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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사회사] 전쟁위기의 고조와 전쟁 발발
    전쟁위기의 고조와 전쟁의 발발By 신방과 이동진 정상은 문성환 박성용 김호철 이보라한국사회사 발표 '04. 10. 1(월)목 차1. 분단 정권의 수립2. 전쟁위기의 고조3. 전쟁 발발4. 한국전쟁의 전개과정5. 전쟁 발발과 관련된 주장6. 한국전쟁의 원인(수정주의, 전통주의)분단 정권의 수립㉠ 해주 인민 대표자 대회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 - 남조선 대표 선출 - '49. 9. 9 정부수립 ㉡ 사회주의적 경제개혁과 조,중,소 삼각동맹 - 사회주의 경제체제 본격화 - '49. 10 중공 수립 - 조, 중, 소 3국 공산주의동맹 - '49 말 ~ '50 초 중공, 북한의 주요 지도자 모스크바 방문㉠ 대한민국 정부 수립(자유민주주의) ㉡ 이승만 정권의 반공노선과 억압체제 - 반당정 세력과 소장파의원의 도전에 대한 정치 노선 ㉢ 경제 위기 고조와 농지개혁 - 종속적 식민지 산업구조 유지 - 미국의 ECA의 대한 원조 - 농지개혁의 지지부진 ㉣ 주한미군 철수와 군대 강화 - '49. 6 주한미군 철수 - 한미군사원조협정 남한 지지북 한남 한2. 전쟁위기의 고조■ 동아시아의 정세변화 ○ '48년 말 ~ '50년 초 한반도의 국제정세 급변 공산주의 팽창 강화, 미국의 대한정책의 모호성 ■ 남한의 북진 통일론 ○ 남한 내부위기 극복과 미국의 군사적 개입 원조 유도 ○ 미국의 추가군사원조, 무기제공 거부 (내부 전복활동 제어수준에 무장을 희망) ■ 북한의 군비증강과 평화통일공세 ○ 북한의 소련, 중공의 지원 군비 강화, 남한내 빨치산의 총공세 ○ 화전양면전술, 내부와해공작 ■ '48 ~ '50년의 38선 충돌과 남한 내 유격 투쟁 ○ 38선 무력충돌 – 정치적 의도, 현지 지휘관의 승부욕(우발적 충돌) ○ 토벌작전으로 남한내 유격대 와해3. 전 쟁 발 발■ 선전포고 없는 개전 북한의 북침 주장 ■ 북한의 반격새시 몇 시간만에 38선 수킬로미터 전진은 전면남침임을 반증 ■ 구소련의 문서들은 조-소간의 협의 내지는 사전 동의와 허락을 의한 것임을 증명4. 한국전쟁의 전개과정'50. 6. 25 개전7월 3일 한강 돌파38도선 부근 접전 '53. 7. 27 휴전협정10월 18,19일 중국군개입10월 1일 남한군 38선 돌파9월15일 인천상륙작전7월말 경상도 제외한 전지역 북한군 석권5. 전쟁 발발과 관련된 주장전면적 남침설 – 남한 정부의 공식적 입장전면적 북침설 – 북한의 공식주장남침유도설 – 이승만정권, 미국의 남한의 위기상황 극복을 위해 의도적 남침 유도제한 전쟁설 – 처음부터 전면적인 것이 아니라 '49 ~ '50년을 통해 지속적 발생 → 38선 국경분쟁의 연장선상에서 전쟁 발발- [인민군 정찰명령서 제1호], [인민군 전투명령서 제1호], 최근 공개된 구소련 문서- 이승만 대통령과 이범석, 신성모 국방부장관의 북진 통일론불안정한 남한의 정치상황 ; 5. 30 총선 이승만 직계 39명 불과, 경제위기 미 국무장관 애치슨연설(50. 1)6. 한국전쟁의 원인 (수정주의, 전통주의)민족해방론(민족해방전쟁의 일환)당 내부의 군력 투쟁 평화통일 협상 재개 무력 적화통일북 한세계 적화 전략(소련주도)극동팽창 : 부동항 구축소 련이승만 체제 위기 (소련에 호기 제공)군비 경쟁 북진통일론 이승만 체제의 위기 (미국,유엔 지지 필요)한 국對한 공약 약화 중공 승인 정책 대일 단독 강화 조약 체결 정책對한 공약 강화 유럽 우선주의 맥아더의 개인적인 지위개선 야망 맥아더의 아시아 우선주의미 국전 통 주 의수 정 주 의구 분Thank you ^.~{nameOfApplication=Show}
    사회과학| 2005.01.12| 9페이지| 1,000원| 조회(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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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감상문] 영화 감상문 10편
