舞姬'를 읽고일본 낭만소설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舞姬'는 소설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남여간의 사랑을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다. 사랑을 다루는 소설이 독자들에게 감동이나 강한 인상을 주기 위해 비극, 또는 이룰 수 없는 사랑으로 결말을 맺는다던가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것에 비해 '舞姬'는 남여간의 사랑에 중점을 둔 것이 아니고 사랑하는 사람을 버리고 성공을 택하는 비정한 남자 주인공의 행동을 중심으로 주인공 자신이 여자를 버릴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변명하는 듯한 내용으로 일관하고 있다.오타 토요타로는 도쿄대학교를 발군의 성적으로 졸업하고 관비로 독일의 베를린으로 유학을 떠난다. 장래의 출세가 보장된 오타는 베를린에 와서 처음으로 자아의식에 눈을 뜨고 이제까지의 자신이 자기의 의사와 생각이 없었던 기계적이고 수동적인 인간이었음을 깨닫는다. 어느 날 오타는 산책을 하다가 돌아가신 아버지의 장례를 치를 돈이 없어 울고 있는 에리스라는 무용수를 만나게 되고 그녀를 동정하다가 마침내 사랑하게 되고, 동거에 들어간다. 이 일이 소문이 나서 본국으로부터의 관비가 끊어지고 오타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에리스 곁에 남는다. 그러나 에리스의 임신과 함께 방황하던 오타는 본국에서 덴보 장관을 수행해서 온 친구 아이자와 겐키치의 충고로 미쳐 버린 에리스를 버리고 귀국하게 되는 내용이다.지금까지 「舞姬」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행해져 온 것 같다. 사랑이냐 출세냐의 갈등을 그린 소설이라든가, 근대적 자아의 각성과 좌절을 그린 이 야기라든가 하는 것이 그 대부분이었던 것 같다. 개중에는 豊太郞에게 있어 서 エリス가 보호의 대상이었던 것처럼 국가는 또한 유능한 豊太郞가 보호의 대상이었다고 하는 거시적인 입장에서의 「舞姬」論도 있었고, 한 여자를 배신하고 국가와의 관계를 살아갈 수밖에 없는 명치 지식인의 숙명을 국가 와 개인과의 관계로 보아 역사적 시대적 입장에서 파악 한 것도 있었다.내가 처음 「舞姬」를 읽고 느낀 것은 豊太郞에 대한 알 수 없는 배신감 같은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豊太郞의 행동에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는 그런 내 자신 안에서의 모순으로 난감했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는 어딘지 모를 배신감을 누구나 다 느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그 만한 이유가 있지 않고서는 다가올 수 없는 느낌이라 한다. 문학가나 평론가도 아닌 일반독자의 눈으로 봤을 때 이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내려가다 보면 豊太郞의 책임은 그다지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 그것은 森鷗外가 작중인 물의 행동을 한편으로 치우치도록 합리화하거나 변호하지 않고 나쁜 인식을 심어 주지 않으려 묘사하는데 힘썼기 때문이다. 작가가 그러한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豊太郞에 대한 배신감이 사그러지지 않는 것은 소설 속에 나 타난 豊太郞의 개인적·사회적 자아의 갈등표출 상황에서 豊太郞의 선택과 정에 나타난 豊太郞의 본질적인 모습, 이중적인 모습이 잘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현대예술의 흐름과 영향에 대해서....예술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면 어떤 일정한 재료와 영상·기교 등에 의하여 미를 창조하고 표현하는 인간의 활동, 또는 그 산물을 일컫는다. 이러한 예술은 흔히 붓과 캠퍼스로 대변되는데 작가는 붓으로 조그마한 캠퍼스 안에 사물과 풍경을 넣고 또 자신의 마음을 불어넣으며 예술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자 했다. 