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런 논의를 할까?나는 언제나 혼자 생각하는 것을 좋아한다. 혼자 있는 시간이면 따뜻한 차 한잔을 앞에 놓고 창 밖을 보면서 생각에 빠지는 것이 내 취미이다. 그런 생각에는 정해진 범주가 없다. 이 글의 서두도 내 생각으로 시작해 보려고 한다. 이 과제를 가장 먼저 받았을 때 ‘화학과 생활’이라는 과목에서 ‘공자’라니 이게 무슨 의미일까 하고 생각해봤다. 공자의 도덕성을 배우려면 적어도 강좌 명이 ‘동양사상의 이해’정도로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답은 의외로 함께 나온 인물에서 찾을 수 있었다. 바로 아리스토텔레스 그가 적어도 내 생각의 답을 얻는 첩경을 제공했다. 공자 그러면 바로 동양 사상의 대가 이다. 반면에 서양 철학의 대가 하면 소크라테스 뿐만 아니라 이 아리스토텔레스도 빠지지 않는다. 그랬다. 바로 과학도 철학의 아주 작은 부분이고 특히 고대에서는 철학가의 역할에 과학자의 역할도 중첩되어야 했기에 그들의 철학적 사고를 비교하는 것은 동 서양의 철학이 좁게는 동서양 과학의 발전 방향을 파악하는 계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즉 아리스토텔레스와 공자의 철학적 사상의 비교를 통해서 현대 우리 동서양 과학의 현실에 대한 이해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에 미치고 나니 과연 공자면 공자 아리스토텔레스면 아리스토텔레스 어느 하나만 하는 것은 사람 몸의 한쪽만 살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둘을 비교,대조하는 방향으로 논의를 전개하려고 한다.▶서양과 동양 과학의 수준은 얼마나 다르나?동양이 서양에 비해 과거 과학 수준이 상당히 발전해있었다는 것은 기지의 사실이다.그러한 근거로 가장 먼저 들 수 있는 것이 ‘직각삼각형의 작은 두 변의 길이의 제곱의 합은 큰 변의 길이의 제곱의 합과 같다’는 피타고라스의 정리는 이미 그 이전에 "구를 3, 고를 4라고 할 때, 현은 5가 된다." 이 정리는 중국에서 약 3000년 전에 진자라는 사람에 의해 발견되었다는 '진자의 정리'이다. 다른 말로는 '구고현의 정리' 라고도 한다. 이와 같은 예는 징기스칸의 대포류임을 감안한다면 이해가 가리라고 본다먼저 ‘아리스토텔레스’에 관해 살펴보자►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이해플라톤은 이상주의자이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경험주의자라는 도식이 희랍 철학에 관심이 있는 일반인들의 머리 속에 자리잡고 있는 경우가 많다.1.아래스토텔레스의 학문구분공리적인 기하학체계에 깊이 매혹되어 인간의 적합한 모든 지식이 몇몇 제일 원리로부터 논 리적으로 도출되는 통일적인 공리체계로서 정립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플라톤과는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서로 어느 정도 차이를 갖는 각각의 학문의 독립성을 무시하지 않았다.아리스토텔레스는 지식을 그 관련된 목적에 따라 세 종류로 나누었다.이것은 그 대상에 따라 다시 자연학, 제일철학(신학과 형이상학이 혼용),개별과학으로 나뉜다형이상학 Z편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에 대한 탐구와 실체에 대한 탐구를 동일시한다.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의 실체란 무엇인가?2.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 개념아리스토텔레스는 「범주론」애서 술어의 유형을 여러 가지로 나누고 있는데 그것의 큰 줄기를 아리스토텔레스는 범주라고 한다. 이러한 언어상의 유형은 곧 존재상의 유형을 반영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체의 범주와 다른 여타의 범주(성질, 관계 등)를 나누고 실체의 범주가 일차적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다른 범주들이 단지 실체와의 관련 하에 서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체의 조건으로 아리스토텔레스가 내세우는 것은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두 조건을 모두 만족시키는 것을 소위 제일 실체로 분류하는 데 여기에는 개체들이 속하며, 종(species)이나 유(genus) 등은 이러한 의미에서 엄밀히 실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제일 실체를 포괄하고 있으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것들 을 이차적인 의미에서의 실체라고 분류하고 있다. 범주론에서의 그의 설명은 실체의 독립성을 강조한 것이다. 실체는 어떤 (특정한) 성질 없이 존재할 수 있지만 성질들은 단 지 어떤 실체의 성질로서만 존재할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은 하나하나의 보편적 성질들에 일차적인 존재를 부여 변화를 구제한 후 그가 설명하는 변화의 세 기본 요소는 다음과 같다. 우선 변화의 시점과 종점이 있어야 하며 이것은 서로 반대되는 성질이다. 하지만 이것만 있어서는 변화가 아닌 생성과 소멸이 있을 뿐이다. 변화의 기저에는 변화를 겪으면서도 동일성을 유지하는 어떤 것이 있어야 하며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을 기체 (hypokeimenon; substratum)라고 부른다.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변화를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누는데 그것은 각각 실체의 측면(생 성, 소멸), 질의 측면(변질), 양의 측면(증가, 감소), 장소의 측면(운동)에서의 그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분류에서 실체의 변화는 특별한 지위를 가지는데 그것은 다른 변화에서 는 어떤 개체가 변화의 기체로서 얘기될 수 있는 반면 실체의 변화에서는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여기서 실체를 질료와 형상으로 나누고 생성과 소멸의 경 우에 있어서는 질료가 그 기체의 역할을 한다고 설명한다.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을 변화의 기본단위를 물, 불, 공기, 흙이라고 하는 엠페 도클레스의 운동설명에 비교해보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단지 운동에 관련된 질료들을 넘 어서 어떤 운동의 개념이 본질적으로 지니는 일반적 구조를 지적하여 운동을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말하는 방식이 대상세계의 존재방식 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에서 이러한 논의를 일상언어에 대한 체계적 분석을 통 해 전개한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공자의 철학에 대한 탐구공자는 아리스토텔레스와는 차이가 있었다.