 모든 것을 감추어 버리고 자신만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마력과도 같은 것이고, 작품 속의 표현처럼 귀신의 입김일지도 모른다. 이 작품에서 안개는 가장 중심이 되는 이미지이다.주인공은 서울에서 실연 뒤, 어느 부잣집 과부와 결혼을 해서 탄탄대로를 걷고 있다. 장인 어른의 덕으로 전무에 오르기 직전에 있으며, 그러한 성공 앞에 '안색이 안 좋아지는' 정신적 괴림감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잠깐 쉰다는 핑계로 무진을 찾는다. 그러나 그의 고향 무진은 그에게 편안한 유년의 기억으로 남아 있지는 않는다.그 때는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였다. 6·25사변으로 대학의 강의가 중단되었기 때문에 서울을 떠나는 마지막 기차를 놓친 나는 서울에서 무진까지의 천여 리 길을 발가락이 몇 번이고 불어터지도록 걸어서 내려왔고, 어머니에 의해서 골방에 쳐박혀졌고 의용군의 징발도 그 후 국군의 징병도 모두 기피해 버리고 있었다. … 모두가 전쟁터로 몰려갈 때 나는 내 어머니에게 몰려서 골방 속에 숨어서 수음을 하고 있었다.주인공에게 무진은 홀어머니의 기억이고, 안개는 홀어머니의 이미지이다. 자기를 가두어 놓고 아무도 볼 수 없게, 숨겨두는 이미지.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셨고, 그는 어머니의 무덤으로 기어들어가고 싶어 하지만, 그에게 무진은 안개가 있기 때문에 어머니라고 부를 수 있다. 안개는 언제나 그를 물고 교미를 하고 있었다.2. 그녀에게서 나를 보았다.무진에 이르는 동안의 기억들과 이미지들이 지난 후에는 좀 더 현재적 시각에서의 무진에서의 며칠이 전개 된다. 고등고시에 합격한 세속에 찌들지 못해 안달이 난 세무서장과, 그 세무서장에게 꼬리를 치는 음악선생과 그 음악선생을 짝사랑하는 국어 선생 박. 이들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주인공은 그 동안 고향을 거의 방문하지 않았다. 별로 들추어내고 싶지 않은 고향일 것도 같다. 역시, 주인공은 고향 붕우들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들이 의용군이었건, 국군이었건, 주인공은 단지 방속에 쳐박혀, 오욕과 일기만을 휘갈겼을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좀 다르다. 주인공은 잘나가는 '서울 손님'이고 묘한 삼각관계의 밖에 서서 그들을 관찰하면서도 언제든지 여선생을 유혹할 수 있는 우월한 위치이다. 그리고 그는 어느 정도 성공을 한다. 서울로 데려가 달라는 그녀와 정사를 나누게 되고, 그녀의 애원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무진 사람이 아닌 '서울' 사람이다. 그렇게 그의 고향은 서울을 동경하고 있었다. 그러나 결코 주인공은 무진에서 자유롭지는 못하다.나는 그 도달할 길 없는 거리를 보는 데 홀려서 멍하니 서 있다가 그 순간 속에서 그대로 가슴이 터져버리는 것 같았었다. 왜 그렇게 못 견디어했을까. 별이 무수히 반짝이는 밤하늘을 보고 있던 옛날 나는 왜 그렇게 분해서 못견디어 했을까.무진에 사는 사람들은 개구리 소리를 듣지도 못하고 별을 보지도 못한다. 그러나 무진을 떠나서야 비로소 별과 개구리가 마음속에서 새로 자리 잡는 것이다. 개구리도 별도 서울에는 없는 고향의 이미지이다. 주인공은 안개의 흐릿함과 적막 속에 갇혀 잠을 이루지 못한다. 적막 속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동안 자신의 유년의 기억을 떠올려 준 미친 여자는 음독을 하였다.이슬비를 맞으며 그는 어머니의 묘지를 찾아간다. 무덤의 긴 풀을 뜯으며 자신을 전무로 만들어 줄 장인을 생각하며 '묘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그런다. 다시 어머니가 자신은 그에게 태워버린 일기와 찢어버린 편지와 같은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이정표인지도 모를 일이다.3. 서울 1964년 겨울1964년 겨울을 서울에서 지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겠지만, 밤이 되면 거리에 나타나는 선술집-오뎅과 군참새와 세 가지 종류의 술 등을 팔고 있고, 얼어붙은 거리를 휩쓸며 부는 차가운 바람이 펄럭거리게 하는 포장을 들치고 안으로 들어서게 되어 있고, 그 안에 들어서면 카바이드 불의 길쭉한 불꽃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고, 염색한 군용잠바를 입고 있는 중년사내가 술을 따르고 안주를 구워주고 있는 그러한 선술집….안개 속에 모든 것이 감추어지는 무진과는 달리, 1964년의 서울은 카바이드 불킹에 모든 것이 드러나는 곳이다. 