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어 교수법※ 외국어 교수법1. 문법 번역식19세기 유럽에서 현대 언어인 프랑스어와 영어가 교육 과정에 포함되자, 이들 새로운 언어의 교육 모델로 라틴어와 희랍어 같은 고대 언어의 수업 방식을 채택, 답습하면서 발달한 교수방식이다.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문법과 번역이다. 특징으로는,① 목표어로 된 문헌 해독② 목표어의 문법 규칙과 어휘 학습③ 모국어가 수업에서 매개어 역할을 한다.도입 -> 예문제시 -> 어휘 학습 -> 문장 만들기 연습 -> 번역 연습2. 직접교수법19세기 중엽 유럽인들 사이에 의사소통 기회와 필요성이 증대 -> 문법 번역식 비판① 외국어 교육의 초점이 독해가 아니라 회화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② 외국어 학습의 원리는 아동의 모국어 학습 원리에서 찾았다는 점.-직접 교수법은 언어 교육을 할 때 학습자 모국어의 개입 없이 외국어가 직접 전달되는 것에 초점을 둠.-교육목표 자체가 의사 소통을 위한 언어 교육으로 초점이 바뀌었다.-의사소통을 위해 글이 아니라 말을 배운다.-외국어 수업을 어린이가 모국어를 습득하는 과정과 동일하게 진행한다.-목표어의 규칙을 직관적으로 추론할 수 있는 언어 감각 개발 (교사를 모방한다)-그림이나, 실물 등 시각적 보조 자료를 활용한다.3. 청각구두식1940년, 1950년대 행동주의 심리학(학습을 습관 형성으로 보는 견해)과 구조주의 언어학을 토대로 발전한 교수법으로 경험주의적 언어습득 이론이다.청각구두식 교수법은 언어는 말이지 글이 아니며, 제2언어 습득은 자연스러운 대화의 암기와 문형의 반복연습을 통하여 일련의 언어 습관을 형성함으로써 가능하다고 본다.특징으로는,① 목표어를 사용하여 의사소통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② 외국어 학습을 기계적인 습관 형성의 과정으로 보기 때문에 수업 중에 주로 모방과 암기, 반복 연습이 주를 이룬다. 문법 설명은 간단하게 한다.③ 구조적인 교수요목을 취하며, 언어의 유형 습득을 강조한다. -> 등급을 설정하고 단계별로 교육을 한다.대화를 통한 도입 -> 유형 연습(모방과 반복) -> 문법 -> 적용활동그러나 언어의 창조적 훈련이 없기 때문에 실제 상황에서의 언어 능력으로 전이되기 어렵고 흥미가 떨어지기 쉽다.4. 인지주의적 접근법1960년대 말부터 70년대 초 사이에 이성주의적 언어관에 입각해 청각구두식 교수법에 반대하여 일어남. 인지심리학과 변형생성문법론으로서, 기본 가정은 언어 습득의 본질은 유의적인 학습이라는 점과 문법 지식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이다. 언어에 관한 환경은 단지 실마리의 역할만 할 뿐이고, 학습자에게 훨씬 더 큰 책임을 부여한다.그러나 인지적 접근법에서는 목표어의 문법을 완전하게 이해시켜야하기 때문에 학습자의 모국어로 문법을 설명해야 한다.5. 침묵식 교수법교사의 불필요한 간섭을 최대한 억제한다.why? ① 암기와 반복을 통한 학습보다 발견과 창조를 통한 학습이 더 효과적이다.② 학습은 물리적인 대상물을 수반함으로써 촉진된다.③ 학습은 문제 해결을 함으로써 촉진된다.6. 전신반응법신체적 움직임을 동반한 언어 학습이 성공적인 회상의 가능성을 높여준다는 심리학에서의 흔적 이론에 바탕을 둔 교수법이다.① 이해중심 접근법, 듣기 능력을 가장 먼저 개발해야 한다고 본다. 듣기가 되어야 말하기가 된다고 여긴다.② 불안의 장인 언어 교실에서 학습자의 불안감을 없애고 학습에 용이한 긍정적인 분위기를창출해내기 위해서 신체 활동을 동반한 학습을 강조한다.③ 구조주의 언어학에 기초, 특히 각 단계별 명령문의 활용으로 이루어진다. 초급 단계의수업에 많이 활용된다.그러나 추상적인 표현지도에 어려움이 있으며 명령에 대한 반발이 있을 수 있어 중, 고급단계에서는 적합하지 않다.7. 자연적 접근법1977. 언어 교육의 목표를 실제 의사소통 상황에서의 언어 사용 능력 개발에 두고, 기존의 교수법에 대해 문제 제기.① 습득-학습가설 : 교실에서는 학습이 아니라 습득이 일어날 수 있도록, 언어 형식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의사소통의 기회를 더 제공하는 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② 자연적 순서 가설 : 문법 구조의 습득은 그 경로가 예측 가능한 방향으로 진행된다는 것이다.③ 모니터 가설 : 의식적 학습은 성인의 제2언어 수행에 매우 제한된 단 한 가지의 기능밖에 하지 못하는데 감시자, 또는 편집자의 역할이 그것이다.④ 입력 가설 : 메시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학습자의 현재 수준을 약간 상회하는 구조를내포하고 있는 발화, 즉 이해 가능한 입력이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 입력 가설이다.⑤ 감정 여과기 가설 : 강력한 동기, 적극적 태도, 자신감8. 의사소통적 접근법1970년대에 이르러① 언어 사용법 위주의 교육이 아니라 실제적인 발화 상황에 적절하게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언어 사용 위주의 교육을 한다.② 맥락화된 상황에 맞는 발화의 이해와 생성을 강조한다.③ 용인성과 유창성을 중요시 생각한다.④ 문법, 구조 등의 언어의 형태적 측면은 언어 교육의 일부이다.⑤ 문법 교육은 x, 자연스러운 상황을 통해서⑥ 교육이 학습자 중심으로 이루어진다.⑦ 교사의 역할 비중이 감소한다.지금까지 외국어 교수법의 발달 순서로는문법 번역식 -> 직접교수법 -> 구두청각식 -> 인지주의적 접근법 -> 침묵식 교수법-> 전신반응법 -> 자연적 접근법 -> 의사소통적 접근법※ 최근 외국어 교수법의 특징 및 경향1. 의사소통 중심의 교육언어의 본래 목적이 의사소통에 있다면, 그 목적은 언어교육에도 그대로 적용되어야 한다.