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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양사] 유럽인들의 타자만들기
    유럽인들의 타자만들기고대 이전의 유럽이 갖고 있는 오리엔트에 대한 인식은 고대 시기에는 야만이라는 ‘타자’의 모습으로, 기독교 국교화가 이루어진 시기에는 ‘이교도적 이단’이라는 타자의 모습으로, 그리고 봉건제 시대에는 주로 ‘악마의 모습’으로 유럽인들에 의해 각인되었다. 그리고 15~16세기 이후 대항로의 개척이 이루어지면서 1571년 ‘레판토해전’을 계기로 유럽이 이슬람권에 비해 힘의 우위를 지니게 되고, 대서양문명이 세계의 표준으로 자리 잡게 되면서 계몽주의 시대에는 아시아를 폄하의 대상으로 삼으면서 유럽 중심적 이데올로기를 구축하게 된 것이다.유럽인들에게 있어 1492년은 새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것이었으나 그 기본적인 성격은 정복이었고 이는 대재앙을 가져온 학살이었다. 이 새로운 만남과 정복은 차후 유럽 근대성의 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고 유럽의 자기이해에 불가결한 요소가 되었다. 그들은 이교도 스스로의 지배권과 자연법 상의 권리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인디언들이 기독교 선교사를 받아들이지 않을 때 전쟁이 정당하다는 주장을 펴서 식민사업과 개종에 정당성을 부여했다.16세기 유럽인들의 세계인식은 아직 유동적이었으며 문명화 담론에 내재한 19세기의 인종주의와는 성격이 달랐다. 그러나 17?18세기에 확대된 유럽의 식민사업은 과학과 기술을 통해 세계를 위계적 질서로 재편서하는 것이었다. 즉 근대의 서구중심주의는 이러한 식민주의가 한층 진전되는 과정에 가능해진 새로운 유럽적 정체성 인식과 더불어 과학혁명과 계몽주의의 17?18세기에 형성되었다.17?18세기에 이르러 기독교 신앙의 약화는 새로운 타자인식의 길을 열어주었다. 특히 계몽사상은 타문화에 대한 지식의 증대에 힘입어 스스로를 상대화시키는 포용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하지만 타자를 포용하는 보편주의는 사실상 식민사업과 더불어 싹튼 유럽적 정체성이 안정화되고 확신에 이르게 되었음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서로 타자임을 인식하고 스스로를 보편적 틀 안에서 정의하고자 한 계몽주의가 한편으로 타 문화를 하위자로 위치시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결국 계몽사상의 보편주의는 유럽 중심적 세계상, 역사상이 보편적 패러다임으로 자리 잡는 데 큰 기여한 동시에, 인종주의를 그 안에 담고 있었다. 보편주의가 인종주의와 함께 공존하는 관계, 양자가 서로를 전재하는 관계가 된 특이성은 사실상 근대세계가 하나로 통합되면서 갖게 된 위계제적 배치를 반영하는 것이었다.산업혁명이 확산되고 인도의 식민지화에 뒤이어 중국이 서구의 군사력과 기술 앞에 무릎을 꿇는 19세기에 이르러 유럽에서는 계몽주의가 갖는 이중성 가운데 배타적인 성향이 한층 강해지고 진화론의 유행과 더불어 과학의 옷을 입은 노골적인 인종주의가 성행했다. 19세기 이후 본격적으로 등장한 문명화 사명의 담론은 유럽을 문명 그 자체로 인식하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었고, 이는 견고한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로 변화해갔다. 이것은 세계적 보편주의의 이름으로 타자 집단에게 강제로 부과하는 차원이라는 점에서 과거 문명들의 자기중심주의와는 성격이 다른 것이었다. 과학과 기술의 진보의 이름을 내건, 매우 치밀한 또 다른 이름의 ‘자기중심주의’가 된 것을 뜻했다.유럽은 이제 자신을 세계의 중심과 역사의 정점에 놓는 진보의 역사를 구성하는 새로운 학문분야를 탄생시켰다. 서구 대 타자의 구도, 문명 대 전통의 구도는 학문편제에서부터 두드러졌고 식민주의적 기획을 정당화하는 데 기여했다. 18세기 말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인류학과 동양학을 필두로 유럽은 자신만이 문명화되었다는 자각 하에 경제학, 사회학, 정치학, 역사학을 만들어냈다. 또한 타자와 구별된 유럽적 정체성을 구성하기 위해 유럽의 역사가 재구성되었다. 기독교의 가장 큰 특징이 고대와의 결정적 단절임을 강조하던 담론은 자취를 감추었고 이제 그리스, 로마 문명은 근대 서구세계의 가장 중요한 기원으로 자리 잡아 확고부동한 사실이 되었다. 이러한 논리의 전제는 근대의 특성이 유럽 내부에서 출현하여 자라나 열매를 맺었다는 가정아래, 근대성이 서구의 내부에서 자라나 전지구로 전파된다는 확산이론이 확고히 자리 잡게 하였다. 이는 특성상 인종주의를 그 안에 담고 있었다. 이 인종주의는 과거의 이교도나 이방인에 대한 두려움과는 달리 타자를 동일한 구조 안으로 끌어들여 불평등한 위계제를 확립하는 보편주의 이데올로기의 보완물이었다. 