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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육의 역사와 철학
    제 1 부 한 국 교 육 사1. 고대의교육 2. 고려시대의 교육 3. 조선시대의 교육①고조선시대의교육 ①고려시대의 학교교육제도 ①관학 교육의 실제 정창손 등의 반대에 부딪치기도 하였음-특정 문헌기록없으나 단편적 기록인 단군신화를 통하여 추론 신중심, 그러나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음 국자감 이전의 교육 -고려의 개경 및 지방에 이미 교육기관 존재 -과거제도,서학박사,태학박사 칭호->학교가 있었음을 추정하게 함 관학 교육의 실제 -이성계는 전제군주국가,유교장려,전형적 봉건사회,신분제도의 고착,교육은 고려의 교육제도 -세조,연산군등 보금 노력으로 사대부에서 서민 이나 부녀자에까지 널리 보급, 그러나 성균관을 비롯한 여러 학교교육 내용으로 채택은 않됨-홍익인간은 건국이념이자 교육이념 임 그대로 답습, 서원의 성립, 실학운동의 대두, ④과저제도와 교육②삼국시대의 교육 국자감 동학의 등장 등 사성적 혼란 -과거제는 개인적면에서 양반이 관료체제에 편입 할 수 있었던 제도, 중앙집권체제 유지 수단고구려의 교육 -일종의 종합대학,공자의 제사와 석전의 기능, 성균관-태학:소수림왕때 삼국시대 최초의 교육기관으로 오늘날의 국립대학,귀족자재대상,왕권 강조와 관리가 갖추어야할 소양을 배움 교육의 기능수행 그러나 발전하지 못하고 쇠퇴 십이공도의 등장과 국학의 부흥 '-사립고등교육기관,12공도는 국자감을 제치고 -성균관은 국학,태학,국자감,반궁,현관등 명칭있음,교육목적은 유교사상을 보급,고급관리양성,과거응시,자치활동,상소를 올려 탄핵->유소 -특징:문무의 양과 균형있게 운영,생원시를 중시,관학을 육성 과거제와 유기적으로 연결시킴 문과-경당:지방 소재 중등,초등교육기관 지배게급과 피지배계급자녀가 함께 교육받음. 유학경전 및 역사서와 활쏘기가 교육내용 고려시대를 대표 할 정도록 크게 번성, 국자감이 왕의 권위를 정당화하는 왕권중심의 교육기관이라면 12공도는 귀족의 권익을 옹호하는기관 학당 -성균관에 예속된 중등기관,입학자격은 10세 이상의 양반자제대상, 재원 부족으로 경영 부진 -소과->생원시자학,유학,이학,학학,화학,음양학 교육이 있음 교육법규 및 규범:조선시대의 교육을 구체적으로 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들이다 -경국대전,학령,권학사목,구재학규,진학절목, 잡과 -잡과시취는 역과,의확,음양과,율과 등 네종류로중인계급의 자제들만 응시 가능 ⑤교육사상가 권근(양촌)-국학의교육:신문왕때 형식적 교육기관인 국학이 등장,유교사상보급,왕족인 성골출신을 대상으로 교육,논어와효경이 필수과목임 -서당은 조선시대까지 이어져 발전하게 된다 경외학교절목,학교사목,학교모범,학제조건,학교절목,제강절목,원점절목,향학사목이 있음 ②사립교육기관 -입학도설을 지었고 인재양성이 목적, 유교사상 실천, 그림을 통한 교수방법을 강조하였다 -태종의 부마가 된 아들 규에게 公,勤,寬,信을독서삼품이라는 새로운 인제 등용법 시행,당나라유학이 성행으로 민족문화의 독자성 상실과 사대주의 문화가 정착됨 ②고려시대의 교육사상가 안향(외헌) -고려후기 학자, 교육목적을 효ㆍ충ㆍ예ㆍ신ㆍ경ㆍ성의 덕목 실천, 주자의 전서를 중시 서당의 교육 -지방의 유일한 교육기관으로 대중의 문자교육 도덕규범 확립,교화,학도들로 향교나 학당 등 가르쳤는데 이것이 그의 교육적 이상 임 조광조 (정암) -소학과 근사를 존중, 나라의 폐단을 시정하고교육사상 및 교육사상가 상급교육기관 진학,서민의 자제들에게 교육기회 개혁하는데 힘씀,성도치명의 정치이념 실현노력-불교사상:일반민중에게 교육적영향력 미침,원효사상으로 불심,유심기연, 화쟁 이색(목은) -고려말의 성리학자, 교육의 중요성 강조,교육의 목적을 하늘의 도리를 지키어 따르고 인간의 그릇된 욕망을 억제함으로써 인격적완성 정몽주(포은) -동방의 성리학의 원조로 추대될 정도의 대학자 제공, 강독,제술,습자 등 세가지 교육내용 배움 서원의 교육 -제자 육성에 전념, 교육의 목적을 성인의 도를 배워 치국할 인재를 양성하는데 두었다-유학사상:교육을 통해 귀족지배계급에게 영향을 미침,교육목적을 인이라는 도덕적 인자인 군자양성의 공자사상과 교육적 인간상을 성인에둔 맹자사상 -제향,유학교육, 국교육①실학의 발생배경과 사상 ①개화기 근대교육의 발달 ①통감부의 교육정책 ①제1차 조선교육령 시행기의 교육(1911.8~1922.2)실학발생의 배경 -18세기 전반기에서 19세기 중기까지 조선의 문제를 현실에 적합하게 개선하려는 학문경향을 실학이라고 한다 -성리학의 회의,중국에서 들어온 서학의 영향으로 자연과학,천주교에 관심 이것을 학문을 연구함으로서 조선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타파하려고 하였다 -정치,경제,사회적 폐해를 시정, 언어,지리,역사 농업,의학 등 사회 경제적 부분까지 영역이 확대되었고 사회개혁 수단 및 한문연구의 목표로 발전 한 것은 영조와 정조 시기 전후 한 17-19세기 중엽까지 이다 문호개방과 근대화의 추진 -조선조는 오랜세우럴 쇄국을 유지하다 인본과 강제,불평등 조일수호조규 후 열강에 문호개방 -개화 또는 근대화는 서구문명을 받아들이는 것과 직결되어 외국의 문물제도를 직접배워 옴 근대교육의 발단 -중국 통해 유입된 서학,천주교는 박해를 박으면서도 포교활동, 신부양성 교육기관 필요 -배론신학당,원산학사,통리기무아문,동문학,육영공원 등의 근대교육 기관이 생김 -육영공원은 구교육에서 신교육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교량의 역할,관립학교로서는 처음으로 서양 교육내용에 준하는 교육을 실시함에 의의 일제의 통감부 설치 -1905년 일본제국주의는 을사보호조약이라는 것을 맺고 식민지지배 준비에 들어 감 -1904년 한일 외국인 고용 용빙에 관한 협정에 따라 사실상 식민지 준비를 위한 교육정책 펼침 -일본문물을 한국에 이식 시키는 것이 한국 근대화의 수단이라고 생각하고 청소년들에게 일본인화를 교육의 기준으로 삼음 -1906년 통감부설치,1907년 3차한일협약에 따라교육행정의 최고자를 일본인으로 삼음 -이때부터 한국의 학부는 다만 일제가 조종하는대로 그 정책을 시행하는 일제의 식민지지배 교육을 위한 기관으로 전락 해 버림 일제의 한국에 대한 신민지지배 계획 -헌병에 의한 무단통치에 둠,1910년 한일합방이후 토시사업개시,조선총독 임명 등 신민지 지배정책을 펴나감다는 저의 담김 -사립학교 통제를 넘어서 한국 고유의 대중 교육기관인 서당조차 통제, 서당의 수가 감소 함 ②근대 학교의 성립 식민지지배 방침의 변경 -1919년 독립운동으로 놀란 일본은 식민지 지배정책을 변경, 문화정치를 포장한 무단통치계속②실학자들이 교육사상 유형원(반계) -유학사상근거,전통성리학에기반,반계수록의 교선지제와 교선고설이 교육목적 -공거제 구상, 과거제도의 폐지와 관계있는 것 -향약운영에 덕업상권,과실상규,예속상교,혼란상휼 등의 약조에 얽메이지 않고 지방 사정에 맞게 운영, 미풍양속을 진작하게 하였다 -원산학사를 시작으로 220개교에 이름, 홍화학교,종교의숙,낙연의숙,서북,서우,대동등 각종학회,숙명여학교,진명여학교등 