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과 수업 장학 관점(주제)》관점(주제). 칭찬, 칭찬....또 칭찬..칭찬이 아이들의 사고력을 키운다!!1.문제 제기학창 시절, 많은 선생님들을 거치면서 느꼈던 점은 선생님들이 좀 더 학생들을 인격적으로 대해주길 바랬던 것이었다. 단순한 지식전달을 해주었던 선생님들은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가물가물하거나 아예 기억에 남지도 않는다. 기억에 남는 선생님들-기억에 남는다면 그것은 그 과목에 대한 애정도도 높았다는 말이다-은 학생을 인격적으로 대해주고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끊임없는 칭찬을 하여 학생들로 하여금 긍정적인 사고를 갖게 하는 선생님의 수업은 지금까지도 기억에 생생하다.강의시간에 보았던 각 교사들의 수업 동영상중에서 L선생님의 수업이 특히나 기억에 남는다. 조금은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높여가며 끊임없는 질문을 통해 아이들과 적극적인 상호작용을 하는 L선생님은 참 인상적이었다. 아이들이 대답을 하는 것에 민감히 반응하여 이상한 대답(?)을 하는 경우에도 무시하지 않고 수정을 해주고 칭찬을 해주고, 질문 후에는 잘못 대답했건 잘 대답했건 칭찬의 홍수를 쏟아 붓는다.2.‘칭찬’이 왜 중요한가?칭찬이 중요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칭찬은 사람을 기분좋게 하여 건강하게 만든다. 여기서 한 의학 보도 기사를 인용해보자면“칭찬을 많이 받은 아이는 면역체계가 활성화되어 잔병에 걸릴 위험이 낮아지고, 자율신경계가 늘 편안한 상태에 있어 최적의 신체 상태를 유지하기 때문에, 건강한 몸을 유지할 수 있다.그러나 반대로 꾸중을 받는 아이는 늘 불안한 심리 상태에 놓이게 되고, 정서적으로 매우 위축되는 동시에 각종 질병에 걸리기 쉬우며 신체가 늘 경직되고 긴장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그러나 칭찬을 받고 자란 아이는 꾸중을 들을 때도 당당하고 꾸중의 긍정적인 효과를 받아들이지만, 늘 꾸중만 받고 자란 아이는 꾸중에 더 강해지기는커녕, 언제 또 불호령이 떨어질지 몰라 항상 불안하고 초조해 하며 위축될 뿐이다. 바로 꾸중의 부정적인 측면만 도드라지는 것이다.”-손석한 ‘칭찬 받고 자란 아이가 공부 잘해요’ 조선일보2004.11.02위의 글을 살펴보면 칭찬은 아이를 건강하게 만들고, 지속적인 꾸중은 불안한 심리상태로 놓이게 한다고 한다. 필자 역시 중고교시절,한 수업시간에 꾸중을 많이 받았던 터라 그 수업시간만 되면 불안하고 숨고만 싶고 수업내용은 머릿속에 들어오지도 않았던 기억이 있다. 칭찬은 사람을 기분좋게 만들고 긍정적인 사고와 자신감을 갖게 한다.3.칭찬을 많이 한 수업의 긍정적 효과위의 L선생님 수업으로 다시 돌아가서 살펴보자면 L선생님의 수업에서 특히나 눈에 띄었던 것은 아이들의 적극적인 발표였다. 중학생이라서 더 그런면도 있겠지만 다른 선생님들의 수업에서는 볼 수 없었던 역동적인 모습이 아니었나 생각이 든다. 이렇게 역동적인 아이들의 모습은 선생님의 칭찬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수업의 중심(?)인 선생님께 칭찬을 받은 아이들은 기분이 좋아져 수업에 더 열정적으로 임할 것이고 선생님 역시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아이들을 통해 더 열심히 수업을 진행할 수 있을것이다. 칭찬은 교사와 학생사이의 ‘WIN-WIN STRATEGY'이다.
Ⅰ.교장 임용제도의 현황과 문제점1. 국가가 주도하는 학교장 선발현재 우리나라는 교육을 중요한 기본사업으로 이식하고 있으며, 이에 대하여 국가 재정의 투자를 점차 늘려가고, 사회적ㆍ정치적 문제와 연관하여 제 문제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보이는 분야이기도 하다. 하지만 교육에 대한 개혁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기에 있는 것이 바로 한국 교육의 현실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학교교육은 현재까지 행정적으로 국가주도의 측면이 강한 중앙집권적인 형태를 띠며, 지방분권적인 교육행정분야보다는 전반적으로 우월한 위치에서 수직적으로 행정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학교장의 선발 역시 국가의 주도로 선발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2. 학교장 임용의 문제점(1) 학교장 임용, 무엇이 문제인가?우리나라의 교장ㆍ교감은 승진으로 규정되고 있으며 이는 ‘교육공무원승진규정’에서 그 기준을 명시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교장과 교감의 선발에는 그 자격을 갖추어야 하는 형태를 요구하고 있다. 이처럼 교장의 선발이 승진을 위한 규정에 매여 있어 상당수의 교사들이 교장으로의 승진을 위하여 교육의 본질적인 측면보다도 근무평점과 승진규정에 적합한 조건을 갖추기 위한 노력으로 세월을 보내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행태는 교육자의 자질을 절로 감소시키고, 기존의 관료체제에서 나타나는 지위의 수직적인 상승만이 추구되는 파행적인 형태로 나아가게 한다. 이러한 체계에서 가장 커다란 피해를 받는 것은 결국 교육의 수혜자인 학생이라는 게 가장 큰 문제인 것이다.우리나라 교장 임용권은 국가가 갖고 있으며(정확히는 대통령이 자격증을 주고 독점적으로 임명하고 있다.)임용을 위해서는 일정의 자격을 요하고 있어, 실제적으로 정부가 ‘교장자격증’을 발행하고 임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수직적인 임용의 과정과 절차는 교육의 현장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위계적인 교육의 분위기를 조성하고 앞으로 교육이 나아가야 할 방향인 교사, 학생, 그리고 학부모가 수평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화합적인 분위기 속에서 교육이 이루어지는 것을 방해하며 진정한 지의 학생도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기에 학교로 교사가 임용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내가 언급하려는 것은 승진을 목표로 희생을 자처하면서 투덜거리고 결국은 대가를 바라는 교사를 말하는 것이다.)