그리고 과학의 이름으로 다가온 보편주의는 위계제와 불평등 위에 구축된 근대 세계에서 지배집단의 이념으로 작용했다.인도에서의 성의 개념은 인도의 거세지는 정치적 요구와 닮은꼴에 대한 추구에 부담과 두려움을 느낀 영국이, 인도와 자신과의 차별성을 강조한 하나의 방식이었다. 영국인들은 자신들의 식민지인인 인도인들을 젠더, 인종, 계급의 세 가지 범주로 타자화하고 차별화하는 통치방식을 실시하였다.먼저 영국인들은 인종의 범주로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백인남성의 남성성과 유색남성의 여성성으로 하여금 그들을 타자화하였다. 그들은 인도남성들을 남자답지 못하다고 주장하며 ‘사티제도’, 여자로 태어난 영아의 살해, 여자아이와의 결혼과 성적이용, 과부 학대 및 재가 금지 등으로 그 주장을 뒷받침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제도들은 영국인들이 그들을 타자화하여 통치를 원활히 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영국인들이 자국 내에서 보인 중세 ‘마녀사냥’과 ‘여성과 개, 도토리는 때릴수록 좋다’와 같은 속담을 보면 그들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다.또한 영국인들은 젠더의 측면에서 지배자인 영국과 식민지인 인도를 각각 남성성과 여성성을 투영해 통치하고자 하였다. 정복자와 지배자만이 유일한 남성이자 지적인 주체라는 인식은 데카르트 이후 서양사상의 일관된 흐름이었다. 영국인들은 뱅골인을 포함한 인도인들이 가진 나약함과 나태함을 그 이분법적 성의 구분을 통해 연약한 여성으로 간주하여 인도인들을 이중적인 성적인 차별을 하였다. 즉 여성적인 인도인은 지배자 남성의 공적 세계인 식민정부에 참여하지 못하였고, 겨우 얻어도 그들에게 종속된 하위직에 만족해야 했다.또한 영국인들은 계급의 측면에서 인도인들을 타자화하여 통치하였다. 즉 인도 내에서 어느 계층을 포섭하여 자신의 정책을 따르게 하여 식민통치를 원활케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소수의 영국인들이 다수의 인도인들을 점령?통치하기 위해서였다. 영국인들은 영어로 교육받고 더운 평원에 사는 그저 ‘아는 것이 병’인 뱅골인으로 대표되는 인도인과 ‘모르는 것이 약’인 씩씩하고 용감한 산악지방의 상무적인 종족을 여성성과 남성성으로 나누어 인식하였다. 즉 인도 내에서도 남성성과 여성성의 이분법적 구도가 영국인에 의해 나누어지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영국은 인도 내에서의 분열로 통일된 인도의 힘을 분산시킬 수 있게 되었고 다수의 인도인들을 원활히 통치할 수 있게 되었다. 즉 영국인들은 인도 내에서 인도인들을 두 가지 계급으로 나누어 그들이 좋아하고 필요로 하는 계급을 포섭하여 영국인들에게 복종하게 함으로써 영국인이 원하지 않고 심지어 두려워하기까지 한 계급을 통치하고자 한 것이다.
    인문/어학| 2005.06.19| 3페이지| 1,000원| 조회(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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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평] 일제하 한국 지식인들의 저항과 식민지 근대화론
    일제하 한국 지식인들의 저항과 식민지 근대화론인류역사에서 근대화를 유럽적 경험을 반영하여 근대성(modernity)을 규정할 경우 그것은 단위민족의 정치적 독립, 공업화 그리고 민주주의를 핵심내용으로 하는 개념이다. 그리고 그것은 종교적?문화적?정치적 큰 변화를 배경으로 종교적 율법과 교회세력에 억압되었던 개인의 삶의 질이 크게 향상되는 역사적 발전의 주요국면에 해당하는 것이었다.그러나 서구의 근대화는 비 서구에 대한 제국주의적 진출을 병행하였다. 이는 비유럽지역 민족의 정치적 독립과 문화적 독자성, 그리고 개인의 인권을 유린하며 시도된 제국주의이며, 다만 그것은 기독교 전파와 문명화 혹은 개명과 계몽의 이름으로 합리화됐다. 최근의 연구를 살펴보면 제국주의는 “물질적 현상이 아니라 오히려 항상 문화적 과정”이었음이 강조되고 있다.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정책은 경제적 착취와 함께 정치?문화적 단위인 한민족을 영구히 말살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따라서 이들 제국주의국가에 대항해 민족 정체성을 유지하고 그것을 위해 정치적 독립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시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이런 현실에서 식민 상태에 있는 민족의 문화적 정체성 유지와 정치적 독립 추구는 반제국주의 투쟁의 내용이자 목표였다. 