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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개론] 문학을 보는 관점 평가A좋아요
    모방론모방(模倣)이란 모사(模寫)와 비슷한 말이다. 모사란 본체 또는 원상(原像)과 아주 유사한 것 또는 닮은 것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모방론은 작품 제작의 전제로 현존하는 것 혹은 현실적 존재를 시인하는 관점이다. 현존하는 것 또는 원상에 해당되는 것들은 그 숫자가 거의 무진장이다. 예를 들어서 우리는 시내·들꽃·구름 등을 노래한 시를 만나게 되고, 또 애정을 노래한 시들을 만나게 된다. 그런가 하면 우리들은 일제치하를 산 많은 시인들의 작품에서 민족에 대한 감정을 포착하기도 하며, 종교적 신념에 불타 있는 시들에서 시인이 스스로 참이라고 믿는 절대의 경지를 발견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모사 내지 모방의 실체가 된 여러 현상들을 가리켜서 Universe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모방론(模倣論)은 시론 내지 문학론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경우다. 동양에서는 이미 공자(孔子)가 『논어(論語)』에서 시 속에는 초목, 화훼에서부터 인간세계의 여러 현상이 두루 담겨 있다고 말한 것이 있다. 그리고 서구에서는 플라톤이 자신의 『공화국』 10장에서 모방의 이론을 전제로 하여 유명한 시인추방론을 내세운 바 있다. 이 중에서도 플라톤의 시인추방론에 대해서는 특별한 주목이 요구된다. 플라톤의 공화국은 인간이 가져야 할 이상적 국가형태를 가리키는데, 거기에서는 그가 이데아라고 명명했던 진리가 그 이념이 된다. 그런데 플라톤의 생각에 따르면, 진리란 사물 속에 내재하는 본질적인 것으로 순수한 이성을 통해서만 포착·파악된다. 하지만 시 또는 문학은 일차적으로 눈에 보이는 사물이나 현상만을 대상으로 삼는 데 그치기 때문에 이러한 진리로부터 멀어져 있다. 이러한 과정을 플라톤은 '탁자'의 예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제시한 바 있다. 즉, 그는 탁자라는 사물의 이데아를 지니고 있는 자(제1단계: 창조주), 이데아에 따라서 실제로 탁자를 만들어내는 사람(제2단계: 목수), 그리고 만들어져 있는 탁자를 대상으로 하여 예술작품을 만들어 내는 자(제3단계: 화가 또는 시인)로 구분하장인의 작품은 전혀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라톤의 주장은 이 엄연한 진실을 돌보지 않은 채 작성된 것이다.플라톤의 생각은 그 후 다른 사람들에 의해 손질이 가해졌는데, 그 허두에 나타난 사람이 아리스토텔레스다. 그는 우선 이분법을 써서 인간의 정신활동을 제일원리 쪽으로 향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나누면서, 시를 후자 중에서도 기예의 세계에 속하는 것으로 보았다. 또한 그는 기예를 응용적인 분야와 심미적(審美的)인 분야로 나누었다. 여기에서 응용적인 분야가 장인의 영역이라면, 심미적인 분야는 시의 영역에 속한다. 그러니까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단선적(單線的)인 전제에서 빚어진 오류를 처음부터 극복하고 있는 셈이다. 즉, 그는 시와 철학이 정신범주에 있어서 다르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해 놓았던 것이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는 심미적 기예의 세계(fine art)를 모방예술의 세계로 보면서, 모든 모방예술들은 어떤 실체를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의 가치체계와 존재이유를 갖는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문제되어야 할 것이 바로 그가 생각한 '모방'의 뜻이다. 그에 따르자면, 모방은 진리와 정의, 덕성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니라 본능에 의한 것이며, 시는 그것이 작품 외의 실체나 이데아를 모사해야 되기 때문이 아니라 여러 형태의 소재들을 이용하기 때문에 모방예술일 뿐이다.그렇다면, 시는 그 소재들과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인가.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시 독자적 현상설을 내세웠다. 그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 존재이유와 존재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이것은 모든 사물들이 어떻든 질료를 가지고 있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형식 내지 형태도 가지게 마련임을 뜻한다. 그렇다면, 인간이 빚어낸 노작 가운데 하나인 예술과 그 하위 개념인 시에도 당연히 그 독자적인 존재의의가 있어야 하고, 좋은 시인은 그것을 구현시키는 사람이다. 여기에 바로 그가 『시학(詩學)』을 통해 구성이라든가 형태의 이론을 펴고 있는 까닭이 있다.한편, 이보자면 그는 바로 시인이며 예술가이다. 그리고 이는 시를 시인 또는 예술가의 몫으로 돌린다는 것을 뜻한다. 시를 시인의 몫으로 돌린다는 것은 시인의 내면세계가 어떤 국면에 이르고, 나아가서 반드시 표출되어야 한다는 것을 요구한다. 어쩌면 그것은 W. 워즈워스가 말한 것처럼 '감정의 자발적인 넘쳐남'일지도 모르는 것으로, 그것을 통해서 비로소 한 편의 시가 성립된다. 이것이 우리가 시인을 중심으로 시를 이야기하고자 하는 비평태도에 대해서 표현론(表現論)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이유이기도 하다.표현론의 입장에서 시를 논한 예로는 워즈워스를 손꼽을 수 있다. 그는 1798년에 쿨리지와 함께 낸 『서정민요시집』의 서문을 통해서 제 나름의 시론을 폈다. 