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1. 테니스의 역사1.1 서양의 테니스......21.2 한국의 테니스......22. 테니스 시설2.1 코트의 종류.........33. 프로테니스 대회의 종류.........4~54. 테니스 경기 시 지켜야 할 예절4.1 선수의 예절.........54.2 심판의 예절.........54.3 관중의 예절.........55. 테니스 룰과 규칙.5~66. 경기 진행과 점수 계산6.1 경기 진행............66.2 점수 계산...의 발생 시부터 오늘날까지 일관된 경기 방식은 볼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볼을 치는 경기라는 것이다.또한 12세기 초부터 16세기까지 프랑스에서 가장 유명했던 이 경기는 12세기에 프랑스 수도원에서 고안되었다고 하며 ?쥬우ㆍ드ㆍ포옴?이라고 불렀다. 포옴(Paume)이란 프랑스어로 손바닥을 말하며 이것이 13세기경 프랑스 귀족과 성직자들 사이에서 쥬드폼이라는 손바닥 게임으로 발전했다. 이러한 ?쥬우ㆍ드ㆍ포옴? 경기가 테니스라고 불리게 된 것은 프랑스어로 볼을 치라고 하는 테네(tennez)라고 하는 발음에서 1360년경 영국인들이 자기 나라에 테니스라고 하는 명칭으로 조어하여 소개할 때부터라고 한다.?쥬우ㆍ드ㆍ포옴?은 손바닥으로 볼을 되받아 치는 경기이기 때문에 참가자들은 너무 손이 아파 장갑을 끼고 경기를 하던 중 마침내 손 대신에 다른 타구 도구를 찾게 되었으며 15세기 후반에 라켓을 고안하여 16세기경에는 라켓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 경기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 받는 스포츠로써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었으며 1596년 파리의 인구 30만명에 코트는 250여개가 있었다고 한다. 아무튼 테니스의 정식 명칭은 론 테니스라고 하며 빅토리아 왕조시대의 영국에서 시작되었다. 1874년 영국사람 윙필드는 일정한 코트와 네트를 만들었으며 1875년에는 메릴리본 크리켓 클럽에서 규칙을 통일함으로써 근대 스포츠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이어서 1877년에는 제 1회 영국 선수권 대회가 윔블던에서 열려 지금까지도 가장 권위 있는 대회로 이어져오고 있다. 1896년 제 1회 아테네 올림픽 대회에서 정식 경기 종목으로 채택되었으나, 프로 선수의 참가자 문제가 되어 1928년 제 9회 암스테르담 올림픽 대회부터 경기 종목에서 제외되었다가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다시 정식 종목으로 부활되었다.1.2 한국의 테니스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테니스 경기가 시작된 것은 1900년부터였다. 1908년 탁지부(지금의 재정 경제부) 관리들이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회동구락부를 조직한 뒤 미창동에 테 타구의 스피드는 약해진다. 또한 이 코트에서는 볼 자체의 스피드가 감속되기 때문에 베이스라인에서 스트로크와 패싱을 주로 하는 수비형이 된다. 이 코트의 결점은 항상 롤러로 잘 밀어 정비해 두지 않으면 바닥의 요철이 심해지고 플레이에 지장을 주므로 잘 정비해야 한다.2.1.2 하드 코트이 코트는 콘크리트나 케미칼(화학 섬유질), 아스팔트로 만든 코트다. 이 코트는 표면이 단단해서 바운드 한 후의 타구 스피드가 빨라지므로 보다 빨리, 보다 정확하게 자세를 취하고 있지 않으면 정확한 리턴을 할 수 없다. 한편, 이 코트는 탄력성이 없기 때문에 선수는 발이나 허리, 관절에 많은 부담을 받게 되어 상해에 위험이 있다. 이 코트의 장점으로는 시공 후 별로 손질하지 않아도 되며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2.1.3 앙투카(붉은 벽돌가루) 코트이 코트는 클레이 코트와 함께 일반적으로 많이 있는 코트인데 소나기가 자주 오는 유럽이나 동남아에서는 클레이 코트의 일종인 앙투카 코트를 쓴다. 이 코트는 붉은 벽돌가루와 흙이 많이 섞여 있기 때문에 비가 온 후 약 한 시간 정도 지나면 경기를 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코트는 클레이 코트 이상으로 탄력성이 있기 때문에 그 만큼 타구는 바운드 한 후에 더 약해지며 리턴이 쉬워진다.2.1.4 론 코트잔디 코트를 말하며 코트면으로는 가장 좋다. 타구에 가해진 스피드와 회전이 바운드 한 뒤에도 계속 걸리기 때문에 플레이어의 기술을 확실하게 발휘할 수 있는 코트이다. 더구나 녹색은 시각적으로도 좋고 풋워크 때의 감각도 최고지만 코트 제작에 드는 비용이 많이 들 뿐만 아니라 유지비도 많이 드는 단점이 있다.2.1.5 카펫 코트옥외에서 테니스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추운 날씨나 지방에서 주로 열린다. 실내 코트에 카페트를 깔고 대회를 치르는 데 잔디 코트 못지않게 볼의 스피드가 난다. 또한 바람이나 태양, 외부 기온에 의한 영향이 없어 자신의 실력을 그대로 보여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주로 봄가을의 유럽에서 실내 카펫 코리시버는 폴트 된 볼을 네트에 넘기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이 경우에는 네트 아 래로 볼이 가도록 한다.