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성 괴물의 존재는 남성괴물과 비교했을 때, 어떠한 면에서 다른점을 지니고 있나?페미니즘이란 편협된 가치나 개념을 바로잡아, 여성과 남성 모두를 포함한 인간 해방에 그 목적이 있다. 그러나 작품 Frankenstein은 마치 남성적 시각에서 글을 서술한 듯한 인상을 받았다. 그 이유는 작품 속 여성 인물들은 고귀한 영혼을 지니고 헌신적인 역할을 함에도 불구하고, 남성에 의해 모두 무력한 상태로 죽거나 사라지고 마는 불행한 존재이다. 그렇다면, 여성괴물의 모습은 어떠한가? 그리고 남성괴물과 비교했을 때 그 존재는 어떻게 묘사되고 있으며, 어떠한 점에서 다른가?Volume3에서 괴물은 빅터에게 자신의 배우자로 여성괴물을 창조해달라고 요구한다. 이에 빅터는 불가피하게 여성괴물을 만들려는 시도를 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많은 고민을 한다. 여성 괴물이 인간 남자에게 매력을 느낄 경우, 괴물은 자신의 괴물성을 더욱 자각하게 될 경우 등 여러 가지 가능성을 상상해본다. 하지만 빅터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성적으로 해방되어 스스로의 삶을 선택하는 여자괴물의 독립성이다. 그의 여자괴물은 남자괴물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독립적인 의견을 가질 수도 있고, 그 독립적인 여자괴물의 욕망은 가학적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괴물은 비록 괴물이라도 ‘여성은 작고 섬세하고 겸손하고 수동적이고 성적으로 남성을 즐겁게 해주어야 한다’는 그의 여성의 개념과 어울릴 수가 없다. 그는 제어되지 않은 여성의 성에 공포를 느끼고, 여자 괴물을 파괴하는 가운데 여성의 육체를 통제하는 느낌을 갖는 것이다. 빅터는 괴물성과 여성성의 양립을 상상할 수 없기 때문에 여자괴물을 만들 수 없는 것이고, 괴물의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는 여성의 성에 대해 공포심을 느끼며 그 공포심이 가학적으로 표출된다. 결국 그녀는 괴물의 요구에 의해 창조되었다가, 빅터의 상상적 공포로 인해 갈갈이 찢겨진다. 탄생 직전에 파괴되고 폐기된 여성괴물은 전통적인 남성중심적 사회에서 여성에게 부여되는 모든 악을 다 구현하고 있는 존재이다. 자신의 목소리로 빅터와 독자들에게 최소한 가슴에 연민을 느끼게 하는 독립적인 남성괴물과는 달리, 여성괴물은 전혀 자신의 목소리가 없다. 더구나 빅터는 생명이 부여되기도 전에 여성괴물을 파괴함으로써, 괴물의 존재는 빅터에 의해 묘사된 이미지로만 부각된다. 빅터의 상상의 거울 속에 그려진 여성괴물은 이성과 자기 의지를 지님으로써 사악하며, 인간 남성을 강간할 수도 있으며, 그들의 종족을 퍼뜨려 인류를 없앨 만한 과도한 성적 능력이 있는 불결한 공포의 대상인 것이다. 그 존재는 너무나 끔찍해서 빅터가 혐오감과 두려움으로 그 괴물을 파괴할 때, 비로소 이 사회는 안정의 상태에 놓인 것처럼 보인다.
*『톰 소여의 모험』과 『허클베리 핀의 모험』의 작품세계 비교현대 19세기 미국의 성장 소설로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마크 트웨인의 『톰소여의 모험』과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다. 이 두 소설은 톰과 허크라는 두 소년에 각각 초점을 맞추어 소년들의 유년기의 주인공들의 육체적, 정신적 성장 과정을 형상화하였다. 소설의 발단은 대체로 주인공의 지적(의식적) 미성숙, 사회적 지위의 미천함, 애정의 결핍 등으로 인한 증세가 갈등의 양상을 보이며 전개되다가 주인공이 이에 좌절하지 않고 새로운 차원의 단계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그러나 이 소설 모두를 성장 소설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허크는 언제나 톰을 우상시하며 그처럼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갖기를 갈망한다. 