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 사람은 있고 받은 사람은 없는 비자금...재신임투표까지 몰고왔나...10월 10일 노무현 대통령은 즉각적인 기자회견을 갖고 최도술 전 청와대 비서관의 SK비자금 수수의혹 사건에 대해 사과하고 국민에게 재신임을 묻겠다고 말했다. 이번 노무현 대통령의 재신임거론은 국가 전체에 큰 파장을 주고 있다. 한편에서는 동정심을 얻고자 하는 깜짝쇼라느니 경제죽이기라며 국정혼란만 일으키는거 아니냐는 등 반발을 세우는가 하면 다른쪽에서는 노대통령 자신도 상당한 고뇌를 거쳤고 자신의 측근의 문제점에 대해 책임지려는 자세를 보인 것은 높게 평가해야 한다는 상반된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나는 노무현 대통령의 재신임거론에 대해 반대에 한 표를 던진다. 노대통령의 갑작스런 행동이 어쩌면 민주당의 분당, 감사원장 부결, 이어 촤도술씨 사건등으로 막다른 길에 내몰린 대통령의 마지막 발악이라고 까지 표현할 수 있겠지만 그의 재신임 발표에 옳고 그름을 떠나 아직은 재신임 거론 자체가 시기상조인 듯하다.지금 나라 사정이 부동산 가격 폭등 안정, 이라크 파병, 여야당이 연류된 SK의 수백여억원의 비자금, 경제 위기, 또 어제 전두환 전 대통령 비자금에 유래없는 재신임 문제까지 터지면서 보통 시국이 아니라는 것을 일반 국민도 모르는 사람이 없다. 물론 노대통령이 이러한 판국에 재신임을 거론하기까지 많은 고심과 갈등을 했으리라 짐작된다. 취임 초부터 도덕적 신뢰를 바탕으로 한 개혁 대통령이 되겠다는 취지에 따라 이와 같은 결정을 내렸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다소 경솔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나름대로 국정의 혼란과 공백이 없게 하겠노라 했지만 벌써부터 국민과 야당은 국정의 혼란을 거론하고 나서고 있고 내각과 이광재 실장의 사퇴까지 오고 있는 실정이 아닌가.만약에 학교에서 선생님이 더 이상 교사직을 못하겠다면서 불만을 토로하다가 나중엔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는다는 강력한 태도에서 갑자기 풀이 죽은 모습으로 그동안의 불미스러운 일에 사죄하는 뜻으로 교사로서의 거취여부를 학생들의 뜻에 맡기겠다고 한다면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 또한 그 혼란을 어떻게 해결 할 것인가.
目次Ⅰ.서론Ⅱ.무측천의 일생과 주요활동Ⅲ.무주혁명Ⅳ.무측천의 폭정정치Ⅴ.측천시대의 종말Ⅵ.측천시대의 재평가(再評價)Ⅶ.결론Ⅰ.서론측천무후라는 것은 통칭이고 중국에서는 흔히 무측천(武則天)이라 불린다. 성이 무씨였기 때문이지만, 당의 제3대 황제 고종의 황후였으므로 사서에서는 측천 황후로 전기를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당이라는 국호를 폐하고 주(周)라는 한 왕조를 세워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황제의 자리에 올라 성신(聖神)황제라 칭했다.중국사에서 여성의 정치적 역할은 매주 제한됐다. 기껏해야 최고 권력자인 황제를 뒤에서 조정했던 것이 고작이다. 그러나 잠시나마 唐(당)제국의 맥을 끊고 스스로 황제에 오른 여성이 있었으니, 그녀가 바로 무측천이었다. 그녀는 중국사의 유일한 여성황제로서 과거제 실시등 매우 진보적인 역할을 수행한 장본인이기도 하다.여기에서는 무측천의 일생과 주요활동, 그리고 후대에 미친 영향과 그에 관한 평가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Ⅱ.무측천의 일생과 업적(주요활동)무측천은 624년 山西(산서)의 무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원래 목재상으로, 수말기에 李淵(이연), 즉 唐高祖(당고조)을 좇아 봉기하여 당의 건국에 참여했다. 그 공로로 당 건국 후에는 고위직을 차례로 역일할 수 있었다. 무측천은 14세 때 궁녀로 선발되어 입궁했다. 그녀의 본명은 明空으로 이 글자는 그녀 스스로가 만들었다. 태양을 가리키는「일」과 달을 지칭하는「월」그리고 하늘을 의미하는「공」세 글자가 합쳐 이루어진 것으로 하늘에 해와 달이 동시에 떠있어 비춘다는 뜻이다. 