    먼저 영화를 분석하기 전에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주위 친구나 선배 후배 들에게 자신있게 내 인생은 아름다워..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명이나 될까? 부의 유,무에 따라 , 얼굴(몸)의 생김새에 따라 인생이 결정되어진다고 생각하는가? 이 영화를 보면서 우리는 깨닭아야 하는 것이 있다, 자기 인생은 자기가 아름답게 만들어 가는 것이다...라는 것을이 영화를 수업시간에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다. 이런 명작을 수업을 통해서야 만나게 된 것이 부끄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이 강의를 수강하지 않았더라면 이 영화를 볼 수 없었을 지도 모르니까...처음 이 영화 제목을 들었을 때 나는 "그냥 평범한 연인간의 로멘스 사랑이야기"일 꺼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내가 생각했었던 그런 가벼운 사랑이야기가 전부가 아닌, 무언가 심상치 않은 사건이 배경에 깔려 있음을 알아차리는데는 음악을 통해서였다. 전반부에서의 베니니와 도라의 사랑이야기..여기에서의 음악은 경쾌하고 발랄하면 빠른 음악이 주를 이루었지만 후반부로 넘어가면서 시대적 배경이 나타날 때쯤 음악은 무겁고 느린 음악이 주를 이루면서 아 단지 가벼운 영화는 아니겠구나 생각했다. 비극적 현실과 희극적 현실 상황이 교차하는, 그리고 아무것도 모른 채 수용소로 따라와 숨박꼭질을 하는 조수아..... 그들이 펼치는 모든 장면 하나하나에서 "사랑의 힘은 거대한 공포와 절망을 이겨낼 수 있다"는 말을 절실히 느낄수가 있었다. 파시즘의 냉혹한 전쟁의 이데올로기 속에서도 끝끝내 자식에 대한 사랑을 맹목적으로 실천하려는 그의 인생은 너무나도 아름답고 위대했다.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무언가로 부터 끓어오르는 뭔지 모를 마음 아픈 복잡한 감정들.... 계속 눈가에 눈물이 고이면서도 "그래도 인생은 정말 아름답다" 라고 느끼게 해준 영화. 머릿속에는 내가 사랑하는 모든사람들을 생각하게 만들어주는 영화....내가 아끼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삭막한 이세상을 살아가는 요즘 사람들에게 "헌신적인 사랑"을 보여주는 "인생은 아름다워"는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감당할 수 없었을 지도 모르겠다. 어둠 속에서 보이는 한 여학생을 첫사랑으로 착각하다가, 보내달라는 그 여학생을 실수로 사살하면서 그는 자기의 순수를 내던졌을 것이다. 그리고 경찰이 되고, 경찰이 되어서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천박한 삶의 굴레에 갇혀 버린 것이다. 너무나도 순수했기에, 거대한 시대적 흐름이 안겨주는 작은 상처를 그는 극복할 수 없었던 것이다.옛날로 돌아가고 싶다던 그의 과거를 하나 둘씩 여행을 하면서, 그 스스로도 극복할 수 없었고, 용서할 수 없었고, 자신을 내팽개칠 수 밖에 없었던 그를 인정할 수는 없으나 인간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첫사랑의 순정도 구원해 주지 못한 그의 냉소어린 삶을 이해할 수 있었다.옛날로 돌아가고 싶다던 그는 이제 없다. 예전에 자신이 첫사랑과 소풍을 갔던 그 곳에서, 그와 함께 불렀던 노래를 부르고 그는 사라졌다. 그가 이 세상에 남긴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다. 그의 아내도, 그의 친구도, 그의 자식도 그에게는 남아있지 않았다.그래도 인생이 아름다운가? 첫사랑의 숭고한 추억마저도 지키지 못한 시대 속에서 살았던 그 때 그 사람들은 과연 인생이 아름답다고 할까? 첫사랑 순임이가 기대했던 영호의 그 아름다운 꿈이 바로 그것이었나? 결과론적으로 이야기하면 인생은 아름답지 않다. 하지만 인생을 결과이기 보다는 과정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그래도 인생은 아름답다고 말 할 수도 있을 법 하다. 그 험난하고 나약한 삶에 첫사랑 순임이 만큼은 영호의 삶이 아름답기를 기원했으며, 냉소적인 영호도 술을 한잔 할 때면 그 첫사랑을 되내이며 흐느낄 줄 알았으므로....사막. 우리가 살아가기엔 너무나도 힘든 곳이다. 매서운 모래바람, 모래산.. 그 곳에서는 언제나 목마르고 그 곳은 지쳐 있게 하고 결국 그 곳에서 이름 없이 사라지기를 바란다. 이렇게 아무것도 없는 사막 가운데의 오아시스. 단지 물이 있다는 것만이 아니라 그 곳은 누구나 한 번 쯤은 갈망하고 희망하는 곳이다. 목마르지 않은 사람에게도 오아시스는 부장제 가족은 아니지만 아무런 문제없이, 문제가 생기더라도 스스로 해결해가며 살아간다. 안토니아의 집단의 사람들은 보통사람들이 보기에는 독특한 캐릭터들을 가지고 있고, 그것이 정상 가족인지 내가 정상 가족인지 약간의 의심이 들기는 하지만 우리들이 그것을 받아들이는데 큰 무리는 없다.안토니아의 여인들은 분명 어머니지만 모두 결혼이라는 정상적인 절차를 걸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중 누구하나도 그 집단에 거부를 하는 법이 없고, 모두가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안토니아는 바즈가 청혼했을 때 아들 따위는 필요 없어요. 가끔 와서 여자들이 하기 힘든 잡일이나 도와주세요. 라고 대답한다. 