과연 허크의 생각처럼 톰은 성장소설에 나타나는 이상적인 소년상으로 적합한 것일까? 또한 『톰소여의 모험』을 『허클베리 핀의 모험』과 같은 성향을 지닌 소설로 평가 될 수 있을까? 따라서 본 글은 두 작품 세계의 공통성과 상이점을 비교 천착하여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필자가 더욱더 선호하는 이유와 두 소설의 공통적인 예술적 양상을 부각시킬 것이다.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톰소여의 모험』은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 비해 성장소설로서 어른들의 사회나 문명사회의 허식과 위선에 반발하는 소년의 심정이 잘 미국문학작품 중 걸작의 하나로 평가하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다.첫 번쩌, 구성적인 면에서 전자의 소설을 살펴보면, 공상적이고 활발한 악동 톰은 담에 페인트칠을 하는 싫증나는 일을 재미나는 듯이 해 보여서 다른 아이의 사과를 얻어 먹는 것을 비롯하여, 여름 태양이 내리쬐는 대자연의 강과 숲을 배경으로 허크와 해적놀이를 하고, 살인사건에 개입하여 범인을 체포하기도 하며, 동굴의 보물찾기에 나서는 등, 소년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이야기로 구성되었다. 물론 위선적인 어른들을 대표하는 폴리 아줌마에게 저항하는 톰의 행동을 볼 수 있으나 이러한 행동은 소년 시절에 누구나 한번쯤 겪었을만한 이유 없는 반항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에 반해 후자의 소설은 더글러스라는 미망인에게 의탁하여 살고 있는 허크는 숨막힐 것 같은 평범한 일상생활과 주정뱅이 아버지에게서 벗어나려고 도망쳐 나와 흑인 소년 짐과 함께 미시시피강을 따라 뗏목을 타고 내려가고 두 소년이 때때로 육지에 올라가서 본 젊은이들의 비련의 이야기, 불량배들의 싸움, 악당들의 사기 등, 전자와 같은 성향을 띠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후자의 허크의 활약이 펼쳐진 이야기는 미국 서부의 자유인으로서의 의식을 가진 허크라는 인물의 창조, 성인들의 사회적 인습과 위선에 대한 통렬한 풍자, 웅대한 자연을 배경으로 구가하는 자유에의 찬가, 방언(方言)의 구사와 문체의 예술성, 허크의 노예 짐에 대한 생각의 전환점을 다루어 노예에 대한 의식 변화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전자의 측면과는 다른 성장소설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두 번쩌, 형식적인 면에서 이 소설의 중요한 특징은 시점(point of view)에서 찾을 수 있다. 『톰 소여의 모험』은 3인칭 소설이지만 『허클베리 핀의 모험』은 1인칭 소설이다. 허크의 어법은 반어적이며 방언의 특색을 멋지게 구사하고 있다. 또한 허크는 1인칭화자의 입장에서 조절할 수 있는 화술을 가지고 있다. 책 서문부분에 나타나 있는 글귀를 살펴보면 “당신을 나를 모르실 겁니다. 톰 소여의 모험을 읽지 않았다면 말입니다. 그러나 상관없답니다. 그 책은 마크 트웨인씨가 만든 건데 대체로 진실을 말하고 있지요. 과장된 것도 있기는 하지만 대개는 진실을 말하고 있지요.”처럼 이러한 면이 확연히 나타난다. 『톰 소여의 모험』은 톰과 톰의 친구들을 살펴보는 어른에 의해 이야기되지만 『허클베리 핀의 모험』은 위 예문에서 보듯이 처음부터 허크 자신에 의해 이야기된다. 그러나 이 소설은 겉보기와는 달리, 1인칭 소설의 특징적인 실감성이나 직접성만 강조하는 것도 아니고 허크의 어휘가 소년의 감성과 통찰력에 제한을 받고 있는 것도 아니다. 