그리하여 피카소로 대변되는 추상파가 생겨나고, 반 고흐로 대변되는 야수파가 생기는 등 여러 가지 미술 사조가 생겨나 문화의 한 흐름으로서 자리잡고 있었다.하지만, 오늘날 어디서부턴지 모르게 작가들은 그림으로 대변되는 예술을 하나 씩 하나 씩 부수기 시작했다. 붓을 부러트리고 캠퍼스를 찢으며 자신의 영감을 담은 그림이 더 이상 미술관 한쪽 벽에 드리워져 그냥 관객들이 봐 주러 오기만을 바라고 관객들에게 팔려가기만을 바라는 예술에서 탈피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바로크나 로코코 양식 등의 예술에서 얽매이기를 원하지 않고 있다.그렇다면 과연 현대 예술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원하며 어떤 메시지를 던지는 걸까? 그리고 어떤 꿈을 그리는 걸까? 이 문제에 대해 현대 예술의 흐름과 방향이라는 주제로 이야기 해 보기로 하자.먼저 이 이야기를 하기 전에 나는 카셀에서 벌어진 도큐멘타를 보았다. 카셀도큐멘타는 전후에 시작하여 정치적이고 사회적이며 예술가도 사회에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시작된 전시회이다. 그래서인지 카셀도큐멘타는 이제껏 내가 알고 있었던 예술가들의 전시회와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해골, 아무런 정리 정돈 없이 널 부러진 책상들..... 정말로 다양한 형태의 모습이었다. 이 전시회가 현대 예술의 흐름을 보여주는 다면적인 모습이라면 난 이것을 통해 현대 예술의 특징을 몇 가지로 나열해 보고 싶다.첫째, 현대예술에서 작가와 관객은 함께 호흡한다.현대 예술 작품은 관객을 기다리지 않는다. 그 이유는 작가의 참여가 있어야만 비로소 작품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현대 예술에서 작가는 작품을 통해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이미지를 관객에게 전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으로 하여금 스스로 그 작품에 함께 동참함으로서 저마다 나름대로의 이미지를 갖게 한다. 예를 들어 벽으로 연결된 조그마한 통로 작가는 그 통로마다 메시지를 놓는다. 관객들은 통로를 지나면서 그 메시지를 느끼며 작품에 스스로 동참해 간다. 하지만 통로를 지난 사람들에게 있어서 메시지는 동일한 것이 아니다. 한 관객은 슬픔을 또 다른 관객은 희망, 그리고 용기.... 작가는 관객이 작품 속에서 저마다의 이미지를 만들길 원한다.이렇듯 현대 미술은 미술관에 놓이길 원치 않는다. 그건 미술관에 소장되자마자 단지 소장해야할 과거의 예술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관객들과 호흡하는 예술은 관객들 마음에 이미지와 꿈을 심어준다. 현대 예술은 바로 동참의 예술인 것이다.둘째, 현대 예술은 인생 그 자체를 보여준다.현대 예술은 더 이상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던 지난 예술에서 탈피하여 사회적 문제를 꼬집기 시작했다. 미래는 항상 현재이고, 현재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현대 예술은 올바른 미래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 예술은 그 어떤 도구에 상관없이 사회의 모습을 비춰내고 있다. 그 문제에 대해 직시하는 것이 바로 정체성을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카셀도큐멘타에서 작가는 《그 나라로의 여행》이라는 작품 속에서 미디어를 통해 지금 우리의 모습을 보여준다. 사회문제, 국제문제, 인종차별 그리고 AIDS, 르완다 내란 등.... 현재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또한 《페인팅》이라는 작품 속에서는 가장 전통적인 도구인 붓으로 현대 문제를 비춰냈다. 문제를 밝히는 데에 있어서 붓은 가장 혁명적인 도구로 사용되기도 하는 것이다.