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羅眞平王代의 政治的 性格{目 次1. 머리말 3. 眞平王代 專制王權의 成立2. 專制王權의 槪念規定 1) 銅輪系의 血緣意識3. 新羅 專制王權의 成立基盤 2) 內省의 設置1) 王族意識의 深化 3) 濟·麗와의 抗爭과 王權伸張2) 忠 思想의 涵養3) 中央集權的인 制度整備 4. 맺음말 - 비판적 관점에서..1. 머리말新羅史를 權力構造면에서 볼 때 흔히 중대(29대 武列王∼36대 惠恭王)를 專制王權時代로 이해해 왔다. 기존의 연구가 전제왕권이 구축될 수 있었던 요인이나 전제정치의 현상만을 지적하고 있는 점에 반하여, 이정숙은 신라 전제왕권의 성립시기를 중고시대로 소급시켜 보고, 이에 대한 개념을 규정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한 전제왕권의 특징과 그 기반에 대해서 정리를 하였다. 본고에서는 이정숙의 이「新羅眞平王代 政治的 性格」이라는 논문의 요점을 정리하고, 마지막 단락에서는 김기흥의 『천년의 왕국 신라』, 이기백의 「新羅 專制政治의 成立」, 김두진의 「新羅眞平王代 初期의 政治改革」을 참고로 한 필자의 생각을 정리해 보려한다.2. 專制王權의 槪念規定먼저 專制 라는 개념을 살펴보면, 專制 라는 용어는 대개 獨裁와 구별없이 사용되고 있다. Otto Stammer에 의하면 전제란 정치조직의 통치규칙만을 의미할 뿐 아니라 생활양식의 기초가 되는 이데올로기와 정치행동의 표준이 되는 표현을 의미할 수도 있다는 것이며, 모든 형태의 전제(혹은 독재)는 권력행사에서의 독점과 전횡, 정치권력의 사법적 속박의 폐지 또는 완화, 시민적 자유의 속박이나 잠정적 제한, 결정을 내리는 데 있어서의 지나치게 공격적이고 충동적인 형태, 정치적·사회적 조정에 독재적 방법을 적용하는 것 등과 같은 특징을 지닌다는 것이다.하지만, 專制主義라는 것은 학자들마다 보는 영역과 시각이 다르고, 또한 그 용어자체가 대단히 추상적이면서도 다양하기 때문에 정확히 어떤 것이라고 정의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여러 이론들 속에서 나오는 공통적 개념들을 정리했을 때 專制 란 고도의 중앙집권화된 정치체제로 압축할 수 있으며, 그것어 中古期의 획기적인 발전을 위한 초석을 마련하였고, 왕권도 본궤도에 오르게 된다. 이러한 왕권의 확립에 따라 소위 王族意識이란 것이 생겨났는데, 이것은 중고기에 있어 왕권전제화를 이루어 나가는 기반이 되었다. 이러한 왕족의식에는 성골·갈문왕제도·왕즉불사상 등이 있다.법흥왕 22년(535)의 佛敎公認이래 나타난 왕즉불사상과 眞種設은 왕족의식의 高揚 및 그 지배권을 합리화하는 표징이었다. 5세기 초에 신라에 들어온 불교는 보수성과 폐쇄성으로 인해 많은 박해를 받는다. 하지만, 이 보수성은 외래의 어떤 사상이 들어와서 일단 정착하고 나면 이를 다시 전대미문의 것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소지 또한 다분히 지니고 있다. 그래서 신라에 수용된 불교는 신라적인 것으로 變容되어진 것이다. 또한 현실주의적 신라인의 성격은 신라를 樂土로 보고, 신라 중심적인 생각을 낳았다. 이것은 애국호국사상으로 이어져 승려들조차 조국 신라를 위해서는 불교의 본질성 마저도 과감히 변질시켰다. 이러한 호국사상은 진흥왕대에 이르러 큰 발전을 보게 되었다.신라 불교수용의 주체세력은 왕실이었는데, 이들은 불교를 신앙의 대상보다는 왕권강화를 위한 목적으로 받아들였다. 귀족반대가 있었으나 법흥왕14년(527) 異次頓의 순교를 통해 법흥왕 22년(535)의 불교를 공인한다. 이때를 지나서 왕법과 불법과를 일치시키려는 왕즉불사상이 있어났다. 왕즉불사상은 진흥왕대에 호국사상으로 전개되어 신라 최대의 호국사찰인 황룡사 창건을 보게 되었다. 이것은 영토팽창을 목적으로 하는 군사적 행동을 정신적인 면에서 뒷받침해 주는 것으로 정복전쟁이 호국신앙으로 승화됨을 알 수 있다.왕즉불사상은 중고시대 특유의 불교식 왕명(진종설)으로도 표출된다. 왕즉불의 북방불교를 고구려를 통하여 받은 신라가 중고기에 있어서는 그 왕명을 전부 불교에서 취하는데, 법흥·선덕왕을 제하고는 모두 眞 자가 붙는 父母俱眞種의 說話를 채용한다. 한편 진흥왕대에 轉輪聖王으로 상징되었던 왕권이 진평왕대에 와서 釋迦로 변화되는데, 이러한 관념-불교를 배경으로 전계층의 공통된 시대정신으로 전재되었다. 그러므로 충은 반드시 화랑도만의 專有精神이라고는 볼 수 없으나, 그 시대정신을 가장 첨단적으로 대표한 것이 화랑도인 것이다.忠과 信은 신라인의 社會倫理德目으로서는 가장 중히 여기는 것이었으며 이러한 도의는 6세기 중엽∼7세기 중엽의 신라 국난기에서 나온 시대정신이었다. 참 어지러운 이시기 국가와 민족을 향한 구심점이 요구되었고, 그것이 곧 忠 위주의 윤리관으로 성장되어 갔던 것이다.3) 中央集權的인 制度整備신라는 왕권강화와 제도정비는 軌를 같이 하는 것이다. 신라는 중앙집권적인 개혁정치를 추진해 나감에 따라 중앙행정조직이 정비되고, 왕권강화를 목표로 측근정치를 志向해 나가는 과정에서 近侍機構를 확장·조직화 및 文翰機構를 생성하게 되었다. 이러한 제도 및 기구들은 모두 中古初의 법흥왕·진흥왕대부터 설치되기 시작하여 진평왕대에 이르러 質的인 전환을 가져옴으로써 어느 정도 체계를 갖추게 된다.中古初에 싹트기 시작한 중앙행정조직은 진평왕대에 이르러 양적으로 크게 확장되고 질적으로 전화되어져서 신라 관제발달사상 하나의 획기적인 시대를 이루었다. 이것은 정복과정에 따라 확대된 영역의 지배나 왕권강화에 따른 직능분화의 성격상 당연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때 설치된 중앙행정관직 및 관부는 7세기 후반 관부체계에 직결된다.진평왕대에 급성장한 중앙집권적인 관료체제는 곧 신라전제왕권의 성립기반이 되는 것으로 진평황 44년(922) 內省의 설치로 그 절정을 이룬다. 내성은 內廷의 庶政을 총괄하고 근시집단을 통솔하는 관부로서 신라사에서 하나의 시대를 劃할 만큼 그 의미가 매우 크다.4. 眞平王代 專制王權의 成立1) 銅輪系의 血緣意識중고기의 급속한 왕권신장을 배경으로 동륜(진흥왕의 장자)계의 독존적인 왕족의식이 발생하였는데 성골과 갈문왕제도가 그것이다.