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릭 입센남편 헬메르가 말하듯 그의 작고 지저귀는 작은 종달새인 주인공 노라는 남편내조, 자녀양육, 집안살림의 3대 의무를 철저히 신앙같이 여기는 연약한 여성이다.노라의 개성은 작고, 지저귀고, 낭비하고, 연약한 아름다움으로 치부되며, 작품 초반에서 산만하고 파닥거리는 그녀의 모습은 딱 새장에 갇힌 종달새 그 자체이다.그를 위해 거짓서명을 하고, 그의 권위와 능력을 찬양하며 그녀에게 주어진 삶의 질서를유지하려 노력하지만 실제적으로 진실에 맞닥뜨렸을 때 노라를 대하는 헬메르의 위선에서 느끼는 배신감으로 인해 노라는 켜켜이 불안하게 쌓여진 삶의 질서를 흩뜨려야 할 때가 바로 지금임을 깨닫는다.그런 깨달음은 극단적인 노라의 행동으로 인해 독자들을 충분히 놀라게 한다.가정에 대한 철저한 신앙으로 무장한 노라가 종국에는 남편과 끔찍하게 애지중지하는 자녀들을 버리고 자신의 인생을 찾고, 한 인간이 되기 위해 떳떳이 노력하겠다는 멘트를 날리는 모습을극의 초반에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저는 세상을 올바르게 알기 위해 혼자 독립하지 않으면 안되요. 그러니 더 이상 당신 곁에 있을 수 없어요.”그녀를 위해 만들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행복들이 실제로는 팬시한 감옥이었음을 그녀가 깨달아주어, 한방 먹여주어 충격과 통쾌함을.맹목적이었던 그녀의 인생에 씁쓸함을.그리고 앞으로 노라가 살아갈 그녀의 주체적인 인생에 대한 기대감을!그렇게 작고 지저귀는 작은 종달새는 세상을 향해 훨훨 날아가버렸다.
지리학 개론REPORT학과 :학번 :이름 :담당교수 :제출일 :1. 인간 삶터로서의 자연환경★ 인문성의 모태 ‘자연환경’? 자연환경 ① 인간이 존재할 경우 - 단순 대기권, 수권, 암석권 + 생물권② 인간이 존재할 경우 - 방=지구방주인= 인간자연환경과 인간의 관계는 투과적인 것? 인간과 자연은 서로 분리해서 이해할 수 없음→ 인간 거주지로서의 지구, 에쿠메네로서의 지구자연환경 = 인간, 인간 = 자연환경∴ 자연환경이 인문성의 모태(母胎)이며 , 자연환경은 언제나 사회?문화적으로 재구성★ 생태론의 허점? 생태론- 인간에 의해 자연환경이 파괴됨, 이로부터 벗어나 자연환경을 보호, 자연환경을 살아있는 존재로 인식해야 한다는 입장? 허점) ㉠ 인간의 존재범주 = 자연환경의 존재범주: 모든 유기체를 동일범주로 보는 전체론적 사고 → 인간주체성의 격하, 묵살그러면서도 인간에게 자연에 대한 책임요구 (비 도덕적, 비 논리적)㉡ ‘권리를 지닌 주체로서의 자연’ 주장: 권리라는 개념은 의무를 동반해야하나 자연에게 적용되지 않음2. 생태론을 넘어 풍토론으로★ 풍토론에서 보는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 와쓰지테스로우 - 풍토란 물리적, 생물학적 차원의 객관적 대상이 아니라 인간의 자기 요해 방식임다시말해 풍토 = 일정범위의 지역에 나타나는 기후, 지질, 토질,지형, 경관을 총칭. 인간의 거주 환경으로서의 자연자연환경은 자연과학적 대상에 국한되는 것이 아닌 인문성의 문제? 풍토론에서는 자연환경과 인간의 ‘관계’를 강조? 자기요해 -자연환경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수단, 사회적 실천의 발견을 통해 이루어짐∴ 풍토현상 = 인간이 자기자신을 요해(발견)하는 방식 (≠ 환경결정론)★ 세가지 풍토형 : 몬순, 사막, 목장① 몬순형? 몬순 - 여름계절풍, 열대대양에서 육지를 향해 부는 바람→ 몬순지역의 풍토는 뜨거운 열기, 높은 습기의 결합을 특징으로 가짐풍토론의 입장에서 몬순지역은 온도계로 나타낼 수 없는 인간 존재의 방식? 무더위와 습기가 결합한 남양의 풍토는 인간에게 풍요로운 식량제공 → 생산력을 발전 시켜야 할계기 제공X → 인간은 수용적, 인종적 관계에서 고정 ( 문화창출X, 정복당하기 쉬움 )? 자연의 힘넘침 = 인간의 감정넘침신이 주는 혜택에 감사, 신들을 영탄하는 것에 의해 지상의 풍부한 은혜 기대∴ 몬순형 인간 = 역사적 감각의 결여, 감정의 넘침, 의지력의 이완으로서 규정② 사막형? 