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Ⅰ. 서론(序論)Ⅱ. 본론(本論)1. 러시아 혁명2. 19세기말부터 혁명 전까지의 문학과 사상3. 국내전시대와 부흥기Ⅲ. 결론(結論)Ⅰ. 서론(序論)19세기 러시아의 사상가 체르니세프스키는 러시아 문학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러시아에서는 문학이 지적 활동의 거의 모든 것을 집결함으로써 문하에는 크나큰 사명이 부과되고 있다. , 문학은 생활의 교과서이다. 그리고 게르첸은 러시아 문학의 사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어떠한 정치적 자유조차 갖지 못한 국민에 있어서 문학이란 국민의 분노이고 양심의 외침을 전달하는 수단이며 하나의 연단이다. 이와 같은 러시아 사상가들의 어록에서도 볼 수 있듯이 러시아의 문학은 단지 문학 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 현실의 모습을 담고 있는 거울 로서 존재해 왔다고 쉽게 생각 할 수 있다.현실과 문학 ...어찌 보면 진부한 주제인 것 같기도 하지만 앞에서와 같이 러시아 문학이 존재해 왔던 기반을 살펴볼 때 시대의 현실은 러시아 문학에 있어 빼 놓을 수 없는 중요한 모티브인 것이다.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러시아 사회가 홍역처럼 겪어야 했던 역동적인 변화들 역시 당시의 러시아 문학 속에 뿌리 깊이 박혀 있다. 러시아 현실과 러시아 문학은 과연 어떻게 조우했고 그 둘은 서로 어떤 영향을 주고받으며 결과적으로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살펴 보는 것은 충분한 가치를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따라서 이 보고서에서는 러시아 혁명에 대한 개괄적인 소개부터 시작해 혁명기 동안 러시아 문학의 변화를 혁명의 시간의 순서에 따라 논의해 보도록 하겠다.Ⅱ. 본론(本論)1. 러시아 혁명ㄱ 혁명의 배경러시아에 본격적인 혁명이 도래하고 있음을 실질적으로 알린 것은 트로츠키 주도하에 이루어진 소비에트의 탄생이었다. 물론 소비에트 이전에도 많은 정치 사상과 조직이 있었지만 소비에트만큼 전국적이고 단단한 결속력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배고픔과 폭정에 절망하고 있던 노동자, 농민 계급을 구호와 파업이라는 적절한 방법을 사용해 혁명으로 유인하는 직은 곧 지역적인 정치적인 회의 또는 소비에트로 조직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소비에트 권력의 커다란 부분을 차지했고 사회 민주당 아래에 하나로 합쳐졌다. 그리고 그들은 1905년에 니꼴라스에게 개혁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했다. 일본과의 전쟁이 끝난 후, 니꼴라스는 새로운 자유를 뒤집기 위한 시도를 했고 그의 정부는 전보다 더욱더 보수적으로 되었다. 민중은 힘을 얻었고 니꼴라스는 통제를 유지하면서 증가한 개혁의 요구를 반대함으로써 대중과의 관계는 나빠졌다. 1912년에 사회민주당은 급진적인 볼셰비키와 비교적 절제 있는 멘쉐비키로 나누어진다.1914년에 다시 한번 파멸적인 전쟁이 일어났다. 러일 전쟁으로 인한 손실을 해결하기엔 너무 이른 시기였다. 그러나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준비되지 않은 군사력과 산업으로 러시아는 패배하고 음식부족으로 고생했고 곧 경제는 무너졌다. 1917년 2월 노동자들과 군인은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폭동은 뻬쩨르부르그에서 발생했다. 수비대가 거기에서 폭동을 일으켰다. 노동자 소비에트는 준비되었다. 그리고 두마는 수도에서 질서를 회복시키려 시도하기 위해 임시 정부의 설립을 인정했다. 