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은 우리에게 무한한 물질 및 정신적 자원의 보고로서 인류의 존속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생명의 근원이다. 자연은 우리에게 경제적, 미적, 문화적 대상으로서의 가치, 윤리적인 측면에서의 가치 등 인간 생존을 위한 기반으로서 삶에 필요로 하는 다양한 기능을 제공하고 있을뿐만 아니라 자연 자원이라는 인간의 생활에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물질적 뒷받침을 우리에게 제공해주고 있다. 즉 자연은 인간 생존의 원천으로 인간의 정신적?물질적?문화적 요구를 뒷받침하며 또한 경제발전과 국민의 복지는 자연자원의 보전과 지속가능한 이용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므로 자연의 무분별한 훼손은 경제발전의 기초를 상실케하며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존속을 위협하는 행위라 할 수 있다.이러한 자연과 그 곳에서 나오는 자연자원의 중요성은 어떠한 말로도 훼손할 수 없는 인간의 존속에 중요한 점임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이후에 도래한 급격한 인구의 증가와 경제 발전은 국토의 대규모 개발과 자연환경의 훼손을 초래하여 그로부터 나오는 자연자원 역시 날이 갈수록 훼손되고 있다. 도시화와 공업화는 자연생태계를 훼손하고 단편화하였고 해안의 경관은 이미 대규모로 변화하였다. 이로 인해 아름다운 자연경관이 사라졌으며 귀중한 생물의 서식처가 파괴되었다. 이러한 경제발전 및 산업화는 국민에게 경제적인 풍요함을 제공하였으나 국민의 ‘삶의 질’이 향상되었다는 데에는 이견이 많다. 더욱이 이러한 경제 발전 및 산업화 과정을 통해 인간이 살고 있는 환경의 질은 낮아지고 생물다양성도 심각하게 감소되었으며 이는 궁극적으로 우리의 삶의 질을 낮아지게 하고 국가의 발전에 심각한 악영향을 미치게 한다는 우려가 더욱 높아지고 있다.자연 생태계는 일단 파괴되면 복구가 거의 불가능하다. 그리고 복원이 된다 해도 오랜 시간이 소요되고 많은 경제적 부담이 따르기 때문에 사전에 대책을 수립하여 보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더구나 우리나라는 좁은 국토에 인구밀도마저 높고 자연자원이 빈약하기 때문에 자연환경보전은 한층 더 절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정부 차원에서 추진되었던 국토의 개발과 자연환경보전정책을 함께 고려할 때 국가의 자연환경보전업무는 이러한 국민의 삶의 질 향상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게다가 국가 차원에서 진행되는 자연자원 및 자연 생태계 보전에 대한 방안들은 생물계 및 비 생물계에 대한 통합관리 필요성에 대한 주목없이 한 부문에 대한 단편적인 관리를 지금까지 해왔던게 사실이다. 생물계 내에서도 식물이면 식물, 동물이면 동물 한 분야에 대해서 관리하는 곳은 존재하지만 그 둘을 아우를 수 있는 곳에 대한 중요성에 대한 관심은 적으며, 더욱이 생물권과 비생물권의 상호작용 및 그로 인해 나타나는 결과, 현재의 상황에 대한 포괄적인 연구를 하는 기관도 거의 없거나 있더라도 그 중요성에 대해서 그다지 큰 관심을 두지 않았던게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부터라도 자연자원과 자연 생태계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지금까지의 단편적인 보전이 아닌 다양한 접근 방법을 통합해서 관리할 수 있는 방안의 마련이 시급한데 이를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정책 방향을 기본으로 관리 방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첫째, 고립되고 단절된 지역의 자연생태계가 아닌 국토관리의 차원에서 생태계를 접근하여야 한다. 생태계를 보전하고 지속가능한 이용을 위해서는 지역적인 차원에서 생태계가 관리, 이용되어서는 안 되며 전국토의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역설적으로 제시하면 국토의 지혜로운 이용을 위해서는 생태계의 보전의 개념이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국토관리의 차원에서의 생태계 접근은 생물권에 대한 보전뿐만이 아닌 비생물권까지 아우르는 서로간의 상호작용을 감안하는 접근이 되어야 할 것이다.둘째, 현세대와 미래세대를 함께 배려해야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국토는 우리의 후손들의 생존 기반으로 후손으로부터 우리가 생존하는 동안 잠시 빌린 것임을 인식하여야 한다.자연환경을 온전히 보전하여 후손에게 넘겨주어야 할 책무가 우리에게 있으며 우리의 후손이 풍요로운 자연환경조건에서 살아갈 수 있는 여건이 될 수 있도록 해야한다.셋째, 멸종위기에 처한 야생 동식물은 보호되고 생물다양성과 수려한 자연경관은 보전되어야 한다. 환경위기 시대의 인간의 존엄성은 생존의 기본 여건인 환경권의 신장을 통해 신장될 수 있다. 자연을 ‘착취의 대상’에서 ‘보호의 대상’으로, 보다 나아가서 ‘대화의 상대’로 확대하여 인류의 생존 문제를 해결해야 하며, 그리고 자연을 인간의 종속물이 아닌 독자적인 존재가치를 인정하여야 한다.넷째, 생태계 보전 및 복원기술의 효율성 증대시키도록 한다. 이미 우리의 생태계는 부분적으로 훼손되어 있거나 훼손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할 때, 생태계를 보전하기 위해서는 훼손되었으나 보전할 가치가 있는 생태계의 복원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실용적인 생태계 복원 기술의 개발, 보급이 우선될 수 있도록 한다.다섯째, 다양한 생물과 이들이 다양하게 서식하고 있는 우수한 자연생태계의 보전과 이용은 지구적 이익, 국가 이익과 지역적 차원의 이익을 동시에 고려하여야 한다. 다양한 생물과 이들이 다양하게 서식하고 있는 우수한 자연생태계를 보전하는 문제는 중앙 정부, 지자체, 지역주민 등, 이들의 고립된 역할로서 이루어지기 어렵다. 또한 다양한 생태계 보전 기술 및 정보 등에 관한 정책과 정보를 국가간에 또는 지구적인 차원에서 공유할 때, 그 활용도는 크게 증가된다.
