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동전을 읽고..이 작품은 홍길동이라는 영웅적 인물을 내세워 당대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대담하게 고발하고, 적서 차별철폐, 탐관오리 응징, 이상국 건설에 대한 작가의 견해를 제시하여 고전 소설의 한계를 극복하고 있다. 대부분의 고전소설이 소재와 인물, 배경 등을 중국에서 취해 온 반면, 이 작품은 우리나라를 무대로 삼고 있으며 한글로 표기하여 서민들에게까지 독자층을 확대 시킨 점에서 진정한 한글 소설의 출발점으로 평가되고 있다. 내용상으로는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대한 비판 의식이 드러나 있는 현실 참여적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어린 시절 읽었던 홍길동전을 성인이 된 지금 읽으니 여러면 에서 그때와는 읽는 관점이 틀리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예전에는 마냥 홍길동전을 어려운 사람을 도와 악한 관리들을 혼내준 영웅으로 만 기억하지만 홍길동 역시 조선 시대 사상 내에서만 생각할 수 밖에 없는 현실적 한계를 지니고 있는 입신양명의 꿈을 품은 사나이라고 받아 들이게 되었다. 나는 여기서 홍길동전을 문학적 의의를 논하기 보다는 작품속에 나타나는 그 시대적 배경에 중점을 두고 서술해보고자 한다. 소설의 본문 가운데 "소인이 대감의 정기를 타 당당한 남자로 낳사오니 이만 즐거운 일이 없아오되, 평생 설워 하옵는 아비를 아비라 부르지 못 하옵고,형을 형이라 못하여 상하 노복이 다 천히 보고, 친척 고구도 손으로 가르쳐 아무의 천생이라 이르오니 이런 원통한 일이 어디에 있사오리까?"와 남아가 세상에 나서 입신 양명하여 위로 양화를 받들고 ,부모의 양육지은을 만분의 하나라도 갚을.....이몸이 당당히 조선국 병조판서 인수를 띠고 상장군이 되지 못 할진데.... 라는 대목이 나온다. 홍길동의 아버지인 홍 판서는 양반 사대부 신분이나, 그의 어머니 춘섬은 홍 판서의 계집종이다. 따라서 길동은 적자가 아닌 서자로서 차별을 받게되 서자는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더라도 출세할 수 없었고, 양반의 자식으로서 대우받지도 못하였다.. 홍길동전의 작가는 적서차별제도 때문에 갈등하는 길동의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모순된 사회 제도를 비판한 것이다. 조선시대 적서차별 정책은 15세기 초에 시작되었다. 실제로 조선 시대의 가장 기본이 되는 법전인 경국대전에 따르면, 서얼은 문과나 생원, 진사시에 응시하지 못하도록 하여 양반 관료의 등용 시험인 과거에 응시할 자격을 박탈하였다. 때로 제한된 범위에서 등용되기도 하였으나 그것 역시 아버지의 관직 높낮이나 어머니의 신분에 따라 한계가 있었다. 이를 한품 서용(限品敍用)이라고 하는데, 문, 무 2품 이상 관리의 양인 첩 자손은 정3품, 천인 첩 자손은 정5품까지, 6품 이상 관리의 양인 첩 자손은 정4품, 천인 첩 자손은 정6품까지, 7품 이하 관직이 없는 사람의 양인 첩 자손은 정5품, 천인 첩 자손은 정7품까지만 관직에 오를 수 있었다., 15세기 후반 법적 뒷받침을 받으면서 본격화되었고, 16세기에는 그것이 더욱 강화되는 추세를 보였다. 그런데 차별이 강화됨에 따라 그에 대한 일부 사대부들의 비판과 서얼들의 반발이 차츰 확산되면서 적서차별 문제는 국가적 논쟁거리로 떠올랐고, 그 결과 16세기를 고비로 17세기부터는 서얼들에 대한 법적 규제가 점진적으로 다시 완화되는 추세를 보였다. 작자 허균이 살았던 16-17세기는 이처럼 적서차별 존폐 논란이 가장 치열했던 시기였으며, 중세 모순의 개혁을 지향하는 홍길동전이 이를 일차적 관심사로 삼은 것은 이러한 시대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하지만 적서차별에 대한 비판이 확산되고는 있었지만, 이를 온존시켜 신분적 특권을 독점하려는 세력 또한 엄존하고 있었기에, 그 개혁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차별론자들은 자신들의 속뜻을 숨긴 채 위장된 논리로 이를 합리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문구에서 길동은 입신양명하기를 꿈꾸고 부모에게 은혜를 갚기를 원하다고 했다. 