현대 예술에서는 어떤 것이 예술인지 아닌지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늘날 무엇을 실현시킬 수 있고 사회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 획일화되어 있는 것이 아닌 자신의 눈을 갖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소통의 공간으로서 인생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하여 작가는 더 좋은 세상 미래를 보여주고자 하며 그 손으로 미래를 건설하고 만들고자 한다. 즉 예술은 생각고 손이라고 한다.셋째, 현대 예술에서 이미지는 살아있다.현대 예술의 이미지의 표현은 비단 붓과 캠퍼스에 한정되지 않는다. 이것을 알아보기 위해서 우리는 『ZMK』에 이코노크래쉬로 들어가 본다. 여기서는 그림의 파괴를 얘기하고 현대의 끝이 있는지 이야기한다. 즉, 바로크·로코코 미술처럼 특정한 형식이 아닌 살아있는 예술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검은 사각형》이라는 작품은 회화의 종말을 얘기하며 전후의 모습을 보여준다. 대신 예술가들은 세상의 문제와 욕망을 이야기하는데 적합한 미디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미디어를 통해서 상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아닌 직접 만나고 바꾸는 예술의 성립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현대 기술(미디어)과 예술의 만남은 예술과 과학의 경계를 허물었다. 그리하여 새로운 개념의 살아있는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즉, 현대 예술에서의 이미지는 살아있는 이미지이다. 그것은 머리 속에서만 느껴지고 그려지는 이미지가 아닌 직접 손으로 만지고 느끼고 창조하는 예술이다. 이것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관객들이 참여를 유도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살아있는 이미지는 따분하지도 않고 이해를 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단지 스스로 느끼면 된다. 《빛》이라는 작품 속에서 뛰어다니는 아이들 작품을 마음껏 느끼는 아이들... 그 아이들 이야말로 진정으로 작품을 느끼는 관객이 아닐까...?마지막으로 과학과 예술은 더 이상 별개의 존재가 아닌 하나의 유기체로서 호흡하기 시작했다. 이것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다시 한번 『ZMK』를 예로 들어야 할 것이다. 『ZMK』는 유명한 미디어 아트센터로서 첨단 테크놀러지와 현대 예술이 결합되어 있다. 『ZMK』의 관장 피터 베이블의 인터뷰 내용을 들어보면 우리는 영화, 음악, 그리고 책 프로듀서인 것이다. 우리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절반을 프로듀싱하는 미술관이다. 그래서 우리는 미술센터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미술관이라고 하지 않는 것이다. ZKM은 21세기 다른 미술관의 모델이 되고 있다. 라고 하고 있다. 이 말은 현대 예술의 전형적인 모습을 가장 잘 나타내준 말이라고 생각된다. 현대 예술은 과학과 접목되면서 그 형태가 점점 다양화되었다. 과학의 발달은 미술과 음악을 접목 시켰고 또한 미디어를 접목시키면서 새로운 형태로 나타났다. 더 이상 대중매체 속에 흡수되어 독창성을 빼앗는 그림에서 벗어나 모션 트래킹, 터치 패드 등 다양한 현대 예술은 슈퍼에서 물건을 사는 듯한 행위가 아닌 구성의 정신과 과학의 결합으로 새로운 이미지를 탄생시키는 것이다. 실제로 현대 예술가들은 미술을 잘 그리고 악기를 잘 다루는 사람이 아닌 컴퓨터 그래픽이나 전기 쪽에 더 큰 의의로 두고 있다. 현대 예술가들이 만들어 내는 작품을 여기에서 일일이 다 언급할 수는 없지만 정말로 신기한 것들이 많아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칸트의 철학의 근본은 이성에서 출발한다. 여기서 말하는 이성이란 자유의지에 의한 자율적 행위 능력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칸트는 인간은 무엇을 할 수 있나? 인간은 무엇을 요구하나? 