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일 동맹에 편승한 일본의 부상. 중화민족주의를 자극하다.걸프전에서 일본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역할’은 미국 입장에서도 미일 동맹관계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요구했다. 일본과의 동맹관계를 ‘군사적 파트너쉽’의 단계로까지 발전시켜야 한다는 판단에 이른 것이다. 탈냉전기의 변화된 국제환경에서 새로운 국가전략을 모색하고 있던 일본은 ‘보통국가론’이라는 논리로 이에 호응했다. 그 결과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군사적 역할은 지속적으로 확대되어 왔다.1990년대 초부터 시작된 일본 자위대의 해외파병과 1996년 미일 신안보공동선언, 1997년 신가이드라인, 1999년 주변사태법은 같은 연장선상에 있다.부시 행정부 출범이후 이와 같은 흐름은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부시행정부는 1기 때부터 중국을 ‘잠재적 경쟁자(potential competitor)로 상정하고 북한을 ‘악의 축(axis of evil)으로 지명하면서, 미-일-한으로 이어지는 ‘동맹축’을 재편, 강화하고 있다. 이에 부응하여 일본은 부시 행정부가 9.11 테러 이후 벌인 두번의 전쟁에 자위대를 ‘파병’했다. 을 통해 이지스함을 포함한 자위대를 아프카니스탄 ‘보복공격’에 파견했으며, 2003년에는 에 따라 전투지역인 이라크에 자위대를 파병하기에 이르렀다.특히, ‘럼스펠드 구상’으로 불리는 미군의 ‘군 변형(military transformation)은, 테러 등 새롭고 예측하기 어려운 안보위협들에 대응한 전쟁을 원활하게 수행하기위해 기동성, 유연성을 확보하는 것이지만,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는 대중국 봉쇄 및 견제의 일환으로 미군의 전력구조와 임무를 재편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미 미국과 일본 사이에서는 주일 미군 재편을 위한 2+2각료급회담(외무. 국방장관회담)이 시작되었다. 올해 2월에 개최되었던 미일2+2각료급 회담에서는 미일동맹의 협력 범위에 대만을 포함시켜 중국을 크게 자극한 바 있다. 미국은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자국 이익의 최대 위협으로 상정하고 있는 중국을 ‘사전에 좌절시키기 위한’견제, 압박 전략을 가속하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일본은 그 전략의 핵심적 파트너 역할을 하고 있다.부상하는 중일갈등과 동북아.동아시아의 주변국들이 일본의 변화에 우려를 하는 것은 미일동맹 강화에 편승한 일본 안보정책의 ‘공세적’ 변화가 평화헌정법 개정. 교육기본법 추진. 역사교과서 왜곡등과 같은 정치사회적 보수화와 과거회귀적 성향과 맞물리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매년 세계 2-3위권에 해당하는 막대한 군비를 지출하며, 최첨단의 군사력을 보유한 국가가 해외에서의 군사활동을 확대하고, 그것이 정치사회적 보수와 공존하고 있다면 주변국이 그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도 당연하다.중국의 경우는, 자국을 견제하는 것이 미일동맹 군사화의 직접적인 이유이며 지역의 주도권을 두고 일본과 미묘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그동안 잠재되어 있던 중일간 갈등의 균열선이 동북아 정세의 전면에 등장하게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중일 양국이 서로에 대한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어제. 오늘의 일만은 아니다. 1970년대 개혁개방으로 노선전환을 한 이후 급성장하고 잇는 중국의 경제력과 그에 기반한 군사력의 증간은 일본의 ‘중국경계론’의 초점이다. 2004년 ‘방위백서’와 1995년 신방위계획대강을 개정한 2004년판 ‘신방위계획대강’은 중국이 핵과 미사일 전력, 해군 및 공군력의 현대화를 추진하는 것에 대한 경계심을 명시하고 있다.또한, 미국과 일본은 미사일 방어망(MD)구축 사업을 통해 첨단무기시스템의 공동연구에 임해왔으며, 올해부터는 본격적인 개발단계에 들어섰다. 동북아시아MD는 오견상으로는 북한의 미사일에 대한 방어를 목적으로 한다고 말해진다. 최근 일본 의회를 통과한 미사일 발사 절차 간소화 조치도 북한의 미사일 위협에 대한 대처가 명분이었다. 그러나 그 밑바탕에중국에 대한 견제 의도가 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한편, 중국의 언론들은 일본 당국이 ‘중국 군사 위협론’을 제기하는 것은 미일의 군사적 일체화와 해외에서의 군사활동에 대한 국내외 여론을 무마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작년 11월 9일 일본의 언론들을 통해 보도된 중국의 일본 침략 가상시나리오를 둘러싼 논쟁. 중국 잠수함의 일본 영해 침입을 둘러싼 양국간 신경전은 중일관계의 현주소를 잘 보여 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은 1960년대부터 댜오위다오(센카쿠 열도)의 영유권을 둘러싸고 분쟁을 벌이고 있다. 최근에는 동중국해 가스전 개발 문제로 일본과 영유권 및 자원 분쟁을 벌이고 있다. 이두 해역의 경우 중국과 일본이 간접적인 군사대치 상황을 연출하기도 했었다. 일본은 댜오위다오 인근 도서에 자위대를 전진 배치했고, 중국은 동중국해 가스전 개발권을 일본정부가 자국기업에 넘기자 해군함정을 파견하기도 했었다.특히, 중국은 양안 유사시 일본이 미국과 함께 공동의 군사적 행동에 나서는 것에 대해 가장 우려하고 있다. 올해 2월 미일 2+2협의에서 미일동맹의 협력범위에 대만이 포함되었을 때 중국의 지도부와 국민들이 강하게 반발했던 것은 이런 이유이다. 앞서 언급한 199년에 성립된 ‘주변사태법’도 대만을 일보ㄴ의 주변사태에 포함시키고 있다. 일본이 미국과의 동맹 강화를 추진하면서 그 협력 대상에 대만을 포함시킨 것은 중국의 가장 민감한 부분들을 한꺼번에 자극한 셈이다. 이것이 올해 3.4월 극렬한 반일시위를 촉발한 중요한 이유이기도 했다.일본의 군사대국화와 중화민족주의의 충돌미일동맹 강화에 편승한 일본의 부상과 그에 대한 경계심이 중국의 대중적 민족주의와 만난다면, 중일 갈등은 심각한 국면에 접어들 수도 있다.올해 3월과 4월의 반일시위는 우려가 현실이 될 수 있다는 예이다.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2003년과 2004년 연이어 발생한 일본인들의 매춘관광 사건등에 의해 고조되어 있던 대중적인 반일감정이 교과서 왜곡과 일본의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 강행, 댜오위다오를 둘러싼 영토 분쟁, 대만 문제등과 만나 폭발한 것이었다.