니꼴라스가 어떤 지지도 받지 못했다는 것은 명백했다. 로마노프 왕조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두마에 위해 세워진 임시정부는 사회의 재정비를 요구하고 노동자들의 권리의 개혁을 약속하면서 온건정책을 시도했다. 그러나 사실 마지못해서 소비에트의 요구를 찬성한 것이다. 9달 동안 임시 정부는 처음엔 르보프 왕자, 다음엔 알렉산더 케렌스키하에서 힘을 세우는데 실패했다. 그 동안 볼세비키는 실망한 많은 소비에트로부터 많은 지지를 얻었다.볼세비키는 10월 25일 레닌의 지휘하에 겨울궁을 습격하고 케렌스키 정부를 물러가게 했다. 볼세비키들이 뻬쩨르부르그와 모스크바에서 대폭적인 지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결코 나라를 관리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전쟁에서 러시아를 끄집어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반혁명세력들과의 내란은 금새 러시아 전역에 발생했다. 1920년쯤 마침내 적군 볼데, 이는 고정화된 사실주의에 대한 반발인 동시에 예술에서 새로운 형식을 모색하고 시도하는 것이기도 하다. 모더니즘 문학은 부르조아 문학으로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인 새로운 시도였다.좀 더 크게 보자면, 이시기의 복잡한 문학적 현상을 19세기 후반의 비판적인 리얼리즘을 계승 발전시키고자 한 그룹과 러시아문학의 전통인 사실주의{)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1830년대에 걸친 여러 문예사조 압축현상을 마침내 종합적인 러시아 국민 문학의 양식을 탄생시켰는데, 그것이 러시아 사실주의 문학이다. 현실을 보 다 더 많이 문학에 반영하려는 사실주의는 비현실적 낭만주의와는 정반대의 형식과 내용 을 지닌다. 낭만주의가 예술의 본질에 관해 탐구했다면, 사실주의는 예술의 임무에 관해 서, 예술과 생활과의 관계에 관한 문제들을 제기하였다. 그러므로 사실주의는 생활의 진 실을 더 많이 반영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이것은 종전에 관념적 탐구에만 치우치던 문예 사조에 평형을 가져옴으로써 사실주의를 통한 총체적인 균형을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의 원칙에 반대하여 모더니즘의 깃발을 올린 그룹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ㄱ 신 사실주의 - 비판적인 사실주의 지평의 심화와 확대·신 사실주의로 가는 과도기적 작가, 코를렌꼬그는 인민주의와도 마르크스주의와도 직접적인 관련을 맺지 않고 인도주의로 일관된 입장에 서서 독자적 작풍을 이루었다.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농민의 생활을 취재한 단편소설을 쓰기 시작하여, 여성 혁명가의 이야기를 다룬 「불가사의한 여인」, 낭만주의적 상황에서 부정한 힘에 반대하는 자의 모습을 그린「숲이 속삭인다」, 국민의 운명에 관한 인텔리겐치야의 사명을 생각하는 「얌전한 사람들」등을 집필하였다. 그는 혁명의 지지자는 아니었지만 부정한 것에 대해 항의 하는 점에 관해서는 항상 러시아의 사회적 양심을 대표하여용감한 발언을 하였다. 또한 그는 19세기 사실주의 전통에 굳건하게 발을 붙이고 있으면서도 새로운 사회적 이상을 문학 속에 반영시킬 필요를 느꼈으므로 사실주의적 작품과 나란히 낭만주동시에 자본주의적 인간관계의 야비함을 말하였다. 그리고 그의 대표작 「어머니」는 1902년 노보고로드 노동자 운동에서의 실재 인물과 사건을 취재한 소설로서 노동자의 무식한 어머니가 아들과 그 동료의 영향아래 혁명 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것을 묘사하였다. 