공자에 대한 논의에 들어가기에 앞서 다음 제시할 자료는 ‘동양사상의 이해’라는 과목에서 조사한 보고서임을 밝힙니다.1. 공자의 생애중국 노나라의 사상가이며 유교의 창시자인 공자의 이름은 구(丘)이고 자(子)는 존칭이다. 예수·석가·소크라테스와 함께 세계 4대 성인으로 일컬어진다. 은나라 왕족의 혈통을 이어받았으나 3세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서 가난하게 자랐다. 공자는 17세 때부터 관직에 나갔으며, 창고지기와 목부마 시행되고 있었다. 이에 비하여 전국시대에는 주 왕이 완전히 권위를 잃고 이전의 예적 질서도 시행되지 않아 제후국이 서로 쟁탈을 반복했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시대에는 일관된 역사의 흐름도 발견된다. 그것은 분열로부터 통일로 향하는 움직임이다. 춘추시대에는 초기에 서주 이래의 제후국이 170여 개국이나 분립하고 있었으나 점차 제후국 상호간의 공방과 동맹을 통하여 패자에 통솔되면서 일종의 제후국연합을 이루 게 된다. 더욱이 그 과정에서 약소국은 점차 대국에 병합되어 주권이 없는 지방도시로 전락하고 이에 따라 대국의 규모는 보다 확대되어 전국시대에는 진·초·제·연·한·위·조의 7대국으로 병합된다. 이리하여 진·한 제국에 선행하는 소 제국의 대립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이러한 추이의 배후에는 지배집단 내부의 변질과 군주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관료제의 성립이라는 요인이 작용했으며 특히 농업생산의 발전에 따른 농촌사회의 변화, 화폐경제의 발달, 상업의 성행이라는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이러한 요인들은 춘추·전국 시대를 통하여 일관되게 전개·발달되었던 것이다.3. 교육가로써 공자일개 私人의 자격으로 공자는 자질이 좋다고 생각되는 사람이면 누구나 제자로 받았으며, 종래의 정치와는 다르지만 공자의 생각으로는 훨씬 더 좋은 정치를 구현하려는 목적으로 그들을 교육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교육목적은 실제적인 것이었으나, 좁은 의미에서의 실제적인 것은 결코 아니었다. 비록 교육의 목적은 善政을 구현하는 것이었지만, 그 교육의 결과 모두가 유능한 행정가가 되어야 하며, 그 이상은 아무 것도 필요 없다는 것은 아니었다.실제로 그것을 훨씬 넘어서서, 교육을 받은 사람은 모든 관점에서 가능한 한 이상적인 인간이 되어야 하며, 특정한 기술만 가진 단순한 전문가가 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것이다.공자는 지혜가 있고 탐욕스럽지 않으며 용감하고 교양도 있을 뿐 아니라 禮樂에도 정통한 사람을 이상적인 인간이라고 정의한 적이 있는데, 이것이 공자가 제자들에게 제시한 모범이었음에 틀림면, 세계의 질서도 안정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수양을 위해 부모와 연장자를 공손하게 모시는 효제의 실천을 가르치고, 이를 인의 출발점으로 삼았으며, 또 충(忠) 즉, 성심을 중히 여겨, 그 옳고 곧은 발로인 신(信)과 서(恕)의 덕을 존중했는데, 이러한 내면성(內面性)을 중시하고 전승(傳承)한 것이 증자(曾子) 일파의 문인이다. 그러나 공자는 또한 인의 실천을 위해서는 예(禮)라는 형식을 밟을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예란 전통적 ·관습적 형식이며, 사회규범으로서의 성격을 가진다. 유교에서 전통주의를 존중하고 형식을 존중하는 것은 바로 이 점에 입각한 것이며, 예라는 형식에 따름으로써 인의 사회성과 객관성이 확실해진 것이다. 이처럼 공자의 사상은 사회적 ·정치적 인간을 위한 도덕이 중심을 이루고 있는데, 그 보편성을 보증하는 것으로서 하늘의 존재도 생각하고 있었다. 공자로서는 하늘이 뜨거운 종교적 심정으로 받들어지는 불가지(不可知)의 존재였지만, 이는 인간적인 활동을 지원하는 신(神)일지언정, 인간을 압박하는 신은 아니었다. 공자의 사상은 어디까지나 인간중심주의였다고 할 수 있다.5. 공자의 영향공자는 많은 제자들을 교육하여 인의 실현을 가르치는 한편, 자기자신도 그 수양에 힘써, 인격에 도달했기 때문에, 생전에도 커다란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사후에는 제자들이 각지에서 그 가르침을 전파하였으나, 제자백가(諸子百家)가 일어남으로써 교세가 약해졌다. 이를 다시 일으킨 사람이 맹자(孟子)였으며, 또 전국(戰國) 말기에 순자(荀子)가 이파(異派)의 사상도 받아들여 집대성하였다. 그 후 한(漢)나라의 무제(武帝)가 유교를 국교(國敎)로 택함에 이르러 공자의 지위는 부동의 것이 되었으며, 사실은 각 시대의 유교 내용에는 큰 변화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공자 자체는 이 가르침의 비조(鼻祖)로서 청조(淸朝) 말까지 계속 존경을 받았다. 한국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민국혁명(1912) 후 우위[吳虞]와 루쉰[魯迅]은 공자를 중국의 봉건적 누습(陋習)재훈
들어가며…..”과연 간접 경험으로 인한 지식이 직접 경험으로 인한 지식의 유용성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하는 생각… 어떻게 보면 무척이나 자기 과시욕이 커보이고 또는 어떻게 보면 책에 대한 관심이 적은 자들이 자신의 무지함에 대한 궁색한 변명일수도 있다.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나 자신도 이걸 믿는다.하지만 위의 두 가지의 연유로 인해서 생기는 의무에 대한 회피의 길로 이 생각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럼 너무 궁색하지 않은가? 나 자신이 그렇게 잘나서 책을 안 읽어도 이 세상에 널려있는 지식의 조각들을 머리 속에서 꾸며서 생각할 수 있을 정도의 비상한 머리를 소유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책의 첫 장과 끝장 그리고 그 속에 있는 그림이나 보는 그런 책 기피 환자도 아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날(물론 장구한 세월은 아니었다.)에 비추어 볼 때, 그리고 그 동안의 글을 통한 간접 경험의 유용성면에서 고찰해볼 때, 직접 경험보다 간접 경험의 손을 들어주고 싶은 생각은 없다. 아직까지 내가 삶을 덜 살고 앞으로 겪어야 책의 중요성을 느낄지 몰라도 아직까지는 책보다는 홀로 비오는 차창 밖을 내다 보면서 생각에 빠져보는 그리고 직접 부딪혀보고, 떨어져도 보고, 힘들어해도 보고 그러면서 배우는 것이 그리고 생각하는 것이 더욱 인생에 도움이 되고 더 큰 힘을 발휘하는 것 같다.하지만 이렇게 책을 반기지 않는 나로서도 괴상한 버릇이 있다. 그건 책을 읽고나서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는 절대로 받아 들이지 않는 다는 것이다. 그대로 받아들이고 줄거리만 기억하면 그게 무슨 의미인가보다. 