안토니아스 라인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남자들의 힘 없이도 농사일을 하며, 힘든 상황에서도 그들 스스로 역경을 헤치며 살아간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억압받아왔던 여성들을 모습을 능동적으로 그려내며 가부장제의 모순을 비판하고, 모계사회도 가부장제 사회처럼 모든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몇 년 뒤, 바즈에게 성관계를 제안할 때에도 결혼은 하지 않겠다고 얘기함으로서 그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밝히고, 영화에서는 결혼으로 이어지는 정상가족을 부정하고 있다.영화에서는 강간 혹은 성추행에 대한 대응방식을 법이나 다른 사회적 방법에 입각해 해결 하기보다는 인과응보라는 원칙에 따른 자력구제의 형태를 띤다. 이것은 남성 중심적 사회에서 법이 여성에게 작용하는 방식이 결코 온당하지 못함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한편 강간을 당한 이후에도 디디와 테레사가 다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주변의 보살핌과 더불어 직접적인 방식이 한가지 요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여진다.여성과 가족에 대한 신화를 유포하는데 있어 종교는 지식과 더불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영화에서 비판하고 있는 구교는 신부의 성추행이나 보름달을 보며 늑대울음 소리를 내는 미친 마돈나 와 그녀를 사랑하는 아래층의 신교도가 죽음으로만 화해할 수 있었던 점을 미루어 볼 때, 그 기에 주인공을 통해 우리 사회가 얼마나 외모를 중시하는가? 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인성을 가르쳐 야 할 교육 현장에서, 능력을 우선시 해야 할 취업 전선에서 우리 사회는 외모를 중요시하고 있다. 이는 영화 속의 상황이 아니다. 현실에서도 그렇기에 감독은 이러한 시선을 끄집어내며 비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주인공은 이러한 시선에 거부할 의지나 힘을 가지지 않고 있다. 그러한 시선에 부합되기 위해 주인공은 부단히 노력한다. 이는 주인공이 나약해서가 아니라 시선의 힘이 막강함을 나타내어 준다.몇 년전부터 외모가 인생을 좌우한다고 믿는 이른바 "루키즘"(Lookism:외모지상주의)현상이 우리나라 여성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다. 이를 타개 하기 위해서는 자기 존중감과 정체성을 찾도록 노력해야 한다. 동시에 사회적으로는 아름다움에 대한 다양성을 인정하는 문화와 교육을 펼쳐야 한다. 중요한 것은 외면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내면의 아름다움이다. 외모 때문에 자신이 가진 능력과 자신만의 아름다움을 찾지 못한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외모에 대한 한국인들의 의식전환과 루키즘으로부터 자유로워진 한국 사회를 필자는 기대하는 바이다.대륙횡단3번째 영화인 대륙횡단 은 뇌성마비 장애인 김남주씨의 일상을 군더더기 없이 다뤄 영상화 한 작품이다. 기존 장애인들보다 우월한 입장에서 보는 시각이 아니라 그들을 친구 또는 가족처럼 대한 작품이여서 보다 장애인들의 입장을 잘 헤아릴 수 있는 작품이다. 주인공을 실제 장애인이 맡아 픽션이 아니라 일상을 장애인의 시각에서 말하고 있기 때문에 진실된 감정을 읽을 수 있는 좋은 피사체 역할을 하였다.단편영화임에도 불구하고 11개의 짤막한 일상적 에피소드로 필름을 채우고 있다. 특별한 줄거리를 내세우기 보다 객관적인 사실들을 여러차례 보여 줌으로써 시청자의 기억에 더 강하게 입장을 표현하고 있다. 필자는 이 제목에서 말하고 있는 11번째 에피소드의 소재인 대륙횡단에 대해 말하려 한다.광화문 네 거리를 담담하게 지켜보는 주인공이 나온다. 그리고 목 듯 보이는 미래도 허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영화에서 자신보다 우등한 동생과의 수영시합을 하면서 하는 빈센트는 동생에게 이렇게 대사를 말한다. "나는 되돌아갈 힘을 남겨두지 않기에 너에게 이기는 거야!" 이 대사는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한번쯤 되새겨 볼 대사일 것이다.인생을 살다보면 우리는 많은 고난과 역경에 부딪히게 된다. 하지만 그 어려움을 슬기로 극복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좌절로써 결국 삶의 포기를 택하는 사람이 있다. 