거기에서 그는 당시 영국 시단을 지배하고 있던 신고전주의에 반발하고 나서면서, 시는 곧 '강렬한 감정의 자발적인 넘쳐남'이라는 유명한 정의를 내세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넘쳐남'이라는 말과 '자발적'이라는 말이다. 그가 쓴 '넘쳐남'이란 말은 감정에 관련되는 언어를 가리키는 것으로 시가 감정처럼 유동하는 언어로 이루어짐을 뜻한다. 그리고 '자발적'이란 말은 자발성(spontaneity)의 개념을 성립시키는 것으로 시 또는 감정이 독립적 존재임을 뜻한다. 그러니까 워즈워스에 따르자면, 시의 성패는 감정을 어떻게 구성해 내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한편, 워즈워스에게 있어서 감정의 구성은 어떤 사상 또는 현실적 효용가치를 떠나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워즈워스는 이때부터 모방론의 입장을 완전히 배제하고 있는 셈이다. 이와 같은 그의 시론을 우리는 감정을 전제로 한 자발성의 시론이라고 한다.워즈워스의 다음을 이어 표현론을 개발한 경우에 J. S. 밀이 있다. 그 역시 워즈워스처럼 모방론을 배제하는 입장을 취했다. 그는 신고전주의자들이 서사시나 비극을 문학의 대표적인 양식이라고 본 데 대해서 정면으로 반대했다. 서사시나 비극은 다같이 이야기를 전제로 하고, 이야기란 또 인간의 생활을 그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시는 자기 자신을 위한 양식이며, 거기에서 독자는 바로 시인 자신이 된다. 또한 시 곧 서정시는 관조를 전제로 해야 하기 때문에 외부세계, 특히 사회적인 것이거나 역사적인 사실들로부터 떨어져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결국 시인이 단독자로서 명경지수(明鏡止水)와 같은 상태가 되었을 때에만 서정시의 여건이 확보될 수 있는 것이며, 그것을 시인이 자신에게 했을 때에야 비로소 서정시는 그 필요하고도 충분한 여건을 모두 확보한 상태가 된다. 시가 시인이 스스로의 내면세계를 털어 내는 양식, 즉 〈독백〉이 되는 것은 바로 이 경우에서이다.그러나, 잘못 해석될 경우 표현론은 시가 시인의 전유물로 생각될 여지를 남긴다. 비록 시인에 의해서 빚어진 것이라고 하더라도 시는 반드시 일반 사람들이 인정할 수 있는 것이어야만 한다. 이것을 우리는 공인상태(公認狀態)에 이를 수 있는 작품만이 시일 수 있다고 바꾸어 말할 수도 있다. 언어행위에서 화자가 청자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을 해야하는 것처럼 시인 또한 독자가 인정할 수 있는 작품을 써야 한다. 시에서 청자 혹은 청중의 개념이 요구되어야만 할 필요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효용론일상생활에서 쓰는 말은 우리가 어려서부터 수없이 자주 사용해 온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거의 기계적으로 그것을 써도 청자는 그 내용을 이해하게 되고, 따라서 우리는 아주 손쉽게 청자의 반응을 기대할 수가 있다. 그러나 시는 그와는 다른 예술의 한 양식이다. 특히 좋은 시는 관습적인 면이라든가 전통을 소화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데, 이때의 관습이나 전통은 시인 자신의 몫이 아니라 청중 또는 독자의 몫이다. 한편, 시에는 반드시 창조적 측면, 개성이 확보되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측면 역시 시인 혼자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참으로 시를 알 수 있는 독자가 그것을 시인해야만 하는 것이다.시가 일반독자의 공인 내지 찬동을 받아야 할 이유는 좀더 근본적인 차원에서도 제기된다. 이미 밝혀진 바와 같이 시는 자연 그 자체가 아니다. 어떻든 그것은 우 시가 독자에게 불러일으키는 효용은 크게 보아 두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심리적 효과이며, 다른 하나는 교훈적 효과이다. 시를 말하는 자리에서 이와 같이 이분법을 써서 그 효용을 말한 최초의 사람은 로마의 시인 호라스다. 그는 『작시법(Ars Poetica)』으로 통칭되는 긴 서간체 글에서 "시인의 소원은 가르치는 일, 또는 쾌락을 주는 일, 또는 그 둘을 아울러 하는 일"이라고 말한 바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호라스의 포괄적인 입장이다. 그리고 그는 그 포괄, 종합형태가 있다고 밝혀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의 이런 말이 작시법에 한하고 있다는 점이다. 만약 그가 교훈적인 면을 강조하고 싶었다면 시를 효과적으로 쓰는 기술 전수는 거의 무의미한 게 된다. 왜냐하면 도덕 윤리상의 교육은 그 내용이 되는 훌륭한 알맹이가 주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때 기술이란 교육의 영역이지 시의 영역이 아니다. 그런데 분명히 그는 같은 글에서 시는 미를 추구해야 하며 그것만으로도 부족하다고 했다. 구체적으로 그는 "미만으로 청중을 이끌고자 해도 그들은 그로써 만족하지 않는다"라고 하면서, 이어서 그들을 울고 웃겨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우고 있다. 이것은 분명히 그에게 쾌락설을 향한 정신의 경사가 있었음을 뜻한다.호라스에 이어 교훈 대 쾌락의 문제를 다룬 비평가에 P. 시드니와 J. 드라이든이 있다. 시드니는 호라스처럼 시의 교훈성을 부차적인 것으로 돌리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그것을 정서와 결부시켜서 논하고 있다. 이 경우 정서란 움직임(moving)에서 온 말로, 시가 어떻게든 독자를 감동시켜야 한다는 생각과 관계가 있다. 이렇게 본다면, 시의 교훈적인 내용은 감동을 가능하게 만드는 정서를 통해서 독자에게 작용해야만 한다. 달리 말해서 인간에게 약이 되는 교훈 내용은 알맹이로 있는 것이고, 시는 그것을 정서라는 껍질로 싸서 독자가 즐겁게 수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만 한다. 여기서 유명한 시드니의 당의설(糖衣說)이 이루.