사막의 생활 - 끊임없이 물을 구하는 생활( 밖의 자연 = 죽음의 위협, 기다리기만하는 사람 = 물의 은혜가 없음 )→ 사람은 자연의 위협과 싸우면서 초지나 샘을 찾아다님? 사막적인간은 사막적 특수구조 지님㉠ 사막에서의 인간과 자연의 관계 - 대항적, 전투적 관계‘생산’은 사람의 손에 달려 있음㉡ 사막에서의 자연과의 전쟁에서 사람들은 서로 단결 - 개인으로서는 생존 불가능대항적, 전투적 특성? 자연적으로 발생할 수 밖에 없는것, 인간만이 만들 수 있는 것에 대한 애착 예) 피라미드? 인간은 자연과 대항 → 또 다른 인간세계의 대항과 연결부족의 전체성이 개인의 생을 가능케함 ( 전체에의 충성, 전체의지에의복종은 불가결 )∴ 사막형 인간 = 사유의 건조성, 강한 의지력, 감정생활의 메마름으로 규정③ 목장형? 지중해 일대 - 여름철 강수량이 적어 건조, 여름에는 상대적으로 다습?온난문화사적으로 유럽문화의 근원지, 유럽적 풍토? 민둥산, 고요하고 잔잔한 바다, 많은섬과 항만, 안개가 없어 좋은 조망, 하얗고 반들반들한 바위,흘러들어가는 강물이 적어 해수의 증발 보충 X →지중해 = 바다의 사막교통로이자 항해술의 실험실? 무더위와 습기를 조건으로 번성하는 잡초 대신 겨울부터 자라온 동초로 뒤덮임→ 목장의 발달, 토지는 한번 개간되면 항상 순종하는 토지 (자연과의 싸움 X )? 바람의 약함 - 나무는 거의 대칭형, 꽃?나무의 교배와 성장과정이 규칙적임→ 자연이 가장 합리적인 것 ( 유럽의 합리주의 사상 )? 지중해성 기후의 원형 - 바위산과 올리브, 포도 등 건조한 여름을 견디는 수목 발달→ 농업은 목축, 과수재배 위주몬순형, 사막형과 달리 농산물을 언제나 일정 생산 가능→인간과 자연과의 조화, 인간세계에서의 다원성 인정 예) 폴리스3. 자연환경을 보는 두가지 시선★ 본질주의와 구성주의? 자연 - 레이몬드 윌리암스 - 우리 언어에서 가장 복잡한 단어 일 듯 하다- 카스트리 - 어떤것의 본질, 인간의 행위가 가해지지 않은 영역, 인간을 포함하는 자연세계전체? 자연에 대한 본질주의적 입장: 자연은 일정, 불변하는 안정된 개념, 자연이란 무엇이며, 자연자원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가 명 확, 이것들을 인간이 어떻게 이용 혹은 오용하는가 하는 것이 관심사→ 자연과 인간의 ‘문화’는 서로 분리된 것? 자연에 대한 구성주의적 입장: 자연이란 물질적 실체인 동시 하나의 고안된 개념?착상, 자연이란 일종의 사회적 구성이며 사회권력의 도구라는 것이 강조, 자연은 특정담론이나 이데올로기에 구속될 수 있음★ 자연환경에 대한 다양한 견해? 본질주의 입장㉠ 기술중심주의 - 자연 → 유순, 지배가능, 인간의 간섭을 통한 개선가능, 인문과 분리, 인간의목적을 만족시키기위해 존재, 과학을 통해 최선의 것으로 조작가능㉡ 심층생태론 및 생태중심주의 - 인간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갈 필요가 있다고 제안상대적으로 덜 착취적, 모든 생명이 가치가 있다? 구성주의 입장㉠ 에코페미니즘 - 심층생태론 및 마르크시즘의 남성중심주의적 편견에 대한 반발→ 남성중심의 사유로 자연인식, 여성의 종속성을 재생산한다고 봄
R E P O R T학과 :학번 :이름 :담당교수 :제출일 :★ The Hundred Years' War ★- 플랑드르는 북유럽의 산업 중심지로 성장해 왔고 특히 직물 산업으로 유명하였다. 그러나 울 생산이 충분하지 않아서 영국으로부터 수입 양모를 들였다. 영국은 이 무역에 의존하였다. 또 상위계급의 영국인들은 맥주에서 와인으로 취향을 바꿨다. 맥주와 와인은 중세 식단에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맥주와 와인속에 있는 알콜은 매우 큰 수치의 칼로리가 싸고 효과적인 방식으로 저장되어 있음을 나타냈다. 맥주와 와인은 식자원으로 큰 가치가 있었다. 문제는 영국에서 와인을 생산하는 포도를 기를 수 없었다는 것이다. 영국은 양모를 프랑스의 와인과 교환했다. 플랑드르의 백작들은 프랑스왕의 가신이 되어왔고 프랑스는 나라의 부를 위해 그 지역을 다시금 회복하려 하였다. 