무엇을 느낄 수 있나? 라는 물음을 제시하면서 인간의 영혼 능력을 사유의 능력, 의욕의 능력, 그리고 느낌의 능력으로 구분하였다. 이것은 그가 말한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과도 주제를 같이 하고 있는데 이 중에서 실천이성비판에서 다루어지고 주된 주제는 도덕적 행위의 선험적 근거를 말하는 것이다. 즉, 바로 이 부분에서 칸트의 선의지 가 나온다.칸트에게 있어서 본래적으로 선한 것은 선의지 뿐이다. 선의지란 옳은 행동을 오로지 그것이 옳다는 이유에서 항상 택하는 의지를 말한다. 그것은 행위의 결과를 고려하는 마음이나 또는 자연적인 경향을 따라서 옳은 행동에로 쏠리는 의지가 아니라, 단순히 어떤 행위가 옳다는 바로 그 이유로 말미암아 그 행위를 택하는 의지인 것이다. 결과에 대한 고려나 자연적인 경향에 좌우됐을 경우에는, 비록 외면적으로는 틀림없이 옳은 행위를 택한 의지일지라도, 참된 선의지라 부를 수는 없다. 한 마디로 말해서 선의지란 객관적 실천의 법칙을 순수한 동기에서 따르는 능력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도덕적 노력이 궁극의 목표로 삼을 바는 선의지의 실현 내지 함양이라고도 할 수 있다.또한, 칸트는 인간이 따라야할 절대적 도덕법칙의 존재를 주장하며 실천이성의 절대적 법칙을 제시했다. 이 실천법칙은 실천이성의 명령에 의해 그 존재근거를 부여받고 있는데 이것은 언제 어디서나 적용이 가능한 무제약적으로 타당한 도덕법칙 으로 보편성과 필연성을 필요로 하게 된다. 여기서의 보편성이란 모든 이성적 존재에 대한 무제약적 타당성을 의미하며 필연성이란 의무로서 명령하는 예지적 강제성의 존재를 의미한다. 이 보편성의 확보를 위한 실천법칙은 후천적이며 경험인 요소들을 배제시키고, 명령 또한 정언명령을 이루게 된다. 마지막으로 인간이 선의지에 따를 수 있는 이유를 서두에 언급한 인간의 자유의지로 설명하였는데 자연물이나 인간의 육체는 인과율의 결정론에 따르지만, 인간은 자유로운 의지를 가지고 있어서 자연법칙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이라 하였다.
이케바나의 관해서0970188 박영범1. 이케바나의 정의이케바나란 일본전통예술의 하나로서 나뭇가지 잎사귀, 풀 등의 화재를 그릇, 즉 화기에 담아서 꽂는 일, 또는 그 기법을 말한다.이케바나의 역사는 아주 오래돼서 그 기법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났으며 여기에 사용된 화기 또한 여러 가지가 사용되었다. 화기에는 길다란 화병, 넓적한 수반, 이층 짜리 화병, 대접, 컵 등이 있다.이케바나는 신에게 꽃을 바치는 쓰임새로 1300년대 초반에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이케바나는 그 동안 수많은 유파를 만들어 냈고 가장 체계적이며 영향력이 큰 이에모토제도를 낳았다. 그런데 현대에 들어와서 이케바나는 종교적인 용도보다는 실용적인 성격이 짙어졌다. 오늘날 일본인들은 이케바나를 스스로 만들어 감상하기도 하지만 손님을 품위있게 대접하는 데에 이용하기도 한다. 또한 이케바나는 생활공간을 아름답게 하는 인테리어의 한 측면으로서도 기능하고 있다.이처럼 현대의 이케바나는 인간 생활을 윤택하게 해주는 복합적 생활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케바나는 단순히 생활의 외형을 아름답게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사람이 자연과 친밀해지고 마음의 평정을 갖게 해준다. 또 이케바나를 하는 사람은 작업과정 자체를 즐거워하고 겸손한 태도를 배우는 것과 같은 정신적 수양을 하게 된다. 이케바나를 가도 즉 '꽃의 도'라고 부르는 것은 이런 점에서 연유한다.2. 이케바나의 역사1. 이케바나의 전개이케바나의 출발점을 제사 때 신에게 바치는 나무나 부처님에게 바치는 꽃에서 찾기도 한다. 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는 반드시 나무를 세워야 한다는 것은 일본 민속신앙의 일관된 특징이다. 신령이 강림하여 나무에 깃들인다는 관념이 있기 때문이다. 이 나무는 신의 요리시로, 즉 내림대가 된다. 이런 나무가 있는 곳에 신사를 세우거나, 신사에 이런 나무를 심었다. 나무의 종류는 상록수인 소나무나 삼나무나 비주기 나무를 택하여, 늘 푸르고 아름다움을 유지하도록 했다.