성골은 중고왕실 혈연집단의 分枝化 과정에서 성립된 것으로 동륜태자의 直系卑屬으로 구성된 왕실의 소가족집단이 진평왕대에 나머지 왕실 친족집단의 구성원이 갖는 신분인 진골과 구별되는 신분으로서 음을 암시해 주는 것이다. 갈문왕이란 號를 부여함에 있어서 封 의 형식을 취하게 된 것은 일종의 가족주의에서 나온 特例이자 왕권상승에 따른 尊親榮族의 개념이 강화된 데에서 나온 결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들 6명의 被封葛文王 가운데 骨正, 伯飯, 國飯, 龍春 등 이상 4명은 각각 世神, 眞正, 眞安, 文興이란 美號와 함께 봉해지고 있어 재래의 본명을 붙인 갈문왕과는 그 색채를 달리하며, 특히 진정과 진안은 진평왕의 弟라란 점에서 주목된다. 이와 같은 사실은 앞에서 설명했듯이 중고기 진평왕대에 이르러 왕권이 더욱 상승함을 따라 尊親榮族의 개념이 강화되고 확대되어져서 갈문왕의 책봉이 왕의 弟에까지 미치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2) 內省의 設置진평왕대의 왕권강화에 따라 설치된 내성은 중앙행정관직과 마찬가지로 중고기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왕권이 강화될수록 근시신료들의 세력 또한 성장되어 갔을 것이고, 그 임우에 있어서도 진흥왕대에 이미 어느 정도의 職能分化가 이루어졌다. 이것이 후대의 내성예하에 있는 각종 세분된 내정관제로 발전되는 것이다. 고위관직으로 상급신료가 취임하는 三宮私臣의 설치 사실에서 근시집단의 질적인 전환을 찾아볼 수 있으며, 三宮私臣의 설치 이후부터 국왕근시집단은 가신적 성격에서 벗어났으며, 그 역할도 변해갔다.다음으로 진평왕 44년(622)에는 三宮私臣이 나누어 맡았던 업무를 통합하여 내성으로 만들고 사신을 一人으로 축소시켰는데, 이 내성의 설치 이후부터 국왕 근시집단은 하나의 체계로 통합되어 보다 진전된 조직화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 장관인 내성사신은 일반 중앙행정관부의 장관인 令이 대체로 복수제인데 대해 一人으로 규정되어 있고, 또 여기에 취임하는 자는 국왕의 近親이었으며 병무령과 겸직이 허용되었다는 점 등에서 실로 요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내성사신의 정치적 지위는 국왕 근시집단의 성장에서 비롯된 것. 다시 말해서 진평왕대의 왕권강화에 따른 그 직속신료들의 지위상승이었던 것이다.내성사신직에는 김춘추의 父 龍春이 최초로 년(622) 내성이 설치될 무렵에는 한국 전통사회로서의 원형을 이룬 신라중대 전제왕권의 바탕이 이미 성숙되어 있으므로 이때를 신라 전제왕권의 성립시기로 볼 수 있으며, 그리고 이러한 진평왕대 후반에 성립된 신라 전제왕권은 곧 중대를 주도할 무열왕계에 의한 것이었다.3) 濟·麗와의 抗爭과 王權伸張모든 나라가 주변 제국과의 교섭과 충돌을 거치면서 성장하기 때문에, 외교와 전쟁은 국가발전의 불가피한 요인이 되게 마련이었다. 중고기 진평왕대(579∼632)는 이전의 어느 때보다도 전쟁과 외교의 회수가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어 주목된다. 물론 진평왕은 그 재위기간이 무척 길었다는 사실도 있었으나, 어쨌든 그의 재위기간 동안에는 무려 14회의 전쟁기사와 18회의 외교기사가 나오고 있으며 전쟁과 관련된 築城기록도 4차례나 보이고 있다.빈번한 전쟁은 국가유지와 발전의 커다란 자극제로써 국민결속의 응집력 내지는 국가성장의 動力으로 작용할 뿐 아니라, 전투지휘관의 권위를 높여 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므로 전쟁기간 중에 지휘관이 보여 준 권위는 戰後에도 그대로 이어져서 지휘관은 정치적 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신라의 정치지도자는 전쟁을 통해 형성되었으며, 왕 자신도 실전경험을 통해서 그 지위와 권위를 높일 수 있었다. 그러므로 강력한 절대권을 행사한 왕은 전쟁에 있어 선두에서 군사를 통솔하면서 자신의 지배력을 표시하였던 것이니, 결국 전투에서의 권위와 능력은 곧 정치·사회에 있어서의 그것을 뜻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축성은 단순히 방어시설을 조성한데 지나지 않지만, 막대한 인원동원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이것은 국력의 집중이며 동시에 왕권의 신장을 뜻한다고 하겠다. 즉 왕은 방어시설의 확충이나 대비책의 강구속에서 실질적인 왕권의 강화를 모색하였던 것이다.신라의 외교는 주로 대중교섭으로서 법흥왕·진흥왕대의 정치적 성장으로 활발하게 되었고, 특히 진흥왕 14년(553)의 新州설치로 黨項城을 확보함으로써 새로운 단계에 들어서게 되었다. 그러나 보다 실질적이고 제도화된 외교...
강화도 조약과 개항{목 차1. 머리말2. 조약체결 전의 국내외 정세1) 메이지유신과 일본의 조선정책 2) 고종친정과 대외정책3. 강화도조약의 체결1) 운요호사건과 조선정부의 대응 2) 조일수호조규의 내용과 성격4. 개항 이후 조선정부의 대내외정책1) 수신사파견과 개화정책의 모색 2) 조일수호조규 부록 및 통상장정5. 맺음말1. 머리말19세기 후반 조선에 대한 자본주의 열강의 개방압력은 청국·일본에 대한 개방요구와 동일한 시기에 시도되었다.{) 조선에 대한 서구의 직접적인 통상개방 요구는 1832년 영국의 동인도회사 소속 상선 로오드 엠허스트(Lord Amherst)호에 의해 처음으로 시도되었다.(최덕수, 「강화도조약과 개항」, 『한국사』37, 국사편찬위원회, 2000년, 219쪽, 인용.)청국·일본이 각기 1842년과 1854년에 서구 열강들에게 굴복하여 통상조약을 체결하고 국내시장을 개방하였던 것과는 달리 조선은 프랑스(1866년)와 미국(1871년)의 무력도발로 다수의 사상자와 막대한 피해가 발생했음에도 이들의 요구를 거부하였고, 오히려 척화비를 전국 군현에 건립함으로써 정부의 반개방의지를 천명하였다. 