영국은 이것을 허락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프랑스 세습군주가 영국의 교역의 근원을 통제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영국의 왕은 특히 비옥한 남부를 포함한 프랑스의 많은 부분을 통치하고 있었다. 끊임없는 언쟁이 프랑스- 영국 국경을 따라 있었고, 프랑스왕은 항상 남부로 부터의 영국의 침략을 두려워 해야했다. 프랑스는 Scots와 동맹하였다. 영국은 오직 그들이 북쪽 바다에서 원조를 보내주며 영국 무역이 해협을 통한 해군의 교통에 자유롭게 된다면 플랑드르의 동맹을 지지한다고 하였다. 필립 4세 왕의 마지막 아들이 1328년에 죽자 카페왕조의 직계 후손은 거의 350년간 없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필립왕의 딸 이사벨은 영국의 에드워드 2세 왕과 결혼하였고 에드워드 3세를 아들로 두고 있었다. 그는 필립의 손주가 되며 직계후손이 된다. 프랑스는 에드워드가 프랑스의 왕이 되려는 생각을 참을 수 없어 발로아의 필립에게 왕위를 주는데, 그는 필립 4세의 조카이다. 에드워드 3세는 그가 원한다면 프랑스의 왕위를 가질수 있다는 유효한 주장을 하였다. 영국은 당시 강력한 중앙집권 정부를 가지고 있었다. 에드워드는 프랑스와의 싸움을 선언하게 되며 1340년에 전쟁이 일어난다. 프랑스는 플랑드르의 모든 저항을 부술 군대를 모았다. 영국은 해협과 북부 바다를 통제할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프랑스의 침입으로부터 안전하였고 의지대로 프랑스를 공격할 수 있었으며 프랑스의 영토를 위해 전쟁을 하는 것 까지도 기대하게 되었다. 에드워드는 1345년 북부 프랑스를 침입했으나 흑사병이 찾아와 군대는 병으로 인해 약해지게 되었다. 에드워드의 군대는 연합군이었다: 사수, 창병, 보병, 기병대 등 ;반면에 프랑스는 그들의 낡아빠진 봉건 기사제에만 매달리고 있었다. 전투는 프랑스에게 재앙이 되었다. 이런 같은 전투 상황은 10년후에도 직면하지만 프랑스는 같은 전술을 써서 같은 결과를 낳는다. 프랑스 왕과 귀족들은 포로가 되었고 많은 다른사람들은 죽임을 당하였다. 영광을 위해 싸우는 기사들의 구식 봉건 전쟁은 끝나게 된다. 1360년의 조약으로 전쟁 1기는 마치지만 프랑스는 계속 고통을 겪는다. 영국은 도둑질, 약탈등으로 나라를 떠났던 용병들을 임금을 주지 않고 고용했다. 전쟁이 지속됨에 따라 영국군은 지치게 되었다. 자국에서도 Peasants' Revolution과 같은 갈등을 겪는다. Agincourt에서 프랑스는 그들의 봉건 전쟁의 낡은 전술로 한번 더 비참하게 공격을 당하게 된다. 영국은 그들이 읽어버렸던 많은 땅을 회복하게 되며 헨리와 프랑스 공주 캐서린의 결혼을 기반으로 새로운 평화를 맞이하게 된다. 1422년 헨리의 죽음과 함께 전쟁은 재발된다. 프랑스는 잔다르크로 인해 국제적인 정체성을 발전시키게 된다. 프랑스는 이제 매우 큰 단합을 이루었다. 프랑스 정부는 전쟁의 현대적 스타일을 가지기 시작하였고 새로운 군사적 지도자를 갖추었다. 이 전쟁은 영국이 육지를 통치하는 것과 해양의 최고임을 강조함의 시작인 것이 주목된다. 그 시기 동안 군사적인 기술과 과학에서의 훌륭한 진보가 있었지만 시민전쟁의 물결속에서 전쟁은 서부유럽 나라에 황폐함을 주었다. 유럽나라들은 전문적인 존속 군대를 설립하기 시작하였고 그런 군대를 유지하기위해 필요한 근대적 국가를 발전시켰다. 그러나 14세기의 이런 관점에서 볼때 가장 주목할 결과는 귀족과 세속적 지도자들이 서부 유럽의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리더쉽을 필요로 했을 그때 각자 싸우느라 바빴다는 것이었다.