교육입국의 인재양성을 민족의식 고취와 국권을 회복에 두었다 ③신학제의 수립과 관학의 설립 신학제의 수립 -일본압력,예조,과거제 폐지등 신교육 도입의지 -근현대적학제,교육과정,초등교육의무,균등원칙 [교과용도서규정]에 의한 교과서의 탄압 -모범교육을 빙자하여 교과서 편찬과 통제, 이것을 기초로 하여 사립학교를 통제하기 위해 [사립학교령],[교과요도서검정규정] -[교과용도서규정]은 교육내용을 자의적으로 통제, 때문에 한국국민의 자주적 교육운영에 큰 타격 줌,학부편찬,학부대신 검정 받은것,이상 해당 없는 도서는 학교장이 인가를 받은 것 만 -헌병경찰제를 폐지하고 고등경찰을 확대 등 민족운동을 분열 분활통치의 고등술책 임 제2차 조선교육령에 의한 식민지교육정책 -일본식교육을 강화,일어시간 대폭 확충,한국역사를 왜곡 교수함,고등사법학는 두지 않음,농촌정책,동화정책을 하나로 간이학교제 도입 함 조선민립대학 설립운동 -민족정신 높이고 민족의 단결을 굳게하기 위함이익(성호) -예의 중시, 인간을 현과 불현의 두 종류로 구분하고 과거제도의 문제점을 비판하였다 -군왕과 치자교육에 관심,사농합일 실현 주장 -학제제시,교육개혁,일신전공과,자각,치자 강조 각급학교 교육 상황 -1895년 소학교령,소학교규칙대강을 제정 공포 -1895년 한성사법학교관제,외국어,규장각 내외직에 근무하면서 식견 넓힘 -민족주의교육/무궁화양선 운동 등 교육실천가 -시,가정교과등 저술활동,실업교육관심 -교육을 통한 구국운동을 전개, 이것은 주권회복을 위한 민력증강과 직결되었다 제4차 조선교육령에 의한 식민지교육정책 -연성교육체제화와 학도동원체제화의 방향에서-봉건지배자를 위한 폐쇄적인 교육에서 탈피하여 직업,신분 관계없이 인간의 도야를 목적에둠 이승훈(남강) -민족학원창설,운영,애국계몽운동통한 구국이념 기독교학교의 교육구국운동 -교육구국운동은 기독교학교에서도 이루어졌다 추진,지원병제,징병제,군사교련강화, 여성동원 고등교육 기관의 개편-철저한 문자교육 실시, 어린이에게 역사교육 -이덕무의 고증학적 학문은 정약용,김정의,김정호,이규경 등에 영향 미침 -지성인 정신,주된 교육은 근대,산업,민족,종교교육,민족교육을 위해 신민회에 참여 함 안창호(도산) -기독교 학교는 근대식 교육과정 제공,사회계몽활동 전개,창가를 통한 민족정신 고취,충군애국 행사를 통한 민족정신의 발휘하였다 -전쟁수행에 필요한 능력을 증강하기 위해서 고등기관 개편, 1945.8.15일 종지부 찍음 경성제국대학의 개편-인간성에 본 교육이념 誠,자애,勇,知의 인격 -사회운동측면 무실,역행,충의,용감을 말 함 -1905년 한국에 미국인 250여명이 모였는데 한국독립을 위해 선교사들이 그 중 반이었다 -1938년 경성제국대학 설립,그러나 학생,교원,대부분 일본인,관립의 식민지 대학의 구실제 3 편 교 육 철 학1. 제1 ~ 5장 정리역사배경 및 교육실재 교육사상가/대표자/분파 기타(비판 및 이론추가)실용주의 -신학에 대한 도전, 자연과학 발달, 미국인들의 개척자 기질 -퍼어스,제임스,듀이진보주의 -전통적 교육의 반대 어린이의 자유,경험,생활,창의 등 존중 -듀이,킬패트릭,촤일즈,테일러,스텐리,토마스, 베네,카운즈,왓슨,베이커,벤자민, 앤더슨 -지나친 아동중심교육으로 목표설정을 못함-실용주의에 기반 자발적,능동적,전인적 인간육성 -신교육동지회,아동교육협회,미국교사협회 -아동의 흥미를 지나적음
    교육학| 2008.10.23| 5페이지| 1,500원| 조회(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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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다이즘과 아방가르드
    < 목 차 >가. 들어가는말나. 아방가르드란 무엇인가?다. 유럽의 아방가르드라. 서반아의 아방가르드마. 중남미의 아방가르드바. 맺는 말참고문헌가. 들어가는 말아방가르드는 유럽의 문예사조로 볼 때는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사이에서 교량 역할을 하고 있으며, 포스트모더니즘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예술사조임에도 불구하고 영미문학에서는 아방가르드를 실제로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지는 않는 것 같다. 오히려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에서는 그 중요성이 부각되었고 그에 대한 연구도 많이 행해졌다. 이는 레나토 포기올리의 지적대로라면 모더니즘보다 훨씬 더 유희적인데다가 우상 파괴적인 특성을 지닌 아방가르드가 발전하는데는 라틴 문화권 사람들의 감수성이 비옥한 옥토의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반대로 영미문학에서는 모더니즘과 아방가르드를 구별하려는 의도또한 환영받고 있지 못하고 있는 실정에다가 모더니즘의 하위개념으로써 아방가르드를 두고자 하는 학설도 있어 아방가르드는 역시 라틴계 언어에서만 대접을 받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이 리포트에서는 주로 아방가르드가 무엇이며, 무엇을 추구하며, 그것이 유럽과 서반아와 중남미에서는 누구에 의해서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기술하였다. 유럽의 아방가르드는 주로 프랑스를 기준으로 한 것이고, 아방가르드의 일반이론도 아방가르드의 시작이 프랑스였던 것만큼 그 방면의 이론을 기준으로 하였다. 일반론에서 기준이 된 텍스트는 외국문학 1984년도 제 1호에 실린 아드리안 마리노의 ‘아방가르드는 어떻게 정의되는가’이며, 부텍스트로서는 김욱동교수의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아방가르드편을 참고하였다. 서반아어권의 아방아가르드는 민용태 교수의 ‘서중남미 문학론’과 현대시학에 실린 아방가르드 시인들에 대한 연재물에서 참조하였다.나. 아방가르드란 무엇인가?1. 개요백과사전에서는 아방가르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전위라는 뜻. 혁신적인 예술 활동을 지칭하는 말로써 특히 남보다 앞서 미지의 세계를 타개해 가는 것을 급선무로 하였던 20세기비판하는 의식들이 밖으로 거세게 표출되기 시작하면서 아방가르드는 그러한 사회 현실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아방가르드란 용어에서도 우리는 그것이 처음부터 문학을 지칭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Avant-garde는 군대 용어로써 적진을 향해 뛰어드는 특공대의 선봉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것이 프랑스 혁명이후 정치사상이나 사회혁명적 용어로 쓰여지게 되었고, 처음부터 아방가르드는 정치나 사회 개혁과 관련을 맺을수 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1845년에는 분명하게 Levardant에 의해 유토피아적이고 혁명적인 미학용어로 자리를 잡아가게 되었다.