의사소통 능력(communicative competence)이라는 개념은 Hymes(1972)에서 처음 사용된 용어로, Chomsky가 말한 언어 능력(language competence)에 언제 말해야 하고, 언제 말하지 않아야 하는지, 또 언제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해야 하는 지까지 포함한, 실제 발화 상황에서의 언어 사용 능력으로 정의할 수 있다.문법적 능력이란 어휘, 발음 규칙, 철자법, 단어 형성, 문장 구조 등의 언어학적 기호를 정확히 사용하여 문법적으로 올바른 문을 생성해 내는 능력을 말한다. 사회언어학적 능력은 설명, 묘사, 설득, 정보 전달 등의 언어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사회적 맥락과 담화 상황에 맞게 문법적 형태를 사용하거나 이해하는 능력으로서, 언어 사용 장면에 알맞게 수행하는 능력을 말한다. 담화 능력이란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응집성과 결속성 있게 조직하는 능력을 말한다. 전략적 능력은 발화 생산자가 소통의 효율성을 높이고 소통 장애를 보상하기 위해 사용하는 언어적, 비언어적 전략의 사용 능력을 말한다. 의사소통 중심의 교육이 되기 위해서는 위에서 언급한 이 네 가지 범주를 수업에서 모두 담아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2. 과제 중심의 교육과제 중심의 교육은 언어 기능은 실제적인 사용을 통해 증진된다고 보고, 언어 교육이 어휘나 문형 등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일련의 과제의 집성으로 설계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는 각종 과제의 수행이 의사소통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는 믿음에서 출발한 것으로, 오늘날 널리 인정되는 교육의 방향이다.과제의 의미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언어 교육에서는 ‘의미를 중심으로 의사소통을 위해 행하는 모든 이해, 처리, 생산, 대응 활동’을 말한다.(Nunan, 1991)일반적으로 언어 교육에서의 과제는 교육적 과제와 실제적 과제로 나뉜다.교육적 과제: 언어 숙달을 목적으로 문장을 만들어 보거나 테이프를 듣거나 따라 읽는 것.
총체적 언어 교육에 대해서...1. 총체적 언어교육이란 무엇인가?총체적 언어는 진정한 읽기와 쓰기를 통해 일어나는 과정을 말한다. 분절된 기술이나 단편적인 언어 훈련은 진정한 읽기와 쓰기라고 볼 수 없다. 그것은 하나의 테크닉에 지나지 않는다. 진정한 언어교육은 언어소통체제에 관한 규칙을 추론하고 이해하게 하며, 언어 작용을 예측하고 검증하도록 하는 과정에서 단순한 단어 습득이 아닌 학생으로 하여금 창조의 과정을 말한다. 즉, 진정한 총체적 언어 교육이란 단순히 상황 맥락 안에서 기술을 배우는 것을 초월하여 사회적, 개념적, 언어적 모든 맥락을 결정하는 상호 작용의 상위 체계를 학습하는 보다 광범위한 의미이다. 그리하여 학생들에게 의미있는 상황 속에서 학생들의 동기화를 중시하고, 스스로 성취하고자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국어에서의 총체적 교육은 읽기, 쓰기 뿐만 아니라 말하기, 듣기, 국어지식 등 여러 분야에서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총체적 언어 교육은 읽기, 쓰기, 말하기, 듣기 사고하기의 언어 과정을 통합하는 것이기 때문에 교수적 자료의 다양성에서 단순한 연습형식의 언어교육과 차이가 난다. 총체적 언어를 시도하는 교사는 의도적으로 제작된 자료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즉, 교과서에만 의존하지 않는 것이다. 학생들의 생활에서 접할 수 있는 것들을 활용하여 교육이 이루어지도록 한다. 이러한 생활 속의 자료들은 보다 높은 수준의 학습 동기를 유발하며, 유아가 교육과정의 주체로서 활동 할 수 있게 한다.2. 총체적 언어 교육을 위한 전략총체적 언어 교육을 위한 총체적 언어 교실은 없다. 그 이유는 총체적 언어가 교사의 신념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사의 교수전략이 매우 중요하다. 총체적 언어교육을 위한 교수 전략의 가장 큰 목적은 읽기, 쓰기, 말하기, 듣기, 사고하기를 통합하여 언어 발달의 과정을 증진시키는 데 둔다.총체적 언어교육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문학적 접근은 학생들이 단순히 책을 읽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책의 범위를 능가하는 언어 활동으로 전개될 수 있게 한다.문학적 접근에 대해 다양한 책을 활용한 교수전략은 작가적 전략, 협동적 학습전략, 이해를 위한 전략, 이야기 구조 인식을 위한 전략, 듣기 전략, 연출 전략, 시각 예술 전략 등이 있다.1) 시각적 전략프로젝트 활동이나 실제 모형을 보여주거나 실제 문학 작품에 나타난 장소나 인물의 자료를 보여줌으로써 학생들의 사고 증진에 도움을 줄 수 있다.2) 이해를 위한 전략총체적 언어교수법은 학생들이 단어나 문장 하나하나를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문맥을 이해하고 전체를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지도록 하는 것이다. 잘 이해하고 진정한 의미를 창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마인드 맵을 이용한 생각 가지를 만들어보거나 직접 그 주인공의 입장이 되어서 생각해보도록 유도한다.3) 문학적 접근을 중심으로 한 작가적 전략문학적 접근 방법 중의 하나인 작가적 전략은 모든 언어 확장 활동을 위한 기초로서 ‘짓기’를 활용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학습자는 비판적 사고를 기를 수 있게 된다. 