일본 언론등에서는 중국정부의 부추김이 있었다는 억측도 있었지만, 이는 중국의 대중적 민족주의의 확산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결론이다.최근 중국의 민족주의는 정부가 조장하고 활용하는 측면이 있지만, 그 폭발력이 때때로 정부의 통제선을 넘곤 한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인화성 강한 대중 민족주의가 반일감정으로 폭발했을때의 상황은 예측 불가능하다는 것이다.그러나, 아직까지 중국이 ‘중화민족주의’를 기반으로 삼아 노골적으로 지역의 패권을 추구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지는 않다. 현재 중국은 미국과 일본이 자국을 상대로 동맹을 군사화하는 것에 직접 대응하지 않고 내부의 안정과 통합을 우선적 과제로 설정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와 2010년 상하이 박람회의 성공을 최대의 과제로 삼고 있다. 경제적 성과를 통해 국내적 안정을 유지하고, 대외적 위상을 확보하겠다는 것이 국가전략인 것이다. 또한, 다자외교를 통해 ‘반패권 전선’ 구축에 나서고 있기도 하다. 지난 7월1일 있었던 후진타오 중국 국가 주석과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정상회담, 그리고 8월 16일부터 26일까지 실시된 중러 공동 군사훈련은 미국과 일본의 군사동맹 강화에 대해 직접적 대결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미국의 일방적 패권주의에 대한 견제 움직임의 일환이라고 불 수 있을 것이다.한반도를 동북아 평화의 발신지로이상과 같이, 불안정성의 다양한 요인이 공존하고 있는 동북아의 상황은 한반도의 입장에서는 기회이자 도전이다. 과거의 질서는 동요하고 있지만 새로운 질서는 아직 자리 잡지 못한 ‘전환기’에 행위자의 선택은 결정적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특히, 중미. 중일 갈등의 한복판에 놓여 있는 한반도는 생존을 위한 선택을 요구 받고 있는 상황이기도 하다. 동북아 최대의 안보 이슈로 부상하고 있는 북한 핵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고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켜감에 있어 동북아 불확실성의 증가는 커다란 장애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그러나, 한국 정부가 제시하고 있는 ‘협력적 자주국방’과 ‘동북아균형자론’, 그리고 북한이 주창하고 있는 ‘강성대국’은 한반도의 비전이 될 수 없다. 그것은 미일이 주도하는 냉전적 동맹의 정치와 동북아 민족주의간 충돌이라는 ‘블랙홀’에 그대로 흡수되어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군사력에 기반한 안보라는 구래의 관념은 새로운 군비경쟁을 초래할 뿐이다.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강대국 중심의 정치질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그러면서도 민족적 경계선을 넘어설 수 있는 평화와 공존의 청사진을 제시하는 ‘평화의 발신지로서의 한반도’라는 비전이다.
I.드골의 생애De Gaulle. Cgarles Andre Joseph Marie 1890 ∼ 1970 프랑스의 군인, 정치가. 북프랑스의 릴에서 독실한 카톨릭 가정의 아들로 태어났다. 1912년에 생시르 육군 사관 학교를 졸업하고 페탱 원수의 부하가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때 부상하여 포로가 되었다가 1920년 귀국하였다. 그 해 폴란드군과 싸워 공을 세우고, 생시르 육군 대학 교관이 되어 군사 이론과 군 지도자론을 담당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기갑 사단장으로 있다가 국방차관으로 임명되었다. 44년의 파리 해방 뒤 임시 정부 부석, 45년에는 수상 겸 국방상을 거쳐, 47년에는 반공단체인 프랑스 국민 연합을 조직하였다. 51년 제1단으로 성장하였으나 53년에는 당을 해체하고 정계에서 은퇴함으로써 그의 시대는 끝난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58년 알제리에서 쿠테타가 일어나고 제4공화국이 무너지려 하지 그는 다시 정계에 나타나, 같은 해 6월 수상이 되었다. 같은 해 10월을 기해 제5 공화국이 수립되고, 59년 1월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62년에 알제리 독립을 인정하는 에비앙 협정을 국민 투표에 부쳐 가결시킴으로써, 약 7년에 걸친 알제리 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였다. 그는 외교 정책에서는 프랑스의 위대함을 지키기 위하여 반미 정책을 쓰고, 64년 중공을 승인하였으며, 핵무기의 개발과, 유럽 경제 공동체의 추진과 영국의 가맹의 거부, 금본위 제도의 부활 주장, NATO 군사 기구로부터의 탈퇴(1966) , 미국의 월남 정책 반대 등, 미. 소 간의 틈바귀에서 독자적인 외교 노선을 전개하였다. 68년의 이른바 5월 혁명으로 말미암아 드골 집권 체제가 근본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하고, 69년에 실시한 국민 투표에서 패하여 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저서에는 54∼59년에 걸쳐 쓴 제2차 세계대전 중의 『회상록』이 있으며, 정계에서 은퇴한 후에는 『자서전』을 집필하였다.Ⅱ. 드골리즘과 외교정책1. 드골의 역사인식드골의 역사인식의 특징은 대략 6가지를 들 수 있다믿을 수 없는 연합국의 일원으로 취급했던 루스벨트는 북아프리카 공격에서 드골의 참여를 배제시켰고 이는 결정적으로 양자 사이의 긴장을 초래하였다. 루스벨트의 평화전략은 미국 자신이 평화의 구조를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며 동시에 일단 패배한 국가들은 미국의 전략적 구조에 복종해야 하며, 그래서 프랑스가 미국을 구원자 및 중재자로서 인정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항하여 드골은 영·미의 전략적 계획을 거절하였다.