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란 무엇인가?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 ‘모든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며, 사회를 떠나서는 인간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여기서 볼 때, 가정은 바로 사회의 기본적 단위 즉, 인간이 태어나 최초로 부딪히며 경험하는 가장 기초적인 공동체 집단으로 인간에게 있어 ‘가족.가정’은 대단한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알 수 있다.자신을 태어나게 해 준 아버지, 어머니의 보호아래 자라 그것을 계속 반복해 나가며 사회를 유지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크고작은 모든 생활에 있어서 얼마나 큰 역할을 하며, 정상적이고 평탄한 개인의 삶을 영위해 나가는데 중요한가를 잊고 살기 쉽다. 그러나, 가족의 역할은 개인의 안정과 정상적이고, 능동적인 생활에 뿐만 아니라, 국가나 여타 사회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내가 조사한 것은 한 핏줄의 민족인 북한과 한국을 비교한 것이다.조사를 하면서, 사회주의 체제의 북한도 근대화 물결과 산업의 발달로 인해 의식적으로나많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북한과 같은 사회주의 체제에서의 가족과 자본주의 체제하의 남한 가족을 체제하에서 어떻게 다르게 생활하는지를 알아보고자 한다.첫째로, 가족 관계면에서 살펴 보겠다.북한은 '가족법' 제1조에서 "가족은 사회주의 혁명리론의 실습장이며 생산의 최저단위"라고 규정해 놓고 있다. 이는 북한이 가족을 혁명의 실습장일 뿐 아니라 생산의 최저단위로 인식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북한이 가족에 대해 이와 같이 인식하고 있는 것은 여타 사회주의 국가와 마찬가지로 가족을 마르크스·엥겔스의 정의에 따라 국가와 함께 소멸해야 할 대상으로 파악하고 있는 데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한다.즉, 북한은 마르크스·엥겔스가 그의 저서 《가족 사유재산 및 국가의 기원》에서 "생산의 성장, 사회의 진보에 따라 소가족 형태가 생성 발전해 왔으며… 경제발전의 일정한 단계에서 발생한 사유재산과 계급, 그리고 국가의 소멸과 함께 가족도 소멸해야 한다"고 규정한데 따라 한국이 가족을 “사회의 기초단위”로 인식하도로 중요한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는 실정이다.그러나 북한의 호주제도 철폐는 여성을 가정에서 사회로 나오게 하여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해 공포만 했을뿐, 여전히 북한은 사회주의적 이념과 함께 남한과 같이 가부장적 성격이 여전히 남아있다고 한다.이것은 북한의 가족법 제 30조 “ 아들이 없거나 자식을 낳지 못할 경우 타인의 자식을 입양할 수 있다”는 규정에서 볼 수 있듯이, 부모-자식 관계는 권위적 관계. 특히 부권의 권위가 강하게 존중되고 있고 남아선호사상이 지배적임을 알 수 있다.셋째로, 직업의식에 대해 살펴보겠다.북한 주민들에게 있어 직장은 필수적이다.왜냐하면 기본적으로 재산 및 사적 소유가 인정되지 않아 노동력을 제공하지 않으면 생필품을 배급받거나 확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그래서 북한에서 노동 가능한 인력은 거의 경제활동에 참여한다고 볼 수 있는데, 1995년 북한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69.8% 수준으로 추정된다고 한다.한국은 구조가 고도화되어 가면서 직장인들의 생활과 의식도 많이 바뀌고 있다.한국인들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60%를 넘어섰다고 한다.S경제활동인구조사 통계청(1999)에서는한국의 취업자수는 총 1천50만7천명으로, 전체 인구의 41.5%가 일자리를 갖고 있다고 조사했다.이중 자영업주는 28.8%이고, 가족 종사자는 9.1%이다.피고용자의 비율은 전체 취업자의 62.2%이다. 취업자 총수는 1997년에 비해 92.4% 수준으로 하락 했다고 한다.이상 직업 비율을 보았다.직업의식은 어떠한가?북한은 노동이 가장 “신성하고 여예로운 것”이며, 모든 주민의 지위는 노동에 대한 성실성에 의해 규정되고, “노동에서 가장 모범적이며, 영웅적인 사람은 인민의 사랑과 높은 존경을 받는다”라고 할 정도로 주민들의 삶의 가치를 노동에 둘 것을 강조한다.