⑤ 코트 안에서는 서성거리지 말아야 한다. 일단 코트에 들어가면 차분한 마음으로 기다려야 한다.⑥ 코트를 교대할 때에는 상대편 선수가 먼저 지나가도록 양보하는 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⑦ 랠리 중에 상대방의 방심을 찔렀을 때에는 예의를 표시한다. 랠리 중 상대방이 넘어졌거 나 라켓을 떨어뜨리거나 하여 실점 당했을 때 가볍게 눈인사로 미안함을 표시해야 한다.⑧ 코트에는 운동화를 신고 들어가야 한다.⑨ 어떠한 경기라도 심판관이 내린 판정에는 항상 복종을 해야 한다.⑩ 코트를 교대할 때 혹은 플레이 중에 네트를 넘어가거나 손을 대는 등의 행동은 금물이다. 또한 서브를 넣을 때 상대편 리시버가 충분한 준비를 갖추었는지 살펴야 한다.4.2 심판의 예절① 공정한 마음가짐으로 심판에 임하며 엄격하고 정확한 심판으로 선수들에게 신뢰감을 주 어야 한다.② 정중하고 친절해야 하고 경솔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③ 감정을 억제하고 선수나 관중의 소리에 마음을 쓰지 않는다.④ 시원하고 민첩한 태도를 취하고 우유부단한 태도는 버린다.⑤ 실수했을 경우에도 그 보충은 결코 하지 않는다.⑥ 심판은 타인이나 선수와 사적인 말을 하지 않는다.4.3 관중의 예절플레이어가 코트에 나타났을 때, 그리고 좋은 플레이가 나왔을 때, 시합이 끝났을 때, 박수로서 그들을 격려하고 맞아주어야 한다.5. 테니스 룰과 규칙① 볼은 흰색 또는 노란색이어야 한다.② 라켓은 스트링을 감고 난 뒤의 형태가 전체적으로 균일해야 한다. 라켓 면에는 진동이나 스트링의 마모를 억제하기 위한 합리적인 크기의 부착물이외는 아무 것도 부착할 수 없다.③ 플레이어는 네트를 중심으로 서로 반대쪽에 서고 처음 볼을 치는 사람을 서버, 받는 사람 을 리시버라고 한다.④ 서비스는 네트를 향해서 베이스라인 뒤쪽 센터마크와 사이드라인의 가상 연장선 사이에 두 발을 모두 지면에 붙이고 토스를 하고 라켓과 볼이 닿는 순간 완료한 것으로 본다.⑤ 때④ 볼이 코트에 바운드하기 전에 직접 플레이어 몸에 닿았을 때⑤ 볼이 두 번 바운드하기 전에 라켓으로 리턴하지 못했을 때⑥ 라켓 또는 몸, 옷 등이 네트 포스트, 심판대에 닿거나 이를 넘었을 때⑦ 타구하는 순간 그 볼이 두 번 이상 같은 라켓에 맞았을 때⑧ 손에서 떨어진 라켓으로 리턴 했을 때⑨ 코트 내의 다른 볼 또는 몸에서 떨어진 모자, 손수건 등에 맞아 리턴하지 못했을 때⑩ 라켓이 손에서 벗어나 네트나 상대방 코트에 닿았을 때7. 테니스 기초 기술7.1 그립일반적으로 라켓을 잡는 방법에는 세 가지가 있다. 즉 웨스턴 그립(Western Grip), 컨티넨탈 그립(Continental Grip), 이스턴 그립(Eastern Grip)이 있다.7.1.1 웨스턴 그립통상 연식 정구를 칠 때의 그립 방법으로 포핸드와 백핸드를 같은 면으로 치는 그립을 말한 다. 엄지와 인지의 교차점이 라켓을 똑바로 세웠을 때 2시 방향에 오며 라켓 면이 지면과 평행이 되도록 잡는 그립이다.7.1.1.1 장점첫째 손목이 견고하므로 빠른 볼에 밀리지 않는다. 둘째 순 스핀(forward spin)의 볼을 치기 쉽다. 셋째 팔꿈치의 굴신이 많으므로 강타에 적합하다. 넷째 대각선이므로 깊은 볼을 치는데 유리하다. 다섯째 드라이브에 유리하고 높은 볼에 유리하다.7.1.1.2 단점첫째 체력 소모가 많다. 둘째 다양한 플레이를 할 수 없고 단순하다. 셋째 그립이 두꺼우므로 포핸드 쪽으로 길고 낮은 볼에 아주 약하다. 넷째 몸 가까이에서 쳐야 함으로 항상 볼에 접근해야만 한다. 다섯째 백핸드 스트로크와 발리에 약하다.7.1.2 컨티넨탈 그립테니스 그립 가운데 가장 최초로 발달, 보급이 된 방법으로 포핸드나 백핸드시 그립의 변화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이 그립은 라켓을 코트 면과 직각으로 세운 후 이것을 위로부터 잡되 엄지와 인지의 교차점이 왼쪽에서 첫 번째 모서리에 오도록 하여 꽉 잡는 것으로 이때 라켓을 잡은 팔과 라켓 사이에 V자형의 각도가 생긴다.7.1.2.1 장점첫째 옆으로 뛰어가서 .
1. 유교의 역사와 사상유교의 역사는 공자로부터 시작된 것은 아니다. 공자 이전 수세기 동안 존속해 온 의례제도가 있었고, 공자는 이를 바탕으로 유학을 체계화하여 새로운 것을 알게 한 대학자이었다. 그리고 공자 이후 맹자와 순자를 거치면서 집대성된 고대 유학이 한국에 전해졌다. 따라서 유교의 역사와 사상을 알기 위해서는 중국의 공자와 맹자 그리고 순자의 생애와 사상을 먼저 살피고, 후대에 이르러 성리학, 즉 신유학으로 발전된 과정을 알아보아야 한다.가. 공자의 생애와 기본 사상①생애은(殷)왕족의 혈통을 이어 춘추시대 말기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제(齊)나라와의 싸움에서 군공(軍功)을 세운 부장(部將)이었으나, 공자가 3세 때 별세하여 빈곤 속에서 자랐다. 노나라의 창시자로 주왕조(周王朝) 건국의 공신이기도 했던 주공(周公)을 흠모하여 그 전통적 문화습득에 노력했으며, 수양을 쌓아 점차 유명해졌다. 처음에는 말단 관리였으나, 50세가 지나서 노나라의 정공(定公)에게 중용(重用)되어, 정치가로서의 탁월한 수완을 발휘하였다. 그의 계획은 노나라의 실력자인 3중신의 세력을 눌러 공실(公室)의 권력을 회복하고, 주공의 정신을 살린 질서있는 문화국가를 건설하려는 것이었다. 