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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양현대사] 라틴아메리카의 혁명
    Ⅰ. 서론라틴아메리카는 지구상에서 우리 한국과 가장 멀리 떨어져있는 지역이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라틴아메리카에 대해서는 우리의 관심이나 지식이 다른 지역에 비해 많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먼 거리이기는 하나 같은 제3세계 국가로서, 식민 지배의 경험을 공유하는 국가로서 우리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고 볼 수 있다.제 2차세계대전이 끝난 뒤 세계정치 질서에 있어 가장 괄목할만한 변화는 제3세계 의 등장이라고 할 수 있다. 강대국 중심의 기존 국제질서에 도전하면서 새로운 국제경제질서의 수립을 주창하고 있는 제3세계 국가들은 국제사회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대다수가 서구 자본주의 열강의 식민을 체험한 이들은 식민지상태로부터의 해방을 확인하고 식민지주의, 신식민지주의의 극복과 독자적인 이데올로기의 추구를 통해 경제사회개혁을 수행해가고 있다. 이러한 주체적인 발전과정은 서구열강 중심의 정치 경제질서 및 문화에 대한 전면적 비판에서 출발하고, 또 제3세계국가들이 당면하고 있는 저개발성 및 경제적 종속의 극복이라는 문제는 제3세계국가들의 자기인식과 그 맥을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라틴아메리카는 대부분의 국가가 제3세계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들 국가의 현대사는 바로 이러한 저개발성과 종속의 극복이라는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된 격동의 역사로 할 수 있으며, 도 이들 국가들이 쿠데타, 군사독재, 내전, 혁명 등으로 점철된 현대사를 보낸 것으로 보아 제3세계 국가들의 주체적 발전이 그만큼 어렵고 험난하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또한 식민지적 관계가 올바로 청산되지 못한 상태에서의 경제개발은 그 양적 발전에도 결국 경제적 종속의 사슬을 끊지 못했으며, 그 결과 민족자립의 기반을 오히려 약화시켰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강문구, 『포위된 혁명-니카라과 혁명 10년사의 현대적 조명』도서출판 나라사랑, 1993.9. p14.한편, 이렇게 복잡한 외세의 영향에서 오랜 역사동안 복종과 억압을 강요당해 온 라틴아메리카 대륙에서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오늘날까지 그 영까지 계속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노예제는 멕시코나 칠레와 달리 노예 자체를 사용하고 있었으며, 노예 중 다수가 아프리카출신의 흑인노예였다는 점에서 특징이 있다. 많은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이 19세기 전반에 독립하여 노예제폐지를 선언하나 쿠바는 1880년에 이르러서야 노예제가 폐지되고 독립은 1898년에 이루어졌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쿠바의 노예제는 타국에 비해 가혹했다 할 수 있다.쿠바의 노예제는 사탕수수 재배와 함께 시작되고 발전되었는데 이는 19세기, 특히 19세기중엽에 전성기를 맞았다. 그래서 이후 쿠바의 산업은 농업, 특히 사탕수수재배에 치중하게 되고 이는 쿠바사회의 노예제적인 성격을 보여준다. 쿠바에서 생산된 사탕은 스페인 상인에 의해 유럽각국에 판매되었다. 이러한 노예지배의 이데올로기는 당연히 인종차별로서 정치나 기타 지배층이 되기 위해서는 백인이어야되었고, 다른 라틴아메리카국가와는 달리 인디오의 대부분이 일찍 사멸했기 때문에 메스티소같은 혼혈인종이 거의 없었고 이에 따라 인종차별이 더욱 극심했던 것이다.미국의 쿠바에 대한 경제적 진출은 1836년 철도 건설에서 시작해 곧 사탕산업으로 나아갔다. 쿠바에 대한 미국의 본격적인 자본투자는 19세기 말부터였다. 미국의 부르주아들은 남북전쟁을 통해 국가권력을 장악하였고 보호관세정책에 의해 독점의 형성을 시도했으며 이는 철강과 제당분야에서 형성되었고 이후 불경기(프론티어의 소멸과 1893년공황)는 해외투자를 촉진하였다. 물론 다른 서구열강에서도 투자를 했지만 미국에 의해 생산과 판매가 되어 쿠바가 정치적으로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다 하더라도 미서전쟁(1898년)당시 이미 경제적으로 미국의 지배를 받고 있다 볼 수 있는 것이다. 19세기 말에 사탕을 중심으로 경제를 실질적으로 장악하던 미국은 쿠바의 독립을 뒤에서 연출하였으며 독립과 동시에 그 관계를 결정적으로 만들었다. 이후 미국기업은 쿠바 사탕생산부분에서 독점을 하게 되었고 사탕생산은 쿠바생산액의 약 4할을 점하였고 수출액전체에서 사탕이 차지하는 비율도 85%로를 비롯한 20명정도는 오리엔테주의 산중으로 들어가 게릴라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지역은 수도와 멀리 떨어진, 사탕수수생산중심지로 노예해방운동과 독립운동의 전통을 가진 지역이었다. 게릴라운동이야말로 쿠바혁명의 가장 큰 특징이었다. 쿠바혁명이 공산당이 지도한 혁명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혁명의 특징을 구한다면 이는 카스트로가 7월26일 운동이라는 혁명주체를 형성함으로써 이미 공산당을 부정하고 게릴라운동을 상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게릴라운동은 중국혁명과 베트남전쟁에서의 게릴라와 다른 측면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반기존정당주의, 반지식인주의, 경험적 체험주의를 근본으로 혁명이론을 체계화하고 또 게릴라운동의 전제로 삼았다.체 게바라는 혁명전쟁 안에서 혁명은 기다리는 것이 아니고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일종의 주의주의(主意主義)를 표명하고 있다. 그는 혁명할 의지가 있는 소수가 혁명의 조건을 만들어낸다는 것으로 다시말해 인간의 존엄이 혁명을 이룩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의주의는 일종의 정신주의, 금욕적 윤리로서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게릴라전사들은 제대로 인간취급을 받지 못하고 살아왔던 대중들에게 도움을 받으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예의와 함께 혁명이념과 노동에 대한 생각을 가르쳐주는 것을 통해 대중의 지지를 받는 것이 당시 게릴라가 이길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이었던 것이다.카스트로의 7월26일 운동 단체가 점차 세력을 확대하고 있었던 것을 숨기던 바티스타 행정부는 뉴욕타임즈의 특파원이 카스트로를 인터뷰하며 그 기만이 폭로되고 이후 점차 반 바티스타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후 57년 혁명위원회가 결성되고 이러한 움직임이 미국에도 반영되어 결국 미국은 바티스타 정부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게 된다.인민사회당은 점차 확대하여 가는 반바티스타정권운동을 무시할 수 없었고 결국 카스트로가 결행한 4월파업을 계기로 7월26일 운동과 결합하게 되었고 이에 반바티스타세력은 크게 확대되었다. 4월파업은 실패하게 되지만 바티스타군에서는 탈영병이 속출하고 반바티스타파의 세력은 카라카스 협하는 중점적 부분인데 이에 따라 농지개혁은 낡은 계층관계를 해소함으로써 민족산업에 대한 원료공급, 식량충족, 외화획득을 이루고, 주민들의 소비를 향상시키고 국내시장을 확대시키며 그 연장선상에서 새로운 산업을 창설하려 하고 있었다. 