그러나 경제난으로 공장 가동률이 낮아지자 공장에 나가도 할 일이 없고, 임금만으로 살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따라서 북한 노동자들은 대부분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기보다 부업이나 개인 장사에 몰두하기 위해 과거에는 ‘혁 연령은 남자 30.2세, 여자 27.6세로 남여혼인 연령 차이는 2.7세이었고, 남녀 모두 혼인연령은 높아지나 혼인 연령차이는 점차 줄어드는 추세이다.혼인의 연령별 구성비를 보면 남자는 25-29세 49.4%, 30-34세 26.3% 순서이며, 여자는 25-29세 48%, 20-24세 27.1% 순서로 나타났다.이러한 결혼 평균 연령을 보인다.한국과 북한의 혼인은 큰 차이를 보인다.배우자선택은 1970년대까지는 주로 중매로 이루어졌으나, 1980년대 이후부터는 연애결혼이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북한의 가족법도 제8조에서 "공민은 자유결혼의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실제로 최근에는 북한의 젊은 남녀들 사이에서 연애를 하는 사례가 늘고 있는 추세이다. 그러나 사회적 통제가 심하고 아직 남녀가 데이트하는 장면 등이 사회적으로 수용되지 않기 때문에 연애는 밤에 음성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따라 진정한 사랑을 나누기보다는 육체관계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으며 이로 인해 혼전 임신사례가 빈발해 사회문제로 되고 있기도 하다.대학생의 경우 혼전임신을 하게 되면 즉각 퇴학하는 것은 물론 노동직장에 배치된다. 이러한 시세를 반영하듯 최근 북한의 일부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사랑과 결혼을 별개의 것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팽배하고 있다.이는 북한의 대표적인 시나리오 작가인 장유선이 《조선영화》(93. 9)에 기고한 글에서 일부 북한 청소년들이 사랑과 결혼을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나 "이러한 사랑은 결국에는 자기 자신을 불행에로 끌고 갈 것"이라고 경고하고 나선 데서도 알 수 있다. 또한 자유결혼의 권리를 명문화해 농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젊은이들이 결혼을 하는 데는 아직 정치적·사회적인 많은 제한이 따른다.우선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출신성분에 따른 제한이다.북한에서는 당사자들간에 아무리 좋아해도 해당조직에서 성분문제를 들어 반대하면 결혼할 수 없다. 특히 당원이나 간부 또는 앞으로 당원이 될 수 있는 남자가 성분이 나쁜 여자와 결혼하고자 할 때는 과 친구들은 1인당 5~15원 정도인데 이는 북한 근로자의 평균임금 80원을 감안할 때 후한 편이다. 직장에서는 대체로 회람을 돌려 축의금 액수를 적고 나중에 임금에서 공제하기도 한다.그러나 최근에는 심각한 경제난의 여파로 일반 주민들 사이에서는 축의금을 현금으로 내기 보다는 자기가 먹을 양식과 선물을 가져가는 추세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결혼식이 끝나면 신랑신부는 3~4일간의 휴가를 얻어 신혼살림을 꾸리는데 신혼여행은 거의 가지 못한다. 신혼여행 대신 인근의 김일성 동상을 찾아가 일종의 결혼신고를 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으로 되어있다. 결혼비용과 신접살림 살이는 양가에서 부담하거나 소속직장에서 약간의 도움을 주기도 하기 때문에 신부는 일반적으로 주방용품 등만을 준비한다. 그러나 지방에 따라서는 아직 예전의 결혼풍속이 남아있는데 함경북도 등지에서는 남자는 일체 결혼준비를 하지 않고 여자가 모든 준비를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여자가 타지역으로 시집을 갈 때는 결혼식을 올린 후 전에 살던 직장에 사직원을 내고 새 거주지에서 직장을 구해 취직한다. 결혼식을 한 부부는 결혼등록을 함으로써 명실상부한 부부가 된다. 북한의 가족법 제11조에는 "결혼은 신분등록기관에 등록을 하여야 법적으로 인정되며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 결혼등록을 하지 않고 부부생활을 할 수 없다"고 규정해 놓고 있다. 이는 결혼등록을 마쳐야만 진정한 부부가 되며 부부간의 성생활도 원칙적으로는 이때부터 가능하다는 뜻으로 이해된다.그리고 북한은 이혼을 제도적으로 제한하고 있다. 따라서 북한에서는 비교적 이혼율이 낮은 편이다. 북한이 1956년 3월 합의에 의한 이혼제를 폐지하고 재판에 의해서만 이혼을 허용하는 내각결정 제24호를 채택, 이혼을 재판에 의해서만 가능하도록 명문화했기 때문이다.