I. 탐방 목적요즈음 우리 주변 어디서든 ‘환경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쉽게 들을 수 있다. 그만큼 환경문제가 심각해 졌다는 의미가 되겠지만, 또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그동안 개발을 위해 질주했던 발걸음을 늦추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자연에 대해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는 희망적인 신호라고도 볼 수 있다. 환경오염을 막기 위한 기술개발 및 친환경적인 행동을 유도하기 위한 대대적인 캠페인들이 행하여지는 것이 그 예라고 할 수 있다.하지만 ‘환경문제’는 모두 사람들에 의해 초래된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그 근본적 해결책은 역시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선행된 여러 연구에서는 ‘자연 체험’이 환경에 대한 의식을 고취시키고 실천 활동으로 나아가는데 중요한 요소임을 밝혔다. 다시 말해서 자연과 가까워 질 수 있는 경험은 사람들에게 자연과 인간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함으로써 환경문제 해결의 기초를 제공하게 되는 것이다.자연에 대한 체험의 중요성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도시 가까이에 있는 자연 체험에 적합한 장소를 발견하게 된다. 평소에는 만날 수 없는 동물과 자연을 접할 수 있는 곳, 그곳은 다름 아닌 ‘동물원’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동물원에 가서 이색적인 동물들을 보고 새로운 경험에 즐거워 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동물원은 바로 이러한 자연체험을 제공하는 현장인 것이다.또한 동물원이 멸종위기종들의 멸종을 막고 그 종들의 유전자를 보존할 수 있는 유전자은행(gene bank)이 될 수 있다. 일례로 美 동물원·수족관 협회는 호랑이와 와이오밍 두꺼비 등 92종의 멸종위기 동물들을 보호하고 번식시키기 위한 ‘종(種) 생존 계획’을 작성했다. 그런 동물들 중에는 7백50마리의 발리산(産) 찌르레기과(科) 새들이 있는데 이는 발리의 국립공원에 생존해 있는 30마리보다 훨씬 많은 것이다. 심지어 보호구역에서처럼 반(半)야생적으로 살고 있는 코뿔소·코끼리 같은 일부 대형 동물조차 동물원에서처럼 세심히 보호되고 관리돼야 한다.현재 세계적인 라 중 하나이다. 호주는 문명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한 역사가 그리 길지 않으며 선진국들 중에 자연자원이 풍부하고 보전이 잘 되어 있는 국가로 손꼽히고 있다. 또한 다른 대륙에서는 살지 않는 캥거루, 코알라, 에뮤와 같은 동물들이 서식하고 있으며 이들은 외국의 많은 관광객을 끌어들이는데 한 몫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이 서식하는 자연환경과 거의 가까운 환경을 갖춘 야생동물원들이 있으며 그 관리가 비교적 잘 되어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드니에는 호주에서 가장 많은 인구가 살고 있으며 접근성이 좋기 때문에 많은 동물원들이 관광, 교육, 보전 등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시드니의 동물원과 수족관을 탐방고자 한다. 우리의 탐방계획은 다음과 같다.II. 탐방대상육상생태계의 동물을 사육하고 있는 동물원과 수중생태계의 동물을 사육하고 있는 수족관을 찾아본다. 호주의 수도인 시드니에서 가까운 동물원은 1. 타롱가 동물원, 2.페더데일 야생동물원 3.오스트레일리아 야생동물원, 4. 코알라 공원, 그리고 수족관의 대표인 5. 시드니 아쿠아리움이 있다. 이들을 방문하여 다음과 같은 것들을 알아보고 한국의 동물원과 수족관에서 같은 방식으로 조사를 하여 서로 비교연구를 해 보고자 한다.1. 타롱가 동물원 (http://www.zoo.nsw.gov.au)오스트레일리아의 대표적 동물원이다. 1879년에 창설된 뉴사우스웨일스주 동물학회가 1884년 시드니의 무어파크에 개원한 오스트레일리아 최초의 공립 동물원에서 비롯되었다. 개원 당시에는 넓이 30㎢의 소규모 동물원이었지만, 1916년 시드니만이 내려다보이는 지금의 자리로 이전했다. 1923년 기린 막사의 건설을 시작으로 1927년 수족관, 1928년 꽃시계, 1932년 타르 산, 1939년 호랑이 굴 등을 잇 따라 건설하면서 그 규모가 계속 확장되었다.특히 에드워드 홀스트롬(Edward Hallstrom)이 원장으로 재직한 1940년대부터 1960년대 사이에 대형 고양이과 동물, 코알라, 원숭이, 고릴라 등을 위한 축사가보 활동도 활발하다. 연간 약 139만 명의 입장객을 다녀간다.1977년 시드니에서 북서쪽으로 500㎞ 정도 떨어진 뉴사우스웨일스주의 다보에 웨스턴 플레인즈 동물원이라는 이름으로 분원을 개원하였다. 넓이 2,850㎢의 이 분원에서는 주로 대형초식동물들을 사육하고 있다.(1) 위치 : 시드니(2) 면적 : 약 280㎢(3) 보유종수 : 781종(포유류 128, 조류 306, 파충류 l13, 기타) 3,754마리, 2,000종 이상의 동물 표본 보유(4) 개장시간 : 오전 9시-오후 5시(5) 특징 :① 교육 프로그램 : ‘찾아보고’, ‘오감으로 체험하고’, ‘활동하라’라는 주제 하에 각종 교육프로그램을 진행시키고 있다.② 생물 종 보전을 위한 노력 : 멸종 위기종 및 희귀종을 위한 서식지 복원 사업을 시행하고 있으며, 이에 따른 보전생물학적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③ 동물원에서의 하룻밤 : 타롱가 동물원은 동물원에서 야행성 동물들을 직접 관찰하고, 야생동물들과 가까이서 텐트를 치고 밤을 보내는 야생 체험 프로그램인 ‘ROAR and SNORE'을 운영하고 있다.2. 페더데일 야생 동물원 (http://www.featherdale.com.au)페더데일 야생동물공원은 민간인이 운영하는 곳으로 2000여 마리의 동물들이 사육되고 있다. 시드니 중심부에서 가까운 곳에 자리 잡고 있고 호주의 특유동물이나 이름이 많이 알려진 유명한 동물들을 관람하고자 한다면 꼭 들려야 할 곳이다. 특히, 오스트레일리아에서도 보기 힘든 흰 캥거루나 코알라를 직접 안아 볼 수 있기 때문에 많은 관광객들로 늘 붐비는 곳이기도 하다.