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를 읽고부제 : 부자들이 들려주는 과 의 비밀난 지금 가난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부유하지도 않다. 아마도 내가 부자였다면 지금보다는 엄청나게 편하게 살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들은 누구나 부자가 되기를 원한다. (나도 남들보다 엄청나게 부자이고 싶은 것이 나의 솔직한 심정이다.) 이것은 그 누구도 부정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누구나 다 부자가 될 수는 없다. (누군가가 부자가 되려면 여러 사람들은 전보다 더욱 가난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물질에 얽매여 살 수 밖에 없다. 인간의 모든 삶을 좌지우지하는 역할을 “돈”이라는 도구가 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자들이 들려주는 과 의 비밀`이라는 다소 유혹적인 부제를 붙인 이 책(원제 Rich Dad Poor Dad)은 어떻게 하면 재산을 늘릴 수 있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이 책은 부와 투자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해 주고, 재산을 늘리는 금융투자적인 방법에 대한 저자의 설명과 부자가 되기 위한 사고의 변화와 행동의 변화 등 다양한 면을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은 다른 여느 경제 책과는 달리 노동과 생산활동으로 인한 부를 축적하는 방법을 제시해 준 것이 아니라, 돈으로 돈을 버는 방법인, 즉 자산이 수입을 벌어들이는 데 그 초점을 맞추고 있다. 다시 말해 벌어들인 돈을 어떻게 관리하는가를 이 책은 제시해 주고 있다.머리말에서 저자는 `학교에서는 부자들이 알고 있는 것을 가르치지 않습니다.`라는 말을 했다. 샤론 레흐트는 세상은 예전과 달리 너무나도 변해 있지만 학교와 가정에서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있는것은 하나도 변한 것이 없다며 이 책의 머리말을 연다. 우리의 학교와 가정은 아이들에게 부자가 되는 방법으로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는 방법만을 가르쳐주었지, 돈을 번 후에 어떻게 관리하는 지는 가르쳐주지 않는다. 나 역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학교나 집에서 그저 공부만 열심히 하라는 소리를 들어왔다. 공부만 잘하면 가만히 앉아있어도 여기저기서 나를는 미래를 준비하고, 교육을 받고, 나와 나의 아이들에게 금융 재능을 일깨워야 할 것이다.제1부는 이란 제목이 붙어 있는데, 과연 부자와 부자가 아닌 사람이 가는 길이 다를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내가 1부의 첫 장을 읽었을 때 나는 가난한 아버지의 관점(생각)과 일치한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나는 깜짝 놀라고야 말았다. 보통의 사람들이 당연히 생각하리라고 아니,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했던 것이 가난한 아버지의 관점(생각)이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부자 아버지의 관점(생각)을 보고는 이런 관점(생각)을 갖고 사는 사람이 도대체 몇이나 될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부자 아버지의 관점(생각)은 내게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가난한 아버지는 `돈을 좋아하는 것은 모든 악의 근원이다. `라고 말한 반면, 부자 아버지는 `돈이 부족한 것은 모든 악의 근원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나는 가난한 아버지처럼 `돈을 좋아하는 것은 모든 악의 근원이다. `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부자 아버지의 말을 보고 부자 아버지의 말도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가난한 아버지는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직장을 구해야 한다. `, `나는 너희들 키우는 데 돈이 너무 많이 들어 부자가 될 수 없단다. `, `나는 너에게 그것을 사줄 돈이 없다, 너도 우리 형편 알잖니. `, `돈은 안전하게 사용하고 위험을 피해라, 중요한 건 돈이 아니다. `, `똑똑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라고 말하는 반면, 부자 아버지는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회사를 차려야 한다. `, `나는 너희들 때문에 부자가 되어야 한다, 그것을 사려면 어떻게 해야 좋은지 생각해 보거라. `, `무엇보다 위험을 관리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돈을 제대로 아는 것이야말로 힘이다. `, 네가 똑똑한 사람을 고용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나는 한가지를 발견하게 되었다. 두 아버지 모두 저자에게 교육의 중요성을 강요했지만 똑같은 내용을 강조하지 않았다. 저자는 이 차이를 한 분(가난한 아버지)의 과 다른 한 분(부자 아버지)의다. 나는 또 생각을 해보았다. 돈을 위해 일하지 않으면 어떻게 부자가 될 것인가. 이것은 모순이 아닐까? 책을 몇장 읽어나가면서 이 말이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난한 사람들과 중산층 사람들은 평생 돈을 위해 일하지만, 부자들은 자산과 부채를 통해 돈이 움직이는 방식을 배워서 돈이 자신을 위해 일하게 만든다. `돈이 자신을 위해 일하게 만든다.` 이 말은 참으로 멋진 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말이 내포하고 있는 뜻은 아직도 조금은 모르겠다. 돈에 대한 부자들의 공부는 평생 계속 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에 대해서 배우기를 어려워하고 귀찮아하며 두려워한다. (나는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을 귀찮아 할 때가 있다. 