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정환의 생애방정환은 1899년 서울의 가난한 가정에서 방경수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1909년 매동 보통 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이듬해 미동 보통 학교로 전학하여 1913년에 졸업 하였다. 그 해 선린 상업 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집안 사정이 어려워 이듬해 중퇴하였다.1918년 보성 전문 학교(고려대학교)에 입학하였고, 1919년에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문을 배포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일주일만에 풀려 났다.1920년 일본으로 건너간 방정환은 도요 대학 철학과에 입학하여 아동 예술과 아동 심리학을 공부하며 본격적으로 아동 문학에 몰두했다. 여름 방학을 맞아 귀국한 방정환은 어린이에게 존대말 쓰기 운동을 벌였다. 그 당시에는 어린이라는 말이 없었고 이놈, 어린것, 애새끼라는 말로 아이들을 낮추어 불렀다. 이를 안탑깝게 여긴 방정환은 이때 처음 어린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이로써 방정환은 어린이들도 어른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인격체임을 선언했다.방정환은 1921년에 천도교 소년회를 조직하여 '씩씩하고 참된 소년이 됩시다. 그리고 늘 사랑하며 도와 갑시다.'라는 표어를 만들고 본격적으로 소년 운동을 전개 하였다. 천도교 소년회를 중심으로 1922년 5월 1일에 처음으로 어린이날을 정하고, 세계 명작 동화집 을 펴냈다.1923년 3월에 우리 나라 최초의 순수 아동 잡지 를 창간하였고, 그 해 5월1일 도쿄에서 손진태, 윤극영, 진장섭, 고한승 등과 함께 아동 문화 운동 단체인 색동회를 조직했다. 색동회에서는 어린이날 기념 행사를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어린이를 위해 여러 가지 행사를 벌였다. 1925년에는 어린이날을 기념하는 동화 구연 대회를 개최 하였고, 1928년에는 세계 20여 개국이 참가하는 세계 아동 예술 전람회를 개최하였다. 이후 방정환은 여러 어린이 단체에서 활동하였는데, 조선 소년 총동맹이 만들어져 어린이 운동의 방향이 달라지자 모든 단체 활동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오직 강연회와 동화 구연 대회, 그리고 라디오 방송 활동에만 전념하였고, 1활동과 그 의미를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다.이 글에서는 '어린이운동가' 방정환을 살펴보려고 한다. 그가 김기전과 함께 조직한 천도교소년회는 우리 어린이운동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방정환을 중심으로 한 천도교소년회가 어떤 배경에서 조직되었고, 이후의 어린이운동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살펴볼 것이다. 그러나 방정환이 펼쳤던 어린이운동 전반에 대해서는 자세히 살피지 못했다. 1920년대 중반 이후 심각해진 무산 소년운동단체 오월회와의 대립이나 이후 활동에 관해서는 다루지 못했다는 것을 먼저 밝혀둔다.2. 방정환과 천도교우리 근대 아동문학은 《어린이》창간(1923년 3월)으로 본격화되었다. 방정환은 《어린이》를 창간한 배경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짓밟히고 학대받고 쓸쓸스럽게 자라는 어린 혼을 구원하자. 이렇게 외치면서 우리들이 약한 힘으로 일으킨 것이 소년운동이요 각지에 선전하고 충동하여 소년회를 일으키고 또 소년문제연구회를 조직하고 한편으로 《어린이》잡지를 시작한 것이 그 운동을 위하는 몇 가지의 일입니다. (방정환, 《어린이》 동무들께,《어린이》(1924년 12월), 강조는 인용자.)이 글을 보면 1920년을 전후로 전국 각지에 활발히 조직되던 소년회와 우리 근대 아동문학이 어린이 운동 차원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동아일보를 비롯한 신문들과 《어린이》에 그 당시 지역마다 소년회가 만들어지는 상황과 활동들이 계속 실렸던 것으로도 뒷받침된다.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우리 어린이운동사에서 방정환과 천도교의 만남이 갖는 중요성이다. 방정환은 손병희의 셋째 사위가 되면서(1917년) 천도교와 깊은 인연을 맺는다. 손병희에게 방정환을 소개한 사람은 3·1운동의 민족 대표 33인 가운데 천도교측 대표인 권병덕이다. 방정환의 아버지 방경수는 권병덕과 의형제를 맺을 정도로 절친했는데, 둘은 모두 천도교의 한 분파인 시천교(侍天敎)를 믿었다. 권병덕이 시천교에서 천도교로 개종하면서 방경수 역시 천도교를 믿게 되었다고 한다. 