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1. 머리말처음 선생님께서 서평을 과제로 내주셨을때 조금 당황했었다. 4학년들은 많이 써봤을거란 말씀이 나에겐 부담으로 다가왔다. 솔직히 독후감은 많이 써봤으나, 서평이란 것은 나에게 낯선 것이였다. 한달간의 여유가 있어서 이번엔 여유롭게 책을 읽으려 했는데, 이미 책은 다 빌려가고 없었고, 다른 과제와 발표들로 나의 11월은 악몽과도 같았다. 이 책을 처음 접하고 너무나 재미없을 것 같아서 ?중세이야기?를 읽고 서평을 쓰려했었다. 그러나 그 책도 읽다가 별루여서 친구에게 줘버리고 다시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을 읽기로 결심했다. 그 이유는 십자군전쟁에 관한 수업을 듣고 나서 이 책을 읽어보면 나름대로 재미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은 낯선 용어들이 많이 포함 돼 있어서 다 읽고 나니 대충 이해는 갔지만 막상 줄거리를 쓰려니 막막할 따름이다. 그래서 줄거리는 간략하게 쓰고 책에 대한 서평을 쓰려고 한다.2. 줄거리1096년. 로마 교황 우르반 2세는 예루살렘을 순례하는 그리스도 교인들에 대한 셀주크 투르크인들의 박해를 강력하게 비난하면서 성지 회복을 위한 성전을 호소하였다. 종교적 열정에 불타는 농민과 일부 기사들은 저마다 등과 가슴에 붉은 십자 표시를 달고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이렇게 시작된 십자군 전쟁은 1365년까지 9번의 대규모 출병으로 이어졌고 약 250년 동안 오리엔트와 소아시아 반도를 피로 물들였다.(p.5 추천의 글 中)1096년 7월에 들어서면서 클르츠 아르슬란은 한 무리의 프랑크인들이 콘스탄티노플을 행해 이동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는 프랑크인들의 진짜 속셈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다. 1096년 10월 21일. 동틀 무렵, 서쪽에서 온 원정대가 진지를 출발하였고, 1097년 10월 21일, 시리아에서 가장 큰 도시 안티오케이아에 날카로운 비명이 울려펴지며, 삽시간에 온 도시는 공포에 휩싸였다. 1099년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1147년에는 프랑스의 루이 7세와 신성로마제국의 콘라트 3세가 이끄는 2차 십자군이 결성되었다. 그러나 다마스쿠스점령에 실패하고, 1187년에 살라딘이 예루살렘을 탈환한다. 1189년에 루이의 후손인 존엄왕 필립과 영국의 사자심왕 리처드가 지중해를 건넜고, 1202년의 네 번째 그리스도의 전사들은 방향전환 십자군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되었다. 그리고 1218년 다섯 번째 출정으로 공식적인 십자군은 막을 내리지만 역사상 십자군은 8차까지 존재했다. 프리드리히 2세가 예루살렘을 돌려받으나, 1244년에 프랑크인들은 예루살렘을 완전히 잃게 된다. 서유럽에서 명성을 떨치던 군주들 중 이 200여년 동안 시리아 땅을 밟아보지 않은 자가 드물었다. 프리드리히 1세는 찌는 듯한 무더위에 작은 시내에 몸을 담갔다가, 심장마비로 익사했고, 그의 후계자인 프리드리히 2세는 예루살렘에서 왕위에 올라 카이로에서 유유자적한 삶을 보내기도 했다. 군주와 기사들이 헛된 명예와 부를 위해 전장으로 치닫는 동안 1212년에는 성지 회복을 위한 신의 께시를 받았다는 소년들로 십자군이 구성되기도 했는데, 이들이 악덕상인에 걸려 노예로 팔려가는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3. ‘십자군 전쟁’에 대한 나의 생각(서평)나는 역사란 이긴자들에 의해서 재구성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세상의 모든 일에는 양면성이 존재한다고 본다. 역사도 예외일 수 없는데, 이긴자들의 역사와 진자들의 역사가 바로 그것이다. 그 동안 우리는 주로 십자군 전쟁을 성지탈환을 위한 불가피한 전쟁, 즉 성전(聖戰)이라는, 유럽인의 관점으로 보아 왔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유럽인(기독교인)의 관점이 아닌 아랍인(이슬람인)의 관점에서 십자군 전쟁을 말하고있다. 