그 결과 조선은 그때까지 지구상에서 자본주의 시장권에 공식적으로 편입되지 않았던 유일한 지역이 되었다.{) 당시 서구 열강은 거대 시장인 중국의 개방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던 데다가 국내문제로 말미암아 조선의 개항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지 않았다.(최덕수, 「개항의 역사적 의의」, 『한국사』37, 국사편찬위원회, 2000년, 332쪽, 인용)이러한 조선을 자본주의 시장체제에 편입시켰던 세력은 동일 문명권의 인접국가 일본이었다.조선이 서구자본주의 열강에 대하여 전면적인 개방을 시도한 것은 일본과 조약을 맺은 지 6년이 지난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과 1883년 조영수호조약 체결을 통해서였다. 즉 청국과 일본이 서구 열강들 가운데 특정의 국가와의 조약을 체결한 뒤 곧 바로 다른 국가와도 이에 준하는 조약체제를 수용하여 국내시장을 전면적으로 개방하였던 것과는 달리 왜학훈도의 입장에서는 구래의 예를 벗어나는 서계를{) 조선의 입장에서 특히 문제가 되었던 부분은 첫째, 쓰시마 영주는 조선국왕이 그에게 하사한 圖書(印章)를 사용하지 않았으며 청조의 年號 대신 일본의 年號를 사용하였다. 둘째, 그가 일본천황에 대하여 皇上 , 皇祚 와 같은 호칭과 용어를 사용한 것이다. 셋째는 이것을 받아들일 경우 일본천황의 서열상의 우위를 스스로 인정하는 결과가 되는 것이었다. (金基赫, 「江華島條約의 歷史的 背景과 國際的 環境」, 『國史館論叢』25, 國史編纂委員會, 1991, 12쪽, 요약정리.)수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1869년 6월 27일 천황정부군에 의해 일본의 정치적 통일은 완성되었고, 쓰시마번이 가지고 있던 대조선외교권을중앙정부에서 직접 관할하도록 하였다. 천황정부는 1870년 1월 7일 外務省出仕 사다 하쿠보(佐田白茅), 外務少錄 모리야마 시게루(森山茂) 등을 조선에 파견하였다. 이들은 자신들을 서계수리를 독촉하기 위한 일본정부의 관리라고 설명하고 그간의 경위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왜학훈도 안동준은 동래부사와 협의하여 대수대차사 척퇴(서계거부)가 조정의 뜻임을 확실히 하였다. 이러한 조선정부의 서계거부에 대하여 일본에서는 征韓論{) 모든 정한론의 공통된 특징은 그 표면상의 구실이 무엇이었든 간에 그 실질적 이유나 동기는 예외없이 일본 內에 있었다. 즉 일본 자체의 국내의 사정이나 문제에 대처하는 수단이나 방도로 조선 또는 조선문제를 이용하려는 일본의 상습적인 행동으로 볼 수 있다. (金基赫, 「江華島條約의 歷史的 背景과 國際的 環境」, 18쪽, 재정리.)(강경론)이 대두되기도 하였으나, 일부 관료들에 의해서 청조와의 수교론이 제기되었다.{) 메이지 정부 성립 초기의 대조선정책은 사절파견을 통한 직접교섭론과 조선측이 거절할 경우 무력을 사용한다는 무력정한론, 그리고 조선과의 수교에 앞서 청국과 대등한 관계를 구축한 다음 조선과 교섭한다는 우회안 등이 각 시기 일본정부내 여러 세력의 정치적 위상과 맞물리면서 시도되었다. 서구 열강으로부터 비난을 받게 되었다. 이때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는 대담하면서도 기민한 외교로 청조와 교섭을 벌여 정치적·군사적 어려움을 극복하였다. 이로 인해 정한논쟁으로 약화되었던 정부의 정치적 기반은 강화되었고, 서구열강들도 일본의 군사적 능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또한 琉球에 대한 일본의 단독적 주권주장이 강화되어 이를 倂呑하기 위한 터전도 마련할 수 있었다.{) 金基赫, 「江華島條約의 歷史的 背景과 國際的 環境」, 19~20쪽, 요약정리.2) 고종친정과 대외정책정한론을 둘러싼 메이지정부의 분열이 있은 지 약 한달 후, 조선에서도 집권세력이 교체되는 정치적 변동이 있었다. 최익현의 상소를 둘러싼 정치문제의 결과로 조정내 대원군 지지세력이 축출되었던 것이다. 이 시기 고종은 대원군파를 축출하고 李裕元·박규수를 중용하면서 집권세력을 교체하고 군사권을 장악하였다. 또한 1874년에 접어들면서 각 지방에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지방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제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암행어사를 파견한 목적은 중앙과 지방에서 대원군 세력을 약화시키면서 일본과의 관계개선을 급속히 추진하고자 했던 것이다.{) 대원군의 대일정책 청산을 위해서 조정을 기만하고 일본과의 불화를 초래하였다는 죄목을 씌워 일본과의 교섭을 주관 담당한 경상도관찰사 金世鎬, 동래부사 鄭顯德, 훈도 安東晙을 처벌하였는데, 이 중 안동준은 극형에 처해졌다. (金基赫, 「開港을 둘러싼 國際政治」, 24쪽, 인용.)조선정부가 이 시기 일본과의 관계개선에 나선 이유는 일본의 대만침공에 대한 소식과 대만사태에 뒤이은 청국 자문의 영향에 있다.{) 청국 禮部로부터 정부에 전해진 소식에 의하면 일본의 출동부대 약 5,000명이 현재 長崎에 주둔하고 있는데, 대만사건이 해결되면 조선으로 진출할 것이고, 한편 프랑스와 미국도 조선과 화해성립이 안 되어 있으므로 반드시 일본을 도와 공동출병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李光麟, 『韓國史講座』Ⅴ 近代篇, 一潮閣, 1981, 65쪽, 재정리.)조선정부는 신임 왜학훈도 玄 부산과 동래부민들로 하여금 위기감을 갖게 하였다.이러한 상황하에서 조정은 서계문제에 대해 다시 논의를 하였는데, 일본의 무력시위가 시작된 이후에도 조정대신들 주류의 입장은 여전히 서계 접수자체를 거부하고 있었다. 서계접수를 주장하는 박규수 등은 일본측과의 무력분쟁을 피하기 위해서는 서계를 일단 접수하여야 한다는 것이었으나 소수의 의견일 뿐이었다.