광개토 대왕에 대하여.1. 나는 왜 이 사람을 선정했는가?우선 내가 광개토대왕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된 것은 첫 수업시간에 교수님의 발표문 작성 예시를 듣고 나서였다. 교수님이 김유신장군을 예로 들었을 때 정말 큰 건 하나 놓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유신장군에 대한 일화가 다른 인물에 비해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물론 여기에 개의치 않고 김유신 장군에 대해서 다시 조사하는 것도 큰 문제는 없겠지만 왠지 교수님의 어드바이스를 따라갈 가능성이 있을 것 같아 지식인에 삼국시대 주요인물에 대해 검색하여 보았다. 그랬더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라의 김유신 장군을 비롯하여 고구려의 광개토대왕, 신라의 진흥왕을 추천하였다.처음에는 별 생각 없이 한 검색이었지만 꽤 흥미로운 기사와 글들을 많이 볼 수 있었는데 대표적인 것은 광개토대왕에 대한 “태왕사신기” 란 드라마가 제작되고 있다는 것이었다.생각해 보니 전에 텔레비전 연예프로그램에 나왔던 것도 어렴풋이 떠올랐고 지금은 좋아하지 않지만 초등학교 때 좋아했던 배용준이 주연을 맡았다고 해서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또 여러 인물에 대해서 알아보던 중에 광개토대왕의 광대한 업적과 함께 연령 차이를 뛰어넘는 많은 현대 사회의 팬 층도 알게 되면서 최종적으로 광개토대왕에 대한 발표를 마음먹게 되었다.넘어가기 전에 한 가지 덧붙이자면 나는 예전에 드라마제목이 주몽처럼 인물의 이름이 아닌 태왕사신기 라기에 어느 인물에 관한 내용인지 궁금하였지만 가볍게 넘어간 적이 있었다. 이번 발표 인물을 광개토대왕으로 선정하게 되면서 그것에 대한 의문이 남아 알아보니 태왕사신기의 태왕은 광개토대왕을 칭하는 말이며 중국의 왕을 황제라 칭한 것같이 태왕이란 왕 중의 왕이란 뜻으로 당시 고구려가 독자적으로 사용하였던 호칭이었다는 것을 확인 할 수 있었다.2. 광개토대왕의 탄생과 가계여러 자료에서 통일되어 있지 않지만 광개토 대왕은 소수림왕 재위 4년째 되는 해인 서기 374~5년쯤에 태어났다.그는 고국양왕의 장남으로 출생 시 아버지 이연(고국양왕) 은 소수림는 요소가 아닐까 싶다.광개토 대왕의 가계에 대해 알아보자면 우선 할아버지인 고국원왕과 큰아버지 소수림왕, 아버지인 고국양왕을 들 수 있는데, 할아버지인 고국원왕에 대한 일화가 유명하다.고국원왕은 광개토대왕 출생 전인 371년에 평양에서 백제 근초고왕과의 전투 중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물론 살면서 좋은 일이 없지는 않았겠지만 그 인생이 참으로 파란만장했는데, 연나라 모용황과의 싸움에서는 전략적인 면의 부재로 인해 어머니와 부인이 볼모로 잡혀갔으며 아버지 미천왕의 시체가 약탈되는 일이 있었다. 이 때문에 중국에 신하의 예를 갖추어가며 아버지의 시체를 되찾는 일이 벌어졌고 그 부인 또한 13년의 인질 생활을 했다.이후 설상가상으로 백제 근초고왕과의 전투에서 화살을 맞아 고구려 역사상 전투 중 목숨을 잃은 임금이 되었다.그 뒤에 구부(소수림왕)가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고 아버지인 고국양왕과 광개토 대왕에 까지 그 치욕이 전해져와 수모를 갚기 위한 노력이 이루어졌다.이런 예를 통해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는데, 당시 혈통에게 전해지는 왕위계승제도의 문제점이 그 것이다. 물론 당시 상황에서 고국원왕의 전략과 행동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현대의 사람들의 평가가 더 많겠으나 그 자질이 충분했을까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단순히 혈통과 서열에 따라 이루어진 왕위 계승으로 인해 부족한 자질의 왕자들이 왕위에 올라 국가적인 면에서 불안한 상황을 조장했을 것 같다.그러나 반대로 이런 할아버지 고국원왕의 치욕이 없었다면 위대한 업적의 광개토대왕이 없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아마 광개토대왕은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와 큰아버지, 어머니를 포함한 왕가 식구들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푸념을 들었을 것이다.