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운동, 과연 혁명인가 반란인가 ?? 서론19세기 조선사회 안팎에는 여러 가지 문제들이 존재했다. 안으로는 정부의 조세 개혁 노력이 성과를 얻지 못하여 삼정이 문란해졌으며 이로 인한 농민들의 삶은 극도로 피폐되었고, 밖으로는 개항이후 서양의 침략에 대한 위기감이 더 커져갔다. 또한 이와 함께 개항이후 외국의 공산품들이 밀려 들어와 국내 수공업이 위축되었고 빈농이나 소상인 등 백성들의 삶은 나날이 어려워지는 반면 지주와 대상인 등은 점점 부를 쌓아 두 계층간의 격차가 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1860년 최제우가 동학을 창시하였다. 동학의 교리에는 보국안민과 제폭구민을 뜻으로 두었고 이에 사회 변혁을 꿈꾸는 지식인들과 피폐한 삶의 변화를 원하는 일반 농민들이 서학에 반대하여 대거 동학에 빠져들었다. 이러한 동학 조직은 점점 교세를 확장시켜 정치세력화 되어갔고 1894년 고부 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반대하여 수백 명의 농민들이 고부 관아를 점령하는 것을 계기로 동학 운동이 시작되었다.본론에서는 동학 농민 운동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과 이에 대한 평가를 한다.? 본론1. 동학농민운동의 배경19세기 후반 조선 정부의 사회 개혁은 제대로 추진되지 않았고 이 가운데 농민에 대한 수탈은 오히려 심해져만 갔다. 삼정의 문란은 더욱 심화되었으며 개항 이후 들어온 외국 공산품으로 인해 국내 수공업은 마비가 되었고 쌀이 일본으로 빠져나가면서 쌀값이 폭등하고 국내에는 식량부족현상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빈농과 영세 수공업자 그리고 소상인들의 빈민층의 삶은 갈수록 피폐해져갔다. 그러나 지주와 대상인 등은 쌀 수출을 통해 부를 쌓아 토지를 늘려가 이 둘의 계층은 더욱 양극화 되어갔다. 또한 19세기 초 세도정치로 인해 국가 재정이 파탄이 나자 이를 조세로 채우기 위한 탐관오리들의 부패한 만행들이 성행하였다. 이에 희생자가 된 농민을 비롯한 백성들은 정부의 조세 수탈과 지주층의 지대 수탈 그리고 외세의 경제 침투에 맞서 전국 여기저기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부농을 비롯한 소농, 빈농층까지 봉기에 참여 했으며 지주와 관아를 공격하기도 하고 외세와 결탁한 상인들을 공격하며 점차 조선 사회 체제에 대한 비판이 강화되어가고 있었다. 이러한 농민들의 기본권을 요구하는 봉기는 19세기 내내 지속되었으며 특히 1890년에서 1893년 사이에 집중 되었다. 즉, 농민반란이 빈번히 일어난 것이 크게 네 가지 이유로 정리 할 수 있는데, 조세 수취제도의 문란, 열강의 경제적 침탈, 농민층의 양극화, 정치세력의 부패가 그것이다.2. 동학이란 ?동학은 서학에 대응하는 것으로 1860년 최제우가 창시하였다. 동학은 본래 풍수사상과 유교, 불교 등의 민족종교의 교리를 토대로 하여 ‘인내천(人乃天)’을 기본 사상으로 두고 있다. 이러한 인내천 사상은 인간이 평등하다는 만민평등 사상을 나타내는 것으로 기존의 조선 양반사회에 대한 혁명적인 성격을 지니는 것이다. 또한 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보국안민’과 폭정을 제거하고 백성을 구한다는 ‘제폭구민’을 제창함으로써 많은 지식인과 일반 농민들을 동학조직에 끌어들였다. 동학이 점차 대중적이고 혁명적인 성격을 띄자 정부는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속인다(혹세무민)’고 하여 최제우를 처형하였다. 그러나 2대 교조인 최시형이 교단을 재정비하고 포교에 힘써 교세를 더욱 확장시켜 나갔고 동학교도들은 공주와 삼례, 서울, 보은 등지에서 교제 최제우의 억울함을 풀고 동학교도에 대한 탄압을 중지할 것을 요구하는 시위를 열었다. 포접제를 통하여 동학은 더 많은 교도들을 끌어들이게 되고 후에 3대 교주인 손병희는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여 그 뒤를 잇게 된다.3. 동학농민운동의 전개● 제 1차 농민 운동개항 이후 일본의 조선에 대한 경제적 침탈로 인해 쌀값이 폭등하고 농민들의 생활이 피폐해졌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일본은 조선에서 쌀을 빼내감으로써 조선의 물가를 불안정하게 만들어 농민생활을 더욱 힘들게 하였으며, 일본 어부들의 횡포 또한 조선 어부들의 삶을 힘겹게 만들었다. 조선 시대 산업구조가 전반적으로 농업 형태였음을 감안하여 볼 때, 우리나라 최고의 곡창 지대인 전라도 농민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고 그들이 더욱 가혹한 수탈의 대상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특히 전라도 중에서도 으뜸가는 곡창 지대인 고부는 군수 조병갑의 학정으로 인해 농민들의 고통이 더욱 심하였다. 조병갑은 농민들에게 무리하게 쌀을 거둬들이고 백성들에게 무고한 죄를 씌워 돈을 빼앗아 가기도 하였으며 부친의 비각을 세운다는 명목으로 농민들로부터 1000여 냥의 돈을 강제로 징수하는 등 여러 만행을 저질렀다. 조병갑의 학정에 참지 못한 수백 명의 농민들은 동학 농민 지도자인 전봉준을 중심으로 뭉쳐 1894년 고부 관아에 나아갔다. 이들은 관아를 점령하여 수탈에 앞장선 아전을 처벌하고 무기를 탈취했으며 불법으로 징수한 세곡을 모두 빈민에게 다시 나누어 주었다. 하지만 앞날에 대한 구체적인 준비가 결여되었었기 때문에, 조병갑이 체포되어 압송되고 새롭게 박원명이 후임으로 들어와 온건한 무마책을 펴자 스스로 해산하였다. 그러나 안핵사로 내려온 이용태가 민란의 책임을 모두 동학교도와 농민에게 전가시키고 혹독하게 탄압하자 전봉준 등 동학교도들은 농민군을 재조직하고 다시 봉기하였다. 이것이 1894년에 일어난 제 1차 농민 전쟁의 시작이다. 전봉준은 인근의 동학 접주들에게 사발통문을 돌려 보국안민과 교조신원을 위하여 함께 궐기할 것을 호소하였고 마침내 접주들이 농민군을 편성하여 백산에 모여 4대 강령을 발표하였다. 4대 강령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1) 사람을 죽이지 말고 재물을 손상시키지 말 것.2) 충효를 다하여 제세안민(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평안케)할 것.3) 왜적을 몰아내고 성도(나라의 정리를 깨끗이)를 밝힐 것.4) 병(군대)을 몰아 서울에 들어가 권귀(권세가와 귀족)를 진멸(모두 없앰)시킬 것.