“사회의 표현인 예술은 드높게 비상함으로써 가장 진보적인 사회적 경향을 표현한다. 예술은 개척자이며 폭로자이다. 그런데, 예술이 선구자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는지 혹은 ‘예술가가 그야말로 아방가르드에 속해 있는지 아닌지’를 알기 위해서는 인류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인지를 알 필요가 있다.)이러한 아방가르드를 문학개념으로는 처음으로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에서 언급되었고, 당시 샤를르 보들레르도 이 용어를 사용하였다. 그리하여, 1870년도에 들자 이 용어는 전위적인 작가들과 예술인들을 總稱하게 되었다. 따라서, 용어에서도 볼 수 있듯이 아방가르드는 전투적이고 투쟁적이며, 이러한 중심개념을 중심으로 조금씩 의미가 확대되어 자신의 몸체를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아방가르드를 이해하는데 있어 중요한 열쇠가 된다. 아방가르드는 다양한 분야에서 위의 기본적인 개념을 끌어안고 당시의 세계관이나 삶의 방식들을 이해하고 규정하는 하나의 시대흐름이 되었으며, 이러한 맥락에서 아방가르드 문학정신을 파악할 수 있는 있는 것이다.정리해본다면, 아방가르드란 19세기말과 20세기초에 일어났던 사상적 혼란과 이데올로기의 투쟁속에서 과거에서 탈피하고자하는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욕구가 예술로 이어져 나타난 일련의 반항아 집단이었으며, 이는 인위적이고 비인간적인 전통으로 가득찬 과거와의 단절과 새롭고 진정한 예술을 향한 년 이상이나 계속되어온 예술의 흐름을 인상주의를 끝으로 막을 내리게 했던 것이다. 이 이후로 예술은 자연의 再現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그 시대의 예술 흐름의 일반적인 경향이라고 보아도 무관한 이러한 과거와의 단절을 아방가르드는 수용하고 촉진시켰으며, 과거의 전통을 매장시켜 결국 예술의 근원을 추구하고자 한 것이다.또한, 아방가르드는 현대적인 의식의 일차적인 반응인 무소속감과 반순응주의로 이미 예상할 수 있었던 낭만적 개인주의의 특징들인 무소속.고립.계급 탈락.방랑 등의 단절을 재현.강화한 것이다.) 아방가르드는 모든 것들에 대한 단절을 확인하고 싶어하며, 문학적 전통들과 사고방식을 조소한다. 그리고는 영원한 단절감을 맛보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단절을 통한 자기고립만이 목적이 아니라 원래의 예술의 원형을 복구하고자 하는 것이기에 그 단절은 진보를 위한 필요조건으로 받아들여 졌다. 단절을 함으로써 새로운 것을 추구한다는 논리인 것이다. 이러한 욕구에 의해 실질적인 단절이 가지고 온 것은 결국 아방가르드로 하여금 도덕적 파괴까지 하게 하는 것이고, 이는 분노로써 삶을 바라보게 하는 태도를 형성하고 삶을 하나의 문제거리로 보게 만들게 되었다. 끊임없는 반항은 도덕에까지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반항의 미학은 결국 허무주의로의 길을 선택하게 되는 것이 아방가르드의 운명인 것이다.(4) 아방가르드의 허무주의초현실주의자들의 정치 참여가 실패로 끝나고, 도덕적 반항으로 인한 허무주의가 2차대전 전까지 지속되었다. 부정의 행위가 더욱 과격하게 바뀌어가고 마침내 이데올로기적인 논쟁의 동기가 결여되기 시작되면 파괴적인 양상은 갈수록 더해지고 결국 그것은 걷잡을 수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마침내 허무주의는 이러한 아방가르드의 과정에서 나올 수 밖에 없는 필연적인 것이다.아방가르드의 허무주의는 완전한 파괴를 의미한다. 모든 계급과 가치의 구조를 완전히 파괴하여 잿더미만을 남겨놓자는 것이다. 완전한 파괴, 그것은 완전한 절망의 소산이다. 즉, 善과 惡, 美에야 알 수 있는 것이며, 작가는 그것의 성공을 볼 수도, 아니면 영원히 산다 할지라도 그 성공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아방가르드의 내적 논리에 의해 끊임없는 창조적 반항을 미래로 쏟아 붓고 있는 것이다.다. 유럽의 아방가르드1918년 세계 제 1차 대전이 끝나자 곧 유럽의 지성인들은 과거의 시대가 멀어져가고, 인간의 지성이 쌓아올린 모든 유산들과 전통들이 전쟁으로 인류를 몰아갔음을 통감하고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고 한편으로는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 나가는 작업에 대한 강한 욕구를 가지게 되었다. 때마침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과 프로이트의 정신철학은 전통적인 인간 이해에 큰 변혁을 불러일으키고 이는 당시의 예술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부르조아적인 모랄이 공격의 대상이 되고, 기독교도 비판의 화살을 피하기 어려운 지적 분위기가 이루어진다. 문학에서는 프랑스를 중심으로 과거의 소재와 형식을 버리고 현대에 맞는 미적 가치를 이룩하려는 모더니즘적인 지적 도전이 계속되었다. 모더니즘은 19세기 보들레르에서 출발한 것으로 볼수 있는데, 이를 아폴리네르에 이르러서 형식과 내용면에서 적극적으로 탐구되고 실험된다. 또한 그는 ‘새로운 정신’이라는 글에서 “진실은 숭고함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성 속에 내재하고 있으며, 驚異야말로 모든 예술 창조의 원동력이 된다.”)고 주장하여 이후 다다와 초현실주의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그 자신도 아방가르드라는 흐름에 휩싸여 있음을 보여주었다. 모든 예술계는 이러한 새로운 흐름에 충실히 부응하고 있었으며, 1909년 마침내 이탈리아의 마리네티가 파리에서 ‘르 피가르’지에 ‘미래주의 선언’을 발표함으로써 대표적인 아방가르드운동의 선구자격인 미래주의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미래주의는 문학과 예술 전반에 걸쳐 기계문명의 도래를 예고하였는데, 이것은 후에 새로운 시어개척에 영향을 주게 된다. 미래주의는 인류의 미래와 예술에 나타날 새로운 관념에 깊은 관심을 보였으며, 모든 아방가르드 운동 중을 받아 부사, 형용사를 되도록 쓰지 않으며, 구두점을 찍지 않고 단어의 의미보다는 소리나 억양, 리듬을 중요시하였다. 아폴리네르는 상형시 즉, 글자를 어떤 의미를 띤 형태로 배열하여 그림처럼 된 시를 고안하기도 하였으며, 여러 사람이 동시에 시를 읽는 동시시가 등장하기도 하였다.한편, 다다가 인정하는 가치는 개인의 자발성에 있으며 그것으로 인해 인간은 자유로와지고 그로인한 예술도 진정한 창조물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자발성에 무한한 자유를 허용하여 각양 각색의 예술적 실험이 이루어지고 있었으나, 따로이 자신들 내부에서 이론적인 통일성을 추구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실천적인 면이나 기교에 신경을 쓰지 않음은 물론이고 고유의 원칙도 없었다. 