이슬람의 입장에서 보면 십자군 전쟁은 프랑크족의 침략 전쟁이고, 이방인들이 저지른 대학살과 약탈로 삶이 짓밟힌 역사상 가장 치욕적이고 반문명적인 사건이었다.십자군 전쟁은 로마 교황 우르반 2세가 주도하였다. 그는 그리스 정교회를 로마 교회로 통합하여 기독교 왕국을 이루고자 하였고, 비잔틴 황제와 신성로마황제를 누르고 권력을 잡으려는 정치적 의도도 있었다. 또 예루살렘 성지를 회복하려 하였다.우르반 2세는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는 것은 일종의 무장 순례이며, 십자군이 되는 자는 죄를 사해 주고, 죽어서 바로 천당에 갈 수 있다고 퍼트려서 명예스러운 의미를 부여하였다. 처음에는 농민, 특히 빈민들이 많이 몰렸다. 이들의 목적은 땅을 찾아서 이주하는 것이였다. 이들이 1차 십자군으로 출병하였다. 1차 십자군전쟁이 가장 잔인하였으며, 유럽의 입장에서는 가장 성공적인 전쟁이였다. 반면에 이슬람의 입장에서는 아주 잔인하고 치욕적인 전쟁이였던 것이다.이 책을 쓴 아민 말루프는 자신이 쓰고 싶었던 것은 역사책이라기보다는 십자군 전쟁 이야기를 다룬 ‘실화 소설’이라고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다. 인용한 말은 진한 글씨체로 표시하였고, 낯선 용어들에 대해서는 책 뒤쪽에 따로 용어 설명, 주석과 출처를 표시하였다. 첫 장을 넘기자 마자 낯선 용어들과 ‘*’표시들이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하지만 카디는 ‘법관’, 칼리프는 ‘계승자’, 디완은 ‘자문 회의’를, 에미르는 ‘왕자’, 지하드는 ‘불신자들의 성전’, 함맘은 ‘공중 목욕탕’ 이라는 것 등을 알게 되면서 책에 조금씩 적응해 갈 수 있었다. 책에 실린 당대 아랍 역사가와 연대기 저술가들의 생생한 묘사와 증언을 통해 내가 그동안 십자군 전쟁의 일부분만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에서는 십자군들의 끔찍한 만행들, 전쟁의 참혹함 뿐만 아니라, 당시 이슬람 세계 내부의 모순, 문제점, 다툼 등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책을 읽다보니 수업시간에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던 구절도 많이 나와서 처음 보는 책인데도 불구하고 낯설지 않게 다가오기도 했다. 지금부터는 내가 이 책을 읽고 기억에 남는 몇 부분을 소개할까 한다.(1) 3장 마라의 식인종① 마라에서 우리들은 이교도 어른들을 커다란 솥에 넣어 삶았다. 또 그들의 아이들을 꼬챙이 꿰어 불에 구웠다.(p.70 프랑크인 연대기 저자인 라울 드 카엥의 고백)⇒ 수업시간에 선생님께서 이 부분을 읽어 주셨을 때도 진짜 프랑크인들이 야만인이고 잔인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직접 읽으니 소름이 끼쳤다. 서유럽의 침입자들은 군대에 무시무시한 기근이 엄습하였기에 시신으로 연명할 수밖에 없는 잔인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고 교황에게 보낸 공식 서한에서 밝히고 있으나, 아무리 그래도 너무 잔인하게 먹은 것 같다.② 프랑크인들에 대해 잘 아는 이들은 모두 한결같이 그들에게서 엄청난 용기와 전투에 대한 열정을 갖춘 맹수의 모습을 보았다. 그들은 힘 세고 호전적인 동물들이었다.(p.71 연대기 저자 우사마 이븐 문키드의 저술)⇒ 당시 이슬람인들의 프랑크인에 대한 시각을 잘 보여주는 부분이다. 이후 아랍의 서사 문학 속에서 줄곧 식인종으로 묘사되곤 했다고 한다.③ 우리들은 투르크인들과 사라세인들의 인육을 먹는 일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개조차 먹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p.72 프랑크인 연대기 저자 알베르 덱스의 증언)⇒ 인육을 먹는 것 보다 개를 먹는 것이 더 수치스럽다는 듯이 적고있다. 오늘날 프랑스인들의 ‘친구인 개를 먹는 한국인들은 야만인이다’와 같은 사고방식이 이때부터 비롯된 것이 아닌가한다.④ 11세기 초반, 이슬람 국가는 지구상에서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국가였으며 그 수도는 가장 앞선 문명의 중심지였다. 