이 농지개혁은 적극적으로 실시되어 새로운 쿠바의 모색의 기초가 이루어졌다. 소농민도 소위 말하는 독립자영농이 아니고 연맹에 의해 조직화되어 농지개혁공사 밑에서 협동조합과 조화를 이룬 발전이 시도되었다.제2차농지개혁은 카스트로가 쿠바혁명이 사회주의혁명임을 선언한 이후이기 때문에 사회주의 정권하의 개혁이었다. 1차개혁이 시행됨에 따라 농촌의 부농 내지 중농이 반혁명운동의 근거지가 되는 경향이 있게 되자 이런 것에 대한 대책으로 농지의 사적소유규모를 5카바렐리아(67.1㏊)이며, 그 이하의 소농소유지는 사회주의 하에서도 보장된다는 것이다. 그 결과 국유부분이 70%, 사유부분이 30%로서 기본적인 개혁은 끝났다.쿠바의 농지개혁은 극히 독특한 것으로 이는 노예상태에서 살아오던 농업노동자에게 토지를 분배하더라도 생산성을 향상시킬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 농지의 국유화를 통해 공동체적 관계와 낡은 갈등의 동시극복이라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엄청나게 늘어난 소농들은 앞으로의 국가수행정책에 부담요소로 작용하게 되었다.또 농지분배의 측면은 성공했지만 이를 통해 생산력의 증대나 다양성의 확보 등을 이루어내지는 못하였다.이러한 전환을 보면, 쿠바의 농업이 그 태생부터 선진국에 의한 모노컬츄어의 확대에 의해 왜곡된 것이라 이것이 2-3년만에 해소되기에는 너무 그 생산력이 낮았고, 농지가 국유화되어 과거의 낡은 단계와 공동체 관계가 끊어지더라도 사탕의 생산량이 감소하여 경제위기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소련은 쿠바를 의도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사탕모노컬추어의 해체를 바라지 않고 무역과 원조를 통해 지배하고자 하였다. 결국 쿠바는 사탕모노컬추어를 유지하고 이것에 의해 소련과의 결합을 강화하여, 중소대립의 와중에서 중국비판 투자불균형이 문제였다. 그결과 사회주의시장 을 통해 수요와 공급의 균형을 맞춰야한다는 주장이 대두되었고 물질적자극론 역시 대두되어 부분적으로 정책에 나타나고 있었다. 이러한 논의를 쿠바에 도입하려고 시도하자 게바라는 결렬하게 반대하였다. 그는 게릴라 운동의 사상이 살아있었는데 혁명의 객관적 조건보다는 진실로 혁명을 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가 없는가라는 것이 문제라고 보았던 생각을 가지고 사회주의 건설에 직면해서는 대중의 사회를 자신의 손으로 건설하겠다는 의지력과 의식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게바라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식민주의와 결합한 자본주의 세계를 넘어 성립한 쿠바의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을 기초로 하여 사회주의의 이념을 지니는 것이었고 이는 게릴라전사의 자기희생적 정신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이 집약된 것이 새로운 인간(nuevo hombre)이었다. 이는 계획에 따라 할당된 노동을 자발적으로 적극적으로 달성하는 것은 물론 국가가 필요하다면 자신의 사적인 생활은 버리고 달려가는 노동자이며, 타국이 침략하면 죽음으로 쿠바를 지키는 의용민병이었다. 이러한 새로운 인간 이 계획적으로 노동하여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게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소련과 동구권의 상태는 정치적 이념을 망각하고 일종의 금전주의에 빠져 자본주의의 가치관을 온존시키며 발전이 계속될 수록 사회주의의 이행이 문제가 되는 체제로 체게바라에게는 비치게 되었고 이는 1964년 소련을 방문하여 한 토론에서의 비판과 이후 65년 사회주의 비판발언도 이러한 맥락속에 있다 하겠다.이렇게 하여 쿠바에서는 새로운 인간 에 기초한 사회주의가 제창된 것이지만 현실적으로는 금권주의에서 해방된지 얼마되지 않았기 때문에 금전을 원하는 의식이 강하였고, 새로운 인간이라는 이념을 정착시키는 것은 큰 어려움에 봉착했다. 물론 게바라도 이러한 어려움을 알고 있었지만 그의 사상속에 깔려있는 인간에 대한 인식은 금전만을 쫓는 게 아니고 더 고귀하고 숭고한 존재라는 철학이 있었기 때문말았다.
    인문/어학| 2003.06.08| 14페이지| 1,000원| 조회(5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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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전과학관 견학] 대전국립중앙과학관에 다녀와서 평가A좋아요
    국립중앙과학관은 각종 과학기술 자료를 모아 연구, 전시, 교육하는 국가의 과학문화시설로서, 기초과학,산업기술,과학기술사,자연사에 관한 자료를 수집, 보존, 연구 및 전시하여 국민들에게 과학기술 지식을 보급하고 생활의 과학화를 촉진하는 기관이다.1. 건물의 외양과 주위 환경과학관의 외부는 수준 급으로 매우 좋은 환경을 자랑한다. 넓은 부지에 과학관의 이미지를 가지는 건물로 잘 지었다. 또한 상설전시관과 특별전시관, 사무실을 모두 분리해 놓아 관람객들이나 연구자, 공무를 보러 온 사람들간 섞이지 않아 좋았다. 그러나 조경이 아직은 부족하고 초기투자이후 건물에 대한 투자가 적어 지저분해진 부분 또한 발견할 수 있어 아쉬웠다.2. 실내과학관 상설전시건물은 2층부터 관람을 시작하게 되어있다. 이는 매우 특이하고 재미있는 발상으로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며 관람하는 시스템을 적용했는데 프랑스의 퐁피두센터나 구겐하임 미술관의 형식을 따라한 거 같다. 그런데 2층으로 올라오는 에스컬레이터가 고장나 있어 초입부터 아쉬움을 느꼈다. 전시관에 들어서니 전체 바닥은 고무재질로 되어있다. 이는 밟을 때 조용하고 먼지가 가라앉는 장점이 있지만 보기가 그다지 좋지 않고 약간 반사가 되어 방향표시가 잘 보이지 않는 단점이 있다. 과학관은 넓은 공간에 가운데가 비어 있으며 높은 천장에 이동이 가능한 조명장치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조명장치는 백열등을 사용했는데 왠지 산만한 느낌이 들었다. 음향문제 지적할 수 있었다. 과학관은 관람자들의 효과적 이해를 위해 음향시설을 많이 설치하였는데 소리가 지나치게 울려서 관련 없는 장소에서도 들리는 점이 관람에 방해가 되었다. 이를 위해 적절한 음량조절과 방음시설, 음향시설에 대한 차폐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과학에 대한 영상자료를 볼 수 있는 차폐된 작은 시설들이 곳곳에 있어 조용하고 방해 없이 영상을 볼 수 있게 해 놓아 좋았다.그리고 한편 전시시설에 여기저기에 학생들을 배려한 필기를 할 수 있는 보조 턱이 있어서 활용에 편리했다. 그러나 관보니 전시품이 많아지고 산만하다는 느낌도 들기도 한다. 그리고 많은 물건을 상대적으로 좁은 장소에 전시하다 보니 동선에 혼란이 들기도 하였다. 특히 진열장에 실크스크린으로 적은 분류번호, 명칭이 조명과 분위기 상 잘 눈에 띄지 않아 관람순서를 정할 때 혼란을 주는 것 같아 아쉬웠다. 모든 것을 다 보여주려는 생각을 버리고 내부를 정리하고 분류, 개선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었다.외국어 설명 또한 지적할 만 했다. 우선 영어설명이 모든 전시 판넬에 기재되어있지 않으면서 영문 설명이 단순히 한글설명을 해석해놓은 것에 불과해서 외국인이 이러한 설명을 과연 알아들을 수 있을 지 의문시되었다. 또한 일어, 중국어 안내가 전혀 없어서 점차 늘어가는 중국인과 일본인 관광객들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고 생각했다.각 층을 내려가는 과정에 있어서도 문제가 있었다. 2층에서 1층은 빗면을 통해 내려가게 되어 있어 문제가 없지만 3층에서 2층으로 내려가는 과정에서 계단을 통해 내려가게 되어 있어 안전상으로도, 장애인에 대한 배려 측면에서도 에스컬레이터나 슬로프. 