그러나 루스벨트는 영·미 군대가 프랑스의 저항운동으로부터 도움을 받지 못하여 남부 프랑스 공격에서 프랑스 군대를 사용하지 못할 것을 매우 두려워했기에 드골에 대하여 유화적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드골은 전쟁을 수행하면서도 프랑스의 영광과 위대성에 집착하였고, 특히 자유프랑스의 위치를 손상시키지 않으려 했던 골리즘을 전시외교에서도 견지하였다.1958년과 1959년 사이의 8개월은 전후 유럽을 재건하고 프랑스의 독립외교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프랑스와 미국간의 관계를 재정립하는데 매우 중요한 시기로, 드골의 기본입장은 프랑스가 "미·영·프"로 구성되는 삼두지도체제에 가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프랑스가 세계문제에 대한 공동정책을 수립하는 데 참여해야 하고, 핵무기를 배치하는데도 참여해야 한다는 입장인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드골의 독자적인 핵개발정책을 포기시키려 하면서도 소련에 맞서 프랑스 영토에 중거리탄도미사일을 배치해야 했기에 드골에 정면 반대할 수 없었다. 한편 드골은 프랑스 영토에 배치한 핵무기의 통제와 사용에 대한 결정권을 프랑스가 보유하는 경우에만 배치가 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하였다.케네디 역시 나토를 위시한 동맹문제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특권 있는 목소리를 가져야 한다는 드골의 열망을 반대하며 드골의 독립외교정책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한편 드골은 케네디가 중대하게 다루었던 냉전 자체를 무시하고 있었는데 이는 냉전이 자신의 독립외교와 기동할 수 있는 능력 자체를 약화시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드골은 소련이 언젠가는 공산주의 관들의 주기적인 회합을 위한 정치적 기구를 만들어서 회원국가들의 유럽정치를 조정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발효할 경우 3년 후에는 통일적인 외교정책을 수립하고, 점진적으로 연합 속에서 기존의 유럽공동체를 이에 집중시키는 기구를 구성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유럽경제 공동체의 회원국들, 특히 네덜란드와 벨기에가 이에 저항하였다. 푸세는 이 안을 약간 수정하여 제2차, 제3차 안을 제출하였으나 회원국들의 반대, 특히 은폐된 초국가성이라고 공격한 네덜란드의 반대에 부딪혀 좌절하였다. 이런 푸세안의 초국가성은 원래 드골의 사상과는 반명제를 가지고 있었으나 유럽의 현실을 그대로 인식한 드골의 〔상황의 정치와 기회의 정치〕의 일면으로 나타나게 되었다.드골은 유럽을 재건하는데 있어서 비유럽적인 실체가 들어가는 것을 기본적으로 반대하였다. 유럽이 대서양 세력과 그 영향권에 편입한다면 유럽적인 실체를 상실할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유럽은 그 자신의 생활방식을 보유해야 하며, 그래서 강력한 유럽 전체의 목소리를 반영시키고, 과거에 담당했던 주체적 역할을 다시 담당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그리하여 그는 지금까지 미국의 지배에 종속되어 왔고, 다른 한편으로 소련의 영향에 노출된 유럽국가를 재결합하는 데에 있어서 전통적인 국가들과의 협조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 같은 협조 속에서 그는 초국가주의를 배제하는 동시에 유럽의 정통성을 되살릴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그의 외교정책 역시 이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으며 이러한 외교정책만이 궁극적으로 프랑스에 독립, 안정 그리고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믿었다.드골은 유럽연합에 독일을 가두어 두려고 노력했다. 그는 모두를 위해서 독일이 다시 침략을 할 수 없도록 약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유럽재건에 있어서 독일을 문제해결의 열쇠로 인식하고 독일에 대해 화해와 억압을 동시에 사용하였다. 그는 양국의 협력을 위해서 서로간에 화해의 무드를 성립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보았지만, 한편으영토에 적절한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프랑스연합〕이란 현상을 유지할 것이냐 아니면 해체하느냐"였다. 집권 초에는 아프리카 영토를 가능한 지켜보려고 노력을 기울였으나, 1960년대 초에 이르러 아프리카 구 식민지들이 스스로 발전과 전진을 추구하려 하는 민족정신을 갖기 시작하면서 프랑스 자신의 발전을 위해 대 아프리카 부담을 줄이려는 현실주의적 방향으로 전환하였다.인도차이나는 베트남, 라오스, 캄프치아 3개국을 포함하는 지역으로서 옛 프랑스의 식민지를 지칭하는 이름이다. 프랑스는 중국과 근접한 위치에 있는 베트남을 식민지화하는데 주력하여 100여 년 간 식민지로서 통치하였다. 프랑스는 대 인도차이나의 정책에서 프랑스의 범위 내에서 막연한 자치정부를 갖춘 〔자주적 연방〕을 제시하는 등 프랑스의 영역 안에 그들을 두려하였다. 그러나 인도차이나의 해방의 움직임과 물결이 이는 가운데 1954년 5월 디엔비엔푸에서의 전쟁에서 프랑스가 대패하고 난 후 인도차이나 문제에 대해서도 새로운 정책이 대입되기 시작하였는데 곧 초기 정책과 전략에서 보다 유연한 정책과 전략으로 바꾸어지기 시작했다.제3세계는 2차 대전 이후 주로 아시아·아프리카 및 중남미에서 오랜 식민지통치로부터 독립을 쟁취, 해방된 신생국가들로 결성된 세계를 의미한다. 드골이 제3세계가 골리즘이 극명하게 반영될 수 있는 지역이라는 의미에서 특별한 관심을 가졌던 것은 사실이다. 그는 제3세계의 저발전을 심각하게 생각하여 재집권 후 이에 대한 근본적 문제를 제기하였고, 이 지역에 대한 경제 원조를 실시하였다. 그는 단순한 경제원조에서 경제협력으로 방향을 전환하였는데 이것은 상호발전을 유도하기 위한 것으로 이러한 경제원조정책을 실시함으로써 이들 국가와 친선·유대 관계를 공고히 할 수 있었다. 이제 북아프리카 제3세계를 하나의 조직화된 전체로서가 아니라 경제협력의 파트너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이렇게 하여 모범적인 경제협력을 하게 된다면 이 지역에 번영과 안정을 가져와서 궁극적으로 프랑스의 영향권이 다시 설립될 것을 기대한 것 즘을 추구하려는 이상주의적 정책은 전후 국제환경의 변화와 구식민지의 자각으로 인하여 그 한계에 부딪혔다.그러나 변화와 적응을 동시에 추구하는 현실주의적 정책 -비동맹외교정책- 은 성공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구식민지들을 계속 프랑스제국의 속박에서서 풀어줌으로써 프랑스가 국제문제에 참여하고 개입의 폭을 확대함으로써 새로운 국가이익을 창출할 수 있다는 현실적 발상으로 전환하였다. 