그게 설령 돈버는 방법일지라도.) 그들(가난한 사람들과 중산층 사람들)은 직장에 가고, 월급을 받고, 가계부를 맞추고, 그뿐이다. 그것이 머리도 안 아프고 편하고, 안전하다. 그리고 돈 문제가 생기면 더 많은 돈, 안정된 직장이 문제를 해결해 줄거라 생각하면서 부업을 하고 전직을 한다. 하지만 결국에는 돈이 그들의 인생을 지배하게 되고, 돈이 그들의 감정을 관리하고, 결국 영혼까지 통제하는 인생을 되풀이하게 된다. 하지만, 부자들은 그런 에서 빠져나오려는 의지가 있고, 그러기 위해 피나는 공부와 노력을 한다는 것이다. 또 부자가 되려면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아야 한다고 했는데, 이 말은 내가 전적으로 동감하는 말이다. 이 책을 읽기 전부터 나는 남이 못보는 것을 봐야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곧 부자로 통하는 길이였기 때문이었다. 그 훌륭한 예는 `발명`이다. 남이 보지 못한 것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분석해서 불편함을 없애고 편리하게 바꾸고, 그것을 상품으로 만들어 팔면 부자가 되기 때문이다.두 번째 교훈은 `왜 부자들은 자녀들에게 돈에 관한 지식을 가르칠까`이다. 가난한 아버지는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부자 아버지는 돈에 관한 지식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얼마나 많이 버느냐가 아니라,에 얽매여 자유를 포기한 채 산다. 부자 아버지는 먼저 자산과 부채의 차이를 알고, 자산을 사야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저자는 자산과 부채의 정의를 이렇게 내리고 있다. 자산은 주머니에 돈을 넣는 어떤 것이다. 부채는 주머니에서 돈을 빼내는 어떤 것이다. 자산과 부채의 정의를 저자가 내리긴 했지만 난 이 정의를 잘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사전을 찾아보니 “자산(資産); 개인 또는 법인이 소유하는 토지건물기구금전 등의 총칭”, “부채(負債); 진 빛”이라고 나왔다. 이 책에 나온 정의는 사전적 정의와 어느 정도 차이는 있지만 사전적 정의를 보고 나서야 조금 이해가 갔다. 두 번째 교훈에서는 독자들이 비교적 쉽게 이해하게 하려고 많은 그림을 넣었다. 나도 글로는 잘 이해가 가지 않던 부분이 그림을 통해 보니까 쉽게 이해가 갔다.세 번째 교훈은 `부자들은 남을 위해 일하지 않고, 자신을 위해 사업을 한다`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을 위해서는 일하지 않는다. 부자들은 사치품을 맨 나중에 사는데, 가난한 사람들과 중산층 사람들은 그것을 맨 처음에 사는 경향이 있다. 가난한 사람과 중산층 사람들은 부자로 보이기 위해 큰 집과 보석, 모피, 혹은 고급 차를 사곤 한다. 그렇게 하면 부자로 는 보이지만, 사실 그들은 점점 더 빛만 질 뿐이다. 가난한 사람들과 중산층 사람들은 자신들의 피와 땀, 그리고 아이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유산으로 사치품을 산다. 이런것들은 자신을 위해 무엇인가를 투자한 것 같지만 오히려 부채를 벌어들인다. 그들은 회사를 위해서, 정부를 위해서, 은행을 위해서 일한다. 그러나, 부자들은 먼저 자신을 위해 일한다. 즉 그들은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면서 한편으로 자신의 사업을 한다.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 자신의 배움에, 자신의 사업에 먼저 투자한다. 그러면서 부채가 아닌 자산을 먼저 구축하면서 추가 수입을 발생시키려 한다. 저자는 이 책에 자기가 자산이라고 생각하는 범주를 나누어 놓았다. 1.내가 없어도 되는 사업. 주인은 나지만, 사업체는 다른 사람들게서 재물을 빼앗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준다는 이론이 결국은 가난한 사람과 중산층 사람들에게 가장 큰 고통을 주었다. 그래서 저자는 로빈후드는 영웅이 아니라고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1월부터 5월 중순까지는 결국 정부에 내기 위한 세금을 위해서 일하는 셈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세금의 정확한 원리와 기업을 통해 세금혜택을 받을 수 있는 지식을 갖추라고 주장한다. 저자가 말하는 금융IQ는 네 가지 분야의 지식으로 구성된다. 첫째, 회계 지식이 필요하다. 금융 보고서를 읽고 이해하는 능력이 있으면 사업의 강점과 약점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투자 지식이 필요하다. 셋째, 시장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이것은 수요와 공급의 과학이다.(사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다.) 넷째, 법률 지식이 필요하다. 기업이 제공하는 세금 혜택과 절세에 관한 지식이 있는 사람이 훨씬 더 빨리 부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업이 줄 수 있는 혜택은 다음과 같다. 1.세금혜택 ; 세금을 내기 전에 지출을 할 수 있다. 2.소송에서 보호받는다. 네 번째 교훈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기업이 있는 부자는 돈을 벌고 다음에 돈을 쓰고 세금을 내지만, 기업을 위해 일하는 사람은 돈을 번 다음 세금을 내고 돈을 쓴다.다섯 번째 교훈은 `부자들은 돈을 만든다.`이다. 학교 밖의 현실 세계에서는 학교 성적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이것을 종종 , , , , , 혹은 라고 부른다. 결국에는 이것이 학교 성적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현실 세계에서는 종종 똑똑한 사람보다 용감한 사람이 앞서가곤 한다. 따라서 돈을 모으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금융 지식(숫자들을 읽는 능력)과 투자 전략(돈이 돈을 만드는 과학), 시장의 법칙(수요와 공급), 그리고 법률 지식(회계, 기업, 그리고 정부의 규제와 규칙을 아는 것) 등을 알아야 한다. 이 모든 것을 갖춰 를 높여야만 스스로 돈을 창출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투자가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1.가장 흔한 타입으로, 꾸러미(패키지) 투자를한다.