즉 빗면으로 바꾸어야 할 필요가 있다.편의시설은 화장실, 특히 장애인용화장실이 전시관 여기저기 위치해 있어 편리하다고 생각되었다. 의자는 등받이가 없어 불편했으며 많이 쌀쌀한 날씨인데도 난방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추워 안락함을 느끼기에는 부족하였다.1) 3층(외부선 2층)우선 과학관의 규모에 걸맞지 않게 입구가 협소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입구가 좁으면 많은 사람들이 입장할 시에 혼잡을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입구에는 sign board 가 있어 3층의 전시를 안내하고 있었다. 이는 색으로 구분하여 알아보기 용이하고 깔끔하고 단정한 느낌을 주었다. 그런데 우선 전시시나리오를 보면 지질사를 다룬 3층에서 우주에서 한국의 자연으로 넘어가는데 이는 지나친 비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우선 처음 우주의 탄생관이 있었다. 이 전시관은 복도에서 따로 들어와야 하는데 이는 꼭 들러야 하는 전시시설의 중요성에 비해 문제가 있다고 생각된다. 차는 것으로 광물들과 함께 전시되어야 하는 것인데 함께 전시되어 있었다.그 옆에는 '인류의 등장' 관에서는 우선 공룡이 존재하는 중생대와 인류가 처음 출현하는 신생대까지 5 억 년이나 되는 세월의 전시관을 하나의 전시실에 모아놓았는데 이는 아이들에게 마치 인류와 공룡이 공존하고 있다는 생각을 심어줄 수 도 있다. 또한 정면에 시각적으로 매우 위압감을 주는 공룡화석 복제품이 있었는데 조명이 관람객을 향해 지나치게 밝아 눈이 부시며 불편함을 주기도 한다. 공룡디오라마에서 유리 표면에 각 공룡에 대한 설명이 나와 있는 것은 디오라마의 긴장감을 떨어뜨리지 않고 있어 좋았다. 유인원을 전시해 놓은 것에서 도구에 변화를 주며 차츰 발전해 나간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괜찮은 아이디어라 생각되지만 위쪽에 플라스틱 덮개가 보이며 긴장감을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리고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되는 부분인 인류의 등장 부분에 도판이 많이 낡았고 설명판도 떨어져 있었다.선사시대의 전시 직후에 한국의 자연환경이 전시되고 있었다. 이러한 체제는 한국의 특수성을 보여준다는 점은 장점이라 할 수 있지만 관람객들에게 이해의 혼란을 가져오게도 한다. 광물이 전시된 것과 한반도 지질형성이 혼재되어 있어 전시에 통일감을 주지 못하고 있다. 실험코너가 있어 석회암과 염산반응, 복굴절, 조흔판, 자성 실험 등이 있었다. 그러나 염산반응을 실험하는 기계는 낡고 고장났으며 조흔판은 광물끼리 비교하기 곤란하게 엉성하게 되어 있었다. 자성을 띄는 암석은 자성이 지나치게 약했다. 외부의 음악소리가 들려서 시끄러웠다. 조암광물에 대한 설명은 다양한 실제 광물을 보여주어 이해를 도왔다. 스피커를 통한 설명코너는 좋다고 생각되었지만 사람이 없어도 계속 작동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보였다. 한편 전시품이 전시된 유리전시장은 모서리 끝부분이 뾰족해 위험하게 보여 안전을 생각한 완충장치 등을 보강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우리 나라의 동물'에서는 tv를 통해 다양한 고래에 대한 정보제공, 흥미있는 내용이라 고래의 생태서 햇볕이 제대로 차단되지 못하여 채광의 조절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양서류, 파충류는 복도에 작은 규모로 전시되어 있었는데 실제 생태환경과 유사하게 구성해 놓아 이해를 도왔지만 기원이나 분류 등의 자료가 부족하다고 느꼈다.어류 관은 박제나 복제품 어류들을 디오라마 형식으로 바다, 민물로 나누어 놓았는데 실크스크린으로 인쇄한 분류가 잘 눈에 띄지 않았으며 별다른 수역의 구분 없이 내부가 통해있어 혼동을 일으킬 수 있었다. 그리고 각각의 어종, 설명은 진열장 밖 별도로 해 놓아 어류들을 보는데 방해가 되지 않았다. 이러한 설명에 실제 사진을 붙여놓아 박제의 한계점을 보완하였는데 분류 숫자를 손으로 썼고 사진을 그냥 붙여놓아 좀더 처리를 했더라면 좋은 설명이 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곤충, 감각류는 상대적으로 적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어렸을 때, 아니 대부분의 어린이들이 실제 생활에서 자주 접할 수 있는 곤충에 대해 매우 관심이 높았는데 그러한 관심에 비해 전시물이 부족하다고 생각되었다. 갑각류는 표면에 반사되어 본래 색을 제대로 알 수 없어 조명이 적합하지 않다고 느꼈다. 차라리 균일한 밝기를 가진 조명을 활용하는 게 어떨까 싶었다.식물류는 예상보다 전시물이 적었고 비중도 크지 않았다. 식물 중 조류에 대한 전시는 다른 곳에서 볼 수 없어 신선했는데 이중유리로 선명하게 보이지 않았다. 또한 생태계 디오라마가 있었는데 이는 종류별로 하나씩 불을 비추어가며 설명해 가는 방식으로 발상이 매우 독특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학생들이 이를 보고 필기하기에는 실내가 좀 어두웠다. 이와 관련된 '아름다운 금수강산' 이란 상영관은 외부와 완전히 독립되어 있어 소리가 많이 차단되는 장점이 있었다.이러한 자연 생태 전시다음에는 한국의 과학기술사에 대한 전시가 있었다. 그런데 농경의 변천이라 하여 경작도가 전시되어 있는 것은 바로 옆에 선사시대가 있는 데에 조선시대 배경의 것이 있는 것으로 순서나 시대상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되었다. 건너편에 구석기, 청가 있었다. 여기에서는 무명제조 과정을 다룬 설명판넬과 사진, 멀티미디어 tv 설명이 함께 있어 이해를 돕고 있어 좋았다. 한편 건축기술에서는 단청과 조선시대 가옥의 형태 등 일부분만 전시되어 있고 실제 기술인 주심포, 다포, 팔작지붕 등 이 없어 부족함을 느꼈다. 또한 건축 도구, 기술에 대한 단순한 나열이 아니라 설명이 필요하였고, '끌'은 일제시대의 도구로 전통적 도구로 보기에는 옳지 않았다. 그 밖에도 유기, 칠기, 철기, 공예 등 다양한 기술에 대한 설명이 있었지만 모순된 점, 정돈이 안 된 점 등을 문제점으로 지적할 수 있겠다. 예를 들면 금속활자의 제작과정 디오라마 중 일부분은 생략되어 제작 가공을 잘 이해하기 어려웠으며, 특히 금·은 가공분야에서는 제작 공정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어 보충설명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유리공예에서 대롱불기 기술은 한국에 없었으며 토기, 백자 등 전시에서 분류도 효과적이지 못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국악기를 전시해 놓은 것은 과학의 측면에서 볼 수 있는지 의문시되었으며 특히 국악기의 특성이나 과학적 특성을 언급해 놓지 않아 너무 많은 다루었다고 생각되었다. 그리고 지역 특산품에 대한 전시에도 각종 제작 기구를 전시해 놓았는데 이는 별다른 설명없이, 다른 도구들과 중복되면서까지 전시할 필요가 굳이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이러한 기술이 전시되고 다음코너는 천체 관측 등 각종 과학기술에 대한 설명이었다. 여기에는 관천대 디오라마가 있었는데 이는 별이 빛나며 매우 시각적으로도 아름답고 이해도 잘되게 해 놓았다. 그런데 조선시대 물시계인 자격루는 글씨가 너무 작아서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또한 대동여지도를 모두 붙여 놓아 전국지도를 만들어 놓은 전시는 재미있는 발상으로 조상들의 기술수준에 대해 현실감과 위대함을 느낄 수 있었다.도구에 대한 코너가 있었는데 이는 주로 앞에서 다루지 못했던 도량형에 대한 설명이 나와있었는데 앞에서 계속 도구에 대한 전시가 있었기 때문에 별도로 코너를 만들 필요는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옆에 다.