그렇다면 무엇이 이토록 교사들로 하여금 교장 승진이라는 매혹적인 미끼로 빠져들게 하는 것인가? 이는 한국인 특유의 지위점유의식이 강해서이기도 하지만, 국가에서 교육공무원의 승진을 위하여 규정하고 있는 조항이 더욱 그러한 행태를 조장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게다가 각종의 항목에 연수평점과 가산점을 두어서 교장자격연수제도를 부추기고 있다. 교사들은 소수점 두 자리, 세 자리의 점수 차이에 따라 울고 웃으며 그에 따라 지위의 보장이 연결된다고 믿게끔 만들고 실제적으로 현장에서도 실로 막강한 영향력을 갖는다. 이러한 점수의 경쟁은 서로간의 이질감을 부추기고 경쟁자로 인식하게 만들며, 궁극적으로는 교육의 질보다는 개인의 경력 쌓기와 생색내기 그리고 평점 잘 받기 등을 위한 노력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과정에서 실무능력과 학교경영의 자질이 부족하고, 경영에서의 통합적인 능력이 결여된 인물이 교장으로 임용되는 경우가 발생 한다는게 전교조와 일부 소장파 교사들의 입장이다.이러한 현재의 학교장 임용 구조상 교장이 학교에서 막강한 힘을 갖고 독단적인 유형으로 치우치는 것 또한 중요한 문제라고 말하고 있다. 심하게 표현해서는 학교에서 왕으로 군림한다는 표현까지 거론되고 있다. 이처럼 교장의 권위가 막강하여 일선의 교사들에게 독재자의 위치에서 명령하고, 교사들을 말단 공무원처럼 명령에 따르게 만들고 있다는게 큰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다.물론 학교가 관료적인 성격을 갖고 학교행정의 업무를 수행하는데 장점이 존재한다는 것에는 부정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이러한 관료적 성격은 교장이라는 한 명의 왕이 비민주적인 의사결정의 구조를 독점하고 있다는 것에 가장 큰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처럼 교장의 말 한마디에 좌지우지되는 학교의 행정이라면 결코 민주적일 리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이러한 관료적것으로 이러한 문제는 근무평정 요소를 구체화하고, 동료교사에 의한 다면평가를 도입하여 객관성과 공정성을 확보할 수 있으며, 현재 공개되지 않는 승진평정과 근무 평정 결과는 투명성을 보장하기 위해서도 노력한 만큼에 대한 적정한 보상을 위해서도 적어도 당사자에게는 공개될 필요가 있다. 또한, 승진평정에 있어서 현재는 2년간의 평정점만을 활용하고 있으나 진정한 의미에서 평정이 이루어지기에는 부족하다. 이에 승진평정방법을 개선하여 학생지도에 성실하고 능력을 갖춘 교사를 선정하고 이들 가운데 민주적인 지도력을 지닌 교장을 선발할 수 있어야 한다. 이처럼 교장임용제도의 근간으로 유지되어 온 승진임용제도의 개선 방안을 마련함으로써 교직의 안정성을 유지하면서 대안적인 교장 임용제도를 도입하여 단계적으로 보완하도록 해야 한다.(2) 현행 승진 평정 요소의 개선현행 승진임용제도 하에서 교장자격 연수대상자로 지명되기 위해서는 총 200점 만점에서 경력평정점이 차지하는 비중이 90점에 이르고 있으며, 25년의 교육경력이 되어야 만점인 90점을 받을 수 있는 구조로 교육경력에 따라 획일적으로 평정이 이루어지고 있다. 따라서 국 ? 공립학교에서 교장자격 연수대상자로 지명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25년 이상의 경력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력지향성 서열체계를 중시하는 교장자격연수 선발과정은 능력 위주의 선발방식으로 전환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 경력평정기간을 단계적으로 축소할 필요성이 있다. 즉, 경력평정은 관리자가 되는데 필요한 최소 교직경력을 설정하도록 하며, 교육경력 평정에 있어 평정기간을 점진적으로 축소하고 평정점수를 하향 조정하여 경력보다 능력을 중시하도록 해야 한다. 구체적인 대안으로는 현행 25년에서 제도 변경 예고 2년 후부터 매년 1년씩 3년에 걸쳐 22년으로 축소하고, 단계적으로 경력평정 기간을 축소하는 것이다.현재 근무성적평정은 단순히 승진을 위한 도구로만 이용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근무성적평정에서의 다양한 개선이 필요하다. 모든 교사들이 자신의 즉, 질적 평가로 참고하도록 해야 한다.현재 교장 연수를 받을 수 있는 자격 선발기준에 있어서 앞에서 언급한 경력평정, 근무성적과 함께 기준이 되는 것이 연수성적평정이다. 현재는 연수횟수와 연수성적에 대한 획일적인 점수 부여방식이 적용되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의 개선 또한 시급하다. 연수성적평정은 교사의 전문성 개발을 위한 노력을 평가하는 방향으로 개편해야 하며, 연수 성적 평정에서 연수 횟수나 연수 점수보다는 연수내용과 담당 직무와의 관련성 및 연수결과의 현장 활용정도를 평가해야 한다. 해당 교사는 자신의 “교육활동평가서”에 연수관련 내용을 기록하고 학교의 교원평가 위원회에서 연수와 업무의 관련성 및 연수결과의 활용도를 평가해야 한다. 또한 평가의 타당성 증대를 전제로 연수 성적 평정 점수 비중을 상향 조정하는 것이 좋다.(3)임용절차의 내실화주요절차담당기관① 교장 승진후보자명부작성 및 선정명부작성권자대학 부설학교: 대학장공립학교: 교육감교육인적자원부 직할학교: 교육인적자원부장관② 승진후보자 심의시?도 인사위원회③ 교장임용심사위원회의 설치시?도교육청④ 학교경영제안서의 심의시?도 인사위원회/교장임용심사위원회⑤ 면접심사시?도 인사위원회/교장임용심사위원회⑥ 임용대상자 추천교육감?교육인적자원부장관⑦ 임명대통령현행 교장 승진임용 절차는 위의 표와 같다. 임용절차의 내실화를 위해서는 임용에 큰 역할을 하는 시?도 인사위원회의 합리적 구성이 우선시되어야 한다. 교육청 인사 외에 다른 학교의 교장, 장학관, 교원단체?학부모단체?시민단체 대표 및 교육전문가 등의 참여를 허용하여 선발의 공정성을 확보하며, 인사위원은 관련 단체 또는 구성원의 민주적 의견수렴 절차를 거쳐 선임하도록 하며, 전문성을 고려하여 선정해야 한다.