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동적 성격구조너무나 침착하고 능숙한 솜씨를 지닌 간호사와 깔끔한 종업원 차림을 한 도우미들,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흰색 벽의 병동과 테이블에 둘러앉아 카드게임에 열중인 환자들이 있다. 정신병원 환자의 묘사가 그렇듯이, 멍한 표정과 비정상적으로 웃는 모습의 환자들이다. 이런 것들이 우리가 보게 되는 병원의 평화스러운 모습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평화스러운 모습에는 뭔가 이상한 점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정신치료 요법의 하나로 행해지는 토론시간에는 말로 표현 못할 중압감과 환자들의 의기소침한 모습들이 있다.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는 인디언과 항상 말을 더듬는 빌리 등, 여러 환자들은 자신들의 비정상적인 행동과 사고능력 때문에 병원에 의지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들의 자주성을 포함한 모든 것을 병원에 맡기고 있다. 영화『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에서 우리는 막연히 느끼고 있던 인간의 소극적 성격구조를 확인 할 수 있었다. 이는 비단 환자들만의 독특한 성격구조가 아니며 병원 밖에 있는 우리 자신에게도 익숙한 것임에 혼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즉, 공간적인 규제가 없는 일반인들에게도 나타나는 이러한 소극적 성격구조는 왜 나타나며 무엇이 인간의 행동을 주춤하게 하는가 하는 의문에서부터 우리의 논의는 시작된다.여기서 消極的 성격 구조란 사람마다 다른 기질에 따른 소극적 성격은 제외한 것임을 밝혀둔다. 이러한 성격구조는 인간의 행동을 자신 내부가 아닌 다른 외적 환경에 의해 영향을 받는 것으로 인식한 스키너의 이론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앞으로 논하게 될 감시와 처벌의 내용이나 영화의 내용에서 나타난 환경 결정론적 사고 방식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하고, 본문에서는 인간행동을 통제하고 감시하는 환경적 요인을 공간, 권력, 언어로 구분지어 논하도록 하겠다.스키너의 행동주의 철학스키너는 심리학적 차원에서 심리학을 ‘영혼에 관한 과학’ 이 아니라 ‘행동에 관한 과학(the science of behavior)’으로 규정하고자 한다. 즉 그는 연구의스윅이 감시인들과 난투극을 벌인 후, 강제로 끌려간 2층의 병실이 그렇다. 그곳의 환자들은 첫눈에도 그들보다 증상이 심한 것으로 보이며, 건물의 배치 역시 보다 잘게 나누어지고 보다 엄한 감금이 행해질 듯한 독방 중심적 형태를 보여준다. 그 공간들은 개개인을 작은 단편으로 절단하고, 또한 조작 가능한 관계를 수립한다. 그리고 자리를 지정하고 그 가치를 명시하며 개개인의 복종뿐 아니라 시간과 동작에 대한 최상의 관리를 확보하는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에 맥머피가 양처럼 순해져서 지낸다고 전해지는 곳도 바로 이 2층이다. 2층에서는 보다 강력한 규율과 감시, 처벌과 훈육을 통해 양처럼 순종적인 신체들을 생산한다. 위계화되고 극도로 개별화된 이 공간에 의해 맥머피처럼 선동적이고, 도주를 꿈꾸며, 환자들을 연대하게 하는 위험인물에 대한 감시와 소재파악, 평가, 측정, 진단, 일람표 작성 등이 수월하게 진행될 수 있는 것이다.푸코는 『감시와 처벌』 3장에서 벤담이 창안한 이른바 '일망감시시설(Panopticon)'을 긴 분량을 들여 주의 깊게 분석한다. 이 시설의 핵심은 감시자는 모두 볼 수도 보지 않을 수도 있지만, 투옥된 자는 항상 언제나 자신이 감시자의 시선에 노출되어 있음을 의식해야 한다는 점이다. 