    인문/어학| 2002.11.07| 6페이지| 1,000원| 조회(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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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대 과거제도] 송대 과거제도의 형성과 의의 평가A좋아요
    序 論中國에서는 오랜 옛날부터 官吏의 등용이 실시되었는데 그러한 과정을 總括해서 一般的으로 選擧라고 부른다. 選擧는 時代가 바뀜에 따라 變化했다. 科擧制에 앞서서 周의 世卿世祿, 秦의 因功授官, 兩漢時代 400年間 행해진 制度를 鄕擧里選制) 董仲舒의 建議가 하나의 계기가 되어 武帝時代에 新設되었던 것이다. 郡太守 等 地方官이 여러가지 德目에 根據하여 管轄內의 뛰어난 人物을 中央 政府에 推薦하는 形式인데 推擧에는 地方 鄕里社會의 評價(이것을 鄕評, 鄕論이라 함)를 根據로 했으므로 鄕擧里選이라 했다., 三國 魏에서 南北朝를 거쳐 隋 初까지 400年 가까이 행해진 制度는 九品官人法(九品中正法)) 九品中正法은 三國時代 魏의 大臣이었던 陳群이 創案한 官吏登用法이었다. 이는 各 郡에 小中正, 州에는 大中正을 두어, 戰爭으로 인해 각지에 흩어져 있던 人才를 推薦하도록 하였으며, 北魏의 孝文帝時代에 크게 發達하였다. 制度의 내용을 보면, 中正官은 管轄 地域의 鄕論을 살피어 才能이 있고 優秀한 人物을 選拔하여 '鄕品'을 정하고 中央에 推薦하였다. 이때 鄕品은 上下에서 下下까지 9等級으로 나누어 그 等級에 對應하여, 官吏를 任用하도록 하였다. 이는 鄕村에 있는 賢才나 有德者를 發掘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어서 隋 初부터 唐·宋을 거쳐 淸末 光緖31年(1905年)까지 1300年 동안 행해진 制度는 科擧制라 한다. 鄕擧里選制와 九品官人法은 運營面에서의 差異點은 있으나 다같이 人物本位·推薦制를 尊重했음에 비해 科擧制는 學才本位·試驗制를 가장 重視하였다.中國의 政治觀念에 의하면 皇帝, 즉 天子는 그 權限을 하늘에서 委任받아서 天下의 百姓을 보살피고 統治할 義務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天子가 나서야 할 일을 多樣하고 天下는 매우 넓으며, 百姓은 많기 때문에 皇帝 혼자서 統治를 한다는 것은 사실상 不可能한 일일 것이다. 그러므로 百姓들 가운데서 자신의 그러한 意志를 위해 힘쓸 官僚를 찾아 登用하게 되는데 이러한 官僚의 資質은 效果的 統治를 위해, 政治的 安定을 위해 매우 重要하기 때문에 다. 특히 孝廉은 "좋은 人才를 많이 얻는데는 孝廉만한 것이 없다."고 일컬어졌다. 東漢때는 每年 郡·國의 人口數에따라 推擧시키도록 하였다. 예컨데 大略 20萬人에 每年 1人, 40萬人에 2人, 10萬人 以下는 3年에 1人 等으로 比率이 정해졌다.孝廉에 推擧된 사람은 대개 漢나라 時代의 官吏 登龍門인 光祿勳(天子의 宿衛侍從府)의 郎中에 任命되었다. 賢良方正은 孝廉에 버금가는 重要한 科로 日蝕·地震·水害·旱魃 等 天災地變이 일어날 때 많이 행해졌다. 漢의 天子는 天地의 變化를 하늘의 警告로 받아들였으므로 政治 姿勢를 바르게 하고자, 善良하며 天子에게 直諫할 수 있는 人士를 구하고, 下問해서 각자의 意見을 쓰게했다. 그 奉答文을 對策이라 한다. 茂才(東漢에서는 光武帝 이름 '秀'를 諱라 하여 秀才를 茂才라 함)의 察擧는 처음에는 臨時的이었지만 東漢이 되자 監察御使·州牧 等 地方官에 命하여 茂才人을 每年 한 사람 薦擧하도록 했다. 그 以後 孝廉科와 함께 가장 一般的인 科가 되었다.) 金泰丞 譯,『東洋史의 基礎知識』(서울, 신서원, 1991), pp.108∼109.地方官이 鄕村에서 人才를 구할 때 그 地方의 有力者와 合議해서 決定했는데 鄕擧里選은 他薦을 人物本位로 前提로 하기 때문에, 自薦이며 學力本位의 科擧에 비하여 有力者의 壓力이나 干涉이 커지고, 孝廉은 거의 豪族子弟가 獨占하는 바 되었다. 또 他薦은 種種 恣意的인 薦擧를 濫發시켜 "秀才에 薦擧되었어도 策을 알지 못하고 孝廉에 推擧되었어도 父親과 別居한다."는 弊風을 자아냈다.(2) 九品官人法三國 魏나라에서 始作되는 九品官人法은 魏 尙書 陳群의 建議에 의해 成立되었다. 이 制度는 州와郡에 中正이라는 官을 두어 官吏에 適合한 사람을 州·郡에서의 名望을 參考하여 1品에서 9品까지의 9段階로 나누어서 報告케하고, 政府는 이 品級(鄕品)에 따라 官職에 任命했다. 그러나 中正에는 그 地方 사람을 任命했기 때문에 곧 地方豪族이 中正을 獨占하게 되고, 이 制度도 急速하게 貴族色이 짙어졌다.九品官人法 自體는 결코 貴族制 擁護를 天子의 實權이 강화되었음을 의미하며, 한편으로는 身分과 家門에 관계없이 개인의 능력을 취할 수 있게 됨을 의미한다. 이와 대응해 응시도 자발적이고 자유로웠으며, 호족 등 有力者의 仲介가 없이도 가능했다. 이는 豪族의 지배와 간섭을 배제하려는, 보다 개별적인 세력, 즉 과거를 통해 권력을 얻게 된 사대부 세력이 대두해 온 것이기도 하다.그러나 隋唐의 科擧도 科擧制 이전의 제도이던 九品中正制와 마찬가지로 방침과 현실이 다르다. 방침은 天子 권력의 絶對性과 인민의 권력참여의 기회균등에 있었지만 현실적으로는 귀족적 호족의 강한 견제가 있었다. 물론 과거에 비해 많이 皇帝權이 강화되었긴 하였으나 아직 豪族 세력을 억제하기에는 부족했던 것이다. 玄宗 개원24년까지는 시험과 임관 모두, 이후에는 시험이 禮部로 이관되어 임관을 맡은 吏部는 당대 豪族의 소굴이 되고 말았다. 이에 의해 科擧制의 방침은 왜곡되고 天子의 권력은 다시 호족 官僚群에 의해 좌우되는 점이 늘어났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별개의 움직임이 있었다. 안록산의 난 이전인 개원년간에 시험이 吏部에서 禮部로 이관된 계기는 수험자가 시험관에게 시험에 대해 항의한 데 있었다. 