    인문/어학| 2003.07.03| 7페이지| 1,000원| 조회(7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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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문학] 제임스 조이스의 The Dead 평가B괜찮아요
    The Dead 를 읽고..서양어대학 네덜란드어학과 4학년, 199413015 이윤하20세기 초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물질 만능 주의가 사회 전반에 팽배하게 되었고 더불어 인간 소외 현상이 가속화되었다. 이러한 전통적 사회질서와 가치관의 붕괴는 리얼리즘 소설에 있어 기본적인 요소로서 작가와 독자 모두에게 공감대를 형성해 주던 공유 가치의 부재를 의미했고, 결과적으로 리얼리즘 소설이 설 토대를 상실하게 만들었다. 이 시기에 등장한 것이 모더니즘인 것이다. 모더니즘 작가들은 현대인들이 처해 있는 참담한 상황에 많은 관심을 보이면서 현대인에게 있어 삶은 무의미하고 허무적인 것이라고 간주하게 된다.James Joyce는 자신의 조국 아일랜드의 어려운 시대적인 현실에서 비롯된 소외와 마비를 단편집 Dubliners속에서 일관성 있게 다루고 있다. 특히 영어로 쓰여진 단편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걸작중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는 The Dead에는 주인공 Gabriel을 통해 소외 상황의 인식과 깨달음이 묘사되고 있다.The Dead는 관리인의 딸인 Lily가 Morkan가의 자매들이 해마다 벌이는 큰 행사인 파티에서 시중을 드느라 분주한 장면으로 시작된다. 이 파티는 겉으로 보기에는 Morkan가의 자매들을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참석하는 다정하고 즐거운 연회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매년 되풀이되어 온 형식화된 행사에 불과한 연회에 참석한 모든 이들은 죽음 속에서 삶을 살아가는 이들로, 이들의 세계에서 살아있는 것은 과거의 기억뿐이며 모든 활동은 죽은 자들의 것처럼 암울하며 무의미하다.이 소외의 인물들을 대표하는 인물은 주인공 Gabriel Conroy로, 그는 자기중심적이며 교만한 우월감에 빠져 있지만, 동시에 지나치게 소심한 자기 방어적인 성격 또한 지니고 있다. 그는 Lily와 Ivors양 그리고 자신의 아내인 Gretta에게 정면적인 도전을 받고는 자신의 우월감에 상처를 입게된다. 파티 장소인 이모 댁에 도착한 Gabriel이 Lily에게 별 뜻 없이 곧 네가 근사한 신랑하고 결혼식 올리는걸 보겠구나. 라는 말을 던지자 그녀는 정색을 하고, 요즘 남자들은 전부 말만 번지르르하고 제 욕심만 채우려고 해요. 라고 신랄하게 쏘아 부친다. 이에 그는 크게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른다. 또 땅이 질퍽할 때는 언제나 덧신(goloshes)을 신으라고 강요하는 그의 지나친 세심함을 조롱이라도 하듯, 아내인 Gretta가 이모들 앞에서 농담을 하자 이맛살을 찌푸린다. 이러한 그의 소심한 면은 Ireland의 민족주의자인 Ivors양과의 대화에서도 잘 나타난다. Gabriel이 아일랜드의 민족주의에 반대 입장인 신문사인 The Daily Express에 기고한다는 것을 알고, 그녀가 난 당신이 부끄러워요. 그따위 신문에 기고를 하시다니. 친영파이신 줄은 미처 몰랐어요. 라고 면박을 주자 당황해 어쩔 줄을 모른다. 세 여인으로부터 일련의 공격을 받은 Gabriel은 자신의 자만심과 우월감에 상처를 받는다. 이와 같은 두터운 자기 중심주의는 곧 타인과의 단절을 의미한다. 그는 식탁 연설에서 이모인 Morkan자매를 극구 찬양하지만 내심으로는 무지한 여자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몰락한 가엾은 친구라고 말하면서 Freddy를 동정하는 척하지만 본심은 스코틀랜드 놈이라고 욕설을 퍼붓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그는 자신의 아내인 Gretta와의 관계에서조차 단절되어있다. 파티가 끝나고 모두들 돌아가기 위해 밖으로 나갈 때, D arcy가 노래부르는 것을 바라보고 있던 Gabriel은 무엇에 흘린 듯 꼼짝 않고 서 있는 우아한 아내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는 그녀의 모습에 매력을 느끼며 아내에 대한 욕정에 가득 차게 된다. 그러나 Gretta는 남편의 생각과는 달리 D arcy가 부르는 노래에 심취되어 옛 애인인 Michael Furey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음악은 Gabriel에게는 아내에 대한 사랑과 욕망을 일으키게 하는 반면, Gretta에게는 자신을 사랑하다 죽은 Michael Furey에 대한 추억을 불러일으킨다. 이 노래는 Gabriel과 숨겨진 과거를 지닌 Gretta의 단절시키며 Gretta를 다를 세계로 움직여 가도록 만든다. 이러한 사실은 부부인 Gabriel과 Gretta의 사랑마저도 서로 단절된 상태에 있음을 보여준다.