이런 측면으로 인하여 다다는 그 예술론과 창작 활동사이에서 모순점을 안고 있었으며, 그의 떠들썩한 활동에 비해 창작에서의 열매는 별로 거두어들이지 못했다. 그러나, 다다는 모든 아방가르드운동 중에서 20세기의 예술의 진로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긋게 해 주었다는데 그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다다이즘이 미래파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면, 초현실주의는 다다이즘에서 나온 것이다. 이것은 다다이즘을 주도했던 브르통이 초현실주의를 창시한 사실에서도 나타난다. 초현실주의는 다다이즘의 자기부정의 과정의 결과로써 문명의 속박속에서 인간을 해방시키고 이성의 횡포로 억압된 무의식의 세계를 규명함으로써 인간에 대한 이해를 추구한 예술 운동이다.1924년 11월, 앙드레 브르통이 ‘제 1차 초현실주의 선언문’을 발표함으로써 초현실주의의 장이 개막되었다. 그 선언문에서 초현실주의의 예술관은 의식적인 경험과 무의식속의 경험을 일치시킴으로써 꿈과 환상의 세계가 일상생활의 합리적 세계와 일치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브르통의 예술관은 프로이드의 영향을 받았으며, 또한 꿈과, 환상에 대한 강조는 낭만주의나 상징주의적인 색채가 배어 있었다. 그러나, 낭만주의나 상징주의와는 그 예술의 목적의식에서 차이가 나기 때문에 같은 것이라고 감히 말할 수는 없다.초현)
    예체능| 2008.05.03| 16페이지| 1,000원| 조회(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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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술의 역사
    목차Ⅰ. 술의 어원Ⅱ. 술의 기원Ⅲ. 우리 술의 역사ⅰ) 삼국시대 이전의 술ⅱ) 삼국시대의 술ⅲ) 고려시대의 술ⅳ) 조선시대의 술ⅴ) 근, 현대시대의 술┗ 금주령┗ 주세령Ⅳ. 다양한 술ⅰ) 소주ⅱ) 탁주 (막걸리)┗서민적인 막걸리를 좋아했던 박정희ⅲ) 청주ⅳ) 맥주Ⅰ. 술의 어원술의 본래 말은 수블 또는 수불이었다. 조선시대 문헌에는 수을, 수울로 기록되어 있어, 이 수블은 수블→ 수을→ 수울→ 술로 변해왔음을 알 수 있다. 수블에서 ㅂ이 탈락되면서 수을이 되었고, 수을은 모음동화 현상으로 수울로 바뀌었으며, 수울이 축약되어 술로 된 것으로 본다. 수블의 의미에 대해서는 명확하지는 않지만 술을 빚는 과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한다.즉 쌀을 쪄서 익히고 여기에 누룩을 버무려 넣고 일정량의 물을 부어 빚는다. 이어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발효가 이루어져 열을 가하지 않더라도 부글부글 물이 끓어오르며 거품이 괴는 현상은 옛사람들에게는 참으로 신기해 보였을 것이다. 이를 마치 물에서 난데없이 불이 붙는다는 뜻으로 수불이라 한 것으로 보인다.)Ⅱ. 술의 기원술의 古字는 유(酉:닭, 서쪽, 익을)자이다 유(酉)자는 밑이 뾰죽한 항아리(술의 침전물을 모으기 편리하다.)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옛말에 물은 神이 술은 인간이 만들었다는 말이 있다. 술의 기원은 신화로만 전해진다. 서양의 경우 이집트에서는 천지의 神 이시스의 남편인 오시리스가 곡물신에게 맥주만드는 것을 가르쳤다고 하고 그리스 신화는 디오니소스, 로마는 바커스를 술의 시조로 말하고 있으며 구약성서에서는 노아가 최초로 술을 만든 사람이라고 한다. 반면, 동양의 경우 중국에서는 황제의 딸 의적이 처음으로 빚었다 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술은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우리문헌에 나타나는 술이야기는 제왕운기에 처음으로 나타난다. '하백의 딸 유화가 해모수의 꾀에 속아 술에 만취된 후 해모수의 아이를 잉태하였는데 그가 주몽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비록 우리문헌에 술에 관한 기록이 드물지라도 술이 단순히 중국에서 전의례에 술을 이용했음을 알 수 있다. 상고시대에 이미 농업의 기틀이 마련되었으므로 우리 나라에서 빚기 시작한 술도 역시 곡류를 이용한, 즉 막걸리와 비슷한 곡주였으리라고 생각된다.ⅱ) 삼국시대의 술삼국 형성기 이전에 이미 전래 곡주가 바탕이 되어 다양한 종류의 술이 빚어진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의 고구려 대무신왕편에는 고구려에서는 건국 초기인 대무신왕 시절에(서기 28년) 지주(旨酒, 맛 좋은 술이란 뜻)를 빚어서 그 효력으로 한나라의 요동태수의 침입을 물리쳤다는 얘기가 나오고, 自喜善藏釀 (자희선장양 : 발효음식을 저장하고 스스로 기뻐하며 즐긴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양조기술이 발달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백제의 술은 자세한 기록으로 전하는 것이 없으나 백제의 수수보리가 일본에 누룩과 술 빚는 방법을 가르쳤다는 일본에 남아있는 기록과 양조 기술로 보아 고구려에 못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삼국 중 비교적 늦은 시기에 국가의 체계를 갖춘 신라는 술 빚기에서도 가장 낙후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다른 문화와 함께 고구려, 백제로부터 전해진 양조 기술이 국력과 함께 나날이 발전하여 당대의 시인들이 칭송하던 신라주를 탄생시킨 것으로 보인다.삼국시대의 후기부터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는 기간 동안 우리의 술은 생각 이상으로 다채로웠으며 중국에까지 그 명성을 떨친 것으로 보인다. 특히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오면서 술의 제조가 일부 특수 계층이 아닌 일반 백성들에게로 확산되면서 술의 품질 향상이 이루어졌다.ⅲ) 고려시대의 술고려시대에는 중국 송, 원대의 양조술이 도입되면서 체계적인 양조법이 정착되었다. 이에 따라 누룩 제조법과 각종 약주의 제조법도 크게 발달하였다. 곡류 양조법이 발전되어 감에 따라 누룩의 종류도 소맥국(小麥麴)과 미국(米麴) 등 다양한 변화를 이루게 되었다. 고려의 유명한 문인 이규보는 『국선생전(麴先生傳)』이라는 가전체 설화를 지어 누룩과 술의 덕을 칭송하는 한편 술의 남용으로 인한 폐해를 경계하였다.