누 벨 바 그--------------(nouvelle vague)들어가며"누벨바그 (nouvelle vague)"란 프랑스어로 새로운 물결 (영어로 "new wave")이란 말이고 "누벨 이마주 (nouvelle image)"란 새로운 이미지란 말이다. "누벨 바그"는 1950년 말에 프랑스에서 활동하던 젊은 감독들과 그들의 새로운 스타일의 영화를 한데 묶어 거론하기 위해 언론에서 만들어낸 말이다.이 새로운 스타일의 영화는 1951년에 창간된 레 까이에 뒤 씨네마 (Les Cahiers du Cinema) 라는 프랑스의 유명한 영화전문지에 영화이론을 피력했던 젊은 영화인들이 주도해서 생겨난 움직임인데 여기에 속했다가 나중에 감독으로 활동한 사람들로는 끌로드 샤브롤(Claude Chabrol), 프랑스와 뜨뤼포(Francois Truffaut), 쟝 뤽 고다르(Jean Luc Godard). 에링 로메르(Eric Romher), 쟉 리베트(Jacques Rivette)등이 있다.이외에도 루이 말르 (Louis Malle) 그리고 브리지트 바르도의 남편으로 더 유명했고 상업적으로 흘러 별로 언급 안되는 로줴 바딩(Roger Vadim)등도 포함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각각 독특한 자기만의 스타일로 영화를 만들었기 때문에 "누벨 바그"라는 것이 어떤 공통된 영화의 형식을 말하는 것은 아니고 공통점이 있다면 바로 그런 형식과 공식을 부인하고 개인적인 소재와 개인적인 스타일로 영화를 만들려는 취지였다.그래서 그들 이전의 프랑스에서는 낯익은 이야기 위주의 영화들이 영화회사들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이들 새로운 감독들은 작가주의를 외치며 영화를 개인적인 표현의 도구로 만들었다. 이 이후에 영화를 "누구누구의 작품"식으로 말하기 시작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누벨 바그(1958∼1964)'까이레뒤 시네마'의 젊은 비평가 프랑소와 트뤼포는 1954년 [프랑스 영화의 최근 경향]이라는 짧은 논문을 발표하여 기존 프랑스 영화를 공격적으로 비판하며 작가주의적 비평에 대한좋은 원작인나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잘 만들어진 영화를 만드는 '장인'이 아닌 자신의 세계를 영화 속에 투영하는 '작가'의 길을 걸었다.1950년대에 장 뤽 고다르, 프랑소와 트뤼포, 클로드 샤브롤 등은 에 비평을 썼다. 그리고 1950년대 말에 자신들의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누벨바그, 영어권에서는 뉴웨이브로 불려진 이 운동은 이른바 '작가주의'(영화는 전적으로 미장센을 책임지는 "감독"의 것이다)를 표방하며 이론과 실제에 있어 기존의 것에 전혀 얽매이지 않았다. 고다르, 트뤼포, 샤브롤, 에릭 로메르, 알랭 레네, 루이 말, 자크 리베트, 아그네스 바르다, 자크 드미 등은 세트촬영이 아닌 야외촬영과 즉흥성, 점프 컷과 핸드 헬드 카메라(들고 찍기), 거친 편집, 자기반영적인 거리두기 등을 통해 영화라는 매체를 완전히 새롭고 모던한 형식으로 재탄생 시켰다.누벨바그는 실존주의 철학에 근거한 사상적 배경을 갖고 있다. 누벨바그는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이 어떻게 표현되어 지는가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는 "표현과 형식의 논의"를 대중화시킨 운동이다.누벨바그의 가장 대표적인 감독들인 트뤼포와 고다르는 기교에 대해서는 사전적인 인물이다. 트뤼포는 에서는 사실주의적인 기법을 주로 사용했다. 그러나 에서는 표현주의적 편집기법을 사용했고, 에서는 몽타주기법을 주로 사용했다.고다르는 누벨바그를 발전시키는데 기여한 대담한 작가이다. (1959)는 핸드헬드카메라, 점프커트(이어지는 두개 쇼트의 연결이 급작스러운 것. 하나의 시간과 공간에서 다른 곳으로 아무 설명없이 전이된다. 관객을 어리둥절하게 함)를 대중화시켰다. 그는 그의 독특한 편집에다 사실주의적인 편집기법을 실험했었다. 많은 누벨바그 영화들의 매력은 기법의 자유스러운 절충성에 있다는 것이다. 사실주의적 또는 표현주의적 기교들이 신의 극적 요구에 따라 사용되어진다.이 운동은 편집기법이 유행이나 기술적인 제약, 또는 독단적인 선언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선택된 소재 그 자체의 본질에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는 관점을 보편화 사실감을 보장해 주었다.누벨바그의 신호탄 [400번의 구타]그 외에도 인과관계를 무시한 결말과 영화 곳곳에 보이는 유희적 유머는 젊은 그들의 영화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특징이었다. 고다르는 [자기만의 인생]에서 동료 트뤼포의 영화 [400번의 구타]가 상영되는 극장 앞 에 관객들이 길게 줄을 서는 장면을 삽입하였고, 샤브롤은 자신이 존경하는 히치콕의 영화들을 삽입하거나 공공연히 인용하여 관객들의 웃음을 자아내게 했다. 트뤼포의 [피아니스트를 쏴라] 에서 "내가 거짓말을 하면 우리 어머니가 죽을 거야"라는 대사가 나온 다음 한 노파가 갑자기 쓰러지는 장면이 삽입된다.트뤼포는 '까이에 뒤 시네마'의 평자 중 가장 매운 필치와 전투적인 발언을 일삼는 '앙팡 테리블 (Enfant Terrible)'이었다. 그는 노골적인 언사로 선배 영화인들의 작품을 할퀴었으며, 게다가 비타협적이었다. 그의 송곳 같은 논리에 선배영화인들은 혀를 내두르며 "당신이 그렇게 아는 것이 많다면 직접 영화를 찍어 보라"며 비아냥거렸다. 그를 비아냥거렸던 장 본인은 트뤼포의 장인인 유명한 영화배급자였다. 장인의 말에 불끈한 트 뤼포는 [400번의 구타]를 완성하였고 감독 트뤼포의 인생이 시작되었다.[400번의 구타]의 비평과 흥행의 동시 성공은 트뤼포에게 감독으로서의 확고한 위치와 영화작업에 커다란 자유를 주었다. 이 영화는 트뤼포의 자전적 영화이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트뤼포의 모습이 앙트완느 드와넬이라는 극중 소년에게 투영되어 현대 프랑스의 불합리한 모습들을 풍자적으로 보여주었다. 