이곳에는 전문 의사들과 대규모 무료 병원이 있었으며 정기적인 우편 제도, 중국에까지 지점을 두었던 은행들, 훌륭한 관개 시설, 하수도 직결식 수세 장치 들과 더불어 제지 공장까지 있었다.(p.91)⇒ 중세의 이슬람 문명이 발달했었음을 알 수 있었던 부분이다. 반면 당시 서유럽은 모든 부분에서 이슬람에 뒤져 있었다. 심지어 상하수도 조차 분리가 되어 있지 않아서 거리에는 오물로 가득했다고 한다. 다만 신앙심은 이슬람인들에 비해서 더 독실했던 것 같기도 하다.(2) 7장 에미르의 눈에 비친 야만인들① 당사자들이 격투 끝에 상대방을 살해한 뒤 그를 교수대까지 끌고가는 과정이 재판의 전부임을 목격하고 ‘이것을 프랑크인들은 재판이라고 한다!’ 라며 경악을 금치 못한 부분(p.190?p.191 우사마의 진술)⇒ 이는 재판시에 카디들이 이슬람의 경전인 꾸란에서 논고, 변론, 증언이라는 정확한 절차를 따라야 했다는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랍인들에게 재판은 공정함이 요구되는 진지한 사안이었기 때문에 서양인들이 의지하는 ‘신명(神明) 재판’이 아랍인들에게는 거부감으로 다가왔음은 당연한 것 같다.② 혐의를 받은 청년의 온몸을 결박한 채 배꼽 근처에 밧줄을 매달아 통 안으로 떨였뜨렸다. 그들이 말하기를 그가 결백하다면 물통 바닥으로 가라 앉을 것이고, 죄가 있다면 물 속으로 빠질 수가 없을 것이라 했다. 그는 성공하지 못했고 가혹한 법 집행을 받아야 했다. 신이여, 그들을 벌주소서! 이윽고 그들은 벌겋게 달군 꼬챙이로 그의 눈을 찔러 그를 소경으로 만들어 버렸다.(p.192 우사마의 진술)
「결혼은 미친 짓이다」속에 나타난 성과 사랑내가 이 영화를 처음 접하게 된 것은 개봉한 첫 날인 2002년 4월 26일이었다. 별로 친하지 않았던 남자친구와 극장에 영화를 보러 갔었는데, 다른 영화를 보러 갔었지만 이 영화가 개봉한걸 보고 왠지 재미있을 것 같다고 동의해서 보게 되었다. 영화를 보러 온 사람들 중에는 단연 커플들이 많은 듯 하였다. 보기 전에는 이 영화가 이렇게 야할 줄은 몰랐었다. 영화를 보는 동안 어찌나 민망하던지..... 그 당시에는 몰랐는데, 현재의 남자친구와 비디오방에서도 한번보고 또 TV에서 하는 것도 보고 여러 번 보면서 결혼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다. 그래서 이번 과제에서 「결혼은 미친 짓이다」 이 영화를 선택하게 되었다._등장인물의 사랑유형_*준영(감우성)- 남자 주인공 준영(감우성)이라는 인물은 대학 영문과 강사지만 지적이고 여성에게 매너가 좋으며, 결혼은 싫어하는 연애지상주의자다.*연희(엄정화)- 여자 주인공 연희(엄정화)는 섹시하고 애교가 많으며, 자기 주관이 뚜렷한 조명디자이너로, 결혼과 연애는 다르며 둘 다 포기할 수 없다는 여자다._줄거리_- 준영과 연희, 이들은 친구의 결혼식에서 준영이 결혼식 사회를 본 대가로 소개팅을 하게 된다. 처음엔 여느 소개팅과 다름없이 진부한 대화만 나누다가 점차 진솔한 이야기까지 나누게 된다. 3차까지 가다보니 시간이 늦어 택시를 탈까 여관을 잡을까 생각하다 둘 다 여관 잡는 게 더 쌀 것 같다는 생각에 동의해 여관으로 직행하여 섹스를 하게 된다. 그러면서 자주 만나게 되고 서로 더욱 더 가까워지지만 연희는 조건 좋은 남자를 골라 결혼을 하게 된다. 사랑 대신 조건을 택한 연희는 결혼한 지 두 달쯤 지난 어느 날 다시 노총각 준영을 찾아온다. 연희는 준영의 자취방에 또 하나의 신혼살림을 차려서 주말부부 생활을 한다._성과 사랑에 대한 태도_- 이들의 대화들을 예로 들어 성과 사랑에 대한 태도를 살펴보겠다.*이들이 처음 만나서 여관으로 가게된 대화이다.준영: 근데 왔다갔다 택시비하면 여관비가 더 쌀 거 같은데요.연희: 어차피 골아 떨어질 거 같은데 택시비하나 여관비하나 마찬가지일거 같 긴 한 대요.⇒ 준영과 연희 둘 다 처음 만났지만 서로에게 호감이 있었고, 처음 만난 사람과 마음이 맞으면 섹스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연희가 의사와 결혼한다고 하자...준영: 너 같은 스타일이 결혼하면 신랑 하나만 바라보고 평생을 살 수 있다 고 생각해? 평생 한사람만 사랑하며 사는 게 가능할까?연희: 난, 자신 있어! 절대로 들키지 않을 자신!⇒ 준영은 한사람만 사랑하며 살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결혼도 꺼려한다. 