또한 교육활동평가서, 학교경영계획서, 추천서 등 다양한 심사자료를 임용절차에서 활용해야 하며 심사방법 또한 서류심사, 소견발표, 면접심사 등 다양한 방법을 활용하여 승진 심사를 실시해야 한다. 또한 다단계의 심사절차를 통해 좀 더 투명하고 적임자를 임용하기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교장 자격 요건으로서 광범위한 포괄적 영역을 다루고 있는 것으로 교장의 역할을 실질적으로 수행할 때 요구되는 기능적인 영역을 집약시키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학교행정가로서의 전문경영 능력과 영역을 경영관리, 교수학습지도, 조직관리 지도성, 교장학, 현장연구, 실무경험으로 재구성하여 이에 따른 교육프로그램이 개발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또한, 현행 교장 자격 연수 교육과정과 같이 과다한 교과목을 적은 이수 시간 내에 다루게 되면 피상적인 접근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교과목 수를 대폭 축소하고 과목당 이수시간을 확대해야 한다. 이와 함께 앞에서 언급했던 현재의 180시간 이수 시간을 대폭 확대하야 자격 연수 시간수를 확보함으로써, 교장으로서 필요한 전문 지식과 기술 등을 중심으로 이론과 실제를 병행해서 기초부터 심도있게 다루어 나가야 할 것이다.마지막으로 교장 자격 연수 교육과정의 편성에서 탐구 및 실습 과정이 보강되어야 한다. 교장 자격 연수는 학교 교육의 책임자라는 고도의 전문가를 양성하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사전에 조직된 소정의 교육과정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형식적인 수강만으로는 부족함이 있다. 학교 교육의 최고 지도자인 학교장은 고도의 전문 지식뿐만 아니라, 폭넓은 시야와 비전, 민주적 지도성 및 올바른 판단력과 적극적인 문제 해결력 그리고 올바른 문제의식, 자율적인 통제력 등과 같은 능동적이고 자율적인 탐구과정 및 실습과정을 통해서 보다 효과적으로 길러질 수 있다. 따라서 교장 자격 연수 과정에 탐구 및 실습과정은 상당한 비중으로 강화되어야 할 것이다.2.교장 초빙제-학교장 초빙제의 운영과 개선점(1)학교장 초빙제의 도입 배경가. 필요성-학교장 초빙제는 국제화?개방화 시대의 변화에 부응할 수 있는 교육의 질적 고도화를 위하여 교육과정과 인사, 재정 등의 권한을 단위 학교로 이양하여 자율적 결정에 따라 학교를 운영하고, 그 결과를 책임지는 학교장 중심의 단위학교 책임운영제를 전제로 한다. 이는 학교구조의 개선과 획일적인 지시.
Ⅰ. 서론제 1 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유럽은 이전에는 겪지 못했던 극심한 경제적, 사회적 불안을 겪게 되었다. 이것은 유럽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던져준 것이었고, 모든 면에서의 변화의 소용돌이로 빠져들어 이전과는 판이한 세계가 펼쳐지게 되었다. 이 전쟁의 인적·물적 손실과 피해는 그 이전의 어느 전쟁과도 비교가 안될 정도로 컸다. 쌍방을 합하여 전사자가 약 1,000만 명에 달하고, 부상자는 2,000만 명이었다. 일반시민의 사상자 또한 적지 않았겠지만 이를 추산하기는 어렵다. 건물이나 선박을 비롯하여 전쟁에 투입된 물자 등 물적 손실 또한 정확한 통계를 잡을 수 없지만 막대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직접적인 손실 외에 간접적인 피해 또한 적지 않았다. 식량부족으로 인한 영양실조, 장기간 지속되는 긴장된 전시생활, 불구가 된 부상자와 전사자 가족의 슬픔과 정신적 고통은 숫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것이었다.Ⅱ. 본론1. 경제적 변화*자본주의에 대한 경향-통제경제1차 대전은 유럽사회에 근본적인 여러 변화를 강요하였으며 그것은 전쟁 자체보다 더 지속적이었다. 무엇보다도 대전은 이전에 알고 있던 바의 자본주의(경제적 자유주의 또는 자유개인공업)의 본질적 개념이란 정부는 기업을 방임하거나 기껏해야 기업인들이 활동하는 어떤 일반적 조건을 규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914년 이전에도 각국 정부는 경제분야에 간섭이 조금씩 늘어났다. 관세를 올리고, 국내공업을 보호하고, 제국주의적 팽창에 의해 시장이나 원료를 구하고 또는 임금계급의 보호를 위해 사회 보장법을 제정하였다. 대전시에 교전각국 정부는 한층 더 세부까지 경제제도를 통제하였다. 실제로 계획경제(planned economy) 개념은 1차 대전 때 처음으로 적용되었다. 처음으로(1793년의 프랑스 독재체제와 같은 선례가 있긴 하지만) 국가가 단일 목적을 위하여 모든 재정과 자원과 사회의 도의적 목적을 그 방향으로 집중하였다.장기전을 예상한 사람이 없었으니 산업동원을 계획한 사람도 없었다. 모든 것을 즉석에서제외한다면 중세에 의해서 조차도 필요한 모든 자금을 조달할 수 없었다. 과대한 수요와 극심한 물자부적의 결과는 급격한 물가인상이었다. 물가와 임금은 규제되었으나, 결코 1914년 이전처럼 내려가지는 없었다. 이 현상으로 가장 타격을 받은 것은 화폐수입이 쉽게 올라가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즉, 안전투자로 생활하는 사람, 연봉을 받는 자, 전문직업인, 공무원 등이었다. 이 계급은 戰前에 사회안정에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었다. 전쟁 중에 대륙국은 영국에서 차관을 얻었고, 또한 그들과 영국은 모두 미국에게 채무를 졌다. 그 부채를 갚기 위해서는 수년간 수입보다 수출을 많이 해야 했다.(1)영국의 경제전후에는 당연지사 불경기가 닥쳐왔다. 특히 문제가 된 것은 수출부진과 그로 인해서 큰 타격을 받았던 석탄산업이었다. 석탄산업은 실상 19세기 말 이래 꾸준히 경쟁력을 잃어갔다. 1914년 이전에는 총생산의 20%가 수출되었지만, 1920년에는 10%만이 수출되었다. 전쟁 중 국유화되었던 석탄산업이 다시 민영화되면서(1921) 정부보조금이 끊기자 고용주들은 경쟁력회복을 위해서 임금삭감을 결정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광부들은 파업에 돌입하였지만, 실패하였다. 