방정환의 생애는 어토오요오(東洋)대학 철학과에 적을 두고 아동문학과 아동심리학을 연구하면서(1921년) 본격적으로 어린이운동을 구체화시킬 수 있었다.이처럼 방정환은 결혼을 한 다음 청년운동과 어린이운동, 민족운동에 깊이 관여한다. 물론 이러한 활동은 방정환이 어릴 때부터 키워왔던 사상 때문에 가능했다. 하지만 그가 그러한 사상을 적극적으로 펼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천도교의 정신적·물질적·조직적인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1910년대와 20년대에 천도교는 우리 사회에서 매우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대부분 사회단체는 심한 탄압을 받았는데, 종교단체는 그나마 좀 자유로울 수 있었다. 천도교는 그런 조건을 이용해 겉으로는 교단 활동을 내세우면서 사회 활동을 수행했다. 천도교는 3·1운동 당시 기독교와 불교계 지도자들을 조직하고 민족 대표 가운데 16명이나 참여할 정도로 주도적이었다. 특히 다른 어느 종교단체보다 각 지방에 조직화가 잘 되어 있던 터라, 천도교측은 그것을 바탕으로 전국적인 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천도교는 의암 손병희가 일본에서 귀국(1906년)하면서 언론·출판사업과 교육사업에 손을 대기 시작하여 1920년대에는 이 두 사업을 중심으로 한 신문화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해 나갔다. 그 방편으로 1920년대 사상계를 주도한 종합 월간지 《개벽》을 비롯해 《어린이》《신여성》《별건곤》《학생》《혜성》《조선농민》 따위의 출판물을 발행했다. 이 출판물들은 천도교 청년회(1923년 9월에 천도교청년당 창설)에서 전개한 사회 부문운동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이들 대부분 출판물에 방정환은 편집 겸 발행인, 주요 집필자로 관여했다. 특히 어린이운동과 관련해서 《어린이》를 편집발행했다.3. 천도교소년회의 조직과 의미먼저 천도교에서 부문운동을 제기했던 배경과 그 하나로 '천도교소년회'가 조직된 유래를 살펴보도록 하겠다.우리 당의 목적이 역(亦) 창생을 제도하는 데에 있을 것은 물론이다. 하물며 우리 도의 주의 목적을 사회적으로 달성할 것을 당헌 제 1조에 명언하였음이리, 노동, 상민의 칠부(七部)를 두고 당본부와 지방부에는 각 부에 대한 책임 위원을 두어 일반당원과 한가지로 부문운동에 노력하게 된 것이다.(중략)그러므로 우리가 당을 보직하고 당원을 훈련하는 것은 오직 이 민중의 이익을 호지(護持), 증진키 위한 당무부(黨務部)가 있는 동시에 나아가 창생을 상대로 하는 특별부서가 있는 것이니 이 창생을 상대로 하는 특별부서가 즉 칠부문(七部門)이란 것이다. (조기간, 《천도교청년당소사》, 천도교청년당본부, 1935. 38∼39쪽)천도교는 민중을 제도하고 그들의 이익을 증진하는 데에 목적을 두고 이해가 다른 각 계층을 연령, 성, 직업별로 나누어 운동을 전개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것을 위해 일곱 개 부문을 마련했고, 그 하나로 유소년부를 두었다. 더구나 '천도교소년회'는 천도교청년당에서 최초의 부문운동으로 조직되었다.우리 당의 부문운동으로서는 대정 10년 4월(인용자: 1921년 4월)에 어린이 정서 함양, 윤리적 대우와 사회적 지위를 인내천주의에 맞도록 향상시키기 위하여 김기전, 방정환 외 제 씨의 노력으로 '천도교소년회'를 경성에서 조직한 것이 맨 처음이요. (앞의 책, 40쪽)아주 짧은 소개지만, 천도교소년회는 '어린이 정서 함양, 윤리적 대우와 사회적 지위를 인내천 주의에 맞도록 향상시키기 위하여 김기전, 방정환'에 의해 '부문운동 가운데 맨 처음 조직'(대정 10년 4월(1921년 4월)되었다. 봉건적 윤리의 지배를 받던 어린이를 독립된 인격을 지닌 존재로 인식한 것은 물론, 어린이의 감성 해방 역시 중요하게 인식하고 있다. 천도교소년회의 모체인 '유소년부'의 활동 방향을 제시한 다음 글을 보면, 천도교의 어린이운동이 갖는 지향을 좀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1. 총괄 요항 1, 2, 3, 4항(인용자 : 청년당의 전체 강령)을 준수하는 하에서 다음 각 항을 실행할 것2. 유소년의 생리적 발육과 심리적 발육을 구속하는 모든 폐해의 교정에 힘쓸 것.3. 재래의 봉건적 윤리의 압박과 군자식 교양의 전형을 버리고 유소교청년회 유소년부의 활동 방향'을 바탕으로 작성되었다.1. 어린이를 재래의 윤리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하여 그들에게 대한 완전한 인격적 예우를 허하게 하라.2. 어린이를 재래의 경제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하여 만 14세 이하의 그들에게 대한 무상 또는 유상의 노동을 폐하게 하라.3. 어린이 그들이 고요히 배우고 즐거히 놀기에 족한 각양의 가정 또한 사회적 시설을 행하게 하라.(소년운동의 선언, 동아일보, 1923년 5월 1일)이처럼 천도교소년회는 우리 어린이운동의 본격적인 첫출발이었다. 