이는프랑스가 구식민지들과 특별한 유대관계를 유지하는 동시에 더 많은 세계문제에 개입한다면 그 영광과 위대성을 찾을 수 있다는 현실적 접근을 의미한다.결국 프랑는 북아프리카와 인도차이나 반도를 잃어버렸지만 오히려 식민지들을 유지하는 데서 오는 국제적 비난을 스스로 회피할 수 있었고, 따라서 국제도덕을 가지고 유엔에서 5대 상임이사국의 일원으로서 역할을 능동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다.Ⅳ. 드골의 골리즘에 대한 평가대통령 사를 드골의 「강력한 유럽, 강력한 프랑스 건설」이라는 정치적 목표와 이를 실현하기 위한 여러 가지 정책들은 프랑스 정치사를 통하여 가장 다양한 해석과 추론을 낳았다. 우선 그의 초기 경력에 대한 평가를 내려보자면 드골은 명석하고 성실하며 열의에 찬 장교로서, 군대경력을 거치는 동안, 자신감과 용기 그리고 독창적인 사고를 갖춘 인물로 유명했다. 이러한 평가는 제1차 세계대전때 베르됭 전투에 참가한 그가 3번씩이나 부상을 입고 2년 8개월 동안 포로생활을 했으나 5회에 걸쳐 탈출을 시도하고, 프랑스 육군 수훈보고서에 그의 이름이 세차례나 언급되었다는 사실이 뒷받침해준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을 때 드골은 기갑여단을 지휘하였는데, 자신의 이론을 2차례의 전차전에 적용시켜 당시 정력적이며 대담하고 뛰어난 지휘관이라는 평을 얻었다.좌파 정치인들이 꺼리는 카톨릭 교도인 군인출신이면서, 국민적 영웅인 페탱 장군을 배신한 반역자 정도로 취급되던 드골은 자신의 지도자적인 자질과 임무에 대한 절대적인 신념 하나로 조국에 헌신하고, 국익에 위배된다고 생각되면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투쟁하겠다.
--“문을 잠그고 나서는 순간. 아내의 빈 곳으로 그가 들어선다…”영화 ‘빈집’... 과연 김기덕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무엇을 말하려고 했을까? 이러한 질문에 적절한 대답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김기덕 감독이 기존의 10편의 영화를 내놓으면서 보여준 모습들을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이제껏 보여준 영화들에서 김감독의 스타일은 한마디로 항상 확연한 대립구조가 근간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김감독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이다. 김감독의 작품에는 ‘나와 틀리다는 이유’ 하나만 가지고 배타하려고 하는 우리 사회에 대한 강렬한 비판이 담겨져있다. 나와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통해 또 다른 세상을 보게 하는 힘, 그것이 김감독의 영화에서 찾아볼수 있는 가장 큰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러한 표현방식에 의해 적지않은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일상을 표현해내는 눈,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능을 거침없이 영상으로 담아내려고 하는 시도를 끊임없이 하고 있다는 김감독의 말처럼 분명 그는 이제껏 볼 수 있었던 다른 영화 감독과는 뭔가 다른게 있다고 볼 수 있다.해병대 하사와 거리의 미술가 출신이라는 특이한 이력의 비주류 감독, ‘파격적이다 못해 지독한 소재들’, ‘악몽 같은 현실의 판타지’, ‘저예산,최단기간 작업으로 유명한 감독’, ‘그의 영화에 쏟아지는 국내의 혹평과 해외의 감탄이 불러 일으키는 갖가지 추측과 의심들’ 이런 말들이 김기덕 감독을 설명할 때 공공연하게 쓰이는 말들이다. 너무나도 독특한 김기덕 감독의 영화세계로 인해 그 자신과 그의 작품 모두 늘 논란의 중심에 던져져 왔다.어떤 이는 그가 좀더 대중화되었다고 한다. 그거나 그말을 듣는 나로써는 조금은 거리감을 느낀다. 그들이 주목하는 또는 화두로 내세우는 것들은 배니스 영화제. 베를린 영화제라는 아주 맹목적적인 느낌의 홍보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관심은 자연히 그에게 감독상을 수상하게 한 ‘사마리아’와 ‘빈집’에만 쏠려 있다. 하지만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그가 받은 것은 감독상이라는 것이다. 영화제에 출품한 작품의 평가를 따져서 주는 작품상이 아니라 말 그대로 감독 그 자신이 이제껏 밟아오고 있는 그길에 대한 평가로써 주어지는 상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사마리아’이전의 작품들은 매장시켜버리고 ‘사마리아’와 ‘빈집’, 그 두편의 영화에만 관심을 둔다. 그렇게 말하며 이전까지 자신들이 받아들이지 못했던 그이 작품들은 없던 것처럼 만들어 버린다. 하지만 너무도 당연하게 김기덕 감독의 영화는 그가 비유한 한평 두평의 방처럼 결코 독립될 수 없는 연결되어 있는 방들이다.‘빈집;을 비롯한 그의 영화에서 가장 핵심적인 단어를 꼽으라면 편견으로 하고 싶다.그는 무수한 편견과 싸워 왔다. 서두에서 언급한 것 처럼 나와 틀리다는 이유만으로 배타하고 편견의 시선을 가지는 사회에 대한 강렬한 비판이 담겨 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것들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항상 우회적으로 또는 거칠게 다루고 있다. 이때 표현의 방법이 섹스와 폭력이 이용된다. 그것들은 그의 영화의 핵심 코드이며 그의 영화를 이루고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생각들을 드러내는 도구가 되어진다. 그의 영화는 섹스와 폭력이 없으면 이루어지지 않는다. 어떤 이는 섹스와 폭력이 대중 영화. 상업 영화의 기본적이고 핵심적 코드라고 했지만 김기덕 감독의 작품에서는 그것을 상업적으로 이용하지 않는다. 상업적 상술이 아닌 섹스와 폭력은 인간의 내재적인 본성, 혹은 근원적인 욕망이라 생각되어진다. 하지만 영화 속 폭력성을 드러내는 자들은 항상 일그러진 인물들이다. 우리 사회에서 소외받는 계층이 국한되어 있으며 우리는 영화 속에서 마저 그들을 소외시키려 한다. 그저 그들의 성질일 뿐이라고 명명하려 한다. 그리고 불쾌한 거부감을 유발시킬 정도의 잔인성을 폭발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에 관객은 어쩌면 더 그의 작품을 냉대하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항상 이러한 반응에 초연하다. 