정치적 독립과 문화적 정체성이 미비(未備)된 상태에서 경제적 변화는 말 그래도 변화나 성장일 뿐 발전이 될 수는 없다. 따라서 이런 사실들을 근거해 식민지 근대성으로 묶어 인식하는 식민지근대화론은 역사발전을 경제적인 변화로만 초점을 맞춰 보게 되는 치명적인 오류를 발생한다.일제 강점기의 민족 암흑기에 살았던 민족주의 지식인들의 활동은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제국주의의 침탈 속에서 민족주의 정체성을 공고히 하고 정치독립성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더욱 관심을 갖아야 할 필요가 있다.특히 정윤재씨는 이 책에서 일제 강점기에 비타협적 민족주의 지식인으로 대표되는 단재 신채호와 민세 안재홍의 경우를 살펴봄으로써 그들이 제국주의와 민족주의를 어떻게 이해했는지 또 그들이 실제로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살았는지를 검토하고자 하였다. 이로써 식민지 근대화론이 한민족사를 어떻게 왜곡하여 보고 있는지를 알아보았다.신채호(1880~1936)는 일제강점기동안 “今日 大韓民國의 自的地”인바 그것은 곧 국권회복이며 독립이요 자유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그는 다른 모든 운동은 이러한 목적을 이루는 방법이라고 주장하고 “歷史가 有하면 其國이 必興하고 歷史가 卽無하면 亡國에 必至한다”는 자신의 역사관에 따라 국사교육을 통한 애국심 계몽사업과 강렬한 정신적 자주의식에 기반한 전투적 항일활동에 일생동안 여일(如一)하게 매진했다. 이런 역사관은 그의 인생 전반기의 “독사신론”과 후반기의 “조선사”총론과 “조선역사상 일천년 대사건”으로 대표될 수 있다.그는 국민들의 애국심 및 국가 관념의 빈곤과 함께 지도자들의 경영능력 빈곤을 비판하였다. 애국심을 기르기 위해 그는 진아(眞我), 곧 대아(大我)의 의식, 정신, 목표, 의지의 중요성을 피력했다. 여기서 대아란 “각 부문에서 역사적 사명감을 가지고 역사와 자연에 일체가 되어 국권회복에 헌신하는 애국적 주체세력”이며 이러한 대아들의 주체세력이 형성되면 “시대상황을 능동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그는 정신상 국가(국가를 지켜내고 발전시킬 의지의 총합)와 형식상 국가(국가유지의 각종 수단의 총합)를 구분하는 국가관을 바탕으로 무정부주의 전략 및 민중 직접혁명론 그리고 부강하고 자유로운 입헌 공화제 국가라는 민족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함으로써 일제하 엘리트와 민중에게 중요한 지적 리더쉽을 발휘했다.단재를 존경하던 민세 역시 비타협 민족운동가로서 해방까지 일제에 끝까지 저항했던 대표적 언론인 및 역사학자였다. 6?10만세운동 사건이 일어나자 당시 세계에서 유태인들의 디아스포라와 조선민족의 식민 상태를 “20세기 인류의 일대하자”라고 비판하면서 조선민중은 “깨어서 결심할 바를 알고, 결심하여 지속할 바를 지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일제에 의한 민족파멸에 대처하고 민족정기를 보존하기 위해 항일 언론 및 문화운동을 지속해 나간다. 그 후 좌?우익의 통합의 필요성을 깨닫고 신간회를 창립하여 민족대단결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으나 신간회는 공산주의자들의 방해공작과 일제의 탄압으로 결국 해체된다. 그 후 민세는 민족역사의 연구와 저술을 통해 민족자주 정신을 고양하기 위한 의도에서 고대사 연구에 매진하고 조선어학회의 한글 보존을 통한 민족의식 고취에 일익을 담당하고자 하여 고전 교열 및 한글사전 편찬에 매진하게 된다. 그동안 민세는 일경에 의해 아홉 차례나 구속당하면서도 끝까지 버텨 몇 안 되는 비협력 지도인물로 저항하다 광복을 맞게 된다.식민지 근대화론의 주된 논지는 식민지 시기동안 경제적 변화와 성장, 인구이동 및 증가, 직업의 다양화, 그리고 사회계층의 유동성 증가 같은 사회?경제적 변화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이러한 식민지 근대화론은 그 당시 여러 변화양상의 수치상 보여 지는 결과에 중시함으로 인해 그 안에 내재적인 면을 간과하게 되는 필연적인 오류를 발생시킨다. 즉 당시 한민족의 어떤 상황에서 제국주의에 의해 수탈을 겪게 되는지에 대한 내용들은 간과하게 된다. 물론 식민지 근대화론 주장이 그 당시의 생활상을 다시 그려내는데 어느 정도 기여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제국주의의 정치?경제적 수탈과정에 있었다. 즉 제국주의 국가 안에서 그 국내시장으로서의 수요의 영역을 초과하여 다른 식민지를 개척함으로 인해 그들의 경제적인 이기심을 충족하려는 시기였다. 특히 일본제국주의는 경제적인 목적뿐만 아니라 사회?민족적인 수탈인 민족말살정책을 실시하여 한민족의 뿌리라고 말할 수 있는 한글, 국사 심지어 그들의 이름마저 송두리째 빼앗으려고 하였다.