자신들이 선택한 주제를 가지고 글로 표현할 수 있도록 도와주거나 자서전 꾸미기, 브로슈어 활동 등을 활용한다.4) 이야기 구조 인식을 위한 전략이야기 구조의 인식을 위한 전략은 교사는 물론 학습자가 작품을 이해하도록 돕는다. 학습자는 작품을 접하게 되면서 사건의 연속이 있는 이야기나 목록과 연속이 있는 이야기, 비교와 대조가 있는 이야기, 운율과 반복이 있는 이야기, 진술과 정교화가 있는 이야기 등을 학습하게 된다.5) 연출전략연출전략은 학습자들이 적극적으로 할 수 있도록 하는 안정감 있는 분위기와 격려를 하도록 해주는 것이다.6) 듣기 전략듣기는 우리 생활에서 가장 많이 하는 활동이다. 책을 읽는 순간이라도 학습자는 내면의 소리를 듣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시와 함께 노래, 시낭송이 녹음된 것을 함께 제시하는 것 또한 좋은 듣기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7) 게임 전략게임전략은 학습자들이 활동에 더욱 재미를 느끼며 몰입할 수 있도록 한다. 학습이란 것은 게임처럼 재미가 있어야 학습동기가 유발된다고 생각한다. 본인이 학교에 다닐 때도 외울 것이 많은 내용을 그냥 칠판에 판서만 하는 교사의 수업보다는 재미있는 언어유희를 이용하거나 게임을 통해 저절로 외우게 했던 교사의 수업이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아 있다.
1. 교수-학습 방법의 성격2. 교육방법의 의미3. 교수-학습 방법의 분류1) 교육의 주체에 따른 분류(1) 교사 중심 교육 방법(2) 학습자 중심 교육 방법2) 학습자의 크기에 따른 분류3) 의사소통 구조에 따른 분류(1) 일제 학습(2) 집단 학습(3) 개별 학습4. 교수-학습 방법의 유형1) 강의법2) 문답법3) 토의법①원탁식 토의②배심 토의③자유 토론④공개 토의⑤단상 토의⑥대담 토의⑦세미나⑧버즈 토의4) 문제 해결 학습5) 발견 학습6) 협동 학습교육의 과정은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이 하나의 틀 안에서 이루어진다. 이것은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을 별도로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르침이 반드시 학습을 유발하는 것은 아니지만 교수는 학습의 전건이 되고 합습은 교수에 의하여 보다 수월하게 수행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즉, 교수는 학습을 유발하는 중요한 기제인 것이다. 교사는 교육방법뿐만 아니라 학습 방법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하고, 교육방법에 대한 이론적 이해와 학습자 및 교사 자신에 대한 정확한 분석이 따라야 한다.1. 교수-학습 방법의 성격학습자가 한 명이든 그 이상이든 학습목표나 학습 내용을 갖고 상호작용을 하기 위해서는 분명 어떠한 교육 방법이 사용되기 마련이다. 전통적으로 교육 방법이란 학습자로 하여금 학습 목표나 학습 내용을 이해하고 달성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적절하게 선정된 교수 행위 또는 교수 절차를 의미한다. 방법이란 설정한 목적이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구체적인 행위를 말한다. 따라서 교육방법이란 교육적으로 가치 있는 목적이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는 교사에 의해서 수행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교육방법이란 교사에 의하여 학습자들을 대상으로 설정된 교육적 목적이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이루어지는 일련의 행동적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교육방법이란 교육 목표 달성을 목적으로 제반의 교수 활동인 설계, 개발, 적용, 관리, 평가를 하는 데 요구되는 지식과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로 늘리는 것으로 이상적인 것은 부분 2, 3, 4가 모두 부분 1로 합해질 수 있도록 하는 상황이다. 그렇다고 해서 부분 5의 존재를 부정할 수는 없다. 교육과정에도 명시되지 않고 의도적인 교사의 수업에 대한 노력도 가해지지 않은 내용일 뿐 아니라 학습자에 의하여 학습되는 이러한 내용을 ‘잠재적 교육과정’으로 분류한다.결국 효율적인 교육이란 이와 같이 적절한 교육을 이루는 세 가지 기본적 요소인 교사, 학습자, 교육내용이 적절하게 조화되어 나갈 때만 가능해진다. 적어도 학교 교육에서는 모든 교육활동이 교사의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가르침에 의하여 이루어지나, 그렇다고 해서 학습자의 학습활동이 없는 상태에서 교사의 가르침은 의미가 없게 된다. 또한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은 교육내용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므로 교육에 있어서 이들 요소간의 관계는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바로 이 같은 점에서 우리는 교육방법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교육방법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이제까지 많은 이들은 “잘 가르치기 위한 구체적 방법” 또는 “잘 배우기 위한 실제적 방법”, 그리고 “내용의 특성에 따른 구체적 방법” 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해 왔으며, 또 교육의 중요한 세 가지 요소 중의 어느 한 가지에 초점을 맞춘 방법이라는 견해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교육방법이란 주어진 교육목표를 효율적으로 달성하기 위한 조건형성 과정이면서도 학습자만의 문제를 다루는 학습지도만은 아니며, 그렇다고 해서 교사들의 수업기술만도 아니다. 