일본에 불교가 전래됨과 함께 불전에 꽃을 바치는 가공하는 과정을 즐기는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의식이 확산되었다.무로마치 시대에 이르면, 귀족들이나 무사들 또는 여유 있는 승려들이 모여 회의를 열거나 놀이를 하는 일이 많았다. 여러 가지 놀이 가운데는 실내에 장식한 꽃을 손님들에게 자랑하거나, 여러 사람이 각각 병이나 그릇에 담은 꽃을 진열하여 놓고 우열을 가리는 놀이도 하였다. 칠석에는 귀족들이 화기에 담은 꽃을 어전에 헌상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헌상하는 사람들 사이에 차츰 경쟁의식이 생겼다. 헌상하는 꽃은 보다 진귀한 꽃을 찾게 되었고, 진귀한 화기를 찾으며, 꽃을 꽂는 모양에도 각별한 신경을 썼다. 이렇듯 보기 좋은 꽃꽂이를 추구하는 사회적 풍조에 따라서, 이윽고 꽃꽂이에 대한 심미안과 재능을 갖춘 전문가가 출현하게 되었다.이케바나 전문가의 출현으로 꽃꽂이는 세련된 미의식을 지니며 일정한 양식을 설정하여 이를 체계화하는 일이 시작되었다. 가장 고전적인 꽃꽂이로는 꽃이나 꽃나무를 그대로 세운다는 뜻으로 다테바나라 했으나, 차츰 양식이 정비됨에 따라서 릿카라 불려지게 된다.릿카는 1682년에 간행된 『입화대전』에 쓰인 용어이며, 당시에는 규모가 큰 실내의 장식품으로 등장했다. 릿카를 시도한 중심인물은 귀족가문인 야마시나가의 하급무사인 오사와 히사모리였다. 1488년 정월에 궁정에서 열린 의례에 참석한 사람들을 위하여 가무와 주연이 벌어졌는데, 연회장을 장식하는 릿카를 만드는 일은 오사와가 담당했다. 기록에 의하면 초목은 5종류를 사용했다고 한다. 전체의 중심, 즉 마음을 의미하는 주지로는 소나무를 사용하며 그 좌측에 가지를 길게 내고, 우측에는 홍매화 가지를 꽂고, 가지 밑에는 초봄의 꽃 밝은 색의 금잔화를 세워서 많은 사람의 시선을 집중시켰던 것이다.그후에는 궁중의 행사가 있을 때마다 행사와 잘 어울리는 모양의 릿카를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이 시대의 쇼오군들은 객실을 호화스럽게 꾸미고 전문가를 동원하여 이케바나를 장식하였다. 이케바나의 전문가로는 다쯔아미를 비롯하여 여러 사람이 있지만, 쇼오군의 측근에서 특성은 규모가 크다는 점과 화려하며 일정한 격식을 따른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예를 들면 화기의 크기가 가로 1.8미터, 세로 1.5미터 짜리 큰그릇을 쓰며, 꽃과 꽃나무의 종류도 많이 썼다. 가지의 배치도 기교적이고 색채도 화려하여, 한마디로 웅장하고 화려하게 꾸밈이 릿카의 시각적 특성이 된다. 또한 꽃과 나뭇가지를 배치하는데 일정한 양식을 두어, 각 부분의 명칭을 진, 부, 청이라 하여, 각 부분에 일정한 의미를 부여하며 구성 양식을 정하여 미를 추구하려 했다.릿카에 대한 일종의 반발이라고도 할 수 있는 나게이레라는 양식이 나왔다. 이는 꽃을 던져 넣듯이 꽃병에 넣는다는 뜻으로 규격화된 화병이 아닌 그릇에도 손쉽게 가벼운 기분으로 꽃을 던져 넣듯이 꽃을 꽂아 이케바나를 할 수 있다는 뜻을 지닌다. 그러나 글자 그대로 꽃병에 꽃을 던져서 넣는 것은 아니고, 꽃을 가공하지 않고 자연상태대로 넣는다는 의미이다. 나게이레에도 일정한 양식이 있음은 물론이다.릿카의 경우 진을 나타내는 꽃, 가지 혹은 잎을 수직으로 세우는 형식을 지켜야 하지만, 나게이레는 던져 넣는 것처럼 가지를 길게 옆으로 뻗어나가도록 한다는데 특징이 있다. 따라서 화기는 천장에 달아서 늘어뜨리는 배모양으로 만들기도 하며, 꽃은 여기에 어울리도록 비스듬히 꽂아 자연스럽게 뻗어나가도록 하였다.나게이레는 다도에 활용되어 다실을 장식하는 꽃꽂이 방식으로 애호되었다. 다실에서 추구하는 자연 친화적인 정신과 잘 조화를 이루었기 때문이었다. 풍류 정신을 중요시하던 나게이레는 다실에 도입되어 차바나라고 불리며 다실의 이케바나로 중시되었다.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다도가 추구하는 형식미의 존중 정신과, 자연스러움을 강조하는 다실과 나게이레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결국 나게이레는 다도와 상관없는 독자적인 이케바나 양식의 한 가지로 정착되었다. 나게이레의 특징으로는 즉석에서 만들어 손님에게 보여 대접할 수 있다는 점과 그런 즉흥적인 운치를 즐길 수 있다는 점이 있다.