太宗(태종) (626-640)은 그녀에게 「武媚(무미)」라는 칭호를 내렸다. 태종이 죽은 후 그의 후궁들과 함께 절로 들오간 그녀는 태종을 이은 高宗(고종) (649-683)에 의해 다시 환속되어 그의 후궁이 됐다. 다음해 고종은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녀를 황후로 봉했다. 이로써 그녀는 권력의 핵심으로 진입하는 계기를 마련했던 셈이다.일찍부터 총기 있기로 소문난 무칙천은 역사에 대한 지식이 천은 반대세력을 잠재우고 확고한 통치가반을 마련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강구하기 시작했다. 우선 인재 등용을 위한 획기적인 조치를 취했다.즉 과거제를 통해 선발한 인원수를 증가시키는 동시에, 황제 앞에서 과거시험을 치르는 殿詩制(전시제)를 설치하여 과거제 체제의 위상을 높였다. 주왕조가 멸망하고 당이 제건됐을 때 활약한 명신중 상당수가 이때 그녀의 획기적인 인재선발 정책을 통해 관계에 진출했던 인물들이다.宋代(송대)부터 더욱 발전하기 시작한 과거제는 중국 제국이 오랫동안 유지되는 비결 중 하나였다. 과거제는 관직 임용에 출신보다는 능력을 우선하여 우수한 인력이 황제를 위해 봉사할 수 있도록 만든 제도적 장치였다.또한 일반 서민들에게도 사회적 상승의 숨구멍을 터줌으로써, 사회적 안정을 통해 제국의 질서가 탄탄한 토대위에서 유지되게 됐다. 아울러 과거제의 실시로 새로운 성격의 지배층이 중국사회에 출현했다, 이때부터 중국의 지배층은 과거제를 통해 관료를 역임했거나 예비적인 관료군으로 올라선 사대부에 의해 구성됐다. 이들 지배층은 실제로 토지나 상업 자본과 같은 경제적 기반을 바탕으로 형성됨으로써, 세가지의 다른 얼굴, 즉 지주-상인-지식인의 면모를 동시에 지녔다. 이처럼 토지-상업자본-학식이 결합된 지배층의 기반이 과거제를 통해 확립되면서 전제왕정은 오랬동안 비교적 안정되게 유지될 수 있었다.무측천은 또한 산업발전,특히 농업발전에 심혈을 기울였다. 고종 재위시 그녀는 이른바「12개조의 건의」를 받아 들였는데, 첫째 조항이 바로 『농업과 잠업을 권장하고 부역을 가볍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경지와 호구를 증대시킨 실적을 지방관의 포상에 대한 표준으로 삼았다. 이러한 적극적인 산업진흥정책 덕으로 그녀의 통치기간에 중국의 사회경제가 안정추세로 접어들었다. 특히 국가가 장악하는 호구의 숫자가 계속 늘어 당태종 제위시 3백80만호였던 전국의 호구가 무칙천 퇴위시에는 6백15만호로 비약적인 증가를 보였다.그녀가 사망하고 唐(당)이 복구된 후 玄宗(현종)(712-756)재위기 그녀는 통치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몇 가지 무리한 시책을 펼침으로써 정치적 수명을 단축 시켰다. 무엇보다도 비밀정치와 공포 정치를 감행하여 반대세력의 반발을 부채질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또한 불교를 중흥시키기 위해 대규모 사찰을 축수하는 등 백성의 부담을 증대시켰으며, 사원경제가 국가의 통제를 벗어날 만큼 지나치게 확장되는 것을 방조했다. 더욱이 그녀의 통치말기에 친족들의 권력남용은 절정에 달했다.마침내 그녀가 중병에 걸리자 당의 재건을 위한 쿠데타가 일어났다. 정변은 결국 성공을 거두어 705년 당은 재건되고 중종 황제가 복위했다. 같은 해 그녀는 병사했다. 이때 나이는 82세였다. 무측천이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천하대권을 휘두른 기간은 15년 정도 밖에 안됐다. 그러나 이미 660년부터 약30년간 중국을 실질적으로 통치했기 때문에 그녀는 모두 45년간, 즉 80여 년의 생애 중 절반 이상을 최고의 권력자로 군림했던 것이다. 아마도 이렇게 장수한 권력자는 남녀를 통틀어 중국사에서 그리 흔하지 않았던 듯 하다. 철저하게 남성위주 사회의 중국에서 여성이 그렇게 오랜 기간 권력의 정상에 있었다는 사실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Ⅲ.무주혁명측천문자는 천(天)?지(地)?일(日)?월(月)?성(星)?국(國)?군(君)?신(臣)?인(人)?년(年)?정(正)?재(載)?초(初)?