(1) 위치: 시드니 중심부에서 약 40km 떨어진 루티 힐에 위치(2) 가는 법: 센트럴 역에서 웨스턴 라인 Western Line을 타고 블랙타운 Blacktown 역(약 40분 정도 소요)에서 내려 그곳에서 다시 08:30∼18:30분 사이에 약 30분 간격으로 운행하는 725번 버스를 타고 레슬리 Leslie(약 10분 소요)에서 하차(3) 개장시간: 오전 9시수 있습니다. 천천히 산책하듯이 길을 걸으면서 캥거루, 왈라비, 호주에만 사는 새 등 여러 동물들을 편하게 볼 수 있습니다.(1) 위치: 시드니에서 서쪽으로 40km떨어진 곳에 있는 원더랜드 안에 위치.(2) 가는 법: 센트럴 역에서 웨스턴 라인 Western Line을 타고 루티힐 Rooty Hill 역에서 내려서 원더랜드 방면으로.(3) 개장시간: 오전 9시-오후 5시4. 코알라 공원 (http://www.koalaparksanctuary.com.au)시드니의 서부 약 25km인 곳에 있는, 뉴 사우스 웨일스주 최초의 코알라 보호구역. 1930년에 창설된 전통 있는 동물원으로 처음에는 가죽을 위한 사냥으로 다친 코알라들을 치료하고 보호하기 위하여 만들어 졌다. 지금은 코알라 병원과 연구소가 함께 설치되어 있다. 코알라의 생태와 정보를 코알라와 직접 접함으로서 얻을 수 있다. 코알라 외에도 캥거루, 웜뱃, 월래비, 딩고(개의 일종으로 몸은 작지만 매우 사납다), 앵무새 등이 있다.(1) 위치 : 시드니 서부 25Km(2) 장소 : 10에이커의 열대우림과 유칼립투스 나무(3) 개장시간 : 오전 9시-오후 5시(4) 특징 :① Stockman's Camp : 매일 오전 10:30, 오후 2:30 양털 깎기 행사가 있다. 가까이서 실제로 양털을 깎는 모습을 볼 수 있다.② 코알라 먹이주기 : 매일 오전 10:20/ 오전 11:45/ 오후 2:00/ 오후 3:00, 네 번에 걸쳐 방문객이 직접 먹이를 줄 수 있다. 또한 코알라를 안고 사진도 찍을 수 있다. 코알라와 직접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③ Koala Cam : 코알라의 생활을 홈페이지를 통해 24시간 동안 생방송한다. 사람들의 코알라에 대한 관심을 충족시켜주며, 연구에도 직접적인 도움이 된다.5. 시드니 아쿠아리움 (http://www.sydneyaquarium.com.au/default.asp)바다 속의 신비한 모습을 실감 있게 느낄 수 있는 곳으로 남반구에서 규모가 가장 큰 이 수족관은 달링하버널스 상어가 있다. 거대한 수족관 밑으로 대형 아크릴판 지하 수중터널이 있어, 생동감을 느낄 수 있다.② 해양 포유동물 구역 : 아이들이 실제로 해양 동물을 만져볼 수 있는 곳으로, 해양 동물과 더 친해 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III. 조사 방법1. 사전에 동물원측 담당자에게 이메일을 보내어 조사에 협조를 해 줄 수 있는지를 묻고 협조를 요청한다.2. 협조를 승낙하면 미리 준비된 설문지를 담당자에게 보내서 사전 조사협조를 구한다.3. 직접 동물원을 방문하여 관계자와 인터뷰를 한다. 인터뷰 방법은 설문지에 있는 내용을 중심으로 캠코더와 보이스레코더를 동시에 이용해 기록을 한다.4. 안내요원의 안내를 받고 직접 동물원의 시설과 동물들을 관람하고 체험을 한다. 이 때 2인이 번갈아 캠코더 촬영을 하고 1인은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 기록을 남긴다. 필요한 것은 전부 메모를 해 둔다.5. 관람객을 임의로 선정하여 인터뷰를 한다. 인터뷰 방법은 동물원측 담당자와 인터뷰했던 방법과 동일하다.6. 당일 돌아오고 난 후 그날의 성과를 분석하고 다음 활동계획에 맞추어 준비를 한다.7. 최종적으로 탐방을 마치면 자료를 분석하여 탐방보고서를 작성한다.IV. 조사항목1. 즐거움을 주는 것과 상업적인 성과동물원과 수족관의 가장 큰 기능을 떠올리자면 관람하는 사람들에게 여가를 즐길 수 있는 공간과 시설, 재미를 제공하고 그로 인해 수익을 올리게 된다. 동물원과 관람객들에게 주는 즐거움은 어떤 것이 있으며 수익사업에 어떠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가를 알아보고자 한다.이것 역시 동물원과 수족관측의 의견과 관람객 측의 의견을 따로 나누어 조사하는 방법을 택하도록 할 것이다.(1) 동물원측① 어떤 돈으로 운영을 하는가② 가장 관람객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분야는 무엇인가③ 관람객들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가④ 어떠한 상품을 만들어 관광객들로부터 수익을 올리는가⑤ 한 해 관람객을 통해서 벌어들이는 수익은 얼마나 되는가⑥ 동물원이 현재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2다.
1. 떠나기 전에5월 3일부터 5일까지의 연휴를 답사기간으로 정해놓고 리포트를 쓰기 위해 답사를 할 장소를 고르다가, 교수님이 말씀하신 내용중에 경주를 돌아보기 위해서는 1주일도 모자르다라는 말이 문득 떠올랐다. 지금까지 초등학교, 고등학교때 각각 1번씩 총 2번 수학여행으로 경주를 다녀온 나는 별로 그렇다할 기억도 남아있지 않고 뭐가 그리 대단하기에 경주를 1주일씩이나 돌아봐야하는지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때 내가 경주의 참맛을 모르고 넘어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사실 경주라고 하면 드는 생각이 신라의 수도, 문화재가 많은 곳, 수학여행장소, '신라의 달밤'이라는 영화의 촬영지라는 사실 빼고는 그 유명도에 내가 알고 있고, 느끼고 있는 사실은 너무나도 적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이번에는 경주를 답사지로 정하게 되었다.이틀전인 5월 1일에 중요한 중간고사가 있어서 준비기간이 2일 밖에 없어서 시험이 끝나자 마자 경주로 내려가는 고속버스표를 구입하고, 바로 인터넷으로 이런저런 정보들을 급하게 조사하고 서점에서 경주에 대한 책을 사고 읽어보게 되었다. 후기에도 다시한번 쓰겠지만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자료를 조사하면 조사할수록 2박 3일(실제로는 토요일 오전에 실험이 있어서 2일만이 온전한 시간)만으로는 경주를 반도 구경하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그렇게 구석구석 신라시대의 유물과 유적지와 유구들이 많은지 2일가지고는 유명한 곳만을 돌아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주어진 기간동안만이라도 알차게 보내자 하는 전의를 다지고 토요일 낮 12시 40분 버스를 타고 경주로 내려가게 되었다.2. 