이 말은 천도교소년회가 우리 나라 최초의 소년회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 전에 이미 안변소년회, 왜관소년회, 진주소년회들이 있었다. 특히 진주소년회의 소년('어린이'라고 하기에는 연령이 많음)들은 뒷동산에 올라가 '조선독립만세'를 외쳐 체포되었다. 이 사건은 신문에 보도되어 어린이운동계에 큰 자각을 일으켰고, 천도교 내에도 어린이운동에 대한 자각을 깊이 심어주었다. 당시 사회운동의 주류는 청년운동과 농촌운동이었는데, 천도교 내에서도 역시 그러했다. 이 때 방정환은 어린이운동의 중요성을 제기했다. 천도교의 지도자인 소춘 김기전 역시 방정환과 뜻이 통하여 천도교소년회는 조직될 수 있었다. 천도교소년회는 천도교의 탄탄한 조직과 재정, 방정환·김기전 같은 뛰어난 어린이운동가들의 이론적·실천적 활동, 뚜렷한 활동 목표와 그에 걸맞는 부서(유락부(遊樂部), 담론부, 학습부, 위열부(慰悅部))의 설치와 구체적 활동들로 가장 완전한 소년회로 발족하여 전국의 어린이운동계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그렇다면 방정환, 김기전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천도교소년회가 초창기 어린이운동사에서 왜 그토록 중요한가? 이것은 당시의 다른 소년회와 견주어 볼 때 천도교소년회가 천도교의 재정적·조직적 뒷받침 때문에 이후 어린이운동을 전개하는 데에 유리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천도교소년회가 우리의 근대 민족·민중운동이었던 동학에 뿌리를 둔 조직이기 때문이다. 천도교소년회에서 표방하는 어린이의 인격과 감성 해방는다.
생애인촌 김성수선생은 구한말로부터 6.25전후까지 우리 근대사에 있어서 가장 암울했던 65년간의 세월을 살다간 민족의 선각자였고 겨레의 스승이었다.인촌은 1891년 10월11일(음9월9일) 전라도 고창군 부안면 인촌리에서 김경중의 4남으로 태어나 세살 때 큰아버지 김기중의 양자로 출계했다. 본관은 울산이고 조선 인종때의 거유(巨儒) 하서 김인후의 13대 손이다. 6세 때부터 한학을 공부하다가 1908년 일본 경성으로 건너가 1914년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했다.귀국 후 1915년 중앙학교를 인수해 민족교육의 터전을 마련하였으며 1917년에는 경성직뉴주식회사를 인수, 경영하다가 1919년 10월에 경성방직주식회사를 설립했다. 1920년 4월에는 동아일보를 창간함으로써 30세에 교육 산업 언론을 통한 민족의 실력양성과 국가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1929년 12월 구미 선진국의 교육문물을 시찰하고 1년9개월만에 귀국한 인촌선생은 1932년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함으로써 숙원이었던 고등교육기관 설립의 꿈을 이룩하였으며 해방후 1946년8월 보성전문학교를 기초로 하여 고려대학교를 발족시킴으로써 민족사학의 터전을 다졌다.해방후 애국지사들이 한국민주당을 창당하고 참여를 권해 왔으나 처음에는 이를 거절했다. 그러나 1945년12월 고하 송진우 선생이 흉탄에 쓰러지자 주위의 강청에 못이겨 한민당 수석총무(당수)를 맡았다. 1951년5월 피난수도 부산에서 제2대 부통령에 피선되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과 뜻을 같이 할 수 없어 1년만에 사임하고 말았다.1953년 환도 이후 건강이 좋지 않았는데도 이승만 독재에 대항할 민주세력의 대동단결을 위해 노심초사하시다 1955년 2월18일 65세를 일기로 서거했다.장례는 국민장으로 치러졌고 장지는 고려대학교 구내 인촌동산이었으며 1962년 건국공로훈장 복장이 추서되었다.교육운동식민지 조국의 독립은 진정한 교육에서 출발한다는 것이 인촌 김성수의 일관된 신념이었다. 1914년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인촌 김성수는 사립학교 교육의 중요성를 모아 1915년 봄 백산학교라는 이름의 사립학교 설립안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의 첫 시도는 조선총독부에 의해 좌절당해야 했다.그러던 차에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고있던 중앙학교로부터 운영을 맡아달라는 의뢰가 들어왔고 김성수는 젊은이들에게 민족혼을 일깨우겠다는 신념에 따라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는 중앙학교 인수를 지나친 모험이라고 생각하는 부모를 설득하고 인수 비용을 얻어내 1915년4월 중앙학교를 인수했다. 김성수가 동경 유학시절부터 키워왔던 민족교육의 꿈이 처음으로 실현된 것이다.중앙학교를 인수한 김성수는 근대적인 경영방식을 도입, 학교 운영을 근대적 합리적으로 바꿔나갔다. 김성수는 그곳에서 직접 영어와 경제를 가르쳤으며 1917년엔 중앙학교의 교장으로 취임했다. 그해 12월엔 서울 종로구 화동에서 종로구계동의 근대식 건물로 학교를 옮겼다.