나게이레에는 엄격한 양식이 다. 유파에 따라서는 간략하게 한 작은 꽃꽂이라는 뜻에서 쇼카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세이카는 일정한 법칙에 따라 격조 있게 만들며, 화기와 맞닿는 꽃가지의 아랫부분은 가늘게 처리하여 단정하고 산뜻한 느낌이 들도록 함으로써 당시의 미의식을 반영하였다.18세기 중엽부터 맹렬한 기세로 유행되며, 세이카의 여러 유파가 출현했다. 세이카에는 유교사상이 채용되어 천지인 삼재사상을 이케바나의 모양 즉 화형에 응용하였다는데 특징이 있다. 꽃가지의 배치와 구도를 천지인이라는 알기 쉽고 선명한 개념으로 분류하여 꽃을 꽂는다는 점은 서민들에게 크게 환영받았다. 세이카를 통해서 인륜을 바로 잡으며, 부녀자들에게 삼종지도를 깨우쳐준다는 실리적 이유가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되었던 것이다. 이런 이론은 에도막부의 교화정책과 합치되여, 이후 메이지시대의 교육이념에도 원용되었다. 메이지 정부에서는 세이카를 학교교육 과정에 편입시켜서, 다도와 더불어 여성의 수양방식의 한 가지로 교육한 일도 있다.메이지유신 이후, 서양문물을 추종하는 사회풍조 가운데 이케바나는 전통적인 구습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신구 문물이 교체되는 시기에다가, 경제불황이 시작되자 이케바나를 배우려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1890년대 국수주의의 기운이 발흥함에 따라, 이케바나는 일본 고유의 전통예능으로서 다시금 각광을 받게 되었다. 여학교에서 여성의 교양으로 재봉, 편물, 다도와 함께 이케바나를 정규 과목으로 채택했다.러·일 전쟁 후에는 일본에서 서양 꽃을 많이 재배하기 시작하였고, 생활양식도 변화함에 따라서 생활환경에 어울리는 이케바나가 요구되었다. 이때 서양꽃을 도입하여 색채가 풍부한 새로운 이케바나를 시도한 사람은 오하라 운신이었다. 그의 새로운 이케바나를 모리바나라 했다. 오하라 운신은 처음으로 다알리아·마아가렛 등의 서양꽃을 이케바나에 사용했다. 이 꽃들은 전체적으로 꽃의 키가 짧기 때문에 분재의 형식을 응용하여 수반형식의 화기도 처음으로 고안했다.오사카에서 활동하던 오하라 운신은 수반형식의 화기를 이용하여 사실적이며라는 시점에서 이케바나를 출발하려는 전위 이케바나가 전후 이케바나계를 석권하였다.전위 이케바나는 소재를 꽃에 한정하지 않고 이질적인 소재를 도입하고 꽃도 무기물로서의 취급하는 등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근대조형을 시도하였다. 또 슈르리얼리즘 수법에 의하여 환상적이며 상징적인 작품을 만들기 위하여, 꽃 이외의 소재로 금속, 돌, 유리, 헝겊, 플라스틱 등을 사용했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존중하며 꽃의 원래의 모습을 살리려는데 기본을 두는 종래의 꽃꽂이 형식에서 멀어졌다. 꽃을 꽂는 인간의 심정을 중심으로 추상이라든가 초현실적인 사상이나 상황의 표현을 시도하였다.2. 이케바나가 가지는 의미이케바나의 기본에는 동양사상 가운데 우주의 구성요소를 천지인으로 분류하여 인식하는 동양적인 사상이 적용되었다. 이 원리를 적용하여, 꽃가지에 천의 부분, 지의 부분, 인의 부분을 설정하여 우주의 원리를 구현하려 하는 이들이 나타나 이를 구체적으로 이론화하였다. 미쇼류의 창시자인 미쇼사이 잇포에 의하여 에도시대 말기에 이론화되어 현대 이케바나에도 이 이론이 적용되고 있다.이런 이론이 실제 이케바나에 적용되는 예를 들면, 중심이 되는 꽃가지를 3가지로 하되, 각각 천지, 지지, 인지로 설정한다. 꽃가지가 향하는 방향과 꽃가지의 크기를 각기 달리하여 변화를 주되, 각각 일정한 상징적 의미와 역할을 부여한다. 천지는 하늘이자 양성을 상징하여 중심에 두는 가장 긴 꽃가지이며 위를 향하여 수직으로 꽂는다. 지지는 땅의 안정감을 나타내는 음성을 상징하여 짧고 옆으로 뻗게 하며 수평적인 느낌이 들도록 꽂는다. 이 두 가지를 조화시킬 수 있도록 두 가지 사이에 중간 정도의 길이가 되도록 꽂는 꽃가지를 인지라 한다.천지인의 개념은 세이카가 성립되는 에도시대 중기 이후에 사회질서와 도덕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세이카가 천지인삼재를 받아들여서 구성의 기본원리로 한 것은 이 때문이다. 또한 세이카의 내용이 단순히 외면적인 미에 의지할 뿐만 아니라 생활지표로서의 도와 같은 정신적인 수양의 의미를 말이다.