고려 때에는 사찰이 시중에 있어 여행자의 숙 되었고, 부본(腐本) 즉, 밑술을 사용하여 효모를 증식시키는 기법이 발전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선비들은 풍류도(風流道)를 즐기게 되었으며, 주막을 중심으로 한 서민들의 술 문화도 크게 발달하였다.조선 후기로 접어들면서 지방 토속주의 전성기를 맞게 되는데, 각 지방마다 비전되어 내려오는 술들이 다양하게 나타나게 된다. 이 때의 명주로는 서울, 경기 지역의 삼해주, 약산춘, 충청의 소곡주, 노산춘, 호남의 호산춘, 두견주, 영남의 고하주, 송엽주, 청명주, 평안도의 벽향주, 감홍로 등이 있었다. 한편, 소주에 각종 약재를 응용한 술들이 새로 개발되었는데, 전라, 황해도의 이강주와 전라도의 죽력고가 유명하였다. 그밖에 약주의 산패를 방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양조주와 증류주를 혼합한 혼성주인 과하주가 개발되었는데, 김천의 과하주가 유명하였다.ⅴ) 근, 현대시대의 술대한제국의 종말과 더불어 조선총독부에 의한 일제의 수탈 작업이 시작되면서 전통주의 생산이 큰 타격을 입게 된다. 일제는 1907년 7월 조선총독부령에 의한 ★주세령 공포로 제일 먼저 주세를 세금원의 대상으로 삼고, 8월에 주세령 시행규칙 공포와 함께 9월부터 주세령의 강제 집행에 들어갔다. 조선시대에는 ★금주령은 있었으나 술에 대한 과세나 전매제도가 없어서 공업적 양조보다는 집에서 가양주를 빚어서 마시는 문화가 정착되어 있었다. 1916년 1월에는 주류 단속을 강화하면서 전통주류를 약주, 막걸리, 소주로 획일화시켜 우리의 전통 고급주를 사장시켰다. 1917년부터는 주류제조업 정비가 시작되면서 자가 양조를 전면 금지하는 한편 각 고을마다 주류 제조업자를 새로이 배정하였다. 이로써 찬란했던 가양주 문화는 맥이 끊어지고 양조면허를 받은 소수의 양조장에서 공업적인 술의 제조가 시작되었다.1930년대에 들어 집에서 담그는 술을 민주로 규정하고 단속이 강화되면서 자가술 제조는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각 지방에서 전해지는 전통 토속주의비법도 거의 사라지게 되는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일본은 주세 징수에만 골몰일제가 영업용주를 위한 소비시장과 세원의 창출에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영업용 주조업의 경우에는 주조 석수의 최저한도를 설정하여 조선인 자본을 중심으로 하는 소규모 제조업의 남흥(濫興)을 방지했다. 자본가들을 위한 세제특혜조치도 규정하여 수출할 때 주세를 면제하거나 교부금을 지급하여 특혜를 주었다. 주세령의 시행에 따라 강제적인 술시장이 형성되었고, 과세의 기초단위인 석수는 신고가 아닌 사정(査定)으로써 결정하도록 하여 세원 파악도 훨씬 치밀해졌다. 주세령 이후 주세 징수액이 크게 늘어나 1918년은 1909년에 비해 12배나 증가했다. 일제는 주세령의 제정과 시행으로 시장기구를 통한 수탈정책과 더불어, 조선의 주조업에서 일본자본의 발전을 위한 법적인 기초를 마련하려고 했다.)★금주령조선시대 큰 가뭄이 들거나 흉작·기근이 있을 경우 국가에서 술 마시는 것을 금하는 법령. 이러한 기간에 근신 절제함으로써 하늘의 노여움을 풀고 굶주린 백성들을 위로하며 식량과 비용을 절약할 목적으로 행하여졌다. 1392년 조선개국 직후 흉작으로 인하여 금주령을 내린 것을 비롯하여 여러 대에 걸쳐 빈번하게 시행되었다.특히, 태종 때는 거의 매년 내려졌고, 성종과 연산군 때도 자주 행하여졌다. 조선 후기에는 전국적인 금주령은 거의 없게 되었으나, 1758년(영조 34)에는 큰 흉작으로 궁중의 제사에도 술 대신 차를 쓰는 등 엄격한 금주령이 발표되었고, 왕이 홍화문(弘化門)에 나가 직접 백성들에게 금주윤음(禁酒綸音)을 발표하였다.이 법령은 주로 가뭄이 심한 봄·여름에 반포되어 추수가 끝나는 가을에 해제되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때로는 10∼12월에도 시행되는 경우가 있었다. 또, 보통은 중앙정부에서 결정되어 발표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지방관찰사들의 건의로 시행되기도 하였다.이 법령이 반포된 기간에도 음주나 양조가 허용되는 예외적인 경우가 있었는데, 그것은 국가의 제향, 사신접대, 상왕(上王)에 대한 공상(貢上), 그리고 백성들의 혼인·제사 및 노병자의 약용으로 쓰이는 경우였다. 또, 술을 되어 왜구를 막는다고 경상도에 와 있었는데, 왜적 막을 생각은 않고 매일같이 명기들을 갈아가며 참모들과 소주를 마시고 밤낮으로 취해 지내는 바람에, 부하나 백성들이 '소주도'라고 비꼬았다는 말이 고려사 열전에 기록되어 있다.때마침 합포에 왜적이 들어와 불을 지르고 노략질을 하자 병사들이 "소주도를 시켜 칠 일이지 우리야..." 하고 방과하는 바람에 소주도들이 앞서서 달아났다 한다.조선 문정의 빈소를 지키느라 탈진한 나이 어린 단종에게 조금씩 먹여 정신차리게 했다는 기록 등으로 미루어 조선조 전반에는 주로 약용으로 쓰였을 것으로 보이는 소주가, 선조 이후 상류 사회나 관료 사회에 은밀히 나도는 사치스런 술이 되어 자주 규탄받았다.지방에 따라 특색 있는 맛을 내는 소주가 적지 않았다. 육회를 안주 삼아 따끈한 밥주발 뚜껑으로 마셔야 제맛이 난다는 안동 소주, 황해도 선비들 공부 뒷바라지를 위해 선비 아낙들이 빚어 팔기 시작했다는 공덕리 소주, 배와 생강즙을 곁들인 전주의 이강고, 남도 대나무 고지에서 나는 죽력고, 관서 명주인 감홍로, 귀양 선비의 한을 풀어 주었다는 진도 홍로 등.또 소주를 대통 속에 묵혀 두었던 죽통로, 살아 있는 소나무 밑동을 파고 그 속에서 묵혔던 와송로 등 개성 있는 소주가 많았다. 이처럼 맛과 질이 다른 소주가 많아, 찾아 마시는 이의 기호에 따라 무척 사랑받았다고 한다.한 번 내린(증류) 술을 소주 또는 노주, 홍로라 불렀고, 두 번 내린 술을 환소주 또는 감홍로라 불렀다는 순조 때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시대의 변천에 따라 소주의 질도 꽤 발전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탁주, 청주와 더불어 소주는 우리의 3대 토속주가 돼 내렸왔던 것이다.지금 많이들 마시고 있는 소주는 전통적 증류주가 아닌 주정에 물을 탄 희석주이기에 토주가 아닌 유사 소주에 불과한 것이다.)ⅱ) 탁주(막걸리)탁주는 우리 민족의 토속주(土俗酒)로서 도시의 서민층과 농민에게까지 널리 기호층을 가지고 있는 술이다. 막걸리는 예로부터 자가(自家) 제조로 애용되었기 때
    사회과학| 2006.12.22| 10페이지| 1,500원| 조회(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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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과학]일본군성노예