다만 교육에 관계되는 이 세 가지 요소간의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상호작용을 원만히 이끌어내기 위한 포괄적 방법인 것이다. 물론 포괄적인 교육방법의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각각의 요소와 관계된 원리나 원칙을 세부적으로 설명해야 한다. 그렇게 정리하다가 보니 어느 한 부분만을 지나치게 강조할 수 밖에 없다고 한다. 그러나 앞으로는 의도적으로도 이들 세 가지 요소간의 통합적인 방법을 강조해야 하며, 아울러 이 요소들을 통합함으로써 사용할 수 있는 구체적인 공학적 기자제공해 주고 사고권을 넓혀 나가게 해야 한다는 허버트 등의 교육관에 의해 뒷받침 된 것이다.(2) 학습자 중심 교육 방법학습자 중심의 교육 방법은 학습자들의 생활과 자신의 학습 스타일에 초점을 두어 학습자들은 잘 준비되고 검증된 학습 자료로 스스로 진도에 맞게 학습해 나가며 서로 다른 능력과 배경을 가진 집단에 적용 가능하다. 이는 20세기로 넘어오면서 아동 중심의 교육운동, 진보주의 교육철학 등이 교수-학습 과정에서 학습자 개인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켰다.2) 학습자의 크기에 따른 분류학습자가 40명 이상의 대집단일 때는 강의법이 대표적인 방법이며, 20명 내지 40명 사이인 평균 30명 정도의 중간 규모일 때는 전형적인 교실 수업이 적당한데, 이때는 특히 교사의 질문과 학습자의 대답이 주가 되는 문답법 또는 대화법이 대표적인 방법으로 보았다.3) 의사소통 구조에 따른 분류(1) 일제 학습일제 학습은 한 사람의 교사에 의하여 학급의 학생 전체가 일제히 학습 활동을 하게 되는 것을 말하며, 오늘날 대부분의 학교에서 이와 같은 일제 학습의 형태로 수업이 진행되고 있다. 일제 학습은 교사가 일정한 질문, 과제 또는 문제를 학급 전체에 제시하여 교사의 지도하에서 학급의 모든 학생이 교수-학습 활동에 참가하게 된다. 따라서 일제 학습은 교사의 설명, 제시, 해석 등에 의하여 전체적으로 수업이 진행될 수 있으므로 시간과 노력의 낭비가 적어서 매우 합리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으며, 학생들이 비교적 단시간 내에 지식 또는 기능을 습득하게 되는 장점을 지닌다. 그러나 일제 학습은 교사를 중심으로 하여 조직되는 것이므로 자연히 교사 활동 위주의 수업이 된다.(2) 집단 학습집단 학습은 학생들이 자유롭고 민주적인 분위기에서 발표하고 상호 토의하면서 학습하는 것을 말한다. 오늘날 많은 학교에서 활용되고 있는 소집단 학습, 분단 학습 등은 집단 학습의 기본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집단 학습은 집단 활동을 통하여 민주적인 학습 활동과 그 태도를 성장시키려는 것이며, 지식이나 능력을 적는 것이다.1) 강의법강의법은 가장 오랜 역사를 가졌으며 보편화된 교육 방법으로, 중요한 정보를 효율적이고 능률적인 교사의 말로써 학습자에게 전달하는 형태이다. 즉, 지식이나 기능을 교사가 선정, 계획하여 학습자에게 전달하고 이해시키며, 학습자는 이것을 듣고 생각하며 때로는 필기하면서 학습하는 방법이다. 또한 강의법은 해설에 의한 일방적인 교수의 방식이며 문제 형식으로 제기된 어떤 사항 또는 관념을 학습자에게 이해시키기 위하여 설명하는 과정에 포함된 교수상의 절차를 말한다.-장점: 새로운 단원의 도입에 유효하다흥미를 환기하여 학습 동기의 유발에 유효한 수단이다.전체적 내용을 조망하는 데 유효한 수단이다.-단점:교과서의 설명에 그치며 시간을 낭비하게 된다.학습 과제의 주제에서 유리되어 학습의 지엽적이고 말단적인 문제에 얽매일 염려가 있다.수업 진행중에 과도한 받아쓰기 연습에 빠지기 쉽다.하급학교 학생이나 지능적으로 저급한 학생에게는 부적당하다.학습자가 강의 내용을 분석할 수 없고 강의 내용의 중점을 요약하지 못하는 경우가생길 수 있다.2) 문답법문답법은 질문법 또는 발문법이라고도 하며, 산파법이나 대화법과 유사한 것으로, 질문과 응답을 계속하는 과정에서 학습자들의 호기심을 유발하고, 다양한 수준의 사고를 자극하여 스스로 탐구하는 능력을 키우고 배우게 한다. 또한 교사와 학습자, 학습자 상호간의 의사 소통을 증진시키고, 지금껏 배운 것에 대한 평가 및 정리의 수단으로도 사용된다.일반적인 수업은 주로 구두 활동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구두 활동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질문은 효과적인 교수-학습법의 하나로서 널리 사용되고 있으며, 오늘날의 학습 지도에 있어서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교사는 질문을 잘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질문은 예로부터 교육에 있어 중요한 방법이었다. 문답의 유형은 교육 목표 분류 수준, 사고, 그리고 사고의 폭 등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즉 교육 목표 분류에 따라서는 기본적인 개념을 묻는 지식이나 이해력, 적용력, 분설정할 수 있다.그러나 원탁식 토의의 궁극적인 목적은 의사 결정이나 목적 설정이라기보다는 역시 활발한 아이디어의 상호 교환에 있다.②배심 토의배심토의는 집단 구성원이 많아 각 학생에게 발언하도록 하는 것이 곤란하여 토의 참가의 의욕이 약화될 때 수명의 대표자를 단상에서 토의시켜 타학생에게 공개하는 것이다. 즉, 선발된 소집단이 토의를 하는 것을 청중이 방청하는 형식이다. 배심 토의 발표자들은 서로서로 이야기를 나누기에 편리하고, 청중이 쉽게 보고 들을 수 있도록 교실의 한가운데에 자리한다. 의장은 토의를 진행하며 균등한 참여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진행 방식은 한 주제에 대해 찬성과 반대 의견의 대표자 4~6명을 선정하여 토의 장면으로 도입하고 적당한 시점에 청중을 토의에 참가시키거나 질문을 허용하여 설명을 구하기도 한다.