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1. 연구의 필요성.. 22. 실존주의 (실존철학)......... 43. 전통적 교육관과 실존적 교육관....... 114. 키에르케고어와 니체의 실존적 교육관............. 195. 실존주의의 교육원리 정리............... 256. 종합적 논의.... 27참고문헌......... 301. 연구의 필요성인간의 자아의식이 발달된 이후 끊임없이 제기된 주제는 인간성 회복이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이후 인간 본질과 이상사회 그리고 이를 실현시키기 위한 교육에 대한 논의가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다. 인간과 사회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화시키려는 과정으로 정의되고 있는 교육적 노력이 대중화 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 사회는 교육적 이상에 조금 더 근접했다기 보다는 오히려 인간에게 손실과 쇠퇴를 가져왔다. 교육받는 사람의 증대는 개인적 성취와 더불어 인간다운 삶을 살기에 적합한 이상사회에 더욱 접근할 수 있어야 하지만 오늘날의 교육과 사회는 이러한 주제에 회의적이다. 기술적 합리성이 지배하는 현대적 삶의 조건은 인간이 그의 본래적 속성을 잃게 하는 인간성 상실의 상황을 제공하고 있다. 하이데거의 평상인(Das Mann)이나 샤르트르의 즉자존재(in-itself)는 비본래적인 현대인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이는 의식을 가진 인간이 의식 없는 사물처럼 상르케고어와 니체이다. 그러나 우리가 키에르케고어와 니체의 사상을 실존철학이라 부르지 않고 실존사상이라고 부름으로써 실존철학과 일단 구별한다는 것을 일단 알아두어야 한다. 그 이유는 이들의 사상이 철학이라고 부르기에는 다소 이론체계와 방법적인 면에 있어서 의미적으로 거리를 취하고 있기 때문에, 그 후 체계적으로 방법화한 실존 철학과 구별하는 것이 보통이다. 물론 성서에 나오는 욥이나 바울 그리고 철학자 파스칼, 아우구스티누스 등도 실존이란 개념을 사용하였지만, 지금 말하는 현대적 의미로서의 실존주의와는 거리가 있기 때문에 제외된다.(2) 실존주의의 개념과 성격1) 개념실존(實存)이라고 번역되는 말은 독일어로는 Existenz, 라틴어로는 existentia이다. 역사적으로 4세기 무렵에 그리스도교의 교의학자 마리우스 빅토리누스(Gaius Marius Victorinus)에 의하여 그리스말의 (실체, 본질)에 대하여 라틴어 substantia를 쓰고 그에 대립되는 a (실재, 존재)의 역어로서 이 existentia란 말을 썼다. existentia는 동사 existere(ex=∼로부터+sistere=세우다, 두다 나타나다, 일어나다, 생기(生起)하다 현존하다)에서 나온 말로 분사형으로 자주 esse(존재하는)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토마스는 esse라는 말을 써서 존재 esse와 본질 essentia를 명확히 구분했다. 그러나 토마스 이후의 스콜라 철학에서는 esse 대신에 existentia를 본질의 대(對)개념으로 썼다. essentia(본질)는 사물의 무엇을 규정하는 것으로 정의의 형태로 개념적으로 파악되는 것이지만 그것이 반드시 현실로 존재한다고는 할 수 없다. 그 점에서 이념적이며 가능성에 머문다. 그에 대해 existentia는 무엇의 형태로는 잡히지 않으며 어떤 것이 거기에 현존하고 있음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가능적으로 있던 본질은 있음으로써 현실의 것이 된다. 그 후 철학사에서 existentia는 essentia와 대립으로 파악되었는데 한갓 상이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하이데거와 사르트르의 주장은 이런 내용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주장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인간은 그 존재 및 행동 양식을 결정하는 본성을 갖지 않으며 이 양식이란 곧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들이라는 것이다. 이런 뜻에서 하이데거는 "현존재는 항상 그 자신의 가능성이다"라고 말한다. 가능성으로서 인간 실존은 미래의 선취·예기·기투이다. 미래는 근본적인 시간의 차원이며 현재와 과거는 부차적이다. 또한 가능성으로서의 실존은 초월이기도 하다. 초월한다는 것은 그 자신을 넘어서 세계의 다른 존재(사물과 타인)로 총체로서의 세계로 향한다는 것이다.그런데 일부 실존주의자에 따르면 이 다른 실재의 존재는 인간 실존의 존재와는 다른 양상을 가진다. 즉 실존에 고유한 양상은 가능성인 데 반해 존재에 고유한 양상은 현실성 또는 사실성이다. 그 결과 가능성으로서의 실존은 존재의 무(無), 사실의 모든 현실성에 대한 부정으로 나타난다. 하이데거는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Was ist Metaphysik?)〉(1929)에서 "인간 실존은 무의 한가운데 머무르지 않고서는 존재와 관계할 수 없다"고 말한다. 실존주의자들에게 '무'란 사실의 현실성에 대한 부정으로서 가능적 실존이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가능적인 것은 그 자신(itself)이 '되기에는' 대자(For-itself)가 결여된 '어떤 것'으로 그것은 객체가 되기에는 주체가 결여된 것이며 결여로서만 존재할 뿐이다"라고 했다.