조선시대에는 세상을 위해 훌륭한 일을 하고 그 이름을 후세에 남기는 것을 명예롭게 생각하였다. 이는 그 시대의 사대부들의 일반적인 가치관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 길동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도 이러한 사상이 드러나고 있다. 남달리 뛰어난 자신의 능력을 신분적출신의 한계로 말미암아 출세의 기회가 전적으로 봉쇄되고 있는 것을 인지하고 자기의 남달리 뛰어난 능력에 의지하여 자기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소설에서는 불행히도 길동의 이런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뜻을 끝내 이룰 수는 없었다. 초반 출가에 앞서 홍대감이 홍길동에게 호부 호형을 허락하였으나 이것은 단지 그 자리에서 뿐이지 어떠한 사회적 보장도 없어다고 볼수 있겠다. 이것은 아무리 홍대감이라 할지라도 이것은 사회적 신분제도와 관련되어 있으므로 함부로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조선왕조사회의 구조와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에 어떤한 개인의 힘으로 바꾸거나 개선시키기는 거의 불가능했다고 볼수 있겠다. 국왕이 길동을 잡으라는 체포명령을 전국에 내렸으나 길동의 도술을 당해낼 수 없어서 홍대감을 회유하고 길동의 형 인형도 가세하여 길동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하고 병조판서를 제수, 회유하기로 하였으나 이것 또한 진정으로 길동에게 신분적 속박을 벗게 해주었다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대책이 궁해진 조선조정에서 마지 못해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병판 제수를 하였으나 이것은 결과적으로는 홍길동을 제거하기 위한 하나의 미끼에 불과 했던 것 이다. 실제로 홍길동은 병조판서를 제수 받고도 그는 그의 꿈대로 나라를 위해 일하기는커녕 그는 조선을 떠나 신천지인 율도국에서 나라를 세웠다. 이것은 홍길동이 실제 병조 판서를 제수 받았다기 보다는 그저 병목상으로 받아 실질적인 지위보장이 이루어 지지않았다고 생각한다. 길동또한 그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적당히 타협하였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결국 길동은 자신이 절대왕권에 대한 방항의 한계를 보여주었으며 또한 조선왕조 또한 여전히 모든면에서 홍길동을 사회적 이단아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홍길동의 능력은 왕권을 위협할만큼 능력이 너무나 뛰어났던건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길동과 홍판서의 대화에서 우리는 삼강오륜이 사회적으로 깊숙게 파고 들어 있음을 보여준다 할 수 있겠다. 삼강오륜은 성리학적 사회윤리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덕목으로 부자.군신.부부.장유.붕우의 관계를 규정한 어떤 시기 어떤 상황에도 변하지 않는 진리 즉 천리의 사회적 구현이었으며,삼강은 그 중에서 특히 군신.부자.부부의 관계를 상하 주종관계로 강조한 것이 었다.이러한 성리학은 고려말 신흥사대부 도입하였다. 이 삼강오륜은 가부장적 종법질서로 구현되어 사중 중심의 사회를 유지하는데 기여 하였다고 할 수 있겠다.도둑의 괴수가 된 홍길동은 그 집단을 이름하여 활빈당이라 칭하고 나라 각처에서 갖은 작란과 노략질을 일삼았다. 해인사.함경감영을 비롯한 각읍 수령방백의 부정한 재물을 앗아 혹 불쌍한 백성을 구제하기도 하였다.물론 백성의 제물을 범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부패관료를 응징하고 그들의 재물을 빼앗아 빈민을 구제하는 민중 저항활동에서 드러나듯, 작품의 문제의식은 통치질서의 혼란과 백성들의 유민화라는 당대 사회모순 전반에로 확대되어 있다. 이는 적서차별에 대한 서얼드의 반감과 지배집단의 착취에 실달리는 민중들이 상당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의 시대적 배경은 세종으로 되어 있지만 작가 허균은 임진왜란 이후의 인물이므로 그 시대의 상황을 대변하는 거라 생각한다. 