내 생각에 책이란 아니 다른 것도 마찬가지 이듯이 우리의 인생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읽음으로써 얻는 재미와 감동도 있겠지만 그것을 읽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정보, 생각할 거리, 그리고 그로 인한 우리의 세상에 대한 안목을 넓혀주는 것이 바로 책의 유용성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시집류의 직접적 감흥에 호소하는 글보다는 수필과 같은 또는 이책과 같이 어떠한 무모르고 몇 날 며칠에 걸쳐서 읽고 또 읽었다. 가방 안에 넣고 다니며 오는 길 가는 길에 그 속에 그려진 그림이나 사진을 보면서 다녔으니…그때의 책을 지금 들쳐보면 역시나 생물에 관한 부분은 ‘공룡’이외에는 손댄 흔적이 별로 없다. 이렇듯 처음부터 생물에 관한 관심이 적었었고 그래서인지 평소에도 생명에 신비에 관한 주제는 거의 생각의 소일거리가 되기 힘들었다. 생물이라 함은 수업시간에 마지 못해 배우고, 외울 것은 외우고, 시험 날 가서 그동안 배운 것을 다 던져놓고는 아주 빠른 걸음으로 뒤돌아서 나와버리는, 시험장을 벗어나는 순간 싹 잊혀지는 그런 과목이었다.그래서인지 손위선배로부터 이 책을 받았을 때 약간의 거부감이 스쳐갔다.’Double helix’라 이는 생물을 잘 모르는 나에게도 수업시간에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단어다. 책에 대한 믿음이 원래부터 적은 나인데다가 그것도 생물에 관련된 책이라니 선뜻 손이 가지 않아서 그냥 책 장속에 깊숙이 넣어두었다. 다시는 보지말자고 혼자서 되내며…그런 기대도 잠시 우려했던 대로 수업시간에 이책을 읽는 것이 과제로 던져지고, 아무리 새로운 생각을 하고 싶더라도 학점이라는 제도에 얽매여있는 학생인 나로서는 과제는 선택이 아니라 의무였다.다시 보지 말자는 이별의 말을 남긴지 얼마 안되어 자신을 찾게 되리라는 믿음이 있었던지 책장에서 다른 책들보다 앞으로 툭 튀어 나와있었다. ‘그래도 시나 소설이 아니라서 천만다행이다’라는 생각과 함께 책장의 처음을 넘겼다.하지만 처음 이 책을 접하는 것이 쓸모 있는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위안으로 읽어내기에는 힘들 듯 싶었다. 항상 그래왔듯이 처음의 목차를 보고 한번 쓱 보면서 가장 먼저 느낀 것이‘아! 힘들겠다’ 였다. 중간 중간에 그려진 그림이라던지, 학자들의 이름, 이 모든게 그렇게 만만하게 펼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 같았다. 또 항상 마찬가지듯이 나의 욕망과 상응하는 일은 한시간을 해도 십분 같이 느껴지고, 그와 상반되는 상황에 놓이면 한시간이 십분 같이도 느껴지듯이 마음에를 타고 산의 정상에만 오르다가 두 손, 두 발로 힘들여서 한걸음 한 걸음 올라가는 도중에 밑을 보고 후회도 하면서 산을 올라 올라 결국은 산정에 도착하였을 때의 느낌이라고 할까? 여기에는 내용이 나에게 어마어마한 감동을 주었구나 하는 따위의 느낌보다는 힘들게 글을 읽어낸 후에 ‘참 고생했구나’ 하는 데서 오는 감이 컸다.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해보니 이렇게 힘들게 읽어낸 것에 비해서 내용은 의외로 간단 했다.두 줄 세 줄의 지면의 낭비 없이 ‘DNA 구조에 대한 탐구 과정’이라고 요약해도 작가의 의도와는 별반 차이가 없을 것 같다. 즉 작가인 왓슨(James D.Watson)이 몇 번의 시행 착오를 발판 삼아서 끈질긴 사고와 연구 끝에 DNA구조를 밝혀내는 과정을 이미 밝혀낸 뒤에 과거를 돌아보면서 쓴 글이다.나중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은 도움되는 내용도 있었다. 하지만 몇 가지 불만사항도 없지는 않았다. 이러한 불만 사항은 모두 이기적인 것이라 여겨진다 머리가 비상한 누군가가 보면 말도 안 된다고 자기가 싫어하는 글이라고 불평만 늘어놓는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한 이기심의 발로중 하나가 인물이 너무 다양하다는 것이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몇 장의 메모장을 끼고 다녔다 하나는 틈틈이 읽는 터라 내용의 흐름을 놓칠까봐 하는 작은 염려에서 발로한 메모장이고 또 하나는 바로 인물들을 적고 그 인물들의 역할과 인물들 간의 관계를 도시한 메모장이었다. 겨우 190여 페이지에 달하는 책에서 나오는 인물은 예사의 소설이나 수필의 그것을 초월했다. 심지어 한 장에 처음 보는 인물을 십 여명 가까이 소개(작가는 소개한 적이 없다 그냥 알고 있는 인물이기에 쓴 것일 뿐이다)하기도 했다. 나처럼 머리가 비상하지 못한 독자는 읽기에 애를 먹었을 것이다. 이 사람이 그 사람 같아서 도저히 내용의 구조를 이해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 다른 작가에 대한 불만은 현학적 태도라고 할까? 책을 쓸 때는 자기가 기술한 책을 읽을 대상을 고려하여 쓰는 것이 일반적인 것이람들이 무엇이라고 질책하던 간에 자신의 소신을 가지고 밀고 나가는 장면이 너무나 보기에 좋았다. 초기에 그릇된 구조를 맞다고 착각하여 로지와 윌킨스 앞에서 떠들다가 실패를 맞보고, 그 뒤에 이렇다 할 발전이 없이 하루하루를 지냄에도 그의 DNA구조에 관한 관심과 사랑을 잃지 않고 결국에는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구조를 밝혀내는 모습을 보면서 흥미를 끌 수도 있었다.특히 폴링과 왓슨이 누가 먼저 DNA구조에 대해 밝혀내는가 하는 부분에서는 소설에의 클라이막스에서나 느낄 수 있는 감흥도 받았다.책의 뒷 표지를 보며…무엇을 얻었다. 나에게 무슨 득이 되는 것이 있었느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되리라.그런 득실론의 논의에 앞서 예전에 읽은 책을 두어권 소개하려 한다. 먼저 소개할 책은 내가 학창시절에 가방 옆 주머니에 꽂고 다니면서 오가는 차 안에서 소일거리로 삼았던 ‘초광속 입자 타키온’ 이라는 책이다.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나는 물리나 화학에 대한 글을 좋아한다. 이책을 읽게 된 동기도 거기에 있다. 이책의 내용은 간단하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타임머신이 과연 가능한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이라고나 할까? 답은 부정적이었다. 이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페이지에 수식이 빠짐없이 들어있고 곳곳에는 그래프도 그려져있다. 내용 역시 어떻게 하면 과거로 갈 수 있나? 그러한 물체가 있나?등의 매우 지극히 정보제공에 초점을 맞춘 이야기다.다음으로는 ‘학문의 즐거움’이라는 책이다. 이 책은 아버지의 만류로 공부를 못한 한 일본의 수학자가 늙어서 수학의 노벨상이라는 ‘필즈상’ 을 수상한 뒤에 쓴 자서전의 성격을 띤 글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전혀 자신의 이론이나 수학적 지식이 실려있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자신의 삶이 어떠했으며 그 글을 보는 학생들이 어떤 삶의 자세를 가지고 살아주었으면 하는 내용을 주로 쓰고 있었다. 나도 당시에 이 글을 읽고 많은 감흥을 받은바 있다.내가 여기서 이 두 글을 소개하는 이유를 내용에 관해서 따져보자는 의도로,또는 이 두 글을 추천할 테니 꼭 읽어보라을까 싶다.