이 작품은 예술적으로는 만족할 만한 것이 못되지만 1905년 혁명후의 반동시대에 큰 사회적 역할을 하였다.그는 천재적인 감수성을 지닌 작가는 아니었지만 고리끼 특유의 소시민 근성과 자본주의적 착취에 대한 비판의식은 프롤레타리아 문학에 큰 획을 그었고, 고리끼 이후의 러시아 작가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정화된 사실주의고리끼를 중심으로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하는 작가들이 사실주의를 이상주의와 결부시킴으로써 문학에서 새로운 길을 개척할 때 다른 작가들은 형식적으로는 19세기 사실주의의 전통을 고수하면서도 시대의 새로운 동향의 본질을 파악하지 않고 현실의 부정적인 면을 계속 묘사하였다. 그들의 작품은 어느 의미에서는 체홉과 코를렌꼬의 주제를 계승하고 있었으나 거기에는 체홉이 가진 강하 낙천주의도 미래에 대한 기대감도 없었고, 코를렌꼬가 가진 행동적인 휴머니즘도 잃은 채로 암담한 회의와 절망의 모티브가 지배적이었다. 그들의 작품은 시대의 전환기에서 진로를 잃은 일부 인텔리겐치야의 방황하는 정신을 반영하고 있었다.또 그들은 한 유파를 형성한 것이 아니므로 그 작품들 또한 상이하다. 그러나 그들은 사회주의의 이상에도 부르조아 문학에도 환멸을 느끼고, 어두운 혼미속에서 사실주의 정신으로부터 이탈하였다. 이와 같은 경향의 작가들 중에서도 독특한 면을 가진 작가로는 꾸쁘린, 부닌, 안드례예프 등이 있다. 하지만 뛰어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이들 또한 새로운 시대의 조류와 의미를 읽어내지 못하고 19세기 사실주의 정신에서 이탈하고 말았다.ㄴ 모더니즘 - 사실주의로의 탈피, 시의 은시대·자연주의작은 선, 개인적인 자기 완성, 악에 대한 무저항 등의 사상이 사람들의 마음을 끌고 있던 시기에 자연주의 문학과 소위 모더니즘 문학이 많은 공상이다.그들은 사실주의에 대해 사실주의자는 생활 이면에 있는 것은 아무것도 보지 않는다. 라고 강하게 비판하였다. 상징파 시인들은 형식적 완성에 있어서 많은 기여를 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형식중시는 내용경시를 동반하였다. 벨르이와 솔로구쁘의 소설은 시의 연장이며, 메레규코프스키늬 역사소설「크리스트와 안티크리스트」에서 작가의 신비주의적 사상을 전개하기위한 모티브에서는 역사적 진실의 가치를 잃어버리고 있다.제 1차 혁명 후의 반동기에는 상징파는 에로티시즘과 데모니즘이 혼합된 병적인 미의 탐닉의 길로 접어들며, 또 몇몇은 자기의 신비주의를 전쟁의 찬가와 결부시켰다.그리고 러시아의 상징주의는 재능 있는 많은 시인들을 끌어들였으나 이 것은 많은 혼란과 모순을 안은 채 영속적 성격을 가질 수 없는 것이었다.러시아 상징파, 또는 모더니즘의 발로는 사실주의에 대한 반동으로만 일어난 것이 아니다.이는 늦게 개화된 러시아 자본주의의 급속한 성장에 따르는 문화의 팽창과 발달현상의 일부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 시기에는 문학뿐만 아니라 연극, 무용, 미술 등의 혁신과 눈부신 발전 또한 있었는데, 이것은 모더니즘 운동과 관련지을 수 있을 것이다.·아끄메이즘과 미래주의1912년 상징파에서 이끄메이즘 운동이 일어난다. 이는 상징주의의 경향 중에서도 신비주의에 대한 반동으로써 형식상으로는 사실주의로의 복귀로 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상징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구밀료프, 고로제즈키 등을 비롯한 이끄메이스트등은 상징주의가 요구하는 인상중시, 기분의 음악적 전달과 인식하기 어려운 세계의 탐구를 거부한다. 그들은 지상적인 거낭한 예술 창조를 주장하고, 상징주의의 성과 위에 입각한 예술의 개화시기가 도래했다고 하여 이를 신 르네상스로 호칭하였다. 하지만 그들의 작품은 인상주의와 자연주의에 유사한 것이 되고, 상징주의의 말류로서 끝이 났다.아끄메이즘과 같은 시기에 미래파의 운동이 일어난다. 러시아 각지로부터 모여든 젊은 시인들은 기존의 모든 권위를 부정하였다. 그들은 상징파와 아끄메이스트와는 달었다.