광부들과 동맹을 맺고 있던 철도 노조와 도로 및 교통운송 노조가 동조하지 않은 탓이기도 하였다. 막강해 보이던 이들의 “삼자동맹(Triple Alliance)"은 이 사건 이후 절름발이 동맹(Cripple Alliance)”이라는 야유를 받았다.1873년부터 시작된 불경기 기간에 이미 영국경제가 몇몇 수출산업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다는 위험성이 인식되었다. 직물, 석탄, 중장비기계, 조선업 등은 전쟁 전에 이미 외국으로부터의 경쟁에 노출되었지만, 일시적으로 세기말과 세기 초의 제국의 팽창과 재무장 및 전쟁으로 무마될 수 있었다. 그러나 평화의 도래와 더불어 예전의 문제점이 다시 살아났다. 1914년 현재 주요 기간산업들이 전체 노동력의 1/4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전체 수출품의 3/4을 생산하였다. 전쟁 중에 영국은 많으로 얻어진 모든 형태의 수입은 이제 없어지고 말았다. 물질생활 면에 있어서 중산계급은 이제 날품팔이나 떠돌이와 마찬가지로 떨어졌다. 그러나 그들의 인생관은 자기들을 노동계급과 동일시하거나 마르크스주의 또는 사회주의 이념의 용납을 불가능케 하였다. 그들은 사회 자체에 대한, 미래에 대한, 이해할 수 있는 세계에 있어서 인생에 대한 자신의 합리적인 계획과 자기확신 같은 도덕, 전승되어온 시민계급의 신념을 잃어버렸다. 일종의 윤리적 공허함이 조성되어 중산계급은 믿고 바라고 존중할 아무 것도 없게 되었다. 또한 인플레이션은 소수의 부익부와 다수의 빈익빈의 상태를 가져왔다. 전쟁으로 인한 전선의 직접 체험은 만인이 공유한 것이었다. 마르크의 가치가 하락되었어도 토지와 그 외에 부동산을 취득할 수 있는 사람들은 돈을 벌 수 있었다. 그러나 이익을 올린 한 사람에 대하여, 그로 인하여 파산을 가져온 사람은 수백 명에 달하였다. 그 자금을 국채나 주식기타 유가 증권에 투자해 온 중산계층, 연금 생활자, 노동자 계층, 봉급 생활자들의 실질 소득은 폭락을 면할 수 없었다. 전쟁 전의 고급 관료들의 수입은 미숙련 노동자의 약 7 배에 달하였으나, 전후 그들의 수입은 노동자에 비해 1.8배에 지나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8시간 노동제와 단체 협약권을 법률상 획득하였으나 이러한 상황 아래서 그것은 종이 위에서의 권리에 지나지 않았다.미숙련 노동자의 실질 소득도 1914년 이후 지속적으로 저하, 인플레로 인한 타격을 받은 사회의 집단은 바이마르 공화국에 결국 등을 돌렸다. 독일 정부는 가격의 통제, 암시장의 조사, 재산세, 법인세, 최득세의 과세 강화, 그리고 새로운 마르크의 발행으로 어느 정도 인플레를 저지 할 수 있었으나 그것은 일시적 안정에 지나지 않았다.그러나 인플레이션은 독일 내의 모든 큼직한 부채를 쓸어버림으로써 일단 손실이 청산되자 경제적 생산을 일신케 하였다. 1924년 도오즈案으로 독일의 배상지불이 체결되었다. 이리하여 프랑스군은 루르로부터 철수하고 배상지불액이 감소되전쟁 말에 650만으로 증가하였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전쟁은 노동계급의식을 강화하는 데 기여하였다. 효과적 전시경제체제를 작동시키기 위해서 국가는 역사상 처음으로 노동조합을 국가의 상대역으로 인정하였다. 전쟁 추 노동조합은 자발적으로 노사분규를 자제하기로 결정하여 파업도 1915∼16년에는 급감하였지만, 1917∼18년이 되면 다시 상승하기 시작하였다. 이때가 되면 노동계급은 높은 식량가격과 식량부족, 사회 각층이 전쟁의 부담을 공평하게 나누지 않는다는 불만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전쟁으로 인해서 막대한 부당수입을 올린 군수산업 자본가들에게 초과이윤세를 부과하도록 요구하는 등 국가를 위한 공평한 희생과 부당한 부의 몰수를 요구하였다.여성의 진출도 전쟁이 가져온 중요한 사건이었다. 전쟁 동안 135만 명의 여성이 남성노동력을 대체하였고, 여성은 최초로 군수산업 등의 중공업분야에도 진출하였다. 그러나 해방은 일시적이었다. 전선에서 돌아온 남자들은 서둘러서 여자들을 다시 가정으로 돌려보냈던 것이다. 19 세기 후반기 이후 대규모로 전개된 여성참정권 운동은 전쟁 덕분으로 부분적으로나마 목표를 달성하게 되었다. 전쟁 동안 여성이 보여준 희생과 봉사에 대한 보상으로 전후 30세 이상의 여성에게 참정권이 인정된 것이다.마지막으로 전쟁은 영국 젊은이들의 한 세대를 쓸어가버렸다. 가장 높은 사망률을 보인 것은 참호전에서 앞장서서 공격을 주도해야 했던 소장 장교층이었다. 그들은 주로 사립학교와 대학 출신들이었기 때문에 영국사회의 엘리트 구조에 큰 구멍이 뚫렸다. 그러나 대부분 국민의 생활수준은 전쟁을 겪으면서 오히려 더 나아졌다. 식량 및 필수품의 배급과 경제의 총 가동이 가져온 완전고용으로 노동대중의 소득과 소비수준이 전반적으로 향상되었던 것이다.(2)독일의 사회-중산계층의 붕괴전후 엄청난 인플레이션현상으로 독일의 중산 계층은 가장 큰 타격을 받았다. 국민생활 안정의 기초 전제는 사회에서 건전한 중산 계층의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전후 독일에서는 도시 중산 계층의 의 협력이나 지도 없이 이루어졌다고 간주하였으며, 새롭게 이루어진 바이마르 민주주의는 지식인의 지도를 필요로 하지 않고, 또한 지식인은 정치 지도로부터 제외되었다고 보았다. 공화국 시대에는 중하층의 관리, 수공업자, 그리고 봉급 생활자들의 자녀도 대학에 진학하게 되어 1929년에 대학 졸업생의 64.2%가 중간 계층의 출신이었다. 이러한 대학생의 증가는 학생 상호간의 경쟁 격화, 그리고 좁아진 취직문과 엘리트에로의 승진 기회의 저하로부터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사회 불안과 전반적인 경제의 악화에 따른 심각한 취업난으로 직업상의 장래가 불투명한 절망적 좌절을 맛본 대학생들은 그들의 지위와 위신이 민주적인 국가 정책과 사회 정책에 의하여 위협받고 있다고 간주하였다. 그래서 정체와 대기의 시기가 1929년 그 종말을 고하자 제일 먼저 그 돌파구 표면에 나타난 것은 대학생 그룹이었다. 대학생들은 세대의 문제와 급진적 해결책에 대한 행동주의적 열광과 학생 결사에 의한 반공화제적 태도를 표명하였다. 그들 대부분은 이론과 실천에 있어서 인종주의적 논거를 동원한 반 유태주의를 함양하고 있었다.또한 대학을 졸업한 무소속의 지식인들은 사회적 낙오자로 전락하는 공포감이 증대하여 사회적 고립감과 더불어 그들에게 귀속감을 부여하고 그들의 소외감을 표명하는 나치즘 운동에 뛰어드는 여지를 가지고 있었는가 하면, 빌헬름 시대에 정신을 가진 과거의 지식인들은 위기로 점철된 전후 민주주의에 대한 원한과 결합하였다.결국 자본주의의 거대한 조직 속에서 무력감, 그리고 공산주의적 과격한 선전에 의한 사회 평준화로부터의 압박, 그와 더불어 경제적 상황과 사회적 위신의 긴장 속에서 “생존권(Lebemstraum)”정책에 의한 사회적 해결의 약속은 중간 계층의 국민주의적 이상주의에 접근하였다. 그래서 중간 계층의 대부분은 국가를 숭고한 것으로 칭한 신화화한 욕구의 포로가 되고, 이러한 입장에서 국제적 의무에 구속된 바이마르 공화국의 현실주의적 이행 정책은 그들 중간 계층에 만족감을 주지 못했다3 -