    【차례】1-① 일본군 위안부란?1-② 위안소랑 어떤 곳인가?2. 누가 조선여인들을 위안소로 끌고 갔나?(연행방식)① 취업사기② 협박 및 폭력③ 인신매매 및 유괴④ 근로정신대 제도를 통한 동원⑤ 기타 - 공출?봉사대?근로대 등의 명목으로3. 그 당시 그들의 실상과 증언① 고문② 구타 및 총검을 이용한 폭력③ 생식기 관련 질병④ 낙태⑤ 자살시도 및 그 후유증⑥ 전시 상황의 위협⑦ 전염병과 풍토병 감염의 위협⑧ 살바르산(salvarsan) 주사의 후유증4. 지금 위안부 피해자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가?? 나눔의 집?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앞으로의 방향1-① 일본군 위안부란?'일본군 위안부'란 일제 식민지 시대에 일본군 위안소로 연행되어 강제로 성폭행당한 여성들을 일컫는 말이다. 일본에서는 종군위안부라는 용어가 널리 쓰이고 있는데, 이 용어에서 종(從)이 자발적 참여를 뜻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오랫동안 이들을 '정신대'라는 말로 불러왔다. '정신대'는 전시체제 아래서 일본 제국주의의 전투력 강화를 위해 특별히 노동력을 제공하는 조직 등을 지칭한 일반명사였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로 접어드는 1943년 이후엔 여자정신대 혹은 여자근로정신대에 한정해서 쓰이는 경향이 나타나다가 마침내 1944년 8월에 이르러 여자정신대근로령이 내려지게 된다.이후부터 정신대란 말은 전쟁 노동력으로 동원된 여자에 한해서 쓰이게 된다. '여자정신근로령'에 의거하여 조직된 여자근로정신대는 남성들의 전쟁 동원으로 인해 부족해진 노동력을 보완하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여자근로정신대와 일본군 위안부 제도는 원래 다른 것이었다.「정대협」)에서는 강제종군위안부로 쓸 것을 주장한 바 있으며, 한국정부에서는 1992년 보고서를 내면서 ‘군위안부’라는 개념을 사용했으며, 유엔 등 국제 활동의 장에서는 ‘성노예’라는 용어를 사용 하고 있다.1-② 위안소란 어떤 곳인가?일본은 필리핀, 만주, 인도네시아 등 점령국에서는 마구잡이로 군위안부를 간제 동원하기 시작하였다. 명분은 일본군 점령지의 일반 여성에 대한 강간방지와 군인의 성병방지, 사기진작 등이었다.대부분의 위안소 안은 입구에서 표나 돈을 받고 군인의 출입을 확인하는 관리인 자리가 있었고 기다란 복도를 따라 작은 성냥갑 같은 방이 죽 늘어서 있었다. 방은 겨우 한 사람 정도 누울 정도 크기에, 담요 한 장이 주어졌을 뿐이다. 이와 같은 위안소 건물은 대부분 민간 가옥을 빼앗아 고쳐 사용하였고 군부대 판자를 얼기설기 날림으로 지어 겨우 행위를 가릴 수 있는 수준이었다.결국 위안소 제도는 기본적으로 일본 명치유신기) 이후의 가부장제 사회와 제국주의 전쟁이라는 특수한 사회 조건에서 여성을 남성의 성적 대상물로만 여긴 데서 비롯된 것이다.2. 누가 조선여인들을 위안소로 끌고 갔나? (연행방식)① 취업사기 : 좋은 곳에 취직시켜 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따라나섰다가 군위안소로 가게 된 피해자들이 증언하는 ‘좋은 곳’의 종류는 다양했다. 가장 많이 등장하는 곳은 일본의 공장이었다. 그리고 좀 더 사실에 가까운 것으로 병원에 있는 부상병을 위해 일을 하는 것, 종군 간호부의 일하는 것 등의 취업약속이 피해자들의 마음을 끌었다. 이러한 취업사기는 연행방식 중 가장 많이 이용되는 방법이었다.② 협박 및 폭력 : 글자 그대로의 폭력적 연행도 취업사기에 버금가게 많았다. 많은 피해자들이 강제로 트럭에 태워졌다고 증언했다. 길가다가 강제로 경찰서에 끌려갔다는 사람도 있다. 폭력적 연행을 한 사람으로는 군인과 경찰이 대부분이며 특히 경찰이 많았다. 폭력연행은 총독부와 일본군인이 직접적으로 행했다고 한다.③ 인신매매 및 유괴 : 인신매매 및 유괴는 많지는 않았으나 눈에는 띈다. 가난 때문에 어느 곳에 수양딸로 보내졌다가 그 집에서 팔아버린 경우, 일하던 식당이나 가게주인이 판 경우, 가장 비참한 것으로 친아버지가 판 경우도 있다.④ 근로정신대 제도를 통한 동원 : ‘정신대’라는 개념이 노동력 동원과 일본군 ‘위안부’동원을 포괄적으로 지칭한다는 것이 당시 살았던 사람들의 일반적 인식이다. 정신대는 글자 그대로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다는 것으로서 의료, 보도 등 여러 분야에서 인력동원에 쓰인 개념이다. 하지만 일본군은 위안부를 동원할 때도 연행자들이 정신대의 명목을 동원했다.한국 보건복지부 신고한 170여명의 피해자 중 6명이 근로정신대로 동원되었다가 군위안부로 끌려가게 되었다고 증언했다. 이를 통해보면 근로 정신대 제도는 하나의 연행통로로서의 역할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⑤ 기타 - 공출, 봉사대, 근로대 등의 명목으로 : 적지 않은 수많은 피해자들이 공출, 봉사대, 근로대 등의 명목으로 끌려갔다가 군위안소로 가게 되었다고 증언했다. 어떤 경우와 명목이라도 피해자들은 모든 사실을 기억하고 있고 이러한 연행이 경찰과 관리에 의해 이루어 졌다는 사실은 관의 개입이 있었다는 것을 확실히 말해준다.3. 그 당시 그들의 실상과 증언① 고문 : 강제적 성관계에 협조하지 않을 경우, 일본군은 고문을 자행하는 것조차 서슴지 않았다. 식민지 피지배계급 하에서의 인권을 보호해주는 장치는 전무하였으며, 일본군의 고문행위는 자유롭게 이루어졌다.“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쇠꼬챙이를 손가락사이에 끼워서 고문하며 학대하거나......”(이영숙 증언)“시뻘겋게 달구어진 인두모양의 불쑤시개를 가지고 들어와 겨드랑이를 지져서, 그 상처로 석달동안 고생했고......” (문필기 증언)“전화코드를 잡아 빼서 손목, 발목을 감아 전기고문을 했다.” (이용수 증언)② 구타 및 총검을 이용한 폭력 : 일본군은 일본군 위안부 여성을 대상으로 일상적인 폭력과 구타를 일삼았다. 계속되는 폭력은 일본군 위안부 여성들로 하여금 탈출이나 저항 등의 자의식을 갖지 못하게 만들었고, 엄격한 규율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작용하였다.“말을 안 들으면 심하게 때렸다. 나도 아랫도리를 많이 맞았다. 군인들 중 하나에게 나는 허벅지를 칼로 찔렸다. 몇 번이나 달려드는 것을 내가 거부하자 그렇게 된 것이다. 치료를 받으면서도 손님을 계속 받아야 했다.” (이순옥 증언)“한번은 못된 육군졸병이 내 가슴, 팔, 발을 칼로 찔러서 병원에 입원하였는데 그 상처 자국이 아직도 있다.” (이상옥 증언)“엄청 맞아서 기절하면 주사를 놔줘서 다시 깨웠다. 오줌을 질질싸고 피범벅이 되어 누워있으면 어떤 놈이 냅다 발길질을 하고......” (최명순 증언)③ 생식기관련 질병 : 수년에 걸쳐 수없이 많은 일본군이 십대 초중반의 어린소녀들을 성적으로 착취하였다. 그 과정에서 임질이나 매독 등의 성병에 걸리는 경우가 빈번하였으나, 이에 대한 치료조차 제대로 받을 수 없었다. 단기적 치료를 위해 사용하였던 ‘606주사(salvarsan)' 역시 주사직후 구토와 오한 등의 부작용을 초래했다.“하도 많이 남자를 상대하다 보니 얼마 안되어 몹쓸 병이 들었는지 밑이 시뻘겋게 퉁퉁붓고 고약한 냄새가 났다. 