결국 일본의 무력동원 조짐에 대한 위기의식이 고조되는 가운데 8월 21일 운요호사건이 발생하였다. 운요호가 8월 21일 한강 하구 강화도 해안에 정박하였다가 선원 일부가 작은 배로 사전 예고없이 한강하구를 거슬러 항해하자 초지진 포대에서 포격을 감행하여 이를 저지하고자 하였다. 초지진 대포의 사정거리 밖에 있었던 운요호는 초지진의 포격으로 전혀 피해가 없었으나 운요호는 함포사격으로 초지진을 파괴하였으며, 다음날 영종도에 상륙하여서는 다수의 민간인을 살상하고 관아와 민가를 노략질한 뒤 일본으로 돌아갔다.운요호사건은 모리야마의 정책안을 그대로 실행에 옮긴 것이었는데, 그것은 미국의 강압에 의해 문호를 개방하였던 역사적 경험을 역으로 이용한 것이었다. 일본정부는 운요호사건을 빌미로 조선외교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책을 구체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또한 운요호사건 처리와 수교 교섭을 위한 사절단을 조선에 파견하기에 앞서, 청국이 종주권을 구실로 개입할 것을 우려하여 청국과 먼저 교섭을 시도하였고, 일본에 주재하는 서구 각국의 공사들에게도 이를 알리고 동의를 얻었다.{) 이에 미국을 비롯한 프랑스·러시아·영국·이탈리아· 公使 등은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적극적으로 일본의 정책을 지지하였는데, 열강들에 입장에서는 운양호사건의 책임소재가 어느쪽에 있는가에 대한 문제보다는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이 조선을 개항시켜 줄 것을 바랐기 때문이다. (李光麟, 위의 책, 72~73쪽, 인용.)조선정부는 현석운을 보내 일본 전권대표단이 강화도로 가는 것을 중지해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일본대표단은 예정대로 1875년 12월 19일 부산으로 가서, 약의 구체적인 문건은 1876년 2월 26일 강화도에서 조인하였던 와 같은해 8월 24일 체결하였던 과 및 등이다.조일수호조규는 前文과 12개 조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문에서는 조약의 주체를 대조선국 과 대일본국 그리고 조선국정부와 일본국정부로 기술하고 있다. 처음 일본측 초안에서는 이부분을 대일본국여조선국 으로, 대일본국황제폐하 와 조선국왕전하 로 기술하였다가 조선측에서 의의를 제기하여 대등한 표현으로 정정되었다. 또한, 과거의 우호적인 관계를 거듭 확인하고 발전시키기를 원한다 는 뜻의 欲重修舊好 란 표현을 썼는데, 이는 개항반대론자들의 반발을 피하기 위하여 조선정부는 신조약이 새로운 관계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교린관계의 연장에서 이를 개수한 것이라 언급하고자 조선측에서 요구한 것으로 보인다.제 1관에서는 조선을 자주국 으로, 그리고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지고 조약에 임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것은 일본이 조선에 대한 청국의 종주권을 부인하고자 한 것이다. 청국의 종주권을 부인한 실질적인 의미와 목적은 기존의 청국 중심의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일본측이 변경하려고 시도한 것으로 일본의 침략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전제조항이었다. 반면에 조선 내외에서 조선에 대한 청국의 종주권을 부인하고 조선의 자주독립을 추구하였던 세력들에게는 조선의 자주권을 대외적으로 처음으로 인정한 문건으로 평가되었다.제 2관의 내용은 표면적으로는 일본정부와 조선정부가 사신을 상대국의 수도에 파견하면, 외교사문의 최고책임자가 이를 맞이하여 외교적인 업무를 처리해야 한다는 것으로 상호 호혜와 대등한 관계를 규정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조항은 사신의 상대국 수도 체류기간과 파견시기 등에 대해서 대단히 포괄적으로 규정함으로써 수도에 외교사절에 상주와 나아가 상주외교공관 설치를 가능케하고 있다.제 3관은 외교문서에 사용하는 언어와 문자에 관한 규정으로 일본은 일본어를 사용하며, 조선은 한문을 사용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비록 일본이 한문번역문을 첨부하기로 하였으었다.
신라사의 새로운 열쇠 : 울진 봉평신라비{< 목 차 >Ⅰ. 들어가며Ⅱ. 비문의 판독 및 내용Ⅲ. 비문의 의미Ⅳ. 논쟁점 - 부체제설 비판을 중심으로Ⅴ. 나오며Ⅰ. 들어가며현재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삼국시대의 비석은 모두 스무개 정도인데, 대부분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 있었거나 국가적인 의미가 있는 지역에 세워져 있다. 이미 알고 있다시피, 진흥왕 순수비가 그렇고, 중원 고구려비가 그러하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었던 국가적인 의미, 즉 순수비와 중원 고구려비가 세워진 곳처럼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를 차지하고 나서 세운 것이라든지, 그것도 아니면 광개토대왕릉비처럼 무덤의 앞에 세운 것들과는 다르게 그다지 크게 주목받지 못하던 지역에서 비석이 발견되었다.그것은 바로, 지난 1988년 경상북도 울진에서 발견된 봉평비로, 높이가 2미터 4센티라고 하니까, 현재 남아있는 신라 비석 가운데 가장 큰 것이다. 게다가 현재 남아있는 신라 비석가운데 가장 많은 글자를 담고있어, 학계의 관심도 집중되었다. 비석에 새겨져있는 글자는 모두 398자로, 이 가운데 약 30자는 심하게 훼손되어 알아보기 어렵지만, 나머지는 판독이 가능하다.