선술집에는 누구나 드나들며 우연히 만난 사람과 술잔을 기울이며 우연히 헤어지고 다시 우연한 만남을 만들어 가는 곳이다. 그 서울에서 주인공과 대학원생은 불쌍한 처지의 한 사내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의 몰락에 동행을 하게 된다.서울. 붐비는 버스에 올라타 뭇처녀들의 가슴살에 팔뚝을 비비어댈 수 있는 곳이다. 숨가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아랫배의 들썩거림을 느낄 수 있는 곳이고, 그 꿈틀거림 속에서 데모를 느끼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렇다 작가는 데모가 그런 생존에의 본능이라고 잠깐 언급하고 있다."그렇죠?"나는 즐거워졌다. "그것은 틀림없이 꿈틀거림입니다. 난 여자의 아랫배를 가장 사랑합니다. 안형은 어떤 꿈틀거림을 가장 사랑합니까?""어떤 꿈틀거림이 아닙니다. 그냥 꿈틀거리는 거죠. 그냥 말입니다. 예를 들면…데모도…""데모가? 데모를? 그러니까 데모…"그러나 거대한 도시는 모든 것을 획일화 해버리는 곳이기도 하다. 그들은 이 거대한 곳에서 자기만의 것들을 찾아 나서기 시작한다. '평화시장 앞에 줄지어선 가로등 주엥서 동쪽으로 여덟 번 째 등이 불이 켜져 있지 않'고, '화신 백화점 육 층의 창들 중에서는 그중 세 개에만 불빛이 나오고 있'었고, '서대문 버스 정거장에는 사람이 서른 두 명 있는데 그 중 여자가 열일곱 명자 병원이 있고, 화신백화점이 있고, 영보 빌딩이 있고, 단성사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 사람에게는 이름이 없다. 술집의 미자는 먼저 들어오는 순으로 큰 미자가 되고, 둘째 미자가 되고, 셋째 미자가 되고, 넸재 미자가 되며 막내미자가 될 뿐이다. 또한 도시의 시간에는 어스름 저녁도 없고, 이른 아침도 없다. 그들의 기억은 정확히 시간화 되어 존재한다. '오늘 저녁 일곱시 십오분 현재입니다.', '그건 언제?', '지난 십사일 저녁 아홉시 현재입니다.' 이들은 끊임없이 시간을 확인하고, 그 시간을 거짓말일지라도 정확히 기억해 낸다. 그러나 이런 기억이 그리 새로울 것이 없다. 도시인들은 결국 시계바늘에 맞추어서 살아가는 삶이기 때문이다.4. 앗아가는 공간그들의 유쾌한 도회적인 대화에 어떤 사내가 불쑥 끼어든다. 그는 그들과 함께 돈을 다 써버리고 싶다고 말한다. 사내들은 미심쩍어 하면서도 그의 뜻에 응하게 된다. 중국집에서 술을 함께 하며 얻어낸 그 어떤 사내는 오늘 자기의 아내가 죽었노라고 털어 놓는다. 그리고 아내의 시체값으로 받은 4000원을 오늘 밤 안에 다 써버려야겠다고 말한다. 인간의 몸둥아리가 4000원이며, 인간의 몸값은 도시에서 하룻밤 여흥비 정도밖에 안된다는 것을 이야기 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러나 도시는 어떤 사내의 상처의 슬픔도 도시의 유희에 젖어들다가 어떤 사내를 만나 당황하는 사내들에게도 항상 같은 장사치의 미소를 던지고 있을 뿐이다.중국집에서 거리로 나왔을 때는 우리는 모두 취해 있었고, 돈은 천원이 없어졌고 사내는 한쪽 눈으로는 울고 다른 쪽 눈으로는 웃고 있었고, 안은 도망갈 궁리를 하기에도 지쳐버렸다고 내게 말하고 있었고, 나는 "악센트 찍는 문제를 모두 틀려 버렸단 말야, 악센트 말야"라고 중얼걸리고 있었고, 거리는 영화광고에서 본 식민지의 거리처럼 춥고 한산했고, 그러나 여전히 소주 광고는 부지런히, 약 광고는 게으름을 피우며 반짝이고 있었고, 전봇대의 아가씨는 '그저 그래요'라고 웃고 있었다.이 얼나마 서글픈
    독후감/창작| 2002.10.12| 8페이지| 1,000원| 조회(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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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 문학과 사회의 관계 평가C아쉬워요
    문학과 사회의 관계예술의 하나로서, 문학은 사회적으로 결정되면서, 또 늘 새로운 것이다. 문학은 사람이 사는 세계를 믿을 수 있는 완결감을 보여주면서 묘사하려고 한다. 이 세계가 반드시 현실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고 다분히 상상적이고 가공적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동시에 작가가 살고 있는 생활세계를 반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호머의 '오딧세이'의 세계는 조이스의 '율리시스'의 세계와 다른 것이고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 등장하게 된 것은 자본주의가 심화되고 있는 한국사회와 결코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문학이 사회에 간단히 종속될 수 있는 대상적 산물은 또한 아니다.