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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BS 당신들의 슈퍼우먼을 보고
    당신들의 슈퍼우먼을 보고-슈퍼우먼 콤플렉스를 완화, 또는 극복하기 위한 방안한의예과 20051225 나인천슈퍼우먼 콤플렉스에 대해 언뜻 들으면 자기가 슈퍼우먼인줄 알고 잘난 척 하는 여자들이라 생각겠지만 가정과 직장일 두 가지를 하는 여성들이 가지고 있는 정신적 스트레스다. 처음 미국에서 이러한 증후군이 나타났고, 이어 각국에서도 볼 수 있게 되었다. 우아한 몸매, 충실한 사생활, 뛰어난 사무처리 등의 이면에 현기증·호흡곤란·허탈감 등의 여러 증세를 보인다. 이 이름을 붙인 미국의 정신신경학자 M.슈비츠에 의하면 여성이 아내·어머니·직업인·이웃의 역할을 완벽하게 해내려는 나머지 모든 것을 떠맡게 된 결과라고 한다. 과거에 여성성을 강조한 현모양처의 고정관념에 현대의 여성은 사회활동에 있어서 가사 때문에 일에 소홀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이 콤플렉스를 더욱 갖게 된다. 때문에 슈퍼우먼 콤플렉스는 여성이라면 누구에게나 있다. 단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보통 여자들도 어느 정도의 슈퍼우먼 콤플렉스를 가지게 마련인데 욕심이 많은 여성에겐 이런 경향이 더 강하게 나타나는 것 뿐이다.슈퍼우먼 콤플렉스는 왜 나타났을까? 이는 전통적으로 집안일은 여성이 해야 한다는 남성 중심의 가치관과 규범이 잔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여성들의 역할기대에 순응하기를 바라고 과거의 현모양처보다는 슈퍼우먼을 이상형으로 생각하는 직장인들이 증가되어 여성 스스로도 직장과 가정에서 필요이상의 완벽성을 추구하는 경향이 높아 지고 있다. 따라서 사회에서의 여성들은 단순 업무 능력만이 아니라, 성격이나 외모 등 개인적 생활의 변화까지 요구하며 직장에서 남성과의 전쟁 속에서 많은 스트레스와 가사의 스트레스로 여러 질환을 앓고 있다. 이는 매우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kbs방송을 통해 본 [당신들의 슈퍼우먼]에서도 직장일과 가사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여성들의 모습을 담았다. 한가지에도 소홀할 수 없는 모습과, 그 때문에 처절하게 전쟁을 치르는 중간 한 가지씩 병을 얻은 고충과 현재의 모습들을 보여줬다.현재의 여성들의 모습도 다를 것이 없다. 가사일과 직장 일을 모두 다 완벽하게 한다는 것은 여성에게는 벅찬 일이다. 방송에서도 나왔다시피 많은 직장여성들은 경제적 이유 때문에 직장생활을 한다 했다. 때문에 육아에 대해 많은 죄책감을 느끼며 직장생활을 하는 여성의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실제로 아이의 산만함은 엄마와 관련이 깊다. 방송의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이 아이가 있는 직장여성은 그의 부모나, 타인에게 육아를 의지하며 직장생활을 할 수 밖에 없다. 반면에 타인에게 의지 할 수 없는 경우에는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는 여성들의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사실 여성들은 처음에 직장을 구하게 되면 미혼인지, 반면에 기혼인지부터 질문을 받게 된다. 남성들은 그러한가? 남성들은 미혼과 기혼여부를 떠나 직장생활에 있어서 큰 변화와 차이점을 못 느끼는 것은 사실이다. 물론 소수에서는 가정에 좀 더 충실한 사람도 있겠지만, 직장에서 단체 생활하는데 있어서는 남성에게는 큰 제약이 없는 것은 사실이다. 반면에 많은 일하는 여성들은 조금만 잘못되는 일이 있어도 여자라는 이유로 남성들에 비해 더욱 질타를 받는 경우가 많다. 단순히 일과 가사 일에 만족을 하고 편하게 할 수도 있겠지만, 콤플렉스까지 가지면서 하는 것은 주위의 시선 때문이라 생각 된다. 그래서 힘들고 어려운 것도 참아내고 화병까지 걸려가면서 두 가지 일을 해 내려고 하는 것이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사회과학| 2010.07.11| 2페이지| 1,000원| 조회(8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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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긴장력을 상실한 우회기법-「금수회의록」를 읽고!●
    ●긴장력을 상실한 우회기법-「금수회의록」를 읽고!●대개 소설에서 알레고리 기법이 쓰일 때에는, 비판의 대상이 현실에서 우위를 점하여 비판하고자 하는 바를 우회하여 표현할 수밖에 없을 때이다. 80년대 광주 항쟁에 의한 충격으로 내내 죄의식에 시달리던 소설가 임철우는, 80년대 중반 여전히 폭압에 시달리던 상황에서도 알레고리 기법을 도용하여 광주를 소설내용으로 삼을 수 있었다. 단순히 흥미를 최대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알레고리 기법이 쓰인다면 그 소설은 긴장력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 적이 불명확할 때, 쏘아진 비판의 활은 날카로움을 잃게 되기 것이기에 그러하다.