이러한 소외와 단절은 비단 Gabriel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The Dead에 등장하는 다른 인물들에게도 이러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매우 적극적으로 자기 주장에 분주한 Mr. Browne은 난 숙녀들에게 인기가 좋죠. 라고 자랑하며 자신을 돋보이려하나 아무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기 않는다. 그는 무시당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자기중심적인 Mr. Browne과 다른 사람들 사이에 의사소통이 단절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Freddy Malins가 떠벌리는 이야기 역시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는 자기 도취에 빠져 이를 알지 못한 채 웃곤 한다. 그의 어머니 Malins부인도 주위 다른 사람들과는 상관없이 자기 이야기만을 늘어놓고 있으며, 다른 사람들은 모두 Parkinson이 훌륭한 테너였다고 칭찬하는 반면 Baretell D arcy만은 자신이 들어본 소리중 가장 이상한 목소리 였다고 말한다. 파티의 참석자들은 Mary Jane이 연주하는 곡을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연주가 끝나자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낸다. 더욱 아이러니컬한 것은 피아노 연주를 듣지도 않은 젊은이들이 가장 열렬한 박수를 보내는 것이다. 이러한 등장인물들은 서로간의 의사소통의 단절과 마비된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편협하고 세속적인 가치관에 얽매인 Kate와 Julia이모는 말대꾸만은 참을 수 없어하며 그들의 조카인 Gabriel은 자기 중심적이고 교만한 우월감에 빠져있다. 하녀 Lily는 자기의 비위에 거슬린다고 우호적인 Gabriel의 말에 대해 쏘아붙이는가 하면, 민족주의자라고 자처하는 Ivors양은 끈질긴 만류에도 불구하고 파티석상을 떠난다. Mr. Browne과 Freddy Malins 그리고 어머니 Malins 부인은 남의 반응에 개의치 않고 자기 이야기에만 열중하고 있으며, Mary Jane은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아카데미 곡을 연주한다. 이것이 파티에 참여한 인물들의 모습인 것이다.이 이야기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은 상호간에 의사가 통하지 않음으로서 참된 인간관계를 형성하지 못하는 죽음 속의 삶을 살아가는 the living dead 인 것이다. The Dead는 죽은 Michael Furey가 아니라 Gabriel을 포함한 모든 파티 참석자들과 모든 아일랜드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모두 살아서 움직이기는 하나 죽은 자들이다. 이러한 마비된 삶은 비단 이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Dublin, 나아가서는 Ireland가 겪고 있는 병폐인 것이다. 반면에 비록 세상에는 없지만 Gertta나 Gabriel의 가슴속에 살아있는 Michael Furey야 말로 살아있는 인간이다.파티가 끝난후 Gabriel은 욕정에 사로잡혀 아내를 원하지만, 그녀의 얼굴이 너무도 심각하고 피곤해 보여 말을 하지 못하고 속이 타서 몸을 부들부들 떨며 자기의 마음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아내를 원망한다. Gabriel은 이렇게 주춤거리다가는 안되겠다고 두려워하면서 친구인 Malins에게 전에 돈을 빌려 준 일이 있는 데 받으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던 그 돈을 가기에게 갚았다는 이야기를 불쑥 꺼낸다. 그때 자기도 모르는 사이 Gretta가 다가와서 자애로운 사람이라며 키스를 해주자 Gabriel은 행복감에 싸여, 아내도 자신과 같은 생각을 품고 있었다고 확신을 한다. 그러나 Gabriel이 최고의 자신감과 욕망에 싸여있는 순간 Gretta는 D arcy가 불렀던 노래를 생각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녀는 Gabriel과는 전혀 다른 감정속에 깊숙이 몰입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오직 그녀를 보기 위해 빗속을 달려와 나뭇가지 아래 서있던 Michael Furey에 대한 회 상하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그녀의 반응에 Gabriel은 분노를 느끼며 비꼬는 듯한 질문을 하다가, Michael Furey가 개스 공장에서 일하던 소년이었으며, 17세의 나이에 죽었다는 Gretta의 말에 충격을 받아 자만심과 우월감이 파괴되게 된다. 그는 수치심에 싸여 자신의 삶을 새롭게 뒤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Gabriel은 자신의 세계로 아내를 이끌려던 노력이 얼마나 헛된 것이었는가를 깨닫게 되며 두터운 자만심의 벽이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아내의 과거를 듣고 허망한 그는 창가로 조용히 걸어나가, 흐느끼다 잠들어 버린 아내를 잠시 바라보며, 아내가 걸어온 인생과 그녀에 대한 남편으로서의 역할을 생각해 본다. 