그렇기에 그는 원래 자질이 뛰어 났지만 기존의 왕들보다 강도 높은 훈련과 교육 속에서 성장하였을 것이며 할아버지의 치욕을 갚기 위한 마음속 불씨가 커져서 원래 목표를 뛰어넘는 성과를 불러일으킨 듯싶다.3. 광개토대왕의 유년기, 소년기유년시절, 담년째인 386년에 태자로 책봉되었다.고구려의 태자 책봉이 보통 15세를 전후로 이루어지는 것을 미루어 보면 담덕의 재능은 어렸을 때부터 남달랐음을 예상케 한다.태자시절 담덕은 직접 군대를 지휘해서 백제와 후연과의 전투에 참여하여 실전적인 면을 강화하였고 그 용맹함이 다른 나라에 널리 전해졌다 한다.광개토대왕에 대한 일화는 많지 않으나 태자로 책봉된 후의 일화가 하나 전해진다.담덕이 혼자 맹수들이 많다는 장군봉에 올라갔다가 호랑이를 만났는데 재빨리 자세를 낮추고 호랑이를 노려보면서“ 호랑아, 너는 고구려의 태자도 몰라보느냐? 나는 죄 없는 목숨은 해치고 싶지 않다. 그러나 네가 나를 공격한다면 이 활이 너의 목을 뚫을 것이다.” 라고 말했는데 호랑이가 눈길을 내리더니 등을 보이고 앉았다고 한다.이 일을 통해 담덕은 상대를 능가하는 힘이 있을 때 공격하지 않고서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여기에도 과장이 포함되었다 생각한다. 전부가 거짓인지는 현재로서는 알 수가 없지만 사실이었다면 담덕은 동물의 심리를 아는 인물이 아닌가 생각된다.강아지나 고양이도 눈을 맞춰서 상대방이 이기면 자신이 서열이 낮다고 생각하여 싸움을 하지 않는 다고 한다. (이건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으로 모든 동물에 일반화 된 것인지는 모르겠다.)4. 광개토 대왕의 청년기, 장년기391년 고구려 18대 왕인 고국양왕의 죽음과 함께 담덕이 1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그가 바로 고구려에 큰 업적을 남긴 고구려 19대왕 “ 광개토대왕 ” 이다.그는 역대 왕들의 안정적 기반들을 바탕으로 영토를 최대로 확장한 군주였으며 생존 시 칭호는 영락대왕(永樂大王)이었다. 영락이란 연호는 한국의 최초 연호로 알려져 있다.이것은 그만큼 당시 고구려가 독자적으로 놀라운 발전을 이루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광개토대왕은 즉위 후 많은 업적을 남겼는데 내치와 외치로 나누어 알아보았다.1) 내치(內治) :① 아홉 개의 절 창건: 재위 2년째인 392년에 광개토대왕은 평양에 아홉 개의 절을 창건하였다. 수리: 광개토대왕은 재위 16년째인 406년 봄 2월에 궁궐을 증축 및 수리하였는데, 당시 국가 규모 성장에 따른 조치로 여겨진다.③ 동쪽에 여섯 개 성을 쌓아 주민을 이주시킴: 재위 18년 408년 7월④ 남쪽 지방 순행: 재위 18년 408년 8월⑤ 제도 개혁: 효율적인 통치를 위한 행정제도 개편(지방 행정조직을 세분화), 군사제도 정비(귀족의 병들을 줄이고 국가의 직접 관할 하에 있는 군대를 증가시킴). 왕실 관련 법령 정비, 무덤을 관리하는 수묘인에 대한 규정 정비=> 광개토 대왕의 내치에 대한 기록은 외치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지 않지만 이 예들에서 평양의 중요성을 알아 볼 수 있다. 우선 국교의 사찰을 평양에 창건한 것, 또 평양 주민을 이주시키고 남쪽지방을 순행하였다는 것은 고구려인들에게 평양이 지리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졌다는 것과 광개토대왕 대에 미리 준비가 이루어짐으로써 다음 왕인 장수왕의 평양 천도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는 것을 보여준다.2) 외치 (外治) :① 서변정책: 광개토대왕의 서변 개척에 관한 기록으로 비문에서 영락 5년인 395년에 일어난 거란정벌과 영락 17년인 407년에 일어난 후연에 대한 정벌을 찾을 수 있고, “삼국사기”에서는 재위 원년의 거란 정벌을 들 수 있다.