그의 계획이 드러나 BC 497년, 56세 때 실각하고 그 후 14년간 문하생들을 데리고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유세(遊說)를 계속하며 이상실현을 꾀하였으나, BC 484년, 69세 때 그 불가능함을 깨닫고 고향에 돌아가 제자들의 교육에 전념하였다. 74세때 자공(子貢) ?증삼(曾參) 등 뛰어난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타계하였다.제자는 모두 3,000명이며, 특히 육예(여섯가지 기예)에 통한 문인(門人)이 72명이라고 한다. 그의 언행은 《논어(論語)》를 통해서 전해지고, 그의 사상을 알아보기 위한 확실한 자료도 《논어》밖에 없으며 이는 제자나 제자의 제자들이 기록한 것이지 공자 자신의 저술은 아니다. 오경(五經)을 편찬하였다고 전하나, 이는 교육목적에 따라서 《시경(詩經)》 《서경(書經)》 등의 고전을 정리했던 것으로 생각된다.②사상춘추 말기, 주나라의 봉건질서가 쇠퇴하여 사회적 혼란이 심해지자, 공자는 주왕조 초의 제도로 복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위정자는 덕이 있어야 하며 도덕과 예의에 의한 교화가 이상적인 지배방법이라 생각했다. 이러한 사상의 중심에 놓인 것이 인(仁)이다. 공자는 최고의 덕을 인이라고 보고 인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 이라고 정의했다. 그리스도교의 사랑이나 불교의 자비와는 다른, 부모형제에 대한 골육의 애정 곧 효제(孝悌)를 중심으로 하여 타인에게도 미친다는 사상이다. 모든 사람이 인덕(仁德)을 지향하고, 인덕을 갖춘 사람만이 정치적으로 높은 지위에 앉아 인애(仁愛)의 정치를 한다면, 세계의 질서도 안정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그 수양을 위해 부모와 연장자를 공손하게 모시는 효제의 실천을 가르치고, 이를 인의 출발점으로 삼았으며, 또 충(忠) 즉, 성심을 중히 여겨, 그 옳고 곧은 발로인 신(信)과 서(恕)의 덕을 존중했는데, 이러한 내면성(內面性)을 중시하고 전승(傳承)한 것이 증자(曾子) 일파의 문인이다. 그러나 공자는 또한 인의 실천을 위해서는 예(禮)라는 형식을 밟을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예란 전통적 ?관습적 형식이며, 사회규범으로서의 성격을 가진다. 유교에서 전통주의를 존중하고 형식을 존중하는 것은 바로 이 점에 입각한 것이며, 예라는 형식에 따름으로써 인의 사회성과 객관성이 확실해진 것이다. 이처럼 공자의 사상은 사회적 ?정치적 인간을 위한 도덕이 중심을 이루고 있는데, 그 보편성을 보증하는 것으로서 하늘의 존재도 생각하고 있었다. 공자로서는 하늘이 뜨거운 종교적 심정으로 받들어지는 불가지(不可知)의 존재였지만, 이는 인간적인 활동을 지원하는 신(神)일지언정, 인간을 압박하는 신은 아니었다. 공자의 사상은 어디까지나 인간중심주의였다고 할 수 있다.
공자의 생애공자는 본명이 구(丘)요, 字는 중니(仲尼)이다. 그 先代는 宋나라 사람이다. 노나라 양왕 22년(B.C 551) 경술년 11월 노나라에서 출생하였다.공자는 아이가 되어 장난할 때에 항상 俎豆를 진설하며 예를 행하는 용모를 베풀었었다. 장성하여 季吏(창 고관리자)가 되어서는 料量을 平하게 하시고, 司職吏(축산담당자)가 되어서는 가축이 번식하였다.昭公 25년(B.C 517) 갑신은 공자 나이 35세였는데, 소공이 제나라로 달아나 노나라가 혼란하니, 공자께서는 이에 제나 라로 가시어 高昭子의 가신이 되어서 景公에 통하였다. 경공이 尼谿의 토지로 공자를 봉해 주고자 하였으나, 晏영이 불가하다 하니, 경공이 의혹하였다. 공자는 마침내 제나라를 떠나 노나라로 돌아왔다.定公 元年 임진은 공자 나이 43세였는데, 계씨가 강하여 참람하고, 그의 가신인 陽虎가 난을 일으켜 정권을 독단하였다. 그러므로 공자는 벼슬하지 않고 물러나 詩書와 禮樂을 닦으시니, 제자가 더욱 많아졌다. 정공 9년 경자는 공자 나이 51세였다.공산불뉴가 費邑을 가지고 계씨를 배반하고 공자를 부르자, 가고자 하였으나 끝내는 가지 않으셨다. 정공이 공자를 中都의 읍재로 삼으니, 1년만에 사방에서 본받았다. 그리하여 아침내 司空이 되시고, 또 大 司寇가 되시었다. 10년 辛丑에 정공을 도와서 제나라 군주와 夾谷에서 會盟하시니, 제나라 사람들은 노나라에게서 침략한 땅을 반환해 주었다. 12년 계묘에 중유로 하여금 계씨의 가신을 삼아 세 도읍의 성을 허물게 하고 갑옷과 병기를 거두게 하였는데, 맹씨의 집안에서는 成땅의 城을 허물려고 하지 않으므로, 포위공격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정공14년 을사는 공자 나이 56세였다. 정승의 일을 攝行하여 소정묘를 베시고, 국정에 참여하여 들으시니, 3개월 만에 노나라가 크게 다스려졌다. 제나라 사람들이 아름다운 여자와 악사를 보내어 저지하니, 계환자가 이것을 받았으며, 郊祭에 또 제사지낸 고기를 대부들에게 주지 않자, 공자는 노나라를 떠나셨다.위나라에 가서 자로의 원년으로부터 B.C.479년 애공(哀公) 16년까지의 사 건을 기록하고 있다.춘추와 전국의 분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한?위?조의 3家가 晉을 삼분하여 사실상 독립했던 B.C.453년을 그 분기점으로 보는 견해가 가장 설득력 이 있다. 따라서 『춘추(春秋)』이후에 30년 정도를, 또한 그 이전의 50년 정도를 더하여 춘추시대(B.C.770~B.C.453)라 하고 B.C.452년 이후를 전국시대로 규명한다.이렇게 춘추?전국시대의 두 시기를 구분해 보면 춘추시대에는 아직 명목적으로 주왕의 권위가 온전하여 서주 이래의 예적(禮的)인 제도가 다소나마 시행되고 있었다. 