이 선택의 갈림길은 무엇인가? 사고의 차이이다. 이 영화에서의 필자에게 인상깊게 다가온 대사 "몸을 만지면 아파요. 머리를 만져도 아프고, 다리도, 배도, 다 아파요." 의사가 진찰한 결과 "몸은 괜찮소. 부러진건 손이요." 손이 아프기 때문에 모든 것을 아프게 생각 한 것이다. 마음이 아프면 세상의 행복한 일들도 아프게 보인다. 이 대사를 통해 감독은 어느정도 관객들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제시해 준 거 같다. 세상의 일들은 나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주어진다. 그러한 상황을 어떻게 인식하고 대처하느냐는 개인차이다. 필자는 항상 긍정적으로 해석하려고 한다. 어려움 상황들은 내 인생에서의 장애물이 아니고 어쩜 나를 크게 하는 인생의 한 과정이 아닐까 한다....이 영화가 어떻게 칸 영화제에서 수상을 할 수 있었던가..이 영화는 영화 내내 모래바람과 사막, 건설현장의 차들 그리고 사람뿐이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이 영화는 효과음도 거의 없다. 카메라 구도 또한 단순하다. 롱 테이크 때문에 지루하기까지 하다. 그러면서도 수상을 할 수 있었던 이유를 필자는 삶의 대한 고찰을 관객들에게까지 전이시킨 것이 이유가 아닐까 한다.이 영화를 보면서 필자는 이란의 사회에 대해 간접적으로 접하게 된 듯하다. 영화를 위한 설정일지는 모르지만 우리 나라의 폐쇄성에 비해 이란은 개방적이다. 그리고 이타적이다. 한번도 본적이 없는 사람의 차에 서스럼 없이 탈 수 있다는 것, 차가 빠졌을 때 도와달라는 말도 없었는데 할아버지에서.
    독후감/창작| 2004.12.20| 21페이지| 1,000원| 조회(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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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교사회학] 남북한 저항문화
    남북한의 저항문화(지하언론) 비교지하언론은 권력에 대한 또는 국가에 대한 비판적인 목소리가 있을 때 생성, 발전하게 된다. 하지만 단지 그 비판적인 목소리를 개인만이 가지고 있으면, 즉 대중의 힘이 없으면 지하 언론은 생성되지 않는다. 통제가 있어야 일탈(사회제도에서의 저항)적인 문화가 생겨난다. 따라서 필자는 이 논의를 하기 위해 가장 언론에 대한 통제가 심했던 남한시기(박정희 정권)를 전제로 한다. 남한과 북한을 비교하기 위해 필자는 지하언론에 대해 남한과 북한 그리고 동독의 비교를 통해 과연 지하언론이 생성, 발전하게 되는 그 변인을 찾아보려 한다. 무엇이 지하언론을 생성하게 했을까? 과연 언론의 이념 차이가 그 변인으로 작용했을까?● 남한과 동독에서의 지하언론체제 규범에서 이탈한 자들의 활동과 사상의 열린 공간으로 자유로운 커뮤니케이션의 장이 되며, 조작된 허상세계가 아닌 현실상황을 다양한 시각에서 조명할 수 있는 독립적 언론수단을 창출하고자 했다. 전지역에 흩어져 있는 지하단체의 커뮤니케이션 통로가 되어 연대형성에 기여할 뿐 아니라, 지하단체의 활동 프로그램과 의견을 시민 사이에 전달하는 매개체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남한에서는 1960년 말부터 지하 언론이 생겨났지만 박정희 정권의 언론 통제로 인하여 많은 언론들이 소멸되었다. 하지만 동아투위 등 대학에서의 자보와 기독교, 노동 잡지들이 지하 언론으로의 역할을 수행한다.동독에서는 1970년 초부터 자미스타트(지하언론)이 생성되고 점차 발전하게 된다. 예술적 자미스타트와 정치적 자미스타트로 구분할 수 있는데 이들은 결국 사회주의 사상의 개혁과 수정을 울부짖는다.● 국가의 언론 통제(공통점)남한과 북한 모두 언론을 국가가 통제했다는 점에서 같다. 통제의 정도는 차이가 있겠지만 모두 독재 정치(북한 : 주체사상 김일성, 김정일 남한 : 이승만 정권부터 전두환 정권까지)를 위해 언론을 통제하였다. 북한의 노동신문(언론의 대표적인 예)은 당의 정치적 선전의 매개체로 전락해 있으며 따라서 북한의 언론은 국가를 위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독재 당시 남한에서도 많은 언론인들을 해직, 해고 시켰으며 정치 선전 뿐만 아니라 독재자를 미화시켰다.● 남북한, 동독 언론 이념 및 정책 비교◎ 북한 언론의 이념 및 정책북한언론의 이념은 기본적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 언론철학과 70년대 이후 주체사상에 의해 바탕을 두고 있으며 언론은 사회주의 혁명 수행의 매체로 규정되고 있다. 북한언론의 기본성격을 계급성과 당성, 인민성과 대중성, 진실성과 전투성으로 설명하고, 북한언론의 기능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선전.