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현대사 학회 세미나 발췌 자료집1948년 4·3 항쟁, 봉기와 학살의 전모96' 권 혁 운1. 일제하 제주도 민족해방운동제주도는 옛부터 봉건정부의 착취에 부단히 저항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일제시대까지 이어져 1919년 3월 21일의 만세시위를 비롯하여 1920년대에는 무정부주의운동('우리계' 사건), 1930년 3월에 결성된 혁우동맹과 조선공산당 제주위원회이 중심이 된 좌익세력의 투쟁 등이 일어난다. 이중에서 혁우동맹과 조선공산당 제주위원회가 후원한 1932년 '잠녀항쟁'은 당시 가장 격렬했던 반제국주의 투쟁으로 손꼽힌다.그러나 1930년대 후반부터는 일제의 집중적인 탄압으로 모든 운동이 지하화하고 만다.2. 해방과 혼란 그리고 민중의 열망해방 후 제주도의 상황-소작비율이 낮아(9%) 타지역과는 달리 지주 대 소작인의 계급대립이 그리 심하지 않음-일본에서 노동하던 사람들과 징용·징병으로 끌려간 사람들의 귀환으로 인구급증(실업률 ↑)-미군정의 실정(친일파 등용, 미곡의 자유판매제도 도입)-보리농사 흉년으로 인한 식량난과 물품반입을 위한 밀수행위를 착취함으로써 인해 불만이 가중됨일제하에서의 반제민족해방운동의 경험은 해방정국에서 제주도를 변혁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는 장소가 된다.해방후 제주도에서는 1945년 9월 10일 '제주도 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되었고 9월 22일 '제주도 인민위원회'로 발전적으로 해체되어 1읍 11면에 모두 설치된다. 제주인민위원회는 타지역과는 달리 1947년3·1시위운동까지 존속하여 실질적인 정부역할을 수행한다.(좌우연합조직으로 온건한 성격, 계급간 대립↓, 늦은 미군의 진주)이외에 조선공산당 제주도위원회, 건준청년동맹 등의 진보적 대중단체가 속속 조직되었다.한편 미군정은 제주도를 전라남도에서 분리하여 도제(道制)를 실시하고 제주경찰서 승격 및 인원 증원, 9연대 창설 등을 통해 물리력을 강화한다.3. 3·1시위운동과 미군정의 대응제주도에서는 3·1절을 맞아 민족운동세력과 각 단체, 민중들이 폭넓게 참여하여 3·1절 기념식이 열렸다. 그러나 기념식 후 시위에 돌입하면서 발포가 시작되어 6명이 사망한다. 이로인해 3·10관민총파업이 결행되어 제주전역을 마비시킨다.이에 미군정은 파업을 깨기 위해 경찰을 증파하고 민족운동세력을 체포하고 서청을 투입하여 제주도를 공포의 분위기로 몰아간다.4. 항쟁의 불꽃은 타오르고1948년 단독선거가 결정되자 전국적으로 항의시위가 벌어졌으며 제주도에서도 곳곳에서 항의시위가 벌어져 경찰과 충돌하였다. 이 과정에서 연행자에 대한 혹독한 고문으로 고문치사사건이 잇달아 일어나자 민중의 불만은 폭발일보직전이 된다. 이에 남로당 지도부는 항쟁파와 유보파로 나뉘어 논쟁 끝에 무장항쟁을 결정한다.이에따라 1948년 4월 3일 도 곳곳의 지서와 우익단체 간부들의 집이 습격당하면서 항쟁이 시작된다.유격대의 계속적인 습격으로 제주의 치안이 위협받자 미군정은 4월 5일 '제주도 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주민들의 통행을 제한하였으며 경찰력을 늘리고 악명높은 서북청년단을 증파하였다.제주도에 주둔하던 9연대 연대장 김익렬은 초토화작전 지시를 거부하고 4월 28일 미군정의 허가를 받아 유격대 대표 김달삼을 만나 담판을 벌여 합의를 이끌어낸다. 이에따라 평화가 잠시 깃들었으나 오라리 사건으로 평화분위기는 깨지고 9연대장은 김익렬에서 박진경으로 교체되고만다.5월 10일, 전국적으로 단독선거가 실시되었으나 제주도에서는 유격대의 선거 방해활동과 민중의 호응으로 파탄되고 만다. 이는 분단정권에 타격을 주었으나 미군정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져 5월 12일 대토벌작전이 시작되었다. 토벌작전은 어느정도의 목적을 달성하지만 민심이 경비대를 적대하고 경비대안에서도 반발의 분위기가 조성되는 등의 부작용을 낳고 연대장 박진경은 문상길 등에 의해 암살당하고 말았다.