그러나 이처럼 Gretta를 자신의 아내로서가 아니라 자기와는 다른 열정적인 삶을 살아온 타인으로 생각하기에 이르자 조금 전과는 달리 그를 괴롭혔던 마음의 고통은 사라지고 오히려 그녀에 대해 연민의 정을 느끼게 된다. 그는 조금 전에 느꼈던 감정의 격동이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그리하여 이모님 댁에서의 파티, 바보스런 식탁 연설, 포도주와 춤, 작별할 때의 인사말, 이 모든 것들이 부질없는 일이었음을 깨닫는다. Gabriel은 자신과 같은 부질없는 삶보다는 비록 짧지만 진정한 사랑 속에 살다간, 그래서 아직도 아내의 추억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는 Michael Furey의 삶이 더 값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문/어학| 2001.12.15| 3페이지| 1,000원| 조회(2,4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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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문학] 키츠,셸리,워드워즈 시비교 평가D별로예요
    낭만주의는 예술을 모방하는 것으로 정의하였던 신고전주의적인 사고방식에 반하여 작가의 감정과 내면을 중요시하며, 시를 모방이 아니라 시인의 내면의 표출의 수단으로서 표현한다. Wordsworths는 시를 시인의 강렬한 감정의 자발적인 유출(a spontaneous overflow of feeling) 로 정의하는데, 이 정의는 낭만주의의 문학과 시인을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지침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낭만주의 시인들은 시의 소재를 감정이라는 내적 영역에서만 모색하지 않고 자연에서도 찾으려 하였다. 그들은 모호하고 형식적인 문구를 쓰지 않고 실제로 관찰하고 느낀 것을 묘사하여 그로 하여금 내면의 세계를 되돌아보고자 하였다.18세기 신고전주의 자들은 인공적인 도시문화의 편중으로 자연을 완전히 무시했다. 이와는 달리 Wordsworth에게 있어서 자연은 인간생명의 근원이며, 실재와 진리의 근원이었다. 그는 구체적 사물 속에서 보편적 진리를 파악하고자 한 시인으로, 그가 시를 창작할 때 자연을 구사한 것은 자연이 말해주는 교훈을 깨닫기 위해서였다. 또 그의 시어로 일상언어, 평범한 사람들이 쓰는 언어를 사용하였다.To the Cuckoo 는 모습은 보이지 않고 소리만 들리는 뻐꾸기의 출현으로 시작되는데, 작중 화자는 풀밭에 누워 이 뻐꾸기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회상에 잠기고 있다. 화자에게 뻐꾸기는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작자의 내면에 존재하는 낭만적 지향의 대상이기 때문에 뻐꾸기는 화자에게 가장 순수하고 열정적이었던 학창시절을 회상하게 해 준다. 무엇인가를 찾아 헤매는 듯한 뻐꾸기의 소리는 자신의 꿈과 소망을 찾아 헤매는 시인의 모습과 유사한 속성을 가지고 있어 화자는 뻐꾸기, 곧 자신의 꿈과 소망을 찾아 헤맨다. 뻐꾸기의 상징적 의미가 이와 같은 것이므로 그것을 찾아 헤매던 학창 시절은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회상된다. 지금도 여전히 그 때와 같이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듯한 뻐꾸기의 모습이 자기가 살고 있는 현실까지도 꿈처럼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이다.시인은 뻐꾸기를 단순한 자연의 일부분으로 보지 않고, 특별한 개인적 의미를 부여하여 예찬하고 있다. 시인에게 뻐꾸기는 신비로움을 간직하고 있는 수수께끼와 같은 존재인 것이다. 뻐꾸기에 대한 예찬은 동시에 미지의 것을 추구하는 순수한 열정으로 가득 찼던 황금빛 젊은 날 에 대한 예찬이다. 아직도 뻐꾸기 소리 의 신비를 간직하고 있는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송이기도 하다. 결국 시인은 뻐꾸기 소리를 매개로 하여 과거와 현재, 인간과 자연을 포함하는 온 세상을 예찬하고 있는 것이다.Wordsworth의 시는 이처럼 평범한 세계에서 강한 정서를 통하여 모든 자연의 요소가 반영됨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는 자연을 노래하되 그 목적이 자연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숭고한 기쁨으로서 도덕관을 높이려는데 있었다. 따라서 그가 본 자연은 색이나 모양 같은 외적인 것보다는 그의 개인적인 상상속에 투영된 것이었다. Wordsworth는 세상의 어느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자연의 진상을 파악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매일 똑같은 산길이나 들을 거닐며 자연의 섭리를 찾고자 하였다고 한다. 