광개토대왕 즉위 시 서변 정세는 고구려에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는데, 3세기말에서 4세기 초 제왕들 간의 정권 쟁탈전(8왕의 난)에 따른 서진의 멸망과 함께, 5호 16국, 남북조시대가 계속되어 고구려 서변에서는 4세기에서 5세기 초에 이르러 여러 나라(전연, 전진, 후연, 북연)가 망하고 남연, 서연, 전양, 후양, 남양, 북양, 서양이 생멸하는 등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였다.② 남변정책: 고구려의 남변 정책은 광개토대왕 즉위 초부터 백제를 주된 대상으로 하여 적극 단행되었으며, 여기에 왜와 신라가 어우러진 복잡한 양상을 보여준다. 백제는 일찍이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위협해 왔고, 특히 근초고왕은 371년(고국원왕 41년)에 3만을 이끌고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전로 신라 주변 지역에 대한 영향력도 확대했으며 404년 왜를 격파, 한반도는 물론 해상권에까지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았다.고구려의 남변 정책은 광개토대왕 당시부터 상당히 치밀하게 준비되었으며 백제의 침공을 막기 위해 쌓은 성들과 평양 주민의 이주정책 , 대중국 정책 등이 모두 연결되어 고구려의 남변 정책에 반영되었다.③ 동북변 정책: 기원전 1세기 말 이후 계속된 고구려와 부여간의 통합 전쟁은 5세기 말인 494년경, 부여왕이 나라를 바치고 항복함으로 고구려의 승리로 끝나며 승리의 결정적인 주역은 광개토대왕이었다.이로써 고구려는 부여의 넓은 지역을 개척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광개토대왕의 대외정책은 서, 남, 동북 모든 방면에 걸쳐 효율적으로 추진되었다고 할 수 있다=> 광개토대왕의 외치는 후대왕인 장수왕의 대외정책의 성격과 평양천도로 미루어 볼 때 남변에 중점을 두었다고 보인다. 때문에 원활한 수행을 위한 남진과 서변, 동북변(중국과 북방 민족)에 대한 정책의 선행이 필요했다.▶광개토대왕의 내치와 외치를 통한 영토의 확장과 국내안정의 유지는 결과적으로 그 아들인 장수왕대에 이르러 절정에 다하였고, 그 후 약 2백년간 고구려의 태평성세를 이루는 기초가 닦여졌다.....# 광개토대왕의 주변국 정복 순서#① A.D 386년에서 392년 사이,후연과 백제를 적대관계로 만들고 후연과 고구려를 동맹관계로 만들어 백제 정벌.② A.D 392년 정월, 신라를 복속시켜 백제를 북쪽과 동쪽 방면에서 포위하였으며 같은 해 7월에 후연과 함께 온조백제를 공격하여 10월에 온조백제의 항복을 받았다. 또한 같은 해 9월에 후연과의 전쟁에 대비해 후연의 북쪽에 있는 거란을 미리 정벌하였다.③ A.D 395년, 후연과의 전쟁에 대비하여 다시 거란 정벌.④ A.D 396년, 금강하류에 수군을하였다.
동양의 역사와 문화則天武后★ 목 차 ★1. 서론 ------------------------------------ 12. 본론? 황제로 등극하기 전까지의 과정 -------------- 1~2? 무측천의 중요 업적 ------------------------ 2? 후세 사람들의 평가 ------------------------ 33. 결론 ----------------------------------- 3~41. 서론과제에 앞서 인물 선정에 있어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워낙 방대한 역사의 분량속에서 생각나는 인물만도 꽤 되었던 것 같다. 처음엔 사마천을 선택 할까 고민하다가 수업을 듣는 중에 교수님께서 측천무후라는 사람을 강조하시면서 대단한 여황제라고 말씀하셨던 것이 생각나서 측천무후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부끄럽게도 나는 그녀에 대해 별로 아는바가 없었고 자연스럽게 이번 과제의 주제를 그녀로 잡게 되었다.장대한 중국 역사에서 유일한 여성 황제 였던 측천무후!그녀는 태종과 고종, 두 왕의 총애를 받으며 권력을 휘두르다 마침내 자신이 주권을 잡게 되는 여걸이다.사실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녀에 대해서 접해본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어릴 적 모 방송사에서 그녀에 대해 제작된 중국 드라마를 방영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한창 포청천 같은 중국드라마가 인기였기에 아무 부담 없이 보았던 기억이 있다.