선동자, 조직자, 문화교양자적 기능으로 나누어 적용시키고 있다.계급성과 당성이란 노동계급의 당파적 관점에서 당의 요구와 정책대로 사업을 수행한다는 상호작용적 원칙이다. 즉 노동계급을 선두로 하는 인민들의 이익에 철저히 복무함으로써 국제노동운동의 위업을 성실히 하는데 언론의 계급성이 있다고 한다. 또한 당은 계급의 전위대이며 뇌수이므로 언론이 계급성을 띤다는 것은 곧 당성을 띄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언론의 당성이란 당에 대한 무한한 충실성을 말한다.언론의 인민성이란 언론이 인민대중의 이해관계를 옹호하며 인민대중의 이익에 복무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인민성은 계급성을 배제하는 의미가 아니라 그 사회의 가장 선진적인 계급인 노동계급의 이익에 복무하는 데서 발현되는 본성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언론의 대중성이란 인민성을 더욱 풍부하게 해주는 것으로서 인민 자신이 언론 사업에 대중적으로 참가하여 그것을 자신들의 정치적 연단으로 이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을 말한다.언론의 진실성이라 객관적 현실을 가장 과학적이고도 진실하게 반영하는 일반적 본성을 말한다. 여기서 진실성을 체현할 수 있는 실질적 가능성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혁명적 이론과 당정책에 의해서 확보된다고 주장한다. 또한 전투성이란 계급적 원수들과 타협하지 않고 그들을 예리하게 폭로하며 당 정책을 기동적으로 그리고 끝까지 관철시키는 것을 말한다.또한 북한은 언론의 사회적 기능으로서 선전ㆍ선동자적 기능, 조직자적 기능, 문화교양자적 기능을 제시하고 있는데 첫째, 선전ㆍ선동자적 기능은 언론의 1차적 사업으로 간주된다. 선전과 선동은 개념적으로 구분되어 사용되고 있는데, 선전이란 사람들에게 어떤 사상과 학설, 정치적 견해 등을 구두 또는 출판물, 라디오 등 각종 수단을 통해 알려주고 해설하며 교양하는 것을 말한다. 선동은 담화나 보고 또는 연설 같은 것을 통하여 그리고 신문, 소책자, 삐라와 격문, 라디오, 영화 같은 것으로 군중에게 사상적 영향을 주고, 군중의 기세를 돋구고 그들을 혁명과업 수행에로 직접 발동시키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하고 있다.둘째, 조직자의 기능은 행위 유발 및 행위변화의 차원이다. 언론이 담당하고 있는 사명은 한갓 정치적 선전이나 선동에 머물러 있지 않으며, 혁명과업 수행에로 그들을 직접 이끌어 들이며 끝까지 관철하는 것으로 당이 제시한 혁명과업 수행을 위하여 당원들과 대중들을 한 데 단합시키고 그들의 역량을 조직 동원한다는 것 즉, 집단적 조직자로서의 기능도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셋째, 문화교양자적 기능은 1962년 5월 3일 김일성의 교시에 의해 주창된 기능이다.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건설하고 있는 조건하의 언론은 그의 문화교양자적 기능이 근로자들에 대한 맑스-레닌주의 사상의 보급이나 그들의 정치의식 수준 제고 그리고 정치적 동맹자의 흡수에 그치지 않고, 근로자들에 대한 공산주의 사상 교양 그리고 풍부한 문화적 소양과 높은 기술을 소유한 전면적으로 발전된 근로자들을 육성하는 데 이바지하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남한 언론의 이념 및 정책정치문화의 성격은 대통령의 통치의지에 의해 규정되어졌다. 그러므로 이 시기에 있어 정부의 언론정책도 그의 통치의지에 적합하도록 방향 지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뜻에서 대통령의 언론관은 1960년대와 1970년대 한국언론의 성격을 규명하는 가장 중요한 단서가 된다고 할 수 있다. 대통령의 언론관을 형성하는 데 있어 적어도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요인이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된다.첫째, 대통령이 성장한 문화환경을 들 수 있다. 그는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성장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불평등 사회구조에 대한 강한 저항의식 또는 강력한 체제개혁 의지를 지니게 됨으로써 체제유지의 기능을 수행하거나 체제의 한 부분인 언론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형성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둘째, 대통령은 일제 때 사범교육을 받았으며, 육군사관학교 교육을 받고 일생의 가장 중요한 시기를 군인으로 살아왔다. 