이 소식을 들은 인근의 동학군과 농민들이 모였는데 여기에는 동학교도 보다는 주로 일반 농민들이 많이 참여하였다. 이들은 관군과 황토현에서 싸움을 벌여 관군을 물리친 뒤 봉기를 시작한지 한 달만에 호남 일대의 관아를 습격하여 휩쓸고 황룡촌에서 대전을 벌인 후 크게 승리하여 전주성까지도 함락시켰다. 전주성 함락 소식에 놀란 정부는 청에 원병을 요청하였고, 이에 청군은 아산만에 군대를 상륙시켰다. 이때 청군의 개입을 지켜보던 일본도 톈진조약을 구실로 인천에 출병하였다. 정부는 생각지도 않게 일본이 쳐들어오자 청군과 일본군의 철병을 요구하는 한편, 농민군과의 타협을 모색하였다. 동학 농민군 또한 불리한 전세를 돌이키기 위해 폐정개혁안 12개조를 요구하고 휴전을 합의하였고 정부와 농민군 사이에 전주화약이 체결되었다. 다음은 폐정 개혁안 12개조 이다.1) 각 도인과 정부 사이에는 묵은 감정을 씻어버리고 서정에 협력할 것2) 탐관오리의 그 죄목을 조사하여 하나하나 엄징할 것3) 횡포한 부호들을 엄징할 것4) 불량한 유림과 양반들을 징벌할 것5) 노비문서는 불태워 버릴 것6) 칠반천인의 대우를 개선하고 백정 머리에 씌운 평양립을 벗게할 것7) 청춘 과부의 재혼을 허락할 것8) 무명잡세는 모두 폐지할 것9) 관리채용은 지벌을 타파하고 인재 위주로 할 것10) 왜와 내통하는 자는 엄징할 것11) 공사채를 막론하고 지난 것은 모두 무효로 할 것12) 토지는 평균으로 분작하게 할 것전주 화약이 체결된 이후 농민군은 각 군 마다 농민 자치 조직으로 농민들의 의사를 모으고 집행하며 치안을 담당하는 집강소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부의 노력과 요청에도 불구하고 청군과 일본군은 조선 내에 상륙하였다.● 제 2차 농민 운동전주화약 체결 후 집강소를 설치하고 폐정개혁안을 실천하였으나, 정부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청과 일본의 군대가 여전히 조선 내에서 머물러 있었다. 그러던 중, 한반도에서 세력을 과시하는 청을 물리치고 조선에서의 지위를 굳히길 원하던 일본이 마침내 경복궁을 점령하였고, 이내 청?일 전쟁이 일어났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농민군은 항일투쟁을 위한 제 2차 봉기를 일으켰다. 전봉준은 삼례 집회를 주도하며 농민군을 모았고 손화중은 광주에서 무리를 일으켰으며 그 외의 호남지역을 비롯한 충정도와 경상도 지역의 농민군과 연합하여 일제히 들고 일어났다. 일본을 물리치기 위해 서울로 올라가던 농민군은 공주 우금치에서 일본군과 관군 연합군과 접전하였다. 치열한 공방을 벌였지만 농민군의 화력은 정부군과 연합군에게 뒤졌으므로 결국 패배하고 말았다. 그 외의 지역에서도 치열한 접전을 벌였으나 줄줄이 패하고 말았다. 그러다가 전봉준은 순창에서 재기를 꾀하고 있던 중 끝내 배반자의 밀고로 체포되어 서울에서 처형되었다. 이것으로 동학농민운동은 결국 끝이 났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의 개혁의지와 개혁안 등은 후에 갑오개혁 등에 영향을 미쳐 몇 개의 부분에서 그 뜻을 이루게 되었다.? 결론앞서 본론에서는 동학농민운동의 배경과 그 전개과정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물론 본론의 내용은 고등학교 3년 과정을 충분히 이수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내용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우리가 배워온 동학농민운동에 대해 재평가를 내리는 일 또한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동학농민운동은 과연 혁명적인 것일까? 아니면 단순한 농민 반란에 지나지 않은 것일까?고등학교 국정 교과서에서는 동학농민운동을 신분적 질서를 해체시키면서 기존 사회 질서를 부정하고 근대 사회로 나아가려는 움직임이며 비록 실패하였지만 농민이 주도가 되어 근대 개혁을 추진하려는 시도이고 의병 전쟁의 추진력이 되어 반침략 항일 투쟁의 역사적 기반이 된 사건이라고 말한다. 물론 동학농민운동의 한계점도 제시하고 있지만 대체로 동학농민운동에 대해 호의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하지만 본 과제를 준비하면서 동학농민운동에 대해 더 자세한 것들을 알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기존에 고등학교 교육에서 배운 것과는 다른 생각들이 많이 들었다. 물론 동학농민운동이 우리나라 최초의 아래서부터의 혁명임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것 같다. 하지만 동학농민운동을 근대사회를 지향한 농민들의 순수한 혁명으로 보기에는 반란적인 요소 또한 다분한 것이 사실이다.
고려시대는 관료제 사회이다▶서론1. 여는 말종래 한국의 사학계에서는 고려시대를 귀족사회로 보는 것이 지배적이었고, 귀족사회론은 오늘날까지 확고부동한 통설로 자리 잡아 왔다. 귀족사회론은 소수의 문벌이 세습적으로 정권을 장악하고, 음서의 특권을 누리며 폐쇄적인 통혼권을 형성하였다는 것을 골자로 한다. 하지만 근래에 이와 같은 고려귀족제설을 부정하고 고려관인지배층의 성격을 ‘관료제’로서 이해하려는 논의가 일어났다. 대표적으로 박창희는 기존의 귀족제설을 반박하며 관료제론을 주장하였다.) 그의 학설은 고려왕조가 채택한 보다 일반적인 관인의 등용법이란 개인의 능력 여하를 시험하여 선발하는 과거제였으며 그에 따라 선택된 과거관료가 정치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으니 고려는 관료제사회라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먼저 문제가 되는 귀족의 개념을 이해하고, 중심이 되는 두 가지 설중 관료제 사회설에 대해 검토해 보기로 한다. 또한 많은 연구자들이 우리 학계에 몰역사적 인식이 만연되어 있음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조선양반지배신분설처럼 고려 귀족사회론이 별다른 여과 없이 수용될 수 있었고 이러한 귀족사회론의 이러한 몰역사적 인식은 우리 역사의 내재적 발전을 규명할 수 없고 한국사의 정체성론을 극복할 수 없게 만든다. 때문에 우리는 고려 귀족사회론에 대한 이론적, 논리적 비판을 시도하고 고려시대는 관료제 사회였다고 주장할 수 있는 여러 근거들을 발제문을 통해 밝히고자 한다.2. 고려는 전형적인 귀족제 사회였다??