우선 무엇보다도 허크는 객관적인 화자이다. 그 객관성이 허크 자신에게 창피함을 수반할 때까지도 허크는 스스로를 객관화시킨다. 그는 자신이 마주치는 사회에 대해서도 객관적이다. 허크는 자신이 추방당한 사람임을 알고 있지만 자신을 추방시킨 사회를 탓하지 않는다. 그는 언제나 그의 특징인 온화한 방법으로 비난해야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그의 속임수와 회피와 부지중에 일어나는 잘못은 일정한 상황의 요청에 의해 유발되는 것이다. 그는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지만 자기 자신과 독자에 대해서는 결코 거짓말하지 않는다.세 번쩌, 과연 톰은 허크가 우상시 할 만한 소년인가? 후자의 소설에서 허크는 곤경에 처할때마다 '톰이라면 과연 어떻게 해결해 나갔을까?'를 생각하며 소설 마지막 부분에 톰과의 재회 부분부터 그는 다시 톰의 말에 따르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필자는 톰 역시 가식적인 어른들의 세계에서 희생되어진 어른스러운 척하는 소년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자기 또래의 소년들 속에서 어른인 체하는 부분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예를 들어 "'흠~! 오늘 수업이 끝나면 허크와 함께 놀아야겠다.'톰은 허크와 함께 놀 생각을 하니 금새 우울했던 마음이 사라지고 허크랑 무슨 놀이를하면 놀까하고 마음이 즐거워졌습니다."또는 공동 묘지에서 그가 인디언 조, 주정뱅이 머프, 로빈슨 의사를 보고 대화하는 장면이다. 그러한 어른스러운 부분은 법정에서 인디언 조를 범인으로 지적할 때의 내면적 심리묘사와 인디언 조의 오두막을 우연히 찾아갔을 때 그의 모습은 어느 소년들과 다를바 없는 한 소년으로 그려진다. 그러므로 톰은 어릴적 부모님을 여의고 미국의 중산층인 이모님 밑에서 자라나 학교에서의 성인으로 발돋음 할수 있는 첫걸음이 되는 교육과 자신의 내면속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자유분방한 성격이 불균형하게 혼합된 인간형이라고 보여진다. 이와 달리 허크는 미국 남부사회의 무식한 백인 태생이다. 주정뱅이 아버지가 있을 뿐 관습적인 의미의 배경이나 교양도 없고 함부로 담배피우고 멋대로 학교를 빼먹는 불량 소년이다. 그러나 그는 신선하고 현실적인 면도 지니고 있으며 좀 더 순수한 장난꾸러기 소년에서 깊은 내면적 변화를 겪으며 성숙해가는 인간형이라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허크는 그가 사는 사회의 문화로부터 격리되어서 물질주의 사회에 휩싸이기보다는 심원한 실재를 찾아 헤매는 방랑자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허크는 단순한 악동이 아니라 자기 시대의 이중성에 고민했던 작가 마크 트웨인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흑인 노예 짐을 등장 시킴으로서 마크 트웨인은 허크를 인종 차별주의에서 갈등하는 그 당시 자신의 생각을 대변시켰고 이로써 허크는 톰보다는 좀 더 현명하고 지혜롭게 성숙해가는 소년의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허크는 검둥이 노예 짐과 함께 뗏목을 타고 미시시피강을 따라가며 다양한 모험을 한다. 그들이 타고 있는 뗏목은 도금사회의 이중성을 상징한다. 백인 소년과 흑인 노예. 노예제도는 미국 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 가지 이중적인 삶 가운데서도 그 시작이며 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모두 마을로부터 도피, 즉 현대 문명과 도덕률과 질서로부터 도피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들이 선택한 뗏목은 그들의 변신을 결정할 수 있는 가능성의 현장이 된다. 