또 빈번한 士가 시험에 대한 청탁이나 부정행위에 狂奔하여 弊害가 생기고 여러 종류의 禁止令도 發表되었다는 것은 중간적 권력이 되는 豪族 階層을 무너뜨리려는 아래로부터의 힘이 증대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는 과거제의 방침에 담겨있는 皇帝의 中央集中 지향적인 권력의 하부계층에 대한 침투에 있어서도 좋은 조건이었다. 그러나 당은 근본적 한계로 이들 새로운 士階層이 實權을 장악하지는 못했다. 초기부터 세력있는 호족의 자제에게는 가문에 따라 임관의 자격이 부여되는 任子·恩蔭의 제도가 있었으며 이는 유력한 출세길로 작용했었다. 그러나 아래로부터의 새로운 세력은 점차 성장하게 되어 광범위한 人民反亂에 의해 호족의 지배권이 상실·붕괴되고 唐末 五代의 軍閥 割據·下剋上의 만연 등의 현상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를 이어받은 宋代의 科擧制가 唐代보다 훨씬의 합격여부에 응시자의 社會 地位나 신분이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범위를 크게 축소시켰던 것이다. 또한 別頭試라는 特別試驗 역시 이러한 의도를 잘 보여준다.이러한 제도들은 科擧制 시행의 본래의 목적을 유지하는 데에 효과적이었으며, 이러한 공정성의 확보로 인해 신분·지위에 관계없이 과거에 의한 계층 이동이 매우 광범위하고 활발하게 이루어 질 수 있었다. 또한 과거 응시자들의 증가는 과거를 통해 관료가 되고자 하는 지식인들이 엄청나게 늘어났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과거제에 응시하는 사람들이 늘어남에 따라 학교제도의 보급과 정비가 함께 이루어졌다. 중앙의 최고 관학인 國子監은 宋代 初에는 관료들의 子弟에게만 入學이 허용되었으나 이후 太學을 중심으로 개편되는 과정에서 일반민들에게까지 개방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정원도 크게 늘어났다. 그리고 지방에서도 많은 관학이 세워졌으니, 이 州學과 縣學이 주로 일반민들을 대상으로 하여 그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넓혀주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학교제도도 과거제도와 마찬가지로 지식을 훨씬 광범위한 사회계층에 보급시켰으며 일반민들도 지식인으로 될 수 있는 여지가 크게 늘어나게 했다. 특히 지방의 官學은 지식인을 지방민에게까지 확대시켰으며 결국 송대에는 지식인이 양적으로, 질적으로 크게 성장하고 변화하였다.별다른 참여 身分의 제약이 없었던 宋代 과거는 대체로 開放되고 公平하였다고 할 수 있으나 결국은 富裕層 사람들이 獨占하였다. 왜냐하면 과거에 需要되는 經濟부담은 一般農家들이 負擔하기에는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北宋시대의 科擧의 인원수 확대와 公平性의 확보는 전 사회의 讀書人들을 거의 吸收하게 되어 과거 합격자의 증가에 비해 응시자의 수가 절대적으로 증가하다보니 과거장에서 競爭이 치열하였다. 독서인들은 머리가 희고 몸이 衰弱해질 때까지 계속 科擧場을 出入하여 죽은 후에야 그쳤다. 唐代에는 科擧가 선비들의 唯一한 官吏 進出 方法이 아니었으므로 과거가 진 지식인을 吸收하기에 不足하였다. 그 중에 이백같은 사람은 일생동안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과거시험의한 수단으로 삼았다. 또한 모든 지식인들을 이 科擧制度 안으로 몰아 넣고 富貴榮華와 公明의 可能性을 미끼로 이 길을 걷도록 하였다.宋 代에 科擧試驗은 전 기간에 걸쳐 매우 중요하면서도 동시에 여러 가지 문제점을 불러 일으킬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개인과 가정, 그리고 지역사회의 운명까지도 과거시험의 결과에 달려있던 것이다. 中世의 유럽에서 대표적 지식인이던 귀족이나 성직자가 관료와 확연히 구별되던 것과 달리, 중국사회에서는 지위나 권력, 부가 관직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던 것이다. 이러한 관료가 되는 데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었지만 특히 과거합격자는 최상의 영광과 함께 승진에서 우대를 보장받았다. 더구나 이러한 과거제도는 처음에는 소수의 관료만 선출하는 방법으로 실시되어왔으나, 宋代부터는 보다 많은 관료를 채용하는 중요한 절차로 자리매김하였고, 官僚 選拔 方法 중 가장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과거는 기존 당대의 과거와는 달리 공정성을 획득하면서 많은 수의 사람들이 과거에 응시하였으며 또한 과거에 의한 관료는 일대귀족의 형태를 지님으로써 가문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후손들을 교육시키게 되었고 이러한 현상은 많은 수의 독서인을 양산시켰으며 또한 과거는 관료가 되는 주요한 정당한 통로이며 음서가 가능한 고관의 자손들까지 음서를 포기하고 과거를 볼만큼 과거가 관료의 양산과 그로 인한 지배층형성에 큰 기여를 했다고 할 수 있다.결과적으로 科擧制는 中國社會에 걸쳐 학문에 대한 期待感을 폭넓게 퍼져나가면서 중국 사회 전반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4. 以後 明·淸代의 科擧制宋을 滅亡시킨 蒙古人의 元은 처음부터 武力 一邊倒여서 學校나 科擧에 조금도 興味를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피정복인이던 中國人들은 과거에 대한 미련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 元은 점차 중국화되어 가고 여기에 중국인의 희망이 부가되어 40여년간 중단되던 과거가 소규모이지만 부활되어 원이 멸망되기 직전까지 계속되었다.몽고인을 북으로 내몰고 중국인에 의한 중국을 부활시킨 明 太祖는 학교제와 된다.
