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론우리가 뉴스에서 보여주는 북한 방송의 자료 화면의 일부가 아닌 우리측에서 촬영한 화면으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보게 된 것은 아마.. 지난 김대중 대통령과의 남북정상회담 때 일 것이다. 사실 그때의 김정일의 모습은 내가 생각해 오던 그의 모습과 너무도 달랐다.그의 외관상의 모습이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가 보여준 말과 행동들이 그랬다. "구라파 사람들은 나보고 운둔 생활을 한다고 했는데 오늘 김대중 대통령이 오셔서 이제 운둔에서 벗어나게 됐습니다." 하며 농담을 하던 김정일의 모습은 전혀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새천년을 맞이한 해의 6월 15일...7천만을 들뜨게 하는 역사적인 사건이 있었다. 바로 6.15 남북공동선언이었다. 남과 북의 정치 지도자가 분단 이후 처음으로 만나 통일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로 전 민족의 통일염원을 담아 5개항의 역사적인 남북공동선언을 채택하고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서명하였다. 감격적인 상봉이었다.내가 어렸을 때만 하더라도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이승복 어린이의 얘기를 교과서에서 배우고 "반공"포스터 그리기 대회도 하고 했었는데(물론 우리 이전의 세대들은 더했겠지만...) 이렇게 가까워진 북에 대해 혼란스러움이 있었지만.. 두 정상의 만남은 나에게도 당장 통일이 될 것만 같은 기대감을 가지게 하였다. 6.15 직후에는 곳곳에서 김정일이 보여준 이외의 모습에 대해 얘기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김대중보다 낫다~!" 라는 우스개 소리도 들을 수 있었으니까..아무튼.. 그 때까지 우리는 김정일이란 인물에 대해 정말 너무나 모르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 날 이전까지 목소리 한번도 듣지 못했었으니 말이다.사실 그리 오래 전이 아니더라도 북이나 김일성, 김정일에 대한 얘기들은 상당히 비판적, 비방적인 것들이 많았던 것 같다.. 나도 "술을 과하게 좋아하고, 기쁨조가 있어 방탕한 생활을 하는 호색한이라더라", "키가 작은 데에 상당한 콤플렉스가 있어 키높이 구두를 특별히 맞춰 신는다" 던지, "능력 뿐이었다. 하지만 김대통령의 말처럼 우리는 이제 그를 다시 봐야 할, 정확히 파악해야 할 시기를 맞았다. 우리 내부에 잠재돼 있는 허상(虛像)과 '우상(偶像)'을 깨고 북한의 최고지도자와 체제에 대해 객관적인 인식을 가질 때 진정한 남북의 화해와 협력시대를 열 수 있다. 그는 나눠져 있는 한반도 역사의 반을 책임져 가고 있는 사람이며, 앞으로의 우리의 운명을 바꿀 수도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본 론1. 한 인간으로서의 김정일그는 과연 행복했을까?그의 나이 이제 60세이다. 요즘 같은 세상에야 앞이 아직 창창한 나이지만 그가 살아온 세월도 그리 짧지만은 않다. 그는 그럼 60년을 사는 동안 어땠을까?나는 《김일성과 김정일》수업을 통해서 멀게만 느껴졌던 북한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고, 친근감도 가지게 되었다. 특히 그 중심에 서 있는 김정일에 대한 수업을 듣고 책을 읽고 하는 사이에 여러 가지 생각의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그가 내가 생각해 오던 인물과는 차이가 있다는 사실도 인정하게 되었고, 지도자로서의 그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는데 그런 생각이 김정일도 북한의 지도자이기 이전에 한 인간이고 개인이라는 생각에 미쳤을 때... 느낀 것은 김정일이 그렇게 행복했을 것 같지만은 않다는 것이다.어린 시절부터 그랬다 그는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할 수 있다. 바쁜 아버지를 따라 삭막한 병영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으며 일찍 친어머니를 여이고, 어린 나이에 동생을 잃는 아픈 경험을 하기도 한다.