국화와 칼을 읽고.....국화와 칼 이 책은 태평양 전쟁 이후 발표된 책으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일본을 이해하고 또 가장 일본에 대해 정확하게 지적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는 걸작으로 알려져 있다.태평양 전쟁중이던 1944년 여름, 사이판 섬에 상륙한 미군은 전쟁을 종결시키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문제가 된 것이 일본인의 사고와 행동양식에 관한 것이었다. 즉, 밀리고 있는 일본군이 앞으로 어떻게 저항할 것이며, 항복을 하게 될 때에는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그리고 전쟁이 끝난 후에 미군이 통치할 때에는 어떤 형태가 좋을 것인가 하는 것 등등 일본인의 사고와 행동양식을 예측하는 일이 중요하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한 연구를 맡게 된 것이 루스 베네딕트 여사였다. 그녀는 미국 인류학계의 일인자로 알려져 있었지만 그 때까지는 일본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적이 없었을 뿐 아니라, 일본어도 모르고 일본에 간 적조차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최고의 학자답게 온갖 방대한 자료를 섭렵하고 일본인의 가치관과 감정의 특질을 체계적으로 파악하여 을 펴내기에 이르렀다.2차대전 중 일본이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한 전제는 미국과는 정반대였다. 미국이 일본, 이탈리아, 독일 3국의 침략행위가 전쟁의 원인이라고 본 것에 반하여 일본은 각국의 절대적 주권을 가지고 있는 동안은 세계에 무정부상태가 계속되는데 이에 일본은 계층제도(階層制度)를 수립하기 위해 싸운다는 것이다. 모든 나라는 하나의 국제적 계층제도 속에 제각기 포섭되어 하나의 세계로 통일되어야 하는 것이다.일본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각자가 알맞은 위치를 갖는다. 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 가에 관한 일본인의 견해가 어떠한지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일본인의 계층 제도에 대한 신뢰는 인간상호 관계 및 인간과 국가 관계에 대해 일본인이 품고 있는 관념전체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알맞은 위치'라는 것은 세대와 연령, 그리고 성별에 따라 달라진다.세대와 성별과 연령에 알맞은 위치에 따른 특권은 아주 큰 것이지만 이 특권은 행사할 때는 독재자로서가 아니라 중대한 책무를 위탁받은 자로서 행동한다.메이지 정부가 운영되었을 때 정치가들은 일본의 계층제를 없애려고 모든 사사을 배척했다. 「왕제 복고」는 천황을 계층제의 정적에 두고 쇼군을 제거함으로써 계층적 질서를 단순화했다. 이것은 계층적 관습의 발판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위치를 주는것이었다.일본은 끊임없이 계층제도를 고려하면서 그 세계를 질서화 해 갔다.가정이나 개인간의 관계에 있어서는 연령, 세대, 성별, 계급 등이 알맞은 행동을 지정한다. 정치나 종교나 군대나 상업에 있어서는 그 각각의 영역이 주도 면밀하게 계층으로 나누어져 있다.알맞은 위치'가 보장되는 동안은 일본은 불복(不服)하지 않고 계속한다. 그들은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물론 그들은 최대의 행복이 보호된다는 의미에서는 안전'하지 않은 경우가 종종 있지만, 그럼에도 역시 계층 제도를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여 왔다는 이유에서 안전한 것이다. 이것이 일본인의 인생에 관한 판단의 특징이다.그리고 일본에는 그 툭징중의 하나인 온(恩)이라는 말이 있다.이것은 큰 것에서 작은 것에 이르기까지 어떤 사람이 지고 있는 채무를 나타내는 것이다.일본인은 채권자나 은혜를 입힌 사람을 그들의 온진(恩人)이라고 부른다.