    인문/어학| 2002.11.07| 10페이지| 1,500원| 조회(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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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양고대사] 중국 고대 황제제도의 성립과 의의 평가A좋아요
    Ⅰ.서론중국에서는 B.C 221년에 진시황이 최초로 중국을 통일한 이후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이 멸망할 때까지 2200 여 년이 넘는 기간 중 384명의 황제가 존재하였다. 이들은 중국정치와 사회의 핵심적이면서 기본적인 요소로서 작용하였고 중국뿐만 아니라 중국 외의 동아시아의 주변민족에게도 국제적인 외교·경제·문화의 구심점으로 동아시아 역사에서 중요한 영향력을 미쳤다. 중국의 전제정치는 세계의 역사에서 엄청난 국토의 면적에도 불구하고 황제 중심의 통일국가의 지속이라는 중국만의 독특한 역사를 전개시켰고 중국과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던 우리 나라도 이러한 중앙집권적 통치제도와 외교적, 문화적으로 직접적, 간접적으로 깊은 연관을 가지며 또 영향을 받았다.절대권력을 가졌던 황제의 등장과 존속에 있어서 황제를 중심으로 한 지배체제가 2200년이나 지속되었다는 것과 황제가 등장하면서 분열되는 양상을 보이는 중국이 통합되는 양상을 보이는데 여기에는 황제의 어떤 측면이 작용한 것일까? 또한 황제 1인의 권한이 강한데도 불구하고 황제 개인에 대한 사적 이해관계와 국가전체의 공공기능은 어떻게 조절된 것인지 알아보도록 하겠다.Ⅱ.본론1. 고대 중국에 있어서 지도자의 의미진시황이 황제제도를 처음으로 만들었지만 그 근원은 오래 전인 주(周)시대부터 있어왔고, 황제제도가 정착된 것은 진 이후 한 대에 와서이다. 진시황에 의해 중국이 통일되어 황제라는 단어가 나타나기 전부터 중국에 있어서 지도자의 의의는 각별했다.중국의 전통적인 역사에서는 삼황오제로 시작되었는데 원시사회에서 문명사회의 진화를 중국민족들은 위대한 제왕들의 능력으로 보고, 진화과정을 이들의 계승으로 나타내었다. 이들 제왕의 발전단계로는 성인들이 각종 문물을 발명한 聖의 시대, 전설적 제왕이 제도를 창건한 黃의 시대, 왕조를 건립한 역사시대에서의 王의 시대로 볼 수 있는데) 허진웅 지음 홍희 역 『중국고대사회』동문선 1991. 5 pp36-55., 이 지도자들이 서양과 달리 중국에서 큰 의미를 지니는 데에는 중국의 자연 써의 종교적 권위를 확보하여 신비적이고 권위적인 지도자의 성격을 보이고 있다. 또한 가족 공동체로서 가부장적 성격을 지니는 중국의 씨족, 부족 형태에서 지도자는 부족의 가부장이었던 점에서도 그 권위의 절대적 측면이 드러난다.이러한 고대 지도자의 여러 요소와 측면을 이어받은 중국의 황제는 전 중국을 과거 제정일치 사회의 지도자가 그랬던 것처럼 신비주의적 측면과 가부장적 측면으로서 장악하고 지배하였다.2. 황제의 칭호와 황제의 개념과거의 주(周)에서는 혈연과 천명론을 통해 지배의 정당성을 부여하였고 이들은 점복과 제사를 비롯한 종교의식을 통해 제정일치적 사회에서 초월적 절대성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영향을 받은 황제의 호칭은 기존의 王이나 帝와 같은 존호보다 격상된 의미를 지니는 우주·질서의 지배자로서 신비적 존재인 황(皇)과 역시 신성을 보유하여 숭배의 대상이던 제(帝)) 진시황은 황제란 칭호에서 제(帝)를 사용하였는데 이는 유방이 적제(赤帝)의 자(子)로서 백제(白帝)의 자(子)를 무찔렀다는 주장을 봐서도 과거 관중지역에 널리 퍼져있던 제 신앙과 관련이 있는 신성성을 지님을 알 수 있다.를 결합시켜 만들어낸 것이니만큼 비록 서양의 로마와 같은 황제숭배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인민에게 황제의 존재는 신성시되어 경외의 대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진시황은 절대적 권력자로서 신비주의적 성격을 띄지만 혼란한 전국시대에 통일제국을 건설함으로써 위대한 업적을 이룩한 자신의 행위에 무한한 자신감을 가지는 인간중심적인 측면으로 현세적이면서 신비적인 성격이 결합된 절대적 존재로서의 황제에 정당성을 부여하려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효과를 위해 진시황은 당시 전국시대부터 유행하던 오행종시설을 채택하여 주(周)를 계승한 진(秦) 왕조의 당위성과 필연성을 강조하였고, 거대한 규모의 무덤인 여산릉과 아방궁을 매우 웅장하면서도 비밀스럽고 신비스럽게 만들었으며 자신의 활동을 극도로 기밀에 부쳤다. 또한 태산의 봉선을 비롯한 여러 제례의 주관자로서, 통일제국의 기틀을 다지는 도로나 장성 수행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러한 주장은 황제의 절대성에 정당성은 인정하였으나 오히려 황제의 전횡을 제약하는 효과도 가져오게 되었다. 이와 함께 한 대에는 爵이 일반 향촌사회의 민중에게 사여됨으로써 민중이 황제와 유기적 관계를 맺기도 하였 다. 이러한 작위의 수여를 통해 황제는 향촌사회의 질서를 유지, 관리하고 향촌의 농민계급을 그의 지지세력으로 조성할 수 있게 되었다.당시 유행하던 왕조 수명론은 5행설(水, 金, 土, 火, 木) 에 근거를 두어 왕조를 설명하는 것으로 이는 황제지배체제의 정당성을 혈통으로 끌어와 설명하는 혈통주의적 성격이 강하였다. 이러한 왕조수명론은 여러 왕들의 제위찬탈) 혈통주의에 근거를 둔 수명론은 전한 말 왕망의 찬탈과 곧 이어 유수(劉秀)의 한왕조의 재건에도 이용되었다.에도 이용되었고 여기에서 수명 천자로서의 황제상이 정립되며 천자적 황제관이 정착되게 되었다. 또한 참위·도참사상은 신비주의적, 주술적 움직임으로서 참위사상은 유가사상과 결합하며 수명론을 낳게 되었다. 이러한 참위사상은 황제 지배와 일반 인민사이에서 지지를 이끌어 내는 수단으로 사용되며 이후 황제는 천명의 수탁자로서 현실세계를 이끄는 가부장적 군주가 되었다.황제는 중국의 가족주의적 국가관과 밀접하게 연관을 맺고있으며 가부장적수장의 성격을 지닌다. 전국시대의 진은 변방국가로서 종법제가 중원에 비해 약해 전제 군주권의 형성에 유리하였다. 그리하여 국가가 향촌 내의 질서와 통제에 개입하여 가족관계에 대한 국가의 통제가 이루어 질 수 있었다. 그러나 한은 진에 대한 반란으로 이루어진 국가인 만큼 향촌의 지도세력과 정치적 권력이 유대관계를 맺고 있었던 만큼 향촌 주도계층에 대한 정부의 우대책이 작용하였다. 황제는 제례 전반에 대한 통제를 통해 향촌 공동체 기능에 개입할 여지를 마련했으며 기민(棄民)에 대한 사여(賜與)에서 가부장적 온정주의를 과시한 것이다. 이러한 정책에서 황제는 향촌 내부의 가족과 가부장권을 어느 정도 존중해주면서. 즉, 자율적 자치를 보장하며 자신의 입지도 강화전에서 황제지배체제의 기반을 두었는데 공전은 생산활동에 사용되지 않는 수택이나 산림 등의 토지를 국가에서 소유하며 그 개간으로 이루어진 소출을 국가에서 거두어 가는 것이다. 이는 사적 권력의 연장선상에서 전국 군주의 기원을 보는 것으로 전제 군주의 공동체적 기능의 일부의 가산화를 통해 최고 권력이 창출된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이는 공과 사를 막론한 토지제도 전반에 대한 조망이 부족하다는 한계점이 있다. 또 하나의 주장으로는 수전제가 있다. 이 수전제는 그 근거를 상앙변법) 진에서는 상앙변법으로 국가체제의 정비 계기가 마련되는데 토지제도의 개혁으로 수전체제를 마련하였으며 가족관계에 있어서도 기존의 종족관계가 해체되고 개별가족이 증가하는 방향으로 변화하여 황제의 국가질서에 편입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에서 찾는다. 이는 군사적 동기로 상벌제도와 연관되어 있으면서 국가의 공동체적 기능으로서 균분의 기반을 통해 국가를 부국강병에 이르게 하는 것으로 군주를 공동체기능의 수행자로서 존립기반을 마련하였다고 보았으나 토지제를 동원체제의 일환으로서 파악하는 한계점이 있다. 