현실세계 또는 허구세계에 대한 작가의 인식은 그의 체험에 의해 원근법을 달리 하는데, 이것은 작가의 시점에 의해 불가피하게 한정될 수밖에 없다. 시점은 소재에 대한 태도, 소재의 선택, 생의 공간, 근본적인 삶의 방향 설정 등에서 직간접으로 드러나는데 이러한 시점은 개인적인 역사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지만, 개인의 역사는 사회적 신분의 공간 속에서 양성되는 것이므로 사회적 위치에 의해 상당히 한정되는 것이라 하겠다. 이처럼 소재의 사회적 관련은 비교적 자명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문학이 사회의 단순한 반영은 아니고 그 반영의 충실성이 작품의 근본적인 매력도 아니다.문학이 사회의 단순한 반영이 아니라고 할 때, 그렇다면 문학이 시대와 사회를 초월하여 지속적인 감동을 주는 이유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예술의 영역으로서 문학에서 발견할 수 있는 고유한 성격 혹은 감동을 주는 요인은 우선 그것이 '자아의 세계'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문학이 사물이나 세계에 대하여 관심을 갖는 것은 어디까지나 개체적 또는 실존적 인간의 관점에서 체험된 세계에 대하여서이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이러한 개체 역시 사회적으로 형성된 눈으로 자연을 보고 사회를 본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다시 말해 사람은 사회를 원근법적으로 체험한다는 것이다. 감동의 또 다른 요인으로 감각과 행동이 있다. 감각적 체험은 만인 공통의 것이면서 극히 개인적인 체험이다. 행동은 목적을 위한 현실에의 개입 또는 지향성을 의미하며 문학에서는 이러한 일의 성취와 실패, 감정과 의식의 만족과 좌절을 다루어 왔다. 하지만 이러한 구체적 목표와 지향성이 의미하는 것은 인간은 끊임없이 밖으로 내던져진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때 밖이라 함은 사회이거나 물리적 환경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문학이 시대와 사회를 초월하여 지속적인 감동을 줄 수 있는 것은 그것의 영속성을 의미하는 것이지 그것이 시대나 사회를 떠나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예술이 사회에 간단히 종속될 수 있는 성격은 아니지만 그것과 동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문학과 사회의 관계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소재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소재로 등장하는 외부세계나 외부세계에 대하여 반응하는 주체적 체험의 양식이 사회적으로 규정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사고의 이데올로기적인 성격을 고려한다면 구체적 생존의 상황 속에 박혀 있는 인간에게 고도비행의 사고는 불가능한 것이다. 모든 구체적인 생존은 시간적 공간적 상황 속에 갇혀 있으며, 이 갇힌 입장으로부터 퍼져나가는 의도와 의식의 백터에 따라 원근법적으로 전체적인 상황의 인식에 접근한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비교적 굳어져 있는 사회적 범주가 규정하는 원근법 못지않게 나름의 해석을 유도하는 주체의 전체화 작용이다. 사람의 삶은 개인적 환경, 소속 계층, 민족 문화에 따라서 유형적으로 나타나면서도 동시에 이러한 범주를 종합화하여 하나의 일관된 생존의 구도로 현재화한다는 점에서 자유롭고 유일한 것이다. 이러한 역설적인 전체화 작용은 루카치의 변증법 골드만의 세계관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인문/어학| 2002.05.31| 1페이지| 1,000원| 조회(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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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고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고10월 12일내 마음속에서 오시안이 마침내 호메로스를 쫓아버렸다. 그 얼마나 굉장한 세계 속으로 이 영웅이 나를 끌어들이는가! 오시안은 자욱한 안개에 싸여, 어스름 달빛 속에서, 선조들의 영혼을 이끌어가는 비바람에 휘말리면서 끝없는 황야를 방랑한다.