반면에 연희는 연애는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은 조건 좋은 사람과 하려한다. 그렇지만 사랑과 결혼 둘 다 놓치지 않으려는 욕심 많은 여자이다.*연희: 오늘밤에 안 들어가면 되지 , 모든 걸 버리고 나와 가자 등등⇒ 연희가 몹쓸 여자로 비춰지기 쉽지만, 연희는 항상 준영이 자신을 잡아주기를 바랬다. 처음에 선 본다는 말을 할 때부터, 결혼한다고 얘기했을 때, 남자들의 조건을 늘어놓으며 5명중에 누굴 고를까 이야기 할 때 등등 연희는 조건을 중요시하는 것 같으면서도 사랑하는 준영이 자신이 잡아주기를 바랬는지도 모른다.*영화 마지막에 준영이 연희가 만들어 놓은 앨범을 보면서 내레이션으로 나오던 말준영: 이제 나는 알 것 같다 그녀가 왜 이런 앨범을 만들었는지.. 그리고 그녀 가 끝내 내게 하지 못한 말이 무엇이었는지를..⇒ 연희가 앨범을 만들면서 남는 건 사진밖에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둘의 사이가 멀어지고 나니 준영도 연희가 왜 앨범을 만들었는지 조금은 이해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연희가 끝내 준영에게 하지 못한 말은 바로, 사랑한다 한다는 말이다. 이 둘은 서로 사랑하고 있으면서도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_가치관_- 연희와 준영은 백화점, 슈퍼 등에서 자신들이 부부인 것처럼 연기한다. 실제로 둘은 육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잘 어울리는 커플이다. 준영과 연희는 서로 사랑하고 있지만 사랑한다는 말은 전혀 하지 않는다. 이들을 갈라놓는 요인은 경제적인 능력이고 그것이 두 사람이 생각하는 결혼이라는 인생관에서는 엄청 큰 비중을 차지하는 가치관인 것이다. 그래서 준영은 남자로서의 자존심을 버리고 연희에게 매달리지 않는 것이고, 연희 역시 그런 것을 알고, 사랑해서 준영과 결혼을 하더라도 경제적으로 어려우면 사랑이 변할 것이라 생각하기에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하게 된 것이다.
르네상스기 이탈리아 문학과 예술{Ⅰ. 개관Ⅱ.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학Ⅲ. 이탈리아 르네상스 음악Ⅳ.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Ⅰ. 개관르네상스는(Renaissance) 부활·재생 을 의미하는, 14세기~16세기까지의 문학, 미술, 자연과학 등의 분야에서 일어난 인간 중심적, 사실주의 경향의 새로운 문화사조로, 고대의 그리스·로마 문화를 이상으로 하여 이들을 부흥시킴으로써 새 문화를 창출해내려는 운동이다.그러나 르네상스는 고전문화에 대한 단순 흥미가 아닌, 이전의 휴머니즘으로의 회복을 뜻하며, 중세 그리스도교의 신성에 대한 저항이었다는데 의의를 갖는다. 중세의 엄격 일변도의 교권주의 종교세력과 봉건적 지배세력이 결탁했던 질서에 대항하여 신흥 시민계급 지식인들이 인간 정신의 회복을 달성하려는 적극적인 움직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로 인해 인간은 종교나 집단 속박에서 벗어나 개성적인 존재가 되고, 새로이 인식하게 된 자신의 인간성을 자유롭게 발전시키게 된다. 그리하여 자연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그 아름다움을 즐기고 묘사하기에 이르렀다.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갈릴레이, 뉴턴, 베이컨, 데카르트 등에 의해 발전된 과학적 사고와 방법은 성서에 기초를 두었던 중세의 신 중심의 사고와 대치되었고, 이런 과학적 사고와 방법은 산업혁명을 통하여 기계문명과 기술문명을 탄생시키는 요인이 되었다.르네상스는 이탈리아 피렌체(Firenze)에서 먼저 고개를 들었고 15세기에 절정에 달했다. 당시 이탈리아는 일찍이 상공업이 발달하고 있었다. 십자군원정(1069~1224)을 거치면서, 피렌체, 베네치아(Venezia), 제노바(Genova) 등의 지중해 연안 도시들이 동서문화의 중심 교역지로 부상하면서 막대한 부를 축적하게 되고, 문화적 자극과 새로운 사조에 대한 도전의식이 강해지는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새로운 학문과 예술을 보호하고 장려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15세기를 지나면서 외세의 침입과 이탈리아내 정치적 분열, 16세기 신항로의 개척으로 대서양으로 무역의 중심이 이동하게 되면들은 모두 한 언어를 썼던 것이다. 