귀족제설을 주장하는 측에서는 고려사회는 신분제 사회였는데 신분제 사회는 곧 귀족제 사회이며 거기서의 지배신분층은 바로 귀족이라고 말한다. 고려에는 중앙관료가 지배 귀족으로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또 5품 이상의 관료의 자손에게 관직을 주는 음서제와 공음전 또한 귀족사회를 표상하는 제도이며 과거제는 귀족중심의 사회에 적합하도록 마련되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과연 고려가 전형적인 귀족제 사회였으며 과거제가 귀족중심의 제도 였다는 이런 주장이 과연 설득력이편입될 수 있다는 것이다.이에 속하는 인간들이 국가의 요직을 점유하고 정책결정이나 가치의 배분을 귀족제적인 테두리 안에서 운영하여 간다면 그 사회를 우리는 귀족제사회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회에서는 출생신분이 제1차적인 중요성을 가진다. 왜냐하면 개인은 그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그의 배경이 되는 종족친척과 합체되어 평가되기 때문이다. 또, 관직의 세습적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그리하여 정권은 소수의 가문에 의해 세습적으로 장악되며, 그 결과 문벌이 형성되고, 가격의 상하가 나타난다. 가격의식은 혼인관계에 가장 잘 표현되며, 귀족들은 동일층 내지는 상층가문과의 결혼을 희망하며 그에 따라 하나의 폐쇄적인 통혼권을 형성하게 된다. 귀족은 세습적인 특권신분층이라는 점에서 역사의 퇴적에 의하여 형성되며, 고려사회에서는 관직귀족을 의미한다. 그들에게 있어 관직은 정치적 권력의 원천이요, 경제적 수입원이며 사회적 위세의 상징이었다.고려에서 귀족적 특권이 허용된 품계는 오품관 이상이다. 음서의 특전, 공음전시를 지급하여 자손에게 세습시킬 수 있도록 한 것, 국자학?태학에의 입학이 5품 이상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 귀족들도 상층과 하층으로 분화되며, 권력의 핵심에 자리하여 국가의 운영을 주도한 것은 2품 이상의 재상급 귀족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비록 5품 이상 또는 재상급 귀족관료의 자제라 하더라도 관도에의 첫 출발은 아주 하위의 관위에서부터 시작하였다. 그래도 이들은 출생과 동시에 귀족적 신분을 부여받은 셈이며 현재 그 특권의 혜택을 누리고 있고 또 장차도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귀족적 특권을 향유할 수 있는 지위를 약속 받고 있기 때문에 귀족이라고 할 수 있다.이러한 귀족이나 가문과 같은 의식은 일정한 시간의 경과를 거쳐서 형성되는데, 고려사회에서는 대체적으로 귀족적 특권을 누릴 수 있는 지위가 3세대 이상을 이었을 때, 귀족이라 한다.2. 고려를 실제적 귀족 사회라 할 수 있는가.1) 귀족사회의 개념귀족사회는 어떠한 사회인가? 우선 귀족이 존재하는 사회라는 정의에 학문적인 토론이나 합의를 거친 것도 아니었고, 고려의 귀족이 신라 또는 조선왕조와 비교하여 그 성격상의 특징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은 체, 넓은 의미에서 지배층=귀족이라는 광범위한 용어로서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②귀족제설의 대표적 근거? 음서제음서제는 부조의 가음?음덕에 따라 그 자손을 관리로 서용하는 제도로써, 거기에는 조종의 묘예, 즉 왕족의 후예와 공신의 자손에게 부여되는 음서와 5품 이상의 고급관료 자손에게 부여되는 일반음서의 세 종류가 있다. 이는 5품 이상의 고급관료들은 왕족?공신과 더불어 자신들의 지위를 이용하여 자손을 벼슬시킬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고 있었던 것이다.? 공음전귀족들이 특권적인 생활을 세습적으로 누릴 수 있는 경제적 토대로 마련된 것이 공음전시법이었다. 이 공음전시는 처음 훈전의 형태로 공훈이 현저한 공신에 한하여 사급하는 제도였으나 얼마 뒤부터는 훈공의 유무와는 관계없이 관인 신분 그 자체에 대한 우대 보호책으로 5품 이상의 문무양반에 대하여 일률적으로 지급하게 되었다. 이 법의 특징은 일반의 양반전시가 당대한인데 비하여 공음전시는 법 제정의 근본 취지에 합당하게 ‘전지자손’하는 세습적 상속을 인정한 점에 있다.? 폐쇄적 통혼고려 귀족들은 자신들의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 서로 중첩된 혼인 관계를 맺었는데, 특히 최고의 귀족인 왕실과의 혼인관계를 열망하였다. 왕실의 외척이 되는 것은 가문의 명예일 뿐 아니라 권력에 접근하는 데 한층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3)고려를 귀족제 사회라 볼 수 없는 근거고려사회가 실제적인 귀족사회였는가 하는 근거를 검토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고려시대의 문벌의 특징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는 고려전기의 최대 문벌이라 할 경원 이씨, 해주 최씨, 정안 임씨, 파평 윤씨, 경주 김씨, 철원 최씨 등의 6가문의 사례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문벌의 유지기간을 측정하기 위해서는 2품 이상의 재상을 얼마나 오래 배출하였나를 기준으로 한다.해주 최씨 5대, 정안 임씨 5대, 파 고려사회에는 귀족이 지닌 법제상의 세습특권이라 할만한 것을 찾아보기 어렵다 하였다. 이러한 귀족제설은 이론 자체의 문제를 넘어서는 역사인식 차원의 문제까지 안고 있다. 귀족제설을 가지고 신라골품사회를 극복한 고려시대의 발전상을 제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칫하면 몰역사적 인식으로 귀결될 수 있다. 이러한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우리 역사의 내재적 발전은 규명될 수 없고 한국사의 정체성론은 극복되기 어렵다. 그 동안 귀족제 사회설이 주류를 이루었던 이유중 하나는 시대의 발전상을 규명하는 것보다는 당시의 지배층이 얼마나 사회적 특권을 배타적으로 누리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기술적으로 훨씬 쉬운 일이기 때문이다.대부분의 귀족제 주장자들은 관인층 전체를 하나의 신분층으로 생각하였다. 