다음으로 그의 영화에서 섹스는 치유의 과정이다. 세상에게, 사람에게 상처받은 여성이 있다 그러한 여성을 바라보는 남성이 있다. 그 남성 또한 세상으로부터 사람으로부터 상처 받는 이다. 이 둘은 섹스를 통해 그러한 상처를 울분을 이겨낸다. 그들에게 있어서 섹스는 유일한 탈출구이다.이번 영화 ‘빈집’에서도 섹스와 폭력은 그의 영화를 진행시키는 핵심 모티브가 되고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김기덕식 멜로라며 생각하기에도 이상한 극찬을 쏟아내고 있다. 이 작품에는 분명 멜로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있지만 그것은 겉만 보고 내면은 보지 못한 것이다. 즉 김기덕 감독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이다.개인적으로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모두 보았고 그에 대한 나의 견해도 긍정적인 나로써는 이번 작품 또한 기존의 김기덕식 영화의 틀어서 벗어나지 않은 그만의 영화라고 생각한다.이 영화에서 매 맞는 여인 선화, 빈 집만 돌아다니며 기거하는 재희는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이 영화에서 부수적으로 사용되는 모티브는 가족 해체이다. 빈집을 돌아다니는 모든 곳은 전통적인 가부장 제도에서 벗어나 핵가족을 이루고 있고 심지어 독거노인도 등장한다. 비약일지도 모르나 핵가족이라는 구성은 어떠한 불안을 내포하고 있다고 그는 생각하는 모양이다. 가족 해체를 통해 상처받은 인물 재희와 선화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데 그들이 돌아다니는 빈 집 또한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빈집이라기 보다는 주인공 선화가 간직한 빈곳처럼 무언가가 결허되어 있는 공간인 것이다.빈 집안에서 기거하는 동안 재희는 집안에 있는 가족 사진 옆에 서서 사진을 촬영한다. 그들이 집에 잠시 기거함으로써 일시적인 가족의 구성원이 된 것을 사진으로 남기는 것이다. 물론 다음 집으로 넘어가면 그것은 사진 한장으로 남겨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고장난 것들-시계, 체중계, 오디오, 장난감 권총 등을 고쳐준다. 또한 더러운 빨래를 빨아주기도 한다. 그러나 집 주인이 돌아왔을 때 눈에 보이는 것은 그렇게 고쳐 놓은 물건들이나 깨끗해진 빨래가 아니다. 그저 빈집에 들어와 있는 타인일 뿐이다.우리는 때로 눈에 보이는 것만이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은 것들은 외면하고 진실이 아닐 것으로 생각한다. 김감독은 바로 이러한 편견을 언급하고 있는것이다. 유령 연습을 하는 재희를 돌발적 상황에서 사람들이 웃으면 웃을수록 결말부분에 가서 파장은 크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이 현실인지 환상인지 아무도 알 수 없다.감독의 메세지처럼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180도. 즉 동전의 앞 면을 보면 뒷면은 보지 못하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진실일지 모르는데도 말이다. 한 사람의 겉만 보고 내면은 보지 못하듯이. 빈 집에 들어간 침입자는 보이고 빨래를 해주고 물건을 고쳐주고 염까지 지내주는 재희란 인물은 모르듯이. 우리는 현상적인 것에만 묶여있다. 오로지 가시적인 것들의 가치가 평가받는 이 현실 세계에서 감독은 재희를 유령 연습을 시켜 질문을 던진다. 이 사랑의 이면은 보이냐고. 당신의 빈 곳, 그것을 채워주는 것은 남편의 돈, 그 돈으로 만들어진 으리으리한 저택, 이쁜 옷들, 그러한 것이 아니었다. 늘 말없이 그녀를 바라본 재희였다.감독은 말한다. 이 스토리 그대로 이해해도 좋고 재희가 만들어낸 선화라고 봐도 좋고선화가 만들어낸 재희라고 봐도 좋다. 그것은 자유다. 감독의 말 이 전에 너무도 친절하게 관객에게 방향을 제시해준 마지막 씬의 자막이 있다.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이 현실인지 환상인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왜 그렇게 가시적인 것, 비가시적인 것에 얽매여 살아가는 것일까. 그러한 편견은 어디서 시작되고 누구에 의해 지속되는 것인가. 그런 질문을 남기는 영화였다. 그러한 세상의 편견을 재희는 보이지 않는 골프채로 공격한다.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는 나지만 실제로 보이지 않는 골프채는 그의 마음과도 같다.‘빈집’…김기덕 감독의 매력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하는, 아주 좋은 영화였다고 말하고 싶다.
테러리즘과 지역안보Ⅰ. 서 론 / 273Ⅱ. 테러리즘의 정의 / 274Ⅲ. 테러리즘의 발생 원인 / 278Ⅳ. 현대 테러리즘의 양상 / 282Ⅴ. 현대 테러리즘이 지역안보에 미치는 영향 / 288테러리즘과 지역안보I. 서 론냉전의 종식에 따라 국가간 전면적 분쟁 가능성은 감소하였으나 정치적, 민족적, 종교적 동기에 의한 테러행위의 발생 가능성은 더욱 높아지고 있다. 테러행위의 수법으로는 전통적으로 중요인물의 암살, 납치, 주요시설물 파괴, 불특정다수에 의한 공격 등을 들 수 있으나, 과학 기술의 발전과 함께 그 수법 또한 다양하게 발전하고 있다.테러는 다른 범죄와 달리 기존 체제의 전복 또는 변혁을 목적으로 수행됨에 따라 국가안보를 직접적으로 위협하며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함에 따라 정치적, 사회적 불안을 야기하고 특히, 인간 안보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이 되고 있다. 또한 국가개입(state sponsorship) 테러의 경우 필연적으로 관련국간 분쟁을 야기하기도 한다.이러한 테러행위는 마약 및 소형무기 불법거래, 해적, 자금세탁, 위조, 사이버 범죄 등 초국가적인 위협(transnational threats)과 연계되어 종종 국경을 초월하여 발생하며, 지역 또는 국제안보를 위협하고 있다.9.11. 테러와 그 이후에 발생한 탄저균 테러에 이어 앞으로 핵 및 생화학무기 등 대량파괴무기를 이용한 테러 그리고 정보화시대에 있어서 사이버테러 가능성이 점증하고 있어 이에 대한 대비책을 강구하는 것이 중요하다. 테러리즘에 대응하는 방법은 크게 두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하나는 테러가 발생하기 전에 이를 예방하는 對테러(anti-terrorism)이고, 또하나는 테러발생이후 이를 응징하는 反테러(counter-terrorism)이다. 