뗏목은 그들 사이의 관계에 따라 그들이 탈출한 마을보다 더 좋게 변할 수도 있고 더 나쁘게 변할 수도 있다. 육지의 속박과는 달리 뗏목은 그들의 안식처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뗏목은 고정의 상태가 아니라 유동의 상태다. 언제나 위험과 불안을 동반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이 짐을 찾으러 올지도 모른다. 허크와 짐이 새로운 관계를 이루기 전에 우선은 그들이 공동으로 대처해야 할 일이 너무도 많이 일어난다. 파선된 기선 월터 스코트호를 만나 양식을 구하려고 그 배에 올라갔을 때 그 배는 이미 살인 음모자들이 점거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들의 뗏목이 강물에 떠내려갔기 때문에 그들은 살인 음모자들의 보트를 훔쳐 타고 달아난다. 마을의 대안으로 선택했던 뗏목은 일시적이나마 유실의 수난까지 겪게 되는 것이다. 그들의 뗏목에는 공작을 자칭하고 망명 중인 프랑스 왕을 자칭하는 사기꾼까지 등장하게 되어 마침내 허크는 인간 되는 것이 수치스럽다는 경험을 하게 된다.
페미니즘과 자연의 반란생태학은 페미니즘의 단골메뉴이다. 과연 여성과 생태학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생태학에 관한 페미니스트들의 논쟁은 그런 논쟁의 열기 덕분에 실천 운동에서는 나름대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만 논쟁 그 자체는 아직 갈피를 못 잡고 있다. 이처럼 서로 상반된 입장을 보이는 이유는 에코페미니즘 자체의 문제라기 보다는 정치적, 이론적 역사에서 해결되지 못한 문제들 탓이라고 할 수 있다.1.급진적 페미니즘과 생태학어떤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은 생태학과 페미니즘의 연계작업을 비난하고 이를 성-역할의 고착화를 강화하는 퇴행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생태학적 테마가 보편적인 함의를 지니는 것이라면 남성/여성은 마땅히 동일하게 인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엘렌 윌리스는 "페미니스트 관점에 따르면 여성을 남성과 분리시켜 조직해야 한다는 주장의 중요한 전제는 오직 성차별주의와의 투쟁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여성의 정치적 조직화는 단순히 여성분리, 더 나아가서 특정한 행위와 관심들이 선천적으로 여성적인 것이라는 관념을 강화할 뿐이다. 만약 페미니즘이 무엇인가 의미가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바로 여성이 인간적 감정과 행위전반에 걸쳐 남성보다 유능함을 의미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말하자면, 제한적으로 부여된 여성의 본질과 역할에 기반한 모든 정치는 그것이 설령 남성들이나 나와 연대한 자매들에게 지지를 받는다 하더라도 결국은 억압적일 수 밖에 없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메리델리, 수잔 그리핀등 유명한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은 이와 상반된 입장을 취하고 있다. 가령 델리는 여성은 남성에 대항하여 자연과 동일시 되어야 하며 여성은 언제나 남성과 분리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가부장제 아래에서 여성 억압과 자연환경의 약탈은 기본적으로 서로 동일한 현상이라는 것이다.