즉, 영주라는 계급적 성격이나 사환권(양민도 과거를 통해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권리)과 부거권의 배타적 향유라는 특권을 공유하는 모든 관인을 ‘제2의 신분층’으로 포괄한 것이 그것이다.(제1신분은 왕족임) 그러나 귀족으로 꼽은 것은 척신, 공훈신, 문무고관 및 그들의 자손만이었다. 제2신분층인 모든 관인 중에서 일부분만 귀족으로 선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서 우리는 대부분의 귀족제론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동양의 귀족=관직귀족’이라는 등식의 논리적 비약을 엿볼 수 있다. 그 존재 여부가 문제되는 귀족의 존재를 미리 전제하고서 그 대상을 관인에서 찾은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귀족의 편입선을 5품으로 설정한 것 역시 ‘음서제=귀족제’임을 의식한 것이어서 그 등식이 무너지면 그 의미를 잃게 될 것이다. 이 문제는 뒤 이어 음서제의 반 귀족적 요소에 대하여 논할 것이다. 또한 귀족의 선정에 있어서도 문제가 있다. 그리고 특권의 부여에 있어서도 법제적인 테두리 안에 관인이 들어온 것이지 관인이 법을 조정하여 특권을 만든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3대 이상의 관인을 배출하였다고 하여 이제까지 없었던 새로운 특권이 부여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고려사회에서는 비 귀족에게도 귀적 이러한 부분에서 음서제는 귀족적 ? 귀족제적 요소를 가지고 있지만 귀족제로 간주할 수 있는가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한다. 음서제는 신분제사회에서의 가업의 전수제 같은 것이 아니라, 고관?유공자에 대한 국가적 보은제 같은 것으로서 실업대책적 성격을 다분히 띠고 있었다. 목종대의 대표적인 정치지배세력 중의 하나인 최항의 예를 들자면, 그는 가문 등에서가 아니라 그의 자성과 능력이란 개인적 구비조건이 신료들의 모범이 될 만하였다. 따라서 국왕은 이러한 관료에게 응분의 보상을 하게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며, 그것이 그의 자인 최유부에 대한 비서성교서랑의 임관형태로 나타났다. 이것은 가산국가의 군주로서 있을 수 있는 일이며 이러한 국가의 성격의 중요한 한 표징이기도 하다. 즉 개인과 국왕과의 관계가 중시되었기에 그 음덕이 최유부에게 좋은 영향을 준 것이라 보아야 한다. 또 최유부의 경우에도 상당한 개인적 능력을 갖춘 위에서 그러한 우대를 받은 것이었지 그렇지를 못했을 때는 다른 형식의 혜택을 받았을 것이다.② 철저한 반귀족적 요소를 지닌 과거제과거란 그 개인의 출신성분이 어떻든 응시자에 대해 공정하게 시험을 치르게 하는 제도이다. 신분제사회이니만큼 응시자는 일정한 신분층 이상이라야 했다. 그러나 시험의 당락은 그가 향리의 자제이든 경관의 자제이든 그 개인의 학력이 결정적 척도가 되었었다. 여기에는 가문이나 그 출신성분이 문제되지 않았다. 또한 음서제의 수혜자는 그다지 높고 중요한 관직을 얻지 못하였던 반면 급제자는 권력이나 중요도면에서 음서제의 그것과는 비할 수 없이 높았다. 그래서 고관일수록 자제들이 일반적으로 급제를 하여 가문의 명예와 자신의 영달을 유지, 보장 받으려 하였으며 아직 입문하지 못한 사람이면 그럴수록 급제출신으로서의 출세를 꿈꾸었다. 음서로 일단 취직된 사람도 재직 중에 몇 번이고 응시하는 경우가 있는 것을 보아도 과거제의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다. 과거제는 기성 가문이 가진 전통적 권위나 가문들 사이의 고착된 서열을 끊임없이 바꿈으로써 기존의.
파이트 클럽의 영화 분석Ⅰ.서론1.감독 분석2.시놉시스.Ⅱ.본론1.주제 분석2.스토리 텔링방식3.주제를 표현하기 위한 화면 방식.4.연기자의 연기5.영화의 음악.6.인상적이었던 장면.Ⅲ.결론.1.영화의 총평2.영화를 본 후 나의 느낌과 평Ⅰ.서론1.감독 분석꿈과 같은 심리적 공간의 창조자로서 데이비드 핀처는 처음부터 현실과 비현실의 악몽의 창조에 비상한 재주를 보였다. 8살 때 이미 '스타워즈'를 보고 영화감독이 될 것을 결심한 조숙한 소년은 고등학교를 마치자마자 조지 루카스의 ILM에 입사하여 거기서 '인디아나 존스와 죽음의 사원' '제다이의 귀환' 같은 영화에서 특수효과와 찰영 보조로 영화 인생을 시작했다. 그 출신 성분에서부터 동화적 환상주의의 세례를 받은 감독답게 데이비드 핀처의 영화는 스필버그와 루카스 같은 모험담을 악몽으로 바꾼 게임이기도 하다. 핀처의 주인공들은 잠, 꿈, 깨어남의 과정을 반복하면서 무의식의 심연과 마주 대한다. '파이트 클럽'의 잭이나 '쎄븐'의 브래드 피트는 모두 불면에 시달리는데, 잭의 말에 의하면 '불면증이 있으면 잠들지도 못하고 깨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그 동안 연출한 영화마다 화제를 만들어 온 감독이다. 그의 감독 데뷔작은 불과 서른의 나이에 만든 '에일리언 3'였다. 그는 브래드 피트와 모건 프리만 그리고 기네스 펠트로가 출연했던 '세븐'으로 비평가들의 호평과 성공을 얻었고 영화는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세븐' 은 아카데미 편집상 후보에 오르기도 한 영화였으며 마이클 더글라스와 숀 펜 주연의 '더 게임' 또한 성공작으로 평가받았다. 항상 인간의 어둡고, 파격적인 상황들에 관심을 가져 온 그는 세 번째 연출작인 '파이트 클럽'에서 가장 무겁고 강렬한 주제를 가지고 전세계 평론가와 관객들에게 큰 논쟁 거리를 제시하였다.그는 헐리우드에서 성장한 거장의 반열에 오르기에 손색이 없는 감독이다. 뮤직 비디오 감독 출신으로 자신만의 세련되고 혁신적인 영상 감각에 사회를 날카롭게 비트는, 깊이 있는 주제 의식까지 소유한 탁월한 이때부터 잭은 공장 지대에 버려진 건물 안에서 타일러와 함께 생활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밤 타일러는 잭에게 자신을 때려 달라고 부탁한다. 사람은 싸워 봐야 진정한 자신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때부터 두 사람은 서로를 가해하는 것에 재미를 붙이게 되고 폭력으로 더러운 세상을 정화시키겠다는 그들의 생각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씩 늘어가게 된다. 결국 이들은 매주 토요일 밤 술집 지하에서 1:1 맨주먹으로 격투를 벌이는 파이트 클럽이라는 비밀 조직을 결성하기에 이른다. 