로베스피에르..그는 프랑스 혁명사에서 가장 빛나는 업적을 이룬 사람이며, 프랑스 혁명을 잘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로베스피에르라는 이름만은 알 수 있는, 실로 대단한 사람이다. 그가 없었으면 프랑스 혁명이 발생할 수 없었을 것이며, 그가 없었다면 프랑스 혁명이 막을 내리지도 않았을 것이다.그는 아르트와주의 부르주아 출신이었다. 흔히들 생각하기에 부르주아는 돈을 많이 버는 상인층이라고 하겠지만 이 당시 부르주아를 가리키는 말은 농민이외의 평민이라는 뜻이었다. 처음에 로베르피에르가 부르주아라는 말을 듣고 막연히 돈이 많은 집안에서 유복하게 자라난 도련님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유복한 가정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으나 점차 늘어가는 가족에, 유산으로 세상을 떠난 어머니에, 그로 인해 가정을 돌보지 않고 집을 나가버린 아버지에.. 한마디로 집안이 풍비박산이 난 것이었다. 여섯 살난 어린이의 즐거움과 가정의 단란한 맛을 빼앗겨버린 로베스피에르는 그대로 세상의 풍파와 맞서게 되었다. 이때부터 어린 로베스피에르는 더이상 어리광만 부리는 아이가 아닌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기위해 침착하고 사려 깊은 성실한 소년으로 변모하였다. 로베스피에르는 아라스의 신학교에 들어갔다가 수도원의 급비생 네명중 한사람으로 뽑혀 파리의 루이 르그랑코레쥬에 들어가게된다. 그는 젊은 시절 매우 고독했으며 사교성 또한 없었다. 하지만 학업에서는 매우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르그랑코레쥬에서 학업을 마친 후 그는 고향에 돌아와 변호사 조합에 가입한 후 변호사로써 승승장구 하게 된다. 1784년에는 22건, 1785년에는 12건, 1786년에는 17건이라는 많은 소송에 변호를 했다. 그는 그의 직무를 천직으로 여기고 수행했고, 그 도의적 책임의 중대함을 자각하고 있었다. 약한 자, 압박당하는 자, 가난한 자를 옹호하는 이 직업이야말로 숭고한 것으로 이러한 직업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라는 그의 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러한 것은 후에 그가 의정 단상에서 전개하게 될 연뢰침 사건 덕분이었다. 그의 변론으로 거의 질 뻔한 사건을 승소시킨 것이다. 이 사건으로 그는 매우 유명해졌으며 변호사로서 지위가 더욱 상승한 것은 당연지사였다. 하지만 그에게 신분 계층상 더 이상 올라갈 수가 없었고 자기의 가치를 판단하며, 또 그에 정당한 보수를 받기를 갈망했다. 특권 귀족들이 그의 갈 길을 가로 막고 있으니 그들과 싸워보려고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너무 자연스러웠던 것이다. 서른 한 살의 젊은 나이에 아르트와주에서 삼부회로 보내는 제 3신분의 대의원가운데 제5위로 당선되었다.그는 규칙있고 조용한 생활을 즐기며 방안에 꽃을 가꾸고 애견 브루웅과 놀기를 좋아했다. 그의 차가운 외모의 배후에는 예민한 감수성과 따뜻한 마음이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는 외모도 매우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섬세한 감수성을 갖춘 그는 많은 사람들의 정열을 불러일으키게 했으나 그 자신은 정작 단 한번밖에 연애를 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1789년 추 이래 그는 자신에게 하나의 사명을 부과했는데 목숨을 버려서라도 민중의 신성불가침한 권리를 옹호하는 것이었다. 이런 강직한 자기 희생심은 그를 그렇게도 가혹한 운명으로 이끌게 했던 것 이고, 그는 이미 그것을 예감하고 있었으며 또한 그것을 피하려고 하지도 않았다.삼부회의 일원으로서, 자코뱅파의 일원으로서 그는 많은 일을 하였고 그러는 와중에서도 자신의 주장을 피력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매주 매일 의회와 자코뱅클럽에 출석하여 연설을 하는 것이 그의 주된 일이었다. 그러던 중 베르사이유에서 파리로 거처를 옮긴 국왕일가는 가짜여행증을 가지고 궁전을 탈출하였다. 하지만 중간에 붙잡혔고 이 행동은 혁명의판도를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되었다. 파리시민들에게는 국왕과 왕비에게 품었던 의심이 이번 도망으로 확실하게 불신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국왕에 대한 일말의 희망이 사라지게 되어 그들은 왕을 퇴위시키고 공화정을 세우길 원했다. 그러나 로베스피에르는 아직 공화주의에까지 전진해 있지는 않았지만 루이16세를 재판에 회부할 것을 주장하법에서 명하는 즉시 복권시킨다는 案에 대해서 주장을 펴나갔다.1791년 여름 로베스피에르의 이사는 그의 생활방식에 변화를 가져왔다. 조용한 통쥬街에서 가장 번화한 파리에 자리를 잡았으니 여러 지인들과 밤마다 함께 이야기 꽃을 필 수 있었다.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시낭송을 하기도 하는 등 예술적인 면모도 보여주었다. 그의 인간적 공감, 사회적 관심은 이 새로운 분위기 가운데 분명히 넓혀지고 있었지만 그의 정치적 외골수는 조금의 흔들림조차 없었다. 