그렇다면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이 자처하는 이 여성저자들은 무슨 이유로 그렇게 상이한 입장들로 갈리게 된 것일까? 급진적 페미니즘은 여성지배의 근원을 생물학적 차이에 둔다. 남성우위의 지배양식인 가부장제야말로 다른 어떤 형태의 억압과 착취보다도 우선적이고 근원적이라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다. 그러나 여성/자연의 연계성이 잠재적으로 해방적인 것인지, 아니면 단지 여성종속을 영속화하기 위한 논리적 근거로 작용할 뿐인지 하는 문제에 이르면 이들의 견해는 다양하게 분기 된다. 그리고 이러한 이론적 불일치는 다음과 같은 문제를 야기한다. (1)우리 사회에서 오직 여성들만이 경험하는 분리된 생활 경험이라는 것이 과연 있는가? (2)그렇다면 여성 문화란 단지 수태 기능이나 작은 키등 신체적 측면의 선천적인 연약함을 빌미로 오래전부터 남성에 의해 구축되어온 고립된 문화에 불과한가? (3)젠더의 차이란 대체 무엇인가? (4)'차이'는 젠더에 근거한 지배를 고려하지 않고도 인식될 수 있는가?윌리스등 합리적 급진적 페미니스트들과 델리, 그리핀 등 급진적 문화 페미니스트는 이 물음들에 대해서도 같은 이유를 들어 상이한 의견을 말한다. 그러나 젠더가 전적으로 선천적인 것도 그렇다고 전적으로 문화적인 것만도 아니며, 본질적으로 억압적인 것도 본질적으로 자유로운 것도 아니라고 보는 점에서 이들의 공통된 시각을 엿볼 수 있다.2. 사회주의적 페미니즘과 생태학대부분의 사회주의적 페미니즘은 "생태학적 문제"에 관한 페미니즘의 논쟁에 참여하고 있다. 물론 그들은 에코페미니즘을 불편해하는 경향이 없지 않다. 그 이유는 페미니즘이 비역사적, 비이성적인 방법으로 여성과 자연의 동일성을 찾으려는 태도에 대한 우려 때문이기도 하고, 에코페미니즘이 문화적 측면을 강조하는데, 그것이 "유물론적"이 아니라 "관념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적 페미니즘 정치학의 맑스주의적 측면에는 물질적 측면에는 물질적 변형의 우선성(관념/문화/의식의 변화에 우선하는 경제적/구조적 변형)이 함축되어 있다. 사회주의적 페미니스트들은 스스로를 최상의 맑스주의와 최상의 급진적 페미니즘을 통합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이들이 언제까지나 경제적 지향성을 지닌 맑스주의에 고착되어 있는 한, 이들은 여성/자연의 관계에 대한 이성주의자들의 엄격성을 선택하는 것이며, 여성을 생산 영역에 통합시킬 것을 주창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사회주의적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억압/자연억압의 동일화 문제가 발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화가 자연과 벌이는 지속적인 투쟁속에서 문화와 여성을 제휴시킴으로써 문제 해결을 시도하고 있다.3."여기 우리가 다시 간다."-이 주장은 적어도 백년쯤 되는 낡은 것이다.!급진적인 페미니즘과 사회주의적 페미니즘의 논쟁은 19세기 후반의 낭만적 페미니스트들과 합리적 페미니스트간의 논쟁과 유사하다. 보다 나은 윤리적 삶의 양식의 흔적을 사적 영역에서 목격했다는 점, 그리고 이 사적 영역의 가치가 공적 영역으로까지 확장될 수 있다고 보았던 19c그들의 관점은 실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정작 여성성의 미덕을 주장했던 19세기 여성들조차 이해하지 못했던 점은 나날이 증대해가는 비유기적 세계에서 여성들이야말로 유기적인 사회적 가치들의 보고역할을 담당했다는 사실이다.다른 한편으로 19세기의 합리적 페미니스트들은 권력획득과 여성들의 이익관심을 대변하는데 주력했다. 이들은 오늘날 합리적인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이 페미니즘과 생태학의 연계를 반대하는 것과 동일한 이유룰 내세우며, 페미니즘 고유의 문제로 보이지 않는 문제들에 대한 여성들의 정치적 참여를 반대했다.4. 