맨 뒷 장을 덮으면서 내 뇌리 속으로 ‘내가 만약 주인공이었다면…’하는 생각이 지나갔다. 무엇보다 명백한 것은 내 두뇌는 그의 것 만큼 명석하지 못한 터라 그런 발견은 못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또 과연 그렇게 실패의 쓴 잔을 마시면서 한가지의 연구에 매달릴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에도 부정적인 대답을 해야 할 것 같다. 또 나의 순종적 성격인지 우리나라의 문화적 전통의 계승인지는 몰라도 과연 지도 교수의 가르침을 어기면서 까지 연구를 진행시킬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어본다.옛말에 길에 나있는 풀 한 포기에서도 배움을 얻는다는 말이 있다.먼저 왓슨의 여유로움은 이게 배울 점인지 버려야할 점인지에 관해서는 확신이 서지 않으나 그의 파티나 영화를 보러 다니면서 연구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풀고 다시 일상으로의 삶에 돌아와서는 재충전한 에너지를 다시 쓸 수 있는 자세는 삶에 활력을 넣어줄 것 같다. 또 왓슨의 순간적인 착상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물론 그의 끊임없는 DNA구조에 관한 생각은 있었으나 이중 나선이라는 순간적인 착상은 정말로 놀라웠다. 하지만 이 무엇보다 왓슨의 성공은 뚜렷한 목표의식과 그 목표를 향한 끊임없는 정진의 결과라는 것을 주시하고 싶다. 글의 중간 중간에서도 나오듯이 이 시대 왓슨이라는 천재조차도 못 따르는 천재 학자들이 많았다.하지만 그들을 재치고 왓슨은 DNA구조를 밝혀내었다. 과연 무엇이 그에게 이런 영광을 가져다 주었을까?물론 두뇌의 비상함도 일조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다는 아니었을 것이다. 뚜렷한 목표의 선택과 그것을 향한 끊임없는 노력의 경주가 더 큰 부분을 차지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우리 인류의 가장 뛰어난 능력이 무엇일까?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그 때의 대답은 ‘남의 실패나 성공 보고 자기 발전의 계기로 만들어버리는 능력이다’ 였다. 나는 이 책을 읽고 James D.Watson 이라는 사람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여유로운 삶을 살면서 재충전을 재도약의 발판으로 삶
1.치약이란?치약은 간단하게 말해서 치아를 청결하게 하고 연마할 목적으로 칫솔에 묻혀 사용하는 약물성 복합물질을 의미한다.2.치약은 누가 만들었을까?고대 이집트에서 소 발굽의 재, 몰약, 달걀껍질 분말, 가벼운 돌 가루 등을 치약으로 사용하였다. '가루치약(toothpowder)'은 18세기 말 영국에서 처음으로 사용하였고 그 맛을 더 좋게 하기 위해 후에 글리세린(glycerin)이라는 물질을 첨가했습니다. 이 물질은 현대의 치약에도 들어있죠. 현대적인 개념의 치약은 1800년대부터 개발되었습니다. 1873년 Colgate는 미국에서 처음으로 향기가 있는 치약을 선보였는데.. 이 때에는 병이나 항아리에 담에 팔았다는군요.1896년에 소개된 Colgate dental cream은 현재와 같이 짜서 쓸 수 있는 튜브에 담아 팔았는데요... 어쩌면 현대적인 치약의 형태가 여기서 부터 시작된 것 같습니다.비누에 사용되는 성분이 치약에 이용되다가 2차 대전 중에 Sodium Lauryl Sulphate 또는 Sodium Ricinoleate 등의 세정성 합성 물질로 대체되었습니다. 이 물질들은 현대적인 치약에도 사용되고 있습니다.1956년에는 충치 제거에 효과적인 물질로 불리는 불소(Fluoride)가 처음으로 치약에 첨가되었습니다.그러면 어떻게 한국에서 치약을 사용하게 되었을까요?1889년 일본 라이온사의 분말 타입 "가루치약"이 처음으로 등장하였고, 1900년에 본격적으로 판매 되었습니다. 이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대부분의 서민층에서 소금으로 이를 닦고 있었습니다. 1930년 'NO.1'이란 제품명의 가루치약이 생산 판매되기 시작하였고, 1954년 국내 최초로 튜브 안에 있는 연고상의 치약이 생산되었습니다.3.치약은 무엇으로 이루어져있을까?치약의 구성은 먼저 아래의 표에서 보시는 것과 같이 연마재, 발포제, 습윤 제, 점결제, 감미제, 약효성분, 향미제, 보존제 등으로 구성된다.기본구성성 분배 합 비 율연 마 제이산화규소, 침강탄산칼슘20 – 60 %발 포 제라우릴아민트유, 페파민트유0.6 – 3 %보 존 제안식향산 부틸- 치약의 구성성분표-제일 먼저 연마제에 관해서 알아보자. 연마재는 말 그대로 치아 표면을 연마하는 작용을 한다.즉 치아에 부착된 치구, 치석 따위를 제거하며 치아면에 본래의 광택을 주는 작용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연마제로 사용되기 위해서는 다음의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ㄱ.무미무취의 분체로써 색은 백색이 바람직하다.ㄴ.치아의 질을 상하게 하지 않는 경도 3 또는 그 이하에 있는 것을 요한다.(치아의 enamel질의 경도는 6-7)ㄷ.입자의 결정은 침상이나 봉상 등 치아를 상하게 하기 쉬운 형상은 피한다.ㄹ.입자의 지름은 1-20㎛의 작은 것을 요한다.ㅁ.PH은 약산성, 중성 또는 약알카리성이어야 한다.ㅂ.물에 불용성인 것이 좋다.이러한 연마제로 이용될 수 있는 화학종류로는 인산칼슘, 탄산칼슘, 무수규산, 수산화알루미늄등 이있다.먼저 탄산칼륨은 CaCO3(Precipitated Calcium Cabonate)로 입자 직경이 10㎛ 이하의 것이 90%이며 위의 조건을 거의다 만족한다.또 이산화규소(SiO2·nH2O) 입자의 크기가 8㎛ 이하의 것은 점증효과가 있고 보통 20㎛것은 연마제로 사용한다. 뿐만 아니라 콜로이드성이산화규소(실리카)는 균일한 입자의 연마제인 콜로이드성이산화규소(실리카)를 사용하여 자극 없이 프라그의 침착을 예방시켜주 고, 치아를 건강하고 희게 하는 작용을 하여 연마제로 이용된다.다음으로 발포제는 배합된 계면활성제의 작용으로 사용시의 계면장력을 저하시켜 칫솔질의 청소 효과를 높이고 배합되어 있는 약효제의 분산, 침투성을 도와서 그 효과를 높인다. 또한 이 발포성에 의한 기포의 soft한 볼륨감에 칫솔질할 때의 감상적인 안정감과 만족감을 주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이러한 발포제로 쓰이기 위해서는 계면장력 저하 가능, 내경수성, 발포성이 있을 것, 맛, 냄새가 없을 것,독성, 자극성이 없을 것 등의 조건을 만족해야한다.이 조건을 만족하는 것으로는 대표적인 것이SLS ( 라우릴 황산나트륨 건은 친수성으로 보습성이 있을 것, 특이한 맛, 냄새가 없을 것, 독성, 자극성이 없을 것, 무색, 투명일 것 등이있다. 이러한 습윤제의 종류는 글리세린, 솔비톨, 프로필렌 글리콜등의 다가 알코올 (상쾌한 감미를 가지고 있음)이 있다.네번째는 점결제로 이는 치약의 고체성분과 액체성분의 분리를 방지하는 역할을 한다.점결제의 종류로는 C.M.C(Carboxymethyl cellulose), 아라비아 고무, 알킨산 나트륨등이있다.다섯번째로 치약의 구성성분으로 지적 가능한 것이 약효성분이 다. 