변했다면 당파적인 논쟁과 국가의 위험의 압력아래 그 자신보다 더욱 논쟁적인, 더욱 광신적인, 더욱 위험한 인물이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로베스피에르는 공화주의를 공언하지는 않았지만 반동적인 부르조아의 수중에서 노는 카이라이왕정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프랑스 인민의 푹동으로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이행했던 것은 로베스피에르에게 공화정을 요구하게 된다. 그처럼 외골수인 사람도 대세에 따라 뜻하지 않은 것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 폭동이 인민의 승리로 끝나 그의 유일한 이상인 정의와 덕의 공화국에 새 길을 열어 줄 것을 은근히 바라고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이 끝날 때까지 집에 숨어있었다. 그러다가 저녁이 되자 여느때처럼 자코뱅클럽에 나타나 연설을 했고 후에 이 폭동에 대해 로베스피에르의 업적이 대단하다는 평가가 자자했다. 1792년까지만 해도 그는 남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는 일을 싫어해서 재판관임명도 거부했다. 그리고 국왕의 재판문제에서도 그는 국왕은 재판을 받을 수 없다. 왜냐하면 루이는 공화정의 창설에 의하여 벌써 재판과 斷罪를 받았기 때문이다 라고 주장했다. 그는 말을 계속해서 이때까지 자기가 사형에는 반대였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것밖에 취할 방도가 없게 되었다. 조국은 생존해야만 하므로 루이는 죽어야한다. 고 말했다. 그것은 로베스피에르가 처음으로 사형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그는 천성적으로 평화스런 인간으로 폭력과 유혈을 증오하고 있었다. 그는 국왕의 처형이 있고 나서 이 이상 사형이 있어서는 안될, 배반자와 반혁명자에 대한 그의 공포 때문에, 단두대란 새로운 처형기구로 목을 자를 경우 죽음은 꽤 신속히 오고, 보기에도 고통이 심하지 않은 것 같았으므로 그는 그의 이성이 그의 양심을, 그리고 국가 이성이 그의 이성을 누르고 나가게끔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의 마음속의 puritan은 종교재판관이 되었고 덕이 없이 威 은 크나큰 재앙을 낳고, 威 없이 덕은 힘을 지니지 못한다. 는 말을 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공포정치는 자코뱅파의 지도자들이 저항하는 국토에 대해 그들의 통제를 차츰차츰 굳게 해나가는 동안 자연히 생긴 결과였다는 것이 옳을 것 이다.그는 공포정치를 자기의 방법으로 처리하기를 즐겼다. 어렸을 때부터 혼자인 것을 좋아했기때문도 있고 쉽게 남을 믿지 못하는 성격이라서 그런 것도 있을 것이다. 공안 위원회에서는 로베스피에르가 공화주위의 예언자요 순교자인 체 하는 그 자세에 염증을 내고 그의 우월감에 찬 태도와 관용성이 없는 태도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의 협동은 마음이 맞아서라기보다 차라리 공통의 과제를 위해서 중노동을 해야 하는 여러 사람이 할 수 없이 한 데 묶여있는, 그러니까 어쩐지 거북스러운 관계였다고 할 수 있다.로베스피에르는 개인 독재를 꿈꾸는 인물은 결코 아니었다. 그의 德에의 狂信이 그를 공포 정치의 두목으로 만들어 놓았을 뿐이다. 그는 다른 정치가들의 테러리스트적인 범죄에 대해 강하게 항의하고 있었으면서도 혁명재판소의 처사에는 조금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원래는 긴급 사태에 대처하여 정치상의 배반자를 숙청하기 위해 설립된 재판소가 보통 재판의 형식을 통하지 않고 정부의 의지를 전국에 시행하기 위한 편리한 방법으로 사용되었건 것이다. 이 정부가 사형을 극도로 싫어하던 로베스피에르의 정부였던 것이다. 그는 누구인가..그에 대한 해답은 도덕적 광신도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어떠한 눈앞의 인기나 권력보다 훨씬 더 소중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여느때 싫어하던 수단을 곰곰히 생각나며 덕망이 있는 인사였다. 그는 돈을 싫어하고 여자를 싫어했다. 여자를 좋아하고 사랑을 좋아하지도 않았다. 여성에 대한 그런 감정을 존중하고 웃음을 좋아하는 프랑스가 여성과 웃음의 敵에 의해 통치된 것은 이때가 역사상 처음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로베스피에르는 이런 사람이 반드시 지니고 있는 결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성격중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점은 자기 중심적이라는 것이다. 그만큼 pride도 높은 사람이 드물 것이다. 그는 자신의 德의 높음을 믿고 있었다. 그래서 그 德으로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사명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희생하며, 특히 우정을 희생시켜 버리는 것이다. 로베스피에르는 오랫동안 苦樂을 같이 하던 모든 벗을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게 했다. 고귀한 사명을 자각한 양심의 소리야 말로 그로 하여금 적을 넘어뜨리기 위해서는 그를 중상하도록 명하며, 필요하다면 감히 허위를 조작하는 일마저도 하도록 명했던 것이다. 또한 로베스피에르가 당파에 대한 충성과 국가의 위급에 응하기위해 억지로 끌려서 당통의 사형 집행 영장에 서명했다고 그 행동을 용서받을 수도 있겠으나 이것만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 당통파에 대한 고발을 제출하는 서명을 맡은 생쥐스트에게 고발사항의 요점을 제시해주었다. 이것을 보면 공포와 광신이 어느만큼 도덕가요 이상주의자인 한 인간의 판단을 그르치며 그 양심을 부패시킬 수 있는지 뚜렷해진다. 자유와 공화국의 혁명자로 자처한 그는 자신에게 반대하는 자는 모두가 다 혁명과 공화국의 자유의 적이라고 마음으로부터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그의 성격 중 가장 유감된 면이지만 자기의 경쟁자를 질투해서 차례차례 적으로 만들어갔다. 그러면서 자기의 소중한 동역자들이 사라져간 것을 그는 아무렇지 않게 여겼다. 특히나 당통과의 우정은 그에게 썼던 편지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나는 당신의 애정깊은 헌신적인 벗 이라고 까지 했었다. 하지만 나중에 가장 걸림돌이 되는 당통을 치밀한 계획하에 단두대에 오르게 한 다.