이에 비하여 전국시대에는 주왕이 완전히 권위를 잃고 이전의 예적 질서도 시행되지 않아 제후국이 서로 쟁탈을 반복했던 시대라고 할 수 있다.그러나 이 두 시대에는 일관된 역사의 흐름도 발견된다. 그것은 분열로부터 통일로 향하는 움직임이다. 춘추시대에는 초기에 서주 이래의 제후국이 170여개국이나 분립하고 있었으나 점차 제후국 상호간의 공방과 동맹을 통하여 패자에 통솔되면서 일종의 제후국연합을 이루 게 된다.더욱이 그 과정에서 약소국은 점차 대국에 병합되어 주권이 없는 지방도시로 전락하고 이에 따라 대국의 규모는 보다 확대되어 전국시대에는 진?초?제?연?한?위?조의 7대국으로 병합된다. 이리하여 진?한 제국에 선행하는 소제국의 대립시대를 맞이하게 된다.이러한 추이의 배후에는 지배집단 내부의 변질과 군주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관료제의 성립이라는 요인이 작용했으며 특히 농업생산의 발전에 따른 농촌사회의 변화, 화폐경제의 발달, 상업의 성행이라는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이러한 요인들은 춘추?전국 시대를 통하여 일관되게 전개?발달되었던 것이다.교육가로서의 공자일개 私人의 자격으로 공자는 자질이 좋다고 생각되는 사람이면 누구나 제자로 받았으며, 종래의 정치와는 다르지만 공자의 생각으로는 훨씬 더 좋은 정치를 구현하려는 목적으로 그들을 교육하였다.그러므로 그의 교육목적은 실제적인 것이었으나, 좁은 의미생들과 시간을 낭비하는 것을 피하려고 노력 한 것 같으며, 보다 고상한 일에 관심을 가진 체하지만 초라한 옷과 거친 음식을 수치로 생각하는 사람들을 [더불어 말할 가치가 없는] 존재라고 내쫓았다.그러나 그는 3년 동안 물질적인 보답을 생각하지 않고 공부만 하려는 사람을 찾기 어렵다]고 한탄하기도 하였다. 집이 먼 제자들은 공자의 집에서 함께 숙식하였던 것 같다.그의 교육방법은 완전히 형식을 떠난 것처럼 보이며, 수업시간이나 일정한 시험도 없었던 것 같다. 그 대신 공자는 한 명, 또는 동시에 몇 사람과 대화를 나누었고 때때로 질문을 던지기도 하였다. 책은 그들이 스스로 학습하도록 했지만 공자가 학습해야 할 것을 지시해 주고 특별한 대목은 함께 토의하였던 것 같다. 이것은 공자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목적은 단지 학자를 가르치는 것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할 군자를 양성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그는 어떤 주제를 가르친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가르쳤던 것이다. 그래서 그의 방법은 극히 개인적이었으며, 제자마다 다른 문제를 제기하였기 때문에 가르치는 방법도 제자마다 달랐다.따라서 각 학생의 인물됨을 관찰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훌륭한 교사가 모두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공자도 주의 깊게 한 사람 한 사람의 성격을 관찰하였다. 그 방법 중에는 현대의 정신요법을 상기시키는 것도 있는 데, 그것은 학생들의 마음을 편안케 한 후 그들의 소망을 기탄 없이 자유롭게 말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럴 때면 그는 중간에 말을 끊거나 논평을 하여도 속으로만 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동안 그는 자 기가 받은 인상을 종합하여 그들의 장점을 어떻게 살리고 약점은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였다.일단 개개인에 대한 분석을 완료하면 공자는 그에 따라 교육내용을 조정하였다. 때때로 그는 동일한 질문에 대 해서도 제자에 따라 다른 대답을 하였다. 공자가 격식을 차리지 않은 것은 교육방법에만 다. 두 명의 제자가 瑟을 탔던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다른 제자들도 모두 그랬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공자가 제자들에게 음악에 관한 이야기를 한 것 은 확실하지만 다른 선생에게 더 깊이 배우기를 기대하였는지도 모른다. 공자는 완전한 인간이 되려면 인격 도야의 마지막 장식으로서 음악과 [禮]에 정통해야 한다고 말한 적도 있고, 또한번은 학생들의 성품은 시를 배움으로써 자극되고, 예를 배움으로써 확고해지며, 음악을 배움으로써 완성된다.]고 말한 적도 있다. 확 실히 공자는 단순한 지성뿐 아니라 감정과 정신의 교사로서 [禮]와 음악을 결합시켰다.공자의 사상禮를 수호화기 위해 공자는 도덕윤리의 측면에서 "仁"의 학설을 제시했다. "仁"이라는 어휘 자체는 공자 이전부터 이미 일상적으로 사용되어왔지만 철학범주로서 제기된 것은 공자에 의해서였다. 공자가 내놓은 "仁"은 이후 중국 철학사에서 중요 범주의 하나가 되었다. 『논어』에서 "仁"에 대한 언급이 아주 많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공자가 안연의 물음 에 답한 한 구절이다. 이 구절은 "禮"와 "仁"의 관계를 개괄하고 공자의 "仁"학설의 기본 내용을 설명해준다.안연이 인에 대해 물었을 때 공자는 "자신을 이기고 예를 회복하는 것이 인이다. 