    독후감/창작| 2005.05.13| 3페이지| 1,000원| 조회(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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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평] 개발독재와 빈부격차 평가B괜찮아요
    개발독재와 빈부격차IMF가 우리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친 후 매년 “박정희 향수(鄕愁)”가 점점 증가하고 있다. 이는 고도의 경제성장과 민주투사 출신 정치인들의 기대 이하의 성적이라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이정우씨는 이 글에서 박정희식의 개발독재가 발전?민주주의?분배의 삼각관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알아보고자 하였다.독재와 분배의 상관관계에 대한 이론적 연구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대체적으로 독재는 분배를 악화시킬 것이라는 예측이다. 이는 대부분의 개발독재국가에서 ‘선성장 후분배(先成長 後分配)’의 개발철학으로 분배보다는 성장을 중요시하였기 때문이다. 또 다른 관점으로는 독재정권이 들어서는 것이 경제성장에 도움이 된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의 근거는 투자율을 높여야 경제개발이 가능하게 되는데 이 투자율을 높이는데 독재정권이 필요하다는 시각이다.이런 경험의 대표적 사례로 스탈린 치하의 소련이 평가되고 있다. 1920~40년의 20년 동안 가혹한 소비억제로 인해 혁명 이후 굶어죽거나 정권의 박해로 사망한 사람들의 숫자가 엄청나다. 그러면 소련에서의 독재가 분배에는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스탈린은 평등주의를 반맑스주의적인 것으로 비판하며 각자 일한 성과에 따라 분배받을 것을 주장하여 임금격차가 심해지고 불평등도 확대되었다. 이런 불평등은 스탈린 이후 점점 축소하게 되는데 이는 정치체제의 변동과 관련을 맺으며 이루어진 것이다. 심지어 통계조차 스탈린 치하에서 억압을 받았지만 이도 민주화와 더불어 분배가 개선된 사례이다.스탈린 모델과 박정희 모델은 경제개발 모델로서 비슷한 점이 많다. 먼저 고투자를 특징으로 한다는 것 그리고 부국강병정책과 대기업 중심의 경제이다. 마지막으로 경제의 양적성장에 치중한 나머지 질적 발전엔 소홀히 하였다는 점이다.우리는 독재로 인해 고도성장을 얻었지만 그에 비해 잃은 점이 너무나 많다. 독재적 관행, 재벌 중심 경제, 주입식 교육, 물질만능사회, 부정부패, 환경악화 등이 바로 그것이다.즉 이정우씨는 비록 박정희 정권이 고도의 성장을 이루어 냈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그로 인해 이 사회에 악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주장에 동조한다. 박정희 정권이 1960~70년대 해냈던 기적들, 즉 고도의 경제성장과 경제개발 5개년개획 등은 현재에 사는 사람들까지도 그 시대의 향수를 기억하게 할 만큼 우리의 생활을 풍족하게 해주었다. 아마 이 시대를 사는 사람이라도 그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정우씨가 말한 악영향, 즉 독재적 관행, 재벌 중심 경제, 주입식 교육, 물질만능사회, 부정부패, 환경악화 등은 현재 우리사회가 가지고 있는 모든 사회문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얼마 전 노무현대통령이 재벌총수들을 만나 경제 성장을 부탁한 점, 우리나라 교육이 국제경쟁력을 갖지 못한다고 비판받는 점, 끊임없는 비리문제와 같은 부정부패 등은 안락한 생활을 만들어준 박정희 시대의 씁쓸한 뒷면을 밝혀주는 명확한 사례임에 틀림없을 것이다.다음으로 이정우씨는 박정희 모델이 이루어낸 것이 과연 성장인지 발전이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비록 신고전파 경제학을 신봉하는 경제학자들은 경제발전이란 용어와 경제성장이란 용어를 같은 뜻으로 사용하고 있지만 여타의 많은 경제학자들은 의견을 달리한다. 즉 경제발전은 경제성장에 덧붙여 무언가의 변화(플러스알파)가 수반되는 경우를 의미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중 이정우씨는 최근에 제시되고 있는 쎈(Amartya Sen)의 ‘자유로서의 발전’이란 개념이 주목되고 있다. 쎈은 자유의 신장은 그 자체가 하나의 주요 목적일 뿐 아니라 발전의 주요 수단이라고 주장한다. 즉 각종 부자유를 제거하고 자유가 보장되는 체제 하에서만 개인이 경제성장과 생산 활동을 통해 개인적?사회적 발전을 도모할 수 있다고 본다.이런 관점에서 한국의 경제적 성과를 평가해보자. 쎈에 의하면 인간에게 최소한의 자유도 주어지지 않은 상태에서의 소득증가는 ‘발전’이 아니다. 박정희 시대에 민주화투쟁인사에게 가해진 온갖 고초와 신산, 심지어 자신의 심복이었던 한때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형욱도 이런 독재의 폐단을 말하고 있다. 유신시대의 한국은 나라 전체가 거대한 공포의 수용소로 변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었다. 이런 시기에 과연 경제 건설의 속도가 빨랐다고 한들 그것이 경제발전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1961~79년 개발독재 시절의 급속한 경제성장은 경제발전이 아니라 단순한 양적 성장이라고 정의해야 할 것이다.이정우씨는 경제성장이냐 발전이냐란 질문을 쎈의 ‘자유로서의 발전’이란 개념에 주목해 박정희 시대는 양적 성장을 했을 뿐이라고 정의한다. 