김성수의 노력에 힘입어 중앙학교는 사학의 명문으로 성장해나갔다. 특히 한국어 교습이나 민족주의 교육을 통해 민족 교육의 요람으로 자리잡았다. 그것은 3·1운동에서 수행했던 중앙학교의 역할을 보면 잘 드러난다. 김성수는 물론이고 당시 중앙학교 교장이었던 송진우(宋鎭禹 1894-1945) 등은 3·1운동의 준비 과정에서 지대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1918년 겨울부터 중앙학교의 숙직실은 3·1운동의 준비 장소로 이용되기도 했다. 김성수와 중앙학교는 이처럼 막후에서 3·1운동에 큰 공을 세웠다. 뿐만 아니라 1926년 순종의 국장일에 있었던 6·10 만세운동도 중앙학교 학생들의 주도로 이뤄진 것이었다.김성수는 중등교육 못지않게 고등교육의 중요성도 절감했다. 식민지라는 여건 때문에 유능한 젊은이들이 고등교육을 포기하거나 외국으로 나가야 하는 현실을 지켜본 김성수는 그것이야말로 민족의 손실이라고 생각했다.김성수는 1932년6월 재정난을 겪고 있던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했다. 그는 유럽과 미국 유수의 대학을 둘러보고 그들의 선진적인 제도와 시스템을 보성전문학교에 도입하는 등 광복 때까지 보성전문학교에 깊은 애정과 관심을 쏟았다.김성수도 어려움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보성전문의 민족교육에도 탄압이 가해지면서 그 교육이 직업교육의 수준으로 제한받지 않을 수 없었다.그러나 김성수와 보성전문학교의 교수진은 일제의 창씨개명 강요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한국 이름을 끝까지 지켜냈다. 그것은 보성전문학교의 힘이었다. 김성수와 보성전문학교는 일제의 탄압을 뚫고 민족 정신을 지켜냈다. 보성전문학교는 1946년엔 종합대학 고려대학으로 발전, 지금까지 한국의 민족대학으로서의 명성을 드날리고 있다.기업운동인촌 김성수는 청년기 일본유학의 경험을 통해 민족자본으로 만든 기업이 있어야만 민족의 내일을 기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신념은 경성방직 설립으로 이어졌다. 경성방직은 한국 최초의 근대적 방직공장이자 민족기업이었다.김성수는 식민지시대 의류와 직물 섬유 대부분이 일본으로부터 수입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한국의 산업을 활성화를 위해 방직산업부터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경성방직 설립의 첫단계는 1917년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경성직뉴주식회사를 인수한 것이었다. 김성수는 2년전인 1915년 중앙학교를 맡으면서 학생들로 하여금 국산 무명옷을 교복으로 입게했을 때 이미 한국의 직물 발전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겠다고 각오했던 터였다.김성수는 경성직뉴를 근대적 면 옷감 생산 시스템으로 개조, 중앙상공주식회사로 이름을 바꾸었고 1918년부터는 면의류를 생산하기 시작했다.1919년10월 그는 경성직뉴와 별도로 경성방직을 설립했다. 한국 자본으로 세워진 순수한 민족 기업이었다. 김성수는 민족 기업의 의미를 살리려면 더 많은 한국인들이 경성방직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경성방직을 주식회사로 만들었던 것이다.경성방직은 당시 한국의 산업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일본으로부터 면직물 수입이 증가하면서 한국의 면직물은 거의 소멸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김성수의 경성방직 설립은 식민지 조국의 그같은 열악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다.또한 대규모 생산을 시작한 일본인회사 조선방직에 맞서 한국의 면직물 산업기업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조국을 근대화시키고 민족의 생존권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결국 독립운동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김성수는 이후 각종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경성방직을 발전시켰다. 1923년부터 1935년까지 경성방직은 민족 산업의 파수꾼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했다. 그리하여 1939년엔 중국 만주에도 공장을 세움으로써 국내를 넘어 해외에도 투자를 하는 기업으로 성장했다.언론운동인촌 김성수의 민족언론운동은 동아일보 창간으로 대표된다. 