병든 상태에서 계속 군인을 받았다. 어떤 놈이 덤벼들려고 하다가 시뻘겋게 된 내 밑을 보고 욕짓거리를 하고는 뾰족한 것을 가지고 밑을 찔러버렸다. 거기 병균이 옮아 번져서 고름과 피가 범벅이 되었는데도 그냥 군인을 받았다.” (최명순 증언)“일어서려고 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고 사타구니 양쪽이 툭 터져서 그냥 피고름이 나왔는데, 자궁 내에서 생긴 고름이 썩은 후 부풀어서 저절로 터진 것이다. 다리도 부었다. 밑이 뒤집어져서 대소변도 못 봤다.” (강무자 증언)④ 낙태 : 자연유산이나 임신중절수술을 거듭하면서 일본군 위안부 여성들은 귀국 후 임신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당시 일본군 위안부 여성은 가임기간 내 정상적인 임신과 출산이라는 행위를 할 수 없도록 강제한 반인권적 상황에 처해 있었다.“위안부 생활로 애를 못 낳게 된 것이 가장 깊은 한이다.” (이순옥 증언)"한번은 임신을 했는데 3~4개월 무렵 주사를 놔서 떨어졌다. 사람 모양의 핏덩이가 나왔다. 그리고 나서 임신을 하지 않았다." (김춘자 증언)⑤ 자살 및 그 후유증 : 비인간적 생존조건을 견디지 못하고 개인적, 집단적으로 자살을 시도한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러한 자살시도는 어떤 사회적 지지체계도 없는 상태에서 스스로의 절망과 굴욕을 견디지 못해 이루어진 것이다.“함께 있던 동료가 소독하라고 나눠준 과망간산칼리를 먹고 자살을 하려고 했다. 그녀는 신음하는 것을 다행히 내가 발견하여 군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그녀는 그 뒤 목구멍이 쪼그라들어 일 년 정도 밥을 잘 넘기지 못할 정도로 고생하였다.” (박연희 증언)⑥ 전시상황의 위협 : 일본군위안부 여성들은 전쟁을 수행 중이던 일본군의 이동을 따라 이주했고, 많은 경우 전쟁터 인근에 위안소가 존재했기 때문에 각종 위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비행기 폭격은 집단 학살을 초래하였는데 이러한 위험요인에는 대비책이 없었다.
    사회과학| 2006.12.22| 7페이지| 1,500원| 조회(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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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패스트 푸드란??
    패스트푸드서론본론1. 패스트푸드의 정의---------------------------------p.32. 대표적 패스트푸드 “햄버거”의 유래---------------p.33. 햄버거의 고기-------------------------------------p.74.우리나라의 패스트푸드------------------------------p.75.맥도널드화-----------------------------------------p.81)맥도날드의 탄생.2)맥도날드화의 정의.3)맥도날드화의 특성.6.패스트푸드점의 운영전략----------------------------p.97. 패스트푸드의 영향---------------------------------p.91)인체의 건강에 미치는 영향.2)환경에 미치는 영향.3)사회에 미치는 영향.8.패스트푸드의 단점--------------------------------p.15결론참고문헌서론우리나가가 급격한 산업변화와 경제발전을 이루면서 사회의 많은 부분에 있어서 가치관, 습성이 변화하게 되었다. 그중 우리가 흔히 한국인들에게 존재 한다는 “빨리빨리”병이다. 이는 무엇이든 빠른 속도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한국인들의 특성을 빗대어하는 이야기 이다.현대문명의 발달과 빠른 사회변화로 미국에서는 패스트푸드라는 새로운 문화가 생겨났고 우리 또한 패스트푸드라는 문화를 쉽게 받아드릴 수 있는 사회적 변화를 많이 겪게 되었다. 한 민족의 밥상문화를 바꿔놓게 만들었던 패스트푸드. 그것은 빠른 음식제공과 신속하게 먹을 수 있는 특징, 또한 빨리먹고 빨리 나올 수밖에 없는 특이한 음식문화를 만들었다. “밥상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음식매너를 과감히 없애버림으로써 식사시간에 들이는 정성과 시간을 줄여 지금까지 누려온 식사시간의 여유를 우리민족 아니 인류전체에게서 앗아간 것이다. 결국 패스트푸드문화는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의 신속한 노동 투입을 위해 들여야 할 노력을 탕감해 준 것이다.이번 발표문에서는 이러한 패스트푸드문화의 정의부터 시작하여 패스한 여러 지역에서 '감자병'이 돌면서 유럽의 가난한 농민들은 또다시 엄청난 굶주림에 시달리게 되었고 인구가 대량으로 감소하였다. 이들은 무엇보다 무서운 굶주림을 벗어나겠다는 일념으로 북 대륙으로 대거 이주하였다. 감자 재앙이 닥치자 불과 10년 만에 굶주림과 이주로 아일랜드 총 인구의 25%가 줄어들었다.정책적으로 식민지 이주를 권장한 영국이 북미 대륙을 점령하면서 앵글로색슨족의 미국 이주가 본격화 되었고, 뒤이어 북서부 유럽 국가에서 대단위 이주가 이뤄졌다. 이주민들 대부분은 유럽의 산업화기에 주류로 편입되지 못한 농부를 비롯해 가난한 수공업자들이나 신대륙의 무한한 가능성에 미래를 건 젊은이들이었다. 마침 1848년 캘리포니아에서 금광이 발견되자 일확천금을 꿈꾸는 이민자들 까지 대거 몰려들었다. 이 과정에서 독일에서 온 이주자들은 부지불식간에 함부르크 스테이크를 신대륙에 소개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3) 번즈에 끼운 햄버거의 등장, 최초의 햄버거그뒤 햄버거는 1904년 세인트루이스 (Saint Louis) 세계 박람회때 처음으로 상업화의 실마리를 찾게 되었다. 박람회장에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자 박람회장 내 식당에서 일하던 한 요리사가 너무 바쁜 나머지 햄버그(Hamburg)를 둥근 빵에 끼운 핫 샌드위치(Hot sandwich)로 팔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번즈 (buns)라고 부르는 둥근 빵에 패티(patty)를 끼워 케찹, 마스터드 등과 더불어 먹는 햄버거 (hamburg)의 기본적인 형태가 되었다. 이밖에 세인트 루이스 세계박람회를 계기로 햄버거와 함께 아이스크림 콘 (icecream cone), 아이스티 (ice tea)가 유명해 졌다. 예나 지금이나 햄버거는 사람들이 와글와글 몰려드는 가운데 즐겨 먹는 음식이었고, 그러한 특성을 갖고 태어났던 셈이다.이후 1949년 맥도널드 (Mcdonald) 형제가 캘리포니아 산 버나디노 (San Bernadino)에 처음 식당을 열고 주요 메뉴 가운데 하나로 햄버거를 선보이면서 본격적인 상품화가 화를 준다. 