일정5월 3일 - 12시 40분 고속버스를 타고 6시경에 경주고속터미널에 도착. 불국사 근처 유스호스텔에 여장을 풀고 취침5월 4일 - 오전 7시 반에 불국사 답사 후, 경주 시내로 나와 경주국립박물관, 안압지, 반월성, 석빙고, 계림, 첨성대, 대릉원, 석굴암등을 순서대로 답사5월 5일 - 감포 밑의 양남가는 길에 모여있는 감은사지, 이견대진왜란의 병화로 2,000여 칸의 대가람이 불에 타버리자 1604년경부터 복구와 중건이 시작되어 1805년까지 40여 차례에 걸쳐 국가적으로 또는 승려들에 의하여 부분적인 중수(重修)가 이루어졌으며 1805년 비로전 중수를 끝으로 그 이상의 기록은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조선 후기 국운의 쇠퇴와 더불어 사운도 쇠퇴하여 많은 건물이 파손되고 도난당하는 비운을 겪게 되었다.그림 청운, 백운교불국사는 크게 보아 대웅전, 극락전, 비로전을 각각 중심건물로 가지고 있는 세부분으로 나뉜다. 후문으로 가던 정문으로 가던 절에서 마련해 놓은 동선을 따라서 가게 되면 먼저 보이는 오른쪽의 청운, 백운교가 있는 건물이 대웅전 구역이고 왼쪽의 연화, 칠보교가 있는 곳이 극락전 지역이며 무설전 뒤쪽으로 있는 건물 중 왼쪽의 것이 비로전이다.답사를 시작하면서 처음본 불국사의 건축물은 교과서나 어떤 서적에서든 불국사를 소개할 때 마다 나오는 건축물인 청운, 백운교였다. 위쪽의 16계단이 백운교이고, 아래쪽의 18계단이 청운교이다. 지금은 일반인이 다니지 못하지만 이 청운, 백운교위에 있는 문이 자하문인데 이는 석가모니의 피안세계인 대웅전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이는 부처님의 몸에서 나오는 자주빛 금색이 안개처럼 서리고 있다는 뜻이다.그림 대웅전을 둘러싸고 있는 회랑대웅전 구역을 왼쪽으로 하고 오른쪽으로 난 샛길을 따라서 대웅전 구역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처음으로 지나게 되는 것이 대웅전을 둘러싸고 있는 회랑이다. 회랑을 건립한 근본취지는 부처에 대한 존경의 뜻이란다. 대웅전의 정문을 바로 출입하는 것은 불경(不敬)을 의미하므로 참배객은 존경을 표하는 뜻으로 정면으로 출입하지 않고 이 회랑을 따라서 출입한다고 하는데 현재에서는 그런 의미로 정문을 막아 놓고 옆의 회랑을 거쳐서 출입하는 건지 아니면 단지 청운, 백운교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런건지는 모르겠다.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둘을 종합해서 그런 것 아닌가 싶다.회랑을 통과하면 나오는 것은 그 유명한 다보탑과 석가탑이다. 다보탑은 다른 탑하는 곳으로, 무설전(無說殿, 말이 없는 곳)이라는 뜻이 의미하는 바가 참 오묘하다. 원래 경론을 강의하기 위해서는 말이 많이 오가는 곳인데 이름은 역설적으로 지었는데 이는 지극한 진리에 이르려면 모든 진리를 띄어넘어야 한다는 불교의 가르침을 나타낸 것이라고 한다.무설전 뒤쪽의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관세음보살을 보시고 있는 관음전이 있으며, 옆에 나있는 계단을 통해 옆 구역으로 내려가면 비로전이 나오게 된다. 이 비로전에는 국보 제26호로 지정되어 있는 금동 비로자나불상이 있다. 이 비로자나불은 오른속의 둘째손가락을 세워서 왼손으로 접는 지권인을 하고 있는데 오른손은 불계를 표시하고 왼손은 중생계를 표시한 것이다. 이 지권인은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며, 어리석음과 깨달음이 둘이 아니라는 심오한 뜻을 나타낸다고 한다. 또한 이 비로전 옆쪽에는 여러 불자들의 소망을 담은 돌탑들이 많이 새워져 있었다. 이를 보면서 종교의 역할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비로전을 내려와서 무설전, 대웅전 옆으로 돌아가면 극락전 건물이 있는데 이는 극락세계의 중심건물을 뜻하는 것이란다. 이 극락전 건물에서 불국사에 들어올 때 왼쪽으로 보이던 연화, 칠보교와 연결되어 있다.불국사를 답사하면서 느꼈던 것은 아무런 의미없이 보이는 하나하나가 나름대로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는 점이다. 사전에 지식을 가지고 불국사를 답사하니까 회랑하나, 불상의 손모양 하나하나가 나에게 의미를 가지고 다가왔으며, 비록 불에 탄 후에 최근에 다시 지어진 건물들이 많지만 놀라울 정도로 계산적으로 건물이 지어졌으며 지금에도 이렇다면 이것보다 몇배나 규모가 컸다는 예전에는 얼마나 웅장한 모습으로 불국사가 존재했을런지가 매우 궁금하였다. 그리고 답사한 날(5월 4일)에서 며칠 후인 5월 8일이 '부처님 오신 날'이어서 불국사 내에는 연등도 많이 달려있었고 계속해서 여러 손님맞이 채비가 한창이었다. 그것을 보고서 며칠만 늦게 올걸 하는 아쉬움을 많이 느꼈다.2. 국립경주박물관불국사를 나와 귀중한 것들이다. 이 유물들은 당시 왕과 군신들이 안압지에서 향연할 때 못 안으로 빠진 것과 935년 신라가 망하여 동궁이 폐허가 된 뒤 홍수등 천재로 인하여 이 못 안으로 쓸려 들어간 것, 그리고 신라가 망하자 고구려군이 동궁을 의도적으로 파괴하여 못 안으로 물건들을 쓸어넣어 버린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이 안압지관에서는 목제품 종류의 유물들이 눈에 띄었다. 우리나라 토양이 산성인 까닥에 땅에 묻혀진 목기들이 오래 보존되지 못하여 그 시대의 목제품들은 거의 발굴되지 않았는데 안압지 바닥에서는 그런 산성화에서 피해있었던 여러 유물들이 발굴되어 신라시대의 귀중한 유물들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화려한 문양을 지니고 있는 기와지붕에 쓰였던 암키와와 수키와도 그 시대의 예술정신을 엿볼수 있어 좋았다.다음으로 간 미술관에서는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에 많이 제작된 소형 금동불상, 석조유물이 주제별, 시기별로 전시되어 있어 여러 유물들의 양식적 변화과정 및 명칭을 파악할 수 있었으며, 신라부터 고려시대까지의 금속공예품들과 와전류를 통해 뛰어난 신라인의 공예기술을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지금은 남아있지 않지만 그 시절에는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였던 553년에 창건된 대표적인 신라의 호국사찰인 황룡사터에서 출토된 사리구, 불상, 지진구, 기와 등을 볼 수 있었다. 