김성수는 일본 유학 이후 민족언론의 중요성에 큰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3·1운동 이전에는 일제의 철저한 언론 탄압으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다 3·1운동 이후 조선총독부의 소위 문화정치로 인해 한글 신문 출판이 가증해지자 신문 창간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그러나 1919년 경성방직을 설립한 직후여서 재정적으로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신문 창간은 한국인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의 일환이라는 신념은 확고했다. 담보물을 저당 잡혀 대출을 받는 등 각고의 노력 끝에 1920년 4월1일 드디어 동아일보 창간호를 냈다.동아일보는 당시 한국인들의 억눌린 한을 풀어주고 민족정신을 고양시켜주는 터전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만큼 일제 탄압이 가중된다는 것을 뜻하기도 했다.창간호가 간행된 지 보름밖에 되지 않은 1920년4월15일 총독부는 평양에서의 반일시위를 보도했다는 이유를 달아 창간 이후 처음 동아일보의 판매와 배포를 금지했다. 동아일보는 이후 총독부에 의해 기사삭제 압류 배포금지 정간을 당하는 등 끝없는 탄압을 받아야 했다.김성수는 동아일보를 통해 민립대학 설립운동, 물산장려운동, 문맹 타파 운동, 한글 운동 등을 적극 주도함으로써 민족주의 문화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해나갔다.그는 또 31년과 33년 월간 신동아와 신가정을 창간해 다양한 매체를 통해 이같은 문화운동을 펼쳐나갔다. 김성수와 동아일보의 민족정신은 1936년 일장기 말소 사건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1936년 8월25일자 동아일보는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보를 무기한 정간시키는 등 갖은 탄압을 자행했다. 하지만 동아일보는 그에 굴하지 않고 이듬해인 37년6월3일 다시 발행되었다.동아일보는 일제의 영구 폐쇄 음모로 인해 결국 40년8월10일 폐간됐고 광복 후인 45년12월1일 다시 발행됐다. 5년간의 공백기였지만 민족혼과 민족문화를 고양시키려는 김성수와 동아일보의 민족정신까지 중단된 것은 아니었다.독립운동한글 맞춤법과 仁村-1일제는 한반도를 식민지화 하고 나서 원료 공급지로 만들어 경제 침탈을 가속화하는 일방 이른바 이란 식민지사관을 만들어 역사까지 날조, 왜곡하여 한국인의 의식구조에 열등의식을 심으려고 광분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알면 알수록 仁村은 어떻게 하더라도 민족정기를 지키고 발흥시켜야만 광복후의 국학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는 사명감을 갖게 되었다. 당시 민족 지도자 중에 그 같은 일에 관심을 가지고 심혈을 기울인 사람은 흔치 않았다는 데서 仁村의 위대한 민족애와 선견지명을 볼 수 있다. 仁村은 민족사의 올바른 연구를 위해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민족의 언어인 한글표기의 통일을 절감하고 통일안 연구에도 후원을 하고 를 통하여 스스로 맞춤법 통일안을 실천 보급하는데 앞장 섰다.의 체계화는 仁村의 공로한글맞춤법 통일안의 제정은 아주 시급한 문제였다. 나는 당시 25세의 약관으로 권덕규. 김윤경. 최현배씨 등 선배들을 모시고 18인 소위원회 위원으로 125회의 모임을 갖는 동안 모든 궂은 일을 도맡아 했다. 심지어 화계사 회의 때는 모든 경비까지 조달해야 할 정도였다. 경비 150원은 거금이었는데 선친께서 구해다 주셨다. 仁村 선생의 후원이 아니었나 싶다.어쨌든 통일안은 우여곡절 끝에 제정되었으나 시행이 문제였다. 모든 신문. 잡지. 출판물이 호응을 해 줘야 하는데 호응을 하자면 활자를 다시 주조해야 하기 때문에 막대한 비용이 들게 돼 있었다. 제정만 해 놓고 시행을 못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에서는 날더러 를 설득하도록 책임을 맡겼다. 선친이 계시기 때문에 그랬을 텐데 어쨌든 나는 어려운 책임을 완수했
외솔 최현배Ⅰ.생애와 업적(1894∼1970)본관 경주(慶州), 호는 외솔이다. 울산 출생으로 경성고보 재학 중 1910년부터 3년간 주시경의 조선어강습원에서 한글과 문법을 배웠다. 1919년 일본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중등학교 교원자격증을 받았으나 관공립고등보통학교 교원을 사퇴하고 고향에서 휴양하면서 조선인 상권(商權) 확보를 위하여 공동상회(共同商會)를 설립하였다.1920년 사립 동래고등보통학교 교사가 되었다가 1922년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 연구과에 다시 수학, 이어서 교토제국대학 문학부 철학과에 입학, 교육학을 전공하여 이라는 논문으로 1925년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1년간 수업하였다. 