③자유 토론자유 토론은 토론 집단이 6~8명으로 구성되는 것으로 배심 토의의 수정된 형태이다. 이때 참석자의 반은 청중을 대표하는 입장이고, 나머지 반은 자원인사나 전문가로서 참여한다. 소요되는 시간은 두 집단 사이에 거의 동등하게 나누어진다. 자유 토론은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사회자는 참석자에게 진행 방법과 그들의 책무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 준다.-사회자는 모든 참석자를 소개하고 토론을 진행시킨다.-시간이 허용되면 청중으로부터 질문을 받을 수도 있다.④공개 토의고대 로마의 포럼형식으로, 원래 시장과 같이 많은 군중이 모인 곳에서 이루어졌다. 1~2명의 연사가 공중회의소에서 연설을 하고 끝내면 이에 대한 질문을 하기 위하여 회의를 열고 의장의 사회로 회의가 진행되는 방식이다. 이와 같은 방법은 학급의 집회나 전교의 집회 등에 적용하는 방법이며, 전문가가 참가하면 한층 유효하다.⑤단상 토의단상 토의는 강의식 토의라고도 하며, 배심토의보다는 좀더 형식적이고 자유로움이 억제되는 방식으로, 준비된 회의장에서 동일한 문제에 대하여 2명 또는 그 이상의 강연자가 논점이나 문제점에 대하여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의견을 발표한다. 강연자가 결론을것이다.
제3부 민족자각과 민중연극1. 선구연극인과 학생의 민족극운동[창조]지를 중심으로 한 문학 동인지가 서울, 대구, 평양을 중심으로 생겨날 때 [조선], [동아] 양대 민족 신문이 창간됨으로써 문예운동은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이러한 각계의 신기운은 연극계도 예외가 아니어서 기성연극인들은 반성과 함께 새시대에 대비한 준비를 서둘렀고, 기성연극의 낡음에 식상한 신진 연극지망생들은 서양 근대극의 직수입을 서투르나마 시도하려는 움직임을 보인 것이 바로 1920년대 초의 연극계 상황이었다.그러니까 반성하면서 새 채비를 하는 구태와 아마추어적인 새싹이 연극계를 서서히 양분하기 시작한 것이다.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초창기로부터 연극을 해온 사람들도 일본식 신파극에 절은 연극인과, 3.1운동 이후에 등장했으면서도 보수적인 현철, 김정진과 같은 기성연극인으로 다시 나뉘어졌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신파에 절은 구태의연한 연극인들은 3.1 운동 이후에도 여전히 과거 극단들인 신극좌, 취성좌, 혁신단 등을 그대로 지속시켰고, 윤백남, 이기세 등 인텔리 신파 연극인들은 예술협회, 민중극단 등을 새로 만들어 개량신파를 시도했던 것이다. 신파극도 낡은 것과 새 것으로 나누어진 셈이다. 그리하여 같은 신파극이라도 감각이 낡은 극단들은 유랑극단화되어 지방으로 밀려났고, 개량 신파극단 두세 개만이 서울을 근거로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래도 돌아다니는 동안 널리 알려져서 여배우 지망생도 하나둘 굴러들어 왔다. 1920년대 예원을 장식했던 이월화, 복혜숙, 이채전 등도 신파로부터 출발한 여배우들이었다.복혜숙은 신극좌의 말단 예비 단원으로서 남자 배우들의 구질구질한 빨래 세탁은 말할 것도 없고 뜨거운 여름에는 단장을 비롯한 배우들에게 부채질까지 해주어야 겠다. 이런 고초를 1년여 겪은 후에 비로소 무대에 설 수 있었는데 그때는 이미 서울무대에서는 신파가 빛을 잃어가던 때였다. 그녀는 유랑극단화된 신극좌를 따라 전국 방방 곡곡을 떠돌아야 했다. 그럴 때마다 복혜숙은 인질로 여관에 잡혀 있어야 했다직하고 있는 이헌구의 노력으로 언론의 관심은 대단했다. 그렇다고 그들이 번역극을 소홀히 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일제의 간섭으로 그들은 여러 가지 문제점에 봉착한다. 일본의 검열관은 대부분의 작품들의 내용을 바꾸라고 지시하며 극연의 인물들을 괴롭히기도 하였다. 하지만 젊은 인텔리연극인들은 혹독한 일제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저항의 방법으로 예술운동을 교묘하게 구사하였다. 바로 이러한 탄압과 저항의 악순환 때문에 한국연극은 아름다움과 인생의 깊이를 잃고 의식만 앞서는 거친 무대사를 낳게 된 것이다.하지만 일본인의 탄압 속에서도 한국에 있는 서양인들은 그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그들의 기본적 문제인 재정적인 것은 해소가 되지 않았다. 이 때 극예술연구회의 정신적 리더이자 최초의 연출자인 홍해성이 생활고로 인해 흥행극단인 조선연극사로 옮긴다. 그동안 극연으로 많은 손해를 보던 조선연극사는 홍해성이 자신의 극단으로 옮겼다는 것을 대대적으로 광고한다. 이렇듯 극연과 조선연극사는 감정적으로 첨예하게 대립하게 된다. 소위 정통적인 신극을 추구하는 인텔리 집단 극연측과 신파흥행단들 간의 감정적 대립은 이처럼 표면화된 것은 곧 순수연극과 흥행극단 양쪽의 약점을 실상대로 드러난 것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감정적 대립은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사적인 자리에서 서항석과 신불출이 싸운 것이다. 이와 같이 인텔리 연극인들과 신파 연극인들의 대립은 극심했다. 하지만 순수예술을 지향하던 극연의 열정도 오래가지 못했고 점점 전문극단으로 기울어져가고 있었다. 마침 유치진이 일본까지 가서 연출 수업을 받고 온 후라 극연은 1935년 말을 기해 제 2기 활동에 들어가기도 한다. 또한 연출도 극작가인 유치진과 서항석이 번갈아 가면서 한다. 그래서 공연장도 경성공화당이 아닌 부민관의 큰 무대로 옮겨진다. 제2기 선언과 함께 막을 올린 『춘향전』은 대성공을 거두고 경제적으로 극연은 흑자로 돌변한다. 