실존을 무로 환원하는 것은 두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첫째, 사르트르, 카뮈, 무신론적 실존주의처럼 의미의 결여를 주장하는 방향으로, 즉 실존과 모든 기투의 부조리로 나아갈 수 있다. 둘째, 후기 하이데거, 야스퍼스, 신학적 실존주의처럼 실존을 구성하는 가능성을 넘어서 실존과 존재 사이의 더욱 직접적인 관계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런 방향에서 존재는 실존 속에서 언어적·신앙적·신비적 종교 등을 통해 그 자신을 드러낸다.3) 인간 실존의르면 인간은 오직 위기를 통해서만 새로운 삶에 도달하고 인간이 될 수 있다. 또한 일반적으로 모든 새로운 삶은 위기와 더불어 시작하는 것이다. 이러한 위기는 언제나 고통스럽고 몸서리치는 것이지만, 인간은 오직 근본적인 재출발과 혁신을 통해서만 근본적으로 위기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이다.위기의 특징은 자포자기와 이에 연결되는 죽음의 불안이라 할 수 있다. 실존철학적인 파악에 의하면, 인간은 늘 위기 속에 있으며, 위기를 벗어난 상태에서는 단지 비본래적인 현존재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위기는 사실상 필연적으로 인간의 삶의 본질에 속하는 것이며, 성숙의 보다 높은 단계는 위기를 거쳐나가는 데서만 도달될 수 있다고 생각할 수가 있다.그렇다면 교육자는 이러한 학습자에게 위기를 조장하여야 하는가? 위기는 위험이자 기회로서 이중적 성격을 지닌다. 그러나 위기 극복에 성공한다면 새로운 삶을 향할 수 있으나 반대로 실패를 하게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결국, 위기는 숙명으로서 교육자는 위기를 인위적으로 조성할 수 없고, 위기의 발생시에 도움을 줄 수 있을 뿐이다. 도움이란 오직 그 학생을 잘 이해해 주는 단순한 일일수도 있다. 인간이 위기를 명확히 인식하고 주체적으로 그에 직면하여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교육자의 역할이다. 그러나, 극복의 주체는 결국 인간 자기 자신이어야 한다.2) 각성각성이라는 개념은 종교적인 말이었으나 교육학에 전용된 것으로서 이 말에 특수한 의미를 부여한 것은 슈프랑거이다. 그는 내적 세계의 각성에서 인간형성의 완전히 하나의 새로운 차원을 보았다. 슈프랑거에게 있어서 교육의 결정적인 임무는 양심의 각성으로 나타난다. 각성에 대해 가장 쉽게 말한다면 한마디로 '눈뜨게 하는 것', 또는 '깨우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잠에서 깨어나는 것, 또렷한 의식이 없는 상태로부터 깨어나 의식을 가지는 상태, 즉 비본래에서 본래상태로 깨어나는 것을 말한다.각성의 특징은 돌발성과 경과의 곤란성을 들 수 있다. 신체적 수면상태에 있는 사러한 만남의 저항적 성격 앞에서 만나는 자는 굽히지 않고 존립할 수도 있고 존립하지 못할 수도 있다.또 고유한 개성은 그 개성의 유한한 제한성을 벗어나기 위하여 다른 종류의 가능성을 경험할 필요가 생긴다. 하지만 여기에 전혀 다른 사실이 나타난다. 즉 동일한 인간정신이 전혀 다른 형태 속에서 다시 발견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남은 그것이 나에게 대립되는 전혀 낯선 것으로서 나를 전적으로 강요하는 충동이다. 따라서 이것은 개성과 독자성을 고려치 않는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나의 점차적인 발전이 문제가 아니고 이와는 전혀 다른 나 자신의 자기형성, 즉 윤리적 비약이 문제이다.세 번째로 교육에 있어서는 인간적인 능력의 전반적이고, 조화적인 발전이 중요하다고 말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그것으로서 주체가 모든 방면으로 발전할 수 있는 교육내용과의 가능한 한 다방면의 접촉을 꾀하는 일이다. 교육이란 필연적으로 다변적 교육이다. 그러나 만남의 냉혹성은 모든 조화적 훈련이 그 냉혹성과 대립하여 그 의미를 상실한다는 것이다. 모든 만남은 운명적이다. 그리고 그 만남이 인간을 사로잡는 때에는 인간을 전적으로 사로잡는다. 가능한 한의 다변적 만남은 모순이다. 한 만남은 언제나 다른 만남을 배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화적인 공존질서가 참으로 유일한, 일회적인 만남을 방해하고 또 파괴한다면 서로 다른 사람을 차례로 만나는 것이 불가피하며, 또 늘 새로운 자극이 그의 삶을 사로잡을 것이다. 여기서는 이러한 만남의 개념으로서 교육개념을 대치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만남의 개념으로서 교육개념을 정당하게 보충하는 것이 문제이다.그러므로 교육의 기능에 대한 새로운 자각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선 한 인간이 광범위한 정신사 중, 언제 어디서 만남이 가능할는지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육은 먼저 내면적으로 만남이 가능할 수 있는 여지를 될 수 있는 한 넓게 확대해야 한다는 것이다.그렇다고 해서 만남의 개념이 교육에 있어서 단순한 중개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모든 만남은 결코 예측할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