들어가며9월에 교수님이 나눠준 영화 목록을 받고 필자는 구하기 쉽고 전에 본적도 있는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를 볼려고 했었다. 자본주의가 불러일으킨 파멸적인 대공황의 와중에서 황폐화되는 인간성을 다룬다는 점에서도 다루기 쉬운 주제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그러나 얼마전 수업시간중 스페인내전에 관한 영상을 보고 교재를 읽자 스페인내전에 흥미가 생기게 되었다. 또한 교수님이 '랜드 앤 프리덤'을 추천하였고 전에 좋은 영화라고 들었던 것이 생각나 선배와 함께 이 영화를 보기로 결정했다.몇군데 비디오가게를 돌아다니고 자취방의 비디오가 고장나 추운 강의실에서 영화를 보는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영화의 내용은 이를 충분히 보상해줄 정도로 훌륭했다. 올해 들어 본 영화 중 다섯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로 마음속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랜드 앤 프리덤은 그동안 멜로, 공포 영화에 심취해있던 나에게 사회의 모순을 알리고 바꾸려하는 리얼리즘 영화의 진수를 보여주었다.영화를 보고나서는 스페인 내전에 대해 공부하기 위해 몇 권을 책을 참조하였는데 시간이 없어 속독하는 수준에 그쳤지만 어느 정도 스페인 내전의 상을 잡을 수 있었다.필자는 영화의 내용과 공부한 내용을 기초로 우선 영화에 대해 소개하고 영화의 배경이었던 스페인 내전에 대해 초점을 맞출 생각이다. 이를 통해 영화에서 표현된 스페인 내전의 배경 및 전개과정에 대해 알아보고 결론부분에서 스페인내전의 역사적 의미를 알아보고 나아가 우리나라의 역사와도 비교해볼 것이다.Land And Freedom 에 대하여좌파 영화의 거장 켄 로치 감독처음 영화를 보고나서 감독이 누군가 궁금해했었는데 '레이닝 스톤'을 만든 켄 로치 감독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고개가 끄덕거려졌다. 비록 영화는 보지 않았지만 씨네21에서 이 영화에 대한 평을 읽은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당시 기사에는 레이닝 스톤이 영국 노동자의 힘겨운 삶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감독이 유명한 영국의 좌파 감독이라고 소개했던 것으로 기억한다.이 영화 역시 켄 로치 감독의 사회주의 시각향한다. 이곳에서 여러 나라에서 온 민병대원들을 만나고 이들과 함께 프랑코군과의 전투에 참가함으로써 본격적인 반파시즘 투쟁에 뛰어들게 된다. 그는 모든 일이 투표로 결정되고 지휘관조차 투표로 뽑는 민병대의 분위기에 흠뻑 빠져들게 되었고 그곳에서 참다운 동지애가 실현되고 있음을 확인한다.그러던 어느날 민병대는 파시스트가 장악하고 있는 마을을 습격하여 치열한 전투 끝에 점령한다. 그러나 전쟁 중 지휘관인 쿠간이 전사하게 되었고 새로 지휘관으로 선임된 비달은 대원들에게 무기의 원활한 보급과 체계적인 훈련을 위해 공산주의자들의 인민군에 가담여부를 묻는 투표를 실시하고 논쟁 끝에 부결되어 독자적인 조직을 유지하기로 결정한다.한편 데이빗은 신병들에게 사격훈련을 시키다 오발로 어깨에 부상을 입게 되었고 바르셀로나로 후송되었고 상처를 치료한 후 쿠간의 애인이었던 블랑카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이들의 사랑은 블랑카가 다음날 데이빗이 입은 군복이 공산당이 주도하는 국제여단의 군복임을 알고 화를 내며 떠나는 것으로 위기를 맞이한다.국제여단에 참가한 데이빗은 바르셀로나에서 아나키스트인 CNT(전국 노동자 연합)와 POUM, 공산주의자들 사이에 벌어진 시가전에 참가하여 반파시스트 전선의 분열을 목격한다. 