농민에 수탈이 심해지고 토지가 상품화가 되어감에따라 빈농과 부농이 생겨나는등 농촌사회가 분화하며 많은 유망민이 생겨났다. 이것은 농민들이 지배층의 수탈에 저항하는 일종의 저항형태라고 할 수 있다. 18세기에 접어들면서 많은 도적집단이 나타났으며 이들은 양반이나 지주, 부민의 집을 습격하여 재물을 약탈했으며 탐학한 수령이나 포교등을 응징하기도 하였다. 이러함에 지배층은 탄압을 하는 한편 노비제도의 개선,수령에 대한 감찰의 강화, 혹형의 폐지,윤음의 반포등 일련의 개량적인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작품속에 율도국을 . 중국을 섬기지 아니하고,수십 대를 전자전손하여 덕화유행하니, 나라가 태평하고,백성이 넉넉하거늘.. 라고 묘사하였다. 홍길동은 이 율도국을 쳐서 자기가 생각하는 이상국가를 건설하려 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홍길동은 중국을 섬기지 아니하고란 말을 언급하였다. 이것은 중국을 섬겨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조선의 사대사상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이것은 길동의 한계라고 생각된다. 결국은 길동도 조선왕조를 부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중국에 대한 사대는 조선의 기본법전인 경국대전에 올려져 이를 뒤받침하였다.이처럼 홍길동전에 나타나는 조선사회는 결과적으로는 임진왜란이 끝난 직후의 사회모습이라 볼수 있다. 비록 적서차별정책이 15세기초에 시작되었다 하더라도 나머지 여러 사회정황등은 거의 일치하는 것을 볼 수 있다. 16-17세기 조선사회에서 그 존폐를 둘러싼 논쟁이 치열했던 적서차별의 모순을 발판으로 삼아, 당시의 지배집단의 착취와 백성들의 유민화라는 심각한 현실모순 문제로 관심을 확대해 감으로써 중세 모순 전반의 개혁을 지향해 나가고 있다고 볼 수있다.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작가 허균은 임진왜란을 직접 체험하면서 당시의 봉건 집권층의 가혹한 수탈로 농촌이 피폐해지고 도적이 횡횡한 사회적 상황에서 민중을 대표했다고 생각한다.그러나 허균이 생각한 이상국인 율도국은 그 사회 구조가 충 효 우애 같은 삼강오륜 같은 윤리적 덕목이 강조되는 유교적 사회인 조선 사회와 크게 다를 바가 없는 신분제 사회이다. 이것은 당대의 모순적 사회를 개혁하자는 작가의 주장이 현실로 보아 한계가 있음을 보여주거나 작가의 생각의 한계를 보여주는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런 한계점에도 불구하고 보수적 풍토속에서 사회문제를 직접 제기한 것 자체가 의의가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동물의 행동5.1 행동이란?자기보존과 종족 유지를 위해 여러 가지 동작, 발음 발광 또는 수면 따위가 이루어지는데 이때의 모든 크고 작은 움직임과 활동방식을 행동이라 부른다. 인간은 사실상 옛날부터 이러한 동물의 행동을 연구해왔는데 이러한 연구는 주로 가축을 효과적으로 부리기 위해 필요하였다.오늘날은 이러한 응용목적보다 동물의 어떠한 행동이 어떻게 시작되고 진행되는가에 대한 메카니즘의 연구에 집중되고 있으며 그러한 행동이 그 생물의 생활과 적응에 어떻게 공헌하는가를 밝히고 또한 그러한 행동이 과거로부터 어떻게 진화되어 왔는가를 탐구하는데 모아 지고 있다. 이렇게 얻어진 정보와 지식은 한편으론 인간의 행동을 이해하고 그 기원을 따지며 나아가 인간의 사회활동의 본질을 파악하는데 이용되고 있다.5.2 본능어떤 동물이 태어난 후부터 다 자랄 때까지 그의 행동을 계속 관찰해 보면 두 가지로 구분할수있는데 하나는 선천적으로 물려받아 처음부터 비교적 완전하게 나타나는 행동으로 생득적 행동이라 하고 나머지 하나는 그 동물의 어린 시기부터 자람에 따라 점차로 발전하여 완성하는 획득행동이라 한다.생득적 행동@ 본능적 동작--외부로부터 가르침없이 스스로 하는 행동이것은 동물의 종에 따라 독특한 형태로 나타나는데 어버이에게서 물려받은 다른 특성들과 마찬가지다이런 본능적 행동은 고정불변이아니라 성숙과정을 거치며 약간의 변화를 보인다.@ 해발인--생득적으로 장치되어 있고 평소에 억제되어 있다가 신호작극이 주어지는 순간에 풀어져해당반응을 작동시킨다. 