그러나 반테러가 대테러의 연장선에서 이루어지는 후속조치라는 차원에서 보면 테러를 예방하고 반격하는 일련의 행위를 대테러의 범주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HYPERLINK "http://blog.naver.com/post/postWrite.jreligious extremism)와도 연계되어 있다. 종교적 극단주의는 분리주의자 극단주의(separatist extremism)와 근본주의자 극단주의(fundamentalist extremism)로 나누어지며 이슬람 근본주의는 코란의 기본정신에 복귀하는 것을 의미한다. 근본주의자들은 현대 정치체제를 수용하기를 거부하고 코란을 잘못 해석하고 있다. HYPERLINK "http://blog.naver.com/post/postWrite.jsp?blogId=report04&categoryNo=27" l "FOOTNOTE5" t "_blank" 5)동아시아에서 테러발생은 여러 가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연계되어 있다. 경제호황을 누릴 시기에 인종적 또는 종교적인 소수집단은 개발 혜택 배분 과정에서 소외되었으며, 이러한 소외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집단들은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좌절감으로 결국 테러 행동을 하게 되었다. HYPERLINK "http://blog.naver.com/post/postWrite.jsp?blogId=report04&categoryNo=27" l "FOOTNOTE6" t "_blank" 6) 동아시아의 사회경제적 자유화는 이러한 소외 집단을 더욱 한계상황에 몰아 넣게 함으로써 반발감을 갖게 되었고 근대화 및 세계화의 혜택에서 완전히 소외되었다. 이로 인해 이들 소외집단은 세계화의 역작용으로 서구의 가치나 생활방식을 증오하게 되고 결국 절망감의 표현으로 폭력에 호소하게 되었다. 동아시아에서 테러리즘은 정치적 절망, 경제적 불평등, 사회적 고립이 해소되지 않는 한 앞으로도 상존할 것이다. HYPERLINK "http://blog.naver.com/post/postWrite.jsp?blogId=report04&categoryNo=27" l "FOOTNOTE7" t "_blank" 7)4. 테러리즘과 초국가적 범죄간의 상관관계테러리스트들은 활동을 위한 자금 마련을 위해 소형무기나 마약을 불법거래하고 국제적인 범죄조직이 이에 가담하고 있다. 또한,성을 증대시키고 아울러 경제ּ사회적 근대화는 전통사회의 기반을 붕괴시킴으로써 수구세력의 반발을 초래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특히, 그는 이슬람 문명의 공격성 성향을 감안할 경우, 향후 미국이 직면할 최대 위협은 이슬람 문명간의 대립이며, 이런 점에서 “서구의 적은 이슬람이 아닌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이라는 부시 대통령의 견해에 반대하고 이라크에 대한 군사 행동시 서구와 이슬람간의 대립이 보다 명확하게 될 것으로 전망하였다. HYPERLINK "http://blog.naver.com/post/postWrite.jsp?blogId=report04&categoryNo=27" l "FOOTNOTE15" t "_blank" 15)그러나 헌팅턴 교수의 문명충돌론을 부정하는 논거로는 하나의 문명은 다른 문명과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복합적이며, 근대화는 문명의 해체를 가속화시키고 있음을 들고 있다. 또한, 문명충돌론은 9ּ11 테러가 문명간 대립의 시작이 아닌 민주화와 근대화의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측면을 간과하고 있다. 즉, 탈레반 축출 및 파키스탄의 친서방 정책 전환, 對테러전 승리 등을 통한 서구적 민주주의의 확산 가능성을 배제하고 있다.3. 역사 종언론‘역사의 종말’(The End of History and the Last Man)의 저자인 후쿠야마(Francis Fukuyama) 교수는 냉전 종식으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최상의 질서가 도래함으로써 인류의 역사를 ‘인지의 투쟁’(the struggle for recognition)의 역사로 보는 헤겔식의 역사관은 종말을 맞이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민주주의는 동등한 인간간의 상호인지 확보를 위한 최상의 정치체제이며, 생산력 증대를 위해 각국은 시장경제 채택이 불가피하며, 시장경제는 민주화와 개인화로 연계되어 있다고 보고, 9ּ11 테러이후에도 아랍권내의 반근대화 경향이 근대화와 민주주의를 늦출 수 있으나, 중단시킬 수는 없다고 분석하고 있다.후쿠야마 교수는 9ּ11 테러가 근대화를 거부하는 과격 회교도에 의해 진. 또한 2002년 6월 26일부터 27일간 카나다에서 개최된 G-8 정상회의는 러시아내 해체될 핵시설들 로부터의 핵물질 유출위험이 높음을 감안하여 G-8 대테러 협력에 관한 선언을 채택하고 낡은 핵시설 해체 과정에서 발생될 수 있는 핵물질의 유출과 테러분자들로의 유입을 차단하기 위한 종합적인 대책을 마련하여 시행키로 하였다.핵테러의 유형으로는 핵무기 공격, 원자력 시설에 대한 공격, 방사능 물질 투하를 통한 재래식 공격 등 크게 세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중 특히 현실적 발생 가능성이 높은 유형은 소위 ‘더러운 폭탄’(dirty bomb)으로 불리는 방사능 물질 투하를 통한 공격이다. 즉 재래식 공격 무기에 방사능 물질을 장착하여 공격함으로써 순식간에 방사능 오염을 초래하는 것이다.핵테러의 가능성은 현재로서는 그다지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최근 미국 정보기관은 알 카에다의 조직원이 미국에 대해 ‘히로시마식 테러’를 계획하고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통화 내용을 감청한 적이 있다고 밝혔다. 게다가 미국의 9.11. 테러사태를 통하여 대규모 테러행위를 자행할 능력과 의지를 가진 테러조직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재확인된 만큼 국제사회는 핵테러 대응활동을 강화해 나가야만 할 것이다.이러한 핵테러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광범위한 국제적 협력이 이루어져야 한다. 핵테러의 피해대상은 이 지구상 어느 국가나 일부 시민으로 특정될 것이 아니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이유로 핵테러가 일어나 선의의 피해자가 될지 모르는 상황이다. 따라서 국가간에 긴밀한 협조체제를 구축하여 핵물질 밀거래 봉쇄를 위한 국경지역 통제를 엄격히 실시하는 한편, 국제적인 불법무기거래에 대한 정보 수집 및 단속활동이 강화되어야 한다. 