단 하루라도 자 신을 이기고 예를 회복한다면 온 세상 사람들이 그를 어진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克己"란 자기 억제이며 "復禮"는 "禮"에 부합되지 않은 언행을 "禮"의 원칙에 부합되도록 한다면 이것이 바로 "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루라도 "克己復禮"를 이룬다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어진 사람이라고 부르게 된다는 것이다.안연은 한걸음 더 나아가 "克己復禮"의 내용이 무엇인지 물었다. 공자는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며,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나아가지 말라"고 하였다. "仁"의 원칙에 부합되는 사람이란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면에서 "禮"의 범위를 넘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이처럼 여기에든 사람을 사랑할 것과 남을 나의 입장에서 생각할 줄 아는 도덕유형을 만들려고 한 것 같다. 사실상 공자의 "남"이란 다른 귀족을 말하는 것이지 노동자나 노예까지 포함하는 것은 아니다. 공자는 다음에서와 같이 분명히 밝히고 있다. "군자이면서 어질지 못한 이는 있을지라도 소인이면서 어진 사람이란 없다" 또 "군자가 도를 배우면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 소인이 도를 배우면 사람을 부리려 든다."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공자에게 仁愛의 추구란 통치계급의 일 로서 통치대상인 노동자를 어떻게 지배, 복속시키느냐의 문제일 뿐 무엇이 인애이며 도덕인가를 밝히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공자의 忠恕란 노예소유주인 귀족들 사이의 忠恕이지 노예소유주와 노예 사이의 忠恕는 결코 아니며 될 수도 없는 것이다. 이는 오로지 착취제도와 착 취자만 옹호하는 것일 뿐 "자기가 바라지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말라"고 한 뜻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노예제를 지지한 공자로서는 그때까지 다음과 같은 생각은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곧 그 자신이 노예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을 뿐 아니라 남더러 노예가 되도록 요구하지도 않을 것이며 또 그 자신이 착취를 받아들이지 않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착취를 받아들이도록 하지도 않 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적대계급 사이에는 "忠恕"라고 할 만한 것은 없다. 피압박 노동인민으로서 말한다면, 소위 "忠恕"란 철두철미한 기만인 것이다.공자에게 "復禮"란 "仁"의 출발점이자 귀결점이다. "忠恕의 道"를 실행한다는 것은 반드시 주례에 서 규정한 준칙을 지켜야 하는 것으로 "자기가 바라는 것"이거나 "바라지 않는 것"이나를 막론하고 주례라는 원칙적 제약을 벗어날 수 없다. 소위 "인이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라고 한 것은 귀족들에게 주례가 인정하는 범위 내에서 서로 타협하고 양보할 것을 유구한 것으로 자신의 이익 을 고려할 때는 동시에 다른 귀족의 이익도 살펴야 한다는 뜻이 된다. 그러므로 이것의 목적은 모순을 조화시키고 주례의 구질서를 개선, 유지하는 데
●과외 문제●1. 서론60년대 후반 과열 과외 현상으로 과외망국론이 대두된 이래 과외 퇴치를 위해 온갖 대책들을 시도하였으나, 아직도 과외문제는 해소되지 않았다. 과외에 들어가는 사교육비로 인한 문제는 한국교육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가장 본질적이고도, 효과적인 출발점인 동시에 종착점인 실정이니 지금까지의 교육정책은 주로 과외문제에 대한 대책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주요 과외대책들은 과외를 직접적으로 유발하는 것으로 보이는 제도나 행위를 행정적ㆍ법적으로 철폐하거나 금지하는 것 이었다. 여기서 알아보고자 하는 것은 정부의 과외 자율화에 따른 과외문제의 현상과 과외문제를 유발하는 원인과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살펴본다.2. 본론2.1 과외문제 현상초등학생들에게까지 만연되어 있는 과외는 우리나라의 엘리트 현상으로 인한 명문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너도나도 하는 사회문제로까지 번져있다. 초등학생 과외를 유발한다 하여 정부는 중학교 입시를 철폐하고 중학생 과외를 유발한다 하여 고교입시를 철폐하여 추첨제로 신입생을 배정하였다. 그래도 과외가 번성하자 대입전형제도도 수차 개혁을 거듭하여 지필식 국영수 위주의 대학별 본고사가 과외를 유발한다 하여 그것을 폐지하고 논술 및 면접고사만 허용하였다. 