물론 이 약효 성분이 없다고 하더라도 치약이 안되거나 그 근본적인 목적에서 어긋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특정 약품을 더 첨가 함으로써 충치예방, 농루 예방, 치아미백, 치석의 침착방지, 구취예방 등의 효과를 증강하고자 하는 경우에 첨가되기도 한다.보통 충치예방제로는 치질강화제, 살균제, 효소제가 쓰이는데, 치질강화제는 일불소인산나트륨, 불화나트륨, 불화주석,일불소인산나트륨 이 쓰이며 특히 불소이온은 구강 내 세균들이 부식성산에 의해 치아 범랑질이 녹는 것을 방지하고 칼슘 공급 촉진작용으로 치아를 튼튼하게 해준다. 다음으로 살균제로는 클로르헥시딘류, 라우릴산모노 글리세라이드, 사르코신산아실에스테르, 도데실디(아미노에칠)글리신, 프로폴리스등이 있고, 마지막으로 효소제에는 덱스트라나제, 뮤타나제, 아미노글루코시다제, 글루코스옥시다제 등이 있다.다음으로 농루예방제로는 알란토인, 클리칠리친산디칼륨, ε-아미노카프론산, 트라넥사믹산, 히녹치올, 라이소자임, 비타E 및 그 유도체, 염화나트륨 알란토인 클로로히드록시알루미늄 (구강점막을 보호하여 잇몸염증 방지, 치은염, 치주염에 수반되는 부기, 발적을 예방, 잇몸염증의 통증을 덜어준다.) ,ε-아미노카프론산 (항출혈, 항염증 효능이 뛰어난 아미노카프론산은 뛰어난 지혈작용에 의해 잇몸출혈을 예방한다.)세번째로 치아의 미백제로(주로 연마제의 작용에 의하지만 보조적으로 사용된다) PEG-400, PEG-4000, 폴리비닐피롤리돈, 과산화물 등이 치석제거제가 있다. 이는 치석형성저지 및 제거 작용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EHDP, 폴리인산나트륨, 제올라이트, 구연산, 트리메칠렌포스폰산, 에칠렌디아민 테트라메칠렌포스폰산등이 이러한 작용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여섯 번째로 향미료가 있다.이는 입 속을 깨끗이 하고 아침의 상쾌함을 주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우리가 양치 후 느끼는 상쾌함을 배가 시키는 역할을 한다.또 구강내의 불결한 냄새를 억제하고 맛과 향으로 이 닦는 습관을 심어주는 역할도 한다.일곱번째로 감미 제는 단맛을 느끼게 하는 작용을 하는 것으로 사카린,스테비오사이드(설탕의 100~300배 정도의 감미를 가진 천연 감미료이며 특이한 쓴맛이 있고 설탕보다 단맛의 질은 떨어지나 청량감을 갖고 있는 감미료이다).자일리톨(설탕과 비슷한 단맛을 내며, 뛰어난 청량감을 준다. 치아 표면의 세균막인 프라그 형성을 감소시키고 충치예방 효과가 있다.) 등이 있다.치약 안에는 그 밖에도 착색제, 보존제가 첨가 되어있다.4.치약의 역할과 올바른 치약의 사용법은 어떤 것인가?세치제 즉 치약은 칫솔질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도록 석회석이나 인산일수소칼슘(DCP), 무수인산칼슘(DCPA)등의 세마제와 비누, 합성 세제와 같은 세제 및 기타 약제를 혼합하여 만들어진 혼합물로서 국내에서도 30여종이 제조되고 시판되고 있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치약의 주성분은 세마제와 세제로서 이는 마치 과거에 시골에서 놋그릇을 닦을 때 고운 모래에 비누나 약한 양잿물을 섞어서 수세미로 닦는 것과 원리는 마찬가지이다. 각종 세치 제는 세마 제의 성질과 양에 따라 연마력이 조금씩 다르다. 세마 도는 실제로 치약 선택의 기준이 된다. 구강 내 별 이상이 없는 일반인에게는 중등도의 세 마력을 가진 세치 제를, 치면세균막이 많이 부착된 환자에게는 세마력이 강한 세치제를, 시린니를 각진 환자에게는 세마력이 약하고 지간 둔화제가 함유된 세치제를 권장하며, 어린이에게는 아동용 불소가 함유된 세치제를 사용토록 권장하고 있다. 또한 잇몸 질환을 가진번 구강 내를 물로 헹구어 내어서 가급적 모든 세제 성분을 깨끗이 씻어 제거하도록 하는 것이 좋다5.치약에 관해 얼마나 아나?ㄱ.치약은 비쌀수록 좋은가?아니다. 치약은 약이 아니다. 오히려 구강 세정용 비누라고 보는 편이 옳다. 게다가 이를 닦는 데는 치약보다 칫솔이 훨씬 중요하다. 따라서 비싼 치약일수록 좋은 것은 아니다. 가격보다 신경 써야 할 부분은 마모도 이다. 치태가 잘 끼거나 담배를 많이 피우는 사람은 마모도가 강한 치약을 골라야 하며 이가 자주 시리거나 하루 세 번 이상 칫솔질을 열심히 하는 사람은 마모도가 약한 치약이 바람직하다. 마모도가 강한 치약은 브렌닥스. 소금치약. 죽염치약. 하이얀 등이 있으며 약한 치약은 잔메드. 시린메드. 럭키페리오 등이 있다ㄴ.이는 소금으로 닦는 것이 좋은가?아니다. 소금으로 닦아도 치약 못지않은 구강세척효과를 얻을 수 있다. 소금물은 입 안의 세균을 제거하는 소독작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칫솔질 후 소금물로 입을 가글링하면 잇몸질환의 예방효과까지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소금에 대한 맹신은 곤란하다. 소금은 치약에 비해 입자가 굵어 치아를 마모시킨다. 따라서 소금으로 오래 칫솔질하면 이가 시릴 수 있다. 충분한 세척효과를 위해선 농도가 짙은 소금물이라야 한다. 이때도 물론 칫솔로 닦아주는 것이 좋다.Reference: HYPERLINK "http://kin.naver.com/browse/db_detail.php?dir_id=707&docid=48312" http://kin.naver.com/browse/db_detail.php?dir_id=707&docid=48312 HYPERLINK "http://kin.naver.com/browse/db_detail.php?dir_id=707&docid=23100" http://kin.naver.com/browse/db_detail.php?dir_id=707&docid=23100 HYPERLINK "http://www.dentist21.co.kr/dentaliq2.htm17
(서론처음 과제물을 접했을 때 상당히 고민을 많이 했다. 교수님께서 제시한 ‘학교 체육의 문제점 및 개선 방안’, ‘스포츠 관련 행사를 바라보는 시각의 전환’, ‘당뇨병의 원인과 치료를 위한 운동 방법’ 등의 주제 중에서 무엇을 어떻게 써야지 교수님께서 이야기 하셨던 설득력 있게 다가설 수 있을까하고 수많은 시간 동안 생각했다. 처음 그 과제를 받는 날부터 매 수업 시간에 아니 생각할 시간이 있을 때 마다 그 생각 뿐이었다. 그렇게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하루 하루 제출일이 다가 오는 것이었다.그래서 도저히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어서 그냥 주제 하나를 잡아서 써야 겠다고 생각하고 종이를 펼쳤다. 그리고 처음 주제부터 하나씩 하나씩 읽으며 쓸거리가 있는가를 살펴보았다. 그렇게 해서 두 가지의 주제로 좁혀졌다, ‘학교 체육의 문제점과 개선방안’ 이라는 주제와 ‘스포츠 관련 행사를 바라보는 시각의 전환’이라는 주제로 특히 월드컵에 관심이 많은 나로서는 월드컵을 바라보는 시각의 전환에 대한 글을 쓸 지가 매우 망설여졌다.하지만 그렇게 고민하고 있던 날의 수업 시간에 학교 교육의 문제점에 관해서 배우면서 ‘운동장이 없는 학교가 있다’는 말이 너무나도 충격이 컸고 그로 인해서 나의 과거를 돌아보면서 이 주제로 갈피를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마음을 먹고도 쓸거리가 마땅히 떠오르지 않았다. 