성장이란 위에서도 말했듯이 양적인 성장 즉 GDP, GOP등의 경제수치에 의해 보여 지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현재도 언제쯤 GDP가 2만 달러를 넘어서게 되는가에 대해 여러 논의가 있다. 그러나 결코 그 경제수치가 높다고 해서 우리 경제가 잘 발전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논의는 분배라는 측면과 개인의 자유라는 측면을 잘 적용하여야 할 것이다.세 번째로 이정우씨는 개발독재가 분배에 미친 영향을 알아보고자 한다.먼저 임금수준 및 격차에 대해 검토해 볼 때 특히 주목할 것은 임금과 노동생산성과의 비교이다. 즉 실질임금이 실질 노동생산성 증가율보다 빠르게 증가한다면 노동자들에게 돌아가는 소득 몫은 증가할 것이고, 반대의 경우에는 소득 몫이 감소할 것이다. 1970년대의 임금과 노동생산성을 살펴보면 실질임금의 증가폭이 노동생산성 증가폭을 따라가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즉 노동소득 분배율이 하락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소득분배를 악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이런 현상은 외국과 비교해보면 훨씬 열악한 상황임을 알 수 있다. 즉 선진국과 비교할 때 그 격차가 두 배 가량 벌어져있음을 알 수 있고 이를 다시 말하면 한국노동자들이 받아야 할 수준의 반밖에 못 받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각국의 노동 분배율을 비교해 봄으로 확인할 수 있는데 1970년 미국, 캐나다와 유럽은 모두 40%가 넘는 반면 한국은 25%로 현격한 차이가 있다. 이 현상의 이유로 노동시장의 수요독점, 노동공급의 과잉과 낮은 노동력 이동성, 정부의 저곡가정책으로 인한 저임금, 임금인상을 가격인상으로 전가하여 실질임금 상승을 억제하는 기업의 독과점력, 그리고 노동조합운동에 대한 규제를 들고 있다. 이 주제와 관련해 한 나라의 민주주의 발전수준이 임금수준의 결정에 매우 중요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어 주목을 끌고 있다. 이를 주장한 로드릭은 그 이유로 네 가지를 들고 있다. 첫째, 민주주의체제는 법의 지배를 관철하기가 쉬우며, 이것은 노동 측의 교섭력을 강화한다는 점, 둘째 민주주의는 정치적 불안정과 단절에 빠질 확률이 낮으며 따라서 노동 측에 높은 유보임금을 보장하고, 따라서 임금을 높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셋째로 민주주의는 노조결성과 단체협약의 자유를 신장시켜 노동 측의 교섭력을 높인다는 점. 마지막으로 정치참여와 경쟁의 증가는 표를 의식한 각 정당에서 노동자의 이익에 한층 부합하는 법률 또는 제도의 도입을 가져와서 노동자의 교섭력 혹은 유보임금을 높여준다는 이유를 들고 있다. 이런 결과를 한국의 1960~70년대에 대입해보면 정치적으로 민주주의가 억압되고 있다는 사실이 노동자에 대한 보상을 낮추는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었다는 것을 추리할 수 있다. 한편 노동자 상호간에도 상당한 임금불평등이 발견된다. 즉 생산직의 홀대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독재 시기 노동자 특히 생산직 노동자를 천시하고 자본가들만 우대했던 그 이데올로기를 나타내는 것이라 할 것이다.이제 시야를 넓혀서 소득분배문제를 보기로 하자. 소득분배에 대한 연구에 대해 살펴보면 먼저 대표적으로 주학중의 연구로 이로 살펴보면 농가가 상대적으로 평등하고 도시자영업자 및 경영자 가구는 상대적으로 가장 불평등할 뿐만 아니라 1976년 이후 불평등도가 크게 늘어났다. 그러나 이 주장은 고소득층에 대한 자료를 간접적으로밖에 추측할 수 없다는 점이 약점으로 남아 있다. 이 시기의 소득분배를 분배적 정의론의 관점에 입각하여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도 있다. 이로 살펴볼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재벌문제이다. 소위 정경유착으로 축적된 부가 적지 않다는 것이 문제가 된다. 그들이 얻은 부가 정당성이 있는가 하는 의문뿐만 아니라 가족기업형태상의 기업경영 또한 국민들의 상대적 박탈감을 더 크게 하고 있다. 또한 대기업의 경제력 집중, 기업 내의 불균등한 노사관계, 열악한 작업 및 주거환경, 장시간 노동과 높은 산업 재해율 등의 복합적 요인으로 인해 불평등을 높게 만든다는 의견도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또 하나 불로소득의 팽창이 실제로 한국의 불평등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독후감/창작| 2005.05.13| 4페이지| 1,000원| 조회(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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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평] 베트남 파병과 병영국가의 길 평가A+최고예요