……아아, 친구여, 나도 숭고한 용사의 한 사람이 되어 검을 뽑아들고 서서히 숨을 거두는 단말마의 고통으로부터 우리 영주 오시안을 단번에 해방시켜 주고 싶다. 그리고 해방된 그 반신(半神)의 뒤를 쫓아 나 자신도 저승으로 건너가고 싶다.너무나도 우연스럽게 나는 어제 -같이 술자리도 가진 적이 있는- 한다리 건너서 아는 한 후배의 자살 소식을 들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고 또 읽으며 베르테르의 '자살'에 대한 에세이를 써야하는 이 시점에서 말이다. 사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내가 가장 관심을 가지고 고민했던 부분은 '자살'이었다. 베르테르만큼 슬픈 연애 한번 안 해본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의 가치관과 심미안에 감탄하지 않을 사람은 과연 몇 명이나 될 것인가. 작품은 베르테르의 죽음을 해결책으로 제시해 놓았고, 그것을 미화 내지는 승화시키고 있지만 난 동의할 수가 없다.그의 자살은 필연적으로 그렇게 되어가게끔 그려져 있으며 베르테르의 항변 역시 쉽게 뚫을 수 없는 구조이다. 죽겠다, 죽겠다 얘기하는 사람은 절대 죽지 않는다는 일반적 역설을 비웃듯 베르테르가 선택한 죽음은 그의 의지의 약함이라고 볼 수도 없다. 여기에 나의 고민과 '슬픔(?)'이 있다. 차근차근 그의 궤적을 따라가며 그것을 분석하여 내어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어느 정도까지 베르테르에게 동정의 지지를 보낼 것인가' 혹은 '어디까지 동의할 수 있는가' 나는 오시안을 인용함으로써 이 질문을 이미 시작하였다.베르테르가 자연을 바라보는 태도는 그의 심리적 상태를 대변한다고 볼 수 있으며 분명히 자연과 자신의 감수성을 동일시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은 변해갔다. 그가 바라본 자연은 그대로 있었지만 그의 태도는 영원한 환희 속에 떠돌게 하면서, 우리를 떠받들어주고 있는 절대 자비하신 분의 입김을 느낀다. 그럴 때면, 벗이여, 내 두눈의 언저리에는 황혼이 서리고 나를 에워싼 세계와 하늘은 마치 그리운 애인의 그림자처럼 완전히 내 영혼 속에서 고이 쉬는 것이다.그는 떠나서 온 '이곳'에서 '족장 시대의 광경'을 구경할 수 있었다. 그리고 끓어오르는 그의 가슴을 호메로스라는 자장가를 통해 가라앉힐 수 있었다. 완결되어 있는 서사시의 세계, 재현이 불가능하지만 주·객관이 합일을 이루고 있는 방황과 외로움을 모르는 세계, 도란도란 앉아서 완두콩을 까먹던 화목하던 자연의 세계를 찾아 그는 떠나서 왔고 안정된 상태에 있었다. 로테를 만나고 난 다음에도 이러한 그의 자연관은 변함이 없다. 대체로 족장시대의 생활만큼 조용하고도 참된 기분으로 내 마음을 벅차게 해주는 것은 없으며, 다행이도 나는, 지금 그것을 허심탄회하게 내 생활 양식 속에 엮어 넣을 수 있는 것이다. 적어도 로테와의 슬픈 운명을 깨닫기 전까지는.그런 베르테르가 우울한 낭만적 정서를 이루는 죽음의 노래인 오시안을 애독하기 시작했다. 격동적이고 그가 갖고 있는 내적인 에너지를 충동질시키는 눈에 보이지 않는 힘. '사람은 무엇을 읽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을 참 신선하게 배웠었는데, 슬픔을 알고 베르테르가 읽은 책, 자신의 감수성과 동일해진 자연, 그리고 그 정서를 느끼는 통로가 만가(elegy)였다는 점은 그의 죽음을 암시하고 그 필연성에 힘을 실어주는 듯하다. 그의 자연관 혹은 생명관, 세계관에서 삶이란 생령이 있는 육체를 넘어서는 무엇이다.여기서 중요하게 살펴보아야 할 것은 그의 성격이다.아아, 나의 벗들이여, 무엇 때문에, 천재의 물결이 둑을 뚫고 터져나와 큰 홍수를 이루며 콸콸 쏟아져 내려와서, 그대들의 영혼을 뒤흔들어놓는 일이 이렇게도 드물단 말인가! 사랑하는 벗들이여, 천재의 흐름 양쪽 기슭에는 태연자약한 신사들이 산다. 그들은 자기들의 정자나 튤립 꽃밭, 채소밭 등이 혹시나 못 쓰게 될까 봐, 서둘러 둑을 쌓겠다!베르테르의 성격은 알베르트의 그것과 두드러진 대조를 이룬다. '불안정'한 베르테르와 달리 알베르트는 침착하고 용의주도하다. 그들이 자살에 대해 다투는 8월 12일의 편지는 그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알베르트는 인간이 스스로의 목숨을 끊을 만큼 어리석을 수 있다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어요, 그런 생각을 하기만 해도 나는 아주 불쾌해요 그리고 특정한 종류의 행위는 그것이 어떤 동기에서 나왔든지 간에, 언제나 죄악임에는 변함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겠지요, 적어도 지금 우리가 문제삼고 있는 자살만 하더라도 당신은 그것을 위대한 행위와 비교하지만, 이것은 절대로 옳지 못해요, 뭐니뭐니 해도 자살이란 결국 나약함 때문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기 때문이에요. 