쓸려면 자료가 있어야 할 것인데 그 자료는 어디서 구하냐는 생각에… 그러나 그것은 그리 멀리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바로 내가 그 과정을 지내온 학생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 그것이 학교를 졸업한지 얼마 되지 않는 내가 보는 학교 체육이 다른 어떠한 연구원이나 그 외의 사람이 보는 것 보다 우리 교육에 있어서의 체육의 현실을 더 잘 반영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다른 어떤 수업시간 보다 좋아했던 나의 지난날의 초등학교 체육시간부터 고등학교의 체육시간 까지를 거울 삼아 글을 전개 시켜 나가려고 한다.(본론본격적인 논의에 앞서서 선행되어야 할 과제가 있다. 우리가 흔히 어떤 곳이다. 즉 체육은 그러한 활동을 통해서 인간 본연의 움직임 욕구의 실현이라는 본질적 가치와, 체력과 건강의 유지 및 증진, 정서 순화, 사회성 함양이라는 도구적 가치를 동시에 실현할 수 있는 효과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학교의 체육교육은 교육과정에 의해 정규 수업으로 운영되는 정과 체육, 전문운동선수 육성에 초점을 맞추는 학교 엘리트 체육, 여가선용과 생활체육과의 연계성을 지향하는 방과후 체육활동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상의 말한 것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수업시간,방과후에 학교의 연장선 상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체육 활동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그럼 왜 이런 교과 과정 중에 하나인 학교 체육을 중요하게 다루고자 하는 가에 대한 평가가 있어야 앞으로의 전개에 당위성이 부여될 것이다. 먼저 학교 교육은 무엇보다 학생들의 건강에 커다란 도움이 된다. 이렇게 말하면 건강에 도움이 안 되는 체육활동이 어디 있느냐며 반박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아프지 않게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외적인 점에서도 많은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학교 체육이 행하여 지는 때는 주로 인간이 태어나서 가장 많은 성장을 하는 때이다.이를 다른 면에서 보면 학교를 다닐 때 인간의 여생을 살아갈 기본 바탕을 형성하는 몸을 거의 완성한다는 것이다.이러한 중대한 시점에서 학교 체육이 없거나 소홀히 된다면 그 결과는 불 보듯이 뻔한 일이다. 다음으로 학교 체육은 생활 체육의 근간이 된다. 여기서 생활 체육이라 함은 졸업 후에 개인적으로 운동을 하는 등의 우리가 학교를 벗어나서 하는 체육 활동을 의미한다. 만약 학교 체육이 정상대로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학교 체육시간을 통해 여러 가지 운동 종목에 대해 이론을 배우고 그것을 운동장에서 실습해보게 된다. 그 결과 성인이 된 학생들은 생활 체육 속에서 그동안 자신이 학창 시절에 배운 것을 토대로 자신에게 잘 맞는다고 생각되는 종목을 택하여 운동할 수 있게 된다. 마지막으로 체육 시간의 이론 수업에서살펴보자.나는 언제나 체육시간을 기다리곤 한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이 힘들어도 그 날 체육이 있는 날이면 그것 때문에 즐겁게 학교로 갈 수 있었다. 심지어는 체육 전날에는 제발 그 다음날 비가 오지 않게 해주십시오하고 빌기를 할 정도였으니….비가 오면 체육수업이 교실 내에서 자율학습으로 바뀌니 얼마나 간절했으랴. 그날 아침까지 비가 오면 체육시간 전에 운동장에 나가 운동장의 상태가 어떤지 살피고 질퍽 질퍽해서 안되어도 할 수 있다면서 체육을 하려고 애를 썼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허락이 떨어지면 신나하며 운동장에 집합…운동장을 구령소리에 맞추어서 사열로 줄지어 힘차게 다섯 바퀴를 뛰고 다시 모여서 줄 맞추어서 체조를 했다. 이것만 있다면 체육 시간이 기다려 지지 않으리…진짜 기다린 것은 그 다음에 오는 자유 운동이다. 어떻게든 자유시간을 늘일려고 줄도 잘 맞추고 체조도 힘차게 잘한다. 체육선생님은 공을 꺼내어 개수를 세고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놀라고 한다. 그리고 그는 학생들을 뒤로한 채 우리학교의 자랑인 씨름부와 축구부 학생들이 운동을 하는 곳으로 사라진다. 우리는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않고 열심히 삼삼오오 모여서 축구며 농구며 배구를 하며 정말로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하지만 그런 즐거움의 시간도 잠시 한 삼십 여분 뒤에는 ‘삑’하는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집합을 시키고 인원 확인을 한 다음 해산을 한다. 우리는 수돗가에 가서 씻고 얼른 옷을 갈아 입고 다음 수업시간에 대비한다. 하지만 이 즐거움도 비가 오거나 고등학생이 되면 달라진다. 특히 시험기간이 되면 의례적으로 체육시간은 국영수 시간으로 바뀌거나 담임 선생님의 요청으로 자율학습시간으로 돌변해버린다.그럴 때면 창 밖을 쳐다보면서 한 시간을 보낸다.이상은 현재의 학교 체육의 현실을 명백히 보여준다. 학생들의 체육시간에 대한 태도, 교사들의 체육에 대한 태도, 마지막으로 학교나 학 부모의 체육에 대한 생각이 잘 나타나있는 것이다. 그러면 위의 글을 토대로 학교 체육이 지니고 있는 문제점에 대해서 살입장은 교사에게서도 없지 않다. 교사는 체육수업에 관해서 전혀 책임의식이 없다.그냥 학생들을 집합시켜 놓고 인원수를 체크하고, 수업을 마칠 때 인원 체크를 하여서 이탈자가 있나 없나 확인하는 역할과 학생들에게 공을 내어주고 공 개수를 잘 맞추어서 넣어놓는 일이 전부가고 생각한다. 마치 학생들이 가장 좋아하는 체육수업을 안다는 듯이 공을 주면서 ‘니들이 하고싶은 대로 하라’라는 방관자적 입장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역할은 오로지 햑교를 대표하는 체육부에 있다. 자신들이 지도하는 체육부가 대회에 나가서 얼마나 입상을 하느냐에만 관심을 쏟는 것이다. 요컨데 교사는 학교체육을 학생들의 자율 체육이라고 보고 있다는 데서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또 학교나 학부모가 체육시간을 바라보는 시각에도 문제가 있다. 학생들의 정신적, 육체적인 건강을 동시에 증진시켜야 함에도 불구하고 체육은 쓸데없는 과목으로 보고 있다.학교에서는 체육부에 예산을 매우 적게 측정한다. 공이나 몇 개 사주면 그것이 체육수업의 전부인양한다. 또 그렇게 적게 측정된 예산 조차도 학생들이 아닌 운동부 학생들에게 대다수가 들어가게 된다. 또 부모님들도 이에 일조를 하고 있다. 학부모님들은 학교에 학생들의 체육시간을 빼서 다른 성적에 관련되는 과목에 투자해주기를 은근히 기대하고 학교는 이러한 사항을 암묵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마지막으로 학교 체육은 엘리트 위주로 돌아가는 문제점을 들 수 있다. 