현대 페미니즘의 변증법남성적 서구철학이 페미니스트들에게 남긴 유산의 하나는 잘못된 주객의 이분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관점에 따른다면, 페미니즘 운동은 합리적-유물론적 '인간주의'와 형이상학적-페미니즘적 '자연주의'중 어느 하나에 그 근간을 두어야 한다. 그러나 굳이 이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할 필요는 없다. 페미니즘은 그 자체가 근대 이성주의 세계관과 자본주의의 산문이면서, 동시에 이를 잠재적으로 거부한다. 하지만 사적 영역의 중요성이 인정되면서 획득된 여성의 영향력은 시장 사회의 출현으로 쇠퇴하게 되었다. 페미니즘은 우리 문화의 남성 편향적 가치에 도전함으로서 자본주의적 사회 관계를 부정한다. 한마디로 페미니즘이야 말로 문화를 자연에 대립되는 것으로 정의하는 기만적 명제가 빚어낸 세계의 분열을 치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해방적 잠재력을 완수하기 위해서 페미니즘은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존재와 인식 둘 다를 불러들이는 '이성적인 재마법화'를 주장해야 한다.5.변증법적 페미니즘: 급진적/사회주의적 페미니즘 논쟁을 넘어서외적 자연의 지배는 곧 내적 자연의 지배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여성은 남성들을 위한 다리가 되어 남성들이 스스로 부인한 그들 자신의 부분들로 복귀하였는데 남성들은 온갖 잡다한 일들에 정성을 쏟는 여성들을 필요로 하면서도 그러한 여성이 자신들 아래에 있다고 생각했다. 생태학적 조망은 실로 급진적 페미니즘과 사회주의적 페미니즘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그리하여 생태학적 문제는 역사적 페미니즘 논쟁을 지나치게 이성주의적이고 호전적인 남성적 존재방식을 넘어서 전통적인 여성적 가치로의 방향전환에 비중을 둔다. 본성적으로 우리 여성에게 뿌리내려 있는 모든 연관성에 봉사하더라도, 여성이 남성보다 자연에 더 가깝다는 신념에 호소해서도 여성의 해방은 좀처럼 찾을 수 없다. 그 이유는 두 입장 모두가 부지불식간에 자연/문화라는 이분법에 연루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성억압은 엄밀하게 역사적이지도 그렇다고 엄밀하게 생물학적이지도 않다. 두가지 측면이 모두 관계되고 있다.
걸리버 여행기를 읽고정치외교학과 4학년 차은애걸리버는 표류하다 여러 나라를 여행했지만, 우리나라 교수들은 가만히 앉아 비슷한 여행을 하고 있다. 첫째 나라인 80년대의 대학은 그야말로 거인국 그 자체였다. 그 시대에 학생들은 우리 사회의 한 가운데 홀로 우뚝 선 거인군단이었다. 그들은 서슬이 시퍼런 군사독재에 저항하는 유일한 세력이었다. 언론에 보도되지 않는데도 그들의 동정은 입에서 입으로 널리 퍼져갔다. 세상 사람들은 날마다 오늘은 또 대학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살았다. 많은 학생들은 독재와 싸우면서 부모들의 가슴에 지울 수 없는 아픔을 안겼다. 어떤 학생들은 민주화를 외치면서 건물에서 투신했고 어떤 학생들은 신나를 몸에 끼얹고 분신했다. 그보다 더 많은 학생들이 기꺼이 감옥으로 걸어 들어갔다.90년대 들어 대학 분위기는 갑자기 변했다. 독재타도라는 구호가 사라진 대학 구내에 압구정동 패션이 재빨리 파고들었다. 다양한 옷차림으로 자기 나름의 개성을 표현한 90년대 학생들은 80 년대 식 기준으로 보면 몰 역사적인 개인주의자들일 뿐이었다. 그들은 지하당(地下黨) 냄새가 풀풀 나는 80년대의 막걸리 사발식을 마다하고, 신입생 환영회가 열리는 바로 그 날부터 거리로 나가 맥주를 마셨다. 