지난 1988년, 경상북도 울진에서 발견된 비석과 같이 금석문에 주목하는 이유는 오랜 옛날, 이 땅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으며 당시의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는지를 밝혀주는 것은, 과거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특히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직접 세운 비석은, 고대사의 연구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자료가 된다. 왜냐하면, 과거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손으로 직접 기록한, 살아있는 역사이기 때문이다.봉평비는 지금으로부터 약 1500년 전, 신라인들이 세웠다고 알려져 있는 것인데, 봉평비의 발견은 금석문상, 그리고 한국 고대사에서 큰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봉평비는 종래의 기록에 보이지 않는 내용이 많이 들어 있어서, 당시 신라에 대한 모습을 밝혀줄 수 있는 중요한 비라고 할 수 있다.이번 발표에서는 398개의 글자가 새겨진 봉평비를 통해, 고대 ) 이 일을 맡은 대인은 훼부의 내사지 나마, 사훼부의 일등지 나마와 구사 사족지, 훼부의 비수루 사족지, 거벌모라촌의 도사인 졸차 소사제지, 실지의 도사인 오루차 소사제지이다.거벌모라의 니모리 일벌과 미의지 파단과 지사리 일.지와 아대혜촌의 사인인 내이리는 곤장60대, 갈시조촌의 사인인 나이리 거.척과 남미지촌 사인인 이.는 곤장 100대 어즉근리도 곤장 100대6부 관리들이 모즉지매금왕을 비롯한 열세명이 교시한 내용을 현지에 가서 직접 이행한 사실을 기술한 부분이다. 즉, 6부가 얼룩소를 잡고 하늘에 제사를 지낸 다음, 여섯 대인이 판결을 집행한 내용이 단락의 요지다. 이 단락에 실지군주가 나오는데, 그가 비를 세우거나 지방민 처벌을 총괄한 책임자인 것으로 본다.여기에 기록된 사람들은 왕경6부 출신의 중하급 관료에 해당한다. 소를 잡아 제사지낸 사례는 앞서 냉수리비의 경우에도 보인다. 살아 있는 동물을 죽여 생명의 원천이자 상징인 피를 여럿이 나눠 마신다든지 얼굴 등에 바름으로써 목숨을 걸고 약속을 지키겠다는 다짐을 했던 것이다.실화에 대한 처벌내용으로 여기에 보이는 사람들은 그 책임의 경중에 따라서 각기 곤장 60대와 100대씩을 맞았던 것이다. 이들은 모두 이 지역 지방민 출신의 유력자들이었다. 출신지와 직책으로 보면 이들은 모두 4개촌에 소속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니 이 4개의 촌들이 화재의 실제 피해지역일 것이다. 많은 군사 즉, 대군의 동원은 전통적으로 부역에 동원된자로 볼 수 있어 지나치게 군사동원과만 관련지어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悉支軍主喙部介夫智奈麻節書人牟珍斯利公吉之智沙喙部善文吉之智新人喙部述刀小烏帝智沙喙部牟利智小烏帝智1立石碑人喙部博士于時敎之若此者獲罪於天212223居伐矛羅異知巴下干支辛日智一尺世中子三百九十八실지의 군주인 훼부의 이부지 나마가 지휘하였다.글을 쓴 사람은 모진의 사리공 길지지와 사훼부의 약문 길지지이고, 글을 새긴 사람은 훼부의 술도 소오제지와 사훼부의 모리지 소오제지이며, 돌 비를 세운 사람은 훼부의 박사인데 이때에 깨우쳐 별하였고, 나아가 지방민들을 다시 공민과 노인으로 구분하여 차별한 것이다. 노인과 노인법은 6세기 신라 지방 통치의 구체적인 양상을 알려주는 새로운 사료인 것이다. 특히 고대사체계를 정립하는 데 큰 도움을 준 내용이 바로 간지라고만 일컫는 본피부, 사피부 잠훼부 소속 인물들의 존재이다.{관직부명인명관등훼모즉지매금왕사훼사부지갈문왕본피.부지간지잠훼미흔지간지사훼이점지태아간지(대아찬)사훼길선지아간지(아찬)사훼일독부지일길간지(일길찬)훼물력지일길간지훼신육지거벌간지(급찬)훼일부지태나마(대나마)훼일이지태나마(대나마)훼모심지나마사훼십부지나마사훼실이지나마.사대인훼내사지나마사훼일등지나마사훼구사사족지(조위)훼비수루사족지(거벌모라도사)훼졸차소사제지(사지)(실지도사)훼오루차소사제지실지군주훼개부지나마서인훼모진사리공길지지(길사)서인사훼.문길지지신인훼술도소오제지(소오)신인사훼모리지소오제지입석비인훼(박사)위의 표를 보면, 훼부와 사훼부 소속 인물들은 관등을 보유하고 있으나, 사피부, 본피부, 잠훼부 소속 인물들은 단지 간지만을 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냉수리비에 훼부와 사훼부 소속 인물 가운데 관등을 보유하지 못한 인물들이 보이는데, 냉수리비를 건립할 때까지 17관등이 모두 정비되지 않아서 그들은 관등을 받지 못한 것으로 추측된다. 17관등은 520년(법흥왕 7)에 정비하였다.이제까지 6부인은 모두 관등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봉평비에 본피부와 잠훼부 소속 인물들은 17관등이 아니라 단지 간지만을 칭하고 있을 뿐이었다. 결국 간지는 관등이 아니었다는 결론이 도출되었다.간지(干支)는 다른 사서에서 간(干), 한기(旱岐), 간기(干岐)라고도 표현하였다. 여기서 지支, 기岐는 간(干)과 한(旱) 뒤에 붙는 존칭어미일 뿐이다. 관등 명칭에 자주 보이는 찬 이란 표현도 간이나 한과 의미가 같다. 카간은 군주를 뜻하는 몽골 용어로, 돌궐이나 유연, 위구르 제국 같은 북방 유목민족의 군주들을 대대로 카간이라고 불렀는데, 신라나 가야에서도 군주를 간(간지)이나 또는 한(한기)이라고 불렀다.그, 『韓國古代史硏究』17, 2000, 65~69쪽, 토론내용.) 그래서 본 발표문에서는 비록 구분이 모호한 점이 있지만 전미희의 의견대로 단위정치체설 과 행정구역설 로 구분하여 논의를 정리하고자 한다.의 견해로 구분된다. 이들 견해는 1998년 이종욱이 단위정치체설에 기초한 부체제설 을 비판하면서 대립이 표면화되었는데, 6촌과 6부의 형성 문제 및 나아가 삼국사기 초기기록에 대한 인식의 문제와 연계되어 계속적인 논쟁을 예고하고 있다.