    베트남 파병과 병영국가의 길국사학과 200014320 이용학사회경제사 Ⅱ우리나라 현대사에서 1964년 9월 이동 외과병원과 태권도 교관단의 파견당시부터 1973년 3월 주월 한국군사령부의 철수에 이르기까지의 10년은 대단히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 시기였다.한홍구씨의 이 글은 베트남전쟁이 군사적으로 적극 개입한 한국에 어떤 영향을 미쳤으며, 박정희 정권은 전쟁 수행시 국민들을 어떻게 통제하고 동원하였는가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박정희는 1961년 5월 16일 군사반란을 일으켜, 선거로 선출된 정통성 있는 민주정부를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했다. 때문에 박정희 정권은 필연적으로 얻을 수 없는 민주적 정통성 대신 경제발전을 들고 나와 대중적 지지를 창출하려 했다. 또한 출발부터 괴롭힌 또 다른 문제는 반란핵심인물의 좌익경력이었다. 그는 그와 관련되어 반공을 국시(國是)로 한다는 것을 혁명공약의 첫머리에 내세우게 되었다. 그의 좌익경력을 의심하는 미국의 신임을 얻는 데 전력을 다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이는 한국군의 베트남파병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또한 박정희 정권은 이승만 과는 달리 미국의 한일국교정상화 요구를 받아들이게 된다. 이는 미국의 압력과 경제발전 추진이라는 두 가지 요인이 작용하여 이루어진 일이었다. 한편 박정희는 미군의 감군 압력이라는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1960년대 전반까지만 해도 아직 박정희의 군부에 대한 장악력은 확고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도 베트남파병에 중대하게 작용하였다. 즉 박정희 정권의 명백한 필요에 의해 개발되고 적극적으로 추진된 정책의 결과로 보여야 할 것이다.1964년 말부터 신문은 정부가 모종의 중대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는 보도를 내놓았다. 이는 해가 바뀌어 비전투부대의 파병 안으로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흥미롭게 당시 여당인 공화당 내에서는 초기에는 신중론 또는 반대론이 우세한 반면 야당 진영에서는 원칙적인 찬성론이 우세했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두 가지로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이들 비둘기부대 2천여 명의 파병은 곧 전투부대의 파병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였고, 다른 하나는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이 미국의 ‘간곡한 요청’에 의한 것이냐, 아니면 박정희 정권이 자청한 것이냐는 것이냐였다. 이 안은 결국 브라운 대사의 야당설득으로 인하여 통과한다. 이 때 박정희는 「월남파병에 즈음한 담화문」을 발표했다. 그는 베트남 파병의 논거를 세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 전아시아의 평화와 자유를 수호하기 위한 집단안전보장에 대한 도의적 책임의 일환이라는 점, 둘째로 자유월남에 대한 공산침략은 한국의 안전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며 우리의 월남 지원은 바로 우리의 간접적 국가방위를 수행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과거 16개국 자유우방의 지원으로 공산침략군을 격퇴할 수 있었던 우리는 우리의 눈앞에서 한 우방이 공산침략에 희생되는 것을 좌시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전투부대의 파견은 박정희 정권으로서도 부담스러운 일이었으나 5?16 군사반란 이후 대미관계의 개선을 위해 베트남 파병을 카드로 써왔기 때문에 발을 뺄 수도 없는 실정이었다. 국회에 3차 파병 동의안이 제출된 당시에는 한일기본조약의 비준 문제를 둘러싸고 여야간 첨예한 대결이 벌어지고 있던 상황이었다. 3차 파병동의안에 대한 반대여론이 강하게 제기된 이유는 당시 한국이 전투부대 파견을 통해 경제적으로 얻을 수 있는 이익이 별로 없을 것이라는 외신의 보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미국대사 브라운의 막후접촉으로 인하여 야당이 불참한 가운데 통과되었다. 그 후로 2만 명의 추가파견문제가 당장 다음달인 11월 말부터 논의되었다. 이에 대해 국민들은 “엄청난 무관심”을 보이고 있었고 파병 안에 반대하는 의원들도 “깨끗이 체념한 듯한 인상”이며, 남아있는 국회의원들도 “국민보다 더한 무관심”에 빠져있었다. 이런 체념의 태도는 적극적인 파병반대론에 중대한 장애물이 되었다. 4차 파병 과정에서 반대론은 뜻밖에 여성계 쪽에서 제기되었다. 한국부인회는 미국수준의 “처우개선이 완전 보장되지 않는 한 월남전선에 국군증파는 절대로 반대한다”고 1천 5백만 한국여성의 이름으로 성명을 발표했다. 당시 한국군의 월급은 심지어 자기 나라 땅에서 싸우는 남베트남 정부군보다도 못한 보수를 받는 형편없는 조건이었던 것이다.박정희 정권이 파병을 하면서 내세운 명분은 대체로 보은론, 제2전선론, 국위 선양론 세 가지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한국전쟁 당시 한국을 도와준 ‘자유우방 16개국’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우리도 어려움에 처한 남베트남을 도와야 한다는 보은론을 들고 나왔다. 그러나 이는 비둘기부대 2천여 명의 파견으로 우리는 우리의 국력이나 안보환경을 고려할 때 할 만큼 했다는 분위기가 고조됨으로 인해 설득력은 떨어졌다. 또 박정희 정권이 내세운 제 2전선론은 당시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던 냉전의 논리 가운데 하나인 도미노이론의 한국판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논리에 입각하여 박정희는 “자유월남의 반공전선은 우리의 휴전선과 바로 직결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고, 나아가 베트남은 한국전의 제 2전선이라는 표현까지 사용하게 된다. 