실제로 트뤼포는 영화 속의 앙트완느처럼 수업을 빼먹고 선생에게 말도 안되는 변명을 늘 어놓는 소년이었으며, 가출을 하여 방공호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영화 속의 아이들은 귀여운 천사의 이미지보다 천하의 악동이라 볼 수 있다. 앙트완느는 언제나 부모님께 반항하고 철모르는 행동을 일삼는 아이 지만, 관객들이 그의 행동에 공감하는 이유는 그가 살아가는 세상이 너무나 거칠고 힘들기 때문이다. 가난은 그의 부모를 다. 고다르는 자신의 정치적 입장 (마르크시즘에 심취한 좌파적 영화)을 영화의 전통적인 형식 파괴를 통해 서슴없이 드러냈다. 68년 프랑스의 학생운동이 일어나기 직전의 초기 영화에서 영화가 할 수 있는 모든 실험을 그 혼자서 해냈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1964년 이후 누벨 바그는 그 테두리가 엷어지기 시작한다. 그들은 저마다 자신의 세계 속으로 더욱 침잠하여 각자의 길을 떠난다. 고다르는 68년 학생운동 이후 비디오 작업을 통한 실험영화에 집착하고, 리베트는 특유의 영화적 영역을 구축하여 꾸준한 활동을 펼친다.샤브롤은 히치콕을 열렬히 사모하여 프랑스적인 서스펜스물을 만들며 로메르와 함께 프랑스를 지켰다. 트뤼포가 84년에 죽으면서 그의 새로운 작품은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지만 고다르를 비롯한 작가들은 꾸준 한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이미 그들은 더 이상 새로운 물결은 아니지만, 그들이 현대영화에 남긴 발자국은 영화사의 새로운 물결로 영원히 인정받을 것이다.작가주의라는 비판적인 배경이 구성되고 있는 동안 프랑스 영화산업의 조건들 또한 새로운 류의 영화감독에 호의를 보이게 하였다. 1940년대 말기에 상영된 헐리우드 영화의 범람은 "까이에 뒤 씨네마" 비평가들에 의한 재평가를 야기시켰을 뿐만 아니라 헐리우드 영화와의 경쟁에 응하려고 시도하는 프랑스 제작자들과 정부로부터의 일련의 중요한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1950년대 중반경 프랑스에서의 새로운 상황은 관객이 혁신과 훨씬 더 개인적인 성격의 영화제작을 받아들이도록 준비시켰다. 심리적인 리얼리즘에 기초한 표준적인 드라마 트루기를 통해 만들어진 지배적인 대본작가의 영화는 특이한 예술적 상상력과 다양한 양식을 가진 감독의 영화에 의해 물러나기 시작했다. 동시에 누벨바그의 선구자적인 작품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1955년에 만들어진 알렉상드르 아스트뤽의 [Les Mauvaises]와 아그네스 바르다의 [La Pointe courte]그리고 로제 바딤의 [그리고 신은 여자를 창조하였다]등이었다. 대단한 성공을 덕분에 그는 [흑인 오르페] 이후 다른 어떤 중요한 영화도 만들지 못하였다.파리에서 비평활동을 하다가 아주 흥미있는 [이간질하는 사람들](1957)을 포함한 몇몇 단편영화를 만든 작가이기도 한 프랑소와 트뤼포가 만든 [400번의 구타]는 양친으로부터 소외된 어린소년에 대한 반자전적인 보고이다. 이것은 처음으로 연기를 하는 12세의 장-삐에르레오 와 더불어 앙뜨완느 드와넬 시리즈를 시작하는 작품이었다. 만약 [400번의 구타]양식이 아니었다면 그 소재 역시 누벨바그 이전 영화들에 더욱 가까운 것이 될 수 있었다. 만약 그 영화의 인간성과 따뜻함이 트뤼포가 영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중 하나인 르느아르에게 무언가를 빛지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마찬가지로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특히 데 시카-자바티니의 [구두닦이]와 유사점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 영화에는 개인적인 스타일리스트임을 두드러져 보이게 하고 트뤼포 이후의 작업을 뒤돌아보게 하는 활발한 화려함이 있었다.마지막으로 알랭 레네가 감독한 [히로시마, 내사랑]이 있다. 이 작품은 프랑스 여배우와 일본 건축가의 덧없고 긴장된 정사를 다루고 있다. 개인적인 관계는 독일의 프랑스 점령과 원자탄에 의한 고통스러운 기억들과 연관되어 깊이 새겨졌다. 1959년 깐느에서는 세평의 영화들 중 많은 사람들에게 가장 성공적으로, 그리고 혁명적인 영화로 선보인 것은 [히로시마, 내사랑]이었다. 영화의 탁월한 시간, 공간의 통일, 기억에 대한 푸르스트적인 강조, 성적인 사랑과 세계적인 결합 등은 모두가 신기하고 흥미진진한, 결국 전형적으로 레네적인 것이었다.또한 1959년에는 샤브롤의 두 번째 작품인 [사촌들]이 등장하였는데 그것은 미묘한 성격연구와 [아름다운 세르쥬]에서 시작된 도덕적 타락에의 몰두를 지속시킨 것이었다. [시촌들]은 장차 새브롤의 작품에서 일정한 특질이 되는 것-유행을 따르는 상류계급 출신의 등장인물들 사이의 지배와 종속권을 다룬 어두운 매력, 그리고 고상하고 엄격한 이미지-을 보여주었다. 많은 누벨바그못했다.
박정희 평가 보고서-------------------먼저, 박정희 정권에 대한 나의 입장은 부정적임을 밝힌다.박정희는 가난한 농민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군인이었다. 그는 사상가나 이론가는 아니었다. 그가 농민의 아들이었다는 점에서 귀족 취미의 이승만이나 장면보다 민중적 호감을 얻은 것은 커다란 득이었다. 그러나 군인이었다는 점에서 국민적 지지를 얻는 데는 제약이 있었다. 그가 한때 좌익적 성향으로 징계를 받았다는 점도 그의 운신에 크게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복합적 요소들이 얽혀 박정희가 이룩한 근대화의 평가와 더불어 그에 대한 평가 또한 꽤 혼란스럽다. 박정희에 관한 평가를 함에 있어서 많은 사람들의 이견이 엇갈리는 부분은 경제 성장의 긍정적 평가와 인권탄압, 민주주의의 부정 등의 부정적 평가로 나뉠 것이다. 더욱 많은 평가가 있을 것이나 이 두 가지 측면에서의 나의 입장은, 박정희가 산업화를 통해 이룩한 경제 성장의 업적이 절대 반민주적 악행을 정당화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의 입장과 더불어 더욱 불행한 것은 박정희 독재의 18년은 경제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모든 부분에 관해 전반적으로 너무나 많은 영향을 끼쳤다. 정치, 사회, 언론, 통일, 외교 등의 많은 부분을 나눠 그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으나, 여기서는 많은 사람이 긍정적 평가를 하고 있는 경제성장 문제에 관해 이야기 하고자 한다. 