*목차*Ⅰ.序 論Ⅱ.本 論1)高句麗에 끼친 影響ㄱ.政 治ㄴ.文 化2)百濟에 끼친 影響ㄱ.政 治ㄴ.文 化3)新羅에 끼친 影響ㄱ.政 治ㄴ.文 化ㄷ.社 會4)統一新羅에 끼친 影響ㄱ.政 治ㄴ.文 化5)高麗에 끼친 影響ㄱ.政 治ㄴ.文 化ㄷ.社 會佛敎行事의 盛行寺院經濟의 發達佛敎的 身分思想6)朝鮮에 끼친 影響ㄱ.政 治ㄴ.文 化Ⅲ.結 論Ⅰ.序 論비슷한 자연조건과 유사한 사회체계를 가진 나라라도 그 문화가 크게 다를 수 있다. 종교가 큰 영향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종교는 사회와 사회구성원의 가장 밑바탕의 문화를 생성한다. 따라서 한 국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나라의 인구, 사회적 상태, 경제 수준 등의 자료적 접근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종교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라 하겠다. 특히나 우리나라의 대표적 종교라 함은 불교가 아닐까 싶다. 고구려의 소수림왕이 불교를 공인했을 때부터 조선의 숭유억불체제에서도 꿋꿋이 그 자리를 지켜 나갔던 불교가 우리나라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을까?이 글에서는 불교가 우리나라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시대순으로 알아보고 그 시대 속에서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측면에서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조목조목 알아보도록 하겠다. 하지만 시대별로 불교가 융성함에는 차이가 있으니 모든 방면을 알아볼 수 는 없고 확실한 영향을 끼친 부분에 대해 집중적으로 알아보고 고찰해보도록 하겠다.Ⅱ.本 論1)高句麗에 끼친 影響ㄱ.政 治고구려는 372년 (소수림왕2년)에 전진에서 승려 順道가 불상과 불경을 전하였다. 귀족세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왕의 강력한 의지에 의하여 공인되었다, 이와 같이 고구려 왕실이 불교 수용에 적극적이었다는 것은 종래의 원시종교나 시조신을 대신하여 불교가 고대국가 통치의 일원적인 사상적 지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교를 수용한 왕실이 이를 진흥시키고자 많은 사찰을 건립하고 토지를 기진하는 국가불교로 발전시켰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왕실의 이러한 불교 장려는 불교로 하여금 당연히 호국 신앙의성격을 띠게 하였다. 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교를 수용한 왕실이 이를 진흥시키고자 많은 사찰을 건립하고 토지를 기진하는 국가불교로 발전시켰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백제 무왕이 왕흥사를 지은 것을 보아도 불교로 하여금 당연히 호국신앙의 성격을 띠게 하였다.ㄴ.文 化백제는 부여족의 일파가 한반도의 서남부로 이동하겨 옛 삼한의 전통을 계승하였다. 그리하여 북방적인 것과 중국적인 것, 불교적인 것을 가미한 높은문화를 형성하였다. 백제는 일찍이 중국의 남조와 해상교통이 열렸으므로 대륙의 감화를 받았과, 남으로는 일본의 아스카시대의 불교미술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회화는 공주 송산리 고분과 부여능산리 고분벽화가 있을 뿐이다. 남조풍의 고분에다가 고구려식 사신도를 그렸는데, 능산리 고분의 천장에 그린 유운연화 무늬에는 능숙한 필치로 백제의 우아하고 섬세하며 명랑한 감각이 잘 나타나 있다. 개로왕 9년에 화가 인사라아(因斯羅我)가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회화의 시조가 되었고, 백가,아좌태자가 그렸다는 일본의 성덕태자상은 고구려 화승 담징이 그린 법륭사의 벽화와 더불어 삼국시대의 귀중한 화적이다.조소에 있어서 백제의 대표적인 것은 불상 조각이다. 부여 군수리절터에서 발견된 금동보살입상과 말기의 대표작 금동곤세음보살상은 그 기법이 고졸하며 백제 독자의 온화함에다가 중국 남북조의 영향이 가미되어 있다 백제 불상의 특징은 고졸한 미소를 띠운 온화한 표정과 날씬한 자세이다. 이러한 불상은 일본에 전하여져서 아스카시대 조각의 터전을 이룩해 놓았는데, 나라의 법륭사 백제관음과 광륭사의 목조반 가사유성등 훌륭한 작품을 낳게 하였다.건축에 있어서 오늘날 전하는 것은 없다. 그러나 백제의 공장들이 신라의 황룡사 9층탑과 일본의 법륭사, 사천왕사, 법륜사등을 건축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이들 건축에서 백제시대 절의 건축원형을 찾아볼 수가 있다. 백제의 옛땅에는 몇개의 석탑만 남아 있는데 그중에서도 부여 정림사 터의 5층석탑은 그 구조가 목조 건축의 양식으로 되어 있는 백제의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이 탑은 각는, 서양의 그리스가 대리석이 많아서 많은 조각품을 만들었듯이 서라벌의 많은 화강암은 신라의 조각 미술을 번창하게 하였다. 신라의 불상 조각들은 미소를 머금은 달처럼 둥근 얼굴과 자유롭게 흐르는 유창한 옷주름이 단순하면서도 섬세하며 온화한 곡선미를 이루는 것이 특징이다. 그 중에도 금동미륵 반가사유상과 석조삼존불상을 비롯하여 석조여래상등이 유명하다. 명상에 잠긴 반가사유상은 중국북위의 영향을 받고는 있으나, 원만하고 부드러운 감각과 신비로운 미소는 신라 고유미의 절정이다. 또 고구려와 백제와는 달리 고신라 말기부터 불상 조각외에도 임금이나 왕후의 무덤 주위에 둘러 쌓은 돌과 십이지신상등이 만들어 졌다.