이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점은 박정희가 공산중국을 비난하면서 이를 파병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논거로 활용했다는 점이다. 즉 한국전쟁 당시에 싸웠던 중공과 베트남 전에서 다시 맞붙게 되는 것이라고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 논거는 박정희 정권 스스로 폐기하여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 ‘국위 선양론’은 파병 첫 단계부터 즐겨 사용한 논리로 파병장병을 “새 역사를 창조하려는 우리 민족의 전위”라고 찬사하였다. 그러나 이 세 가지 논거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1967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야당의 윤보선 후보에 대항하여 베트남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하던 논리들을 제쳐두고 미군 철수론을 들고 나왔다. 즉 ‘우리가 파병을 하지 않으면 미군이 철수할 텐데 이는 다시 공산주의자들이 침략할 수 있는 찬스를 제공하고 경제적으로도 위축될 가능성이 있다’고 하며 “다 알면서 야당은 생떼를 써서 정부를 곤란하게 한다든지 악담을 하고 있다”고 하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야당 전체가 베트남 파병을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또한 베트남 전에서 한국군이 받는 전투수당이 형편없다고 논란이 일기도 했으나 이는 한국 형편에서 적은 돈은 아니었다. 이와 더불어 경부고속도로가 건설되고 차관이 들어옴에 따라 베트남 전쟁의 본질을 물을 기회를 앗아가게 되었다. 베트남 전에 대한 국민들의 반대가 낮았던 이유의 하나는 베트남 전에서 한국군의 희생자가 적다고 잘못 알려진 때문이었다. 1965년 이후 한국군의 사망자수가 300명을 넘어서면서부터 신문에서 사라지고 한국군이 거둔 혁혁한 전과들만 대서특필되었다.베트남 파병의 성과로 가장 많이 거론된 것은 이른바 ‘베트남 특수’이다. 그러나 당시 한국경제의 고도성장을 가능하게 한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으며, 베트남 파병으로 비롯된 베트남 특수가 유일한 독립변수는 아니었다. 베트남 특수의 최대의 수혜자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일본이었다. 베트남 전에서 얻은 경제적 소득은 겨우 20여명의 병력을 파견한 대만이 얻은 소득을 약간 상회하는 것이었다. 베트남 파병으로 가장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곳은 군부였다. 끊임없는 감군압력에서 일거에 벗어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또한 베트남 전에 파병된 장교나 하사관들이 부를 부당히 축적하여 1960년대 전반기에 많이 완화되었던 군 내부의 부정부패는 다시 성행하게 되었다. 이는 군 내부의 파벌과 사조직의 형성을 조장하여 이들은 박정희 사망 이후 두 차례의 군사쿠데타를 통해 정치권력을 장악했다. 베트남 파병이 한국사회에 미친 가장 중요한 영향은 박정희 정권이 미국과 군부의 확고한 지지를 바탕으로 독재 권력을 행사하면서 한국사회 전체를 병영국가로 만들어갔다는 점이다. 한국이 베트남 전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한 1965년은 한미관계에서 하나의 전환점을 이룬 해였다. 존슨정부는 박정희의 통치능력에 대해 찬사를 보내기 시작했고 한국의 국내문제에 관한 압력을 중단했다. 또한 박정희 정권이 3선 개헌과 유신체제의 수립 등 독재 권력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미국의 별다른 제재나 간섭을 받지 않았다. 즉 한국군은 베트남 참전으로 박정희 정권은 미국의 지지를 얻어 이를 독재권력 강화에 이용한 것이다.
    독후감/창작| 2005.05.13| 3페이지| 1,000원| 조회(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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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평] 식민지 근대화과정과 아전
    식민지 근대화과정과 아전박현모씨는 이 책에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의 역사적 변동기에 아전(衙前)계층의 사회적 위상과 역할변화를 살펴보고 있다. 조선왕조에서 일제시대로 넘어가는 이 시기의 아전에 관심을 갖는 것은 하위 관료층의 변화에 대한 적응력 및 그것의 정치적 결과 때문이다. 조선후기와 일제시대의 단절성보다는 연속성을 강조하는 이런 입장은 ‘조선후기 아전계층의 신분상승 시도와 좌절’ → ‘국가권력의 실질적 집행자라는 지위를 이용한 수탈적 치부’ → ‘근대식 교육의 적극적 수용’ → ‘일제 식민화에 대한 협력과 이를 통한 신분상승’ 이라는 일련의 가설에 기초해 있다. 그러나 이 가설은 충분히 논리성과 개연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충분한 사례를 입증하지 못해 ‘가설’수준에 머물러 있다. 본 연구는 이런 관점에서 황현(黃玹, 1855~1910)의 『매천야록』(梅泉野錄)과 유제양(柳濟陽, 1846~1922)?유형업(柳瑩業, 1886~1944)의 『구례 유씨가의 생활일기〔是言?結語〕』를 탐색하려고 한다. 이글에서는 먼저 조선후기와 한말 아전계층의 사회적 위상과 그들의 신분상승 시도를 고찰하고, 조선왕조 붕괴와 해체과정에서 나타난 이들의 대응양상을 살핀 다음, 대한제국기와 일제시대에 이루어진 토지조사를 둘러싼 아전계층의 역할을 차례로 살펴보고자 한다.조선조 정치에서 아전의 직책은 법과 제도상으로 볼 때 신분이 낮고 경제적 특권도 없는 미관말직에 해당된다. 