암기, 찍기 위주의 과외를 유발한다 하여 선다형 객관식 학력고사를 폐지하고 과외로 대비하지 못하도록 사고력 중심의 수능시험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것마저 난해한 수능시험 대비 과외와 논술과외가 번성하자, 정부는 수능시험을 더욱 쉽게 출제하며, 논술고사도 폐지하는 방향으로 유도하고 있다.정부에서도 과외를 합법적으로 승인함으로서 신고를 한 과외에 대해서는 인정해주고 있으나 이것마저도 고액과외와 맞물려서 불법 과외가 성행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입시 자체를 없애는 과외대책, 그 분야 과외만 생기면 그 과외를 없애고자 그 분야를 입시에서 제외하고 과외를 규제하는 과외 죽이기식 대책들은 실패를 거듭하였다.정부는 국영수 위주의 지필시험을 폐지하고 각종 소질ㆍ재능ㆍ특기를 크게 반영하도록 입학 전형요소를 다양화 하면 입시위주의 교육에서 벗어나며 아울러 사교육비 부담에서도 벗어날 것으로 낙관하고 있다. 그러나 국민들은 이미 학력 및 학벌 경쟁의 원리를 터득하고 합리적 기대로 무장하고 있어서 대입 무시험 제도를 시행 하겠다 해도 과외를 줄여도 되리라 기대하지를 않고 있다. 이제 국민들은 정부가 더 이상 여러 가지 묘안들을 실험하기보다 과학적인 근거에 입각하여 실현 가능한 정책을 추진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과외비 규모를 살펴보면 사교육비로 지출되는 총액은 국민총소득의 6%에 해당하며 공교육비 총액보다도 많다. 개인 평균치가 6%이지 개별 학생들의 과외비는 천차만별이다. 이러한 과외비는 서민들에게는 많은 부담이 되어왔고 현재 과외 자율화로 인해서 이러한 격차는 더욱더 벌어지게 되었다.2.2 과외문제 원인과외문제의 원인을 알아보면 무엇보다도 입시지옥이 만들어내는 현상이다. 입시경쟁의 특수한 구조, 즉 국가의 독점적 입시 관리와 대학 규제로 인해 무의미한 대학간 서열체계가 확립되어 있는 상황에서 가능하면 일류대학으로 진학하려는 학벌 경쟁 구조에 기인한다.두 번째로는 과외수강을 하는 여러 이유가 있는데 첫 번째가 성적이 떨어지는 과목의 보충 그 다음으로는 부모의 권유, 남이 하므로, 취미특기, 사교, 기타 등이 있었다. 그리고 과외를 시키는 이유를 알아보면 학교수업을 따라가지 못해서, 혼자서는 공부를 못해서, 학교수업이 불충분, 남보다 앞서가기 위해서, 상급학교 진학대비, 안 하면 불안해서, 학교보다 고수준의 공부를 위해서, 학교에서 다루지 않는 내용 및 기능 습득이 있다. 입시가 거의 없는 초등학생들도 멀리 떨어져 있는 대학입시를 염두에 두고 과외를 받고 있다. 따라서 과외를 받는 중요한 이유는 공교육의 부실, 그것도 진학 대비에 미흡한 부실이라 볼 수 있다. 또한 남보다 앞서기 위해 학교의 수업진도보다 앞서 배우는 과외도 많은데 이것은 현행의 내신제 아래에서 유리한 등급을 차지함으로써 입시에 대비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또 다른 원인을 알아보기 위해 공교육의 실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초등학교 학급당 학생수가 다른 선진국에 비해서 많다. 그래서 학생들의 학업 성취도가 떨어지고 있으나 이런 현상을 교사들의 무성의 때문이라고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학교 현실은 선생님들의 의욕과 정성만으로는 도저히 대처할 수 없는 다른 물리적 한계에 봉착해 있다. 그것은 바로 학급 내 학생들의 이질성 문제이다. 현재, 중등학교 학급의 이질성은 학교 교육을 사실상 불가능하게 할 정도이다. 학생들 수준이 낮게는 초등학교 고학년 수준에서 높게는 고등학교 고학년 수준까지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러한 수준 차이를 무시하고 한 교실에 수용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학력 우수 학생들은 배울 것이 없어 지루하고 학력부진 학생들은 학습의욕을 상실하여 알아듣지도 못하고 그냥 칠판만 주시하고 있는 실정이다. 중등학교의 이러한 수준 차이는 획일적 교육 즉 선행 학습에서의 결손을 고려하지 않고 진행되는 수업, 연공서열식 임금제처럼 학년만 차면 상급 학년으로 진급하여 추첨으로 상급학교에 진학하는 평준화정책의 당연한 결과이다. 이러한 원인은 물리적인 현상뿐만 아니라 학교수업으로 소화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교과목수, 각 교과목의 난해한 수준 및 과다한 하위 교수 항목 등은 교육의 설계도부터 잘못되어 있음을 의미한다.2.3 과외문제 해결 방안내신 성적이 중요한 대입전형 요소이기는 하지만, 내신과외조차 입시위주 교육이라 보기는 어렵다. 또한, 고등정신능력 배양을 촉진하고자 도입된 논술시험이나 수능시험 대비용 과외들은 비록 입시위주이지만 암기 위주라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만약 현행과 같은 부실한 공교육과 입시제도 아래에서 모든 학생들이 전혀 과외를 받지 않는다면, 그것만으로 우리의 현행 공교육이 고등 정신능력 배양과 인성교육에 더욱 충실해질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다. 학교가 입시학원으로 변모하였다는 지적은, 학원이 여전히 번성하는 것을 볼 때, 공교육이 고등정신 능력은 차지하고라도 저급능력의 배양에서도 학원에 뒤지고 있음을 자인하는 것이 아닌가?