신라에는 거대한 사찰인 황룡사가 건립되었지만 지금은 그 유지만 살필 수 있고 특히 백제의 阿非知가 건축하였다는 황룡사 9층 목탑은 자못 거대한 것이었는데 뒷날 몽고의 침입때 불타 없어졌다. 특히나 이 9층 목탑은 불교의 융성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신라불교는 고구려와 백제의 영향으르 받으면서 성장하였다. 신라불교를 본격적으로 일으키고 발전시킨 것은 진흥왕이었다, 진흥왕은 사원건축과 승려양성은 물론 僧統등의 제도를만들어 교단을 정비하고 불교계의 향상을 촉진하였다. 그리고 불교 사상을 국가 정책면에 응용하여 國仙花郞단체를 설치, 통일 주도권의 사상적인 기반을 마련하는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551년(진흥왕12년)에는고구려 승려 惠亮이 신라에 와서 國統이 되어 교단을 조직하였고 진평왕때는 수에서 귀국한 원광이 성실종, 열반종을 전하였으며 특히 자장은 계율종을 개창하고 대국통으로 서 신라불교를 총관하였다. 이와같이 신라가 국가에서 불교교단을 조직하고 국통아래 州統, 群統등 僧官을 설치한 것은 국가 불교라는 성격을 나타낸 것이다.변태섭, 한국사통론 , 삼영사, 1986ㄷ.社 會신라 불교의 수용의 사회적 의미는 한마디로 왕권 중심의 귀족국가로의 체제 개편의 단행중에 그 사상적 체계로서 불교가 내세워진 것이라 할 수 있다.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신라의 불교를 공인하는 것은 귀족 더욱 적극적으로 신앙되었고, 일명 왕실불교, 혹은 국가불교라는 말로 표현된 것이다.불교의 수용은 이처럼 왕권을 강화하면서 귀족층을 통제할 수 있는 하나의 관념체계의 필요라는 면에서 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사실 공인 이후에는 불교가 대중화되어 전 신라인의 신앙이 되었고 이전의 巫覡신앙이 가지고 있던 기능을 대신하는 고대 신앙으로서 자리잡게 된다. 불교 공인 후 佛僧의 민간에 있어서의 중요한 봉사의 하나는 개인의 질병을 치료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종래의 巫의 기능을 불승이 대신하고 있었으며 나아가 무격신앙과 불교와 교대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4)統一新羅에 끼친 影響ㄱ.政 治신라 통일기에 들어오면서 크게 융성하게 된 불교는 敎學면에서 한층 발달을 보이며 사상체계로서 성립되었고 신앙면에서도 일반 민중에까지 널리 확산되어 사회의 지배이념이 되었다. 이 당시 신라의 엄격한 골품제도를 정당화하는 명분으로 불교의 윤회사상이 사용되었다. 불교의 윤회전생사상은 功德思想 혹은 因果應報說에 근거를 둔 것으로 신라에 있어서 골품제도라는 엄격한 신분제도를 긍정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마련해 준 것이라 한다. 즉 그것은 전세에서의 어떤 그럴만한 공덕의 응보로써 귀족으로 태어났다는 믿음을 갖게 하여 진골 귀족 세력으로부터 크게 환영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물론 그에 대한 비판으로 불교의 평등사상을 강조하여 그것이 골품제 사회의 완충제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불교가 신분제 사회를 뒷받침한 측면은 인정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ㄴ.文 化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정복하고 3국을 통일한 이후부터는 불교문화의 번성과 토착적인 사상의 결합으로 한민족 사상 가장 찬란한 문화를 이룩하였던 것이다.회화는 전하는 것이 없다. 신라의 회화를 추정할 수 있는 것은 기와에 나타나 있는 무늬와 천마총에서 발견된 로서 당시 회화의 우수성을 엿 볼수 있다. 진흥왕시대 솔거에 대한 기록을 보면 당시의 화풍이 매우 사실적이고 생명력이 있었다는 것을 짐배층의 대립이나 지배층 내부의분열을 지양하고 하나의 질서속에 포함시킬수 있는사상적 기반이 되었으므로 지배층인 진골귀족의환영을 받았고 특히 통일 후에는 전제왕권강화의 이념적 도구로 사용되어 크게발전할 수 있었다. 법상종은 경덕왕대에는 화엄종과 대립할 정도로 크게 성장하였지만 이후 화엄종에 눌려 크게 빛을 보지 못하다가 고려 중기에 가서야 귀족 불교로서 부흥하게 된다.그러나 이 시기의 특징으로 들 수 있는 것은 원효의 和諍思想이다. 그는 어느 한 종파에 구속된 것이 아니라 융합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의 화쟁사상은 불교의 종합화를 추구하였을뿐 아니라 불교의 대중화를 주장하였다. 따라서 그가 민중불교라 할 수 있는 淨土信仰을 널리 전도한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신라하대로 들어서면서 기존의 교종의 전통과 권위에 대항하는 새로운 선종이 등장하게 된다. 신라의 9산은 도의가 가지산파를 연 후부터 성립하기 시작하여 신라말에는 이엄이 수미산파를 개창함으로써 완성되었다. 이처럼 신라하대에는 각지에 禪門9산이 차례로 성립되어 종래의 교종을 대신하여 크게 융성하였다.당시 선종이 유행할 수있었던 것은 민중적이며 혁신적인 성격때문이었다. 또한 교종이 전통적인 권위를 내세운 데 반하여 선종은 신라사회의 모순에 대한 개혁을 주장하였으므로 혼란한 신라하대 사회에서 크게 환영을 받았다. 이리하여 선종은 당시의 사상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뒷날 중세적 지성을 성립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또한 선종과 연결된세력은 호족이었으므로 지방문화 역량의 증대를 가져오게 하였다.김정의, 한국문명사 , 혜안, 19995)高麗에 끼친 影響ㄱ.政 治고려불교는 정치적으로 고려라는 통일국가를 탄생시키는데 그 리념적 기반을 제공하였다. 왕건은 고려 건국이 佛法의 가호에 힘입었다고 굳게 믿었고 그로 인해 高麗를 불교국가로 건설하려고 심혈을 기울였다. 고려초 僧侶 내지 佛敎界는 지방세력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王建이 僧侶와 結合한 일은 그의 豪族聯合策과 연결되는 것이었고 또 民心收拾의 교화면도 아울러 지닐 수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