영화 속의 병원 건물에서도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일망감시적인 장치는 많다. 중앙에는 감시탑이 있다. 감시탑을 둘러싼 사방으로 환자들의 출입을 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복도 양편으로 독방들이 빙 둘러 배치된다. 수면 중에도 그들을 한 눈에 복 수 있도록 칸막이 없이 넓게 트인 침실이 있고 거실에 있는 환자들을 훤히 볼 수 있도록 유리가 설치된 투약실이 있다. 거실은 하나의 변형된 판옵티콘인 것이다. 독방들의 문은 창살이 막고 있지만 내부는 시선에 완전히 노출되어 있다. 감시탑은 그러나 어두워서 그 안에 감시자가 있는지 없는지, 혹은 그가 자신을 보고 있는지 아닌지를 전혀 알 수가 없다. 그리 오래지 않아 그는 설사 감시자가 없더라도 감시자의 시선을 느끼며 시선에 주눅들고가 앉아 있다. 그들은 의학적 시선에 의해 관찰되며 그 관찰은 진료기록부에 빠짐없이 기록될 것이다. 기록은 다시 스피비와 같은 의사에게 넘어갈 것이고 그곳에서는 보다 면밀한 의학적 시선을 통해 처방이 내려지고, 다시 관찰되고, 위험인물로 판정될 것이다. 자신들을 평가하고, 측정하고, 기록하고, 치료하는 시선 앞에 주눅들지 않을 환자는 없는 것이다. 이들은 경찰이나, 검사가 아니라 의학적 지식과 시선을 통해 한 신체의 순종 가능성 여부를 타진하는 지식 권력자들이다. 이처럼 권력은 결국 知識을 빌어 자신은 전면에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은 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다. 푸코에 따르면 인간에 대한, 개인에 대한 과학은 이렇게 시작한다. 개인에 대한 원활한 감시를 위해서는 개인에 대한 정보와 지식이 요구되며 개인에 대한 기록과 그것들의 정확한 분류, 계산, 측정이 소위 인간과학을 낳는다. 범죄심리학, 골격학, 정신분석학, 정신병리학, 임상의학, 범죄분류학, 교육학, 사회과학 등등은 이렇게 탄생된 지식 권력들이다.그러나 권력을 매개하고 익명화 하는 것은 지식만이 아니다. 또 하나의 매개가 영화 속에 등장한다. 다름 아닌 원리로서의 민주주의이다. 치료는 민주적인 토론을 통해 이루어지며 간호사들과 감시인들은 환자들을 동등한 인격체로 대하는 것처럼 고상하고 예의 바른 언어를 사용한다. 환자들은 마치 자신들이 자율적인 주체인 양 토론하지만 토론의 주도권은 항상 래취드가 쥐고 있다. 또한 이러한 언어적 자제와 예의 바른 대화는 환자들에게 그대로 요구된다. 사회적으로 쓸모 있고 순종적인 신체는 고상함과 품위를 지켜야 하며 어떤 순간에도 온순하고 냉정해야 한다. 직장 상사 앞에서, 교수 앞에서, 선생님 앞에서, 고참 앞에서, 부모 앞에서, 보건소장 앞에서, 교통경찰 앞에서, 그러니까 그 모든 권위적 시선들 앞에서 순종하지 않을 수 있는 신체는 없는 것이다.2. 규율 권력規律은 다음으로 통제할 신체들에 대한 시간표를 작성하고, 신체들의 동작에 일정한 시간을 부여하며, 그처럼 시간화 된 동일과를 시작해야겠어요.” 이다. 규율 권력에 있어 일과의 준수, 시간표의 원활한 작동은 이처럼 몇 몇 일탈적인 개인의 죽음보다도 훨씬 중요한 것이다. 잘 조정되고 원활히 진행되는 시간표는 느닷없이 죽어버리는 빌리 처럼 불손하고 비순종적인 신체들을 리드미컬하게 굴복시키는 가장 탁월한 훈육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활동에 대한 규율을 취지로 하는 통제는, 신체를 자연적인 기계 장치 따위로 취급하여 그 요소 하나의 소멸 따위에는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인간의 행동은 환경에 따른 종속변수에 불과하여 그것의 변화가 환경에 영향을 줄 수 없다는 스키너의 말도 확인해 볼 수 있다. 시간표를 내면화 한 인간은 절대 급작스럽게 죽거나 죽이지 않는다. 