수(授)?증(證)?성(聖)에다 측천의 이름자인 조(照)를 의미하는 ‘조(照)’를 합쳐 총 17자가 있었다고 한다.) 이 가운데 천?지?인 등의 중요한 글자 외에, 증성?재초?천수 등 연호로 사용된 문자의 의미를 살펴보면, 측천은 이 특정한 문자를 사용하도록 강제함으로써 그 위광을 나타내려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이것이 저항없이 사용되었음은 당시의 문서를 통하여 명확히 증명된다.측천은 이미 30년에 걸친 집정 경험을 갖고 있었고, 또한 당 활실의 일족은 거의 제거된 상황이었다.690년 9월 관중의 인민 900여 명이 시어사(侍御史)인 부유예의 인솔하에 국호를 당(唐)에서 주(周)로 바꾸기를 청원하였다.되었다. 이 때 측천의 나이는 63세(혹은 64세)였다.측천은 즉위 후, 고종 치세인 666년부터 있었던 여러 주의 관사?도관가운데, 관사에 대운사(大雲寺)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 때까지 도교의 시조 노자가 당 황실과 같은 이씨라고 해서 도교를 불교보다 우위에 두었던 것을 뒤집어 ‘불선도후’로 하였다. 692년에는 불교를 더욱 존중하여 도살하거나 물고기나 새우를 채집하는 것을 금하였다.한편 이미 서술한 바와 같이 측천은 관롱지배집단을 박멸하였기 때문에 그에 대신할 인재를 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측천은 한편으로는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인재를 직접 관계(官界)로 흡수되게끔 하였다. 또 측천을 ‘장님 성신황’이라고도 하였지만 측천은 불합리한 인사만 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말하는 것 따위에는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여 강경하게 밀고 나갔다. 측천은 상벌권을 단단히 쥐고 있었고, 당시의 영민하고 어진 이들이 다투어 측천을 위해 일하였다. 따라서 악담이 있었다고는 해도 측천의 인재등용은 높이 평가해도 될 것이다. 측천 이후 꽃핀 현종의 ‘개원(開元)의 치’의 중심인물이 측천 때 등용된 사람들이라는 점은 이를 증명하고 있다.Ⅳ. 무측천의 폭정정치측천의 폭정으로 지적되는 것 같은데 혹리)의 임명이 있다. ‘내(來)?삭(索)’이라고 불린 내준신과 삭원례가 그들이다. 삭원례의 아버지는 노름꾼이었으며 삭원례도 원래 도적이었는데, 낭야왕 충의 반란계획을 고하여 측천의 환심을 사서 시어사가 되었으며, 이 사건으로 천여 가가 처벌되었다.낙양궁성 서면의 남쪽에 있는 여경문 내에 추사원이 있고 그 곳에서 혹리가 취조를 하였는데, 여기에 들어간 자는 다시 살아 나온 예가 없었으므로 여경문을 예경문(例竟門)이라고 하였다. 경(竟)은 진)의 의미이다. 당시는 또 관리도 한 번 입조하면 소식이 끊어지는 일이 가끔 있었으므로 입조 때 집안 사람들에게 다시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며 이별을 고하였다고 한다.내준신이 어느 때 강직한 재상 적인걸에게 모반의 흑심이 있다고 무고하였다. 그는 적인걸 동생인 창종이 측천을 섬겼고, 이어 창종이 형인 이지를 추천하였다. 둘 다 화장을 하고 아름다운 옷을 입었다고 한다. 창종은 산기상시(散騎常侍), 이지는 사위소경(司衛少卿)이 되었다.일반적으로 남자 황제가 많은 비를 총애하는 일은 당연시하면서 여제 측천에게 두세 명의 남성 총애자가 있었던 사실을 비난하는 것은 지금까지의 남성중심사관의 결과이다. 게다가 장이지 형제의 경우, 당시 측천의 나이가 이미 70이 고령이었던 점으로 생각하면 이 총신을 남녀 관계로 보고 비난한다는 것은 좀 잘못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어쨌든 장이지 형제는 곧 권세를 쥐었고, 무승사?무삼사 등 무씨 일족의 대관들조차 그들의 눈치를 보는 형편이었다. 698년 측천은 장이지 형제를 위하여 공학부)라는 관청을 만들고, 그 곳을 측천의 문화 살롱으로 삼았다. 여기에 시인인 이교와 송지문 및 현종 때 활약한 장열도 들어 있었다. 측천은 이 곳에서 『삼교주영』1천 3백 권을 편집하였다. 여기에서 삼교란 유?불?도 3교를 말한다. 