온의 최대의 채무인 천황의 온(皇恩)'에 대해서는 무한한 헌신이란 의미로 사용된다. 일본인은 우연히 다른 사람으로 부터 온을 받음으로써 보답의 빚을 지는 것을 좋아한지 않는다.사람에게 온을 베풀다 는 말은 타인에게 무엇을 강제한다(inposing upon another) 라는 말과 가깝다. 다른 나라에서의 사랑, 친절, 너그러움 등은 어떠한 조건도 두지 않지만 일본에서는 반드시 어떤 부속물이 붙게 마련이다. 그리하여 행위를 받는 사람은 채무자가 된다.이것은 잘 나타내 주는 것으로 다음과 같은 속담이 있다.온을 받는 데에는 더할 수 없는 만큼의 너그러움을 요구한다. 외국인이 일본인이 일본인의 덕행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경제 거래와 비교하여 그 뒤에는 재산 거래처럼 채무를 이행하지 않는 데에 대한 여러가지 제재가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해가 쉽게 될 것이다.채무에 대한 한없는 갚음은 기무(義務) 라고 불린다. 기무는 양친에 대한 보은인 고(孝)와 천황에 대한 보은인 주(忠)가 있다.기무라는 이 두개의 의무는 강제적이어서 어느 누구도 면할 수 없다. 고에서 중요한 것은 의무와 부채의 갚음에 놓여서 연장자는 중대한 책임을 맡게 된다는 것이다.그러나 이들 채임의 하나는 아랬사람에게 필요한 희생을 반드시 치르도록 하는 것이다. 그들의 그 희생에 분개한다 해도 크게 변함이 없다. 그들은 연장자의 결정에 복종치 않으면 안된다.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기무를 태만히 한 것이 된다. 일본에 있어서의 효행의 특징인 가족 구성원간에서 나타나는 뚜렸한 원한은, 효행과 동등하게 기무하고 여겨지는 또 하나의 중대한 의무인 천황에 대한 충절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일본인의 최고의 덕(德)인 천황에 대한 충절, 즉 주(忠)는 속세와의 접촉에 의하여 어렵혀지지 않는 하나의 환상적인 선량한 아버지를 무아경적인 정관(靜觀)으로서 받아 들여야 한다. 1945년 8월 14일 일본인 항복했을때, 세계는 이 주가 정말 믿을 수 없는 정도로 큰 힘을 발휘한 사실을 목격하였다. 그들은 일본이 항복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여겼다. 그러나 천황이 정전 선언을 하자 전쟁이 끝났다. 패전에 있어서도 최고의 법은 여전히 주였던 것이다.일본인이 잘 쓰는 말에 기리[義理]'처럼 쓰라린 것은 없다. 는 말이 있다. 사람이란 기무[義務]를 갚지 않으면 안되는 것과 같이 기리를 갚지 않으면 안된다.일본어 사전의 설명에 의하면 기리는 으로 되어 있다. 기리는 두 개의 아주 다른 부류로 나누어진다. 세상에 대한 기리' - 문자 그대로는 기리를 갚는 것 - 라 부르는 것은 동배(同輩)에게 온[恩]을 갚는 의무요, 누구의 명(名)에 대한 기리'라 부르는 것은 대체로 독일인의 명예'와 같은 것으로서 자신의 명(名)과 명성이 어떤 오명에 의해 더럽혀지지 않도록 하는 의무이다.기무가 태어나자마자 생기는 친밀한 의무의 수행이라고 느껴지는 데 비하여 세상에 대한 기리는 계약 관계의 이행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기리는 법률상 가족에 대해 지고 있는 일체의 의무를 포함하고, 기무는 직계가족에 대해 지고 있는 일체의의무를 포함한다.기리의 규칙은 엄밀히는 어떻게 해서든 지켜야 되는 갚음의 규칙이다. 또 기리의 갚음은 정확히 같은 양이어야 한다. 그것은 만일 갚는 일이 기한보다 늦어지면 이자가 느는 것처럼 그것도 커진다. 이름(名)에 대한 기리란 자기 자신의 명성에 오점이 없도록 하려는 의무이다. 이것은 또한 비방이나 모욕을 제거하는 행위를 요구한다. 훌륭한 사람은 모욕에 대해서도 그가 받은 은혜만큼이나 강하게 느낀다. 어느 쪽도 그것에 보답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훌륭한 행위이다.1946년, 일본 신문은 세계의 눈이 우리에게 주목하고 있는 데도 아직까지도 폭격으로 인한 수라장을 정리도 못하고, 어떤 면의 공익사업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얼마나 일본의 체면을 손상시키고 있는 일인가'하고 끊임없이 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