이와 관련해 북한의 가족법도 제20조에서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이혼하면 없어진다. 이혼은 재판에 의해서만 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즉 이혼은 관할 재판소 에 재판을 청구하여 그 판결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또한 북20.9% 순서이며 여자는 35-39세 24.2%, 30-34세 24.0% 순서로 나타남. 이혼사유는 부부불화 77.1%, 경제문제 7.2%, 가족간불화 3.3%로 나타났다. 또한 남한에서는 이혼을 결정할 때 본인의 결정에 의해 대부분 좌우되나, 북한은 국가가 직접 관여하고 통제한다. 이러한 점으로 인해 이혼률에 있어서도 남한과 북한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여섯째, 가족 형태를 비교해보겠다.가족의 형태는 남북한은 모두가 거의 비슷한 형태의 변화를 해 오고 있다. 산업화의 과정 속에서 핵가족화 현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산업화는 노동력 재생산의 비용을 크게 증가시키고 자녀에 대한 기대나 자녀관을 변화시켜 출산률을 저하시키고 핵가족화 하게 한다(김혜경, 오숙희, 신현옥, 1992). 이러한 일반적 경향은 체제가 다른 남한과 북한에서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총 출산률의 변화를 보면 남한은 1960년 6.0명에서 1993년 1.6명으로 줄었으며, 세대당 평균 가족 수는 남한은 1960년에 5.6명에서 1990년에 3.7명으로 북한도 1997년도에 4.8명으로 크게 줄었다(국토통일원, 1991). 이러한 가족규모의 축소현상은 3세대이상의 확대가족의 비율을 감소시키고 핵가족의 비율을 증가시켰다. 가족규모의 축소와 핵가족화 현상은 남북한 모두 도시뿐만 아니라 농촌에서도 동시에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다(손봉숙 외, 1992). 북한의 인구감소현상은 국가적인 산아제한의 권장과 함께 북한 주민 스스로가 생활이 어려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은 지속적으로 산아제한 정책을 펴왔는데 이로 인해 3-6명으로 구성된 핵가족 또는 부부중심의 2세대 가족이 주된 가족형태일 것이라고 보고 있다(이온죽, 1993). 그러나 부모부양을 중시하는 우리의 전통적인 사고와 부족한 주택사정으로 인해 상당수의 가정(약20%정도)이 확대가족의 형태를 하고 있을 것이라는 추정도 가능한데 이러한 점은 최근 탈북한 탈북자들의 면담에 의한 연구(박미석, 정승원, 1999)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일곱째, 가사노것이다.
국립 중앙 박물관은 초등학생때 조선총독부 건물에서 전시되었을 시에 견학하고, 임시로 새로 옮긴 곳으로 처음 가보았다.그곳은 평일인데도 사람의 발길이 끊이지가 않았다.무엇보다도 그들 대부분이 일본인이었다는 것이다. 관광번역사를 통하여 문화재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아~ 감탄을 하는 그들을 보며 좀 의아해 했다.내 옆에서 관광통역사의 설명을 들으면서 문화재를 감상하는 일본인 중 이 문화재는 우리 나라에도 있다 라고 말했다.그 문화재가 어떤것인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때 좀 놀라면서 그 문화재에 대한 보조설명이 적힌 문구를 보니 중국에 영향을 받아 우리나라에서 꽃피우고 다시 일본등지로 퍼뜨렸다. 라고 씌여 있었다. 왜 그 문화재가 생각이 안나는지.. 정말 아쉽다.나의 국립 중앙 박물관의 견학은 일본인들의 관람 태도를 보고, 학교에서 책으로 미리 접해 익숙한 문화재를 알고 보니 맘이 들뜨지 않을 수 없었다.내가 그곳에서 유의깊게 본 것은 본 건물 2층의 구석기 시대부터 삼국시대의 유물이었다.박물관 견학의 시작이 여기서부터라는 것도 있었지만, 주위에서 비슷한 물건을 흔히 보지 못했던 이유도 있었다.선사시대 유물관은 충적세 간빙기를 거쳐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등 시대의 시작과 그 유적, 유물을 영상매체를 제공하여 그 분포도와 간략적으로 알게 끔 했다.그러나 한국 지형도에 너무 작은 점들로 나타내어 보기에 좀 힘들었다.구석기 문화는 인류가 유이원에서 진화하여 수렵과 채집경제로 이동생활을 한 시기 로 뗀석기가 주요 연장이었고, 나무나 뼈로 만든 연장도 사용했다... 평양 용곡동굴, 승권승리산동굴등에서 화석출토되어 한반도에 산 구석기인들의 모습을 복원할 수 있게 되었고 석회암동굴에서 검출되는 동물화석과 꽃가루의 흔적으로 당시 기후와 자연환경을 알 수 있다. 