그렇게 자연을 구하는 마음은 인간을 구하는 마음으로 발전하여, 이 속에서 자연으로부터의 위안과 교훈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이다.Keat는 자신의 정원에서 휴식을 취하던 중 집 근처에서 둥지를 틀고 살던 nighingale의 노래 소리를 들었고, 그 즐거운 노래 소리를 들으면서 즉석해서 Ode to a Nightingale 을 썼다고 한다. Keats에게 Nightingale은 영원한 행복과 불멸성의 상징이며, Nightingale이 상징하는 불멸의 세계와는 달리 인간의 현실은 고통과 좌절의 연속이며 병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끊일새 없는 곳이다. Nightingale이 상징하는 세계는 이러한 현실적인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시인은 현실에서 벗어나 Nightingale의 세계에 동참하기를 원한다.Nightingale의 세계와 하나가 되기 위해 남국의 환락과 인생의 희열을 풍겨주는 싶은 땅속에 오랫동안 서늘하게 저장되었던 포도주 의 힘을 빌리려 한다. 포도주는 Nightingle의 노래와 같은 반응을 시인에게 불러일으킨다. 술이라는 것은 시인이 세상의 눈에 띄지 않고 떠날 수 있게 해주는 도피의 수단인 것이다. 그래서 술을 통해 이 세상을 벗어나려는 욕구가 생기자 시인은 현실을 떠올리게 되며, 인간 현실을 더욱 고통스럽게 인식한다. 시인이 도망치고 싶어하는 현실 생활은 고난 속에서 신음하고 있으나 어느 누구도 도움을 주지 못하는 그런 세상이다. 인간의 가장 큰 슬픔은 아름다움이나 사랑이 지속 될 수 없는 그야말로 절망으로 가득 찬 세계인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Nightingale이 상징하는 영원의 세계로 들어가고자 또 다른 방법을 구한다.이번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시의 날개 즉 상상력을 사용하여 들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토록 원했던 Nightingle의 이상향에는 빛이 없다. 시인은 어둠 속에서 청각과 후각만으로 사물을 구별한다. 시인은 어둠 속에 남겨져 현실과 결별하는 수단으로 죽음을 생각한다. 그러나 그 순간 Nightingle의 노래를 들으며 인간의 유한성과 Nightingle의 무한성을 깨닫고서는 동시에 삶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된다. Nightingle이 인간의 고통을 달래주는 immortal bird 로 먼 고대시대부터 시인 자신이 노래를 듣고 있는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하여 누구에게나 현실 세계의 고통과 슬픔을 벗어나 기쁨과 행복을 느낄 수 있게 해 줄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Nightingle의 노래는 고대의 황제와 농부뿐만 아니라 Ruth에게도 위안과 기쁨을 주었던 노래이며, 인간이 살 수 없는 faery lands forlorn 에게도 위안과 기쁨의 소리로 들렸다 한다. 시인은 이런 상상을 하며 불멸성의 상징인 Nightingle의 노래와의 강력한 결합 속에서 변화된 의식을 가지고서 현실 세계를 바라볼 수 있게된다. 그래서 또 다시 Forlorn 하고 외치면서, 상상의 세계에서 현실로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상상 그 자체가 고통스러운 현실을 탈피하기 위한 대안이 될 수는 없음을 느끼면서 말이다.Keats는 자신의 삶이 참으로 고통스럽고 힘들었기 때문에 현실적인 행복을 맛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현실로부터 도피하지 않고 삶을 이루고 있는 세부적인 요소들을 감각적으로 심도 있게 관찰하여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고통과 좌절이 그치지 않는 인간의 현실이 전체적인 삶을 구성하는 필수불가결한 요소임을 깨달았다. Keats는 아름다움을 감각적이고 구체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인간에게 감각적인 기쁨은 전달하며 삶을 아름다운 것으로 승화시키려 하였다.Shelley는 현실에서의 삶을 무시하고 이상을 추구하려 하였다. 그의 이상주의는 To a Skylark 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이 시에는 현실의 삶을 초월한 절대 를 향한 갈망이 나타난다. 현실은 끊임없이 양면성이 얽혀있는 paradox의 세계로 완전한 기쁨이 부재되고 기쁨 가운데 슬픔이 도사리고 있으며, 달콤한 노래도 가장 슬픈 기억을 떨쳐버릴 수 없는 세계이다. 그러므로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은 이러한 무상과 paradox의 세계에서 영원과 절대를 그려본다. 불완전한 상황에 묶여있는 채로 실현불가능한 이상을 열망하는 인간은 이중의 절망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현실의 상황을 인식하며 동시에 이상을 갈망하는 시인은 제한된 현실에서 이루지 못할 이상을 끊임없이 갈망하는 모순을 연출한다. 종달새의 노래가 표현하는 기쁨은 현실의 양면성, paradox를 동반하지 않는 절대적인 기쁨이다.