대부분의 우리들이 자살하지 않는 이유는 일상의 일과표에 자살을 위한 시간이 배치되어 있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를 일이다민주주의는 지식 권력 뿐 아니라 규율 권력으로 사용되는데 월드 시리즈 시청을 두고 벌어진 래취드와 맥머피의 실랑이를 상기해 보자. 토론 참여자들 중 9명이 시청에 찬성을 한다. 그러나 래취드는 토론에 참여하지 않은 다른 환자들 9명을 거론하며 과반수가 되지 않으므로 시청은 불가하다고 이야기한다. 맥머피에 따르면 나머지 환자들은 식물 인간들로 전혀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사람들이다. 추장의 거수에도 불구하고 월드 시리즈는 맥머피가 꺼진 TV 앞에서 혼자 하는 중계방송으로나 대치될 수 있을 뿐이다. 아마도 밀러스 포먼 감독은 정치에 무관심하거나 무지한 다수 대중들의 기만 속에 유지되는 미국식 민주주의를 풍자하려는 의도로 이 장면을 영화 속에 집어넣은 것일 테지만, 어쨌든 민주주의는 이런 방식으로 환자들에게 규율을 부과하는 하나의 매개 기술이 되고 있다. 결국 권력은 지식과 마찬가지로 민주주의를 빌어 순종적인 신체를 훈육하고 있는 것이다.언어스키너는 언어에 많은 관심을 가졌는데 이는 인간 행동의 대부분을 구성하고 있으며 인간 행동의 특이한 측면을 가장 대표적으로 나타낸다고 말한다. 그리고 언어 행동의 기능 분석을 실시하. 사회에서는 그들의 통치에 대항하지 않는 사람을 원한다. 결국 환경에 순응하는 사회인을 원하는 것이다. 여기서 사회인이란 그 사회 체제에 반하지 않는 사람이다. 사회에서는 제도에 대항하지 않는 소시민을 원하는 것이다.사회는 앞에서 말한 공간과 언어 등의 기제를 통해 권력을 영위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과거 스키너의 行動主義와는 다르게 이러한 통제 기제들이 점점 내면화 되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제도권 교육 하에서 규율에 의해서 시간표에 의해서 시험에 의해서 평가 받고 통제 당하던 우리 자신의 모습을 제3자의 눈을 통해서 바라보았을 때 비로소 지구라는 큰 정신병원을 느낄 수 있었으니 말이다. 푸코가 말했듯이 사회에는 분리된 공간과 서열과 규율이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런 사회구조 자체에 의문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지식을 통한 권력 습득에만 관심을 가졌다. 그것은 물론 사회가 사회인에게 훈육한 올바른 방향일 것이리라. 맡은 바 일을 열심히 하고 일탈하지 않는 것. 이는 사회가 통제를 통해서 얻고자 하는 궁극적 목표이기 때문이다.또한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의 20년 후의 모습을 ‘트루먼 쇼’에서 볼 수 있다. 현대사회에서 돈만 많은 경제인보다는 기술을 가진 자에게 권력이 이동하면서 통제의 기제가 더욱 과학과 대규모화 된다. 과학적인 기술을 가진 자는 사회인의 거의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지만 오히려 피해자인 사회인은 자신이 통제 당한 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안다 해도 기술을 가진 권력자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도 맥머피 처럼 저항 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통치구조를 알았다고 해서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속세를 떠나서 절로 들어가는 것이 진정 자유를 찾는 길일까? 로빈슨 크루소처럼 아무도 없는 무인도에 살면 개성을 찾을 수 있고 모든 감시와 통제에서 벗어날 수 있어서 행복해지는 것일까? 이러한 고민은 너무나 벅차서 아예 생각하지 않고 제도에 순응하는 상태에서 나름대로의 행복을 찾아보자는 결론에 다다르게 할 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