1926년 연희전문 교수로 취임하여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파면당할 때까지 재직하였다.1941년 연희전문학교에 도서관 직원으로 복직하였으나, 그해 10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사임하고 1945년까지 옥고(獄苦)를 치렀다. 1945년 9월부 터 1948년 9월까지, 1951년 1월부터 1954년 1월까지 문교부 편수국장에 두차례 취임하여 교과서 행정을 담당하여 그 기틀을 잡았으며. 1954년 연희대학교 교수로 취임하여 문과대학 학장과 부총장을 역임하고 1961년 정년퇴임으로 연세대학교 명예교수로 추대되었다. 1964년 3월부터 2년간 부산 동아대학교 교수로 재직한 일이 있다.1954년 학술원 회원에 뽑혔고 이어 임명회원·부회장을 맡았다. 1955년 연희대학교에서 국어학 연구와 그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밖에 1949년 한글학회 이사장에 취임하여 20년간 한글학회를 이끌어왔으며, 1949년 한글전용촉진회 위원장, 1957년부터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이사·부회장·대표이사 등을 역임하며 국어 운동의 중심적인 인물로 활동하였다.이러한 여러 방면에 걸친 활동과 공로로 1955년 제1회 학술원 공로상, 1967년 5·16민족상 학예부문 본상을 수상하였고, 1970년 3월 죽자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한평생을 국어학의 연구, 국어정책의 편에 이르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국어학에 대한 연구는 1910년 봄, 일요일마다 보성중학교에서 열리는 조선어강습원에서 주시경의 가르침을 받음으로써 싹튼 것이라 한다. 이 분야의 업적은 과 로 집약된다. 또한 국어정책의 수립과 국어운동에 대한 집념과 활동도 대단하여 항상 최선봉에서 그 운동을 추진하고 그에 대한 이론투쟁을 전개하였다.(1947), (1958), (1968), (1970) 등 단행본으로 한글 전용과 풀어쓰기의 이론을 발표하였다. 그밖에 우리말도로찾기운동의 뜻이 담긴 (1953), 국민계몽사상을 고취한< 조선민족 갱생(更生)의 도(道)>(1930), (1958), (1963)등이 있다.2.「조선민족갱생의 도」의 정신사적 의의「朝鮮民族更生의 道」의 구조는 크게 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제1장은 민족적 질병이 진찰로, 의지의 박약함, 용기의없음, 활동력의 결핍함, 의로인의 많음, 저축심의 부족, 성질의 음울함, 신념의 부족, 자존심의 부족함, 도덕심의 타락, 정치경제적 파멸이다.제2장은 민족적 쇠약증의 원인으로 이조오백년간의 악정, 사상자유의 속박, 자각없는 교육,한자의 해독, 양반계층의 횡포, 번문 욕례의 누설, 불합리 불경제의 일상생활방식, 조혼의 폐해, 나이자랑하기 , 미신의 성행이다.제3장은 민족 갱생의 원리로 민족적 생기를 진작하라, 민족적 이상을 수립하라, 우리 민족이 시대적 이상을 파악하라, 조선 민족의 특질, 민족적 갱생에 대한 확고한 신념의 필요, 일어날 듯한 비평에 대하여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제4장은 민족적 갱생의 노력으로 신교육의 정신, 계몽운동, 체육장려, 도덕이 경장, 경제의 진흥, 생활방식이 개선, 민족 고유문화의 발양, 여론, 갱생노력이 방식으로 되어있다.그는 산하와 민족 그리고 민족 전통의 역사적 흐름 속에서 우리 문화에 대한 사랑, 그리고 그 문화를 발전하게 할 책임을 우리 과업으로 여겼다. 조선 민족의 갱생은 우리들의 목표인 동시에 세계문화에 기여하는 것이며, 세계가 우리에게 부여한 소임이기도 하다.3. 「나라건지는 교육 관련은 교육의 마당인 동시에 또 그 방법내지 그 목적이기도 하다. 현대에 있어서는, 교육은 개인의 교육이 아니다. 교육사업은 결코 그 개인의 영리 사업이 되어서는 안됨은 물론이거니와,교육울 시키는 부모나 교육을 받는 자녀된 젊은이도 제 집안,제 일신의 이익과 영달을 구하는 데에 그 목적을 두어서는 안된다. 내 돈을 내고 내 힘을 들여서 공부를 한다고 해서 개인의 입신 출세와 부귀 영화를 그 목적으로 하여서는 안된다. 교육은 사사스런 일이 아니요 반드시 구의스런 일이다. 따라서, 교육은 '잘난'개인을 만드는 데에 목적이 있지 아니하고, 정직하고 충실하며, 부지런하고 강건한 국민을 기르는 데에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더욱이 오늘날 민주주의 시대에서의 교육은 피교육자로 하여금 높은 지위와 감투를 쓰고 만인을 마음대로 지배하는 권력자, '잘난이'가 되게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지 아니하고, 각 개인이 제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평범한 시민, 남의 권리와 의견을 존중하는 겸손한 시민 , 분열보다 화합을 경쟁보다 협동을 취하는 선량한 시민 창의적 활동으로써 사회의 개량, 나라의 발전을 꾀하는 진취적 국민이 되게함에 그 목적을 두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가 훌륭한 독립 자유의 국민이 되기 위하여는 개인의 출세주의의 교육관, 이기주의의 교육관을 버려야만 한다.