또한 복원된 황룡사 모형을 통해, 거대한 황룡사 9층 목탑의 모습과 당시 최고조에 달했던 목조건축 기술을 엿볼 수 있었다. 그 거대한 모형을 보면서 이런 모형을 지금에 복구한다면 좋은 관광자원으로서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3. 안압지그림 안압지의 왕궁터안압지(雁鴨池)는 경북 경주시 인왕동에 자리한 통일신라의 궁터이다. 폐허로 방치되었던 것을 1975년부터 2년간 발굴 조사가 실시되었고 이를 토대로 1980년부터 복원 공사가 진행되어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넓은 평지에 3개의 전각이 있고, 넓은 연못이 조성되어 있다. 안압지는 삼국통일을 이룬 신라의 문무왕 14년(674년) 동궁으로 축조된 남아 있을 뿐이다.이 성에 얽힌 설화가 재미있다. 석탈해가 토함산에 올라 서쪽 육촌을 바라보니 반월 모양의 땅이 무척 좋아 보였다. 곧 이곳에 와서 보니 당시 신라의 중신 호공의 집이었다. 탈해는 이 집을 자기 수중에 넣으려고 한 가지 계략을 꾸몄다. 호공 집 주변에 몰래 숫돌과 쇠붙이, 숯들을 많이 묻어두고, 이튿날 호공을 방문하여 "이 집은 원래 우리 조상들의 집이었으니 집을그림 석빙고 입구내달라" 고 하였다. 호공은 크게 놀라 그 증거를 보이라 하였다. 탈해는 서슴지 않고 "우리 조상이 여기서 오래 살다가 잠시 다른 나라로 간 것이오. 집터 주변을 파보면 확실한 증거물이 나올 게요. 우리 조상들은 원래 쇠를 다루던 대장장이였소" 하고 당당히 말하였다.억울하기 짝이 없는 호공이 시비를 가려달라고 관청에 송사를 걸었다. 드디어 재판 날 탈해의 말대로 집 주변을 파보니 과연 숯이 많이 나왔다. 이에 관원들은 탈해의 집이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내막을 알게 된 2대 남해왕은 탈해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 생각하여 사위로 삼았다. 그후 탈해가 왕이 되자 이곳을 왕성으로 정하고, 5대 파사왕 때 석벽을 쌓아 훌륭한 성을 마련하였다는 것이다.반월성에서 계림쪽으로 가다보면 얼음이 귀했던 예전에 얼음을 저장하였다가 일년내내 꺼내 쓰던 돌로 만든 창고인 석빙고가 있다. 다만 이 석빙고는 신라때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조선시대에 만들어졌다. 현재에는 일제시대때에 잘못된 보수공사로 인해서 석빙고의 원래 역할을 수행할 수는 없다고 한다.그림 첨성대6. 계림, 첨성대반월성에서 내려와서 첨성대로 가는 길가에 보면 김씨 시조인 김알지의 탄생설화가 있는 계림이 있다. 탄생 설화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탈해왕9년(65) 3월 어느 날 밤 왕은 월성 서쪽 시림(始林)이라는 숲에서 닭 울음소리를 들었다. 날이 밝아 호공을 시켜 숲으로 가 보니 금색 찬란한 궤짝 하나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흰 닭이 그 밑에서 울고 있는 것이었다. 이 사실을 보고 받은 왕은 궤짝을 가져다 열어보게 하였 하다.
1. 북한 조선노동당의 창당 배경사회주의국가에서는 보통 권력의 분립의 부정되고 공산당이 최고, 유일의 권력기관으로서 국가와 사회를 지배, 통제하는데 이러한 당의 지위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이론적 근거를 두고 있다.이 이론에 따르면 국가는 국민의 자유와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서 생긱것이 아니라 부르즈와의 완전한 탄압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국가는 자본가계급의 반동을 억압하고 계급투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계급투쟁의 유용한 독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성공한 후에도 자본가의 반혁명적 기도는 집요하게 계속되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필요하며,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실현하기 위해서 노동자계급만의 단일정당인 공상당의 존재가 불가피한 것이다.북한에서도 이 근거에 바탕하여 당이란 근본적으로 계급투쟁의 산물이며 계급을 떠나서는 당을 생각할수 없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모든 계급들은 자기계급을 위해서 싸우며, 이 투쟁에서 각 계급은 자신들의 이익을 옹호하기 위하여 당을 만든다는 것이다. 북한에서는 '철학사전에'따르면 "로동계급의 당은 수령의 사상과 령도를 실현하기 위한 혁명의 참모부로서 수령의 사상으로 사람들을 무장시키고 수령의 의도대로 사회를 혁명적으로 개조해 나가는 사회의 심장, 공산주의 건설의 추진력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고 보고 있고 이 말이 북한이 조선노동당이라는 유일당을 건설한 중요한 이유가 된다. 구체적으로 북한에서는 노동당은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과 같이 권력의 원천이요 중핵이며 모든 국가기관과 사회단체의 지도적 핵심이 되는 것이다.이러한 필요성으로 생겨나고 유지되어온 조선노동당은 다음에 말하는 절차를 거쳐서 북한사회에 등장하게 되었다. 북한은 조선공산당 서북 5도 당책임자 및 열성자대회에서 김일성이 깆연설을 한 1945년 10월 10일을 조선노동당 창건일로 공식화하여 사회주의 명절로 기념하고 있다. 북한은 1945년 10월 10일부터 13일까지 평양에서 조선공산당 서북 5도 당책임자 및 열성자대회를 개최하고 여기에서 채택한 '정치노선과 조직강화에 관한 결정서'에 따라 10월 13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창설하였다.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은 1946년 4월말 북조선공산당으로 개칭되었고, 8월 29일 조선신민당과 합당하여 북조선노동당으로 발족되었다. 조선노동당은 북조선노동당과 남북노동당연합중앙위원회가 통합되어 1949년 6월 30일 창당되었다.이후 여러번의 당대회가 열려왔는데 1차 당대회는 북조선 노동당 창립대회로 1946년 8월에 개최되었으며, 2차 당대회는 1948년 3월에 개최되었다. 