전투 후에 민병대원을 비방하는 정부군들과 주먹다짐을 한 데이빗은 환멸을 느끼고 다시 민병대원으로 돌아간다.옛동지들과 해후한 데이빗, 오랜 만에 찾은 민병대의 상황은 악화되어 있었고 어느날 정부군이 지원군이 보내지 않아 전멸위기를 겪은 끝에 민병대는 간신히 후퇴에 성공하게 된다. 그러나 민병대는 곧 정부군인 인민군에 의해 포위되어 무장해제를 강요당하고 이에 분노해 저항하는 민병대원을 만류하던 블랑카가 인민군에게 사살당하고 만다. 데이빗은 블랑카의 장례식에서 그녀의 어머니에게서 붉은 손수건에 싼 흙을 건네 받는다.이 흙이 데이빗의 장례식에서 손녀의 시낭송과 함께 데이빗 관위로 뿌려지는 것으로 영화는 끝을 맺는다.영화의 배경 스페인 내전에 대하여내전 이전의 상황고등학교때 백산서당에럽에서 가장 낙후된 곳 중 하나였다.스페인 사회의 특성은 카톨릭교회의 과도한 권력장악이었다. 카톨릭교회는 광대한 토지와 재산을 갖고 스페인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부를 가지고 그 자체가 대지주로 군림하였다. 게다가 교회의 유력자들은 자기들의 지배를 오래 지속시키기 위해 민중을 무지한 채로 두고 자유나 권리에 대해 자각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런 생각 아래 카톨릭교회가 담당한 교육분야는 민중들에게 지배체제에 순응하고 신에게 복종하는 '신민' 양성을 그 목표로 하였다.따라서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농민은 소작인 상태에서 경제적 수탈에 시달리며 무지와 빈곤에서 허덕이는 삶을 이어나갔던 것이다.이러한 스페인의 왜곡된 경제구조는 공업 부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내전 이전 스페인의 공업화는 비록 완만한 속도이긴 했지만 꾸준히 진척되어 내전 이전에는 상당한 수준에 도달하여 있었다. 그러나 이는 상당부분 영국과 프랑스 아래 종속되어 있는 왜곡된 구조였다. 결국 참전국들에 대한 수출로 호황을 누렸던 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외국자본은 노동자들의 임금을 삭감하고 해고를 자행하였으며 이에 맞서 전투적인 노동자 조직이 곳곳에서 결성되었다. 특히 스페인은 바쿠닌주의가 마르크스주의에 앞서 도입되고 농민들의 '천년왕국' 열망이 반영되어 노동운동에서 아나키즘의 영향이 매우 강하였다. 이후 아나키스트들이 주도한 CNT(전국노동연합)가 결성되어 아나키즘을 배격하는 UGT(노동자총동맹)과 주도권다툼을 하며 나중에 반파시즘 전쟁에서 걸림돌로 작용하였다.스페인의 근대화를 가로막는 또하나의 벽은 군대의 존재였다. 스페인 군대는 장교수가 과도하게 많았는데 이들 대부분은 귀족을 비롯한 특권층의 자제였고 극히 반동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자주 쿠데타를 일으켜 1923년 리베라가 쿠데타를 일으켜 1930년까지 독재정치를 펴게 된다. 이들 반동적인 군부세력은 나중에 스페인 공화정을 무너뜨린 핵심세력이 된다.공화국 수립1930년 1월, 경제위기와 민심이반으로 리베936년 좌파는 마침내 인민전선을 결성하여 연합세력을 형성한다. 총선거 결과 아사냐를 정부수반으로 하여 인민전선 정부가 탄생하였으며, 의회가 소집되자, 입법계획과 농지개혁안을 제출하였다. 4월 7일 수상지명전에서 아사냐의 양보로 키로가가 임명되었으며, 키로가 정부는 교회와 우익 정당 본부의 습격, 민병대 조직, 극우 팔랑헤당 의용병과의 대치 및 군부 쿠데타 위협 속에서 출범하여, 정치적 긴장은 최고조에 달한다내전발발과 전개, 종결1936년 정권을 장악한 인민전선은 아사나를 수상으로 내세워 7만명의 농민에게 토지를 분배하는 개혁을 실시하였다.한편 총선거에서 패배한 우파들은 심각한 불안에 빠져 인민전선 전복을 획책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그 해 봄 군장교들의 정권장악기도로 구체화되었다. 