가까운 가족의 죽음은 어린 그에게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빨치산 대원들의 보살핌이 남달랐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어머니 김정숙의 보살핌과는 차이가 있었을 것이라 생각된다.거기에 이어 아버지 김일성의 재혼 역시 그에게 악재였다. 새어머니와의 사이는 원만하지 못했다그런 그의 어린 시절이 그의 성격에 끼친 영향이 어느 정도라고 단정짓기는 힘들지만 영향을 주었을 것임에는 분명하다. 후에 그를 비방하는 사람들에게 그의 괴팍한 성격이 그의 어린 시절에서 비롯되었다는 입방아 찧기에 좋은 실마리아들을 "조직비서" 라고 불렀다는 내용의 기사를 본적이 있다. 그는 아버지를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존경과 경애의 대상으로 먼저 생각했을지도 모른다.그의 어린 시절 뿐 아니라 언제나 후계자로서, 지도자로서의 역할에 대한 부담 역시 컸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가 어렸을 때부터 받은 체계적인 교육은 그가 아버지와는 다른 교육된 지도자로 긍정적 평가를 받고 있게는 하나,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신분이나 역할 등에 대해 부담을 가지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권력에 중심에 서고, 자신이 우상화되는 상황 속에서 그는 어느 정도의 부담을 느꼈을 것이다. 그가 원래 그런 것을 즐기는 성격이 아니라면 말이다.그가 '정치 지도자'로 태어나기까지 그에게는 여러 가지의 특혜와 배려, 특별 학습이 계속되었다. 후계자가 되기 위한 특혜라고는 하지만.. 과연 그런 삶 속에서 그가 제대로 된 친구 한 명이라도 사귈 수 있었을까 의문이다. 그의 권력만으로도 충분히 그는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 일 테니 말이다. 공식적인 자리가 아니라 사적으로 맘이 통하는 친구와 어울려 술 한잔 할 여유는 그에게 허락되지 않을 것만 같다.그가 후계자로 결정되기까지 그는 몇 명의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지금의 자리에 앉았다. 그런 과정이 순탄치 만은 않았으리라... 후계자로 결정되고 나서도 언제나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으려는 노력을 계속했을 것을 생각하면 눈물겹기까지 하다. 언제나 자신의 이미지 관리에도 힘써야 했다. 인민복 차림도 이런 이미지 관리의 일환이다. 그는 언제나 주위를 의식하지 않으면 안되는 사람이다. 그의 작은 단점(?)도 언제나 사람들의 비판의 근거가 된다. 어린시절도 그렇고 그가 군복무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사람들이 그가 군실정을 모른다고 편가하는 원인이 되었지 않은가? 평가가 옳은가 그른가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런 꼬투리 하나만으로도 그는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게 된다는 것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의 삶이 나에게는 너무나도 피곤한 전투처럼 느껴진다.적어도 이런 저런 이유로 나는 김정일의 일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말이다. 그에게 따뜻한 인간애를 기대할 수 있을까?2. 변화하는 북한의 지도자로서의 김정일1994년 김일성의 갑작스런 사망 이후 '김정일 체제가 과연 얼마나 갈까?'에 관심이 모아졌고, 대부분의 평자들은 김정일 정권의 앞날을 비관적으로 점쳤다. 짧으면 3개월, 길어야 3년 안에 붕괴한다는 얘기들이 흘러나왔다. 그 유력한 논거 중 하나가 북의 새 지도자 김정일은 아버지의 후광으로 후계자가 되었을 뿐 아버지만큼의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나도 곧 흡수통일이 되는 줄로만 알았다.하지만 6년이 지난 지금 김정일 체제는 일단 안정됐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라고 한다.완전히 우리의 예상이 빗나가 버렸다. 너무 몰랐던 것이다. 북한을, 그리고 지도자 김정일을...그는 김일성과 다르게 철저하게 '키워진' 지도자라고 하겠다. 체계적으로 교육받았을 뿐만 아니라 실무적으로도 많은 경험을 쌓도록 훈련되었다. 그리고 이미 오래 전부터 자신의 체제를 굳혀 왔다.