공전제와 수전제 모두 전제군주를 이전의 공동체적 기능의 가장 중요한 계수자로서 파악하고 황제체제의 성립시가의 대다수를 소농민이라고 인식하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로 보아 권력 형성의 초기에는 국가의 동원체제를 이용하여 토지의 균등분배라는 공동체적 기능을 실현하였던 전국형 전제군주 아래서도 이미 분배된 토지의 사적 점유가 나타나 황제가 등장한 시기엔 어느 정도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적점유의 용인과 확대로 호족의 중요한 경제적 기반이 되었고 국가는 이러한 사적 토지의 증가로 국유의 원칙을 유지하고자 하였고 한전론, 염철, 경작지 이외의 토지 등에 대한 논의를 통해 각종 사부의 억제정책을 시행하여 소농민의 안정을 지향하였지만 토지의 사적 점유를 막지는 않았다.) 정하현 「황제지배체제의 성립과 전개」『강좌중국사1』지식산업사 1989.11. pp 233-237한편 부세제도 역시 황제의 중요한 경제적 기의 봉록, 상사, 관용 물자의 구입 등 이중 봉록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였고 식읍사여를 통한 관료 집단 토착세력화를 막아 황제 통치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화폐유통을 통해 황제는 경제를 통제할 수 있었는데 사적인 부의 축적을 막아 소농민의 안정에 기여했으며 화폐를 이용한 물가의 조작을 통해 간접적으로 부를 획득하는 과정을 통해 이를 이루었다. 사실 송 이전까지는 민간 경제에서 화폐가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황제체제의 제민지배체제를 유지하는데 화폐제도는 보완적 기능을 발휘했을 것이라 본다. 또한 이후 황제의 권력이 관료층이 성장하고 경제적 규모가 확대된 사회·경제적 변화에 대응하여 황제는 관료와 민중의 중간 매개자로서 경제적 유통의 상당부분을 향촌의 자율적 성격에 맡김으로서 지방을 중앙에서 통제하려는 경향을 보이며, 관료제의 유지를 위해서도 화폐제도를 유지해야만 했던 것이다.결국, 황제지배체제의 성립과 존속에 경제적 측면에서 토지제도와 각종 부세, 화폐의 유통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였고 사회의 변화에 따라 황제의 통제정책도 변화해갔음을 알 수 있다.4. 황제와 관료간의 공·사적 이해관계황제는 국가의 지배자로서 효과적인 국가의 통제를 위해 관료를 두었다. 황제는 자신의 지배를 영속화하고 또 보다 큰 부의 창출을 위해서는 자신의 사적 이해의 절제와 공공적 기능을 적절히 수행하는 것이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공공적 기능을 수행하며 황제 개인의 사적 이해도 공공적 기능의 일부로 받아들여지도록 여러 활동을 하였다. 그 예로서 황제 자신의 안위와 권위, 지배의 영속화를 위해 국가의 질서를 , 국가기능의 재정적 경비로서, 한편으로는 자신의 경제적 이득을 위해 백성의 조세, 부역의 의무를 부과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국가전체의 통제를 위해 관료제도가 나타나 발전하게 되었는데 이들 관료 또한 자신의 사적 이익을 추구하며 황제의 사적 이해관계와 충돌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각자 사적 이해관계를 극대화하다보면 국가의 공공기능과 일반 백성들다.
    인문/어학| 2002.11.02| 10페이지| 2,000원| 조회(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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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양사] 치즈와 구더기 평가A좋아요
    『치즈와 구더기』는 메노키오가 사용한 비유에서 따온 것으로 물질이 자연 발생하는 과정을 묘사한 것이다. 이 책을 보며 처음 든 생각은 『치즈와 구더기』라는 재미있는 책의 제목에 비해 그 내용이 이해하기가 무척 어렵다는 것이다. 이는 나의 사전 지식이 부족한 데에 가장 큰 원인이 있겠지만 생소한 분야를 그 동안 보아오던 역사책과 전혀 다른 시각과 체제로 다룬 데 그 원인이 있었던 것 같다. 특히 16세기 이탈리아의 사회 상황과 종교 재판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며, 여러 역사가들의 역사이론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고 있어야 책을 읽을 수 있어 이러한 지식이 부족한 내가 읽으며 받아들인 내용은 이 책의 매우 일부분에 불과하며 또 그 받아들인 내용도 올바르게 받아들이었다고 보기도 어렵다고 생각한다.오늘날 역사의 관심이 거시사 중심에서 미시사로, 정치사 중심에서 '밑으로부터의 역사'인 사회문화사로 넘어 오는 추세에서 『치즈와 구더기』는 이러한 새로운 역사 연구의 흐름을 잘 반영하고 있다. 평소에 나는 역사. 그 중에서도 고고학이나 문화 인류학 분야, 문화사에 관심이 많아 흥미를 가지고 있었으며 물론 잘 알지 못하고 이해하기도 어려운 내용이 많았지만 기존의 딱딱한 책보다는 덜 지루하고 읽기가 한결 용이했다. 글의 체제도 그 동안 보아왔던 서술식 나열구조가 아니고 사건의 전개와 사가의 설명이 뒤섞여 짧은 단락으로 나뉘어져 있어서 이해하는 데에 혼란스럽기도 하였지만. 종전에 역사책을 읽는 것과는 다른 새로운 느낌이었다. 이 책은 미시사적 시각으로 종교재판의 한 민중에 대한 단편적인 기록을 바탕으로 16세기 유럽 민중의 생활과 관념을 들여다보고 있다.『치즈와 구더기』는 마치 소설처럼 하나의 주인공이 존재한다. 이 책은 1584년 종교재판소에 고발되어 재판을 받는 이탈리아 시골의 방앗간 주인 '도메니코 스칸델라'란 이름으로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지만 '메노키오' 라는 별명을 가진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는 평생 도시 근교의 프리울리란 마을에서 살았는데 많은 자식을 두었고이러한 책은 단순한 문서가 아닌 상부문화와의 문화접변의 수단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가 종교재판소에 고발된 까닭은 그리스도에 대해 불경스러운 말을 했기 때문이었는데 그는 법정에서도 재판관을 비롯한 여러 사람에게 굽히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그의 우주관에서 그는 혼돈에서 우주가 생겨나는데 이는 '마치 우유에서 치즈가 만들어지고 그 속에서 구더기가 생겨나는 것과 같다') 카를로 진즈부르그 지음, 김정하·유제분 옮김, 『치즈와 구더기』, 문학과지성사, 2001년, p.75.는 주장이며 기독교의 핵심 교리인 천지창조와 삼위일체를 부정하였다. 그에 이어 그는 교회와 교황의 권위를 부정하였는데 성직자를 가난한 자를 착취하는 장사꾼이며 교회의 여러 의식은 단순히 대중의 재물을 빼앗기 위한 사기에 불과하다는 주장) 카를로 진즈부르크 지음, 위의 책, pp.99∼102.을 펼쳤다. 이러한 주장으로 투옥과 방면을 되풀이한 그는 결국 1599년 화형을 당하고 만다.그는 전형적인 농민은 아니지만 당대 민중문화를 대표하고, 또 그 특성을 잘 드러내는 인물로 진즈부르크는 보고 있다. 『치즈와 구더기』에서는 이 메노키오를 통해 16세기 민중들의 종교에 대한 관념을 알 수 있다. 우선 우리는 흔히 당시 유럽 사회를 지배하던 사상 체계는 절대적인 기독교 문화로서 이는 지배층을 비롯한 모든 이의 일상생활과 관념을 통제한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실제로 사회 전체를 기독교적 관념이 지배한 것은 아니며, 봉건 영주들을 비롯한 지배층이 기독교를 그들의 지배 이데올로기화한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인지 민중의 기독교에 대한 생각도 부정적으로 보인다. 