괴로움에 가득 찬 삶을 꿋꿋하게 참고 견디어나가기보다는 차라리 죽는 편이 더 쉬우니까요. 베르테르는 어떠한가. 아아. 당신들 이성을 잃지 않는 사람들이란!, 당신은 그것을 나약이라고 부르는가요? 제발 겉모양만 보고 속지 않도록 하시오. 폭군의 참을 수 없는 압정하에 신음하던 국민이 마침내 궐기하여 그 속박의 사슬을 끊어버리는 경우에도 당신은 그것을 나약이라고 할 것인가요.……그리고 여보시오, 노력을 강점이라고 하면서, 어찌하여 지나친 긴장은 그와 반대로 나약이라고 해야 하나요?, 따라서 나는 자기의 목숨을 스스로 끊는 사람을 비겁하다고 부르는 것은 마치 악성 열병에 걸려 죽어가는 사람을 겁쟁이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라고 태연자약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오히려 한심한 사람이지요. 알베르트는 매력적인 인물이다. 그는 이성적 충고에 따르는 '쓸만한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알베르트는 '우리별' 사람이 아니다. 나는 '그러나 애인으로서의 그는 그것으로 끝장이다. 만일 그가 예술가라면, 그의 예술도 마지막이지'라는 베르테르의 분류에 동의하는 쪽이다. 감수성이 예민한 베르테르에게는 죽음이 최선의 선택일 수도 있다. 그에게 있어 죽음이란 '육체의 파멸' 그 이상의 것 운명에는 눈물을 아끼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나는 베르테르의 정신과 성품에는 동정과 지지를, 그의 운명적인 사랑과 그 표현에는 감탄과 찬사를 보낸다. 로테에 대한 설명과 그의 사랑에 대한 아름답고 놀랄만한 서술들을 우리는 책 속에서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다.(아니 이 책 전체가 그것이다.) 베르테르와 로테는 처음 만나는 날부터 서로가 여러 가지를 공유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소설, 춤, 분위기... 될 사랑은 몇 마디만 해봐도 통하는지 알 수 있다. 클롭슈토크! 눈물을 주르르 흘리며 그 장려한 송가(頌歌)를 서로 나누었는데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하랴! 그 공감을 난 이해할 수 있다. 지면이 모자라더라도 꼭 남기고 싶은 베르테르의 표현들이 있어 잠깐 옮겨본다. 그런데 한가지 바람이 있습니다. 제게 보내시는 편지지에는 앞으로 모래를 사용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 편지를 받자마자 입술에 갖다 대었다가 그만 모래를 으드득 씹었답니다., 당신이 눈을 뜨고 있는 모습을 쳐다보고 있는 동안, 그 동안에는 잠들 염려는 없습니다. 그리고 베르테르의 자기애는 사랑 이후 얼마나 증가했었는가. 나를 사랑한다! 그녀가 나를 사랑하게 된 이후 라는 인간이 얼마나 귀중한 존재가 되었는지 모른다. 나는 얼마나-자네는 그것을 이해해 줄 만한 사람이니까, 이런 말을 해도 상관없겠지-나는 얼마나 스스로를 존경하게 되었는지 모른다 베르테르가 좌절을 느끼기 전까지 로테와의 사랑은 완전한 합일, 일치의 모습을 보여준다.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동시의 불행의 원천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과연 변할 수 없는 것일까?'라는 질문을 시작으로 베르테르의 좌절은 시작된다. 나는 여기에서 로테의 사랑을 잠깐 살펴보고자 한다. 사실 우리가 로테의 심정에 대해 알 수 있는 부분은 그다지 많지 않다. 베르테르가 마지막으로 찾아와 그가 번역한 「오시안의 노래」를 장엄하고 진지하게 읽는 대목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로테의 베르테르에 대한 사랑을 그나마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그녀는 베르테르를 자기 곁러나 그녀 역시 슬픔 속에 살아갈 것으로 보인다. 로테의 집에 있다가 미쳐버린 사람도 잠깐 나오는데 아름다운 그녀는 너무 아름다웠기에 슬플, 다른 사람도 슬프게 만들 운명인가 보다. 베르테르의 죽음의 가장 핵심적인 원인은 바로 사랑이다. 나는 아름다운 사랑과 그 슬픈 운명과 결말에 깊은 동정심을 느낀다. 그러나 그 사랑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다는 필연적 귀결로의 유도에는 아직도 의문을 갖고 있다. 하지만 나는 알베르트처럼 '자살'에 대한 쉬운 정의는 거부한다. 죽음을 선택한 사람의 결단까지의 과정은 오죽하겠는가?한가지만 더 살펴보아야 할 것은 베르테르의 계급적 위치와 갈등이다. 