측천은 국호를 주(周)라고 한 이상, 한편으로는 유교를 존중하였으며 『삼교주영』에서는 유교를 중심으로 해서 불?도를 더하였다.한편 측천은 만년에 불로장생을 바란 탓인지 도교에 심취하였다. 장창종은 주 영왕(周靈王)의 왕자 진의 후예라고 했기 때문에 측천은 왕자 진을 위하여 「승선태자비」를 만들고, 그 상부의 비액(碑額)은 스스로 비백(飛白)이라고 하는 새로운 서체로 썼다. 측천의 이 친필 글씨는 지금도 남아있다.Ⅴ.측천시대의 종말측천도 나이에는 어쩔 수 없어, 후계자를 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측전의 조카인 무승사?무삼사는 황태자 자리를 당연히 기대하였으나, 강직한 대관 적인걸 등의 반대에 부딪쳐 성공하지 못하였다. 측천은 결국 원래의 중종을 소환하여 황사(皇嗣), 즉 원래의 예종(중종의 동생)을 대신해서 황태자로 삼았다. 때는 698년이었다.705년 측천의 병이 악화되었다. 총신의 장이지 형제는 재상의 지시에 따라 참수되고, 중종이 감국(監國)을 하게 되었다. 이어 측천되었다.
『서태후』이번 과제를 부여받고서 서태후에 대한 많은 것들에 대해 이것저것 조사해 보았다. 지금도 나의 뇌리에서 스치는 서태후에 대한 영화는 중국 역사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인 듯 싶다. 이 영화는 서태후에 대한 젊은 낭만을 담고 있는데 1860년을 전후한 중국의 복잡한 사정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준다. 함풍제가 즉위했을 당시 중국은 제국주의의 침략에 속수무책이던 시기였다. 군함을 이끌고 신식무기로 무장한 군인들이 상륙하여 중국의 국토와 인민을 유린하며 청나라 조정을 압박하여 국가의 이권을 강제로 수탈해갔다.야호족의 여성은 황녀가 되지 못한다고 생각된 그녀는 결국 후궁에서 본처인 동태후를 능가하는 서태후로서 황후가 되기 위해 그 총명함과 강인함을 버팀목으로 그 당시 장수했다고 볼 수 있는 73세를 영유한 여걸이다. 함풍제의 사후 동치제가 6세에 즉위하자, 공친왕(恭親王)과 공모하여 쿠데타로 반대파를 일소하고 모후(母后)로서 2세 연하인 동태후(東太后:함풍제의 황후로 慈安皇太后라고도 한다)와 함께 섭정을 시작하였다. 1875년 동치제가 일찍 죽자, 여동생의 아들(당시 3세)을 옹립, 광서제(光緖帝)로 즉위시켜 자신은 섭정이 되었다. 광서제가 16세가 되자 친정이 시작되었으나, 국정의 실권은 서태후가 쥐고 있었다. 98년 광서제가 서태후를 싫어하여 입헌파 캉유웨이[康有爲]에 접근, 신정을 실시[戊戌變法]하여 입헌군주제를 위한 전환을 꾀하자, 서태후는 보수파 관료를 부추겨 쿠데타를 감행, 신정을 100일로 종식시키고 광서제를 유폐하는 무술정변(戊戌政變)을 일으켰다. 의화단(義和團)의 반(反)제국주의 투쟁이 고조되자, 이를 이용하여 열강에 대해 선전을 포고하였으나, 8개국 연합군의 침입을 받아 시안[西安:陝西省]으로 피신하였다. 모든 진보적 개혁에 반대하던 서태후도 이 사건이후 베이징[北京] 귀환하자 다소 진보적인 성격을 띈다. 공교롭게도 광서제가 죽자 다음 날 서태후마저 세상을 뜨게 되어 마지막 황제 부의는 이 그늘에서 벗어나게 된다.비디오를 보고서 여러 관련된 서적들을 뒤져보았는데 대부분의 참고서적들이 대개 그녀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쓰여 있었다. 그 중에 동태후와 광서제의 죽음에 대해서는 거의 서태후의 암살이라고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 앞 뒤 정황으로 살펴보면 그 추측이 맞는 듯도 하다. 서태후는 어렸을 때부터 측천무후를 흠모하여 그녀와 같이 되고자 하는 야망을 키웠고, 그 꿈에 다가가기 위해서 수단을 가리지 않았다. 이 점은 측천무후와 비슷하다고 생각된다. 지금 이 시점에서의 나의 생각은 이렇다. 역사가는 측천을 도덕적 잣대만으로 평가해서는 안 되며, 그 정치와 나아가 그 시대를 어떻게 평가할 거인지를 주제로 삼아야 한다. 측전시대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기초사료에서 여성이 정권을 장악하여 재앙을 낳은 것으로 평가하고 있지만, 오히려 그것을 극복하고 적극적인 평가를 부여하는 것이야말로 역사가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현재 중국이 약 반세기에 걸쳐 겪어야 했던 시련은 서태후 탓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그녀에 관한 대중소설에는 그녀의 악행이 잔뜩 묘사되어 있다. 