그때는 드라마라는 생각이 앞서서 측천무후의 업적에 대해서 주의 깊게 보지 않았고 그녀 역할을 맡았던 배우에 대한 기억만 남아있는데, 과제를 하며 더 자세히 알게될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써 내려갈 글에서는 특유의 지략과 지혜로 그녀가 황제가 되기까지의 과정과 그녀의 업적, 그리고 후세 사람들의 평가에 대해 담아보겠다.2. 본론● 황제로 등극하기 전까지의 과정무측천은 지극히 평범한 가문의 무사확과 사족 출신의 양씨의 차녀로 태어났다.무사확은 재력가였지만 서족출신이기에 항상 신분상승에 대한 열망이 있었고 권력을 중시하여 아들에 대한 바람이 컸다고 한다. 그래서 처음에는 무측천의 탄생에 대해 안타까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관상전문가 원천강이 부름을 받고 경성에 가는 길에 이주에 들렀는데 무측천을 보고는 용모가 비범하여 귀인 중에서도 존귀한 상이라고 했으며 여자아이라면 훗날 군주가 될 것이라는 평을 하였다. 이 일 때문인지 무측천은 다른 여자아이들이 가사를 먼저 배우는 대신 시나 예절을 익히며 자라게 된다. 그녀의 일생에 전환기가 찾아오니 바로 아버지 무사확의 죽음이다. 무사확이 죽은후 무측천의 어머니 양씨는 딸들을 데리고 장안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는다. 당시가 무측천 열네살 때이다. 당시의 기록은 명확하지는 않지만 그녀의 외모에 대해 아름답고 부귀한 상이 었으며 매혹적인 눈을 가졌다고 내려온다. 이런 그녀의 소문을 들은 당 태종은 입궁명령을 내려 그녀를 재인으로 삼게되고 궁에 들어간 그녀는 당 태종이 내린 무미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궁에서 그녀는 엄격한 궁정교육을 받았으며 예악을 배워 문화적 소양을 넓혀가게 된다.이렇듯 조용히 살고 있던 무측천은 황태자 이치와의 인연을 맺게 되고 독특한 무측천의 매력은 아들 관계인 이치를 빠져들게 만들었다. 나이 든 당 태종이 죽은 후 그녀도 자연스레 비구니가 되어야 했는데 고종과의 밀회로 인해 아들을 출산하게 된다. 또한 당시 왕황후와 소숙비사이의 질투와 갈등이 극에 달하여 왕황후가 소숙비를 견제하기 위한 방책으로 무측천을 떠올리게 되면서 재입궁한다.이 때가 무측천 29세 때이다. 드디어 그녀의 세상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입궁후에 무측천은 황후를 폐위하기에 이른다. 자신의 자식을 죽여 그 죄를 황후에게 덮혀씌워 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거기서 만족하지 않는다.우선 왕씨와 소씨를 참하여 후궁들을 제압하고 자신의 아들 이홍을 왕세자로 세웠다.또 씨족지를 성씨록으로 개정하는 일을 단행했다. 이 모든 것들은 자신의 입지를 굳히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에게 국정에 참여하는 기회가 온다.고종이 병에 걸리면서 그를 도와 국정을 맡아 정사를 처리해 줄 사람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무측천이 권력을 잡고 얼마 되지 않아 황태자가 세상을 떠나고 곧이어 지병의 악화로 인해 고종도 세상을 등진다. 뒤이어 중종이 등극한다. 당시 고종의 상중이었으므로 무측천이 황태후가 되어 정사를 주관한다. 중종은 재위기간이 두 달이었다. 무측천에의해 폐위되었기 때문이다. 그 후 무측천은 뒤이어 등극한 예종의 뒤에서 예종을 조종, 본격적인 주권을 잡게 된다. 그녀는 정적들을 제거하기 위해 과감히 혹리들을 이용했다.또한 그녀는 지지 세력의 확보를 위해 과거제도를 개혁하고 전시를 창립했다.과거제의 개혁은 곧 왕권강화를 위함이었다. 그녀는 황제로 등극하기전 마지막으로 자신의 등극이 하늘의 뜻임을 분명히 하기위해 배낙수도 행사를 거행한다. 