김정일이 오랜 기간 동안 후계자로서 통치 체계를 안정적으로 구축했다는 점은 북한이 안정된 후계 체제를 갖추게 된 강점이라 하겠다. 김정일은 혁명1,2,3세대를 등에 업고, 국가의 중추 조직 속에 자기 사람을 채워 넣었으며, 선심(善心)정책을 통해 북한 주민들로부터 일정하게 지지를 받고 있다는 점에서 김정일 체제는 이미 안정권에 들어섰다고 볼 수 있다.하지만 정치가 안정적으로 체제를 굳힌 반면, 북한 경제는 심각한 문제에 시달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전문가들은 회생 불능의 상태에 빠진 것으로 보기도 한다. 앞으로 개혁·개방을 하지 않으면 필연적으로 붕괴할 수밖에 없다는 전망이 지배적이다최근 들어 자연재해를 비롯 여러 어려움이 겹쳐 북한 주민들의 삶이 어려워졌다는 것은 김정일 체제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생각된다. 생활이 어려운 백성은 군주를 원망하기 마련이니 말이다. 계속되는 탈북자 소식은 이런 위기감을 더해 준다.이에 김정일은 여러 변화를 추진하게 된다. 경제 강국의 건설과 과학 중시개방을 시도하고 있다.특히 2001년에 들어서는 김정일 위원장이 직접 나서 새로운 사고와 방식을 강조하는가 하면, 중국의 대표적 특구인 상해시를 방문하는 등 개방과 변화의 방향으로 나갈 것임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대외적으로도 '철천지 원수'라고 하던 미국을 비롯하여, 일본·유럽연합(EU)의 국가들과도 관계 개선을 적극 추진하고 있으며, 서방 자본과 기술을 도입하고, 자본주의에 대한 시찰과 학습을 시도하고 있다. 또한 2000년 7월 아시아 지역 안보 포럼(ARF)에 회원국으로 가입하였으며, 아시아개발은행(ADB) 가입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도 과거와는 다른 모습이다.. 서방과의 합작, 교류가 불가피하고 확대돼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특수 경제 지역, 자유 무역항 개설 등의 경제 개방은 북한에게 상당한 위협 요소로 작용할 것이다. 특히 대외 교류가 확대되면서 자본주의적 사상, 생활양식과 문화 예술 등이 들어오게 될 것이고 사회주의 사상과 대립, 갈등이 불가피 해질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의 해결이 오늘날 북한 체제의 과제로 남을 것이다.북한이 일부 호전된 경제 상황을 기반으로 추구하는 궁극적인 지향점은 모든 것이 흥하고, 인민들이 세상에 부러움 없이 사는 '사회주의 강성 대국 건설'이다. 북한은 1998년 8월 22일 노동당 기관지 노동 신문 정론을 통해 처음 '강성 대국'이란 정치적 구호를 내세웠다. 그리고 내 나라 내 조국을 더욱 부강하게 하자면 과학기술을 빨리 발전시켜야 한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과거 김일성 주석은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최대의 과제로 삼았지만 아버지 세대처럼 성장 과정에서 큰 고생을 하지 않았던 김정일은 노동력 동원 등 국가 계획 경제 개념과 달리 첨단 기술을 확보하고 컴퓨터를 활용하는 등 새로운 경제 개발 방식에 눈을 돌리고 있다 이는 앞으로 북한이 많은 변화를 가져 올 것을 예상하게 한다.여기에 덧붙여 그는 대외 사업을 잘하여 혁명에 유리한 환경을 마련하기 위해 미국과의 대화를 잘하여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민족 공조를 강조겠다.
서 론솔직히 말하면 이 수업을 듣기 전까지 별로 한국의 현대사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었다. 아니... 관심이 없었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 모르겠다.전공의 특성상 예술사 쪽을 제외하면 역사란 나와는 너무나도 먼 이야기였다. 적어도 이 수업을 듣기 전까지는 그랬다. 역사라면 고등학교 때 국사 시간에 배운 지식이 전부였다. 더구나 교과서에서 뒤에 몇 페이지 차지하고 있지 않은 현대사 부분은 제대로 알고 있지 않았다. 이번 『www.한국현대사.com』을 읽고 역사적 사실을 새롭게 많이 알게 되었으며, 알고 있던 부분에 대해서도 이번 기회를 통해서 많은 부분 나의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특히 박정희에 대한 평가를 다시 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후에 다루기로 하겠다.)