중세 시대에 보통 사람들의 구어로서 발전한 민중어는 서민 문화의 언어로 정착했다. 라틴어는 학문 언어로서 제자리를 지켰지만 민중어는 민족어로 발달하고 인정받아 문학 표현의 수단으로 수용되었다. 라틴어가 일종의 지적 통일성을 제공했다면 영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는 민족적 응집력과 목표 의식을 강화시켰다. 근대로 접어들면서 각 민족은 자기만의 고유한 문학적 전통을 발전시켰다. 민족주의의 부상과 언어는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라틴어를 비롯한 모든 언어 사이의 번역이 민족의 울타리를 넘어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르네상스 문학도 미술이나 음악처럼 그 나름의 방식으로 국제화되었다.◈인문주의르네상스의 세속성과 인간 중심적 태도는 고전 학문을 연구하고 그 정신을 부활시키려는 노력에서 유래하였다. 그리스·로마의 고전 작품을 수집, 정리하고 연구하는 기풍 속에서 지성과 덕성을 기르고, 인간적 가치를 추구하는 움직임을 인문주의라 한다.단테가 이탈리아어로 저술한 「신곡」은 아직 중세적 신앙심에서 벗어나지는 못하였으나 인간성에 대한 깊은 이해를 나타냄으로써 새로운 경향을 보였다. 최초의 인문주의자인 페트라르카는 인간적인 사랑을 주제로 서정시를 썼으며, 라틴 작가의 작품을 수집하고 연구하였다. 세속적인 생활을 자유롭게 묘사한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은 당대 이탈리아 사회상을 잘 반영하고 있다.◈단테(Dante, 1265~1321)-이탈리아의 시인. 소년 시절을 피렌체에서 지냈는데, 천사처럼 아름다운 소녀 베아트리체를 만나 사랑을 느끼고 그 체험이 정신 생활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녀가 일찍 죽자 깊은 슬픔에 빠졌으나 그 정열을 학문과 문학 연구에 쏟았다. 1292년에 베아트리체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신생」을 썼는데 그것이 뒷날 세계적인 걸작「신곡」을 낳는 바탕이 되었다. 1300년에 로마 교황청에 사절로 가 있는 동안 정변이 일어나서 피렌체에서 쫓겨났다. 괴롭고 비참한 유랑 생활을 하는 가운데 죽기 직전까지 장편 서사시 「신국의 왕녀와 사귀게 되었는데 신분이 달라 결혼할 수 없게 되자 일생 동안 결혼하지 않고 문학에만 힘썼다. 1353년에 「데카메론」을 발표함으로써 유명해졌다. 대표작으로 「귀부인 피암메타의 애련가」,「아메토」,「단테전」,「신곡 주해」등이 있다.◈마키아벨리(Machiavelli, 1469~1527)-이탈리아 르네상스기의 정치 사상가, 역사가. 1498년부터 피렌체 공화국의 외교와 군사를 맡아보는 중책을 담당하였고, 외교 사절로도 활약하였다. 1512년에 메디치 집안이 피렌체로 복귀하게 되자 정계에서 쫓겨나 어렵게 살면서 저술에만 힘썼다. 그는 대표작인 「군주론」에서 정치는 도덕과 별개의 영역임을 주장하고, 이탈리아는 강력한 군주 아래 통일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Ⅲ. 이탈리아 르네상스 음악르네상스는 1350년경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것이 북쪽으로 확산되어 결국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그러나 유독 음악 분야의 르네상스는 영국, 네덜란드, 북부 프랑스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이러한 르네상스 음악은 1420년부터 1600년까지 무르익었는데 대체로 낙천적이고 발랄하며 현세적이라는 특징을 갖는다.미술과 문학은 고대 그리스의 규범이 있었기 때문에 고대예술의 부활과 재생이 가능했지만 음악은 그 추상적 성격 때문에 그 규범으로서 그리스 음악은 남아있지 않았다. 따라서 음악에서의 르네상스 운동은 고대 그리스 음악의 재생이라기 보다는 그리스 인들의 인간정신(humanism)의 부활이며 억압되지 않은 인간 감정을 그대로 표현하려는 예술운동이었다. 