여러 준비를 마친 무측천은 마침내 국호를 주로 고치고 황제로 등극한다.● 무측천의 중요 업적- 명당 제사 및 유신 정책: 행정을 효율적으로 처리하기 위한 준비.- 불교를 이용한 여론 조성: 왕조교체에 대한 타당성 제공. (대운경, 대운사)- 예악 제정- 칠보설치- 불교와 도교 추앙: 불교와 도교의 갈등 해결.- ★ 과거제 발전: 과거제를 통해 선발한 인원수 증가시킴. 또한 황제앞에서 과거시험을 치 르는 전시제를 도입. → 과거제 체제의 위상을 높임.- 농업 발전: 12개조의 건의 → 농업과 잠업 권장. 부역을 가볍게 함. 경지와 호구를 증대 시킨 실적을 지방관 포상에 대한 표준으로 삼음.- 이민족과의 관계 개선에 주력: 북방민족의 침략에 대해 단호히 무력으로 대처하는 동시, 적극적 화해정책도 폄. 안정도호부, 북정도호부 설치(서북변방의 안정도모)- 경학, 역사학, 문학 발전.- 수학, 의학, 천문학 발전: 신본초, 약성요결등 18종류 의서 편찬, 상헝보 중시(천문학)- 조소, 서예와 회화, 무용의 발전.- 풍속과 관습의 개혁: 혼인촉구, 소박한 장례절차 강조.부녀자의 사회적 지위 높임.- ★ 인재의 등용 : 사회적 지위와 관련 없이 유능한 사람들을 직접 골라씀.군사적, 정치적 귀족계층이 통치하던 사회 → 사대부 가문 출신의 문인 관료계층이 주도하는 사회● 후세사람들의 평가그녀하면 떼 놓을 수 없는 것은 공포정치와 밀고제도일 것이다. 그녀의 이같은 악랄한 책략과 잔인한 탄압은 그녀의 많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죽은 뒤 일천여년이 흐르는 동안 그녀의 시비 공과에 대한 사람들의 의견을 분분하게 하였다. 또한 말년의 요승 회의 및 장역지 형제와의 추문은 그녀에 대한 많은 비난을 불러일으켰다. 어떻게 보면 그녀의 많은 치적이 역사가들의 평가에 의해 가려진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일단 그녀에 대한 당나라 사람들의 평가는 대체적으로 긍정적이다. 중종에서 현종에 이르기까지 무측천의 자손들은 그녀를 여러 황후들과 같은 선상에 놓고 순성황후 라는 존칭을 붙여주었으며 이후 그녀는 측천순성황후라고 칭해졌다.당나라 멸망에서 청시대에 이르는 동안에는 역사가들의 평가가 극과 극이었다. 5대 시대 후진 사람인 의 저자 유후는 무측천의 황제 등극을 암탉이 새벽을 알리는 것에 비유했으며 북송 역사가 사마광은 무측천의 정권독점을 탐탁치 않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러한 역사가들도 비교적 객관적으로 사실을 서술하면서 그녀가 대권을 장악하고 독단적이었지만 꿰뚫어보고 판단을 잘했다는 찬사의 말을 빼 놓지 않았다. 성리학이 성행한 이후 무측천을 폄하하는 의론은 점차 높아졌다. 그 시절의 역사가들은 무측천이 혹리를 임용하여 같은 종족의 지파를 학살하고 진신에게 해를 미쳐 그 화가 끔찍했다고 그녀를 지탄했다. 심지어 아홉가지 커다란 죄상을 나열하면서 무측천은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가장 흉악한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과 상반되는 견해도 역사학계에서 나왔다. 명나라 사상가 이지는 무측천이 아끼고 존경했던 사람들은 모두 현인군자였다면서 무측천을 높이 평가했다. 근대와 현대에 과학적 이론과 방법이 도입되면서 무측천에 대한 역사가의 평론도 한층 심도 있고 풍부해졌다. 또한 무측천이 잠들어 있는 섬서성 건현 사람들은 무측천을 극진히 숭배하고 공경하고 있다. 건릉은 당 고종과 무측천이 합장된능인데 명나라 이후 그곳 사람들은 줄곧 ‘무측천 능’이라 부르고 있고, 아직도 청명절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힘든 것을 마다하지 않고 고파령에 올라 무측천에게 제사지내며 추모하고 있다. 건현의 몇몇 학자는 무측천의 이야기들을 정리하여 책으로 냈는데 이것이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무측천이 어떤 역사적 인물인지 마음속으로 알고 있음을 충분히 설명해주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