구조는 다음과 같다첫째, 나라건지는 교육이다 . 여기서는 나라건지기와 교육/ 생활능력의 교육, 근로생산의 교육/ 화합하고 협동하는 사람을 길러내는 교육/ 이기주의에 사로잡힌 노예상태에서 해방된 자유인, 바침과 섬김의 사람을 길러내는 교육/ 사회와 나라의 참된요구에 맞는 교육/ 도덕교육에 힘쓸 것/ 교육관념을 고치자로 되어 있다.둘째, 진학문제이다. 입학시험 바로잡기/ 입학시험과 교과서/ 국어말본을 가르치는 이들에게/ 진학과 입시시험으로 되어 있다.셋째, 여러 가지이다. 새교과서 박아냄에 대하여/ 도덕교육에 대하여/나의 존경하는 교육자 주시경스승으로 되어 있다.넷째는 페스탈로찌 교육사상이다.4.민족적 이상의 교육사적 이해외적 이상이 존재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그는 오랜 연구 끝에 민족적 이상은 밝은 누리의 실현 이라고 결론지었다. 밝은 누리의 실현 을 홍익인간과 연계하면서 한글 창제의 정신 나아가 정치, 경제, 병사, 과학, 예술등을 통한 그 실현에 힘써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그는 민주주의 근본 정신의 완전한 실현과 일치한다고 하였다.5. 학술활동(한글교육)외솔은 민족이 민족다워지고, 국민이 국민다워지는 것은 모국어를 사랑할 줄 알고 모국어를 아는 사고방식을 가지며, 올바른 표현방식을 갖추게 하는 것이 국어교육의 몫이라 보았다. 얼ㆍ말ㆍ글의 삼위일체를 들면서 올바른 한국인을 키우는데 국어교육의 주요성을 강조하였다.그는 국어학자이며 동시에 교육학자이다.1)우리말본1937년에 발간된 최현배의 문법책. 1937년 초간(初刊) 후 1955년에 깁고 고쳐 펴냈으며, 그 후 여러 차례 개정판이 나왔다. 최현배는 주시경의 문하(門下)에서 가르침을 받았는데, 주시경의 학문은 민족주의 입장에서 시작되었다. 이러한 바탕에서 이루어진 국어학은 그의 제자들에게도 이어졌다. 이 책의 저자도 이러한 정신에 그 학문기반을 두고 있으며, 은 이러한 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지어진 것이다. 이 책은 앞 사람들의 연구가 분석적인 데 반하여 종합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또한, 그 서술에 있어 그전까지와는 달리 큰 진전을 보이면서 처음으로 국어의 문법체계를 대성하였다.의 머리말에서 '이 책은 앞사람의 말본들과는 다름이 매우 크다. 첫째, 그 설명하는 방법이 있어서, 앞사람의 풀이법(說明法)은 분석적이었음에 대하여, 이 책의 풀이법은 종합적이다. 그리하여 그 전체의 체계에서도 퍽 많은 다름이 생기었다. 씨가름(品詞分類)에서 월가름(文分類)에 이르기까지, 거의 하나도 옛 설명을 그대로 습용(襲用)한 것이 없다고 할 만큼, 새로운 체계를 이루었음은, 이를 보시는 분이 짐작하실 줄로 안다. 그리하여, 그 완전 여부는 별 문제로 하고, 이 체계로 말미암아, 비로소, 조선말의 말광(辭典)을 조직적으로 꾸밀 수가 있게 되었으치어서, 조선말과 조선글을 법에 맞도록 쓰게 되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고 스스로 믿는다.' 라고 하여 그의 문법연구는 우리말의 조직과 운용의 이치를 깨치는 데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은 크게 소리갈·씨갈·월갈로 나누어 서술되어 있다.2)한글갈1940년 최현배가 지어 정음사(正音社)에서 간행된 훈민정음에 관한 이론서. 역사적인 문제를 다룬 연구서. 단권. 총 830면. 일명 이라고도 한다. 1961년 정음사에서 이라는 이름으로 개정판이 나왔다. 초판은 세로쓰기로 되어 있고, 개정판은 가로쓰기로 되어 있다.저술동기에 대해서는 머리말에서 "훈민정음에 과한 일체의 역사적 문제와 한글에 관한 일체의 이론적 문제를 크고 작고를 망라하여 이를 체계적으로 논구하여 그 숨은 것을 드러내며 그 어두운 것을 밝히며 그 어지러운 것을 간추리어, 써 정연한 체계의 한글갈을 세워, 위로는 신경준(申景濬), 유희(柳僖)의 유업을 잇고, 아래로는 주시경(周時經) 스승의 가르침의 유업을 이루는 데 있다." 고 하였다.역사편과 이론편의 두 편으로 나누어져 있다. 은 훈민정음의 창제, 한글발전사, 정음연구사의 3부분으로 나누어 15세기에서부터 1930년대에 이르기까지의 한글운동, 한글서적의 체계, 역대 임금의 한글정책 등 국어학사적인 여러 문제를 다룬 것으로서, 김윤경의 , 오구라 신페이(小倉進平)의 에 이어 나온 가장 체계적인 저술이라고 평가된다. 저자는 이 책이 오로지 한글에 관한 연구라 규정하였으나, 실제 내용은 한글 자체에 대한 연구 외에도 한글 문헌에 대한 서지학적 언급도 포함되어 있다.에서는 각 글자의 음가(音價)와 운용(運用) 및 글자의 이름을 고찰하고, 이어서 제자(制字)의 원리, 표기법, 없어진 글자에 대한 상고, 자수와 차례의 변천, '?, , , ' 및 순경음에 대한 상고, 병서론(竝書論)과 기원설(起源設)의 여러 장으로 나누어 서술하고 있다. 즉, 훈민정음의 원리론, 훈민정음사, 문자생활사 등 가히 훈민정음에 관한 전영역을 망라한 역저(力著)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가된다.