그가 발하임을 떠나 공사(公使)와 함께 일하게 되었을 당시 그는 심한 불쾌감을 느낀 파티에 참석을 한다. 그는 귀족계급들이 참석하는 파티에 참석하였다가 모욕을 받고 쫓겨 나오다시피 하는데, 이것은 시민계급으로서 그가 느꼈던 평소의 불만의 중요한 한 예에 지나지 않는다. 원래 지위라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며 가장 상석을 차지하고 있다고 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일은 아주 드물게나 있는 일인데……얼마나 많은 제왕들이 장관에게, 그리고 얼마나 많은 장관들이 비서에게 지배되고 있는가! 그렇다면 제일 상위를 차지하는 자는 과연 누구일까? 그것은 남들보다 뛰어나게 통찰을 하고 남들을 손아귀에 장악하여 스스로의 계획을 성취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들의 힘과 정열을 집중시킬 수 있을 만한 수완과 지략을 갖춘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는 시민계급이 정신의 우수성에서 우위에 있다고 생각했으며, 심한 모욕감에 미칠 듯이 들끓었을 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귀한 혈통의 말은, 무섭게 몰아대서 흥분하게 되면 본능적으로 스스로 혈관을 물어뜯어 숨을 돌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도 역시 스스로 혈관을 끊어서 영원한 자유를 얻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베르테르의 이런 계급적 한계 또한 그의 자살과 연관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그가 처음 로테를 떠났을 때 사회적, 계급적인 좌절을 맛보
    인문/어학| 2002.05.21| 6페이지| 1,000원| 조회(5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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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 변신 평가A좋아요
    카프카 『변신』을 읽고『변신』은 짧다. 줄거리에 대한 요약으로 이 레포트 분량을 다 채울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그러나 『변신』은 또한 길다. 이 극단적이고 충격적인 에피소드에 대해 내릴 수 있는 해석은 모든 방향으로 열려있다. 자본주의, 현대성, 인간소외, 현대인의 일상, 타자와의 관계 그리고 그 기능, 권력관계…카프카가 『변신』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려 했던 것에 대한 분석은 전적으로 우리의 몫이다. 나는 『변신』을 가장 무난한 그리고 가장 범위가 큰 자본주의와 현대성, 그리고 그에 대한 등장인물들의 반응에 비추어 분석해보려 한다. 중간고사 기간이다. 빡빡한 시험공부와 대체 레포트, 그리고 미루지 못한 과외 아르바이트. 후배녀석은 나를 보고 일주일을 한달같이 산다고 했다. 갑자기 현대의 일상성에 대한 무의식적 탈출욕구에 대한 분석으로 이 레포트를 쓰고 싶어진다. 차라리 '변신'을 해버릴까? 아님 따분하고 지겹도록 갑갑했지만 군대생활로 돌아갈 수 있을까? 아냐 힘을 내자. 변심하지 않고, 먼저 살아갔던 카프카를 염두해두고 더럽고 냄새나는 죽은 벌레를 해부해보자.인터넷에서 찾은 『변신』관련 글에서 한 비평가는 변신이 완성되었던 1912년의 프라하와 1998년의 서울을 비교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86년이라는 시간적 거리에도 불구하고 그 두 곳에서 엿볼 수 있는 일상인들의 삶의 세목은 놀랄 만큼 유사하다.해고에 대한 두려움,회사에 지각하는 것에 대한 심리적 압박감,불경기,가족을 먹여 살리는 일의 지난함,자신의 직업에 대한 한탄,저 지긋지긋한 동시에 사랑스러운 가족,부모의 빚,현대인의 불안과 소외,그리고 석간신문과 전차,보험회사,자명종,하숙생,지배인,외판사원의 존재 등등.카프카의 「변신」이 진정한 고전으로 평가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현실감과 보편성의 확보에서 연유할 것이다…권성우 동덕여대 인문학부 교수현실감과 보편성. 그레고르가 불안한 꿈에서 깨어나 자기가 벌레로 변했음을 묘사하는 장면을 떠올려 보자.그는 갑옷처럼 딱딱한 등을 대고 누워 있었는데활절들로 나뉘어진 배를 보고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보인다. 이뿐 아니라 작품 곳곳에서 섬세한 육체감각을 다 동원하여 그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변신』을 현실감 있게 만들어주는 장치이다. 