{) 특히, 이종욱의 경우 신라의 초기국가 형서·발전과 통치체제, 신분제도 등 거의 모든 문제를 부체재를 주장하는 연구자들과 다르게 보고 있다.1) 6부의 성격 : 단위정치체설과 행정구역설우선은 6부의 성격에 대한 단위정치체설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단위정치체설은 봉평비와 냉수비의 발견 이후 6부의 성격 변화 시점을 둘러싸고 보다 다양한 견해들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봉평비와 냉수비 단계의 6부가 단위정치제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는 점에는 대체로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전미희, 「冷水碑·鳳坪碑에 보이는 신라 6部의 성격 -單位政治體說에 대한 검토를 중심으로-」, 『韓國古代史硏究』17, 2000, 221쪽.)단위정치체설은 部가 자체의 관인조직을 가지고 소속 부민들에 대하여 자치적인 권한을 행사하는 독립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는 견해이다. 각 부에는 部主 혹은 部長이라고 불릴 수 있는 세력이 존재하였고, 이들은 部의 長에게 통제를 받으며 연맹체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이 단계에서 部民들은 국가와 소속 부에 이중으로 귀속된 상태에 있었다고 한다. 부체제 란 이러한 성격을 가진 部들이 단위정치체로 기능하면서 정치에 참여한 형태를 말하는 것으로, 신라의 정치발전단계는 단위정치체적인 성격의 부가 행정구역적인 성격의 것으로 변화하면서 부체제단계에서 중앙집권적인 영역국가체제 단계로 발전해 나갔다고 보고 있다.반면에 행정구역설은 신라의 왕이 새로운 사로국을 형성할 때 이미 6촌(6부) 전체를 지배하는 군주가 되었다고 본다. 즉, 신라의 왕들은 한 인식』, 풀빛, 1998.여기서 단위정치체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수정론의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긍정론의 시각은 행정구역설을 구성하는 가장 주요한 전제가 되고 있다.(1) 시조의 성은 박씨이고 이름은 혁거세다. 전하 효선제 오봉 워년 갑자 4월에 왕위에 오르니 왕호는 거서간이다. 그 때 나이가 열세 살이었다. 나라 이름을 徐那伐이라고 하였다. 이보다 앞서 조선의 유민이 산곡 사이에 나누어 살며 6촌을 이루었는데 1은 알천양산촌, 2는 돌산고허촌, 3은 취산진지촌, 4는 무산대수촌, 5는 금산가리촌, 6은 명활산고야촌이라 하였으니 이 것이 진한 6부로 되었다. 고허촌장 소벌공이 양산 기슭 나정 옆 숲 사이에서 말이 무릅을 꿇고 우는 것을 바라보고 곧 가서 보니 문득 말은 볼 수 없고 단지 큰 알이 있었다. (그것을) 깨니 갓난 아이가 나왔다. 곧 데려다 길렀는데 나이 십여 세가 되자 기골이 준수하고 숙성하였다. 6부인들은 그 출생이 신이하여 높이 받들고 존경하였는데 이 때에 이르러 임금(君)으로 삼았다. (『삼국사기』1, 시조 혁거세 거서간)(2) 진한의 땅에는 옛날에 6촌이 있었다. 1은 알천양산촌인데…. 전한 시절 원년 임자 3월 1일 6부의 조들이 각기 자제들을 거느리고 알천의 언덕 위에 모여 의논을 하였다. 우리는 위로 君主가 없어 백성들을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에 백성들이 방자하여 저 하고자 하는대로 하니 어찌 덕이 있는 사람을 찾아 군주로 삼고 입방설도(立邦設都)하지 않겠는가 하였다.…두 성인이 나이가 열세 살이 된 오봉 원년 갑자(기원전 57년)에 남자는 왕이 되고 여자는 후가 되었다. 나라 이름을 徐羅伐 또는 徐伐이라 하고 혹은 斯羅 또는 斯盧라고 하였다. (『삼국유사』1, 기이2, 신라시조 혁거세왕)행정구역설에서는 『삼국사기』, 『삼국유사』의 기록되어 있는 신라의 건국신화를 통해서 사로국 형성 이전 사로지역에는 6촌이 있었고 촌에는 각기 촌장이 지배세력으로 있었다고 본다. 그리고 기원전 언제쯤인가 혁거세가 사로국의 군주가 되며 6촌을 통합한 사것이다.
과목명 : 교육과정 및 교육평가Alkin 모형(= CSE) 모형)1. 평가의 정의 : 의사결정자가 선택할 수 있는 여러 대안 중에 최선의 방안을 선택하는 데 필요한 데이터를 요약?정리하여 제공할 목적으로 의사결정을 내려야 할 사안 또는 영역을 확인해서 관계 정보를 선정, 수집, 분석하는 과정을 말한다.2. Alkin 모형에서는 프로그램 실행과 프로그램 개선을 분리하여 각각 독립적으로 평가하지 않으면 정확한 프로그램 평가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역설하면서, Stufflebeam이 말한 과정평가를 프로그램 실행평가와 프로그램 개선평가로 나누고 상황평가를 체제사정과 프로그램 계획평가로 구분한 점이 다르다.3. 평가절차1) 체제사정평가 : 특정 상황에 적합하거나 또는 필요한 교육목표를 선정하기 위해 교육목표의 폭과 깊이를 결정하는 데 있어야 할 정보를 수집하는 과정이다. 추구하고자 하는 목표(goal)와 현재의 상태(present state of affairs)간의 격차를 요구(needs)라고 했을 때 학생, 지역사회, 국가, 학계의 요구를 확인하여 교육을 통해 기대하는 요구와 체제 및 현상의 차이를 확인하고 비교하는 평가이다.정보를 수집하고 보고하는 방법으로는 관찰, 조사, 면담, 토의 등이 있으며, 평가보고서에는 역사적으로 서술, 정리한다.2) 프로그램 계획평가 : 체제사정평가에서 확인, 선정한 체제의 교육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여러 방안 중에 가장 효과적인 방안을 선택하는 데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는 과정을 말한다. (= CIPP의 투입평가)① 내적 평가방법(internal evaluation procedures) : 프로그램의 목표가 달성될 수 있게 하기 위해 재생 또는 복사 가능한 부분의 범위를 검토하고 프로그램의 스타일, 구성, 실용성, 비용 등을 평가한다.