하지만 그들이 점점 전문극단으로 변하자 배우 11명이 집단으로 탈퇴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접어들자 영화라는 새로운 변수가 생기고 말았다. 그리고 이 영화로 연극은 조금씩 밀리기 시작한다. 이것은 순전히 미군정의 문화정책의 실패인 것이다. 그 첫 번째로 미군정은 자국의 영화를 무검열로 방출함으로써 개방적 성윤리를 일거에 밀어 붙였던 바, 대중의 호기심을 산 것은 물론이고 진부한 도덕률을 강요하는 연극을 대중이 외면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로 노동법을 잘못 개정해서 무대로부터 여배우를 축출한 것이다. 세 번째로 입장세 10할 인상이 가장 타격이 컸다. 이런 상황으로 많은 사람들이 극장을 찾아오지 않자 극단들은 급속하게 몰락해 갔다. 이러한 상황이 계속 속출하자 극단들은 저질의 연극을 만들어 공연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타락과 연극이 맞씨름한 것이 좌익연극과 대결했던 극예술협회였다. 또한 전국연극예술협회를 만들어 유치진을 이사장으로 추대한다. 많은 연극단체들이 민주주의에 대해서 공연을 하고 정부 수립에 대한 선전을 하자 이것이 최초로 연극이 국가를 위해 공헌한 것이다.4. 그 후의 북한연극북한의 연극은 우리 남한과 다르지 않다. 적어도 북한이 공식적으로 연극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1946년부터의 일이다. 우선 남한에서 활동하던 남로당 계열에서는 해방이 되자마자 그 쪽에 손을 쓰기 시작했다. 즉 남로당은 해방이 되자마자 재빨리 예술계에 검은 손을 뻗쳐 일제시대 프로계에 조금이나마 관련을 가졌던 연극인과 우왕좌왕하던 연극인들을 유혹하여 좌익극단을 조직케 했고, 이들을 다시 프로연극동맹이라는 조직체 속에 묶어서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도록 했던 것이다. 이것이 연극을 정치도구로 전락시키는 1단계였던 것이다. 따라서 북한연극의 시작은 1946년 북조선연극동맹이 조직되면서부터였다. 월북 극작가 박영호를 위원장으로 하여 서울에서 제1차로 월북한 극좌파인 해방극단 단원들이 주축이 되어 북조선연극동맹이 조직되자, 서울에서 맹위를 떨치던 악질적인 혁명극단, 청포도, 조선예술극단 등 좌익극단 단원들과 그들의 꾀임에 빠진 월북 연극인들이 평양국립극단, 시립예술극단, 해방예도했다.국내에서 최초의 실전주의 연극인 [붉은 장갑]으로 1951년을 성공적으로 마감한 신협은 1952년 유치진의 합류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먼저 유치진이 관심을 오랫동안 가져오던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정복에 나섰다.유치진 (연출), 김동원(오델로), 이해랑(이야고)의 명콤비 덕분에 [오델로]는 큰성공을 이루었다.그리고 신협은 그동안 너무 무겁고 칙칙한 공연만 하다보니 문제가 따랐다. 피난살이의 고달픔 속에서 가뜩이나 마음이 우울한데 연극마저 어두워야 하느냐는 비판이 일었던 건이다.그래서 취택된 레퍼토리가 몰리에르의 [수전노]였다.연극이란 것이 본래 인생의 환영이지만 관중에게 주는 것은 삶 그 자체 이상의 리얼리티도 있는 것이다. 신협이 최초로 그것도 피난지에서 공연한 번역희극은 전시 중의 관중에게 대단한 웃음을 선사했다.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도전한 [빌헬름 텔]에서도 대성공을 이루었다.이 시기가 신협으로서는 전성기라 할 만큼 인기를 누린 때다. 1951년 초부터 1952년 말까지 2년여 기간이었으므로 전쟁이 막바지인데도 신협은 호황을 누린 것이다.그러나 신협도 1952년 [빌헬름 텔] 공연 이후 퇴조하기 시작했다.왜냐하면 독주하던 신협에 제동을 거는 연극 라이벌이 하나 둘 생겨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3. 영화의 도전에 위축된 연극역사상 가장 어려웠던 3년여 동안 육군과 공군의 뒷받침으로 연극이 그 명맥을 끊지 않고 공연을 벌일 수가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서서히 끝나가면서 서울이 수복되었고 연극인들도 군대의 후원을 뒤로 하고 귀향에 서둘렀다.이때 연극인은 두 패로 나뉘었는데, 국립극장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연극인들은 대구에 더 머물러 있었고, 신협 단원들은 1953년 1월 [향수]라는 작품을 피난지에서의 고별공연으로 하여 정부를 따라 서울로 복귀했다. 유치진 역시 서울로 돌아와 연극 지도자로써 연극 재건에 앞장서면서 네가지 방안을 제시했다.즉 극단 시설의 재정비, 극장의 성격화, 창작희곡 육성, 신인양성 등이 그것이었다.그러나 유치진의 제안은 막연하면서 이를 극복해보려는 움직임으로 드라마센터의 건립과 동인제 극단운동이 시발되었다.그렇지만 드라마센터의 연극중흥운동이 단 1년만에 실패함으로써 동인제 극단운동이 가속화되었다. 이미 1929년에 지두한을 중심으로 동인제 극단이 있었지만 극히 미력해서 연극계를 변화시킬 활동을 벌이지 못하다가, 60년대 들어서 본격적인 동인제 극단들이 주도하게 된다. 그 선두주자가 제작극희와 유사한 실험극장이었다. 실험극장은 서울대 연극부 출신인 김의경와 최진하가 주동이 되어 서울대?연대?고대의 엘리트들로 구성되어 1930년대 극예술연구회 이후 가장 의욕 찬 출발을 한다. 이들은 전례 없는 5조 10항의 화려한 공약을 발표함으로, 이상적이며 나이브하지만, 비현실적인 공약을 내세운다. 그들은 신협중심의 구태의연한 리얼리즘에 반대하여, 전위극 공연으로 부조리극의 기수 이오네스코 작 『수업』을 창립공연 내세운다. 그러나 비상한 관심을 모은 이 공연은 “머리만 앞서고 손발은 움직이지 않는 안타까움만 안겨줌”이라는 평을 받음으로 젊음의 미숙함을 드러내 보였다 . 그러나 부조리극을 이 땅에 최초로 소개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두 번째 공연으로 『거기 누구 없소?』를 올리지만, 여전히 차가운 반응을 얻는다. 