아울러 알 카에다와 같은 핵테러를 자행할 가능성이 있는 테러조직을 분쇄하기 위한 국제적인 대테러 공조활동 강화가 필요하다. 이러한 협력에는 정치ּ외교ּ 경제ּ군사적인 노력과 함께 관계 기관간 국제적인 정보교환을 활성화 함으로써 테러조직의 하부 가중되고 있다. 테러조직의 근거지도 인도네시아, 필리핀, 태국 등 아시아‧태평양지역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테러분자들은 이제 일정한 정처가 없이 전지구상에 퍼져 각 조직간 연대를 꾀하며 무차별한 공격을 서슴지 않고 있다. 일정한 국경이 없는 이러한 테러와의 전쟁이 21세기의 새로운 전쟁으로 등장하면서 미국의 세계 전략과 대외정책도 수정을 가하게 되고 여타 미국의 우방국들도 기존의 안보정책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전세계에 걸친 테러리즘의 네트워크에 대항하기 위한 국제적 협력은 그 어느 때보다도 긴요하게 되었으며 미국을 중심으로 한 대테러 국제연대에 4대강국을 포함한 모든 국가가 참가 내지 지원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로써 탈냉전 이후 국제안보질서의 재편은 더욱 가속화되어 동북아 지역에서도 미‧일‧중‧러간에 여러 가지 기존의 갈등 요인이 상존함에도 불구하고 우호협력관계가 발전함으로써 전반적인 안정 구도를 유지하고 있다.2. 테러지원국 존재의 위험성오사마 빈 라덴의 알 카에다 조직이 전세계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전대미문의 테러 대참사를 촉발할 수 있었던 것은 이를 비호하고 지원하는 국가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아프가니스탄이 알 카에다의 활동근거지를 제공할 수 없었다면 기존에 중동지역을 중심으로 빈번히 발발하고 있는 저강도의 반이스라엘, 반미테러만이 가능했을 것이다.따라서 지구상에 탈레반 정권과 같은 전문적인 테러지원 세력이 존재한 사실은 오늘날 국제사회의 크나큰 불행이었다고 볼 수 있는 바, 앞으로는 이러한 국가나 체제가 지구상에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하는 일이 중요하며 또한 일부 실패한 국가들(failed states)이 테러 조직의 온상이 되는 여지를 제거해야 할 것이다. 현재 미 국무부가 발표한 테러지원국 리스트에는 이란, 이라크, 수단, 리비아, 시리아, 쿠바, 그리고 북한의 7개국이 올라가 있다. HYPERLINK "http://blog.naver.com/post/postWrite.jsp?blogId=report04&catego10일
서양음악의 발달사Ⅰ. 음악의 기원이 지구상에 등장한 인류의 조상들은 먹고 살아가기 위해 차츰 격심한 생존경쟁에 부딪치게 되었다. 그들은 식량확보를 비롯해서 무서운 맹수나 자연과의 싸움 등 온갖 시련과 도전에 시달렸다. 따라서 그와 같은 생존경쟁에 이기기 위해서는 자연히 여러가지 도구나 무기를 만들 필요가 생겼다. 그리고 그러한 도구나 무기를 이용해서 그들은 나무 열매를 따 모으거나 짐승들을 잡았으며, 잡은 짐승을 가축으로 기르는 방식이라든가 농작물을 재배하는 농경기술 등을 익히게 되었다.태초의 음악도 그와 마찬가지로 인간들이 살아가기 위한 일종의 수단이나 방법으로서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추측된다.Ⅱ. 고대의 음악인류문화는 기원전 4000년부터 2000년경에 걸쳐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다. 이러한 고대문명 속에서의 음악은 물론 그 시대가 남긴 피라미드나 문자처럼 형태로 남아있는 것은 없다. 그러나 당시의 벽화나 조각, 유품 등에서 우리는 그 당시 음악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1. 음악과 제사고대국가에서는 왕족(王族)의 제사와 음악이 상당히 깊은 연관을 갖고 있었다. 당시 제사는 정치의 기본으로서, 나라의 정치는 신의 말, 하늘의 말을 들어서 행할 수밖에 없었다. 즉 신의 계시를 받아서 정치를 행했던 것이다.그래서 음악은 그러한 신과 대화를 나누는, 불가사의한 힘을 가진 말로 사용되었다. 또 제사는 신과 말을 교환할때 필요한 종교의식으로서 왕이 주관해서 거행했다. 따라서 당시의 제사는 정사(政事)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제사에서 사용되는 음악은 기악합주와 그에 따른 무용 그리고 노래가 수반되는 것이 보통이었다.2. 음악에서 「미」와 「도덕」을 추구한 그리스인음악을 생활속에서 적극적으로 즐기게 된 것은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이다.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문명을 이어받은 그리스인은 대단히 뛰어난 민족으로서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사고방식(생각)」을 확실하게 내세운 최초의 민족이었다. 그리스는 기원전 1500년경부터 에게해로 진출하기 시작해서 기원전 1000년경에는 도 갔다. 이것이 종교개혁이다.루터는 라틴어로 쓰여진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해서 누구나 이것을 읽도록 했다. 또 교회에서 사용하는 음악의 역할에 관해서도 그때까지와 다른 생각을 내세웠다. 즉 그는 당시의 교회성가처럼, 교회의 수도승이나 수도사들만의 것이었던 음악을 민중에게 해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노래에 의해 신앙의 기분을 심화시키고, 교회중심이 아니라 개인중심의 종교로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이리하여 만들어진 것이 도이치 코랄이다. 이것은 누구나 노래할 수 있도록 민요의 선율을 집어넣어 만들었다. 후의 요한 세바스찬 바하도 이 루터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아 수많은 칸타타를 만들어냈다.① 팔레스트리나와 랏소종교개혁이 확산됨에 따라 카톨릭 교회에서도 그때까지의 방식에 대한 반성론이 일어났다. 교회음악에 관해서도 새로운 것이 요구되었다. 팔레스트리나는 그러한 시대의 요구에 부응해 내면적이고도 종교적인 정취가 깊은 음악을 만들었으며 생애의 대부분을 로마 교황청의 음악가로 보냈다.한편 오를란도 디 랏소는 네덜란드 악파 최후의 사람으로서 교회 음악만이 아니고 여러가지 세속곡에 손을 댔다. 랏소는 팔레스트리나와 같은 시대의 사람이지만 이 랏소음악에는 다음의 바로크 시대를 연상케 하는 새로움이 있었다.Ⅳ. 앙상블의 시대17세기말부터 18세기 중엽에 이르는 시대를 음악사에서는 바로크 시대라고 부른다. 바로크라는 말은 「비뚤어진 진주」라는 의미로 건축, 미술 양식을 지칭하고 있는데 같은 시대의 음악에도 이 바로크란 말을 쓰고 있다.