이런 식사습관의 변화는 햄버거로 대체됐는데, 미국 대중의 생활양식의 방향을 바꾸어놓은 새로운 운송 형태와 마찬가지로 햄버거는 그와 비슷한 다양한 가치와 특성들을 담고 있는 식품이다. 신속한 서비스는 신속한 음식을 요구했는데, 햄버거는 새로운 자동차 시대에 이상적인 선택이었다. 그것은 저렴하고 준비가 간단했으며 매우 손쉽게 다룰 수 있었다. 그것은 일정한 모양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대량 생산이 가능했으며, 햄버거 패티들은 다루기 쉬웠다. 햄버거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눈부신 성장`을 했다. 1950년대 중반에는 미국의 애플파이를 밀어내고 미국의 상징적인 음식으로 자리잡을 만큼 크게 유행했다. 값싸고 편리한 햄버거는 새로운 식품 형태 시스템인 패스트푸드를 이끌었다. 만약 햄버거와 패스트푸드 산업의 성공을 단 한 사람의 공으로 돌린다면 아마도 맥도널드 레스토랑 체인 창업주인 레이 크록이 첫손에 꼽힐 것이다. 크록은 전후에 미국인의 식사습관을 혁명적으로 바꾸어놓은 인물이다. 크록은 헨리 포드가 미국인들의 여행습관을 바꾸어놓은 것처럼 미국인의 식사습관을 효과적으로 변화시켰다. 그는 나라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여러 가지 동일한 운영 원칙과 가치들을 사용했다. 일찍감치 크록은 미국 고속도로 시스템 인터체인지가 엄청난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점을 간파했다. 고속도로 문화는 주간 고속도로 근체에 있는 교외 주택 단지, 쇼핑몰, 복합 상업지구에 새로운 생활방식을 낳았다. 크록은 자동차문화, 교외주택 지역, 패스트푸드 햄버거를 단일한 단지로 통합시키기로 결심하고 정열적으로 사업에 착수했다. 오늘날 식사 절차는 현대사회의 다른 많은 부분들을 지배하는 계몽주의적 방식과 동일하게 간소화되었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쇠고기 산업은 현대 문화의 형성과 규정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심지어 쇠고기의 최종 소비자들은 합리적 조직화,기계화,품질 관리,양적표준,예측 가능한 결과,시간의 효율성과 실용성의 원칙에 자신의 식사습관을 적응시키기도 한다. 공장형 비육장과 도축공장 조합 공정에서 소를물을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현장에서의 레이크록은 쉴 시간이 있다면, 바로 그 시간이 매장을 깨끗이 할 수 있는 시간이다"라고 항상 이야기해 온 레이 크록은 맥도날드 첫번째 프랜차이즈 매장인 데 플랜즈 주차장을 직접 청소하기도 하였다.세계적으로도 유명한 로날드 맥도날드는 즐거움의 상징이다.전세계 즐거움의 상징전세계에서 산타크로스 다음으로 유명한 로날드 맥도날드, 그가 처음으로 TV에 출연한 것은 1963년이다.2)맥도날드화의 정의맥도날드화란 ‘패스트푸드점의 원리가 사회의 보다 많은 부분들을 지배하게 되는 과정’을 말한다. 맥도날드화는 패스트푸드뿐만 아니라 교육 ? 노동 ? 의료 ? 여행 ? 여가 ? 다이어트 ? 정치 ? 가정 즉 사실상 사회의 거의 모든 부문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맥도날드로 대표되는 패스트푸드점의 원리-효율성, 계산가능성, 예측가능성, 그리고 통제가 미국사회를 비롯해 세계의 모든 부문을 지배하는 과정과 그것이 초래하는 불합리성을 의미한다. 맥도날드화는 도저히 침투할 수 없을 것 같아 보이는 제도와 세계의 여러 부분에서도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3).맥도날드화의 특성① 효율성 : 주어진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최적의 수단을 추구하는 것으로 맥도날드화된 체계에서 효율성은 주로 복잡한 절차의 간소화 ? 제품과 서비스의 단순화 등으로 드러난다.② 계산가능성 : 수량화에 대한 강조가 따른다. 맥도날드화된 사회에서는 질보다 양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강조는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난다.③ 예측가능성 : 시간 ? 공간에 관계없이 모든 것을 동일하게 하기 위한 훈련 ? 체계화 ? 관례 같은 것에 대한 강조가 필요하다.④ 통제 : 인간의 기술을 무인기술로 대체한 가장 중요한 목적은 종업원들에 의한 불확실성을 통제하기 위한 것이다. 또 무인기술은 작업에 관련된 과정과 최종제품에 대해서도 통제를 한다.6.패스트푸드점의 운영전략패스트푸드가 계속적으로 성장하는 데는 고객이 요구하는 바와 음식점의 경영이 부합되기 때문이며 이런 패스트푸드의 구성에 대해온난화에 영향을 미치고 있을 정도로 가스의 양이 방대하다. 그런데, 패스트푸드나, 육류음식의 소비량이 많아질수록, 육우의 수요가 많아지게 되는데, 이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선 더 많은 육우를 사육하게 된다. 이러다 보니 소떼로 인한 환경오염이 더욱 가속화 되고 있는 실정이다.)대부분의 사람이 생각하는 도축장은 어느정도 청결을 유지하고 최종단계에는 고기가 깨끗한 상태로 나올거라는 착각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이번에는 도축장의 실태에 알아보기로 한다. “도축장에서는 삽으로 고기를 떠 담아 손수레에 싣기도 하고 삽질을 하다가 고깃덩어리 속에서 쥐 한 마리를 발견하기도 한다. 그래도 이 정도는 별로 놀랄 일이 아니다. 소시지에 들어가는 것들에 비한다면 감염된 쥐 한 마리쯤은 아무 것도 아니다.” 1906년 업톤 싱클레어는 이렇게 썼다. 병에 걸린 동물을 도축하는 것, 상한 고기의 냄새를 감추기 위해 붕산이나 글리세린을 사용하는 것, 쇠고기 통조림에 레벨을 잘못 붙이는 것, 도살대 위세 ‘볼일’일 보는 행위 등 싱클레어는 소비자 건강을 위협하는 정육업계의 여러 가지 관행들을 길게 적었다. 이것을 본 미국 대통령은 각 주에서 팔리는 모든 육류에 대해 조사를 실시하고 라벨을 정확하게 붙이며 정육업자들이 자신의 사업장 청소 비용을 대야 하는 의무 조항을 만들었다.최근에는 감염된 소의 병원균은 도축장에서만 퍼지는 것이 아니라 햄버거 고기 분쇄기를 통해서도 퍼지게 된다. 도축장에서 동물의 가죽을 벗기거나 소화 기관을 제거할 때 고기가 쉽게 오염된다. 최근에는 가죽을 벗길 때 기계를 사용한다. 만일 가죽이 깨끗하지 않으면 먼지 덩어리나 배설물이 가공하는 고기에 떨어 질 수도 있다. 소화기관과 내장은 아직도 손으로 제거하는데 이때 주의하지 않으면 내장 속에 들어있던 내용물이 여러 곳으로 튀게 된다. 오늘날 작업 라인의 속도가 점점 더 빨라 지면서 일 또한 점점 더 힘들어 진다. 내장을 제거하는 기술자는 소의 위를 제거하고 내용물이 쏟아지지 않도록 주의 해야 하맺어지
    사회과학| 2006.12.22| 17페이지| 2,000원| 조회(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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