프랑코장군은 영국비행기를 빌려서 카나리 섬으로부터 탈출하여 모로코로 날아왔다. 장군들은 1936년 7월 18일 모로코를 침입할 준비가 되었음을 알려왔고, 운송비행기들은 무솔리니로부터 빌려온 것이었다. 지부랄타해협을 건너서 안달루시아로 외인부대를 수송했고, 드디어 내란은 시작되었다.프랑코는 공화국정부를 단시일내에 전복하려 했으나 시민들의 적극적인 항전과 해군들의 불협조로 실패하였고 내전은 장기전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반란군은 시민군이 무장한 지역에서만 패배했다. 그 외의 지역은 우수한 무력을 가지고 있는 반란군이 빠른 속도로 잠식해들어갔다.그러나 어느 쪽도 결정적 승리를 확보할 만큼 강력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반란군은 이탈리아와 독일로부터 돈, 무기 그리고 병력을 지원받음으로써 계속 공세를 취할 수 있었다. 반란군은 북서부의 포루투갈 국경근처와 안달루시아에 강한 교두보를 확보했고, 인민전선은 스페인 공군과 해군의 정예군 및, 외국으로부터 온 의용병들로 구성되었고, 소련과 멕시코로부터의 원조를 받았고, 산업지역, 수도, 동부연안의 지지를 받았다.내란의 첫해는 수도 마드리드에 대한 반란군의 공세가 초점이었다. 인민전선은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완강히 반란군의 공격을 막아내었으 중요한 것은 내란의 정치적 측면이었다. 이탈리아의 개입이 증대함에 따라 중부유럽에서 이탈리아가 차지하는 비중이 제한되었고 또한 이탈리아를 서부 진영에 복귀시키는 가능성이 희박해지는 이중효과가 주어졌다. 스페인에 개입하면서 이탈리아는 독일과의 사실상의 협조관계를 강화하였고 이리하여 로마-베를린 추축이 탄생되었다.그러나 인민전선은 이런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마드리드를 계속 사수하였다. 이는 앞에서도 말했듯 시민들의 희생을 감수한 항전 때문이었다. 인민전선은 효과적 전쟁수행을 위해 여러 조치를 취하려 했지만 공산주의자들은 이 기회에 지방의 자치를 강화하고 공장을 인수하여 노동자위원회에서 그것을 관리하려했다. 이는 소련만이 유일하게 인민전선에게 구체적인 군사원조를 제공했기 때문에 소련의 영향력이 강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소련의 스페인에 대한 원조는 스페인의 反코민테른적 좌익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소련은 1936년말까지 2백대의 탱크, 대포 1백 98문, 트럭 4천대, 기관총 3천 2백정 등을 원조하였다.결국 인민전선 안에서 내분이 격화되어 1937년 5월 3일, 바르셀로나에서 CNT와 POUM에 소속한 노동자들과 정부군 및 공산당 지지세력 사이에서 1천명의 사망자를 낸 시가전이 벌어졌다. 결국 친소련 내각인 네그린 내각에서 POUM을 비롯한 아나키스트들이 숙청되기 시작하였고 인민전선은 적전분열되어 역량이 분산되고 만다.한편 1937년 4월 26일, 독일의 공군 폭격기 편대가 바스크의 옛 수도 게르니카라는 소도시를 폭격한다. 그날 오후의 희생자들은 마침 마을광장에서 시장을 벌일 시간에 맞추어 나온 사람들로 1천 6백명 이상이 죽었고, 9백명이 부상했다. 이는 일반폭탄과 소이탄의 치사율을 시험하기 위한 독일의 '실험'이었다.스페인 내전에서 반란군이 압도적인 무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인민전선은 4년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국제의용병들 때문이었다. 내전 내내 전세계 곳곳에서 반파시즘의 깃발 아래 수많은 의용병들이 참전하였다. 인민전선 정부를 지원하기 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