따라서 일제의 사범교육과 군사문화가 존중하는 규범체계를 내면화 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엄격한 규율, 권위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 국가와 민족에 대한 무한한 충성 등의 가치와 규범을 내면화 함으로써 다양한 의견의 표출과 환경의 감시 및 비판의 자유를 근간으로 삼은 언론의 본질과 상충되는 인성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것이다.셋째, 자유당정권 하의 부정부패 구조와 그것을 정당화시켜 주었거나 또는 공생해 온 언론에 대한 적개심, 그리고 4 · 19 이후의 사이비언론의 발호 등이 부정적인 언론관 형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특히 그가 일선 군부대의 참모나 지휘관으로 봉직하는 동안 언론의 횡포와 부패를 직접 체험함으로써 사이비언론의 척결은 물론 언론 그 자체에 대한 강력한 정화의지를 내면화했다는 점이다. 이같은 영향은 그가 권력을 장악한 후의 사이비언론 척결이나 언론에 대한 윤리적 규제를 끊임 없이 시도했다는 데서 잘 나타난다.이를 해석해 보면 →이 당시 언론관은첫째, 국가이익의 추구가 언론의 일차적인 기능인 동시에 궁극적인 목적이어야 하고둘째, 이를 위해 언론은 지도적 기능을 우선적으로 수행해야 하며셋째, '언론의 자유'보다 '언론의 책임'을 더 강조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동독의 언론 이념과 정책{북한동독남한언론 이념마르크스-레닌주의 철학과 주체사상마르크스-레닌주의 철학정치적 기구로 인식언론의 기능선전.선동자적 기능, 조직자적 기능, 문화교양자 기능선전, 선동자적 기능, 조직자 기능, 문화 교양자 기능국가이익의 추구,지도적 기능, 언론의 책임대내 언론 정책주체사상의 선전, 당의 방침과 노선 달성지배 이데올로기의 선동선정의 도구국가 이데올로기의 정치적 기구동독 지배언론의 이념적 기초는 마르크스-레닌주의에 기본적 틀을 두고 있다. 마르크스-레닌주의 언론이론은 신문을 정치적 기구로 간주하며, 신문의 역할이란 사상의 보급, 정치적 교양 및 정치적 동맹자의 흡수에만 그치지 않고, 의식생산 수단으로서 집단적 선전 및 선동자일 뿐 아니라 집단적 조직자이다. 언론은 규범적 의미에서의 공론장형성의 매개체로서 기능을 잃고, 지배이데올로기의 선동선전의 도구화로 전락하며, 국가권력의 한 형태로 민중의 이해나 관심을 대변하기보다는 민중 위에 군림하는 언론기구로 변질, 발전해 왔다.
    사회과학| 2004.12.07| 5페이지| 1,000원| 조회(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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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리학과] 간도는 우리땅
    간도학회 발기문-間島學會 發起文최근 중국이 진행시키고 있는 東北工精으로 말미암아 한.중 사이에 역사전쟁이 발발 했습니다. 동북공정의 목적은 남북통일후 간도지역에 대한 영토 분쟁을 미리 차단하려는 것입니다. 특히 이곳에 거주하는 300만 조선족 동포가 지켜온 한민적의 정체성을 본질적으로 끊으려는 전략입니다. 중국은 이 지역에 있었던 고조선. 고구려. 발해의 연원을 부정하고 이들 국가가 중국 소수민족의 지방정권이라 주장하고 있습니다.그러나 이 간도지방은 고조선 .고구려의 땅으로 수. 당의 침입을 물리치면서 민족의 얼을 지켜온 자랑스런 곳입니다. 더구나 이곳에 남아있는 화려한 고구려의 고분벽화와 천리장성은 우리민족의 문화적 긍지와 당당했던 기백을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더욱이 이곳은 일제 하 민족독립운동의 산실로 한민족의 얼을 만방에 과시해준 자랑스런 고장입니다.그러나 간도지역이 간특한 대륙침약의 수괴인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날조된 을사조약에 따라 중국 측에서 불법점유한 지 어느덧 한 세기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당시 일제는 간도를 한국령으로 만들수 있는 유리한 처지였음에도 이를 외면했고, 조선 정부는 분쟁해결에 나서지 않고 일본과 청나라의 눈치만 살폈습니다. 비록 이 지역에 변계 관리사를 파견하기도 했지만 적극적 보호정책을 시행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간도 한인은 토문강에서 송화강 이동이 우리의 영토임을 주장하며 조속한 해결을 촉구했고 간도 한인의 생명을 구해달라 간청했지만 조선정부는 이를 묵살했습니다. 