또한 재정적 고통을 받기도 하지만, 제 3회공연부터 본격 대외공연을 시도하여 『다리에서의 조망』은 큰 성과를 얻게 된다. 그래서 제 3회공연 직후 단원들 사이에서 실험극장이 직업극단으로 전신해야 한다는 주장에 따라 민예(民藝)라는 이름의 전문극단과 아마튜어 소극작인 실험극장이라는 2원조직을 갖기로 합의하지만, KBS 텔레비전과 드라마센터로의 단원 대거 이탈로 파산직전이 이르게 된다.이에 실험극장에 이어, 1963년 교수?관리?소극연극인?대학생들로 구성된 민중극장이 출현하게 된다. 민중극장은 타성에 젖어 있던 기성극단과는 달리 계통성있는 작품선정과 새로운 표현양식을 모색하겠다는 의지로 5월에 페르시앙 마루쏘의 『달걀』(김정옥연출)을 창립공연으로 가졌다. 이근삼과 김정옥의 희극작가 중심으로 이루어다.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 일세를 풍미한 완당바람{-차 례-들어 가며몸 말1. 출생과 가문2. 학예의 연찬1) 연경에 다녀오는 24세까지의 수업기2) 연경을 다녀온 25세부터 과거에 합격하는 35세까지 학예 연찬기3) 관직에 나아가는 35세부터 제주도로 귀양가는 55세까지의 중년 활동기4) 55세부터 63세까지 제주도에서 귀양살이하는 유배기5) 제주도 귀양살이에서 풀려나서부터 세상을 떠나는 71세까지의 만년기나오며*참고 문헌들어가며...김정희는 자신만의 독창적 필체인 추사체로 한 시대를 풍미한 서예가이다. 그는 금석학(金石學){) 금석학(金石學): 옛날의 비석이나 그릇 또는 쇠붙이 등에 새겨진 글자를 연구하는 학문.에도 뛰어난 능력을 보여 국사학의 발전과 연구에 큰 기여를 했으며, 실학 사상을 형성하는 데에도 기여했다.하지만 그 동안 김정희에 대하여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추사 김정희란 이름과 그의 유명한 글씨체인 추사체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학교 다니면서 열심히 외운 김정희=추사체의 공식이 지금까지도 머리에 남아있다. 추사 김정희는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읽으면서 이 사람이 방외인인지 아닌지를 떠나 일단은 우리 역사에 이런 훌륭한 분이 계셨다는 사실에 고개 숙여 감사를 올리고 싶었다.추사 김정희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산 시대는 왕실의 세력이 약해지고 외척의 세력이 성장하여 세도 정치가 난무하던 시대였다. 그렇다면 여기서 잠깐!세도 정치는 왜 일어났는가? 그것은 정조의 급서 이후 연이은 어린 왕들의 즉위가 그 이유일 것이라 생각한다. {) 신병주, 하룻밤에 읽는 조선사, 중앙 M&B1800년 조선후기 개혁 정치와 문예중흥을 이끌던 정조가 갑자기 승하한 뒤 11세의 순조가 그 뒤를 이으면서 시작된 정치 권력의 공백은 대왕대비와 외척들이 차지하게 된 것이다. 이른바 세도적치기의 서막이 열린 것이다. 그 이후, 헌종과 강화도령 으로 알려진 철종 등 허약한 왕이 연이어 등장하면서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등에 의한 세도정치가 성행조선시대 성리학은 주로 송나라 주자학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발전했다. 명나라 양명학(陽明學)에 대해서는 일부 학자들만이 받아들었을 뿐 적극 수용은커녕 오히려 배격하였다. 게다가 청나라에 대해서는 오랑캐라는 멸시감과 그들에게 당한 적개심 때문에 북벌론(北伐論)과 소중화사상(小中華思想){) 조선시대에 우리 민족의 문화를 높여 이르는 사상, 중국에서 한국민족의 문화를 평가하여 자신들의 중화(中華)에 버금간다고 해서 생긴 말.같은 민족주의적 기풍이 일어났다. 그것은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대단히 자랑스럽고 만족할 만한 일이었지만, 조선의 지식인들은 국제적인 흐름에는 너무나 어두웠다. 고증학이라는 신조류에 대해서는 아는 바도 없었고, 또 별로 관심도 없었다.왕조가 바뀌고 사회가 바뀌면 그 새로운 상황에 걸맞는 이념과 사유 방식이 등장하는데 조선사회는 매너리즘에 빠져 이미 성리학이 공리공론(空理空論)으로 겉돌고 있었다.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곧 조선 후기에 나타난 이른바 실학사상이었다.조선 후기의 실학은 경세치용(經世致用), 이용후생(利用厚生), 실사구시로 요약되는, 대단히 실질적이고 현실 중심적인 사상으로, 그것은 중국과는 관계없이 자생적으로 일어난 학문의 신동향이었다. 그런데 그런 사상적 기류는 청나라에서도 똑같이 일어나 고증학이라는 이름으로 이미 상당히 체계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의 실학자들은 청나라 고증학에서 새로운 관심과 깊은 자극을 받게 되었다. 박제가는 이런 사상적 경향을 스스로 북학(北學){) 여기서 북학(北學)이란 북경에서 유행하는 학문 이라는 뜻이 아니라 박제가가 『북학의』에서 말 했듯이 『맹자(孟子)』에 나오는 북학의 의미로, 이상보다는 현실, 관념보다는 사실을 더 중요시하 는 생각인 것이다.이라고 했다. 북학파의 선봉에 담헌 홍대용, 연암 박지원이 있었고, 그 뒤를 초정 박제가를 비롯한 사검서가 잇고 있었으며 이것을 청나라와의 국제적인 교류 속에서 토착화시키며 완성한 분이 바로 추사 김정희였다. 훗날 김정희의 제자들은 개화파가 되만이 아니라 경학(經學) 자체에서도 고증학적 입장을 취한 완당은 자신의 학문세계를 『실사구시설(實事求是說)』이란 글로 요약하고 있다.『한서(漢書) 하간헌왕전에 이르기를, "사실에 의거하여 사물의 진리를 찾는다.(實事求是)" 하였는데, 이 말은 곧 학문을 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로운 도리이다. 만일 사실에 의거하지 않고 다만 허술한 방도를 편리하게 여기거나, 그 진리를 찾지 않고 다만 선입견을 위주로 한다면 성현(聖賢)의 도에 있어 배치되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다.