그가 이룩한 경제성장은 결코 제대로 된 경제성장이라 볼 수 없음이 전반적인 나의 생각으로, 잘못된 경제성장이 얼마나 많은 영향을 주었는지에 관하여 살펴보겠다.경제성장의 전반적인 평가에 앞서 그가 일제시대에 자라나 5.16 쿠테타의 주역으로 제 3, 4 공화국의 대통령의 자리에 앉게 되는 과정을 간단하게 살펴보자. 박정희는 1917년 11월 14일 경북 선산에서 출생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가난한 환경 속에서 자라나 대구 사법학교를 거쳐 교사 생활을 하다가, 일제가 세운 만주국의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육사를 마친다. (정말 이해할 수 없? 나의 편협한 사고일지 몰라도 박정희 전대통령을 평가하기 이전에 인간 박정희에 관하여 그가 해방까지 일본군인으로 살았다는 이 사실 한 가지만으로도 충분히 부정적인 평가를 할 수 밖에 없다. ) 해방과 함께 일본 군인으로서 패전한 그는 해방후에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고 다시 대한민국의 군인으로서 살아가게 된다. 국군 지도부는 박정희와 같이 주로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박정희는 육사 5·8기생, 해병대와 함께 쿠테타를 일으켰고, 30년대 일본 청년장교들의 쿠테타를 염두에두고 부국강병이라는 '명치유신의 정신을 한국에서 실현'하려고 하였다. 1963년 12월 17일 박정희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제3공화국은 출발한다.박정희 집권 초기인 60년대 초 한국경제는 어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60년대의 경제 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배경은 세계경제와 밀접한 관계를 이루게 된다. 1959년 쿠바혁명과 베트남 전쟁, 한국의 4월혁명 등 민족운동이 제3세계에서 꽃피우자 미국은 후진국 경제를 발전시켜 제3세계 민족주의를 희석시키고 사회주의 세력의 확장을 막으려한다. 근대화론은 양적팽창만을 중요하게 여기고, 정치발전, 삶의 질을 무시하고 오직 경제성장만으로 모든 발전을 평가한 것으로 후진국이 선진국으로 진입할 수 있다는 장미빛 청사진을 제3세계에 제시하여 민족혁명을 저지하고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로 포섭하려는 제국주의 논리이다. 60년대 제3세계전략으로 세워진 근대화론에 발맞추어 미국은 무상원조를 유상차관으로 바꾸어가는데 이는 경제원조로 적자 상태인 미국의 사정에 의해서였다. 이에 동아시아에서 미국은 자국의 군사·경제적 부담을 줄이려고 미국의 핵우산 아래 경제성장을 이룬 일본을 하위동맹자로 삼았다. 한국전쟁 특수와 50년대 후반 호경기로 자본이 성장한 일본은 60년대 자본과잉 상태로 한국에 진출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고 이처럼 미·일 두 나라의 당면한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60년대 한국경제는 미·일을 우두머리로 수직적 국제분업을 이루고 경제한 문제점을 안고 이루어진 것이다. 1차 경제계발계획동안 박정희 정권은 외국 의존계획을 세우고 외국자본을 적극 유도한다. 2차 경제계발계획 기간동안에 경제성장률은 목표한 7%를 훨씬 넘는 10.5%를 이루었다. 하지만 곡물 수입액은 약 7배로 늘었고, 특히 사회간접자본의 확충으로 외국자본이 국내에 엄청나게 들어오게 된다. 1·2차 경제계발계획때부터 경제개발에 있어 꼭 필요한 기술과 자본은 원조에 의존함으로써 한국자본주의는 이를 갖추지 못하였고 원조에 의존하며 수출지향 발전 전략으로 한국 자본주의 발전은 미국 주도의 세계경제체제에 깊숙히 예속되고, 미·일 외자로 미·일 주도의 분업체계에 얽매이며 자립경제 달성은 멀어지게 된 것이다. 양적팽창만을 추구한 경제성장은 결과적으로야 성공을 거두었다고 볼 수 있겠지만 이러한 그 이면의 모습은 후에 지속적으로 한국의 경제발전에 악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는 요인이 된 것이다. 박정희 정권은 경제계발계획을 내세워 적극 경제에 개입했다. 박정희 정권은 독점자본가을 지원하면서 수출을 재촉하였고, 섬유·봉제·신발 등 경공업을 중심으로 하는 수출산업화 정책을 채택한 것은 한국 경제가 노동을 부의 유일한 원천으로 삼아 노동자를 저임금·장시간 노동과 빈곤으로 몰아넣었다.1963∼68년 동안 평군 8-9%의 높은 성장을 거듭한던 한국경제는 1969년부터 불황국면에 들어간다. 달러위기의 미국은 경공업 제품 수입을 규제하므로 한국의 주요 수출품목이던 경공업 제품이 팔리지 않게되는 것이 원인으로 작용한다. 미국은 또한 차관을 갚을 것을 재촉하고, 외자로 정장한 기업들은 돈줄이 막히고 수출도 안될 때 외채를 갚아야 하는 처지에 몰린다. 차관업체 89개 등 정부기업의 45%가 부실기업이었고 이 밖의 90여 개 기업은 총자본 가운데 타인 자본 의존도가 90%를 넘는 부실기업이었다. 1971년까지 도산한 기업은 200여개를 넘고 이는 60년대의 경제성장이 잘못 이루어진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후 국가와 독점자본은 자본축적위기를 벗어 안팍의 혼란을 극복하고 경제성장을 이끌 지도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유신체제를 정당화 시키는 박정희 정권은 남북대화 재개를 유신체재 수립에 적극 이용하는데 이는 통일준비를 위해 강한 영도력의 새로운 체제가 요구된다는 논리로써 평화통일을 위해 독재가 필요하다는 말도 안되는 박정희 강변이라 할 수 있다. 12.27 유신헌법을 공포하고 박정희가 8대 대통령에 오르면서 제4공화국은 시작된다. 유신체제는 60년대 말에 나타난 종속적인 자본축적 방식의 위기와 계급갈등을 국가 권력이 직접 나서서 재편한 체제였다. 노동쟁의를 규제하고, 노동자의 기본권은 무시하며 노동자를 잠재우는 조치들과 함께 박정희 정권은 자본운동을 자유롭게 하는 조치를 취해가고, '8·3조치'는 경제부문의 유신쿠테타로 볼 수 있다. 국가의 비정상적인 8·3조치 덕분에 독점대기업은 다시 한 번 자본 축적의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일단 자본축적 위기에서 벗어난 박정희 정권은 경제개발의 주요 역점을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으로 옮겼다. 