② 외적 평가방법(external evaluation procedures) : 유사한 장면에서 프로그램을 실행했을 때의 실행효과를 컴퓨터 시뮬레이션, 델파이 기법을 이용하여 프로그램을 적용할 수 있는 일반화의 범위를 평가하는 방법이다.3) 프로그램 실행평가 : 프로그램을 선택, 결정한 다음 실제로 프로그램을 운영했을 때 프로그램 계획평가 단계에서 기대하고 결정한 사항이 어느 정도 충족되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과정을 말한다.평가방법은 참여적 관찰, 면담, 토의, 조사 등과 같은 방법을 많이 이용한다.4) 프로그램 개선평가 : 프로그램 개선, 보완에 필요한 정보가 주어지면 즉각적으로 개입해서 적절한 조치를 취하고 그 효과 또는 변화를 확인, 검증하는 것을 말한다.프로그램 개선평가에서는 개선조치에 따른 변화 또는 효과를 실증하는 실험법을 많이 사용하지만 실험실과 같은 상황에서 수행된 평가결과와 실제 현장에서 이루어진 평가결과에는 가끔 현저한 차이가 나타나기 때문에 현장연구 형태의 준실험적인 방법이 강력히 권장되고 있다.
世祖·成宗代의 政治動向과 經國大典 編纂{{과목명 : 조선시대사{< 목 차 >1. 머리말2. 세조대의 정치동향1) 수양대군의 왕위찬탈 과정2) 세조대의 왕권강화와 정치동향3. 성종대의 정치동향1) 예종대의 정치동향2) 성종대의 정치동향4. 경국대전의 편찬과 계승1) 경국대전 이전의 법전 편찬2) 경국대전의 편찬3) 경국대전의 편별과 내용4) 경국대전의 편찬의 사적 의의와 그 특징5. 맺음말1. 머리말태종대의 골격이 잡힌 조선왕조의 통치체제는 세종대에 이르러 더욱 큰 발전을 보게 되었다. 세종 18년(1436)에 의정부의 서사권이 다시 부활되기도 하였지만, 국초의 재상합좌와 같은 것으로 되돌아가지는 않았다. 육조를 중심으로 한 정부의 기본조직은 그대로 보존 되었으며, 집현전과 같은 기관을 중심으로 유교문화가 크게 발전하면서 조선왕조의 정치운영방식은 더욱 원숙한 단계로 들어서게 되었다. 그러나, 세조가 조카인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에 오르면서 조선의 정치사는 전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본고에서는 세조의 찬탈과정에서부터 세조가 자신의 정적들을 숙청해 가면서 왕권을 확립해 가는 과정을 살펴보고, 세조 이후 예종을 거쳐 성종대의 정치동향과 함께 조선왕조 통치의 법적 기초, 즉 통치규범체계 확립에 기초가 되는 경국대전의 편찬과정과 사적의의를 살펴보겠다.2. 세조대의 정치동향1) 수양대군의 왕위찬탈 과정{) 현재 단종폐위과정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는 『조선왕조실록』은 세조 집권 후 『노산군일기』로 편찬되었고, 肅宗 30년(1704)에 와서야 『단종대왕실록』이라 改名되었다. 즉, 『노산군 일기』와 『세조실록』은 세조 즉위를 정당화시켜 놓은 대표적인 사료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진성규, 「世祖의 執權過程과 順興」, 『중앙사론』 제 10·11합집, 중앙사학연구회, 1998, pp.55~56, 참고.)세종이 재위 32년 만에 돌아가고, 세종을 대신하여 정사를 처결하던 세자 문종은 37세로 등극하여 왕세자 때에 쌓은 정치력과 학문을 바탕으로 언로를 확대하고, 문·무신을 , 동북지방민의 감정을 자극하여 반항세력을 형성하였다. 이러한 유형의 반란은 세조 14년에 일어난 이시애의 난에서도 볼 수 있다. (한영우, 「王權의 確立과 制度의 完成(世祖-成宗), 『한국사 9 - 조선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국사편찬위원회, 1981, pp. 193~194. 재구성.)을 일으키자 內外兵馬都統使가 되어 군사까지도 총령하였다. 이에 단종의 왕권은 더욱 약화·고립되고, 유교적 군신관에 입각하여 왕위를 유지하기에 급급하였다. 수양대군 일파는 유교적 명분의 저촉을 극복하기 위해 단종의 선위를 강요하였고, 급기야 단종 3년 윤 6월에 단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다.계유정난 이후 세조 2년(1456)에 걸쳐 세조의 집현전관 융화책에 따라 성삼문·박팽년·하위지 등은 공신에 책록되고 승지와 6조의 참판 등에까지 오르는 우대를 받았다. 그러나 유교적 명분론이 몸에 배인 이들로서는 계유정난은 방관하였지만, 단종의 양위와 세조의 즉위는 수긍할 수 없었다. 게다가 세조가 왕위에 오른 후 정국 주도권이 세조 측근공신들에게 넘어가면서 자신들은 소외세력으로 전락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집현전 출신들의 젊은 관료들과 단종 및 문종의 처가 식구들을 중심으로 세조를 제거하고 단종을 복위할 것을 모의하고, 단종의 내락을 받았다. 이어 세조 2년 6월에 상왕·왕·세자가 창덕궁에 임석하여 세조의 誥命을 가지고 온 명나라 사신을 위한 환영 자리에서 왕과 세자를 죽이고 단종을 복위시키기로 하였다. 그러나 거사 당일 세조를 직접 참살하기로 했던 別雲劍이 폐지되고 세자가 불참함에 따라, 거사는 연기가 됐고, 거사의 성공에 대해 회의를 품은 金 이 장인인 議政府左贊成 鄭昌孫에게 고하였고, 이를 정창손이 세조에게 고함으로써 성삼문 등 6인은 체포되어 刑殺되거나 자실하고 거사는 좌절되었다. 이 사건을 死六臣事件 이라 하며 이 여파로 상왕은 魯山君으로 강봉되었고, 곧 폐서인 이 되어 영월에 유배되었다.세조 3년에 다시 金城大君 등의 단종복위기도가 있었다. 금성 대군은 세종의 6남으로 수양대지를 통하여 왕권확립에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세조 원년 8월에 의정부 서사제의 폐지와 6조직계제의 실시를 천명함으로써 국정운영체제를 국왕중심체제로 개편하였고, 자신의 뜻을 받들어 정치를 담당할 측근 관료집단과 왕권을 보호할 군사집단을 구축하였다. 또 자신에게 순종하는 자는 우대하고 거역하는 자는 가차없이 처단하며, 유교를 억압하고 대간의 활동을 탄압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였다.