翰西 南宮檍의 교육사상1.생애와 활동(南宮檍 : 1863∼1939)한서(翰西) 남궁억(南宮檍)선생은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의 국화인 무궁화를 지키고 가꾼 애국지사로 유명한 분이시다. 선생은 철종 14년 1863년 서울 정동에서 태어나서 1939년 77세를 일기로 영면하시었는데 그 정신은 무궁화를 통해 아직도 생생하게 우리들 가슴속에 살아 남아 있다.그는 명문가의 자손으로 태어났으나,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덕수 이씨 홀어머니의 슬하에서 가나하게 자랐다. 일찍이 동리서당에서 어깨 너머로 한문을 배우다가, 한학보다는 개화한국을 이룩하기 이해서는 소구문물의 수입과 서양인의 교섭의 시급함을 깨닫게 된다.그리하여 21세 때에 1884년 아무도 영어를 배우려 들지 않았던 시절 영어학교인 동문학(同文學)을 수료하였다. 그는 총해관 들어가 개화된 서구문명을 접하였고, 이에 자극을 받아 개화한국을 꿈꾸게 되었다. 24세 어전통역관이 되어 관리생활을 시작하였고, 이듬해엔 통역서기관으로 승진되었다. 개화된 서구문명을 접하였고 그 뒤에 그때는 부정부패가 심하여 나라가 망할 지경이었으나 남궁억은 청렴결백하여 사람들이 옥같이 맑고 얼음같이 희다고 말했다. 그는 또 유능하여 갑오경장내각에서 토목국장으로 재직할 때 좁고 꾸불꾸불한 서울 종로거리와 정동거리를 똑바로 뚫고 시내에 탑동 공원을 조성하였다.남궁억은 대표적인 개화파의 한사람이었으나 정치보다도 교육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민영환이 세운 흥화학교에서 영문법과 동국사를 가르치면서 애국심과 개화사상을 가르쳤다.34세에는 서재필과 함께 '독립협회'를 조직하여 수석 총무 겸 사법위원이 되였으며, 협회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의 영문판편집에도 종사하였다. 그러나 민족의 독립정신과 문화발전을 향상시키고 신문화수입과 국권확장을 하고자 한 운동은 친러파의 미움을 받아 협회는 해체된다.독립협회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남궁억은 언론계에 투신하게 된다. 국가의 문화발전과 사회계몽을 위해서는 일간신문이 꼭 있어야 한다는 절실히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독립신문을 편집한 경험을 살려서 황성신문을 창간하고, 사장으로 취임한다. 남궁억은 1902년 일본이 러시아와 한반도 분할 안을 토의하는 것을 폭로하여 일제의 침략야욕을 백일하에 폭로하였다. 그 때문에 남궁억은 심한 고문을 받아 병약한 몸이 되었고 황성신문 사장직을 사임하였으나 그의 불같은 항일정신은 더욱 더 뜨겁게 달아 올랐다.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전국에서 애국계몽운동이 벌어졌다. 남궁억은 '대한협회'를 조직하여 장을 맡는 등 운동의 핵심에 서서 항일 투쟁을 하였다.남궁억이 처음 학교를 창설한 것은 1906년 양양군에 峴山학교이다. 그가 양양군수로 있을 때 , 11세 이상에서 23세까지의 학생을 모아 무상으로 직접 가르쳤다.남궁억은 무엇보다도 자기 분수에 맞게 각자 할 일에 충실하는 것만이 살길이라고 믿고 여성교육의 일선에 나섰다. 1910년 마침내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한 48세 때 서울 배화학당의 교사로 취임을 한다. 그가 서울의 배화학당 선생을 마다하지 않은 것은 언젠가는 독립할 조국의 동량(棟梁)을 위해 일한다는 각오로 굳게 섰기 때문이었다. 여성교육이란 당시 하찮은 일로 생각하고 있었으나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남궁억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벌써 50대 나이에 접어들고 있었으나 무궁화를 통한 애국심의 함양과 여권의 신장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 때문에 그는 교단을 떠나야 했고 정든 서울을 떠나 낯선 고향 강원도 홍천으로 가야만 했다. 짚신을 신고 미투리 모자를 쓰고 걸어가는 남궁억선생의 모습은 처량하였지만 이 낙향의 길에는 남궁억의 생애 최후의 도전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그가 펼친 문화사업으로는 1908년 6월에 창간된 「敎育月報」이다. 이 교육월보는 교육이론을 실은 것이 아니라, 학교에 가지 않고도 공부할 수 있도록 학과강의를 한 것으로 오늘날의 통신강의록과 비슷한 것이다. 과목은 동국역사, 大韓地誌, 만국역사, 만국지지, 물리, 위생, 家庭要訣 등 오늘날 중학교 정도의 내용이었다. 그러나, 경영난과 민중이 지식수준이 낮아 사업이 부진하다가 창간한지 1년만에 폐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