언제나 한국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화가 날 때가 많았다. 고대나 중세 뿐만 아니라 근대 근세..까지 참 아픔이 많은 역사였다. 내우외환.... 조용할 날이 없었다는 표현이 더 맞겠다. 시대를 막론하고 잦은 외세의 침략을 받았고, 치욕의 식민 통치 아래서 국권을 잃기도 했었고, 최근에 와서도 세계 열강의 이권 다툼에 끼어 국토가 분단되고 민족이 분열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왜 우리는 그래야만 했는지.. 알면 알수록 안타깝고 화가 나는 역사였다.그러고 보면... 우리 역사의 비극은 언제나 외세에 의해서 시작되었던 것 같다. 일본의 제국주의에 희생되어 36년을 식민국으로 억압받았고, 미.소의 이념대립의 희생국으로 민족이 등을 돌린 오늘날의 현실을 맞게 되었다. 그뿐인가? 고대에는 중국의 영향력 아래 있었던 우리가 아니었는가? 신라가 당의 도움으로 삼국을 통일하는 무리를 하지 않았던들 저 광활한 만주 벌판은 우리 땅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하지 못한 것이 국사를 배우면서 느낀 나의 오랜 아쉬움이다. 아무튼 오랜 옛날부터 외세의 개입은 계속되었고, 그것이 현재의 우리의 현실의 많은 부분을 만들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그리고 민주와 자유를 위해 수많은 민중들이 희생되어 갔다.왔다.어쨌거나... 우리의 역사는 끊어지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는 과거와 다른.. 더 나은 역사를 써 나가야 할 것이다.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과거를 알아야 한다. 그래야 무엇을 어떻게 바꿔 나가야 하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본 론우리의 비극은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일제의 통치 아래서 우리가 맞은 20세기는 그야말로 치욕적이었다. 이것은 유구한 우리 역사의 줄기의 단절을 의미했다.을사조약과 한일합방으로 그 비극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예전에 어느 칼럼 같은 곳에서 을사조약은 억눌러서 이루어진 조약이라는 의미의 을사늑약(乙巳勒約)으로 '한일합방(韓日合邦)'은 나라의 치욕{국치(國恥)}이라는 '경술국치(庚戌國恥)'로 불러야 한다는 글을 본적이 있다. 그랬다.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었다. 일제의 조선 지배는 모든 비극의 시작이었다.하지만 그 비극의 끝이 행복의 시작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다른 비극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더 큰 비극이 시작되었다.해방의 기쁨을 미처 누리기도 전에 결국 우리는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강대국의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38도선을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나뉘어져 각각의 정권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민족 최대의 비극 6.25를 맞이하게 된다. 형제끼리 총칼을 겨눈 이 전쟁에서 남. 북한 모두 엄청난 인명과 재산의 피해를 얻게 된다. 있어선 안 되는 비극이었다. 해방 후 힘을 합쳐 민족의 발전적 미래를 위해 노력했어야 할 우리는 이 전쟁을 통해서 전 국토를 초토화시키는 민족 간의 전쟁을 통하여 분단을 고착화시키고야 말았던 것이다.광복에서부터 한국전쟁에 대한 부분까지.. 이 책을 읽으면서 계속 느낀 것은 미국에 대한 분노였다. 그들이야말로 일본보다도 한 수위로 비열하고 자국 중심 주의에 빠진 나라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그들이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우리나라에 주둔해 있다고는 하지만 반 전시 상태의 현실을 만든 것이 누구인가? 바로 그들이었다. 그게 다가 아니다. 그들은 한국전쟁예다. 많은 농민들이 이유 없이 그들의 총에 죽어 갔다. 그야 말로 학살이었다. 