    인문/어학| 2001.12.15| 4페이지| 1,000원| 조회(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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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사학] 일본의 봉건제 평가A좋아요
    제 1 장 봉건제란 무엇인가?....봉건제(feudalism) 라고 하는 용어의 기원은 비교적 근대의 것이다. 이 봉건제도라는 용어는 우리가 봉건제의 관념이 존재한 중세를 되돌아보기 시작할 때 비로소 생겨났다. 이 용어는 근본적으로 어떠한 토지소유의 법칙이나 관습적 습관, 그리고 중세시대에서 그들 자신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잔존해 있으면서도 당시의 지배적 정치사상과 관습에 대해서는 기묘한 차이를 지닌 정치제도를 묘사할 때 사용했던 17세기 법률가들과 골동품 연구가들의 창조물이라 할 수 있다.18세기에 들어서면서 이 용어는 기술적 측면보다는 감정적인 의미를 함축하게 되었다. 봉건적(feudal) 이라고 묘사되는 많은 제도와 법률들은 귀족의 특권을 보호했고, 또 그들로 하여금 대다수 농민들에 대해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도록 인정하였다. 프랑스혁명의 시기에 이르러 봉건제도 는 구시대의 나쁜 관행의 상징이 되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부정적인 의미로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역사들이 봉건제도 라는 용어를 이러한 의미로 사용하지는 않는다. 봉건제도 라는 용어를 사용하려 한다면, 먼저 무엇을 나타내기 위해 그 용어를 사용하는가 하는 용어의 의미에 대해 정의해야만 한다. 그 개념이 제공할 수 있는 하나의 중요한 목적은 비교정치사의 연구에 있다. 비교 정치사 연구에 있어서 봉건제의 개념을 사용하려고 하더라도, 실증적 근거 없이 그 용어를 정의할 수는 없다. 어느 정도의 확고한 자료로부터 모델을 세우거나 용어의 정의작업을 해야만 한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은 봉건유럽의 제도들을 조사하는 것이다. 이것이 봉건제에 관해 가장 잘 알려졌으면서도 가장 최초로 연구된 사례이며 바로 이 구체적인 방법이 봉건제라고 하는 용어를 낳았다. 또한 봉건제에 관한 대부분의 정의들도 결국 여기에서 유래되었다.10세기에서 13세기 사이의 유럽에 있어서 봉건적 정치조직의 특성들은 무엇인가?첫째로 봉건유럽은 강력한 국가체제가 결여되어 있었던 점을 들 수 있다. 분명 중앙집권적 권위의 오랜 전거주했던 강력한 무사집단이 전쟁들을 통해 다른 지역의 부족들을 복속시켰고, 그 결과 복속된 지역의 수장들을 야마토 부족장의 지배권을 인정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6세기에 이르러 바로 이 지배자를 오기미(大王)이라 불렀다. 야마토 통치자의 패권이 무력에 의해 얻어진 것이지만, 6세기에 이르러 그의 지위는 보다 평화적인 방법들로 지탱되었다. 그 시기에 야마토 통치자는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었으며, 통치가문에 속한 인민과 토지를 제외하면, 그의 권위는 다른 무사계급의 족장들에게만 영향력이 있었고 그들의 지배하에 있는 인민과 토지에까지는 힘이 직접 미치지 못했다. 즉 6세기의 일본인들은 아직도 주권국가(sovereign state)의 개념을 인식하지는 못한 것이었다.7세기 초에 접어들면서 일본인은 중국인의 정치사상과 행정제도 및 정부체제 등을 대량으로 수입하고자 노력함으로써 야마토 통치자의 지배권은 강화되었다. 쇼오쿠 태자의 제한된 개혁들을 시작으로 하여 8세기 초에 광범위한 중국식 법전들이 반포되기까지 약 백년 동안에 걸쳐 야마토 궁정의 개혁가들은 국가의 전체 정치구조를 새롭게 개조하였다. 이들은 절대적 군주의 권위라고 하는 중국식 개념을 빌려, 군주가 국가내의 유일한 주권의 중심으로 규정되게 되었다. 군주 혹은 천황(텐노)은 모든 백성과 토지의 지배자 로 간주되었고, 모든 백성들은 오직 그에게만 충성했다. 천황은 자신이 모든 관리를 임명했으며, 또한 그에게 충성과 봉사를 바치는 현명하고 유능한 행정관리들의 도움으로 통치했다. 군주의 새로운 권력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개혁가들은 중국 당왕조의 율령을 모델로한 성문법의 개념을 재빨리 받아들였다. 중앙관료는 군주권력의 가시적 상징체로 영구히 고정된 수도에서 거주했다. 최초의 수도가 세워졌던 곳은 나라였고 794년에는 헤이안으로 옮겼는데, 이 곳은 후에 교토라 알려진 것으로 19세기까지 이곳에 수도가 위치했다. 천황, 수도, 그리고 중앙관료를 유지하는 데에는 많은 비용이 필요했다. 따라서 새로운 국가의 재정수입을 보장하는 토 무사들도 자신의 토지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지방정부의 영향력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종종 지방 정부기구에 밀접하게 관련되었고, 지방의 요직들은 무사들의 세습적 전통으로 되어갔다. 무사들은 스스로 무사단을 조직하거나 아니면 하나의 파벌을 형성했다. 무사단에는 다른 비인척 구성원들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보통 무사가문의 거주구역에 살던 종자들이나 가신들이었다. 결국 당시의 무사단은 씨족집단과는 달리 친족인과 비 혈연적 구성원들을 함께 포함하고 있었다. 추종자의 충실한 봉사는 물질적 보상으로 보답되었다. 무사단의 지도자는 자기 가문의 가신단을 부양해야 했으며, 전쟁이 끝난 후에는 그의 추종자들에게 전리품이나 적으로부터 빼앗은 토지를 분배해 주었다. 