중화학공업은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과 일본의 자본 과잉해결을 위해 한국이 이용된 것이라 볼 수 있는데, 제조업 생산의 중추적 역할과, 국민총생산 규모가 늘어나긴 했지만 국내 산업간의 분업적 관련 없이 수출위주의 노동집약적 산업과 공해 산업을 중심으로 개발되었다. 수출형 중화학공업은 '수출을 위한 수입 확대의 주역'이었으며 주요 중화학 공업 부문은 일본차관으로 건설됨으로써 한국의 대일 의존도는 높아지고 일본은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누리던 지위를 점차 대신하게 된다. 중화학 공업이 추진될수록 한국경제는 일본에 더욱 종속되었다. 또한 정부의 중화학 공업화 지원은 60년대 수출위주 공업화를 통해 경제를 지배하게된 재벌기업을 70년대에는 중화학 공업으로 자본축적과 성장을 이룰 수 있게 하여 재벌군을 형성한다. 재벌이 망하면 경제가 무너진다는 말이 만들어질 정도로 재벌은 소유와 생산을 장악하여 경제를 지배했다. 중화학공업화를 비롯한 박정희 정권의 숱한 정책들은 한국을 재벌공화국으로 만든 것이협소로 한국은 해외수출을 목적으로 투자한 것으로서 이는 소비예측이 어렵고, 해외시장의 변동에 민감하며, 과잉투자의 우려를 갖고 있었으며 실제로 70년대 말 경제위기로 나타났다. 이렇게 발전되어진 경제성장을 과연 잘한 일이라고만 말 할 수 있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도 문제되는 경제위기는 어쩌면 박정희 정권 때부터라고 말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외국에서 돈을 빌려다가 경제발전을 위한 근대화를 이루는 것쯤이야 어느 누구라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보여주는 국가 주도의 경제 발전에서의 정책 또한 어처구니없는 것들이 많다. 정말로 이러한 문제들을 모두 알고 난 연후에도 '박정희가 독재를 했지만 경제는 잘했어'라는 말을 할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박정희는 국민의 저항권을 박탈하고 대중의 국정참여의 통로를 봉쇄하였으며 노동삼권을 제약하고 학생집단의 정의로운 운동을 탄압하였다. 이런 것들은 산업화 ( 너무나도 잘 못 알려진 경제성장을 나는 산업화라 부르고 싶다. ) 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강화되었으며 정치적 분권화나 타협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또한 박정희는 산업화를 이룩하고 나서 무엇을 하려 했을까? 산업화만이 목적이었을까? 산업화만이 목적이었다면 누구를 위한 산업화였을까? 아마도 정권유지를 위한 산업화가 아니었을까? 박정희에게 깊은 통찰력과 장래를 내다보는 넓은 시야가 있었다면 그 시대 6·70년대의 경제위기는 가져오지 않았을 것이고 우리의 산업화는 보다 내용 있고 질적으로 충실한 산업화를 이룩했을 지도 모를 것이다.박정희 기념관 건립추진위원회 관계자는 “모든 전직 대통령에 대한 여론조사에서 박정희 전대통령의 인기는 80%를 넘는다.”면서 “박정희 전대통령을 매도하는 여론은 전체 국민의 소수이기 때문에 신경쓰지 않는다.”고 말했다. 또한 박정희 기념사업회는“구미 생가 방문객은 97년 10만930명에서 98년 13만77명, 99년 18만7935명, 지난해 28만3191명으로 매년 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다.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 서 평 )"세월은 하루가 다르게 변했고, 우리 모두는 수년동안 미처 예상하지 못한 변화에 대처하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했지만 그에 대한 적절한 대응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이 책의 내용은 시카고의 한 레스토랑에 모인 고등학교 동창모임에서 각자의 변화된 생활에 대해 담소를 나누는데, 그들 중 한 명이 두 마리 생쥐와 두 꼬마인간을 등장인물로 한 우화를 들려주는데서 시작된다.스니프와 스커리라는 생쥐, 헴과 허라는 꼬마인간. 모두 미로 속에서 치즈가 있는 창고를 찾아 그것을 즐기며 나날을 보냈다. 어느 날 갑자기 치즈가 없어졌다. 단순하고 비능률적인 시도와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매일 하던 일을 게을리하지 않은 스니프와 스커리는 본능적으로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감지하고 새 치즈창고를찾으러 미로 속으로 길을 떠났다. 그러나 매일 조금씩 일어나고 있는 변화를 주의 깊게 관찰하지 않았던 헴과 허는 치즈창고에 치즈가 없어졌다는 현실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누가 내 치즈를 옮겼어?'라고 하며, 하루 이틀동안 창고를 지키고 있다가 세월이 지날수록 치즈가 바닥이 났다는 것을 실감하면서도 그 자리에 주저앉아 어떻게 해야되냐고 되뇌며 많은 시간을 낭비했다. 막막한 미래에 대한 불안한 마음으로 과거의 즐거웠던 일만 생각하며 주위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새로운 사태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치즈'에 걸고 있던 희망은 현재 자신의 삶, 즉 생활의 보장인 동시에 미래의 안정이었던 것이다. 이들이 아무런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갈팡질팡하고 있는 사이, 스니프와 스커리는 이미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마침내 새로운 치즈창고에 도착했다. 난생 처음 보는 온갖 종류의 치즈가 그들을 반겼다.허는 깨달았다. 사라진 치즈에 대해 집착하면 할수록 상황은 악화되기만 할 뿐 자신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는 불안한 마음이지만 친구인 헴과 함께 새 치즈를 찾으러 떠나고 싶었다. 그러나 헴은 아직도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 라는 어리석은 질문에 빠져있었다. "우리주위의 환경은 시시각각 변하고 있는데, 우리는 항상 그대로 이길 원하지. 이번에도 그랬던 것 같아. 그게 삶이 아닐까? 봐, 인생은 변하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있잖아. 우리도 그렇게 해야 돼." 