아직도 우리 국토의 구석구석에서 그들의 만행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지 않은가?-_-;; 얘기가 빗나갔지만....결과적으로 우리는 그들의 자본주의 체제(지독하게 미국 중심적인)의 유지와 확산이라는 정책 속에 피해를 입지 않았던가?? 우리는 신탁통치의 위기에 놓이게 되지 않았던가? 찬탁과 반탁...사실 한반도의 분단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지 않았는가?독립은 식민 통치에서 벗어났다는 사실보다도 자주적인 독립 국가를 건설하게 되었다는 데에 더 큰 의의가 있는 것이었다. 해방을 맞이한 한국 민족의 가장 큰 과제는 하루 빨리 민주적인 통일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었으리라... 그러나 우리는 그러지 못했다. 50여 년이 지난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 민족은 남과 북으로 갈라져 있다.남한 단독 선거에서부터 이승만은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 그는 지도자가 될 인물이 아니었다. 대통령이 된 그는 독재자였다. 정원의 안위를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았다. 부정선거, 반민특위를 해산시키고, 반공 이데올로기를 무차별적으로 훠둘렀다. 그는 친일파 숙청에 대한 민족의 기대를 져버리고....자유민주주의 국가를 향한 염원을 짓밟았다. 그는 초대 대통령이 되서는 안되는 인물이었다.그는 가혹한 역사적 평가를 받아 마땅했다. 그가 존재했던 시대는 아직까지 우리에게 부끄러운 역사로서 남아 있다. 특히 그가 일제 잔재 세력을 제대로 제거해 내지 못했다는 점은 뼈아프다.일제 식민지 시대에 조선 총독부를 들락거리던 사람들은 지금 사회의 중심에 서 있다최근 친일파 명단 발표가 거센 역풍을 맞았던 것은 친일 세력이 지금도 우리 사회 특권층으로 군림하고 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또 이완용의 증손자가 이완용 명의의 땅을 되찾겠다고 나서는 일마저 있지 않았던가? 그야말로 기가 찰 노릇이다. 벌써부터 제거되었어야 할 세력이 건재하다. 무언가 잘못되어 있다.결국 그는 민중의 심판을 받았다. 4월 혁명... 이승만은 그가 그렇게 노래하던 국민의 뜻에정 선거에 있었으나, 그것은 단순한 부정 선거 규탄 운동이 아닌 국민 주권주의에 입각한 민주주의 운동이라 볼 수 있다.시위는 절망에 빠졌던 민중의 마지막 선택이었던 것이다. 결국 민중은 승리했고 이승만은 하야했다.혁명의 결정적 주체가 젊은 20대 학생들이라는 점에 또 다른 중요한 의의가 있다. 학생들은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염려하고 발전과 새로움을 추구하기 위해 항거하였던 것이다. 이 혁명이 성공한 원인은 당시의 독재를 혐오하던.... 이론적 지식이 없어도 진정한 자유 민주주의를 알고 있던..... 밑바닥 민중까지도 참여적이고 희생적인 동참. 지지로 이룩될 수 있었던 것으로, "4.19는 실로 민권 투쟁의 승리라 하겠다.4.19에 의해 민주화와 민족의 통일을 이룩할 수 있는 유리한 국면이 전개되었다.그러나 4.19로 정권을 잡게 된 민주당은 민중의 바람을 져버리고 보수 정치체제를 유지하고 자신의 입지를 마련하는 데만 관심을 기울였다. 반공이라는 이데올로기 틀을 유지한 채 자유민주주의로서 정권을 유지시킬 방안을 모색하였다. 평화 통일을 외치는 사람은 곧 간첩이었다. 데모도 할 수 없었다. 반공법과 데모 규제법이었다. 학생들의 남북협상을 위한 노력은 그렇게 사라졌다.이 후 발생한 5.16군사 쿠데타에 4.19 의 의의는 그 빛이 바랜 감이 없진 않지만 우리 시민의 저항 정신을 보여준 귀중한 경험이라 할 수 있으며, 우리나라 시민 사회 형성의 첫 시발점이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박정희... 권력을 어떻게 잡았건 간에 그의 업적이 상당한 것만은 사실이다.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 박정희는 한국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혁명적 변화를 가져온 인물이다. 또 그렇게 역사적 평가가 극단적으로 상반되는 지도자도 없을 것이다.민주주의적 관점에서 그를 바라보면 그는 4·19 학생 혁명으로 성립된 민주주의를 붕괴시키고 쿠데타를 통해 독재의 시대를 연 군부 독재의 창설자로 비판받아 마땅하다.