해발인은 어떤 동물로 하여금 본능적 행동을 시동시키고 환경의 일부로서방아쇠 역할을 하는 것을 말한다.5.3 학습@ 대체로 경험의 결과 개인의 행동에 적응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과정@조건반사@습관화:자극에 대해 익숙해져 그 반응을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러한 습관화는 시간요소가 많이 작용습관하는 동일집단을 스스로 보호하려는 집단보존의 장치로 유효@시행착오:동물이 어떤일을 여러 가지로 해보고 나중에 그 가운데 유리한 행동만을 거듭하는 것@모방: 경험 없이도 학습이 이루어질 수 있는 직관적인 학습으로 간주되는 다른 동물의 행동을 따라하는 것. 어떤 행동 패턴이 학습하는 동물의 행동레퍼토리 속에 이미 들어 있고 다만 다른 동물 이 그러한 행동을 나타내면 그 시각에 그 행동패턴이 표출@놀이:척추 동물의 소수종에만 알려짐 인간의 주관에 의해 해석이 틀려짐놀이의 몇가지 특징1) 놀이에는 목표가 없고 순서도 없음2)놀이는 연습의 기회3)놀이는 어떤 문제에 부딪쳤을 때 해결 할수 잇는 능력과 예비지식을 갖게함@각인:새가 알에서 깨어 나왔을 때 먹이를 주러 온 사람을 이 새끼가 자란 후에도 여전히따르는 현상.어떤 특정 개체에 대해서만 일어나는 현상은 아니고 그 생물이 속하는 종에 대해 일어날 수 다.5.4 동물은 어떻게 의사를 전달하는가?5.41 시각적 의사 소통시각신호에 의한 의사소통은 물고기.도마뱀.새 곤충 그리고 양서류와 영장류에서 특히 발달되어 있고 매우 중요하게 쓰인다. 시각신호는 색상 자세 형태 움직임뿐만 아니라 시간 맞추기등을 이용하기 때문에 나타낼수 잇는 정보가 매우 다양하다.5.42 청각적 의사소통인간에서 소리가 의사소통상 매우 중요하게 쓰이고 있고 이외의 동물에서는 소리가 거의 절지동물과 척추 동물에서만 발달.1)동시 부화기능:미국 자고새의 새끼들은 알속에 있을때부터 짤막한 울음소리를 내는데 이소리가 바로 일찍 성숙하는 새끼들의 부화를 억제하고 성숙이 늦은 새끼의 성장을 촉진하여 결국 모두가 거의 동시에 부화 하도록 조절2)어버이와 자식 사이의 유대북극 바다오리의 새끼는 부화하기 3-4일전에 이미 밖에서 어버이가 내는 소리에 반응하고 부화후에는 소리만 듣고도 서로 알이차린다. 칠면조의 경우 소리를 듣지못하면 새끼가 울어도 먹이를 주지않고 잡아 죽일수도 있다3) 무리의 유지울음소리는 무리를 이루는 개체들 사이의 접촉을 유지하므로서 분산을 막는 구실을 한다.4)경계울음새들이 싸우기 전에 위협행동으로 울어대거나 독수리나 솔개등이 나타나면 일부새들이 일종의 경계 경보 로서 우는 것을 볼수 잇다.5.43 화확적 의사소통개미들이 줄을 지어 길게 행진하는 것이나 개가 군데 군데 오줌을 누는 것은 대개 화학물질로 간길을 표시하여 되돌아올때나 뒤따르는 다른 개체들이 길잡이로 쓰고 또는 터를 표시하는데 사용한다.곤충은 몸의 분비샘에서 나오는 페르몬이 있는데 대개 같은 종의 다른 개체가 나타내는 어떤 행동이나 발생과정에서 어떤 반응을 나타내도록 유도한다. 이러한 화학적 의사 소통은 시각적 신호와는 달리 중간에 장애물이 있어도 지장없이 상대방에게 전달 될 수 잇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신호를 즉시 끊거나 잇는 조작이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5.44 촉각 의사소통동물은 신체적인 접촉을 통해 의사를 전달하는 경우가 많다.꿀벌의 척후병이 외부에서 먹이 있는곳을 찾아내고 돌아오면 춤으로써 먹이의 방향과 거리를 나타내는데 다른 벌들은 촉각으로 이 춤추는 벌을 건드린다. 새들은 주로 상대방에 대한 신뢰나 유대를 확인하는데 사용한다.5.5 공격모든 동물은 살아가는데 잇어 정도는 있으나 공격을 생활화하고 있다. 공격은 결국 자원의 확보와 분배를 위한 활동이고 따라서 그런 의미에서 지극히 생존과 번식을 위한 적응적인 활동이다.이런한 공격성은 특히 사회성이 발달한 동물에서 많이 볼 수 잇다. 그러나 이른봐 단서 생활 동물에서도 관찰된다.동물의 공격성은 위협적인 태도나 실제의 직접 공격으로 나타난다. 공격성의 표현으로 시위적 행동과 위협과시가 잇고 실제의 싸움이 투기행동이 있다. 이러한 공격성향의 결과 계급이 형성된다. 그러한 계층제는 개체간의 충돌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일의 능률을 높이는 효과를 발휘한다. 공격이란 대체로 먹이나 배우자 등을 놓고 대등한 입장에서 일어나는 경쟁상태임을 알수 있다.