통일신라, 고려의 불교종파-고려시대 불교의 전개와 성격, 교선의 문제와 신앙결사운동-Ⅰ. 서론Ⅱ. 본론1. 중세불교의 이해방향과 선사상의 수용2. 고려전기 불교계의 재편과 추이3.고려후기 불교사의 전개와 신앙결사운동4. 고려말 불교계의 동향Ⅲ.결론Ⅰ.서론중세사회의 불교는 종교적인 기능과 사회전반의 구조 속에 유기적으로 관련을 맺고 있었다. 이러한 중세불교를 검토할 때 논의되어야 할 점은 사유구조상의 특징과 이를 통해 사회구조 속에서 어떻게 존재했으며 그 기능은 무엇이었을까, 또한 사회발전의 틀 속에 시기구분과 아울러 일정하게 범주화 할 수 있는 문제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들을 염두에 두고서 여기에서 검토할 몇 가지 주제는 다음과 같다. 우선, 삼국시기에 불교가 전래된 이래 통일신라기 전후를 거치면서 크게 발전한 단계인 종파불교의 성립문제이다. 종파가 신라 통일기에 성립된 이후 불교가 한 단계 높은 수준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큰 역할을 담당한 것은 선사상(禪思想)이다. 선사상은 신라하대에 수용되어 고려 초에 교단(종파)으로 정착되었는데, 중세불교를 더욱 발전시킨 선진적인 사유체계를 표방한 것이다. 이로써 선사상과 이미 정착된 기존의 교종간에는 사상적으로 서로 대립하기도 하고 또는 이를 극복하기위한 통합논의가 제기되기도 하였다. 고려시기의 불교는 이러한 교와 선의 관계를 들러싼 사상적인 흐름이 주도하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통일신라기 이래로 불교가 왕실이나 귀족의 전유물에서 지방사회와 일반민들까지도 공유할 수 있는 단계로 확산되면서 나타난 대중적인 신앙활동은 다른 하나의 축을 이루면서 전개되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가 극대화되면서 역사의 전면에 부각된 것이 고려후기의 결사운동이다.Ⅱ. 본론1. 중세 불교의 이해방향과 선사상의 수용*중세불교의 이해방향종래의 사상사 연구를 표방하면서 발표된 글의 경향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사상 그 자체를 밝히고자 하는 노력, 또 하나는 사상을 일정한 역사적 사회적 조건 아래서 배태된 산물이나 현상으로 파악하려는 말해 특정 사상의 의미를 역사의 장에서 찾으려면, 사상은 전 사회구조 속에서 하나의 구조를 이루면서 전체상을 투영할 수 있는, 즉 다른 구조와 유기적으로 맞물려 있다는 전제하에서 문제를 검토하고 인식할 때 가능하다.한국의 중세불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불교 종파의 성립이 갖는 의미를 중시해야 한다. 그러면 종파성립의 단계를 말해주는 기준은 사원을 중심으로 조직적 체계적으로 행해지는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즉 종파성립은 특정 계층만의 특정의 산물이 아니라 전 사회계층이 공유할 수 있는 단계의 산물이어야 한다. 따라서 종파의 성립이란 특정한 지역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계층적으로 전 사회계층이 공유할 수 있는 단계로 불교가 발전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그리고 종파성립의 과정을 설명해줄 수 있는 구체적인 기준이나 지표를 들면 가장 중요하게 인식해야 할 점은 불교대중화 문제이다. 