● 유교사상과 교육1. 유교의 역사와 사상유교의 역사는 공자로부터 시작된 것은 아니다. 공자 이전 수세기 동안 존속해 온 의례제도가 있었고, 공자는 이를 바탕으로 유학을 체계화하여 새로운 것을 알게 한 대학자이었다. 그리고 공자 이후 맹자와 순자를 거치면서 집대성된 고대 유학이 한국에 전해졌다. 따라서 유교의 역사와 사상을 알기 위해서는 중국의 공자와 맹자 그리고 순자의 생애와 사상을 먼저 살피고, 후대에 이르러 성리학, 즉 신유학으로 발전된 과정을 알아보아야 한다.가. 공자의 생애와 기본 사상①생애은(殷)왕족의 혈통을 이어 춘추시대 말기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제(齊)나라와의 싸움에서 군공(軍功)을 세운 부장(部將)이었으나, 공자가 3세 때 별세하여 빈곤 속에서 자랐다. 노나라의 창시자로 주왕조(周王朝) 건국의 공신이기도 했던 주공(周公)을 흠모하여 그 전통적 문화습득에 노력했으며, 수양을 쌓아 점차 유명해졌다. 처음에는 말단 관리였으나, 50세가 지나서 노나라의 정공(定公)에게 중용(重用)되어, 정치가로서의 탁월한 수완을 발휘하였다. 그의 계획은 노나라의 실력자인 3중신의 세력을 눌러 공실(公室)의 권력을 회복하고, 주공의 정신을 살린 질서있는 문화국가를 건설하려는 것이었다. 그의 계획이 드러나 BC 497년, 56세 때 실각하고 그 후 14년간 문하생들을 데리고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유세(遊說)를 계속하며 이상실현을 꾀하였으나, BC 484년, 69세 때 그 불가능함을 깨닫고 고향에 돌아가 제자들의 교육에 전념하였다. 74세때 자공(子貢) ?증삼(曾參) 등 뛰어난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타계하였다.제자는 모두 3,000명이며, 특히 육예(여섯가지 기예)에 통한 문인(門人)이 72명이라고 한다. 그의 언행은 《논어(論語)》를 통해서 전해지고, 그의 사상을 알아보기 위한 확실한 자료도 《논어》밖에 없으며 이는 제자나 제자의 제자들이 기록한 것이지 공자 자신의 저술은 아니다. 오경(五經)을 편찬하였다고 전하나, 이는 교육목적에 따라서 《시경(詩經)》 《서시대에 배출된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한 사람으로서 맹자도 BC 320년경부터 약 15년 동안 각국을 유세하고 돌아다녔으나, 자기의 주장이 채택되지 않자 고향에 은거하였다. 제후가 찾는 것은 부국강병(富國强兵)이나 외교적 책모(策謀)였으나, 맹자가 내세우는 것은 도덕정치인 왕도(王道)였으며, 따라서 이는 현실과 동떨어진 지나치게 이상적인 주장이라고 생각되었다. 만년에는 제자 교육에 전념하였고, 저술도 하였다고 한다. 《맹자》 7편은 맹자의 말을 모은 후세의 편찬물 이지만, 내용은 맹자의 사상을 그대로 담은 것이다. 주자학(朱子學) 이후로 맹자는 논어, 대학, 중용과 더불어 '사서(四書) 의 하나로서 유교의 주요한 경전이 되었다. 맹자의 사상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책이며, 또 전국시대의 양상을 전하는 흥미 있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문장은 변론조이며, 예부터 명문으로 여겨진다.⑴사상① 성선설(性善設): “인간 본성은 착하다.? 인간의 착한 본성을 기반으로 사회의 혼란을 극복하고자 함.? 인간 내면적 본성-인(仁)- 내면적 본성으로서의 따뜻한 사랑, 측은히 여기는 마음. (특히, 공자가 강조)-의(義)- 옳고 그름을 구분하는 (차가운)사회 정의, 악을 미워함. (특히, 맹자가 강조)? 사덕과 사단(事端: :德의 실마리, 단서, 근본): 인간의 본성四端 /사단사단의 뜻四德 / 사덕현대적 해석惻隱之心측은지심남의 곤경을 측은히 여기는 마음仁之端也인지단야사랑羞惡之心수오지심불의를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義之端也의지단야정의辭讓之心사양지심남을 공경하고 사양하는 마음禮之端也예지단야예의是非之心시비지심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마음智之端也지지단야지혜② 대장부(大丈夫)와 호연지기(浩然之氣)인간사회의 타락은 인간의 욕심과 두려움 때문. 그러므로 참된 용기를 함양하여야 없어짐.? 대장부(大丈夫)와 대인(大人)- 사회 타락을 없애는 참된 용기를 갖춘 사람- 맹자의 이상적 인간상- 호연지기를 지닌 사람.호연지기(浩然之氣)- 뜻 : 지극히 굳세며 곧은 마음:至大至剛- 참된 용기 : 自反而縮 雖 계승 발전시켜 후세에 전하는데 공이 매우 큰 학자로서 맹자와 더불어 유가의 쌍벽을 이룬 현인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예'를 중시한 그의 학설은 한대(漢代)에 이르러 맹자보다 존중되어 유가의 정통으로 생각되었다. 그는 이단자 취급을 받게 되었고, 오랫동안 부당한 대우를 받았으며, 정당한 평가는 청 말기에 이르러야 비로소 받게 된다. 순자의 제자로는 한비자와 이사 등이 있는데, 그들은 순자의 '예'의 사상을 발전시켜 법가(法家) 사상의 대표자가 되었고, 이 법가 사상은 최초의 통일제국 진나라의 사상적 기반이 되기도 한다.2. 성리학(신유교)과 교육사상가. 성리학중국 송(宋) ?명(明)나라 때 학자들에 의하여 성립된 학설송?명 시대에 이르러 유학은 정치적 또는 종교적 사회체제의 변화에 따라 노불(老佛) 사상을 가미하면서 이론적으로 심화되고 철학적인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즉, 북송(北宋)의 정호(程顥)는 천리(天理)를 논하였고 그 아우 정이(程)는 성즉이(性卽理) 의 학설을 폈으며, 그 밖에 주돈이(周敦)?