파이트 클럽은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켜 대도시마다 지부가 설립되고 군대처럼 조직까지 갖추게 된다.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파이트 클럽을 보며 잭은 당황하는데, 그의 정신적 지주였던 타일러가 갑자기 실종된다. 결국 타일러가 자기 자신의 다른 모습임을 안 잭은 그를 막기 위해 자기 자신을 쏘고 타일러를 없애려 한다.Ⅱ.본론1.주제 분석‘파이트 클럽’에서 감독이 주는 메세지는 상업주의와, 기업 문화 그리고 자본주의에 대한 냉소를 보내며, 어떤 직업, 얼마를 버는지, 어디에 사는지에 의해 사람을 평가하는 세상에 대한 풍자와 위트, 사물을 대하는 새로운 시각의 제시를 통해 진정한 정체성을 발견이다.영화는 소비 사회의 생활을 무의미하게 되풀이하는 여피 족이 체제를 벗어나고 싶은 욕구를 파괴 욕과 원시적인 에너지로 발산했다.현대 문명과 편리한 생활은 모두 부정된다. 아니 부정된다기 보다는 없어져야 할 쓰레기들이다. 컴퓨터, 신용카드, 편안한 아파트, 현란한 옷과 심지어 전기의 사용마저 그들에게는 그들의 자유를 구속하는 것일 뿐이다. '파이트 클럽'에 등장하는 인물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를 얻기 위해, 자유를 만끽하기 위해 지금까지의 문명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거부는 좀 더 나아가서 문명의 파괴이다. 이렇듯 모든 권위를 부정하는 무정부주의의 취향의 바탕에는 현대 사회의 공허가 깊이 드리워져 있다. 그리고 이것에다 남성의 파시즘과 문명 비판적 요소가 덧붙여 에서는 해방되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러다 타일러 더든을 만나게 되고 둘은 하지 말아야 할 모든 일, 나중에 생각하면 위험하기 짝이 없지만 부모에게서 해방된 20대가 범할 수 있는 그런 모든 것을 하는 것으로 신에게 도전한다. 그렇지만 결국 주인공은 스승인 타일러마저도 죽이게 되고 이렇게 볼 때 영화는 그의 성숙 과정의 기록이라고도 할 수 있다.결국 잭의 성숙과정을 그려 가는 와중에서 무정부주의와 문명 비판, 남성의 파시즘이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2.스토리 텔링방식파이트 클럽은 첫 화면이 마지막 화면으로서 그 마지막 장면이 나오게 된 이유를 뒤로 찾아가는 큰 틀 속에서 그 이야기를 풀어 가는 방법을 잭의 의식의 흐름으로 나타내었다. 그리고 잭과 타일러가 하나라는 큰 내러티브상의 틀을 맞추기 위해 여러 복선과 화면 구성을 사용하였고 또한 영화를 자세히 보면 이 영화가 타일러(영화 내에서 영사 기사)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한편의 장난친 영화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지게 하는 스토리 텔링방법을 가진다.영국 미국 문학에서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보여지는 의식의 흐름 기법은 말 그대로 주인공의 생각나는 대로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대로 화면의 구성이 말해 준다. 이야기의 내용은 오로지 인물에게 생각 나는 것 만큼, 그에게 생각이 날 때마다 조금씩 제공된다. 특히 영화의 처음 40분은 순전히 그의 광적인 정신 상태에 젖어 들기 위한 준비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가 냉장고 뒤에 뭐가 있다고 하면 벌써 그곳으로 가고 그가 폭탄 이야기를 하면 곧 바로 열어 젖힌 창문 밖으로 카메라가 30층을 떨어져서 보도를 뚫고 그 밑의 지하 주차장으로 가서 그곳에 주차해 있는 밴 트럭에 나 있는 총 구멍으로 들어갔다가 옆으로 빠져 나오는 그런 식이다. 그리고 영화의 전개가 잭의 목소리의 나래이션 형식인 것도 의식의 흐름의 기법이라 할 수 있다. 영화의 큰 내러티브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보여주고 그리고 그 마지막 장면이 나오게 된 사유를 잭의 생각에 따라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고에서 연회 시설을 선전하는 웨이터들이 함께 "환영합니다"하고 말하는 샷 속에도 브래드를 살짝 끼워 넣었다.3.주제를 표현하기 위한 화면 구성 방식.cut의 숫자가 상당히 많은 역동적이면서도 빠른 화면 전개를 보여줌으로 해서 지금 영화의 내용이 자신의 환상과 관련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카매라 앵글은 전체적으로 Eye Level Angle을 사용하여, 극중의 주인공과 관객간의 동일성을 조성하는 역할을 한다. 이 기법으로 관객은 자기가 영화내에서 직접 파이트 클럽의 일원이 된 것 같은 효과를 낼 수 있게 하였다.Eye Level Angle과 더불어 주인공과 관객간의 동일성을 나타내는 기법으로 Tracking이 사용되었으며, medium shot과, close shot이 대부분이다. 독특한 카메라 움직임이 돋보이기도 한다. 예를 들자면 빌딩 고층 내부에서 외부로 다시 땅을 뚫고 지하로 그리고 지하에 세워 놓은 차안으로 카매라가 순식간에 이동한다. 잭의 의식의 흐름에 따라 영화의 화면이 움직이기 때문이며 영화가 환상과 관련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감독이 강조하고자 한 자본주의와 물질 문명을 상징하는 물건에는 Close Up이 사용되었다. 예를 들자면 초반부의 주인공의 회사에서 휴지통에서 IBM, Microsoft, 그리고 스타벅스 커피잔, 비행기에서 일회용 용품들, 주인공의 집에서 이케아가구 주문 서적이 있다. 이런 요소들을 강조함으로서 주제를 더욱 부각시키는 효과를 가져온다. 테러 대책 회의에서 경찰 고위 간부가 화장실에서 위협받을때와 편의점 직원이 위협받는 장면에서는 카메라 앵글을 Low Angle과 Extream Low Angle을 사용하여 위협적인 느낌을 나타 냈다. 대부분 DeepFocus가 사용되었지만, 부분적으로 감독이 강조하고 싶은 장면에서는 Soft Focus가 사용되었다.대부분의 장면은 2개의 카메라를 이용하여 촬영되었다. 하나는 주인공을 촬영했고 제2카메라는 같은 장면을 다른 사이즈로 기록하는 기법을 사용했다. 때로 카메라가 주인공의 관점에서 관객들 수 있다. 영화 후반부의 반전에 이르면 타일러에 버금가는 터프한 매력마저 갖게 되는데, 노튼은 이렇게 변화무쌍한 인물을 탁월한 연기와 섬세한 표정 연기로 잘 표현하고 있다. 