어느 학교가 체육수업을 잘하는가에 대한 평가는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어느 학교 야구부 또는 축구부가 어느 대회에서 몇 등을 하였다는 것은 매스컴을 통해서 알려진다. 그것은 그 학교가 참 체육시설이 잘 되어있나 보다 하는 오해를 자아낸다.앞에서 말했듯이 학교에서 체육부에 많은 예산을 투자한다. 하지만 그 보다 더 많은 일반 학생들에게는 그의 극히 일부분에 해당하는 예산만을 투자한다.이것이 과연 올바른 현상일까?이상에서 보았듯이 학생은 체육시간을 자율 체육시간으로, 교사는 자율 체육이 원래 체육인양, 학교, 학부육에 대한 잘못된 시각이다.다음으로 교사의 자질과 분위기 문제이다. 대학을 금방 졸업하고 막 학교로 발령받은 교사나 의욕에 넘치는 선생님들꼐서는 학교 체육의 문제가 많다는 것을 안다.(물론 기존의 선생님들께서 모르시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대학에서 배운대로 학교 체육을 바꿔 볼려고 노력한다.하지만 그것이 혼자의 힘으로 하루 아침에 바꾸어지겠는가? 물론 어느 부분은 바뀔지 모르나 그 사람 역시 예전의 ‘아나공’수업으로 돌아가고 만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 특단의 조치가 없는 한 그러한 연상은 지속될 것이다. 또 이렇게 교사가 학생들에게 공을 던져주는 형식의 수업을 하다보니 자연히 자신이 대학을 졸업한 이후에는 체육 교사에게 필요한 정보에 눈을 돌리기 힘들게 된다. 그러니 자연히 수업은 계속 이런 식으로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학교내의 체육교사 사이에 팽배한 분위기와 전문적인 지식 부족이 두번째 학교 교육을 멍들게 하는 이유이다.마지막으로 학교 부모 등이 만들어 내는 원인을 들 수 있다. 학교의 체육수업에 대한 무시 경향은 국영수 과목에 대한 중시에서 나온다. 체육시간이 국영수의 소위 수능에 반영되는 과목으로 대체 되면서 학생들의 지적 수준은 어느 정도 향상되는 반면 몸은 점점 허약해 져가서 몸과 마음의 불균형 상태를 초래하게 된다. 또 학교에서 체육분야에 예산을 적게 투자함으로써 학교 체육시설은 낙후되고 학생들의 올바른 체육 수업을 하는데 커다란 어려움이 되고 있다. 아는 엘리트 체육에 학교에서 적게 측정된 예산을 대다수 투자함으로써 학생 전체가 누릴 수 있는 부분은 더 줄어드는 점에서 더욱 심각한 문제이다.그럼 이 글의 궁극적인 목표인 이상과 같은 학교 체육의 문제에 대한 해결방안에 대해 알아 보자. 앞에서 문제점과 원인은 학생과 교사 그리고 그 외적인 요인으로 나누어 살펴 보았으나 해결 방안에서는 이를 종합한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려고 한다.학교 체육의 정상화를 위한 방안은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해보았다. 먼저 들 수 있는 것이 생각의 전환이다.학생들은 진정다.
1.서론9월 11일 날 저녁에 나는 한가하게 누워서 tv 드라마를 시청하고 있었다.그런데 갑자기 자막으로 미국에서 테러가 나서 국제 무역센터 빌딩이 테러 당했다는 속보가 나왔다.그러더니 잠시후 드라마가 끝나고 뉴스 속보가 터졌다.그것이 바로 작년의 주요 이슈였던 ‘911테러’의 발발이었다. 그로부터 며칠간 티비를 켜면 매번 국제 무역 센터 빌딩을 향하는 장면이 쉴새없이 나왔고, 매일 매일이 지날 때 마다 테러 장면을 다른 각도에서 찍은 비디오가 입수되어 이를 보여주었다.매 뉴스의 헤드라인은 당연지사 테러 소식이었고, 테러의 범인은 누구고 왜 그러한 테러를 저질렀으며, 미국 정부는 앞으로 이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에 대한 분석이 그 뒤를 이었다. 이를 위해 평소에는 듣기조차 힘들었던 CNN방송의 해설자의 말이 연일 들려왔다.그런 보도자료를 한달간 정도 듣다보니 이제는 미국의 보복성 아프가니스탄 공격을 보도하는 자료가 뒤를 이었다.이 역시 앞의 911테러와 별반 다를 것이 없는 보도였다.그렇게 시간은 흘러서 한 달 여 전 미국 911 테러 일주년을 기리는 행사가 있었다. 이제 그 때의 일을 평정심을 가지고 돌아 올 때가 온 것이다. 여기서 중점을 둘 것은 911테러 그 자체가 아니라 바로 그러한 대사건을 현장감 있게 보도하였던 우리의 매스 미디어이다.특히 그 중에서도 그러한 보도의 중심에서 우리의 눈과 귀를 통한 더욱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tv를 중심으로 이야기 하도록 하겠다.TV에서는 특히 우리의 세상을 보는 귀와 눈이 되어주는 8~10시의 뉴스시간대에서는 그 때 정말로 하루도 안 빼놓고 우리 나라에서 일어난 일 인 것처럼 뉴스의 3분의 2를 미국 911테러에 관해서 보도하였고, CNN에서 보도하는 화면을 그대로 따다가 보여주면서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해 주었다. 물론 이것이 우리에게 세계의 대형 참사에 대한 지식을 알게 해주었다는데 대한 이견을 달 이는 아무도 없다.하지만 이러한 우리의 보도 방식이 올바른 것이었나에 대한 질문에는 고개가 갸우뚱거린다하지만 이 사건이 터지면서 그것이 주가 되기 시작한 것이다.이렇게 되자 당연히 우리가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던 것에 대한 보도는 줄어들게 된 것 이다. 이는 현대 생활을 하는 우리에게 많은 정보를 알 수 있는 기회를 날리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다음으로는 이렇게 테러에 대한 기사량이 많아 지면서 그것의 기사 역시도 중복성이 커지게 되었다.앞에서 말했듯이 대다수의 기사가 현상 제시, 원인 분석,그리고 해결책 제시로 되다 보니 이를 따로 따로 보도하려다보니 앞의 내용이 없이는 전개가 어려워 질것이고, 그래서 앞에 말한 것을 다시 한 번 더 보여주게 되는 것이다.그렇게 됨으로써 그 귀한 시간에 쓸데 없이 버려지는 시간이 많아지게 되고 보는 우리로서는 짜증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다음으로 911테러 보도의 문제점으로 들 수 있는 것이 과대 보도이다.그에 대한 말을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좋은 기사화 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을 가져야 한다고 한다.바로 중요성과 흥미성이 그것이다.이 둘 중에서 어느 하나가 빠지더라도 좋은 화제거리가 되기는 힘들다. 이를 911테러에 접목시켜 보면 세계의 평화를 주장하는 초 강대국인 미국이 이렇게 커다란 공격을 당하였으니 그 중요성 면에서 보면은 더 없이 중요한 것이다.하지만 문제는 중요성이 아니라 흥미도에 있다.처음 비행기가 국제 무역 센터 건물 속으로 돌진하는 장면을 볼 때는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하였다.이는 곧 우리의 흥미성을 얻을 만큼 충분하였다.하지만 앞에서 말하였듯이 똑같은 장면이 반복 되면서 우리의 테러에 대한 흥미도는 점점 사그라들기 시작하였다.왜 그렇지 않은가?아무리 재미있는 영화도 한 번 볼 때이지 그것도 여러 번 반복해서 보라. 처음 만큼의 흥미도는 얻기 힘들 것이다.그런 상황이 되자.시청률을 중시하는 현실에서는 시청률을 올리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더욱더 우리에게 충격을 들 수 있는 기사를 써야하고 그 결과 없는 내용을 있는 내용으로 만들어 버린다든지 가능성이 있다는 말을 마치 당연히 일어날 것이로 테러가 났을 때는 그것이 어떤 과정을 통해서 어떻게 부딪혀서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에 대해 객관적인 보도에 중심을 실었다.