북한정권이 창립되기 이전에 개최된 제 1, 2차 당대회는 당의 이념을 명시하지 않은 채, 조선근로대중 이익의 대표자이며 옹호자로서의 북조선노동당의 성격을 부각하였다. 당의 목표로는 독립국가건설과 인민대중의 정치, 경제, 문화생활수준의 향상을 제시하였다.전후 1956년 4월에 개최된 3차 당대회는 당규약 1조를 개정하여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당활동의 지침으로 제시하고, 또한 조선노동당이 "민족적 독립과 해방을 위하여 투쟁한 조선인민의 혁명적 전통계승자"임을 표방하였다. 당의 당면목표로는 '전국적 범위에서 반제, 반농건적 민주혁명의 과업완수'를 내세웠고 '공산주의 사회건설'을 당의 최종목표로 표방하였다.이후 1970월 11월 5차 당대회에서는 김일성 주체사상을 당의 지도이념으로 표방하였고, 1980년 10월 개최된 6차 당대회에서는 김일성 주체사상만을 당의 유일한 지도이념으로 명문화하였다.2. 북한 조선노동당의 조직 및 기구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창당되고 유지되어온 조선노동당의 구조는 1980년 10월 제 6차 당대회에서 개정된 당규약에 명시되어 있다. 당규약에 의하면 조선노동당은 믿주의 중앙집권제원칙에 의하여 조직된다고 명시되어 있지만, 당조직과 운영의 실제는 철저히 1당독제로 구축되어 있다.당조직의 최고지도기관은 당대회이며, 당대회가 열리지않을때에는 당대회가 선출한 중앙위원회가 최고지도기관이 된다. 도, 시, 군 당의 경우에는 해당 당대표회이며, 당대표회가 열리지 않을 때는 당대표회가 선출한 해당 당위원회가 최고지도기관이 된다.이러한 당조직들은 중앙당과 지방당에 따라 구조조직이 달라진다.I. 중앙당(1) 당대회- 그림에서 가장 맨위에 위치한 당대회는 노동당 규약에 의하면 당의 최고지도기관이다. 당대회는 ① 당중앙위원회 및 당중앙검사위원회의 사업총화, ② 당강령과 규약의 체택 또는 수정보완, ③ 당노선과 정책 및 전략전술에 관한 기본문제 결정, ④ 당중앙위원회 및 당중앙검사위원회 선거 등의 권환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으나 수천명이 참가하는 구조상 실질적인 토론에 의해서 일이 진행되기 보다는 중앙위원회나 정치국에서 이미 결정된 사항을 통과시키는 의례적인 행사에 그치고 있다. 또한 당대회는 5년마다 개최하도록 되어 있으나 지켜지지 않고 있으며, 특히 1980년 6차 당대회 이후 현재까지 개최되지 않고 있다.(2) 당중앙위원회- 규약에 의하면 당대회가 최고기관이나 당대회가 실질적인 토의의 장이 되지 못하고 개최시기가 너무 시차가 크기 때문에 당대회화 당대회 중간에 당대회가 선출한 당중앙위원회가 당의 최고지도기관이 된다. 당중앙위원회는 6개월에 1회 이상 소집하도록 되어있고 전원회의는 당중앙위원회 정치국과 정치국 상무위원회를 선거하며 당중앙위원회 총비서와 비서를 선거하고 당중앙위원회의 비서국과 군사위원회를 조직한다. 또한 당중앙위원회 검열위원회를 선출한다.해당 시기에 당이 직면한 중요문제는 당중앙위원회 전언회의때서 토의, 결정되고 있다. 사회중의 국가에서 당중앙위원은 상당한 권력과 지위를 갖고 있으며 중앙위원한명이 약 1만명의 당원을 대표하는 것으로 보인다. 중앙위원회는 정위워, 후보위원, 준후보위원으로 구성되며, 정위원은 발언권과 표결권을 모두 갖는데 반해서 후보위원은 발언권만을 갖는다. 한편 준후보위원은 각급 당 및 행정경제기과 간부들과 공장, 기업소의 당비서 및 지배인들에서 선출되며 방청권만 갖는다. 전원회의는 당의 실질적인 결정기구로서 당내 조직뿐만 아니라 최고인민회의와 정무원의 조직문제를 다룬다. 따라서 최고인민회의 개최 전에는 전원회의를 개최하여 최고 인민회의 의결사항을 사전에 결정한다.(3) 정치국- 정치국과 정치국 상무위원회는 전원회의가 개최되지 않은 기간동안 당중앙위원회의 명의로 당의 모든 사없을 조직, 지도하도록 되어 있다. 즉 전원회의가 수개월, 길게는 1년여만에 개최되고 회의도 수백명이 참석하기 때문에 보다 실질적인 회의는 소수의 엘리트만이 모인 정치국회의에서 결정하는 것이다.정치국은 정위원과 후보위원으로 구성되는데, 이들의 명실공히 북한 당, 정, 군의 핵심엘리트라고 할 수 있다. 정치국 상무위원회는 정치국원 중 소수의 최고핵심인물로 구성된다.(4) 비서국- 당대회, 중앙위원회, 정치국이 조선노동당의 비상설회의체 성격을 지닌데 반해서, 비서국은 조선노동당의 일상적인 업무를 다루는 실질적인 정책집행기관이다. 추상적 개념으로서가 아니라 실제적인 노동당의 중앙위원회라고 할 때, 바로 이들 전문부서와 여기서 일하는 당일꾼을 일컫는다.비서국은 총비서와 10여명의 비서에 의해서 구성된다. 비서들은 각자가 담당하는 업무가 있는데, 공안비서, 군수비서, 근로단체비서, 공업비서, 대남비서, 사상비서, 선전비서등은 1998년 말 현재 담당자가 있고 김정일이 맡고 있던 조직비서를 비롯하여 4명의 비서가 공석이 되어있다. 남한으로 망명한 황장엽은 국제담당비서였다.내각의 각 q처와 같이 비서국은 산하에 분야별 전문부서를 두고 있다. 전문부서는 조직지도부, 선전선동부, 국제부 등 20여개가 있다. 당전문부서는 통상적으로 업무별로 내각에 대한 지도감독기능을 하고 있다. 노동당 내에서는 선전선동부와 생활지도를 담당하는 조직지도부가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이 큰 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중 특히 당 조직지도부가 노동당의 핵심부서라고 할 수 있는데, 조직지도부는 당 속의 당으로서 당, 정, 군에 대한 조직, 인사, 검열등의 광범위한 권한을 갖고 있다. 1970년대 초반에는 김영주가 당조직비서로 주목받았으며, 김정일도 1973년 조직 및 선전담당비서에 선출된 이후 계속 이 직책을 유지하여왔다.2. 지방당(1) 행정구역별 당조직- 지방당은 기본적으로 중앙당 조직의 틀을 유지하고 있다. 지방당은 해당 지역 주민들의 사상 및 조직사업을 지도하는 기본적인 임무와 함께 행정 및 경제사업을 적절히 지도하여 혁명과업수행을 보장하도록 되어 있다. 구체적으로 지방당은 중앙당의 지시와 결정을 집행하고, 계획을 실행하며, 해당 지역의 모든 기관(기업소, 공장, 협동농장)에 정책적 지도력을 행사하고, 해당 지역의 통합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여러 기관들의 활동을 조정한다.도당대표회는 도당조직의 최고지도기관으로 중앙당의 당대회와 같은 기능을 하고 있다. 3년에 1회 도당위원회가 소집하는 도당대표회는 당위원회와 검사위원회의 사업총화를 하고, 당위원회 및 검사위원회를 선출하며, 중앙당대표자회에 파견할 대표자를 선출한다. 