정말로 이해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왜 일부분만을 보고 그렇게 몰아세우는지 말이다. 그녀는 전한대의 여(呂)황후, 당대의 무(武)황후와 더불어 한 여자의 수중에서 나라가 어떤 지경에 이르는지를 일깨워주는 악의 상징이 되었다. 인민중국에서도 고위직에서 능력을 인정받는 여성의 수가 그토록 적은 이유 중의 하나는 여기에 있다 해도 좋을 것이다.
목 차Ⅰ. 서론Ⅱ. 한국중소기업의 위상1. 중소기업의 역할2. 우리 나라 중소기업의 현황3. 중소기업금융의 실태Ⅲ. 신용보증제도의 당위성 및 당면과제1. 신용보증제도의 정의2. 신용보증제도의 당위성3. 신용보증제도의 당면과제1) 정부출연금의 확대2) 복수경쟁체제의 부작용Ⅳ. 중소기업발전을 위한 신용보증제도의 개선방안1. B2B 전자상거래의 활용1) 현황 및 문제점2) B2B 전자상거래활성화를 위한 보증제도의 방향2. 신용보증제도의 기능강화1) 수출보증지원 확대2) 신용보증에 대한 평가기준 개선3. 영세소기업을 위한 보증지원제도의 확충Ⅴ. 결론Ⅰ. 서 론우리 기업을 둘러싸고 있는 경제환경은 끊임없이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다. 이렇게 급속한 환경변동 속에서도 그 동안 중소기업은 기술혁신, 우리경제 산업발전에 크게 기여하여 왔다. 그래서 우리 나라는 과거 대기업 육성을 통한 경제성장에서 벗어나 중소기업의 발전을 위한 움직임이 대두되고 있는 중소기업에 대한 기대가 더욱 커지고 있으며 그 역할 또한 강조되고 있다. 대기업보다 작은 규모이지만 우리 나라 기업의 전체 약 98.8%를 차지하고 있는 중소기업은 생산수준, 부가가치 측면에서 우리 경제 발전에 있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그러나 그런 기대와 관심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중소기업은 대기업의 그늘에 가려져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고 중소기업을 살리자는 여론이 부각되고, 여러 지원제도가 운영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생산, 수출, 자본 등 여러 면에서 매우 열악한 환경에 놓여있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최근 IMF사태 이후 우리 나라 경제는 경기 악화, 구조조정 지연 등 또 다시 위기상황에 봉착하였고, 이에 중소기업의 경기전망을 더욱 어둡게 하고 있다.)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에 따르면 중소기업 경기전반 예측지수인 S.B.H.Z가 80.3에서 76.8로 나타나 중소기업의 경기가 악화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이것은 최근의 경기침체가 지속되면서 경기하락에 따른 금융시장의 자금 경색이 심화되리라는 것을 짐작하게 301100.05,707,417100.01,844,203100.0주: 박상범·조희영, 중소기업경영론.위의 표에서 보는 것처럼 중소기업은 각 분야에서 절대적인 비중을 보이면서 우리 나라 경제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중소기업은 우리 나라의 공업기반을 구축하여 기업의 창설과 새로운 시장개척을 통한 수요창출을 담당하고 있다. 하지만 1998년 중 중소기업은 IMF체제에 따른 전반적인 경 기침체속에 부도 급증과 금융시장 불안, 자금난과 판매난까지 겪게 되었다.【표-4】 중소제조업 고용 추이구 분1997년1998년1/4 2/4 3/4 4/4종업원수증가업체비율(A)감소업체비율(B)10.727.213.223.511.7 11.9 13.9 15.129.1 26.3 21.7 16.8증가·감소차(A-B)-16.5-10.3-17.4 -14.4 -7.8 -1.7주: 증가·감소차는 %P임, 중소기업은행.