1}아리스토텔레스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B.C. 385-4∼323-2)그리스 철학자이자 플라톤과 함께 그리스 최고의 사상가로 꼽히는 인물로 서양지성사의 방향과 내용에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그가 세운 철학과 과학의 체계는 여러 세기 동안 중세 그리스도교 사상과 스콜라주의 사상을 뒷받침했다. 17세기말까지 서양 문화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였으며 수 백 년에 걸친 과학혁명 뒤에도 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 서양사상에 여전히 뿌리 깊게 남아 있다.1. 아리스토텔레스의 생애와 환경적 배경아리스토텔레스는 필리포스 2세의 아버지이자 알렉산드로 대왕의 할아버지 아민타스 3세의 궁정 주치의였던 아버지 니코마코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따라서 의술은 당시 가업을 잇는 전통적 직업이었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도 의술을 배웠을 가능성이 크고, 훗날 그가 세운 학교인 리케이온에서는 의술과 실제 의료행위를 연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와 같이 어릴적부터 의술과 마케도니아 궁정 생활을 접한 탓에 그는 생물학의 영향이 강한 철학사상을 발표했고, 왕자들과 궁정에 대한 깊은 혐오감도 여러 번 피력했다.그의 아버지 니코마코스가 일찍 세상을 뜨자 그의 친척으로 추정되는 프로크세노스가 그의 후견인이 되었고, B.C. 367년 아테네의 유명한 플라톤 아카데미로 보내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20년간 수업을 했으며 플라톤과 그의 유력한 문하생들과의 잦은 접촉과 학문 활동을 벌임으로써 그의 지적 성장의 제 1기가 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거의 모든 학문에 대해 열의를 가지고 공부했으며, 때때로 수사학 공부에 몰두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아카데미아와 경쟁한 소크라테스 학파에 맞서 글을 쓰기도 했다. 그가 플라톤의 문하에서 벗어나 에게 해의 아시아쪽에 새로 건설된 아소스로 옮기게 된 배경은 B.C. 348년 마케도니아 왕인 필리포스가 그리스 도시국가 올린토스를 노략질한 뒤에 일어난 아테네의 反마케도니아 감정의 고조 때문이였으며, 동시에 아소스 지방의 실권을 장악한 헤르메이아스가 아시아 지방에 그말 또는 342년 초 그의 나이 42세경에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의 초청으로 13세 된 그의 아들 알렉산드로를 가르치기 위해 펠라로 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레산드로를 철학으로 계몽된 고전적 용기를 상징하는 인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으며, 그리스인에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알렉산드로스에게 비그리스 미개인을 정복하고 그들과 피를 섞지 말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드로에게 그다지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이러한 스승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알레산드로는 그리스인과 비그리스인의 결혼을 허용했으며, 페르시아 귀족 가문 출신의 아내를 맞았다. 반면 알렉산드로는 스승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필리포스 2세가 파괴한 그의 고향 스타기로스를 다시 세워주었고 그는 그곳에서 B.C. 335년까지 지낸 후 다시 아테네로 돌아와 리케이온 아카데미를 창설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학원 안에 있는 지붕 덮인 산책로인 페리파토스에서 가르쳤기 때문에 이 학파는 '페리파토스 학파(逍遙學派라고도 함)'라는 이름을 얻었다.아리스토텔레스는 그 뒤 12년간 많은 학자의 의견을 통합하여 리케이온을 모든 탐구의 중심지로 만들었으며 과학과 철학의 광범한 영역에 걸쳐 강의를 제공했다. 