하지만 흥미성이 떨어지면서 더욱더 감각적인 자료를 찾다가 발견한 것이 전쟁에 대한 우려였다. 당시만해도 시대의 흐름이 되도록 이면 전쟁을 피하고 평화로운 세계를 만들자는 것이었다.하지만 이런 현실적 상황을 무시한 채 우리의 언론은 앞으로의 전쟁의 가능성을 먼저 짚어내었고 그를 뒤 따라서 그러한 전쟁을 어떤 시나리오에 따라 전개할 가능성이 크며, 아프가니스탄의 지형의 특색은 이러하기에 어떠한 신무기가 사용될 것이라는 보도를 내어 놓았다.물론 이러한 보도 때문에 전쟁이 일어났다고는 볼 수 없으나, 어렸을 적에 배운 것 같이 설명하는 글쓰기에서는 어떠한 사건이 일어났다면 5W1H의 법칙에 따라서 객관적인 시각을 잃지 말아야 한다. 그것을 테러 보도에 응용한다면 우리의 보도는 딱 반을 나누듯이 이쪽 저쪽도 아니 될 수는 없으나 최대한 객관적 태도를 유지해야 하였다.그런데 전쟁의 전개 상황을 보여줌으로써 국제 정세에 역행하는 그런 보도를 한 것은 그렇게 옳게 볼 수는 없을 것이다.마지막으로 우리의 보도가 미국의 시각을 띠었다는 것이다.제일 처음 서론 도입부에서 소개하였듯이 보도 자료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것이 CNN화면이었다.게다가 처음으로 테러가 터졌을 때 방송사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이 CNN방송의 통역이었다고, 그리고 방송 보도의 성공과 실패가 얼마나 훌륭한 통역사를 두어서 방송을 얼마나 잘 번역하는데 있었다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니 우리가 보는 자료가 전부 CNN의 것이고 이를 통역하여 보도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CNN을 보는 이들의 생각을 우리의 생각인양 보도하게 된다는 것이다.그러면 질이 떨어지는 방송사의 보도도 인용해온 것도 아니고 우리가 매우 잘 알고 있는 방송사인 CNN의 자료를 따와서 방송을 했는데 그게 무슨 문제란 말인가 하고 질문을 하는 이가 있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하지만 중요한 것은 CNN이 어느 나탄을 공격했다면 세계 언론으로부터 비난을 받을 것이 불 보듯이 뻔하다. 그래서 미국은 각국에 동의를 구하기에 이르렀고, 그때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이 바로 CNN이다. CNN은 공격이 있기 전에 그 공격은 이러 이러한 점에서 정당성을 띠므로 당연한 행동이라는 내용이 은연중에 담긴 뉴스를 방송했고, 이를 보는 다른 세계의 각국 역시 이를 당연시 한치의 의심도 없이 여기게 된다. 그 결과 전쟁에 대해서 테러 공격은 나쁜 것이니 당연히 그에 대한 대가를 치루어야 하지만 전쟁을 일어난다는 것 그 자체가 그렇게 지지할 의견이 아니라서 망설이고 있던 국가 까지 전쟁을 지지하는 결과를 낳았다. 따라서 우리의 주관적인 목소리는 작아지고 부시의 목소리를 대변한다고 할 수 있는 CNN의 생각을 그대로 쫓는 심하게 말하면 부시의 추종자가 되어가는 것을 언론이 방치하였다는 것이다.그럼 이러한 현상은 왜 일어난 것일까? 그 이유로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다.먼저 상업주의가 그 첫번째 이유이다.미디어 특히 여기서 중점을 두고 있는 뉴스는 광고를 먹고 산다.미디어의 이윤추구의 원천이 광고 수익이다. 따라서 방송사도 기업인 이상 이윤추구를 하는 것이 당연하고, 더 많은 광고를 끌어들이고, 같은 시간의 광고도 더 비싼 값을 받고 방송하려는 노력을 한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될 수 있을까? 바로 시청률을 높이는 것이다. 즉 시청률을 높임으로써 우리 뉴스는 이렇게 많은 시청자들이 이용하고 있으니 더 많은 광고비를 주더라도 효과는 더 클 것이라는 것을 은연중에 내보이기 위함이다. 이번 911테러는 그러한 방송상의 이익을 추구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월척이었다.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미국이 그것도 미국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국제 무역 센터 건물이 테러를 당했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그래서 처음 그 사건이 터졌을 때, 그러한 사건을 뉴스의 대부분 시간대를 장악할 정도로 소나기식으로 보도를 하였고 특히 비행기가 빌딩을 들이 받는 장면을 정말로 하루의 뉴스에서 수십 번 있는지,그 뿌리를 살펴보겠습니다. 종교적인 갈등에다 미국의 외교정책에 대한 반발이겹쳐 있습니다. ○○○ 기자가 전해드립니다.기자:아랍의 주인들은 아랍어를 함께 쓰고 같은 신앙 속에서 생활하는 아랍인들입니다.한 몸이었던 아랍은 1, 2차 세계대전이라는 강대국의 틈바구니 속에서 22개 국가로 잘게 쪼개집니다. (중략) 1948년 아랍인의 심장부인 팔레스타인 땅에 미국을 등에 업은 이스라엘이 건국을 선포하면서 수백만 명의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이 2000년간 지켜온 고향에서 내쫓겼습니다. 일부 팔레스타인 기지에 대해 현 부시 대통령의 아버지 부시는 미사일과 팬텀기를 동원해 이스라엘의 민간인 학살을 지원한 혐의도 받고 있습니다. (중략) 이스라엘이 핵사찰을 받지 않는 것에는 침묵하면서 아랍 국가들의 원자로는 물론 상수도시설까지 파괴하는 미국의 이중성에 반미감정의 골은 깊어졌습니다. (중략) 전문가들이 시정부의 이번 보복전이 아무리 거세더라도 아랍 근본주의자들의 반미감정을 잠재울 수는 없을 것으로 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위에 나타난 생각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미국의 생각을 중론으로 받아들인 것과는 차이가 있다. 이 기자는 미국의 보복 공격의 당위성을 집중적으로 보도하기 보다는 중동이 왜 이번 테러를 저지르게 되었는지에 대한 역사적 고찰을 바탕으로 그 근본 원인을 밝히고 있다. R그것을 통해서 기존의 무조건 테러에 대한 인식을 악의 행동으로 간주하는 것에서 벗어나 어느 정도의 이해의 지평을 열어주고 있다. 물론 이 기사가 나갔을 때의 반발은 상당히 컸다고 한다. 이 뉴스를 내보낸 방송사는 일부 시청자들로부터 피해국인 미국보다는 테러를 자행한 쪽을 정당화하려는 뉴스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하지만 이를 다르게 해석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지금 우리가 미국인이 되어가고 있다고….즉 미국의 생각에 젖어서 다른 시각적으로는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고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까?그러면 과연 이러한 현상을 해결하기 위한 우리의 태도는 어떠해야 할까? 무엇보다 방송사를 이익와 언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