개발독재의 방법으로 성장 일변도의 불균등 산업화를 추진하였기 때문에 그렇지 않으면 가능했을 본다면 그는 고도 성장을 실현하고 한국을 궁핍과 빈곤으로부터 해방시킨 지도자라고 할 수 있다.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나는 이 후자의 관점에서 그를 봐 왔던 것이 사실이다 어떻건 간에 지금의 우리가 이룩한 자유민주주의는 그 경제발전을 바탕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는가?그가 이룩한 경제발전은 모든 것을 용서하기에 충분했다. 강력한 리더십으로 세계에서도 가장 빈궁한 후진국을 지도적인 개발도상국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야말로 놀라운 경제발전이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의 생각이 많은 부분 바뀌게 되었다. 그가 이룩한 경제발전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건 간에 박정희야말로 민주주의 발전을 가로막고 군부 독재를 한국 사회에 뿌리내리게 한 독재자의 표상이란 것만은 사실이다.경제발전이 실로 대단했기는 하지만 그에게는 모든 것이 군대와 같았다. 그게 문제였다. 경제도 그에게는 전쟁이었다. 그가 이뤄 낸 경제발전은 노동자의 희생 위에서 이루어졌다 싼 인건비... 수출의 유일한 길이었다. 배트남 참전의 용사들과 중동 건설 노동자들의 피와 땀도 더해졌다. 그들의 희생은 지금의 경제적 풍요가 달성되는 밑거름이 되었다.1972년 7월 4일 역사적인 남북한 공동 성명이 발표된다.. "자주, 평화, 민족 대단결"이라는 통일의 3대원칙은 국민들에게 통일의 꿈을 실현시켜 줄 희망으로 보여졌다. 하지만 그런 통일의 꿈은 "10월 유신"으로 산산히 부숴져 버렸다. 79년 가을 부산과 마산의 민중 항쟁의 불길이 맹렬히 타올랐다. 그리고 독재자...박정희의 시대는 총성과 함께 막을 내렸다.그렇게 박정희의 시대는 갔지만 국민이 기다리는 봄은 오지 않았다. 그들이 그렇게 바라는 민주화는 12.12와 5.17로 "군화발"로 차이고 총검으로 "난도질"당했다.. 그렇게 등장한 '5공'...전두환은 반공 이데올로기를 무기로 하여 수 없는 조작과 탄압을 되풀이하였다. 반공법을 국가보안법에 포함시켰다. 그는 반공'으로 민주를 지탱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지만 광주 민중항쟁을 폭력으로 진압하고 등장하는 그들은 과정에서 '자유민이었다.
. 쿠 베 르 탱 과 올 림 픽프랑스의 황폐를 젊은 나이에 목격하고 우국의 일념으로 건너간 영국에서 견문을 넓힌 것을 계기로 청년기의 쿠베르탱이 깨달은 것은 프랑스의 불안정한 국내 전세를 초래한 원인이 청소년교육에 있다는 것이었다. 집단의 평온과 지성과 자기반성력은 교육에 의하여 생기게 되는데 그 교육의 기본적인 기둥의 하나가 스포츠 진흥이라고 생각해 모든 나라에서 스포츠 진흥이 중요하다고 판단하게 됐다.스포츠는 인간의 자주성을 중시하고 맹목적인 복종으로서의 해방을 나타내는 것이며 이를 통해 종족이나 종교의 차이를 초월한 동포애를 가질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그 원형을 고대 올림픽에서 쿠배르탱은 찾게 된다 고대올림픽의 형식 뿐 아니라 그 정신이 근대사회에 꼭 필요한 것으로 보게 된다. 그 정신이 순수하고 숭고한 영혼과 강한 신체를 낳기 때문이다.쿠베르탱의 끊임없는 노력에 의해 올림픽에 대한 세계인들의 지지가 부동의 것으로 되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1896 제1회 아테네 올림픽□ 개최기간 : 1896. 4. 6. ∼ 15□ 참가규모 : 13개국 295명□ 개최종목 : 8경기 42종목제1회 아테네 올림픽은 13개국에서 311명의 선수가 참가했다. 그러나 이중 230명이 개최지인 그리스 선수여서 실제로 올림픽운동을 전세계적으로 확산시키고자 했던 쿠베르탱 남작의 의도와는 달리 그리스 안에서만 벌어졌던 고대 올림픽의 형태에 외국의 선수들이 소수 동참한 형태로 벌어졌다. 우선 올림픽운동의 취지에 대해 전세계가 동참할 만한 국제사회의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지 않았고. 실제로 국가별로 올림픽 참가를 추진하고 진행할 만한 기구가 전무했었기 때문이다.이는 전 지구촌의 가족들의 기꺼이 열정을 가지고 참가하는 현재의 올림픽운동이 초창기에는 얼마나 큰 어려움 속에 탄생했던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1896년 4월 5일 팬아테나익 스타디움에 8만여명의 관중이 운집한 가운데, 그리스 국왕 조지1세가 개막을 선언했다.