이는 메노키오의 주장에서 볼 수 있듯이 교회의 의식과 성직자에 대한 인식이 부정적이며, 기독교의 교리에 대해서도 어찌 보면 이치에도 맞지 않는 맹목적 부정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당시 성물숭배나 제의의 형식에 치우친 교회에 대하여 때마침 새로이 등장한 인쇄술의 보급과 의식이 성장한 민중계층이 지배층의 그늘역할을 하던 교회에 대해 저항의식을 가졌 기독교 문화가 아니고 기독교 신앙과 함께 오랜 기간동안 전래되어 오던 무속적 성향 즉 샤머니즘의 영향이 혼합된 형태) 곽차섭 엮음, 『미시사란 무엇인가』, 푸른 역사, 2000년, p.279.라는 것이다. 그리고 지식수준이 떨어지는 하층민이라고 해서 종교의 단순한 맹신이 아닌 자신만의 추상적인 우주론, 창조론의 논의에 대해 무관심하지만은 않았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한편 그의 우주관에서 그는 우주가 혼돈 속에서 흙, 공기, 물, 불로 이루어진다고 하였는데 마치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자들의 세계관과 매우 유사한 것같이 느껴졌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에 대해 배울 기회가 없는 이들 농민으로 볼 때, 그러한 우주관은 인간이 자연스레 가지고 있는 우주론적 전통의 흔적인 하나의 관념) 곽차섭 지음. 위의 책, p.280.으로 보인다.또한 당시 민중들이 독서를 통한 지식의 변용, 수용을 하며 독자적 지적 체제를 갖추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비록 어려운 책은 구하기도, 읽지도 못하였지만 인쇄술의 보급으로 시장 같은 데서 팔던 간단한 책들이 보급되며 그들의 지적 수준은 빠르게 성장하였던 것이다. 메로키오는 자신의 견해를 자신이 봤던 수많은 책) 카를로 진즈부르그 지음, 김정하·유제분 옮김, 『치즈와 구더기』, 문학과지성사, 2001년, pp. 129∼133.에서 근거를 찾았지만 책의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비록 책의 본래 내용을 왜곡한 일방적이고 자의적인 독해) 카를로 진즈부르크 지음. 위의 책, p.142.즉, '창조적인 오독) 곽차섭 엮음, 『미시사란 무엇인가』, 푸른 역사, 2000년, p.287.'이라서 그 주장에 모순점을 내포하고 있긴 하지만 그의 이러한 독창적인 주장은 지배계급의 문화에 대한 민중문화의 종속성을 부정하게 한다. 그리고 이들의 이러한 문화의 독자성, 스스로 문화를 발전시켜 가는 모습에서 중세 말 민중들의 근대적 의식이 드러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메노키오가 책을 빌려서 많은 지식을 갖추게 된 것을 보면서 나는 조선말 세책찬가지로 민중에게 지적 수준과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키워주었을 것이다. 한편, 평범한 사람과 달리 자신의 주장을 고수하는 메노키오가 그렇다고 매우 독특하고 엄청난 인물은 아닌 듯 하다. 그는 물론 혁신적 주장을 죽음의 위협에서도 떳떳이 밝히다 결국 죽음을 맞지만 그 역시 살기 위해 몸부림치고 자신의 한 주장을 번복하기도 한 평범한 방앗간 주인에 불과한 것이다. 이런 보편적인 성격을 가진 그를 통해 민중의 문화를 찾고자 하는 것은 매우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글도 모르는 무지랭이 민중과 여러 학자의 논저를 자유롭게 읽을 수 있는 엘리트 지배계층의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그를 통해 그 동안 지배계층의 시각으로 본 16세기의 유럽사회를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게 한 것이다. 메노키오와 재판관과의 대화는 많은 점을 우리에게 시사한다. 이들은 비록 하나의 확립된 사상 체계를 만들어내지는 못하였지만 이들 문화의 독자성은 엘리트 계층에게 변화를 촉진하며 역사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이러한 메노키오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그리고 진즈부르크는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이 글을 썼을까? 우선 그는 중세에서 근대적 사고 방식의 기원을 특정 엘리트 계층이 아닌 일반 대중들의 문화에서 찾으려 한다. 근대로의 발전에 가장 큰 요소는 근대적 사상의 형성과 전파에 있다. 이 근대적 사상의 주된 특징은 비합리적인 것을 배격하고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을 강조하는 것이다. 물론 메노키오의 우주관과 천지창조관이 그다지 합리적이고 논리적이지는 않지만, 그 동안 오랜 세월을 두고 전해 내려오고, 또 사회에서 전혀 의심의 여지가 없이 받아들여지는 기독교 사상을 단순히 수용하고 의지하지 않고 자신이 여러 책을 읽고, 나름대로의 사고를 통해 자신만의 가치관을 형성해 나가는 민중 문화의 힘을 찾아낸 것이다.그리고 그가 연구대상으로 삼은 메노키오의 재판에 대한 기록은 지배층의 시각으로 그들의 권력과 이해관계가 반영된 것으로 어찌 보면 지배층에 의해 '왜곡'된 것으로 볼 수 한 관념적인 불일치를 반영하고 있고, 심문에 대한 대화의 권력 구조가 뚜렷이 드러나고 있다) 조한욱 지음, 위의 책. p.87.. 서로 사용하는 단어도, 문장에서도 차이가 나는 데 여기서는 지배층의 권력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남은 사료 속에서 그 동안 억압되고, 많이 남아 있지 않은 민중문화를 재구성해 낼 수 있다. 사료로 사용한 기록은 아무래도 그 사료를 기록한 사람의 의식이 많이 반영되어 이 기록을 보면 권력층과 민중간의 관계, 입장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대부분의 시대기록이 지배층에 대한 기록으로 민중문화에 대한 기록이 부족한데 이러한 분석을 통해 당시 16세기 민중문화에 대해 보다 생생히 살필 수 있다. 한편 이를 보며 우리가 흔히 우리 나라의 역사를 알기 위해 보는 『삼국사기』를 비롯한 여러 사서들도 이러한 지배층의 시각으로 사회와 문화를 본 것으로 이를 곧이곧대로 사실로 받아들여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한 사서에서는 지배층의 관심에 치중하며, 그들의 민중을 보는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어 왜곡된 인식을 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메노키오와 심판관과의 대화로 보아 그들 담론의 불일치로 서로 다른 계층간 첨예한 갈등이 표출되고 있으며 그 갈등이 발전되어 프랑스 혁명을 비롯한 민중의 봉기의 씨앗을 느낄 수 있었다.한편 역사서술에 대해서 이 글은 미시사 연구방법을 직접 적용한 사례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기존의 정치사중심의 거시사 서술에서 전혀 주목받지 못하던 민중들을 역사의 주 무대로 등장시켜 보다 좁은 지역, 사건, 인물에 대한 연구를 통해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과 사상, 관념을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물론 전체를 알지 못하고 작은 데에만 치중하는 것을 옳지 못하지만 전체를 넓게 살피고 세밀한 부분까지 꼼꼼히 재구성하여 전체를 보다 효과적으로 볼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이는 또한 역사를 따분하게 느끼는 일반 독자들에게 역사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효과를 가져오고, 보다 넓은 시각을 갖도록, 생활 주변에 대해 관심을 갖.
    독후감/창작| 2002.09.13| 5페이지| 2,000원| 조회(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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