이 문제는 사회 계층적인 측면과 지역성을 포괄한 개념으로서, 두 가지 측면을 염두 해야 되는데 하나는 지배층이 그들의 권력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민(民)을 파악하는 방식과 민에 대한 입장을 고려해야 하고 또 하나는 불교계의 전반적인 현황 즉 교학체계의 양상, 신앙과 의식의 성격, 주도 승려층의 정치, 사회적 성향 등도 유기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따라서 교학체계를 확립하는 문제와 불교대중화의 문제는 불교가 전래, 수용된 이래의 전반적인 발전양상과 유기적으로 관련된 현상으로서 인식해야 한다.불교대중화는 역사발전의 산물로서 일반 민들의 성장을 전제로 한 봉건지배층과의 합의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봉건 지배층이 서서히 보수화 됨으로써 종파불교는 이미 성장한 일반 민들의 신앙기반과는 동떨어진 세계를 추구하게 된다. 역사적 사실로서 설명한다면 신라말, 고려중기, 고려말의 불교가 보수성을 띠게 되었을 때 이를 극복하기 위해 선사상을 수용하기도 하고 불교계의 자각과 반성을 촉구한 신앙운동을 제기하기도 하였으나 불교는 자정능력(自淨能力)을 잃어버렸을 때인 고려말에는 불교의 역할이견성성불(見性成佛)'을 표방하면서 구체적인 실천수행을 통하여 깨달음을 이루려고 하였다. 선사상이 처음 전래되었을 때 신라 왕실의 왕권강화책과 관련하여 이들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기도 하였으나 신라 말에는 세력을 잡은 지방호족에 의해 분권적 경향에 대한 이념으로 채택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각 지방에 선종의 거점으로 많은 선문(禪門)을 건립하였는데 대표적인 것이 9산선문이었다. 9산선문의 개조를 비롯한 선승들은 호족출신이 대부분이었고 이들 선승을 후원한 세력도 지방호족들이었다.중세불교의 기점을 선사상에 초점을 맞추어 설정한 견해의 연유에 대해서는 선사상은 고대사회의 산물로 인식하면서 비록 같은 시기에 유행하였지만 선사상과 초기 성리학 사이에는 질적으로 서로 차이가 있다고 본다. 즉 선사상은 교학과 마찬가지로 철저한 자기부정, 인간부정을 전제로 하여 모든 현실을 단순한 '관계'로서 절대적 맹목적으로 긍정하는 평면적인 논리를 본질로 하고 있는데 비해 성리학은 인성(人性)을 순선(純善), 선악(善惡), 악(惡)이라는 상중하의 계제적(階梯的) 수직적인 관계로 긍정하면서 현실의 인간관계는 군신 부자 사이의 의리라는 방향으로 파악하고 있다.이러한 견해 중 교학불교 특히 화엄사상을 고대사회의 이데올로기라는 견해만 취하여 논지를 전개한 것이 선사상을 중세불교의 지표로 인식한 우리학계의 일반적인 견해였다. 이들은 신라중대는 화엄사상을 기반으로 한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라는 방향으로 논지를 전개하고, 더 나아가 신라중대에서 하대로 접어들면서 왕실불교, 귀족불교로서의 화엄사상이 사회적으로 일반 서민과 더욱 멀어지는 혼란기에 들어오면서 그 사회적 기반을 잃어버리게 됨에 따라 선사상은 사상적으로 교학불교에 도전하고, 사회적으로는 절대 왕권을 부인하는 성격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는 방향으로 논지를 전개하고 있다. 또한 선사상은 신라의 육두품 계층 뒤에는 지방호족을 그 사회적 기반으로 하여 정착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선사상이 교학불교가 가지고 있었던 한계를 비판하긴 하였지만 선사상은 중세왕권강화를 시도하면서 불교계에 대한 개편작업을 추진하는데 선종의 분권적 경향에 대한 질적인 변화를 모색하면서 선교일치론(禪敎一致論), 선정일치론(禪淨一致論)의 경향을 띠고 있었던 법안종을 중국에서 받아들였다. 또 교종에 대해서도 화엄종의 균여(均如)를 발탁하여 후삼국이래 남악파와 북악파로 분열된 화엄종단을 통합하게 하였다. 이러한 조처는 균여가 신라중대 이래 화엄종과 법상종간의 대립을 '성상융회(性相融會)'라는 각도에서 극복함으로써 왕실에 대한 이념적 역할을 담당하려 하였고 실천신앙을 통해 왕실과 기층사회를 연결시켜주는 매개체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려한 인물이기 때문이다.