장재(張載)?소옹(邵雍) 등이 여러 학설을 편 것을 남송(南宋)의 주희(朱熹:朱子)가 집성(集成)?정리하여 철학의 체계를 세운 것이 성리학으로, 일명 주자학(朱子學)이라고도 한다성리학은 이(理)?기(氣)의 개념을 구사하면서 우주(宇宙)의 생성(生成)과 구조(構造), 인간 심성(心性)의 구조, 사회에서의 인간의 자세(姿勢) 등에 관하여 깊이 사색함으로써 한?당의 훈고학이 다루지 못하였던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내성적(內省的)?실천철학적인 여러 분야에서 새로운 유학사상을 수립하였다. 그 내용은 크게 나누어 태극설(太極說)?이기설(理氣說)?심성론(心性論)?성경론(誠敬論)으로 구별할 수 있다.나. 주희의 생애와 교육사상① 생애자 원회(元晦)?중회(仲晦). 이름 희(熹). 푸젠성[福建省] 우계(尤溪) 출생. 선조는 대대로 휘주무원(徽州張源:安徽省)의 호족으로 아버지 위재(韋齋)는 관직에 있다가 당시의 재상(宰相) 진회(秦檜)와의 의견충돌로 퇴직하고 우계에 우거(寓居)하의 이제현, 이색, 이숭인, 정몽주에게 영향을 주었다.조선시대에 들어와 유교는 지배이념으로서의 자리를 굳히고 또 종교적 특성을 뚜렷이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중앙에는 성균관, 지방에는 향교와 사립의 서원이 설치되어 인재양성과 제사가 거기서 이루어졌다. 정몽주는 성리학에 정통하고 도덕과 경륜(經綸)에도 일가를 이루어 동방 이학(理學)의 시조라 불린다. 조선시대에는 개국 초부터 태조의 숭유억불 정책으로 유교가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유교의 기초를 처음으로 확립한 학자는 정도전이다. 그는 등의 논설을 통하여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숭상할 것을 주장하였다. 세종은 유교 이념에 입각하여 집현전을 만들고 삼강오륜의 중요성을 고취하기도 하였지만, 그의 종교정책은 모든 종교에 관용적인 기본입장을 가진 것으로 그 의의를 높이 평가할 수 있다.조선시대 주자학의 이론 전개는 중국 유학이 우주론적 관심을 앞세운 데 비해, 인간의 심성문제에 관심을 집중한 사실에서 그 특징을 찾을 수 있다. 중종때 조광조가 유도의 정치를 펴려 하였으나 기묘사화로 실패하고 많은 사류도 함께 화를 입었다. 거듭되는 사화로 유학자들은 차차 벼슬을 단념하고 산림에 숨어 오로지 학문과 후진양성에 전념하게 되었다. 그 대표적 인물로는 서경덕, 조식, 김인후등은 그 대표적 인물이라 할 수 있으며 그 후 명종ㆍ선조 때에는 많은 유학자가 배출되어 한국 성리학의 전성시대를 이루었다. 그 중에서도 이황, 이이가 가장 뛰어난 이황을 ‘동방의 주부자(朱夫子)’, 이이를 ‘동방의 성인’이라 할만큼 그 학풍은 후대의 학자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이황은 4단 7정의 이기이원론을 주장하여 많은 저술로써 이를 확립하였고, 그 학설은 일본에 전해져 여러 주자학자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쳐 동양사상에서 한국의 성리학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하였다. 이황의 문하에서는 조목, 유성룡, 김성일, 정구등 저명한 학자가 배출되었다. 한편 이이는 주기설을 확립시켰으며 그 학설은 김장생, 이귀, 조헌등을 거쳐 김집, 송시열등에게 이어졌다. 그 후 유교는 그러나 그 정신은 소멸되지 않고 고려와 조선에 이어 내려오면서 국난을 맞을 때는 의병 등의 의기로 치솟아, 오늘날에도 그 정신은 도(道)로서 재흥(再興)을 염원하는 소리가 높다.3)고려시대 교육고려는 불교를 국교로 수용하였지만, 성종 시대를 맞이하여 유교가 꾸준히 보급ㆍ발전되어 왔다. 초기 광종때 유교 경전을 시험하여 관리를 뽑는 과거제도가 시행되었고, 성종 때는 전국의 지방에 학교를 세워 유교교육을 확장하였다. 문종 때는 한국의 공자로 일컫는 최충을 비롯한 12명의 유학자들이 ‘12도’라는 사립학교를 설립하여 유교교육이 육성되었다. 또한 인종 때는 묘청의 난 이후 유학자들이 정치의 주도권을 잡게 되었고 고려말에는 신유학인 성리학이 수용되고 유학에 입각한 고려의 형식적 교육은 크게 관학과 사학으로 구분되어 발전하였다.⑴관학① 국자감: 6대 임금 성종11년 창설된 고등교육기관 귀족 자제를 대상으로 교육내용은 논어, 효경을 필수 과목으로 하고 주역, 상서, 주례, 예기 등을 가르쳤다.1275년(충렬왕 1)에는 국학(國學), 1298년에는 성균감(成均監), 1308년(충선왕 즉위)에는 성균관(成均館), 1356년(공민왕 5)에는 다시 국자감, 1362년에는 또다시 성균관으로 고쳐 조선으로 계승되었다. 국자감은 성종이 중앙과 지방관제를 정비하여 관리의 수요가 늘어남에 따라 관리양성기관의 기능도 가지게 되었는데, 여기에 국자학(國子學) ?태학(太學) ?사문학(四門學) 등 유학(儒學) 전공의 3학과, 율학(律學) ?서학(書學) ?산학(算學) 등 실무직 기술을 습득하는 3학을 두어 이들을 경사육학(京師六學)이라 하였다.② 향교: 지방에 설립된 중등 수준의 관학 교육기관이다. 교육내용은 제술과 명경(효경, 논어등의 9경)을 위주로 하였고, 지방민의 양성 및 교화를 주로 담당하였다.③ 동서학당과 5부 학당: 동서학당은 국자감에 입학하지 못한 평민 자제를 대상으로 하고 지방의 향교교육 수준과 비슷하였다. 5부학당은 공양왕때 동서학당과 비슷한 수준으로 개경의 중앙과 동서남북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