또한, 세조는 종친·공신과 승정원승지를 중요하고 파격적으로 발탁하여 측근 세력화하였다. 종친의 참여는 원래 금지되었지만, 세조는 법과 절차를 무시하고 이들을 중용하였다. 세조 13년과 14년에는 구성군 준을 都摠管에 임명하였다가 이시애난이 일어나자 토벌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토평하도록 하였고, 다음 해에는 젊은 나이의 그를 領議政으로 삼는 등 20여 명의 종친을 6조와 군직에 기용하였다.그리고, 세조는 공신을 발탁하여 의정부·6조·승정원과 고위 군직에 포진시켰으며, 세조 원년부터 13년까지는 이·병조를 分房한 승지는 이·병조의 판서·참판과 함께 문·무관의 인사에 참여하여, 왕의 주요국정을 의논하고 처리하였으며, 6조·의정부에 진출하면서 왕권의 토대가 되었다. 또한, 세조는 내금위·別侍衛·甲士 등을 크게 증액하고, 최상층 군직에는 깊이 신임하는 인사를 제수하여 왕권의 토대를 삼았다.세조는 이러한 여러 정책과 함께 『경국대전』의 편찬을 통하여 강력한 왕권과 국왕 중심의 정치체제를 고착시키려고 하였고, 세조 11년(456)까지는 국왕 중심의 국정운영체제가 실효를 거두어 왕권이 강화되고 국왕 중심의 정치가 운영되었다. 그러나 세조 11년 이후에는 신병이 악화되어 세자와 院相으로{) 세조 13년(1467) 명나라에서 사신이 왔을 때는 번거로운 일을 처리한다는 이유로 한명회·신숙주 등의 훈구파의 핵심인물들을 승정원에 나오게 하여 정무를 보게 하였다. 그것은 임시적인 것이었으나 명의 사신들이 귀국한 이후에도 재상들의 승정원 출입은 폐지되지 않고 이후 성종 7년(1476)까지 지속되었다. 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하였다. 따라서, 성종의 초기 정책의 급선무는 왕권의 안정화였다. 그리하여 즉위와 함께 정희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고, 한명회·신숙주 등 원상이 국정을 협찬하였다. 성종 원년(1470년)에 정희왕후와 원상들의 주도로 세조 등위의 교훈을 참작하여 구성군 준을 유배시키고, 성종 2년에는 개수한 『경국대전』에 「宗親不任以事」를 규정하여 종친이 왕권에 위협이 되는 것을 근절하였다. 성종 2년에는 한명회 등 75명과 烏山君 澍 등 1,058명을 좌리공신과 원종공신에 책록하여 왕권의 토대로 삼았고, 생부인 孝敬世子를 추봉하고 신주를 종묘에 봉안하여 왕권을 안정시켰다.성종 6년까지는 세조비 정희왕후가 수렴청정하고 한명회 등 원상이 정국을 주도함에 따라 왕권이 미약하였다. 그러나, 성종 7년부터 15년경까지는 왕권강화를 위한 홍문관의 설치, 대간의 중용 등이 시행되었고, 비록 훈구재신인 정난·좌익·익대·좌리 공신들이 의정부·6조당상을 차지하면서 정치를 주도하기는 하지만 왕권은 이전과 비해 크게 신장되었다.성종 7년에 영의정 한명회가 의례적인 대비환정 반대로 대간의 집요한 탄핵을 받고 해직되고, 이 시기를 전후하여 최항·신숙주·홍윤성·조석문·정인지 등도 대개 사망함으로써 퇴조하고, 의정부·6조의 당상직에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하게 된다.성종 15년(1484)경 이후는 김종직의 제자를 대거 홍문관과 대간에 등용하고 언론활동을 장려함으로써 훈구재상을 견제하였다. 성종 17년부터는 特進官制를 운영하여 경연관이 아닌 문무재상을 차례로 경연에 참여시키고, 경연이 끝난 후에는 특진관·경연관(사림출신의 홍문관관이 중심)과 함께 당시의 현안사와 정치일반에 관한 것을 광범위 논의함으로써 의정부·6조의 기능을 견제하였다. 이와 같이 성종은 의정부·6조를 주도한 훈구재상과 삼사를 주도한 사림출신 관료가 균형을 이루는 가운데 왕권을 안정시키고 강화하였다.성종은 문화적으로도 탁월한 업적을 남겼는데, 세조때부터 간행해오던 『경국대전』을 완성·반포하였다. 『경국대전』은 조선왕조 통치 검상조례사에 대하여 고려말 우왕 14년(1388) 이후 당시까지의 10년간에 걸쳐 공포되어 법령으로 현행되고 있거나, 앞으로 준행해야 할 법령을 수집·분류하여 하나의 법전으로 만들게 하였다. 여기에 領議政 趙浚이 적극 주재하여 완성된 법전을 『經濟六典』이라고 이름지어 태조 6년(1397) 12월 중외에 공포 시행하였다. 『經濟六典』은 우리나라 최초의 성문통일법전이다. 또 『經濟六典』은 조문이 순한문이 아니라 이두와 방언을 섞어 소박하고 쉽게 되어 있기 때문에 『方言六典』 또는 『吏讀元六典』이라고도 불리었다.그러나, 『經濟六典』은 『대명률』처럼 법전으로서의 체제를 갖추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그 중에는 누락되거나 새로 공포된 법령이 있었다. 때문에 정종 원년(1399) 11월에는 사헌부의 상소에 따라 법전의 개수에 착수하였으나, 정종의 재위기간이 2년 밖에 되지 않았으므로 법전개수의 성과는 보지 못하였다.태종 4년(1404) 9월에 태종 즉위 후에 공포된 條令 判旨로서 『경제육전』에 아직 실리지 않은 것 가운데 만세의 법으로 할 것을 수집하여 續六典으로서 頒行할 것을 상언하자 태종은 이를 받아들여 태종 13년 2월에 元六典과 續六典의 2부로 된 『경제육전』을 반행하였다.{) 원육전은 조준 등이 편찬한 『경제육전』의 내용을 거의 바꾸지 않고 다만 방언을 문어로 바꾼데 불과한 것이다. 속육전은 『경제육전』반행 후인 태조 7년부터 태종 7년까지(1398~1407)의 법령으로서 준행해야 할 것을 편집한 것이다. (박병호, 위의 글, p.240.)태종 15년 8월에는 법전편찬의 기본 방침을 세웠다. 즉, 모든 조문은 한결같이 원전을 본위로 하고 원전의 규정과 모순되는 것, 즉 원전의 조문을 개정하는 내용의 속전규정은 모두 삭제하고 부득이 원전을 변경해야 할 경우에는 원전에 실린 조문은 그대로 두고 그 밑에 취지를 각주로 표시하기로 하였다. 이리하여 원전, 즉 『경제육전』은 祖宗(조종)의 成憲(성헌)이기 때문에 존중하여야 하며 속전으로서 변경할 수 없도록 하는 祖宗成憲尊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