그러나 작품 구석구석에서 드러나고 있는 섬세한 감각의 촉수를 통한 세세한 묘사가 현실감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감각적 체험을 결을 통해 충실히 드러내주는 것이 문학 작품의 중요한 기능이기는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또 다른 현실감을 느끼게 하는 요소는 보편성이라 하자. 좀 이상한 사건이기는 하지만 이것이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는 것은 이것이 현대사회에 대한 성찰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1912년의 유럽을 '근대'라고 규정한다면 적어도 1998년 혹은 2001년은 '후기'근대 또는 '탈'근대이다. 공통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산업사회로 요약된다. 산업사회 속에서 모든 그레고르 잠자는 피곤하다. 아니 그가 피곤한지도 모르고 일할 수도 있다. 생산수단을 갖지 못한 채, 구상과 실행이 분리된 채 그의 일상은 그가 통제할 수 없는 궤적을 그리며 굴러간다. 이것이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의 인간소외이다. 그래서 우리는 『변신』을 현실감 있게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미묘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기든스의 이론을 빌리자면 오늘날의 현대는 '단순 근대'의 과거와 구별되는 '성찰적 현대'이다. 개인 역시도 성찰적 자아이다.기든스는 현대사회의 세 가지 주도적인 사회변동을 지적하고 있는데 그 첫 번째는 전지구화(globalization) 경향의 강화, 두 번째는 전통의 질서가 변화된 탈전통적 질서(post-traditional order)의 등장, 세 번째는 사회적 성찰성(reflexivity)의 확장이다. 이는 탈전통 사회에서의 개인은 자신의 삶의 조건과 연관된 다양한 정보를 여과하여 이를 기반하여 행위하는 것을 말한다. 기든스에게 이러한 현대사회는 인위적 불확실성(manufactured uncertainty)이 증대된 사회이다.현대사회학 이론, 기든스그는 현대사회에서 위험의 화되는가의 문제이다. 전지구화가 강화되고 전통적 규범이 소멸되며 자본주의적 상품화가 심화되는 '후기' 또는 '고도' 현대적 현실 속에서 자아는 보다 많은 선택의 기회를 갖게 되지만, 이와 동시에 어떤 것도 선택할 수 없다는 무력감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 답변이다. 후기 현대의 특징이 개인의 판단에 대한 최종적 권위가 부재한 것에 있다면, 자아는 이제 헌신과 무관심 사이에서 방황하는 딜레마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2001년도 판 『변신』이 누군가에 의해 창작되었다고 하자. 작가는 현대의 인위적 불확실성의 결과로 '벌레'로의 변신을 채택할 수 있다. 이미 성찰적 자아인 2001년의 '그레고르 잠자'는, 그러나, 1912년의 그레고르와 다른 방식으로 반응할 수 있다는 말이다.카프가의 그레고르는 벌레로 변한 다음 어떠했는가? 그는-그렇게 되도록 구상되었겠지만-무척이나 담담하다. '무슨 일일까?', '좀더 잠을 자서 이런 바보스런 일을 잊어버리도록 하자' 적어도 이것의 한 백배 정도의 놀라움과 참담함을 토로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그는 벌레로 변해버린 자신보다 외부의 환경에 더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회사에 지각하면 어떡하나라는 걱정에 온통 휩싸여 어떻게든 침대에서 벗어나 문을 열고 '출근'하려 하는 것이다. 그는 아직 '벌레'가 아닌 듯 하다. 지배인이 도착한다. 지배인은 업무상의 의무를 고약한 방법으로 태만하는 그레고르를 향해 협박같은 질타를 보낸다. 그레고르는 문을 열지 않고 벌레로 변한 '사소한' 일 때문에 해고 당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며 지금은 몸상태가 좋지 않지만 원기를 차리고 곧 회사에 스스로 나가겠다고 급하게 말하고 있다. 바깥의 사람들은 물론 알아듣지 못한다. 그레고르의 변화에 대한 낌새만 느낄 뿐이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 '사회제도와 인간의 관계', 그리고 '인간과 사물의 관계' 속에서 본래적인 의미의 '인간적인' 또는 본질적인 인간 그리고 관계를 찾을 수 없게 된다. 변종 또는 변태가 인간적인 또는 본질적인 히 사람이었다. 문이 열린다. 쓰러지는 어머니, 겁에 질려 도망가는 지배인, 그의 방으로 그레고르를 도로 밀어넣으려는 아버지… 타자에게 그레고르는 이미 벌레로 인식되고 있으나 그레고르는 여전히 사람이려 한다. 