【표-4】에 따르면 1998년 중 중소제조업의 고용은 경기침체 지속 및 금융시장의 불안에 따라 감소폭은 점차 줄어드는 추세를 보였다. 현재 중소기업은 취약한 경영 및 기술여건, 외부 의존적 기업경영, 중소기업에 대한 낮은 사회적 인식과 자기혁신 노력 부족으로 점점 더 어려운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3. 중소기업 금융의 실태1) 중소기업 금융의 정의 및 특성우리 나라 중소기업 금융의 특징은 자금조달 여건의 상대적 취약성으로 표현 될 수 있으며, 이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본질적 원인이 내재되어 있다.첫째, 높은 경영 위험성이다. 중소기업의 경우 상대적으로 기업도산 등 경영위험이 대기업보다 크다. 이는 자금력 부족, 기술개발 능력부족 등의 복합적인 요소에 기인하고 있다. 둘째, 높은 대출관리 비용으로 중소기업에 대한 금융지원을 다수 의 기업에 대한 소액금융으로 중소기업의 경영실태 파악이 어렵게 되었다. 이로 인해 지원되는 대출실적에 비해 높은 관리비용이 발생하게 된다. 셋째, 담보 및 신용력의 부족이 한 원인으로 중소기업은 금융지원에도 불구하고 그 수혜를 받기취급을 받아 왔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대기업에 대한 자금지원의 편중현상으로 기업경영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는데 많은 애로를 겪어 왔다. 전통적으로 중소기업의 불확실성, 높은 도산율 때문에 은행들은 중소기업과의 거래를 기피하여 왔을 뿐 아니라, 규모의 경제 및 담보제공능력 등을 감안, 안정된 수익이 보장되는 대기업에 대한 여신을 선호하여 왔던 것이다. 이와 같은 문제점을 완화하고 중소기업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신용보증제도의 필요성을 증대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결국 신용보증제도의 목적은 외형상으로는 경제적 약자인 중소기업들에게 신용보증을 해줌으로써 필요한 자금을 상시에 조달할 수 있도록 하는데 있으나, 보다 본질적으로는 자금을 필요로 하는 산업계의 모든 부분에 대해 합리적인 신용보증 을 해줌으로써 신용을 바탕으로 하는 신용사회의 구현을 이룩하는데 있다.3. 중소기업에 대한 신용보증의 당면과제) "자율화·개방화·국제화로 집약될 수 있는 금융혁신은 우리에게 이미 거부할 수 없는 하나의 과제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에 따라 무역중심의 경제구조를 발전시켜 온 우리나라는 STLEO적 조류에 따른 금융산업개방과 금융혁신을 도모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국재산업보호와 국민경제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소극적이고 방어적인 입장을 견지하면서 금융기관의 경쟁력 배양 및 체질개선을 위한 노력을 기울여왔다. 이러한 금융변화는 금융시장에 대한 정책적 개입이라는 특성을 갖고 있는 신용보증제도의 기능과 역할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 이재경.「중소기업 활성화를 위한 신용보증제도의 효율적 운용방안」, 연세대학교, 1994, 에서 발췌.]1) 정부출연금의 확대) 담보가 부족한 중소기업에 대하여 신용보증을 지속적으로 지원하기 위해서는 방대한 재원이 필요하며, 그 재원은 정부와 금융기관의 출연에 의하여 조성되고 있다. 현행 신용보증기금법령에 금융기관은 대출금 잔액에 대하여 연율 0.2%에 해당되는 금약을 2000년말까지 신용보증기금에 출연토록 되어 있으며, 정부는 필요시 각 회계연도의 예산에 반영하여b2b 영위 기업수 (개사)750(-)(2)29,080(3777.3)(15)467,088(1506.2)(26)전체 전자상거래 규모에서 차지하는 비중(%)1.837.071.8주: 전국경제인연합회 「최근 B2B 전자상거래추진현황과 과제」2000.그러나 국내 B2B 전자상거래 시장은 업계의 필요성 및 폭발적인 관심도에 비해 추진실적이 아직 미흡한 실정이다. 이는 중소기업의 낮은 정보화 수준 및 법ㆍ제도적 미흡, 업계간 네트워크 구축의 미비 등으로 선진국에 비해 상당히 낙후돼있기 때문이다. 