플라톤 아카데미와 리케이온의 뚜렷한 차이점은 플라톤주의자들이 수학에 관심의 초점을 맞춘 반면 리케이온은 생물학과 역사에 이바지했다는 점이다.B.C. 323년 알렉산드로 대왕이 죽은 뒤 짧은 기간 동안 아테네에는 마케도니아에 강력히 반대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오랫동안 마케도니아와 관계를 맺고 있었고 아테네를 섭정한 마케도니아 장군 안티파트로스와 친했기 때문에 그도 소크라테스와 같이 '불경'이라는 죄목으로 고발되었다. 유죄가 확실시되었기 때문에 그는 아테네를 떠나 어머니의 영지가 있는 칼키스로 망명을 떠났다. 그 이듬해 그는 위장병으로 사망했으며 그의 나이 62세(또는 63세)였다. 그가 아테네를 떠난 까닭은 아테네인들이 철학에 대해 2번 죄짓는 것(첫번째는 소크라테스를 죽인 일과 사상1) 논리학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논문들은 '오르가논(Organon-도구)'이라는 저작 속에 모여 있다. 이 제목은 후대의 해석가들이 붙인 것인데, 이들은 소요학파의 전통에 따라 논리학을 철학하는 수단으로 생각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논리학을 과학의 분류체계에 넣지 않고 각 지식 분야를 연구하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예비 학문으로 여겼다. 그가 논리학에 직접 붙인 이름은 '분석론(analytica)'이었다.은 ····등의 논문으로 구성되어 있다.먼저 은 실제의 사물 또는 본성에 관한 이론인지 아니면 말 또는 표현에 관한 이론인지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일단 플라톤의 형상이론을 비판하는 그의 대목에서 그가 자연과 인간을 구성하는 모든 사물과 현상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구분'을 시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에 따르면 플라톤은 아름다움 또는 지혜와 같은 질에 실체성을 부여함으로써 실체 범주와 그 밖의 범주를 혼동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체 범주 안에서도 '제1실체'와 '제2실체'를 구분했는데, 제1실체는 이 사람 , 저 말(馬), 이 돌등의 개체이며, 제 2실체는 이 개체가 속한 種과 類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적 사물이 가지고 있는 속성들을 완전하게 열거하려는 다소 무모한 시도를 하고 있는데, 사실상 이것이 그리 놀랍지 않은 것은 그의 논리 체계가 귀납적인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의 에서 나타나는 그의 뛰어난 업적인 '삼단논법'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즉 제시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조건들을 나열하고 그것에 의해 결과적으로 파생되는 하나의 명백한 사실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이러한 논리구조는 생물학적 고찰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즉 그는 이론적 설명을 제시하면서도 이론이 관찰을 왜곡해서는 안된다는 확고한 의지를 보여 준다. 다시 말해 관찰(열거할 수 있는 실제적 상황, 증거)이 이론을 수정해도 이론이 관찰을 초월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2)자연철학그의 저서 에서는 자연 물체 일반, 즉 형체를 가진 모든 것을 다루고, 특수한은 작용인, efficient cause)이다. 즉 창작활동의 주체를 뜻하는 말이다. 셋째로 형상적 원인(formal cause)이다. 형상이 서술하는 뜻을 감안해 본다면 그 속성의 특징이 목표로 한 결과물의 적합성을 가지고 있음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목적인(final cause)이 있다. 즉 최종적으로 왜 이것을 만들려는 지의 의지에 관한 부분이다.생물학과 동물학 저작에서도 의 원리는 분명하게 나타난다. 에서 그는 서로 다른 동물 종에 대한 기술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 안에서 그는 생물 분류학을 세우려 했고 그래서 동물세계를 類와 種으로 나누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동물의 여러 기관과 신체부분을 성질·기능 등으로 단순히 서술하지 않고 '설명'을 하고 있는데 여기서 그의 목적론적 사고를 살펴 볼 수 있다. 