이 시기는 음악이 크게 발전했던 시대로서 성악 중심이었던 음악에서 기악을 사용해서 앙상블을 즐기게 된 시대이기도 하다. 기악만이 아니고 성악과 악기의 앙상블인 오페라도 탄생, 그때까지 낡은 형식에 매어 있던 습성에서 벗어나서 자유롭고 생생한 연주가 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에는 여러가지 악기가 현저하게 발달해 있었다는 사실을 묵과할 수 없다.이 시대 예술의 일반적인 특색으로는 규모가 컸고 효과를 과장한 외에도 디자인이 화려했다는 점이다. 또 감 구성하고있다. 이것이「소나타 형식」이다. 이 형식에는 자유를추구하는 이 시대의 숨결이 가득차 있다. 따라서 「소나타 형식」이 현대에 있어서도 뛰어난 음악형식이 되고 있는 이유는 바로 그런 데 있는 것이다.2. 궁정은 소나타 형식을 키운 온상현재까지도 최고의 음악형식으로 지칭되고 있는 「소나타 형식」은 이 고전파 시대에 완성되었다. 그것을 완성한 것은 하이든이나 모짜르트 등 이 시대의 음악가들이다.그러나 그들이 일하고 있던 궁정이 음악을 필요로 하지않았다면 아무리 뛰어난 음악가라도 자신의 재능을 충분히 발휘하지는 못했을 것이다.그런 의미에서 궁정은 음악을 키운 온상이었다고 할 수있다. 베를린(독일)의 프리드리히 대왕은 본인이 플룻의명수로서 작곡도 했다. 또 빈(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사 여제(女帝)도 아름다운 소프라노 노래를 잘 불렀다고 한다.또 이시대는 계몽주의라고 해서 인간들이 지금까지의낡은 인습이나 형식에 구애되지 않고, 개인으로서의 자각에 눈떠 진리를 추구하려는 사고방식이 유행했었고, 왕후들도 앞장 서서 학문과 예술을 장려했었다. 음악도 예외는 아니었다.보다 뛰어난 음악을 - 그러한 요구가 각지의 궁정 안에있는 음악가들을 끊임없이 자극했으며 그에 따라 작곡공부나 오케스트라의 기술등이 보다 중요해졌다.당시 음악의 온상지였던 대표적인 궁정으로는 산스시궁,만하임궁, 그리고 에스테르하지궁을 들 수 있는데 산스시궁은 베를린의 프리드리히 대왕이 가까운 포츠담시에다베르사이유 궁전을 모방해서 만든 궁전이다. 설계는 모두 왕 자신이 손수 한 것이라고 하는데 독일의 로코코 건축의 가장 뛰어난 건축물이다. 여기에는 요한 세바스찬바하의 아들로서 「베를린의 바하」라고 불리던 칼 필립에마누엘 바하가 봉직하고 있었다. 이 바하는 청년시대부터 근 30년간 이 궁정에서 일을 했으며 특히 소나타 형식 확립에 커다란 공적을 남겼다.또 독일의 바이에른 지방을 다스리고 있던 칼 테오도르라는 왕도 열렬한 음악애호가였다. 그 궁정이었던 만하임에는 각지의 유명한 음악가가 모여 유럽 제일의 뛰어 높은 기분을 노래했으며,연주를 통새서 국민들의 생생한 기쁨을 확인했다.북유럽의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등지에서도 동유럽과 같은 거센 음악은 아니었으나 소박한 북구 사람들의일상생활을 노래한 국민음악이 만들어졌다.① 핀란드핀란드가 공화국으로 독립한 것은 1917년으로, 체코슬로바키아와 마찬가지로 길고 고된 민족독립의 투쟁사가있었다. 13세기부터 계속된 스웨덴의 지배, 19세기부터는 러시아 제국의 지배하에서 혼자 살아갈 수 있는 날을핀란드 사람들은 꿈꾸고 있었다.핀란드 동부에는 카렐리아라 부르는 지방이 있다. 그카렐리아 지방에 전해지는 민족 전승시 「칼레발라」는이러한 타민족 지배로 고생하던 핀란드 사람들의 마음의위안이며 정신적인 지주였다. 몇 세기 동안 사람들의 입으로 구전되어 온 시집 「칼레발라」. 그들은 민족의 악기인 「칸텔레」의 반주에 맞춰 싸움이나 사랑이야기를노래했다. 시벨리우스의 교향시 「투오넬라의 백조」는이 「칼레발라」의 이야기를 음악으로 만든 것이다.② 체코슬로바키아체코슬로바키아는 오랫동안 오스트리아 제국의 지배를받고 있던 나라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18년에드디어 독립을 쟁취할 수 있었지만 그때까지 15세기에 시작된 길고 고된 저항의 역사가 있었다.스메타나의 「몰다우」로 유명한 교향시 「나의 조국」에 나오는 「타보르성(城)」은 이러한 민족운동의 중심이된 도시 이름이다. 스메타나 자신도 1848년에 프라하에서 혁명을 일으켰을 때 반란군에 참가했다고 전해질 정도로 열성적인 애국자였다.스메타나의 뒤를 이은 드보르작도 보헤미아의 음악을토대로 해서 교향곡이나 실내악의 명작을 많이 남겼다.③ 노르웨이노르웨이는 옛부터 어업을 중심으로 번영했던 나라이다.14세기말엔 덴마크의 지배를 받았고, 19세기초엔 스웬덴의 속령이 되었던 노르웨이도 그후 스웨덴을 상대로 독립전쟁을 계속, 1905년에 마침내 독립을 쟁취했다. 그리그가 태어난 것은 이 시대이다.그러나 그리그의 음악은 동유럽의 민족음악처럼 격렬한조국애나 자연의 찬가로 일관된 것이 아니고 서정적이고온건한이트한 인상을 듣는 이에게 전하려고 했다. 따라서 그때까지의 형식이나 작곡기법에 구애되지 않고 특수한 화음변화를 통해서 색채적인 음향을 만들어냈다. 악기 편성면에서도 그러한 효과를 거두기 위해 하프를 첨가한 트럼본에굳이 약음기를 달라는 지시를 하는 등 특별한 기법이 강구되었다.이와 같은 새로운 음악을 쓴 대표적 인물이 바로 드뷔시이다.2. 원시주의와 신고전주의난폭한 터치, 불타오르는 듯한 색채. 이것은 마티스를 중심으로 한 포비즘 화가들의 생명감 넘치는 회화를 지칭하는 말이다.음악의 세계에서도 그와 같은 방향으로 개혁이 진행되었다. 원시주의(原始主義)방식이 바로 그것으로서 그 대표자 스트라빈스키는 이 원시주의 방식을 발레음악으로서수용했다.그는 색채적인 오케스트라의 울림, 민족음악에서 따 온강렬한 리듬, 이것들을 멋있는 색채의 무대미술과 격렬한인간육체의 움직임에 결부시킴으로써 원시적인 생명감을보다 한층 더 높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스트라빈스키의 대표작 「봄의 제전」이 작곡된 것은1913년,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기 직전의 일이었다.제1차 세계대전 말기, 러시아에서는 레닌이 주도하는혁명이 일어나, 노동자 대표들에 의한 정부가 만들어졌다.이에 따라 러시아는 제국주의에서 사회주의 국가로 변신했다. 이러한 새로운 러시아에서는 살 수가 없다고 판단한 슽츠라빈스키는 고향을 떠날 결의를 굳혔다.제1차 대전이 끝난 1918년에 스트라빈스키는 또다른 발레음악을 썼는데 그 작풍(作風)이 전과는 너무도 달라서사람들은 마치 카멜레온 같다고 놀라와했다. 「병사의 이야기」라는 이 발레의 무대음악에는 이미 대오케스트라는사용되지 않는다. 음악의 표현방식도 고전적인 간소한방식을 쓰고 있다. 단순하긴 하지만 재즈수법을 도입했던 이 음악은 신고전주의(新古典主義) 음악으로 호칭되고있는데 이 음악에서 우리는 현대음악의 숨결을 느낄 수있다.3. 12음주의(音主義)와 신비주의20세기의 복잡한 인간사상을 음으로 표현하기 위해서는「조성(調性)」에 묶여 있는 것이 좋지 않다고 생각,「조(調)」의 중심음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