올림픽찬가가 연주된 뒤 팡파레가 울리는 가운데 선수들이 입장하면서하였고, 루즈벨트 대통령의 딸 아리스가 로쓰에게 월계관을 수여하였다.그러나, 로쓰는 반환점인 20㎞지점에서, 지나가는 자동차의 도움으로 메인스타디움에 골인한 사실이 폭로되었고, 그로부터 약 1시간 후 미국의 토마스·힉스가 지칠대로 지쳐서 골인 금메달의 영예를 안았다.처음으로 복싱 경기가 채택되어 전체 6체급을 미국이 석권하였으며, 올림헤비급(158파운드 이상 : + 71.67kg) 참피온은 사무엘 버거였다.미국이 고안한 농구의 시범 경기가 처음으로 실시되어 미국의 YMCA팀이 우승하였으며, 농구경기는 1936년 제11회 베를린올림픽대회에서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었고, 미국은 1972년 소련에게 우승을 내어주기까지 7회 연속 올림픽을 제패하게 된다.이 대회에서도 여성의 참가가 허용됐으나 첫 여성금메달리스트가 배출되었던 테니스에는 여자선수가 참가하지 않았다.세인트루이스대회에서는 처음으로 흑인 메달리스트가 탄생했다. 위스콘 신대학의 법학도였던 밀위키클럽 조지 포지가 200m와 400m허들에서 동메달을 차지했다. 그는 대학경기에서 1/4마일 경주와 허들경기에서 전국 대학기록을 수립해 밀워키 스포츠클럽의 첫 번째 흑인회원이 된 인물이기도 하였다1908 제4회 런던 올림픽 대회□ 개최기간 : 1908. 4. 27. ∼ 10. 31.□ 참가규모 : 22개국 1,999명□ 개최종목 : 22경기 109종목제4회 런던대회는 올림픽 역사상 매우 중요한 몇가지 전기를 마련했다.각국내 올림픽위원회(NOC)를 통하여 신청한 선수만이 참가할 수 있도록 정했으며, 올림픽에 참가할 수 있는 선수는 아마튜어에 한한다라고 제한을 가한 최초의 대회였다.스포츠에 참여함으로써 생활비나 자금을 취득치 않으며 경제적 이익을 얻는 금하는 아마추어로서의 성격을 갖게했고, 이는 올림픽의 질적, 양적인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이전의 올림픽 대회에서는 개인 또는 클럽이 학교 또는 클럽의 명칭으로 출전하였으며, 프로선수와 아마튜어 선수가 함께 경기하거나, 상금이 걸려 있는 종목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아마튜어 규스테르담에서 열리기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쿠베르탱이 IOC위원장의 임기를 마치고 물러나게 되자 IOC는 쿠베르탱에 대한 경의와 존중의 표시로 제8회 대회를 암스테르담에서 파리로 변경키로 결정했다. 암스테르담에는 아음 대회인 제9회 대회 개최권이 주어졌다.프랑스의 일부 광란적인 팬들이 다른 나라 국가 연주 중에 야유를 하고, 미국의 소위'프로'선수들의 독주에 반발한 영국이 선수단을 철수시키겠다고 위협하는 등 몇 가지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지만 이 대회는 지금까지 최고의 대회로 평가받고 있다. 올림픽이 채 자리를 잡기 전에 열렸던 제2회 대회와는 달리 경기장마다 열광적인 관중들로 가득 메워졌고 경기운영 또한 매우 매끄럽게 진행됐다. 대회가 끝났을 때 쿠베르탱은 행복에 겨운 목소리로 "내가 할 일은 끝났다"고 말했다.파리 올림픽은 5월5일부터 7월27일까지 44개국 3,070명의 선수가 참여해 명실공히 인류의 스포츠제전으로 자리잡았다. 파리 올림픽에서는 올림픽 사상 처음으로 선수들을 한 장소에 모아 숙시켜 대회진행을 더욱 원활하게 했는데, 이것이 올림픽 선수촌의 효시가 된다.앤트워프대회에서 영웅으로 등장한 파보 누르미는 이 대회에서 더욱 맹위를 떨쳐, 1,500m, 5,000m,개인 및 단체 크로스컨츄리, 3,000m단체 레이스 등에 출전 모두 우승을 차지했다.수영경기에서는 100m와 400m 자유형, 800m 계영에서 금메달 3개를 획득한 조니.와이즈뮐러가 등장 하였으며, 그는 타잔 영화에 출연함으로써 더욱 유명해 진다.100m 경주에서 우승한 영국의 단거리 선수 해럴드 에이브러햄스는 자유분방하고 담배와 맥주에 탐닉한 유태인이었다. 그는 당시 유럽에서 일기 시작하던 반유태주의를 등에 지고 경기에 임했다. 그는 유태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큰 성원을 얻지 못했으며, 바로 그런 이유로 그의 100m우승은 어떤 이에게는 충격으로, 또 어떤 이에게는 말할 수 없는 감격으로 받아들여졌다. 매우 먼 훗날의 일이긴 하지만 그의 이야기는 1981년 제작된 '불의 전차'라는 영화의 중손기정의 우승장면 사진을 그대로 신문에 실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손기정의 가슴에 달린 일장기를 지워서 신문에 내보냈다. 