고 한다. 소개 된 유적지가 동굴이며, 전곡리 유적에서 발견된 외날찍개 , 밀개 , 주먹도끼 , 상무룡리 유적에서 발견된 찌르개 등 남겨진 유물들을 보니 부딪쳐서 깬 돌로 만든 기구들 뿐이었다. 보통돌과 어떻게 구분이 가능한지 좀 어렵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구석기가 점차 후기로 가면서 돌의 크기가 작아지고 훨씬 더 세련되어진 것을 볼 수 있었다.신석기 문화는 기원전 10,000년경 시베리아의 여러곳에서 흩어져 살던 고아시아족들이 중국 동북 지방과 연해주 지역을 거쳐 한반도로 이주해 오면서 한반도도 신석기 시대에 접어들었다 라고 시작을 한다.괄목할 만한 것은 구석기 시대에서는 볼 수 없었던 토기를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반달 돌칼등은 구석기 시대의 기구보다는 좀 더 세련되게 보였다.그리고 동글거나 모를 죽인 네모꼴의 구덩이인 움짐에서 생활한 흔적들을 발굴 사진을 봄으로서 관람했다.벽에 걸린 삽화를 보니 신석기는 동북지방, 남부지방, 중서부지방으로 나뉘며, 동북지방에서는 돌끌,돌칼, 갈판과 갈동, 빗살무늬 토기가 남부지방에서는 부산 동삼동 조개더미에서 발견된 덧무늬 토기조각, 꾸미개, 동물 이빨로 만든 장식기구, 그리고 여인상과 멧돼지 모양 토제품을 볼 수 있었다. 중서부 지방은 서울 암사동 유적 지에서 발견된 돌도끼, 뾰족 바닥에 아가리가 곧추선 반란형의 빗살무늬 토기가 대부분이었고, 집터는 네모 구덩이가 발견되었다.그리고 인형으로 그들(신석기인)의 생활을 보여주었다.그것에서, 무덤이 납작하고 돌을 깔고 주검을 그위에 놓고 자갈로 덮어 의식을 마치는데, 그들이 생활했던 집과 좀 떨어져 있는 것을 보면서 그들(신석기)은 삶과 죽음을의 공간을 구분했음을 알 수 있었다.이 인형전시를 보고 신석기의 문화에대해 이해를 쉽게 할 수 있었다.청동기 시대는 기원전 10세기 중국 동북지방에서 청동으로 만든 도구와 무기를 사용하는 새로운 주민이 한반도로 들어와 선주민에 동화되면서 한반도가 청동기 새대가 시작되었다. 고 한다. 청동기 제품은 지배계층의 꾸미개나 무기 또는 의기로 만들어졌다고 한다.그리고 거푸집이 발견되어 직접 제작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신석기 시대와 비교하면, 돌로 기구들이 점자 매끄럽게 다듬어지고(간석기), 빗살무늬에서 민무늬 토기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청동기로 만들어진 유물 대부분이 많이 부식 되었었다. 청동기의 검은 초기에는 단순한 검모양으로 실용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후기로 갈수록 무엇을 덩붙이는 등 필요없이 좀 과장하여 꾸몄다.청동기에서 초기 철기 시대는 무엇보다도 고인돌, 돌널무덤, 독무덤, 널무덤을 들 수 있다고 한다.북방의 고인돌의 형태 남방식의 고인돌의 형태(큰 돌로 덮개를 덮음)를 사진을 통해 볼 수 있었다.청동기 시대의 유물이 전시된 것 뒤에 간략한 설명이 적혀 있었는데, 우리나라 청동기는 요령식 동검 문화(기원전 10세기 중국 요령성을 중심으로 성립)와 한국식 동검문화(청동기 후기)로 구분 한다고 한다.요령식 동검은 날부분이 활모양이었으며, 농경문 청동기 표면에는 사람이 싸리 빗자루 같은 것을 들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요령식과 한국식의 유물을 보면서 한국식이 좀더 세련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원삼국시대(역사 기록상 삼한에 해당)의 유물이 전시된 곳으로 간다.오수전, 금제띠고리, 은제막꾸미기, 쇠솥등을 보고 무엇보다 유리로 된 유물을 볼 수 있었다.유리는 메소포타미아에서 처음 생산되어 이집트, 로마, 시베리아 등지로 퍼져서 넘어왔다고 한다. 우리가 유리로 제작했다는 것은 거푸집이 발견 되어서 이리라.유물뒤에 적힌 보조 자료에는 금은보다 구슬을 재보로 여겼다는 삼한 풍속에서 알 듯이.. 라 적혀 있었다.따보, 쇠칼, 쇠낫등의 농기구도 볼 수 있었다.고구려 벽화가 그려져 있는 조그마한 벽화 같은 곳을 지나 고구려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는 곳으로 갔다. 고구려는 맥족이 건국하여, 주몽을 중심으로 국가를 형성하고 지리상 주변국가와 끝없는 항쟁을 한 나라이다.국사 책에서 많이 본 말탄 사람(쌍영총)등을 볼 수 있었고, 그들은 문화는 고분벽화, 광개토대왕비등에서 선진성과 국제성이 특징으로 볼 수 있다고 한다.고구려의 토기는 시기에 따라 모양과 재질이 달라졌다는 것을 느낄수 있었다.백제는 토기들은 정말 아무런 장식도 없이 순박함을 느낄 수 있었다.그리고 지금과 같은 유리용기를 볼 수있었는데, 이것은 단지 우리가 제작해서 썼다는 가정을 남긴 유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