또 최근 종합상사를 중심으로 B2B시장이 활성화되고 있기는 하나 업종별, 산업별 전자상거래 시장이 제대로 구축되지 않아 기업간 제휴와 파트너쉽 형성 등을 통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해외시장에 뒤쳐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전자신문 2000. 6월기업측면에서 전자상거래가 중요한 한 분야의 이슈로 부상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기업들은 위와 같은 실정으로 전자상거래의 활성화를 방해하는 주요장벽이 되고 있다.【표-10】인터넷 전자상거래 시장규모구 분96년97년98년99년2000년한 국(단위:백만원)1,4006,28515,00434,48461,396전 세 계(단위:백만달러)5181,1882,3713,9906,750※자료: 한국전산원 . 2001.주: 자료마다 다소차이가 있으나 최대 6천억 달러까지 예상.② 문제점세계는 기업간의 전자상거래를 통해 업무효율을 높이고 개발하고 있으나, 우리 나라의 중소기업의 정보화 계획전체의 48.6%가 인터넷 이용 정보검색, 22.2% 사내네트워크 구축, 17.4%가 전자상거래 활용 등을 정보화 추진 계획을 들고 있고, 정보화 추진계획이 없다는 비중도 17.2%나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표-11】에서도 알 수 있듯이 기타 선진국에 비해 우리 나라 전자상거래의 활용은 아직 미비한 수준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에 기인한다.【표-11】정보화 추진체계(단위: %)구 분인터넷이용정보검색홈페이지개설사내네트워크구축전자결제시스템도입전자상거래활용없음전 는 기반 조성 업무의 전자화, CALS) CALS(Continuous Acquisition and Life-cycle Support)는 모든 정보를 전자화하여 컴퓨터에 의한 거래 환경에서 설계, 제조 및 운용지원 자료와 정보를 통합하여 자동화시키는 개념이다.도입 등의 운용 비용 등의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다. 이러한 자금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보증한도확대(최고 2배)가 절실히 요구되고 있는 상황으로 보증공급확대를 위한 신속한 지원방안을 강구해야 한다.둘째, 기존의 전통적 제도를 좀 더 확대시켜 보증지원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앞서 말했듯이 중소기업은 기업간의 신뢰부족, 법적ㆍ제도적 미흡 등으로 전자상거래의 확산에 장애가 되고 있다. 전자상거래를 활성화시키기 위해서는 새로운 기술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때문에 담보어음제도와 같은 기존의 전통적 제도를 좀 더 확대하여 보증지원 방안을 검토해야 할 필요가 있다. 전자상거래는 전통적인 상거래 개념이 바뀌고 있으므로 기존 보증제도의 보완이 불가피한 실정이다. 이에 따라 전자상거래에 적합한 법률체제가 마련되어야 하는데 이는 일반 담보어음제도의 개정은 물론 기술관련 보증, 수출입금융보증 등의 제정 작업이 함께 진행될 필요가 있다. 결국, 기술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보증제도의 법/제도적 분야에서 대대적인 개선, 혁신작업이 이뤄질 때 성공적인 전자상거래를 기대할 수 있다.신용보증기금에서는 무분별하게 중소기업에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의 신용도, 사업전망 등의 심사를 통하여 보증을 결정한다. 그러므로 B2B를 추진하는 중소기업에 보증을 해 준다면 상대거래기업은 신용보증의 신뢰를 바탕으로 그 기업을 믿게 되고 거래가 이루어 질 수 있다. 즉 이 같은 방향의 추진은 기업간의 신뢰부족을 극복하고 전자상거래를 확대시킬 수 있는 것이다.전자상거래는 세계의 경제패러다임을 변화시키고 있다. 즉 전자상거래는 전세계에 한마디로 혁명을 일으킬 것이다. 그에 부흥하기 위해서는 전자상거래를 활성화시켜야 하고 또 기업환경의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