이렇게 한 작품에서 두 가지, 세 가지의 모습을 보여주는 연기는 쉽지가 않다. 그러나 노튼은 그런 우려를 불식시키고 훌륭한 연기로 작품을 한층 더 빛내 주었다.또한, 남성의 전형을 보여준 피트의 연기 또한 이에 뒤지지 않는다. '세븐', '조 블랙의 사랑'에서 보여주었던 백마 탄 왕자님 같은 이미지를 기대한 여성들은 다소 아쉬웠을 수도 있었을 것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피트의 진정한 매력은 이렇게 확실하게 망가져줄 때 더 빛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진정으로 물을 만난 고기의 모습이었다. 삐죽삐죽 아무렇게나 난 수염과 일주일 넘게 안 감았을 것 같이 보이는 떡진 머리를 하고 하품을 쩍쩍해 대는 그의 모습은 타일러란 캐릭터를 잘 소화했다. 사실 타일러의 캐릭터를 다른 연기자가 연기했다면 그 캐릭터에 대한 적의를 품게할수도 있었다. 그러나 브래드 피트였기 때문에 반전이 이루어진 후에도 노튼만을 옹호하는 게 아니라 타일러란 캐릭터마저 옹호하고 싶어지는 충동을 느끼게 한다.극중에 주인공을 사랑하는 여인으로 등장하며 말라는 자신의 타락한 삶에 대한 위로를 각종 시안부 환자 모임에서 찾고 있는 현실 부정적인 캐릭터이다. 극중 주인공을 환자 모임에서 만나게 된 동기로 두 사람은 사랑하는 사이가 되지만, 주인공의 양면적인 모습과 변덕스러움에 질리게 되고 그로 인해 그를 떠나려고 하는 역과 순간 순간 변하는 그녀의 내면묘사를 잘 표현해 내고 있다.5.영화의 음악.이 영화의 사운드 트랙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한다면 영화 음악을 한 테크노 뮤지션에게 모두 맡겼다는 점이다. 이 사운드 트랙은 새로움이라는 바탕 위에서 최대한 영화의 분위기를 그려냈다는 장점을 갖는 동시에 현실에 대해서 반항적인 의미도 찾을 수가 있다..음악들은 영화의 주변부에서 조심스럽게 청각적 공간을 채운다. 하우스 댄스가 있는가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찾던 중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원작으로 하여 제작된 '햄릿'이라는 영화를 찾았고 이 영화를 가지고 감상문을 쓰기로 하였다.1990년 4월 23일, 셰익스피어 탄생 축제일에 맞춰 영국 남부의 도버 성에서 촬영이시작된 영화 '햄릿'은, '로미오와 줄리엣', '말괄량이 길들이기' 등의 셰익스피어 작품을 혁신적인 영화 언어로 표현하여 작품성과 흥행 모두에서 성공을 거둔 거장 프랑코 제피렐리 감독에 의해 연출되었다. 400여년 동안 모든 연령의 관객에게 감동을준 가장 재미있고 매혹적인 줄거리의 문학작품에 가장 신선한 영화적 생명을 부여한 것이다.이 영화에서 캐스팅에 주목을 안 할 수가 없는데 감독은 햄릿 역에 "매드맥스", "러쎌 웨폰", "전선 위의 참새"에서 훌륭한 연기를 펼친 멜 깁슨을 캐스팅 해서 '가장의외의 캐스팅'이라는 평가 주목을 받았다. 멜 깁슨과 함께 출연한 글렌 클로스 역시 "위험한 정사", "위험한 관계", "행운의 반전" 등의 작품에서 재능을 인정받은 연기파 배우로, 그녀의 기용도 이례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제피렐리 감독은 그의 재능과 경험으로 새로운 "햄릿"을 만들기 위해, 훌륭한 배우들을 캐스팅 하여 셰익스피어를 읽지 않은 젊은 세대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하였다.햄릿은 셰익스피어 4대비 극중 하나인 것처럼 철저한 비극이다 햄릿이 결국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게 되고 어머니마저 잃게 되고 엉뚱한 사람을 죽이고..결국자기까지 죽게 되는 이 영화는 훌륭한 희극을 기반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구성이치밀하게 되어 있고, 내용 역시 흥미진진하다. 내용은 너무 유명하므로 언급하지 않겠다. '햄릿' 이라는 텍스트는 시대를 초월하여 대단히 흥미 있는 주제를 제시하고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단순히 비극적인 상황과 그 과정, 결말을 풀어놓는 것이아니라, 한 인간의 고뇌와 갈등을 통해 인간의 내면을 주의 깊게 통찰하고 있다. 여기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인간 하나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거기에 얽힌 주변인들과의 관계가 빚는 갈등, 정치적·시대적인 상황이 표출하는 불안, 우주와 종교,운명에 관한 폭깊은 명상과 탐색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측면에서의 주제를 제시하고 있다. 영화를 보면서 나는 햄릿이라는 뚜렷한 캐릭터에 대해서 생각했다. 흔히사려깊고 행동을 조심하는 사람들을 "햄릿형"이라고 말한다. 이 작품 속에 나오는햄릿의 성격은 바로 이런 유형의 사람들을 단적으로 드러내 주고 있다. 햄릿이 부왕의 복수를 맹세한 것은 바로 부왕의 유령을 만났을 때이다. 하지만 햄릿은 왕, 즉그의 삼촌에게 어떻게 복수를 했는가? 복수를 하려면 얼마든지 할 기회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항상 망설였다. 마지막에 왕을 죽인 것도 어쩌면 무대는 왕과 레어티즈가 마련해 준 것이다. 그리고 생각해 보자. 햄릿은 결국 아버지의 복수를 하고, 자신도 죽음을 맞이한다. 하지만 자신이 죽으면서까지 아버지의 복수를 해야 하는 것일까? 햄릿에게는 '자신의 인생'이라는 것이 없는 듯하다. 아버지의 유령에 얽매여 복수만을 꿈꾸다 결국은 복수를 하고 죽는 햄릿의 모습이 그리 아름답게 만은보이지 않는다. 흔히 이렇게 열심히 생각하고, 고뇌하는 사람들을 "햄릿형"이라고지칭하고 무턱대고 돌진하는 "돈키호테"형 인물의 반대 개념으로 생각한다. 여러 번생각해 보고 행동하는 것은 물론 좋은 일이다. 실수하는 일도 적어지고, 계획이 치밀해 지기 때문에 좋은 성과를 얻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걱정되는 일이 있다고해도 "생각"만 해서는 되는 일이 없다. 그 생각을 정리해 일어나서 행동으로 옮길때 바로 그 생각도 가치 있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일을 하는데는 "때"라는 것도 중요하다. 아무리 완벽한 계획이 있어도 적당한 때를 놓치게 되면 그것은 무용지물이되는 것이다. 