더구나 이등박문의 책략에 속아 간도분쟁의 해결을 일제 통감부에 위임하는 어리석음까지 저질렀습니다. 결국 일제는 1909년 간도협약을 체결하여 이곳을 청나라에 넘겨주는 불법을 자행했습니다. 더욱 통탄스러운 일은 간도조약이 불법이고 무효임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광복된지 60년이 지나도록 이에 대한 정부의 항의가 단 한번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간도에 거주하는 조선족 동포는 지금까지 어려운 환경에서도 이곳을 지켜왔고 장차 간도의 파수꾼이 될 사람들입니다. 이처럼 매우 있고, 또 그 동북쪽 70리 지점에 고성고기가 있는데 이것이 거양성이며 고려 때 윤관 장군이 이를 축조한 것이라 한다. 한편 회녕 고령진에서 두만강을 건너 고라이를 넘어 오용흠·영가흠을 지나서 소하강 강면에 이르르면 공험령 고기가 있다. 또 회녕에서 두만강을 건너 북쪽 700리 지점에 선춘령이 있는데 윤관 장군이 개척하여 이 성에 이르렀으니 이 선춘령은 고려의 북쪽 경계로서 남경과 거양이 모두 이 경계 내에 있다고 한다. 만주의 간도지방은 특히 이조의 발상지이며 그 선조의 옛터와 능이 이곳에 있다. 목조(이태조의 4세조)는 원나라에 가서 남경오천호소 달로하치(達魯花赤)가 되었는데 알동을 중심하여 다스렸다. 이 때 주민이 모두 목조의 덕망과 선정을 흠모하면서 복종하였는데 이것이 곧 이씨왕업의 근거라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남경과 알동은 모두 두만강 건너편의 만주지방이다. 목조가 죽은 후에 묘지는 덕능이라 하여 그곳에 있으며 그 부인의 묘는 효비안능이라 하여 역시 그곳에 있다. 그러므로 이씨조선은 왕업의 근거인은 이태조의 고조부이고 그 근거지는 만주이기 때문에 그 이후로 만주지역 특히 간도지역을 성역으로 생각해 왔다. 이조 여조때에 이조 발상지인 백두산과 만주지역을 소중히 여기고 국가에서 제사를 지냈다.한·청 국경과 무인지대의 설치1638년 청태종은 압록강 하류에 있는 천반에서 성을 거쳐 감양변문(지금의 동경·회인)을 지나 성창문과 왕청변문에 이르는 선에 경계표시를 하였다. 이 일련의 경계공사는 옛 경계보다 50리를 더 동쪽으로 이전하여 설치한 것이다. 1731년(영조 7년)의 우리측 기록에 의하면 "……봉황성 밖의 육로수비지 근처에 초하와 애하의 두 강이 있다. 이 강들은 봉황성 성내에서 시작하여 성 밖의 망우소 지방에 이르러 합류하여 중강으로 들어간다. 이 가운데 삼각주가 있는데 이를 강심타라 한다. 이 타의 서쪽은 봉황성 관할에 속하며 타의 동쪽은 조선에 속한다.……망우소 지방에 수신지를 세웠다. 수신·방신을 설치한 곳은 조선 국경과 연첩한다"고 하고 있다 이중하를 임명하였다. 이에 중국측에서도 독옥을 대표로 임명한 후 1885년 9월 30일부터 국경회담이 진행되었다. 이 회담에서 중국측은 토문강은 두만강을 뜻하는 것이므로 두만강이 국경임을 기정사실로 하고 다만 두만강 상류는 여러 갈래로 나뉘므로 이 여러 상류 중에서 정계비를 세워 둔 곳에 가장 가까운 경계를 택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하여 두만강에서 정계비 있는 곳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조사하자고 하였다. 이에 맞서 한국측은 정계비는 국경을 정한 비석이고 그 비석에는 토문강을 국경으로 한다 하였고, 비석에 가장 가까운 곳에서 출원한 강이 두만강이 아닌 실제의 토문강이니 토문이 국경임이 틀림없다고 주장하였다. 한국측은 그러므로 비석이 있는 곳에서 토문강을 따라 내려가며 그 강이 어디로 흐르는지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회담은 1885년 1월 27일까지 걸쳐 진행되었으나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났다. 1887년 4월 7일부터 5월 19일에 걸쳐 제2차 국경회담이 한·청간에 개최되었는데 이때에도 제1차 회담 때와 같은 주장을 함으로써 아무런 결과없이 회담은 끝나고 말았다. 청국의 이홍장은 1888년 1월 12일에 방랑을 대표로 임명하고 제3차 국경회담을 한국에 요청하였다. 이에 한국은 앞서 있은 두 차례의 회담시 양측 대표의 숙식비를 한국이 부담함으로 인한 한국측 피해가 컸으므로 앞으로는 비용을 각자 부담하자고 하게 되어 이 문제로 인하여 국경 회담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어떻든 여기에 표시된 토문강은 그 상류에서 강물이 흐르며 어느 지점을 흐르다가 다시 강물이 강으로 흘러들어가기 때문에 그 지역이 토퇴·석퇴를 쌓도록 한·청간에 합의를 보았으며, 그 후의 이 공사를 완료한 바 있다.선후장정의 체결가. 선후장정의 체결경위청국은 1880년에 간도에 개간사무를 보는 개간국을 두고 1894년에는 행정구역을 세분하여 4대학 39사를 두고 사에는 향약사장을 두었다. 1900년에는 국자가에 연길청을 신설하고 1902년에는 지타소에 무민독리사부를 두었다. 