그들은 교수가 무슨 책으로 강의하느냐에 따라 하루에도 몇 번씩 색깔을 달리했다. 80년대 학생들이 강고한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혁명군이었다면, 90년대 학생들은 그저 귀엽고 만만하고 때로는 버르장머리 없는 마마보이일 따름이었다.이제 2000년대. 밀레니엄을 달리하면서 대학 풍경은 눈 깜짝할 사이에 무섭게 달라지고 있다. 요즘 학생들은 90년대의 소극적인 소비주체가 아니다. 그들은 엄청난 잠재력을 지닌 예비투자자들이다. 벤처니 사이버니 하는 세상은 그들에게는 만만하기 그지없다. 그 세상에 뛰어들어 새로운 신화를 창조하기 위한 야망이 그들을 지배한다. 그들은 걸리버의 세 번째 나라, 하늘을 나는 섬나라로 떠나기 위해 잠시 대학에 기착한 나그네들이다. 그러니까 이른바 빵빵 학번이 활보하는 대학은 더 이상 80년대의 혁명진지도, 90년대의 압구정동도 아니다. 이제 대학은 비행을 앞둔 공항 터미널로 변하고 있다.
《걸리버 여행기》에 대하여정치외교학과 4학년 차은애그는 이 작품에서 가공의 모형사회를 빌어서 궁전의 허례, 왕족의 교만, 고관들의 아첨, 정치의 부패, 정당과 종파의 무의미한 싸움, 학문의 편협, 재판의 불공평, 교육의 무능 등등-한마디로 말하면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제도·문물·관습을 뼈아프게 풍자했을 뿐만 아니라 제 4 부인 말 나라에서는 인간 및 인간성 자체를 매도하고 부인해 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풍부한 유머에 미소가 떠오르고 예리한 풍자에 쾌감을 느끼지만 , 한편으로는 자신의 상처가 무자비하게 파헤쳐지는 듯한 아픔을 또한 느끼지 않을 수 없다.이 작품에서는 문학적 흥취를 느낄 수 있고, 보다 근원적이고 공통성이 있는 문제를 다뤘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이 세상에 인간이 존재하는 한 성립되는 이야기인 것이다. 더구나 아무런 역사적 예비지식 없이 이야기 자체만으로도 흥미진진해서 심지어 어린아이들의 동화가 될 수 있을 정도인 것이다.그러나 작품 전체를 지배하는 사상은 염세주의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데, 스위프트의 염세주의는 과연 절망의 표시이며 이것이 바로 그의 생활의 근거를 이루는 정신적 토대였을까? 그의 성품이나 생활태도는 결코 그런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는 항상 명랑하고 친절하고 관대하고 온화했다고 그의 친구들은 술회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풍자의 목적이 개정에 있지 결코 파괴에 있지 않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이 점은 스위프트 자신이 '풍자는 결함의 지적이 아니라 누구나가 고칠 수 있음을 말한다'라고 그의 진의를 시로 읊은 일이 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오히려 결함에 대해 싸늘한 경멸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불같은 분노를 느꼈다고 할 수 있다. 분노는 언제나 정정당당하고 정의감이 밑받침이 된다. 이 작품에서 우리는 스위프트의 인간에 대한 분노와 그 뒤에 숨은 연민까지도 느끼는 것이다.사람들은 스위프트의 풍자소설 《걸리버 여행기》를 인간세태를 비꼰 풍자소설의 극치로 평가하는데 인색하지 않다. 이 소설에서 걸리버는 항해를 하다 난파하여 표류하면서 소인국, 거인국, 하늘을 나는 섬나라, 말(馬) 나라 등을 두루 돌아다닌다. 풍자가 가장 심한 것은 마지막 편인 말 나라 이야기다. 이 나라는 말이 세상을 지배하며, 인간에 해당하는 야후(Yahoo)는 가장 추악하고 불결하며 비열하고 뻔뻔스러운 존재로 묘사된다. 정치에 뜻을 두었으나 좌절한 스위프트는 이 네 번째 이야기에서 인간을 실컷 통렬하게 매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