햄릿에게는 바로 "행동력"과 "결단력"이 부족하다. 햄릿은 단지 자신의 불행한 운명과 비참한 상황에 대해 고민 했을 뿐 실제의 "현실"에는 결국 눈을돌려 버린 것이다. 운명 같은 것 따위는 아무리 생각 해 봤자 바뀌는 것도 아니다.불행한 운명에 대해 고뇌하기 보다 차라리 돈키호테처럼 운명에 맞서 부딪쳐 나가는 것이 더 나은 삶의 자세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주인공인 햄릿은 단순히극을 주도하는 입장이 아니라, 극 자체를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인물이다. 사실 '햄릿'의 스토리 구조 자체는 복수 극의 컨셉트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극이 비극의 대표적인 전형으로 제시되며 끊임없이 인구에 회자되는 이유는, 햄릿이라고 하는 주인공이 대단히 독특하며 복잡한 인물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극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극심한 딜레마에 봉착하고 있다. 시대적으로 보면, 그는 한참 르네상스가 활기를 띄던 시대의 지식인이다. 당대의 명문으로 꼽히던 대학에서 수학했으며, 무엇보다 이성을 지닌 인간상을 신봉하고 있는 진보적 사상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만큼 숙부의 왕위 계승과 모친의 부정한재혼은 그로 하여금 믿고 있던 이성적인 인간에 대한 신념을 파괴하는 결과를 낳는다. 믿음을파괴당한 그는 극도의 허무주의에 빠져든다. 그는 여성-나아가 인간 자체를 불신하고, 마침내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까지 회의를 느끼게 된다. 자신조차 신뢰할 수 없게 된 그는 숙부를 처단할 수 있을 만한 정당한 명분을 확신하지 못한다. 또한, 그의 감정은 분명 격정적으로 복수를 부르짖고 있으나, 그의 이성에 대한 집착은 섣부른 결단을 저지하고 있다. 결국 그는 이성에 근거하여결과를 숙고하면서도, 그런 자신에게 끊임없이 혐오감을 느끼며 반복되는 내면의충돌을 겪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면이 햄릿의 진보적 가치관에 기인한 것이라면, 딜레마를루고 있는 또 하나의 측면은 그의 극단적인 보수성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왕위를 계승할 후계자이며 탁월한 기사로 교육받은, 중세적인 기독교의 이상을 추구하는 인물이다. 그러므로 그는어머니와 숙부의 재혼을 용납하지 못한다. 이미 숙부의 범죄를 알기도 전에, 그는 어머니와 클로디어스의 결합으로 인해 극단적인 우울증에 빠져든다. 왕의 망령은 그러한 도덕적 가치판단에 뿌리를 둔 혐오감을 보다 구체화하는 역할을 한다. 숙부와 어머니를 비난하기는 하되 확실한 근거를 갖지 못하던 햄릿은, 선왕의 망령에 의해 자신이 느끼던 혐오감을 복수라는 이름으로 재구성하게 된다. 그는 자신이 그러한 부정을 심판할 권리를 갖고 있다고 믿게 된다. 그러나 그의 도덕심은 그에게 명분을 부여하는 한편, 복수를 위한 살인조차 죄악으로 여기게 되는결과 또한 낳는다. 앞서 언급했듯 선왕의 유령은 햄릿에게 복수를 요구함과 동시에 "마음을 더럽히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를 내건다. 그러나 복수를 하면서 깨끗한 마음을 유지한다는 것은
이혼에는 협의 이혼과 재판상의 이혼이 있다. 이때 재판상의 이혼에는 이혼에 사유가 되는 6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 번째, 배우자의 부정행위, 두 번째, 배우자의 악의의 유기(악의의 유기란 정당한 이유 없이 동거의무·부양의무·협조 의무를 포기하는 것이다) 세 번째, 배우자 또는 그 직계존속으로부터의 심히 부당한 대우 네 번째, 배우자에 의한 자기의 직계존속에 대한 심히 부당한 대우 다섯 번째, 배우자의 3년이상의 생사 불명 여섯 번째, 기타 혼인을 계속하기 어려운 중대한 사유가 그것이다. 이럴 때 이런 6가지중 한가지 이상을 가지거나 또는 다른 이혼의 원인 사유를 야기한 사람을 유책 배우자라 하는데 이런 유책 배우자가 이혼을 청구 당할 시에는 문제없이 이혼이 성립되지만 유책 배우자의 이혼 청구 시에는 그것을 허용할 것인가 허용하지 않을 것인가에 대해서 복잡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유책배우자의 이혼권 청구를 허용할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일단 유책주의와 파탄 주의에 대해서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유책주의란 이혼의 원인을 야기한 자의 상대방의 청구가 있는 경우에만 이혼을 인정하는 주의이며, 이혼 원인의 엄격·명확성을 기할 수 있으나, 다만 혼인 관계의 파괴 원인이 항상 배우자의 유책행위에만 기인하는 것은 아니며 엄격한 유책주의 적용으로 부부 생활의 현실과 판결의 괴리 현상을 초래한다. 원래 유책주의는 이혼을 제한하고자 하는 취지로서 예방의 기능 외에 혼인 질서를 확립하려는 것이므로 이혼 사유를 엄격히 하고 명백히 하기 위하여 구체적인 사유의 열거가 필요했고, 피청구인의 유책성과 함께 청구인의 무책 성을 요건으로 하였다. 이와 같이 유책주의는 유책한 배우자에 대해 제재를 가하고, 반면에 무책한 배우자를 보호하려는 의미를 내포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기본적으로 유책배우자의 이혼 청구권을 허용하지 않는 우리 나라의 경우에는 유책주의를 채택해 왔다.파탄주의란 이혼의 원인을 야기한 자의 상대방의 청구가 있는 경우에만 한정하지 않고 널리 가정의 정도에 따라 이혼을 인정하는 주의이며, 자유주의적·개인주의적 이혼관을 바탕 하여 혼인 생활에 고통을 겪고 있는 이혼 부부에 후원하여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장래에 대처할 수 있게 하는 시대적 요청에 부응한다고 할 수 있겠다. 이것은 불치의 정신병, 장기간의 행방불명 등과 같이 당사자의 책임이나 과실을 물을 수 없는 사유로도 혼인이 파탄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한 것이며 부부 공동생활의 파탄을 구제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서구제국의 유책주의 이혼법 의 문제점에 대한 논의가 다양하게 이루어졌고, 그 대안으로서 출현한 것이 파탄주의 이혼법이라 할 수 있는데, 이러한 파탄주의가 나오게 된 사회적 배경은 현대 사회에 있어서 고도의 산업화, 도시화에 따른 사회구조의 변화, 가족 구조의 변화를 들 수 있다. 