종교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것에서부터 현세적인 것을 추구하는 인본주의적 세계관의 반영으로 볼 수 있는 것들 즉, 음악가의 개인적인 감정이 중요시되기 시작하였고, 엄격한 형식의 소멸, 음악과 가사의 긴밀한 결합, 음에 빛깔을 부여하는 반음계의 사용, 기악음악의 발달 등에서 보여지는 괄목한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또한, 예전의 종교 음악과 세속 음악의 엄격한 구분은 당시에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종교 음악이라고 해서 언제나 경건하고 고상하고 적인 예술의 한 장르(Genre)가 되기 위해서는 배경, 벽감 등 건축의 유기적인 부분으로 갖는 연관을 탈피하고, 전면성 즉 한 면에서만 감상할 수 있는 속성이 극복되어야만 했다. 르네상스 시기는 조각의 이러한 전면성 탈피의 초기시기에 해당되고, 완전한 탈피는 19세기에 이르러서야 된다. 전면성을 극복한 작품으로는 도나텔로의 「기마상」, 미켈란젤로의 「다비드」가 있다.조각의 르네상스는 도나텔로에 의해 개척되었다. 도나텔로의 조각은 핏기 없는 그리스·로마의 조각과는 달리 발랄한 생명감을 지니고 있다. 이 생명감이 르네상스 조각의 새로움이었다. 특히 마치 살아있는 사람처럼 꿈틀거리는 르네상스 조각들의 눈이나 눈썹, 손 등의 세부묘사는 고전 조각들과는 전혀 달랐다. 완벽하고 생동감 넘치는 인체의 표현은 해부학의 지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육체에 대한 탐구와 관심은 천 여년 동안 눌려 있었던 인체의 관능미를 부활시켰다.르네상스 조각의 가장 큰 특징은 자연주의적 사실 묘사 에 있다. 르네상스 시대의 자연주의는 중세와 고전주의로부터의 영향을 받았고, 특히 고전·고대의 부활은 자연주의 경향에 박차를 가하였으며, 이상주의에 입각한 작품성향이라는 것이다. 이상주의는 르네상스 시기의 인본적·현세적·세속적인 것과 반대의 개념으로써 단순한 이상주의가 아닌 '美의 이상 추구'를 뜻하는 것이다.◈도나텔로(Donatello, 1386?∼1466)-피렌체 출신인 그는 브루넬레스키의 건축, 마사치오의 회화와 더불어 조각에서 르네상스 양식의 창시자이다. 후기 고딕 양식에서 초기 르네상스에 걸친 과도기에서 그의 활동은 대체로 4기로 나눌 수 있다.제1기는 1405∼32년으로, 고딕의 작풍을 남기면서도 이미 르네상스의 새로운 이상을 추구하여, 분석적인 사실을 억제하고 종합적인 장엄함으로 향하고 있다. 이 시기의 작품 중《성 조르조》는 그때까지 건축의 질서를 따르고 있던 조각을 3차원의 공간에서 독립시켜, 범할 수 없는 위용과 고전적인 격조를 보였다.제2기는 1432년 이후 10년간의 시기로 이 겨오는 것은 인간의 생명에 육박해오는 투철한 르네상스적인 리얼리즘이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그는 고대의 단순한 모방에서 탈피하였으며, 조각을 회화화한 기베르티의 고딕적인 작풍과도 대결할 수 있었고, 조각을 원래의 정도(正道)로 되돌림으로써 베로키오나 미켈란젤로에게 영향을 끼쳐 근대조각으로 발전할 실마리를 제공하였다.2건축르네상스의 건축은 이탈리아에서 15세기에 그 양식을 확립하여 16세기에 서구 여러 나라에로 확대된 고전건축의 재생과 아울러 고딕양식은 그 지배적인 세력을 상실하여 간다. 이 시기의 건축은 주로 교회당과 궁전 중심으로 지어졌다. 그 양식상의 특색으로는 고딕의 수직선에서 바뀌어 수평선의 강조, 간소하고 명확하고 규칙적인 개개의 형식을 들 수 있다. 그 형식은 각 부분과 전체 속에 그 독자적인 성격을 확연하게 나타내는 동시에 일관된 조화적 질서를 구성하는 요소이다.◈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 1377∼1446)-피렌체 출신으로 15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건축 양식 창시자의 한 사람이다. 그는 처음에는 조각가로서 자신의 예술적 경력을 쌓아가다가 1401년 세례당의 북쪽 입구 장식 공모전에서 기베르티에게 패배한 뒤 건축가로 돌아섰다. 그의 첫 업적으로는 피렌체의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커다란 돔이 있으며, 고대 로마의 판테온의 가구(架構) 기술을 도입하여 전통을 중시하면서도 새로운 구성미를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다. 