허는 쇠약해진 친구를 바라보며 설득하려고 노력했지만 헴은 두려움이 분노로 바뀌어 허가 하는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어두운 미로 속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역경을 이겨내면서 희망을 가지게 되었고 벽에 교훈을 남기며 지나갔다.아직도 과거에 대한 집착과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망설이고 있는 헴을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자기 자신을 위한 교훈이기도 했다. 그는 과거에 미련을 두지 않고 미래에 적응해가고 있었으며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힘이 그를 더욱 빠른 속도로 달리게 했다. 마침내 허는 자신의 영혼을 쉴 만한 쉼터를 발견하게 되었다. 미로 속을 영원히 헤매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갑자기 여행이 신속하고 행복하게 끝나버린 것이다. 그 쉼터에서는 옛 친구 스니프와 스커리가 허를 반겨주었다. 그들의 통통한 모습을 보고 오래 전에 이곳을 발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허는 변화에 대처하는 방법을 벽에 적었다. 『변화는 항상 일어나고 있다. 변화는 치즈를 계속 옮겨 놓는다. 변화를 예상하라. 치즈가 오래된 것인지 자주 냄새를 맡아 보라. 변화에 신속히 적응하라. 사라져버린 치즈에 대한 미련을 빨리 버릴수록, 새 치즈를 보다 빨리 발견할 수 있다. 자신도 변해야 한다. 치즈와 함께 움직여라. 변화를 즐기라. 모험에서 흘러나오는 향기와 새 치즈의 맛을 즐겨라. 신속히 변화를 준비하고 그 변화를 즐기라. 변화는 치즈를 계속 옮겨놓는다』. 허의 경험은 변화의 시기가 늦었다고 생각할 때도 너무 늦지 않았다는 교훈을 주고 있었다.그 다음의 내용은 이 우화에 대한 토론을 짤막하게 나타내고 있다. 우리는 우화 속의 누구일까? 빠르게 바뀌는 세상을 누구처럼 변화하고 대처하고 있는지... 서로의 의견을 나누는 장면으로 이어져 끝을 맺는다.
쿠르베 (Gustave Courbet)-----------------------1819. 6. 10 ∼ 1877. 12. 31국 적 : 프랑스활동분야 : 예 술출 생 지 : 프랑스 프랑슈콩테주 오르낭주요작품 : 《오르낭의 매장》(1849)《나부와 앵무새》(1866)《사슴의 은신처》(1866)초기생애와 작품쿠르베는 프랑스 동부에서 부유한 농부인 아버지 엘레오노르 레지와 어머니 실비 쿠르베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왕립 중학교와 브장송 미술대학을 다닌 뒤 1841년 명목상으로는 법률을 공부하기 위해 파리에 갔다. 그러나 그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대가들의 그림들을 연구하는데 더욱 진지하게 몰두했다. 그들 부자는 서로의 의견을 매우 존중했는데, 쿠르베가 지방 법률가보다는 화가가 될 작정이라고 아버지에게 말하자, 아버지는 "만일 도중에 그만두게 된다면 그것은 내가 아니라 너일 것이다"라고 하면서 동의했다. 또한 필요하다면 땅과 포도원, 집까지 팔겠다고 덧붙였다. 재정적인 불안에서 완전히 벗어나자 청년 쿠르베는 미술에만 완전히 몰두할 수 있었다.디에고 벨라스케스와 리베라 등 17세기 스페인 화가들의 그림들을 모사함으로써 숙련된 기교를 얻은 그는 여러 번 낙선하다가 1842년에 그린 자화상 [검은 개를 데리고 있는 쿠르베 Courbet with a Black Dog]로 마침내 25세가 되던 1844년에 왕립 아카데미의 후원으로 당시 프랑스에서 해마다 열리는 유일한 공공 미술전람회인 살롱 전에 입선했다. 그 뒤 몇 해 동안 그의 작품이 비전통적인 양식과 대담한 주제 때문에 살롱의 심사원들에게 3번이나 거절당했지만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 출품했다.사실주의 운동의 선도자쿠르베는 당대의 낭만주의 회화에 반발하여 일상적인 사건들을 그림의 주제로 택했다. 인물들을 빽빽이 그려 넣은 어두운 배경의 대작 [화가의 작업실 The Artist's Studio](1855)은 당시 미술계로부터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1860년대부터 그의 작품들은 좀더 감각적이고 다채로워졌다.사실주의의 태동도는 실패했으며, 화가인 외젠 들라크루아만이 그의 일기에서 쿠르베의 대담성과 재능을 칭찬했다. 쿠르베는 1867년 다시 한번 그룹전을 시도했으나 또다시 실패했다.1856년 쿠르베는 독일을 방문하여 동료 미술가들의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3년 뒤 40세가 된 그는 자신의 조국에서는 여전히 혹독한 비평을 받았지만 이제 명백히 미술의 대가가 되었으며, 전통적인 회화 양식들이 예술적 착상에 장애만 될 뿐이라고 생각하고 거기에서 등을 돌린 새 세대 화가들의 지도자로서 인정받게 되었다. 쿠르베는 온갖 장르의 작품을 만들었다. 여성 찬미자였던 그는 매우 따뜻한 느낌의 관능적인 그림들에서 여성의 누드를 예찬했다. 훌륭한 초상화들도 그렸지만, 무엇보다도 프랑슈콩테를 찬양해 그곳의 숲·샘·바위·벼랑들을 그리면서 거기에 불멸의 생명을 불어넣었다. 1865년에는 에트르타와 도빌, 트루빌 등 제2제정시대에 인기가 있었던 휴양지들의 벼랑을 그리기 시작했다.그는 대기의 흐름과 폭풍우가 몰아치는 하늘을 주의 깊게 관찰해 일련의 해안 풍경화들에서 폭풍우 치는 장면을 성공적으로 묘사했다. 이 그림들은 미술계를 놀라게 하고 인상주의로 나아가는 길을 여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 뒤 인상주의는 대상을 엄격한 윤곽선들로 형상화하기보다는 대상에 부딪쳐 반사된 광선 및 색채를 그려 더욱 놀랄 만한 감각적 표현을 성취했다.정치활동1870년 프랑스-독일 전쟁이 일어나 제2제정이 무너지면서 제3공화국이 선포되었다. 1871년 3월 18일 파리 코뮌(파리에 세워진 혁명정부)이 수립되어, 프랑스에 체류중인 독일인들 및 나폴레옹 3세에게 계속 충성하는 베르사유군과 싸울 것을 다짐했다. 파리 코뮌 사람들은 베르사유군이 독일과 휴전 조약을 맺은 것을 불명예스럽게 여겼다. 그 무렵 미술가동맹의 회장으로 선출되어 박물관들을 다시 열고 해마다 열리는 살롱전을 주관할 임무를 맡은 쿠르베는 코뮌의 혁명적 활동에 참여했다. 그는 박물관들을 여는 대신 중요한 공공기념관들, 특히 세브르 자기공장과 퐁텐블로의 궁전을 보호하기로 결답게 꾸미거나 이상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정확하게 모사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쿠르베는 회화에서 상투적인 수법과 인위적인 이상주의, 낡은 양식들을 없애 버렸다.