그는 "자연은 쓸 데 없는 짓을 하지 않는다"라고 말했으며 신체의 각 부분은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있고 그 목적대로 기능을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4)형이상학형이상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범주론에서 2차적 실체로 정의한 種과 類를 1차적인 실체로 다시 규정하고 있다. 이것이 그의 논리적 오류이며 그의 견해를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기도 하다. 그래서 몇몇 학자들은 그가 에서 플라톤의 존재론으로 되돌아갔다고 해석하기도 하는데 어찌 보면 그가 플라톤과는 달리 영혼이 육체와의 합일적이고 통일적인 존재로 보았기 때문에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에서 種과 類를 보다 1차적인 우위의 단계로 설정할 수도 있다.그의 에서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목적론'이다. 이 목적론은 자연과학 연구에 있어서도 지속적으로 사용되었으며 물질적인 현상 이외에도 인간의 윤리와 정치의식을 이러한 지각된 목적의식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5)윤리학과 정치학그의 에서 중요한 것은 실천과학과 이론과학이 가지는 뚜렷한 차이점을 파악하는데 있다. 이론이 실제와 다른 것은 실제(실천) 안에는 주제가 정확하게 정의할 수 있는 것에 한정되지 않고 습관·기술·제도 등까지 포함하간의 선을 위해 바람직한가를 기준으로 윤리문제를 이야기한다. 이러한 목적론적 접근 때문에 다양한 종류의 선을 검토하고 마침내 행복에 이르는 최고선을 규정한다.3. 아리스토텔레니즘의 영향아리스토텔레스가 후대에 미친 영향은 실로 막대하다. 우선 그의 용어 중에서 지금 까지도 학문적으로 중요한 전달 매개로 사용되는 것이 있는데, 예를 들어 '주어'와 '술어', '형상'과 '질료', 어떤 사물에 내재하는 능동적 힘으로서 '현실태', 잠복해 있지만 표출될 수 있는 '가능태', '실체'와 '본질', '양'과 '질', '우연적', '관계', '원인', '類와 種', '개별', '불가분할적'(원자적) 등이 있다.스토아 학파는 자연에 대한 관심, 자연과학의 여러 측면, 인간은 본래 사회적 동물이라는 믿음뿐 아니라 경험주의 관점을 취했다는 점에서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수용하고 있다. 회의론자들은 종종 그들의 체계적 회의를 입증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증 형식에 의존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초기 신학과 심리학을 논박하고 그의 성숙기 철학을 무시한 에피쿠로스조차 '의지에 대한 학설', '우정의 관념', '만족과 기쁨을 주는 고귀한 목적으로서의 지식 추구' 등에서 아리스토텔레스와 유사점을 보여준다.3세기에는 신플라톤주의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을 원용했다. 이 학파의 대표자 플로티노소스의 제자인 포르피리우스는 논리학 분야에 대한 간략한 개론서 를 썼다. 이 입문서는 곧 의 필수 부분이 되었고 이후 1,500년 동안 모든 학파에서 큰 권위를 인정받았다. 이때부터 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 신플라톤주의와 불가분하게 결부되었다. 5세기 이전에 그리스도교 신학은 부수적·간접적으로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에 대한 원리적 연구는 신학자의 엄격한 훈련을 위해 필수불가결함이 입증되었다. 그의 , 에 나오는 몇몇 개념은 교리를 합리적으로 정식화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게 되었다.이후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은 시리아와 아랍, 그리고 유대의 전통 학문에도 널리 영향을 미치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