또한 산 로렌초 성당은 저마다 질서 있고 지적인 공간구성이 특색이며, 파치 예배당은 고전 시대의 설계 양식에 대한 자신의 지식을 적용했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 예배당은 복잡한 구조적 문제를 털어 버렸다는 점에서 르네상스 건축물의 개성이 확연히 드러나는 건물이다.그의 위대성은 전통에서 계승한 구조방식을 여러 군데로 수시로 활용하면서 새로운 시대에 적응한 구축(構築)의 미적 법칙을 거기에서 이끌어내고 실현한 점에 있다.◈로렌초 기베르티(Lorenzo Ghiberti, 1378∼1455)-원근법과 고전적 모티프를 완었다.
◆데카메론(IL Decamerone)보카치오가 1348~1353년에 지은 것으로 이탈리아 문학의 걸작이다. 데카메론 이란 10일 이야기 라는 뜻이다. 7명의 부인과 3명의 신사가 한자리에 모여 10일간 매일 각자 한가지씩 이야기를 해서, 모두 100가지 이야기가 모아진다는 구성이다. 단테의 『신곡(神曲)』이 신의 길을 주장한 데 비해 『데카메론』은 인간의 본능과 악덕, 허영 등을 폭로하고 있는 데서 『인곡(人曲)』으로 불리어지는 작품이다. 『데카메론』은 영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는 중세적 시각과는 달리 보통 사람의 육체적 욕망을 제재로 하고 있다. 거의 모든 장르를 망라하는 100편의 이야기는 외설과 교훈, 풍자와 관용, 로맨스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를 교차하면서 중세에서 르네상스로 전환하는 시기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야기 전체가 보카치오의 창작은 아니고, 예로부터 각지의 민간에 전해 내려온 것도 들어 있다.또 이 작품에 사용된 이탈리아어는 보카치오적 문체라고 하는 것으로, 그 후 오랫동안 산문의 본보기가 되었다. 『 데카메론』의 모작(模作)은 대단히 많아서 많은 작가에게 소재를 제공하고 있다.1줄거리- 1348년 동방에서 전염된 흑사병(페스트)의 유행으로 이탈리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피렌체는 죽음의 도시로 변한다. 이 전염병을 피하기 위해 아름다운 7명의 부인과 3명의 신사가 피에솔레의 숲과 언덕 근처의 어느 한적한 별장에 당분간 머무르며, 유쾌하고 규율 있는 즐거운 지상 낙원의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그들은 10일 동안을 즐겁게 보내기 위해 날마다 왕 또는 여왕을 뽑아, 주제를 정하고 매일 밤 열 사람이 한 가지씩 이야기를 해서, 모두 100가지 이야기가 모아진다.연장자인 팜피네아가 첫째 날 여왕으로 뽑혔다. 이야기 주제는 각자가 좋아하는 이야기를 한가지씩 하기로 했다. 둘째 날 여왕에 뽑힌 필로메나는 이야기의 주제를 사람에게 일어난 불행과 그 불행 뒤에는 기대 이상의 행복이 온다 는 것으로 정했다. 셋째 날에는 네필레가 여왕으로 뽑혔다. 그녀는 이야기의 주제를 자기가 바라던 것을 노력하여 차지한 사람 또는 한번 잃었던 것을 되찾은 사람 으로 정하였다. 넷째 날에는 필로스트라토가 여왕으로 선발되어 사랑이 불행하게 끝난 사람들 을 주제로 정했다. 닷새째 날에는 피아메타가 여왕으로 뽑혀 불행한 사건 뒤에 행복해진 연인 으로 정했다. 엿새째 날의 여왕은 엘리자였다. 그녀는 재치를 이야기의 주제로 정하였다. 이레째 날에는 왕은 디오네오 청년이었다. 주제는 부인이 사랑 때문에 남편을 우롱하는 이야기 로 정했다. 여드레째 날 여왕이 된 라우레타는 남녀가 서로 속고 속이는 내용을 주제로 했다. 아흐레째 날에는 에밀리아가 여왕이었다. 주제를 제한하지 않고, 각자가 자유롭게 이야기하도록 했다. 열흘째의 왕은 팜필로였다. 너그러움을 주제로 정하였다.열흘째의 각자의 이야기가 끝나고 별장을 떠나 피렌체의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에서 해산한다.그 각각의 이야기는 변화가 풍부하고, 무대도 유럽 각지에서 동방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며, 인물이나 성격·기질 등도 서민층에서 상류층에 이르기까지 다양함을 보여 준다.