쿠르베 Gustave Courbet(1819∼1877)1819년 6월 10일, 프랑스의 오르낭에서 출생. 부친은 부유한 지주.1937년 (18세) 부친의 뜻에 따라 법률 공부를 하기 위해 브쟝손에 있는 왕립 학교에입학했는데, 법률보다 그림에 뜻을 두고 프라젤로에게서 기초를 배움.1840년 (21세) 화가가 되기 위해 파리로 나가기로 결심.거의 혼자서 루브르 미술관의 명작들을 모사, 아카데미 슈이스에도 다님.쿠르베는 루브르에서 스페인파, 네덜란드파, 베네치아파 등 옛 화가들에 대한 연구를 철저히 했다. 조각가 로댕, 화가 모네 출생.1844년 (25세) 〈검은 개를 데리고 다니는 쿠르베〉가 처음으로 살롱에 입선.영국의 화가 터너 〈비·증기·속력〉을 발표. 루소 출생.1845년 (26세) 살롱에 5점을 출품했는데, 〈기타를 치는 젊은이〉만 입선.뒤마, 「몽테 크리 스토 백작」발표.1847년 (28세) 시인이자 미술 평론을 하는 보들레르와 알게 되어 그의 초상화를 그림.1848년 (29세) 비어 홀 앙드레르에서 코로, 도미에, 사회주의자 프루동, 평론가 뒤랑티 등과 자주 어울림.1849년 (30세) 〈오르낭의 장례식〉, 〈돌을 깨는 사람〉제작.1853년 (34세) 〈목욕하는 여인들〉살롱에서 악평을 받음.1854년 (35세) 브뤼아스 초대로 몽펠리에에 체재. 〈안녕하시오 쿠르베씨〉제작.1855년 (36세)〈화실〉과 〈오르낭의 장례식〉이 만국 박람회 심사위원들에 의해 거부됨.비평가들의 공격과 고전, 낭만 양파에서 받은 거부 반응에 격분, 이에 대항하 기 위해 만국 박람회장 바로 앞에서 개인전 개최.이때부터 스스로를 리얼리스트로 자처하게 됨. 피사로, 마네, 드가 등이 쿠르 베의 기개에 감명을 받음.1856년 (37세) 〈세느강변의 소녀들〉제작.1857년 (38세) 〈세느강변의 소녀들〉, 〈설중의 사슴〉 등 살롱제에 있어서나 묘법에 있어 쿠르베의 제반 특성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어 그의 예술이 이미 청년 시대에 든든히 형성되어 있음을 엿보여 준다. 화면은 인물의 얼굴을 향한 삼각형의 구도 속에 인물과 개가 자리잡고 배경은 암벽과 하늘로 처리하였다. 검은 인물의 옷과 개의 모습이 밝은 색조의 암벽과 원경(遠景)에 대조를 이루면서 한층 안정감을 주고 있다.줄리엣 쿠르베의 초상 (1844)1844년에 제작, 이듬해인 45년 살롱에 출품했으나 낙선된 작품이다. 모델인 줄리엣은 쿠르베의 세 누이동생 중 막내로, 그녀는 오빠를 누구보다도 존경했는데 쿠르베의 사후에는 그의 불명예에 대한 일체의 자료를 소각할 정도로 세심한 관심을 보여주기도 했다. 1844년이라면 쿠르베는 음영이 짙은 초상화를 그리고 있었던 시기인데, 이 작품에서는 그런 요소를 발견할 수 없다. 밝고 명랑한 분위기가 화면을 지배하고 있다. 달걀형의 얼굴과 꼭 다문 입, 그리고 맑은 눈이 총명 한 여인의 이미지를 한결 부각시키는데, 사각형의 칼라와 둥근 등의자의 선, 여기에 어울리는 배경의 커튼과 카네이션의 선이 한결 장식적인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해 먹1845년 살롱에서 낙선한 작품으로 원제는 이었다. 달아맨 해먹에 누워 잠자고 있는 부르주아 소녀를 그린 것으로, 소녀의 포즈는 S자 형으로 완만한 곡선을 이루고 있다. 극히 일상적인 모티브이면서 소녀의 모습에선 어딘가 모르게 신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과 비슷한 고전적인 취미를 보여준다. 숲과 인물이 자아내는 신비로운 분위기가 현실의 실감을 벗어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에서 보이는 젊은 날의 쿠르베의 정감이 여기서도 두드러지게 드러나고 있다.그레고와르 아주머니 (1855 . Oil on canvas)1848년에서 54년에 걸쳐, 쿠르베를 중심으로 한 일군의 리얼리스트들이 파리 오토피유가(街) 비어홀 앙드레르에 매일 저녁 모여들어 토론을 벌였다. 그레고와르 아주머니는 이 비어홀 카운터에 언제나 앉아 있던 집주인으로 이들 리얼리스트들과는 굉장히 친숙해 있었다. 화가 여인의 포즈는 다분히 신화화에서 엿볼 수 있는 극적인 동작을 취하고 있다.보리를 까부르는 여인들한 여인은 열심히 보리를 까불고 있고, 또 한 여인은 일일이 손으로 낱알을 가려내고 있다. 오른편에는 한 소년이 뒤주인 듯한 나무통 안을 들여다보고 있다. 평범한 농가의 실내 정경을 붙잡은 것이다. 곡식을 가득 넣은 큰 자루들이 벽에 기대 세워져 있고 방 구석 구석에 그릇들이 널려 있다. 쿠르베는 현실을 즉사(卽寫)하면서도 가끔 고전이나 민중 판화 같은 데서 발상을 얻거나 구도를 원용해 오고 있는데, 이 작품의 발상이나 구도 역시 다분히 벨라스케즈의 을 연상케 하는 바가 많다. 아마도 그는 일하는 여성들의 모습을 통해 보이지 않는 유락(遊樂)의 여성들을 대비시켜 사회적인 의미를 강조하려고 한 것인지도 모른다.만남 (안녕하세요?) (1867 . Oil on canvas . 129 149㎝ . 몽펠리에 파브르 미술관)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그린다는 쿠르베의 사실주의 사상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대표작의 하나. 화구 (畵具)가 담긴 상자를 짊어지고 막 역마차에서 내린 여행자 차림의 쿠르베 앞에 몽펠리에 시의 미술 애호가인 알프레드 브뤼야스가 마중나와 인사하는 장면이다. 맑은 남 프랑스의 들녘에 선 화가와 그를 마중하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은 너무도 일상적인, 그렇기 때문에 그림의 소재로서는 걸맞지 않게 보이는 장면을 소재로서 다루었다는 데서 쿠르베의 현실에 대한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본다는 생각이 적나라하게 묘출되고 있는 것이다. 빛으로 충만한 남 프랑스의 광은, 쿠르베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려는 밝은 심경의 반영처럼 시사 된다.세느강변의 처녀들 (1856∼1857 . Oil on canvas . 174 200㎝ . 파리 프티팔레 미술관)1857년 살롱에 출품되어 물의를 일으켰던 작품. 여자들의 표정이나 자태가 음란하다는 도덕적 입장에서 비난을 받았다. 이러한 도덕적 비난은 곧 인상파인 마네의 로 이어지는 전조이자 인상파가 즐겨 다루는 행락(行樂)의 정경의 효시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