그러나 아전의 권한과 활동영역은 매우 넓어 대민 영향력은 수령의 그것을 훨씬 뛰어넘었다. 조선초기에는 관의 기강이 어느 정도 잡혀 있었지만 19세기의 세도정치기에 들어서자 중앙정부의 감시 및 통제가 약화되어 수령과 아령의 착취 역시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던 것으로 보인다. 아전이 이렇게 변질된 이유에는 네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로 중앙정부의 수령에 대한 통제약화라는 점, 둘째로 아전 자체의 신분적 조건과 물질적 가치지향, 셋째 조선왕조의 불완전한 봉급체계 넷째, 이러한 제도적 조건에 더해 조선후기에 시행된 공동납(共同納)이라는 조세제도는 아전계층의 재량권을 확대시키는 동시에 부패의 소지를 키워 놓았다. 이렇게 성장한 아전은 심지어 조선 후기에 수령이나 관찰사의 통제를 넘어서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이들은 이러한 세력을 바탕으로 자신들을 제약하고 있던 신분적 구속을 넘어서려고 했다. 아전 출신 지식인들의 ‘통청운동’(通淸運動)이 그것이다. 이는 사회질서가 변하고 사회 저변에 평등의식이 제고되면서 유교적 지식수준과 경제력에 걸맞는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려는 운동이었다. 그러나 아전계층의 통청운동은 조선조의 견고한 사회계층 구조에 부딪혀 좌절되었다. 결국 이들은 민란과 외세의 침투 등 정치?사회적 혼란기를 틈타 군공을 세우거나 권세가에게 뇌물을 바치는 등 개별적으로 신분상승을 도모할 수밖에 없었다. 아전계층이 실질적으로 신분상승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개항 이후의 근대식 교육을 통해서였다. 근대식 교육을 통해 일제의 식민지화 작업에 필요한 조건을 갖추게 됐는데, 특히 일제시대 초기에 군수, 헌병보조원, 지방의원 등을 거쳐 사회의 지배층으로 대거 진입한 것이다.아전계층은 일제의 식민지화 과정을 어떻게 생각하고 또 어떻게 대응했는가. 여기서는 동학교도와 의병과 같이 일제의 식민지과정에 저항했던 세력에 대한 그들의 태도를 고찰해보고자 한다. 우선 대체로 아전은 ‘반(反)동학교도, 친(親)의병’의 성향을 보인다. 동학교도나 민란집단에 대한 아전들의 적대적인 태도는 기본적으로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1910년 이전에는 대개의 아전은 일본의 정치적 개입과 경제적 침탈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양반이 중심이 되어서 일으킨 의병을 지지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런 성향은 양반가문의 지주들에게서도 보인다. 그런데 일본이 점차 조선을 식민지화하는 것에 관련해서는 다소 차이가 있다. 즉 유제양이 “나는 좋지 않은 때에 태어났네”라고 하여 ‘불행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데 비해, 유형업은 일본의 지배를 대세로 보고 순응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유제양은 일본의 지배를 믿을 만한 정치가의 부재가 망국의 가장 큰 원인으로 보았다. 그러나 손자 유형업은 조부보다는 ‘현실적’이었다. 유형업은 시국에 대해 가급적 논평을 최소화하고 현실을 예의주시하는데 이는 일본의 강력한 힘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즉 유형업은 막강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지닌 일본과 그에 저항하는 항일의병을 ‘염려스런 마음’으로 지켜보면서 시대의 대세를 따른 것이다. 이런 현실인식은 토지측량과 같은 제도변화에 재빠르게 대응한 것에서 잘 나타난다. 한말?일제 초기에 토지측량은 1900년을 전후한 ‘광무양전’과 1910~1918년 사이의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실시되었다. 러일전쟁 발발과 긴축재정의 필요성 등으로 중단된 양전사업은 한일합방 이후 ‘토지조사사업’으로 확대 실시되었다. 즉 토지조사사업은 광무양전의 연속선상에서 파악되고 있었다. 토지측량시 아전은 일본인과 일을 준비하고 있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을미개혁의 제도개혁과 1907년 아전의 주요한 읍권(邑權)인 ‘경찰권’과 ‘조세권’이 박탈되었다. 그런데 통감부는 미수?미납의 세금을 파악하고 은루(隱漏)된 결호(結戶)를 찾아내기 위해 재직하고 있거나 전임의 아전계층을 이용했다. 통감부는 이 과정에서 기존의 징세관련 서류를 압수하는 조치를 취하게 된다. 1910년 6월 ‘결수연명부완제계획요령’(結數連名簿完製計劃要領)이 발표되는데 그 주요 특징은 면을 단위로 지주가 신고하되 부득이한 경우 소작인 또는 이장?동장?면장이 대신하며, 지주의 주소와 성명의 기재에 특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 유형업 등은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이런 적극적인 참여로 인해 유형업은 집단적 실력행사나 재력을 동원한 소송을 통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 이춘성과의 소송에서 이기게 되어 재산이 자못 늘게 된다. 여기서 당시로서는 매우 생소한 서류 즉 인감, 인감증명서, 매도증명서 등이 새롭게 등장하여 근대적 토지제도가 도입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독후감/창작| 2005.05.13| 3페이지| 1,000원| 조회(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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