이 일로 동아일보 관계자들의 투옥과 신문은 무기정간 되었고, 손기정 선수의 환영 행사는 일제의 방해로 좌절 되고말았다1904년 제3회 세인트루이스 올림픽대회때 시범경기로 첫 선을 보인 농구경기가 정식종목으로 올림픽에 채택되어 미국이 우승을 차지했으며, 당시 미국과 캐나다는 폭우가 쏟아지는 가운데 실외에서 결승 경기를 치루었다.1940/1944 제12회, 제13회 올림픽 대회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무산됨.1940년 제12회 올림픽대회는 일본의 동경과 핀란드의 헬싱키가 경합을 벌여, 아시아 대륙에서는 처음으로 일본의 동경이 개최지로 결정되었다.일본의 동경은 대회조직위원회의 발족과 경기장, 선수촌 등의 건설계획에 박차를 가해 대회준비에 만전을 기하였으나, 1937년 제2차 중·일 전쟁의 발발로 일본은 올림픽 주최권을 반납하게 된다.일본 동경에 이어 핀란드의 헬싱키가 올림픽 개최지로 결정되었으나, 이 역시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된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하여 제12회 올림픽대회는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제13회 올림픽대회 역시 영국의 런던이 개최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계속되는 전쟁에 의해 또 다시 무산 되고 말았고, 1948년 제14회 대회가 비로서 영국의 런던에서 개최될 수 있었다1948 제14회 런던 올림픽 대회□ 개최기간 : 1948. 7. 29. ∼ 8. 14.□ 참가규모 : 59개국 4,064명□ 개최종목 : 19경기 151종목1908년 제4회 올림픽대회에 이어 2번째로 개최된 제14회 런던 올림픽대회는 제2차 세계대전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준비되었고, 24년전 만들어진 메인스타디움을 주경기장으로 그대로 사용하였으며, 군인 막사를 개조하여 선수촌으로 사용하였다.제14회 런던 올림픽대회는 59개국에서 4,064명의 선수가 참가하여, 올림픽대회 중 가장 훌륭한 대회로 평가 받았으며, 대회기간중 150만명의 관중이 입장하여라톤의 이창훈 선수는 20위에 머물고 말았다. 복싱의 김기수 선수는 이번 대회의 우승자인 이탈리아의 니노 벤베누티와 2회전에서 격돌하여 판정패 하였으나, 프로로 전향 1966년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가진 미들급 세계타이틀전에서 벤베누티를 이겨 한국 프로복싱 첫 세계 참피온이 되며 로마 올림픽 대회의 패배를 설욕하게 된다.1964 제18회 동경 올림픽 대회□ 개최기간 : 1964. 10. 10. ∼ 10. 24.□ 참가규모 : 93개국 5,081명□ 개최종목 : 20경기 167종목1940년 제12회 올림픽대회를 제2차 세계대전으로 무산시킨 바 있는 일본은 근대올림픽 부활 68년만에 올림픽의 아시아 개최라는 신기원을 이룩한다.일본의 동경시는 올림픽 사상 최대의 거액인 30억 달러를 투자, 동경시 전역의 재개발을 시도해 시의 면모를 새롭게 갖추었으며, 7만 2천명을 수용하는 메인스타디움의 건설, 승마공원, 수영장, 실내체육관, 지하철, 고속도로 등을 건설하여 대회준비에 만전을 기하였다.1960년 제17회 로마 올림픽대회에서 맨발의 신화를 창조한 이디오피아의 아베베는 동경 올림픽대회에서도 우승, 올림픽 사상 최초의 마라톤 2연패의 위대한 업적을 남겼으며,체조 경기에서는 소련의 라리사 라티니나 선수가 제16회 멜베른, 제17회 로마 올림픽과 이번 대회를 합쳐 총 18개의 메달(금9, 은5, 동4)을 획득, 개인 경기의 최다 메달 획득 선수가 되었다.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첫선을 보인 배구 경기는 남자 배구에서 소련이 체코를 꺾고 올림픽 배구 초대 우승팀이 되었으며, 여자 배구는 일본이 소련을 누르고 우승을 차지했다.4개 체급으로 실시된 유도 경기에서는 주최국 일본이 3개의 금메달을 차지했으나, 무제한급에서는 네덜란드의 안토니우스 게싱크가 우승해 유도 종주국 일본의 자존심에 상처를 남겼다.우리나라는 동경 올림픽대회에 올림픽 참가 사상 최대 규모인 10개 종목에 선수 165명, 임원 59명을 파견하여 은 2개, 동 1개로 종합 순위 25위에 올랐다. 레슬링 자유형 플라이급에 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