도당대표회의는 중앙당의 당대회와 마찬가지로 규모의 거대성과 3년에 한번이라는 시간차이 때문에 이론적 최고지도기관에 불과하며, 당의 실질적 최고지도기관의 역할은 전원회의가 한다.도당전원회의는 4개월에 1회이상 소집되며 당의 노선과 정책의 수행방법을 토의, 결정하며, 당의 최고지위인 책임비서를 비록하여 비서를 선거하고 비서처를 조직한다.지방당전원회의가 수 개월에 한 번씩 개최되기 때문에 일상적인 중요사항은 집행위원회에서 처리되는데, 실질적으로 집행위원회는 중앙당의 정치국과 같이 지방당의 최고핵심권력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집행위원회는 전원회의와 전원회의 사잉에 당위원회 명의로 당사업과 행정 및 경제사업을 조직, 지도한다. 1개월에 2회이상 소집되도록한다. 지방당의 집행위원회도 지역 내의 핵심인물들로 구성되어 있다. 집행위원회는 당책임비서를 비롯하여 당비서, 사회안전국장, 국가안전보위국장, 행정경제위원장, 검찰소장, 재판소장 등으로 비상설 최고정책결정기구이다.
I. 서론이번학기에 북한학개론이란 수업을 들으면서 기말리포트를 제출하라고 교수님이 말씀하셨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한국전쟁'에 대한 것이었다. 98년도에 '한국전쟁'에 대한 수업을 들으면서 지금까지 한국전쟁에 대해서 알고 있었던 많은 사실들이 다른 관점에서 보면 다른 결론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됨으로서 아직까지도 좋은 기억이 남아있는 과목이었다. 따라서 이번 기말레포트도 '북한학개론'과 '한국전쟁'의 교집합인 '한국전쟁에서의 북한'에 대한 것으로 해야겠다고 결정하였다.이후 도서관에서 여러 관력서적들을 살펴보다가 '한국전쟁동안에 북한의 권력구조가 어떻게 변했을지'에 관해서 리포트를 쓰기로 하였다.II. 본론그러면 한국전쟁은 북한의 권력구조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다 주었는가? 우선 새로운 최고권력기관이 생기고 그것이 전쟁중 군사문제뿐 아니라 정치문제도 관장하는 최고의사결정기구의 기능을 수행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군사위원회이다. 전쟁 발발 다음날인 1950년 6월 26일에 북한의 입법부인 최고인민회의의 결정에 의하여 설립된 군사위원회는 김일성(위원장), 박헌영, 홍명희, 김책, 최용건, 박일우, 정준택등으로 구성되었다. 최고인민회의의 결정에 의하면 군사위원회가 북한의 주권을 전적으로 행사하게 되며 북한의 전인민, 모든 주권기관, 정당, 사회단체와 군사기관들은 군사위원회의 결정과 지시를 절대적으로 복종하고 이행하도록 되었다.그러나 권력구조의 측면에서 볼때에 전쟁은 김일성에게 잠재적 또는 사실상의 경쟁자들을 제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는데서 큰 의의가 있다. 만일 전쟁도발의 주범이 김일성이었다면 그는 전쟁실패의 책음을 당연히 추궁받아야 했을 것이다. 김일성은 오히려 희생양을 색출하여 책임전가를 했을뿐 아니라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 일석이조의 책략을 썼다.유엔군의 개입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완전패배의 위기에 처해있다가 중국의 "인민지원군"이 전쟁에 개입함으로써 구제된 김일성은 중공군 개입후 전세가 북한에게 유리하게 전개되기 시작한 1950년 12월 사람들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는데 그 때 숙청된 자들중에는 거물급이 포함되어 있었다. 연안파의 무정(군단장), 김한중(사단장), 소련파의 김렬(후방총국장), 채규형(최고검찰부 총장), 빨치산파의 김일(전선사령부 군사위원), 최광(사단장), 임춘추(도당위원장), 국내파의 허성택(남조선빨치산 조직책), 박광희(남로당도당위원장)등이 피해자였다.이 중 김일, 최광, 임춘추 등은 정치생명이 부활되지만 무정은 명예가 회복되지 못한채 병사하였다. 무정은 조선인민군 제 2군단 단장으로 있으면서 병사들을 무단사형시켰을뿐만 아니라 평양방위의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유엔군이 진격해 오자 저항없이 후퇴하였다는 혐의를 받고 숙청되었다. 그가 중국의 영향력이 증가한 여건하에서 김일성의 권력유지에 차질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도 숙청대상이 된 이유가 될 수 있었다.한국전쟁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에 김일성에게 제거된 또 하나의 거물급 인사는 소련파의 대부 또는 두목인 허가이였다. 허가이는 노동당의 제 1서기로서 조직을 책임맡고 있을때에 "60만 당원가운데서 45만명"에게 "책벌"을줌으로서 "당을 파괴"했다고 김일성이 지적하였다. "책벌"받은 당원들 중에는 유일한 과오가 "적들의 눈을 피하기 위하여 잠시 당증을 파묻어두었던" 것이었다고 김일성은 밝혔다. 허가이는 그 후 자살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자살인지 타살인지 판가름하는 신빙성있는 자료는 아직 공개되지 않았다.김일성의 권력기반을 공고화하는데 큰 역할을 한 대규모의 숙청작업은 1953년 7월 휴전협정이 발효한 직후에 진행된 이승엽등 전남로당 지도층의 재판 및 처형과 1955년 12월에 진행된 박현영의 재판과 처형이었다. 이 사건들은 한국전쟁과 관련이 있으며 전쟁이 북한의 권력구조에 미친 영향을 논하는데 큰 비중을 차지한다.국내파의 숙청은 휴전협정이 체결되기 이전에 이미 시작되었다. 1952년 12월 15일에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 5차전원회의에서 한 보고에서 김일성은 "종파주의의 잔재"를 없애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는 종파주의자들이 "간부들 사 겉으로는 받들고 뒤돌아서서는 배반하며 입으로는 다 좋다고 하면서도 속으로는 딴꿈을 꾸며 대면해서는 의리를 지키는척하고도 뒤에서는 딴장난을" 한다고 비난하였다.김일성은 이어서 종파분자들에게 "당앞에서 솔직히 고백하고 자기의 비당적행동을 그만둘" 것을 촉구하고 "우리 전체 당원들은 혁명적 경각성과 당성을 더욱 높여 이런 분자들의 행동을 엄격히 감시하며 종파분자들이 우리 당내에서 한걸음도 움직일 수 없도록"하자고 다짐하였다. 김일성의 말을 더 인용해보면 아래와 같다."