그러나 경종대의 반동정치에 의한 탄압과 성종이 최승로를 등용한 뒤로는 유학이 집권적 귀족사회의 이념으로 채택됨으로써 불교가 가졌던 체제이념으로써 기능은 축소되었으며 그 결과 각 종파별, 신앙별로 특정집단만을 대변하는 위치로 전락하였고 특히 11세기 이후 현종 문종대를 지나면서 집권적 귀족사회의 골격을 갖추고 차츰 문벌귀족층이 형성됨에 따라 불교계도 이들의 영향력 속에서 좌우되기에 이르렀다. 문벌귀족과 결탁되어 있던 대표적인 교단은 화엄 법상종으로서 불교계의 중심교단이었다. 이들 세력은 정치세력을 배경으로 무리하게 각종 교단의 장악을 시도하면서 불교계 전반의 부패를 가속화하였다. 한편으로 이들과는 달리 지방사회의 향리층이나 대다수의 농민, 천민층은 특정종파와는 무관하게 독자적인 신앙공동체를 형성하기도 하고 소규모 사원을 중심으로 조탑(造塔) 주종(鑄鐘)에 참여하고 팔관회 연등회등과 같은 정토신앙과 전통신앙이 결합하고 있는 형태의 신앙을 수호하고 유지하는 형편 이였다.이와 같이 문벌귀족과 결탁된 불교세력이 보수적인 경향을 띠면서 당시 불교계를 장악했을 때에 의천이 출현하여 문벌귀족과 결탁된 교단세력에 대한 자각, 나아가 고려왕실의 문벌체제에 대해 왕권강화의 계기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의천의 노력은 속장경(續藏經)의 조판과 천태종의 개창으로 나타났고, 원효의 계승을 자처하고 송에 유학을 흡수한 다양한 제공한 것은 틀림없다.3. 고려후기 불교사의 전개와 신앙결사신앙결사는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신앙을 추구하기 위한 결집체로서 불교가 수용된 이후 중국이나 우리 나라의 경우 어느 시기에도 존재했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의 경우 4세기 말에 동진의 혜원(慧遠)이 중심이 되어 백련사를 결성한 것을 신앙결사의 시초로 본다. 그리고 신앙결사는 불교가 당시의 사회에서 사회적 기능을 수행할 수 없는 한계에 이른 자기모순을 인식하고 이를 개혁하려는 의도에서 출발한 자각 반성운동이라고 할 수 있고 신앙결사운동 조직화과정의 특징은 중앙 집중적인 교단체제에 대해 개별적 독자적인 형태로 지방사회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는 점이다.사회운동의 차원으로 평가할 수 있는 신앙결사는 12세기 말에서 13세기에 접어들면서 사회변동과 함께 다양하게 전개된 신앙결사를 들 수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지눌이 개창한 것으로, 뒤에 수선사로 사액되었던 정혜결사(定慧結社)와 요세(了世)의 백련결사라 할 수 있다. 이들 양대 결사는 기존의 개경 중심의 불교계의 타락상과 모순에 대한 비판운동이라는 공동의 과제를 갖고 출발했다. 이런 의미에서 지방 불교적인 경향을 발견할 수 있고 불교개혁운동이라고 규정지을 수 있다.수선사는 지눌이 1182년(명종12) 정월에 개경의 보제사에서 개최한 담선법회에 참석하여 승과에 합격한 것을 계기로 하여, 당시 불교계의 타락상을 비판하면서 동지 10여명과 함께 명리를 버리고 산림에 은거하며 결사를 맺을 것을 약속함으로써 출발된 것이었다. 그 뒤 지눌은 수선에 힘썼고 특히 거조사에서는「정혜결사문(定慧結社文)」을 1190년(명종20)에 반포함으로써 정혜결사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지눌의 수선사는 기존의 불교계의 제반모순과 폐단을 자각하고 이에 대해 단순한 비판과 반성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이를 개혁하려는 실천운동으로 승화시킨 것이었다. 수선사가 당시 불교교단의 중심세력으로 주목받게 되고 크게 성장한 단계는 1219년 최우가 등장한 이후라고 할 수 있다.그러면 당시 사회에서 수선사가 광범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