이 첫 번째 소동이 끝나기 전까지 그레고르는 사람에 더욱 가깝다.그레고르는 이상하게 절망하지 않는다. 누이동생이 갖다주는 음식이 입에 맞았으면 하고, 가족이나 주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살핀다. 그는 서서히 적응해 나가고 벌레가 되어간다. 물론 생각이 완전히 '벌레화'된 적은 없다. 가족들이 집안의 재정 형편과 전망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을 주의깊게 듣고 음악을 사랑하고 바이올린을 멋지게 켜는 누이동생을 음악학교에 보내겠다는 야심찬 계획, 크리스마스 저녁에 할 엄숙한 그 발표를 생각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벌레'처럼 누이동생에 민감해지고 차츰 자신을 사람들이 보기 싫어하는 존재로 '인식'하며 다른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 숨을 줄 안다. 심심풀이로 벽과 천장을 이리저리 기어 다니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 유쾌하게.가구를 치우려는 과정에서 어머니와 누이동생의 대화 내용을 듣고 그레고르는 생각한다.어머니의 이러한 말을 듣자 그레고르는 한 집 안에서 단조로운 생활을 하면서도 사람과의 직접적인 대화를 갖지 않아서 이 두 달 동안 자기의 머리가 뒤틀려진 것이라고 믿었다. 왜냐하면 자기 방을 치워 주기를 그가 진심으로 바랐다는 사실을 자신에게 다르게는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 따스한 방을 방해도 없이 사방으로 기어다닐 수 있고 자기의 인간으로서의 과거를 빨리 온통 잊게 되는 그런 동굴로 바꿔놓을 생각이었을까?… 가구가 무의미한 기어다니기 동작을 방해한다면, 그것은 손해가 아니라 큰 이익이 되는 것이다.반 벌레가 되었다.어머니는 그레고르의 모습을 정확히 보고 만다. 그녀는 쓰러지고 또 한번의 소동이 일어났다. 집에 돌아오신 아버지는 사과를 던져 벌레에게 상처를 준다. 그의 운동능력과 몸의 상태는 말할 수 없이 악화되었으나 저녁 무렵에 한두 시간 전게 벌레라는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마는 세 번째 소동이 일어나고 그는 그의 방으로 추방당한다. 그리고 굶어 죽는다. 그가 죽음으로써 모든 것은 정상으로 복귀한다. 아버지는 권위를 회복하고 집안의 경제적 사정도 괜찮을 것 같고 딸은 시집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도 오빠로 되돌아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현실 세계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그의 변신은 그 개인으로 볼 때 그의 주위에 대한 적개감의 표현이요, 자유에의 원망이요, 동시에 자기 처벌의 타협적인 산물이라고는 하더라도, 결국 경제적인 기능인으로서의 역할을 포기한 셈이다. 이러한 인간이 설 자리는 현실 사회에서는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바꿔 말하면 인간의 경제적 기능인으로서의 그 역할을 수락할 때 사회는 그 존재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다.카프카의 변신 연구, 박범서, 132p완전한 벌레의 모습이다. 현대인의 일상성은 적응되기만 하면 에누리가 없다. 그레고르가 벌레로 적응되었을 때 그는 완전한 벌레이다. 가족의 가장에서 미물로, 공급하는 자에서 공급받는 자로 그리고 굶어죽는 벌레로. 역할이 규정지어지면 그걸로 끝이다. 그것이 현대성이다. 실존은 본질을 항상 앞선다.그레고르의 입장에서 즉, 벌레에 입장에서 그의 판단과 반응을 살펴보았다. 그럼 벌레에 대한 반응, 타자의 것은 어떠한가? 크게, 이미 그레고르 잠자를 알고있었던 가족들, 지배인의 반응과 벌레가 되고 난 후의 '벌레' 그레고르를 안 하숙인, 파출부의 반응으로 그것을 나누어 볼 수 있다. 벌레로 변하기 전 그레고르를 알고 있었던 일군의 사람들은 약 네 번의 큰 소동을 통해 벌레로 변한 그레고르를 적응한다. 첫 소동은 그레고르가 열쇠로 자신의 방문을 열었을 때의 반응이다. '놀라움'으로 요약될 수 있다. 지배인은 '보이지 않는 줄기찬 힘에 쫓기듯이' 물러나고, 어머니는 둥그런 치마를 펼치며 쓰러지고 아버지는 불안스럽게 거실을 둘러본 후 두 손으로 눈을 가리고 튼튼한 가슴팍이 들먹일 정도로 운다. 두 번째는 어머니가 그레고르 벌레를 정식으로 본 뒤
    인문/어학| 2002.05.21| 7페이지| 1,000원| 조회(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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