무사들은 자신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으려 하였고, 자신들의 가문에 대해 커다란 자부심을 지녔다.10세기 말에서 11세기 초에 이르러 대규모의 군사적 위기가 번번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935년 타이라 마사카도와 후지와라 스미토모의 반란을 시작으로 지방의 일부 유력한 무사족장들이 천황정부의 군사적 약화를 이용하여 황실의 권위를 부정하고 지방에 파견된 대리자들의 권력에 도전했다. 천황정부는 무사족장들이 일으키는 군사적 봉기를 분쇄하기 위해 지방부사단으로 구성된 군대를 동원할 수 있는 또 다른 무사지도자들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비록 대부분의 무사들이 위기가 발생한 기간 동안에만 지역적 동맹에 가담했고, 또 그 위기가 가라앉은 이후에는 각자의 길을 갔지만, 이러한 동맹들이 때때로 보다 항구적인 결합의 기초가 되기도 하였다. 조정이 장원의 소유나 관직의 획득을 위해 서로 다투는 많은 귀족파벌들로 나뉘어짐에 따라, 어떤 지방의 무사가문들이 중앙정치에 직접 참여하게 되었다. 특히 중요한 가문들로서는 미나모토가문의 지류인 세이와겐가문과 타이라 가문의 지류인 이세 타이라 가문 일족이었다. 12세기 후반기에 이르러 미나모토가문과 타이라가문의 족장들 및 조정귀족들 그리고 천황정부 사이의 세력균형은 심각한 변화를 맞이하기 시작했다. 최후 모든 소송들이 법정 내에서 공평하게 처리되도록 하는데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기 때문에, 카마쿠라정분는 14세기 초에 이르러 바쿠후가 해체될 때까지 공정한 분쟁의 해결책을 제공했다. 이렇듯 무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법률에 의거해 토지에 관련한 분쟁들을 해결해 나가는 바쿠후당국의 능력은 그것이 실행된 기간만큼 오랫동안 바쿠후체제를 존속할 수 있게 만들었던 것이다.제 4 장 무사통치에서 봉건적 무질서로......1300년에 이르러 무사계급이 각 지방을 지배하게 되었고, 주종제가 상당히 일반화되었으며 사회의 최고수준에 있는 무사지배자들은 그들의 추종자들에게 충성스런 봉사에 대한 보상으로서 토지나 관직을 인정했다. 그러나 공권력의 행사가 지방 봉건영주들의 손으로 완전히 이전된 것은 결코 아니었었다. 중앙집권적 권위의 마지막 자취들이 지방의 무사계급에 의해 소멸되기까지는 거의 2세기가 걸렸다. 1500년에 이르러서야 일본에서의 봉건정부는 4세기 정도 이전에 유럽이 도달했던 것과 똑같은 발전의 단계를 맞이했다.바쿠후 권력의 쇠퇴는 완전한 형태의 정치적 봉건제가 시작되는 과정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카마쿠라체제가 붕괴된 것은 지도력의 결여에 그 원인이 있었다.1300년대 초에 이르러 부패가 점차 바쿠후를 침식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호죠가문이 불안한 무사계급에게 확고한 지도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주종제에 의한 통치 구조가 붕괴됨에 있어서 더욱 중요한 요인은 주종제의 결합 그 자체 내에서 발생한 부패였을 것이다. 몇 세대를 지나면서 고케닌과 카마쿠라 주군 사이의 결합은 점점 더 개인적 요소가 약화되었고, 더욱더 형식적인 것으로 되었다. 그들은 점차적으로 바쿠후의 이익에 앞서 자신들의 이익을 우선으로 여기는 경향이 생겨났다.카마쿠라체제의 쇠퇴는 1274년과 1281년에 있었던 몽고족에 의한 두 차례의 침략 후에 더욱 가속화되었다. 바쿠후는 군사력을 모집해 두 차례의 침략을 막을 수 있었으나 결국 그 승리는 많은 무사들, 특히 바쿠후의 지배력이통해서 하나로 결합되었고, 또 가신들의 군대에 의존해서 이웃들의 침략으로부터 보호되었다. 사실상 다이묘의 영지는 하나의 작은 군국(軍國:garrison state)이었다. 다이묘의 수는 결코 고정된 것이 아니었고, 그들의 영지 규모또한 그러했다. 각 영지의 경계는 전쟁의 승패에 좌우되어 변화했는데, 때로는 다이묘가 갑작스레 성장하거나 몰락하기도 했다. 무사계급 사이의 유동성도 상당했다.주종제의 결합은 보통 다이묘로부터 봉토 혹은 봉급의 수여로써 강화되었다. 가신들에 대한 보상방법은 토지 그 자체를 부여하는 치교(知行)의 개념으로 변화되었다. 봉토의 수여에 대한 댓가로서, 가신은 다이묘에게 보통 자기가 받은 봉토의 크기에 비례하는 군사적 봉사를 수행해야 할 의무를 지녔다. 봉토가 군사적 봉사를 조건으로 주어졌기 때문에, 주종제의 결합이 이전보다도 훨씬 더 계약적이었고, 훨씬 덜 일방적이었다. 다이묘에 대한 군사적 봉사를 거부한 가신들이나 약간이라도 불충의 표시를 나타낸 가신들은 모두 벌칙을 받았고, 마찬가지로 다이묘도 가신들을 보호하는데 실패한 경우에는 배반의 위험에 처해졌다.16세기 초기에 이르러 많은 다이묘들이 백성들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또는 자신의 부를 보다 효과적으로 획득하기 위해 행정체제를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15세기 말엽에 이르러 장원영지법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많은 다이묘 가문들은 세대를 거치는 동안 가법(家法) 을 만들었다. 가법의 조항들은 바쿠후 법률에서 발췌했을 뿐만 아니라, 조상 대대로 전해온 가문의 훈령들이나 정통성을 지닌 지방의 관행들, 그리고 그 지역의 특성에 따라 요구되는 행정상의 규정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다이묘의 영지는 하나의 강력한 경제단위가 되었다. 군사적 행동에 늘 대비해야만 했던 다이묘들은 군사상의 재정적 부담을 덜기 위해 자기 영지내에서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부유계층을 가능한한 통제하고 착취하는데 열심이었다. 다이묘들은 자신들의 영지에 대한 경계를 전쟁을 통해서 확립했기 때문에, 자신들의 토지로부터 세금을
    인문/어학| 2001.12.15| 12페이지| 1,000원| 조회(6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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