(중간 생략)그러므로 학문하는 방도는 굳이 한(韓), 송(宋)의 한계를 나눌 필요가 없고, 굳이 정현, 왕숙과 정자 .주자의 장단점을 비교할 필요가 없음, 굳이 주희, 육구연과 설선, 왕수인의 문호를 다툴 필요가 없이 다만 심기(心氣)를 침착하게 갖고 널리 배우고 독실히 실천하면서 '사실에 의거하여 진리를 찾는다,'는 한 마디 말만을 오로지 주장하여 해나가는 것이 옳을 것이다. 』{9) 김정희, 국역 완당전집, 솔출판사, 1988.옹방강은 완당의 이런 실사구시적 태도를 격려하며 1811년라는 현판을 써서 보내준 것이 있다. 그 현판에는 옛것을 고찰하여 오늘을 증명하니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 라는 잠언이 곁들어 있다.완당의 주위에는 이처럼 일찍부터 훌륭한 벗들이 있었고, 그들은 학예의 동인(同人)이자 인생의 동반자들이었다. 혹자는 완당의 파란 많은 인생 역정을 염두에 두고 그가 교류한 인사들이 편벽하다고도 하고, 혹자는 그를 따른 화가들이 대부분 중인임을 생각하면서 사대부 친구는 별로 없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완당의 교우관계를 오히려 누구보다도 폭넓고 긴밀하고 다양하였다. 여기서도 완당 김정희의 방외인적인 면모를 찾을 수 있다.그가 교류한 학예인들을 최소한 세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하나는 정통 사대부 문인들이고,둘째는 완당 일파라 불러도 좋을 학예의 문인(門人)들이며,셋째는 스님들이다.여기서 완당 일파라 불러도 좋을 학예의 문인(門人)들을 다시 세 부류로 나누어 보면,하나는 양반 출신의 문모신 것, 역관 출신의 중인들과 깊이 교류한 것, 중인 출신 화가와 도화서 화원들과 어울린 것, 당시로서는 천민이었던 스님들과 인간적으로 교류했던 것 등, 그의 삶과 행동에서 그런 신분적 개방성을 가지고 있었다. 완당은 이처럼 당시 사람들이 엄격하게 따졌던 제도적 질서, 불교의 천시와 배척 같은 사회적 통념을 훌쩍 뛰어넘어 행동하였다. 본인은 완당의 이런 점을 방외인적인 면모라 보지만 그 당시 보수적인 양반들은 완당의 이런 점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며 완당은 꺼리는 바를 스스럼없이 했고, 하지 않아야 할 일을 잘 했다 고 비방하기도 했던 것이다.완당이 연경에 다녀온 25세부터 과거에 합격하여 출사하게 되는 35세까지를 그의 장년(壯年)이라고 부를 때 추사체의 시작은 바로 이 장년부터라고 할 수 있다.완당의 장년 글씨는 그 어느 작품을 보아도, 완당의 말년 글씨와는 말할 것도 없고, 40대 중년 글씨와도 다른, 매우 매끄럽고 윤기 나는 글씨이다. 훗날 추사체는 방필(方筆)을 기본으로 하면서 금석기(金石氣)를 보이며 획의 굵기에 변화가 많이 구사되지만 장년의 글씨들은 오히려 원필(圓筆)이 많고 유려한 곡선미를 보이기도 한다. 박규수의 증언에 의하면 완당은 장년에 동기창체를 썼다고 하는데 아닌게 아니라 이 무렵 완당의 글씨에서는 동체가 많이 느껴진다. 그러나 연경에 다녀온 뒤로는 연경 학예인들 사이에 유행하는 윤기 나는 필체로 서서히 바뀌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연경에 다녀온 직후에 쓴 글은 옹방강, 섭지선의 글씨를 꼭 닮은 것이었다.*연경에 다녀온 직후에 쓴 글씨{완당의 장년 글씨로 옹방강의 글씨를 열심히 익혔다.3) 관직에 나아가는 35세부터 제주도로 귀양가는 55세까지의 중년 활동기1819년(순조 19) 4월 25일, 34세의 완당은 드디어 과거시험 대과(大科)에 당당히 합격하게 된다. 1828년까지 김정희는 관직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청나라 학예인들과의 교류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제는 중국의 학예인들이 완당을 존경하며 그의 글을 구하고 서신을 통해 친교를 완당은 여전히 연경학계의 새로운 동향과 신간서적을 제주도에 앉아서도 접하고 있었다. 완당은 제주도 유배생활 9년 간 자신의 학문과 예술 모두를 심화시킬 수 있었다.1844년 완당 나이 59세 때 제주도에 유배 온 지 벌써 5년이 되었을 때 완당은 생애 최고의 명작으로 손꼽히는 를 제작했다. 이것은 귀양살이하는 동안에 정성을 다해 책을 구해준 제자 우선 이상적에게 선물로 그려준 것이다.{귀양살이를 하는 동안 완당의 글씨는 많은 변화를 일으킨다. 귀양 오기 전 쓴 대둔사의 현판 글씨는 대단히 기름지고 부티와 자신감이 넘치는 윤기가 있는 글씨인 것 반면에 귀양 와서 쓴 화암사의 은 기름기가 다 빠지고 메마른 듯 순진무구한 원형질이 드러나며 대단히 명상적이다.. 완당이 화암사를 위해 써보낸 현판 글씨.이런 완당의 글씨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나 또한 처음에 완당에 관한 책을 읽었을 때에는 타고난 천재성을 가진 사람이라 생각했지만, 그의 벗 권돈인에게 보낸 편지 내용 중 내 글씨는 아직 말하기에 부족함이 있지만 나는 70평생에 벼루 10개를 밑창 냈고 붓 일천 자루를 몽당 붓으로 만들었다 라는 것을 보고 난 뒤 완당이 얼마나 노력했는지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제주 유배 시절 완당의 글씨는 이렇게 점차 확고한 자기 틀과 형식을 갖추어갔다. 이제 완당의 글씨에는 점점 금석기와 예미(隸味)가 들어가면서 변화의 울림과 강약의 리듬이 강하게 드러난다. 그 좋은 예를 우리는 완당이 61세 환갑 때 쓴 에서 볼 수 있다.완당의 간찰로는 예외적이라 할 정도로 정중하게 썼다. 우리는 여기서 추사체의 각이 지고 힘있는 변화를 여실히 살필 수 있다.완당은 입고출신하여 변화를 구하겠다는 신념으로 꾸준히 글씨 쓰기에 정진한다. 정통 서예의 입장에서 보면 대단히 파격적인 글씨라고 할 수 있는 것도 많이 쓰는데 사람들은 이런 글씨를 두고 괴(怪)하다고 말하곤 했다.이런 제주도 귀양살이 시절 완당의 글씨를 두고 박규수는 이렇게 말했다.『완옹의 글씨는 어려서부터 늙을 때가지 그 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