한국측은 1895고 두만강이 양국의 국경으로서 이미 정한 문제가 아님을 설명하였다.이 제1조에 의하면 한·중의 국경을 두만강으로 볼 수 없다는 점은 명백한 것이다.2 제2조 : 사포대 및 한병의 도강 금지장정 제2조는 "시찰 이범윤은 이미 여러차례 사단을 일으켰으나 약정 후는 재회 한국측 문무명관 긴급히 변방의 소요를 금지할 것이다. 만약 다시 청계로 침범하는 일이 있으면 한관등의 승인하에 무고히 위약하고 사단을 일으킨 것을 용인한 것을 볼 것이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 조항은 간도지역에서 한인보호를 위해 사포대를 조직하여 활동중인 이범윤을 축출하기 위해 만든 것이며, 한국변계관리들의 의도와 청측이 종래 주장한 이범윤의 철퇴문제를 모두 만족시켜주었다. 이후 간도지역의 한인들은 간도협약이 체결될때까지 청인의 학대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한인의 도강금지는 간도지역을 청인들이 관할하겠다는 의도였다.3 제3조 : 비준문제장정 제2조는 "이범윤이 북간도를 관리함은 청국정부가 비준의 문빙을 주지 않았으며 청국계관도 윤인하지도 않았다"고 되어 있다. 이 조항은 청측이 종래 요구해 온 이범윤의 철퇴문제에 귀결된다. 청이 수차 이범윤의 철퇴를 요청하였지만 한국정부는 거부했던 것이다. 청이 이범윤의 간도 주재에 대하여 비준을 윤허받아야 한다면, 마땅히 간도에 주재해 있는 청의 관리들도 한국의 비준을 받아야 할 것이다. 다만 간도지역은 국계가 미결된 상태이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었다.따라서 한국정부는 이범윤의 간도주재를 청에 통보했을 뿐이었다.4 제4조 : 사포대원에 대한 인도요구장정 제4조는 "이승호·김극열·강사언·성문역 등은 이미 청계에 인적한 반민이다. 공법에 따라 청관이 소환하여 조례 징변할 권리가 있다. 재회 한관은 빨리 잡아 청관의 관속에 넘겨서 변계를 편안케 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 조항은 이범윤이 조직한 사포대가 도강하여 청의 덕화사, 장화사 등을 점거하고 또 청병과 교전한 사건 등에 관계한 사람들이다. 간도지역에서 한병이 청인을 공격한 자를 범죄시하여 청에 인도한하고 연강상하를 순소할 것이며 정약 후 무사하면 작량 철수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 조항은 양국 방위병의 근무규정을 명시한 것인데 한명의 도강을 염두에 두고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⑫제12조 : 결론규정제10조는 결론규정으로서 "청한양계는 교섭이 분반하며 일일히 신론하기 어려우나 이미 조약에 제명한 것은 다같이 조약에 따라 처리하고 조약상 미비한 바가 있을 때는 공법에 준거하여 판리 할 것"을 규정하였다.청일간도협약의 체결가. 간도협약의 체결경위이조말 1879년, 병자수호조약의 체결로 한국은 낡은 쇄국의 장벽을 깼으나, 밀려드는 열강의 경쟁적 세력팽창을 저지할 수 없었다. 거센 외세의 각축 속에서 독립국가로서의 존엄을 유지하기 위해 고종은 1897년(고종 34년) 10월 11일에 국호를 '대한' 년호를 '광무'라 칭하고 새로운 '대한제국'을 내외에 선포하였다. 그러나 노·일 전쟁 이후 득세한 일본은 1905년 11월 18일, 강박으로 우리 정부와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였고, 1907년 7월 24일 헤이그 밀사사건을 계기로 '정미 7조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내정권을 강취했다. 일본은 '한일의정서' 제1조에 의거 1904년 8월 22일' 한일협약'을 조인하여 외교권에 대한 박탈을 의미하는 고문정치가 시행되었다. 이듬해 '한국보호권 확립의 건'을 4월 8일 각의에서 논의하여, 한국에 대한 보호권을 확립하고 한국의 대외관계를 장악토록 하며 이를 위해 보호조약체결의 필요함을 결정하였다. 10월 27일에는 伊藤博文과 장곡천 군사령관 및 명석원이랑 헌병사령관의 위협아래 조인된 '을사보호조약'주)을 위한 '한국보호권 확립실행에 관한 각의결정'을 하였다. 이의 내용에는 "도저히 한국정부의 동의를 얻을 희망이 없을 때에는 최후의 수단을 써서 일방적으로 한국에 대해서는 보호권이 확립됐음을 통고 하라"고 하여 무력에 의한 보호화를 계획했던 것이다. 이에 앞서 일본은 1905년 9월 5일 러일강화조약에서 한국에서의 탁월한 이익과 한국의 보호화에 대한
    사회과학| 2004.12.07| 6페이지| 1,000원| 조회(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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