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인물로는 왕후·기사·법관·시장·의사·공증인·상인·직공·예능인·광대·요라서·승려 등 각계 각층을 망라한다. 승려도 고승·역승(役僧)·파계승·탁발승 등이 등장하여 흥미롭고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작품 속의 남녀는 천성과 처지에 따라 선인과 악인, 탐욕·간사함·무지에 가득 찬 승려, 성공자와 실패자, 비장형(悲壯形)의 인물과 익살꾼이 각각 상이한 성격으로 그려져 있다.여인상으로는 정절을 지키는 열부, 비련에 우는 여인, 무지와 교활에 젖은 여인, 탕녀 등 천태만상이다. 이러한 인물들이 연출하는 기발한 줄거리와 이국적인 장면이 교차하고, 아이러니와 풍자, 선정적인 무드가 감돌면서 이야기가 진행된다.2보카치오(Giovanni Bocaccio:1313∼1375)- 이탈리아 작가. 단테와 페트라르카와 함께 {이탈리아 최대의 작가로 꼽힌다. 『데카메론』은 토막이야기 형식을 취하여 10일 100화의 기상천외한 단편 이야기들을 엮어냄으로 초서, 셰익스피어를 비롯하여 후세의 유럽 문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보카치오는 단테를 존경해서 1364년 『단테전』을 집필하였고, 만년에 피렌체의 교회에서 『신곡』을 강의하였다. 그의 출생에 대해서는 환전상(換錢商)인 아버지 보카치오 디켈리노가 파리에 머물러 있는 동안 프랑스 여성과 사이에서 낳은 아이라는 일화 등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사실이 아닌 것 같고, 아마도 피렌체에서 비교적 낮은 신분의 여성을 어머니로 하여 1313년 여름에 태어났다고 한다. 1325년 아버지는 아들에게 금융업을 배우도록 나폴리의 대리점에서 일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는 금융업보다 지식인과 친교를 맺고 여러 문헌을 읽으며 왕녀와 사랑에 빠져 약간 현학적이기도 한 초기의 작품『여신 다이아나의 사냥』,『필로스트라토』,『필로콜로』등을 썼다. 1353년에 완성한 이 작품은 인문주의 시대의 문단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지만 일반 서민들에게는 폭발적인 인기를 모아 급속히 보급되어 외국으로도 퍼져 나갔다.『데카메론』 발표한 이후 문학적 명성이 높아진 보카치오는 자신의 문학적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페트라르카와 친교를 맺는 한편 피렌체 공화국 특사로 유럽 가지를 돌아다녔다. 『테세우스 이야기』,『사랑의 환영』,『피암메타 비가』, 라틴어 논문『이교신(異敎神)』등 후기 작품을 저술하며 은거하던 보카치오는 1375년 12월 성곽 도시 체르탈드의 집에서 사망했다.보카치오는 현실을 냉정하게 받아들이며 풍자를 섞어 묘사함으로써 근대소설의 선구자가 되었다. 단편을 몇 편씩 연결해서 당시 사회를 풍자하는 형식의 소설은 이탈리아는 물론 프랑스와 영국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3탄생배경『데카메론』은 1348년에서 1353년에 걸쳐 집필되었다. 이 작품이 발표되자 문단의 반응은 냉담했으나 민중으로부터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 작품은 곧 외국에까지 퍼졌고, 거리의 변사들까지도 이 이야기를 늘어놓을 정도였다.인쇄술도 없고 종이도 귀한 시대에 설화형식의 단편소설이 퍼진 것이었다.1348년, 유럽인구의 3분의 2를 휩쓴 흑사병이 피렌체를 덮치자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게 된다. 급속도로 도시는 황폐화하고 무정부 상태에 빠져들기 시작하였다. 수만 명의 시민이 죽어갔으며, 부유층은 말할 것도 없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다른 곳으로 피신해야 할 형편이었다. 흑사병으로 인해 사람들은 두려움에 휩싸였다. 환자와 미처 피신하지 못한 빈곤한 사람들 이외에는 사람의 그림자를 찾아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보카치오 또한 그때 아버지를 잃었으나, 그 자신은 나폴리에 머물러 있었으므로 재난을 모면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