그런데 파탄주의를 철저하게 따른다면 피고의 유책와 원고의 무책 여부를 문제화시키지 않게 되어 유책배우자의 이혼 청구를 인용하는 적극적 파탄주의로 된다. 적극적 파탄주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신분법의 선행 사실의 원칙으로 보아 혼인 공동체의 객관적 파탄이라는 사실이 선행하는 이상 당연히 법적 평가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둘째 근대법상의 혼인은 자유의사의 존중을 기초로 하는 이상 그 계속을 강제하는 것은 오히려 반도덕적이다. 셋째 파탄 주의는 이혼법 진화의 정점에 있는 것인데 해석으로써 이를 역하는 것은 부당하다. 넷째 자유의사에 의한 협의 이혼을 인정하면서 일방적으로 혼인을 강제하는 하는 것은 이혼 법의 내부에서 균형을 잃게 된다. 다섯째, 이혼 법도 국가법인데 혼인을 계속시킴으로써 오히려 사실혼을 증가시키고 자의 행복을 빼앗는 결과로 된다. 여섯째 상대방에게 손해 배상이나 부양의 만전을 기하면 된다는 것이다. 반면에 유책배우자의 이혼 청구를 부정하는 소극적 파탄 주의의 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혼인의 파탄을 자초하면서 해소를 요구하는 것은 도덕성에 일치되지 않는다. 둘째, 축출 이혼의 인정과 직결된다. 셋째, 무책 배우자가 그대로 혼인을 계속해서 오랫동안 공동 재산을 이용하며 매월마다 부양을 받는 것이 유리할 수도 있다. 넷째, 신의 성실·권리남용 금지의 원칙에 반하며 약자인 여성은 보호되어야 한다는 것 등이다.이렇듯 유책주의와 소극적 파탄주의는 유책배우자의 이혼 청구권을 인정하지 않고 있고 적극적 파탄주의가 기본적 골격으로 유책배우자의 이혼 청구권을 인정한다.기본적으로 우리 나라는 유책주의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유책배우자의 이혼 청구권이 불허하다고 명문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이혼 청구권에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다.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소극설, 적극설, 제한설이 그것이다. 소극설은 유책배우자의 이혼 청구권을 배적하여야 한다는 견해이다. 그 근거로서는 첫째, 혼인의 파탄을 자초하면서 그 해소를 요구하는 것은 도의성에 반한다. 스스로의 비행의 결과를 주장하는 자에게 법이 조력하여서는 아니 된다. 둘째, 자칫하면 축출 이혼을 시인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셋째, 피해자가 그대로 혼인을 계속하면서 공통 재산을 이용하고 부양을 받은 것이 오히려 유리할 경우도 있다. 넷째, 신의칙, 권리남용 금지의 원칙에 반하며, 약자인 여성은 보호되어야 한다는 점이다.적극설은 유책배우자의 이혼 청구를 허용하여야 한다는 견해이다. 그 근거는 첫째, 신분법의 사실주의 원칙에서 볼 때 객관적인 파탄이라는 사실이 선행하는 이상 당연히 법적 평가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둘째, 근대법상 혼인은 자유의사의 존중을 기조로 하는 이상 그 계속을 강제하는 것은 오히려 반도의적이다. 셋째, 파탄주의는 이혼법 진화 과정에 있어 그 정점에 위치하는데 해석으로써 이에 역행하는 것은 부당하다. 넷째, 자유의사에 의한 협의 이혼을 인정하면서 타방으로 혼인의 계속을 강제하는 것은 혼인법의 내부에 있어서 균형을 잃게 된다. 다섯째, 형해화한 혼인을 계속시킴으로써 오히려 사실혼을 증가시키고 여자의 행복을 박탈하는 결과를 가져옴으로써 이혼법의 취지에 반한다. 여섯째, 상대 배우자에게는 손해 배상이나 부양의 만전을 기하면 된다를 든다.마지막으로 제한설은 유책배우자의 이혼 청구를 원칙적으로 인정하지 않지만 특수한 사정이 있는 경우에 한하여 예외적으로 이를 허용하여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 논거로써는 첫째 이혼의 합리성, 둘째 약자 보호 등이 거론된다. 결국 제한설은 어떤 경우에 유책배우자의 이혼 청구를 인정할 것인가 하는 점이 문제가 된다. 일반적으로 다음에 열거되는 경우가 그 예외적인 경우에 해당한다고 본다. 첫째로는 협의 이혼과의 관련하여 균형상 피고 배우자에게도 이혼 의사가 명백히 있다고 볼 수 있는 경우에는 원고가 유책이라 하더라도 그의 이혼 청구를 허용하여야 한다. 그 이혼 의사가 명백한 경우라 함은 피고 자신이 이혼의 반소를 제기하고 있는 경우나, 피고의 이혼 불응이 오로지 오기나 원고에 대한 보복적 감정에서 나온 것인 때로, 이 경우에는 피고에게도 원고와의 정상적 혼인 관계를 계속할 의사가 없다고 보아도 좋으므로 원고 청구의 기각을 구하는 피고의 주장은 지지될 가치가 없다고 할 수 있다.둘째로는 부부 관계는 성로 상호적이기 때문에 원고의 유책적 행위를 비교하여 쌍방유책기거나, 혼인 파탄의 주된 원인이 피청구인의 유책보다 청구인의 유책이 보다 작다고 인정될 수 있는 경우에는 비록 유책배우자라 하더라도 이혼을 허용해도 좋다. 원고가 주로 유책이라고 할 수 있기 위해서는 원고의 책임이 피고의 책임에 비하여 클 뿐만아니라 파탄을 가져오게 한 다른 객관적 사정과 비교하더라도 커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이혼 청구를 인용해도 좋다. 셋째, 유책성이 이혼 파탄과 인과관계가 없는 경우, 즉 이미 다른 원인에 의하여 혼인 파탄되어 있는 경우에는 설사 청구인에게 유책한 행위가 있더라도 그것으로써 이혼 청구를 기각하여서는 아니 된다. 뿐만 아니라 혼인 파탄이 당사자의 책임만에 의하여 야기되는 것이 아니라 당사자의 주관적 의도나 노력과는 관계없는 사정이 상당 정도 결합함으로써 발생하는 경우도 허다할 것이므로 이러한 경우에는 이 객관적 원인이 혼인 파탄에 기여한 것보다도 유책당사자의 유책성의 정도가 크지 않으면 인과관계가 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넷째, 별거 기간이 장기화 된 경우로, 부부 당사자의 별거 기간이 너무 장기적이어서 도저히 파탄된 혼인을 회복할 수 없게 된 경우에는 비록 유책배우자의 이혼 청구라 하더라도 이를 허용해야 한다. 이 경우에는 유책배우자라 할지라도 이혼 청구를 받아들이도록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