모든 혁명적 당들의 경험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만일 종파분자들을 그냥 내버려둔다면 그들이 결국은 적의 정탐배로 되고 만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하여야 하겠습니다. 또 일부 당원들중에는 당의 로선과 당조직에 의거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개인을 밀고 그에 의겨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결국 개인영웅주의자들에게 리용되 수 있는 것입니다."박헌영, 이승엽일파는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 5차전원회의 후에 체포되었다는 설도 있다. 이승엽외 11명은 1953년 7월 27일에 휴전협정이 발효된지 3일후인 7월 30일에 기소되고 8월 3일부터 6일까지 북한 최고재판소 군사재판부에서 공개재판을 받았다. 피소자들은 이승엽외에 조일명, 임화, 박승원, 이강국, 백철, 유순달, 이원조, 백형복, 조용복, 맹종호, 설정식이었다. 이 12명은 "미제국주의를 위해 감행한 간첩행위","남반부민주역량 파괴, 약화, 음모와 테러","공화국정권전복을 위한 무장폭동행위"라는 세가지 혐의로 기소되고 재판을 받았다.피고들은 재판중 모든 기소상항을 인정하였다. 이강국은 자신을 "미국의 전형적인 주구"라고 불렀고 맹종호는 남한에서 친북한 유격대 활동을 한 것도 자신의 "출세를 위하여"한 것이고 "이승엽의 야욕에 알맞도록 충성을 다하는 과정에서 김일성을 반대"한 것이라고 고백하였다. 이승엽은 그가 1948년에 "38선을 넘나드는 자는 그 누구를 막록하고 체포하여 처단하라고 지시"하여 42명의 희생자가 나왔다는 증언에 대하여 그가 "직접 지시한 일은 없으자유록게 진술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고 변호사까지 선임해 준데 대해 감사"를 표하고 "우리들에게 어떠한 엄중한 판결이 내린다 하더라도 달게 받겠다. 생명이 둘이 있어 그것을 모두 바치더라도 부족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하였다.위의 피고 중 윤순달과 이원조만 빼놓고 모두 사형 및 전재산 몰수의 판결이 내렸다. 윤순달은 15년 징역, 이원조는 12년징역을 언도 받았다. 이들의 "죄상"중 반김일성 모의를 했다는 부문을 제외하고 신빙성이 없는데 재판 중 완전히 협조한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가장 중요한 이유가 가족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기 위한 것이었든 것 같다. 그들 자신은 처형될 것이 기정사실이 된 이상 남을 가족들의 장래가 협상에서의 양보카드가 되었을 확률이 크다. 재판소에서 한 피고들의 최후진술에 이러한 것이 부문적으로 반영되었다. 예를 들면 설정식은 "나는 멀지않아 죽지만 아이들이 잘 살만한 사회, 우리 인민들이 잘 살수 있는 사회, 나의 아이들과 모든 아이들이 잘 살 수 있는 민주주의 사회가 올 것을 믿고 물러가겠다"고 말했고 조용복은 "만일 재판장이 나의 원을 들어줄 수 있다면 나의 자식에게 한마디 유언ㅇㄹ 남기고자 한다. '너희들은 이 애비를 조국의 간악한 원수로 만든 미제에 대해 모든 것을 바쳐 싸워라'"라고 최후진술을 하였다.박헌영을 2년후에 따로 재판한 것은 1953년에는 협조를 거부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2년이상 감옥소에 있으면서 온갖 압력, 설득, 또는 고문까지도 받았을 박헌영은 1959년 12월에 드디어 기소되고 12월 15일에 북한 최고재판소에서 특별재판을 받게 되었다. 박헌영의 범죄는 이승엽 등 12명의 것과 똑같은 간첩행위, 민주역량 파괴행위, 북한정권 전복음모행위였다. 박헌영은 기소장에 적힌 범죄사실중 "새정부, 새당의 조직에 관한 것과 무장폭동 음모에 직접 참가하거나 그러한 범행을 조직, 지도한 사실이 없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한 책임으f 지기 곤란하다. 기타는 전부 시인한다"고 재판장에게 말하였다.그러나 그가 시인한 범죄 온 것인 만큼 나의 과거를 공산주의 혁명운동이라고 말 할 수 없다고 본다"고 격하시켰다. 그는 "1939년터 체포될 때까지 미국 간첩으로 있었으며 미국세력을 배경으로 인공정부(人共政府)를 전복하고 통일적인 친미정부를 수립하여 내가 이 정부의 수령이 되려고" 범죄행위를 했다고 말하였다. 그는 최후진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나의 죄악의 엄중성으로 보아 사형은 마땅한 것이다. 내가 미국간첩들의 두목이고 그들로 하여금 나 자신이 희망하는 범죄를 감행하도록 모든 것을 비호 보장하여 온 장본인인 까닭에 전적으로 나에게 책임이 있다. 끝으로 내가 과거에 감행해 온 반국가적 죄악이 오늘 공판에서 낱낱이 폭로된 바이지만 여기 온 방청인뿐들 아니라 더 널리 인민들 속에 알려 매국역적의 말로를 경고해주기 바란다."박헌영은 사형과 전재산몰수를 언도받았고 사형이 곧 집행될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박헌영과 그 추종자들이 미국의 간첩이었다는 주장은 이해할 수 없다. 1953년과 1955년에 진행된 재판에서 당국의 피고들의 범죄사실 인정이외에 아무런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였다. 기소내용을 그대로 인정한 피고들의 자백에도 문제점이 있었는데 그 중 그들을 미대사관의 일등서기관 해롤드 조이스 노블이 지도하였다는 부문은 사실과 맞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승엽이 노블을 처음 만났다는 1947년과 안영달이 노블에게서 이승엽의 간첩임무를 전달 받았다는 1950년 6월 26일에 노블은 서울에 있지 않고 일본 동경에 있었기 때문이다. 노블은 1947년부터 1948년초기까지 동경에 있는 연합군총사령부 민간정보국 출판담당 책임자로 있다가 1948년에 주한 미국사령부 정치연락실장으로 부임하였다. 그리고 1950년 6월 23일에 노블은 휴가를 받아 동경에 갔다가 6.25를 맞았는데 즉시 서울에 귀임하려고 노렷했지만 6월 27일 오후 2시에 겨우 김포공항에 군용기로 착륙할 수 있었다. 노블은 자신과 미대사관의 행동에 대한 자세한 기록을 남겨놓았는데 1975년에 미국학자 프랭크 볼뒨의 편집으로 출판되었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