까마귀처럼 효도할 줄 모르고, 개구리처럼 분수 지킬 줄도 모르고, 여우보다도 간사하고, 호랑이보다도 포악하고, 벌과 같이 정직하지도 못하고, 파리같이 동포 사랑할 줄도 모르고, 창자없는 일은 게보다 심하고, 부정한 행실이 원앙새에게 부끄러운 사람들을 꾸짖고 회개하여 선량한 심성을 회복하여야 한다는 것이「금수회의록」의 내용이다. 이 소설에서는 동물이 의인화되어 인간들이 동물들에게 붙인 여러 가지 특성을 부정하며 인간 생활에 대한 비판을 감!행!하고 있다.에서는 한 사나이와 한 여편네가 서로 저버리지 아니하여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러한 천리를 어기고 사나이는 계집을 여럿 거느리는 일이 너무나 빈번한데, 더욱 통탄할 일은 계집이 두 사나이를 두면 변고로 여기고 사나이가 두 계집을 두면 당연시하는 것이라 하였다. 이 부분은 부부의 화목을 이야기한다기 보다는, 남녀가 평등하여야 한다는 개화사상에 방점을 찍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평등'이라는 근대사상은 다만 인간의 성별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땅위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에 해당한다.그런고로 세상에 있는 모든 물건은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초목이든지 무슨 물건이든지 다 귀하고 천한 분별이 없은 즉, 어떤 것은 높고 어떤 것은 낮다 할 이치가 있으리요.이러한 근대적 사상은 이 소설에서, 모두 '기독교적 사상'으로 연결되고 있는데, 따라서 사람의 심성회복을 이전과 같이 '충'이나 '효'로서만 언급하지 않고 '평화'나 '사랑'으로 이야기한다.따라서 남이 나를 죽이려 하면 어떻게 하든지 죽지 않도록 주선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나(구밀복검- 벌), 대포와 총의 힘을 빌어서 남의 나라를 위협하여 속국도 만들고 보호국도 만들고 하는 일은 잘못된 일이라 꾸짖는 것이다. 벌의 입에 담긴 꿀은 남을 꾀이려 하는 것이 아니라 양식을 만들려고 하는 것이고, 배의 칼은 남을 공연히 쏘거나 찌른는 것이 아니라 남이 그를 해치려고 할 때 정당방위로 쓰는 칼이라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호랑이가 세상에서 제일 포악하고 무서운 것이라고 하여 두려워하나 사람이 해를 입는 것은 무서운 호랑이에게서가 아니라 같은 동족인 사람에 의해서라고 비판한다.결국 이렇듯 선한 심성을 잃어버린 인간들이, 다시 하나님이 주신 권리와 가치를 누리기 위해서는 '회개'를 해야 한다고 언급한다.사람이 떨어져서 짐승의 아래가 되고 짐승이 도리어 사람보다 상등이 되었으니 어찌하면 좋을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니 하나님이 아직도 사람을 사랑하신다 하니, 사람들이 악한 일을 많이 하였을지라도 회개하면 구원얻는 일이 있다 하였으니, 이 세상에 있는 여러 형제 자매는 깊이깊이 생각하시오.
    독후감/창작| 2007.05.03| 2페이지| 1,000원| 조회(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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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전문학이란 무엇인가(고전문학의 특성)
    고전문학이란 무엇인가1. '우리' 문학이다'고전문학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대답하는 방법 중 하나는 말뜻을 풀이하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말하자면 고전문학이란 '우리' '옛날'의 '문학'이다.그러나 이런 대답으로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그것은 마치 "너희 집이 어디냐?" 하고 물으니까 "우리 집은 철수네 앞집이다."하고 대답하고, "그럼 철수네 집은 어디냐?" 하고 물으면 "우리 뒷집이다." 하고 대답하는 식이나 한가지다. 동어반복이기 때문에 여전히 질문은 질문으로 남아 있고 해명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이제 하나씩 뜻을 분명히 헤아려 보자. 먼저 '우리'란 누구인가?'우리'라는 단어를 모를 사람은 없지만, 고전문학의 범위를 정하는 데 '우리'의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운동회 때 청군 백군을 갈라서 '우리'라고 한다면 자기가 속한 편을 가리키는 말이 되고, 이웃집 사람과 말을 하다가 '우리'라고 하게 되면 자기 가족을 뜻하는 말이 될 정도 로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그러나 '우리 문학'이라고 할 때, 더구나 고전문학을 두고 그런 말을 규정지을 때 그 일은 그리 간단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이 누구에 대하여 '우리'인가를 생각하면 그 가닥을 어렴풋이나마 잡아낼 수가 있게 된다.우리 문학을 우리는 한국문학이라고 하고 또 이것을 줄여서 국문학이라고도 한다. 그러니 얼른 생각하면 '우리'라는 말이 '한국'이라는 나라를 뜻하는 말로 이해되기도 한다. 우리 문학의 상대 개념이 남의 문학 또는 외국문학인 점에 비추어 생각하면 그럴 듯도 하다.그러면 충분한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한국이라는 말의 뜻을 좁게 해석하게 되면 대한민국이라는 뜻이고,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세워진 것은 19세기말이므로 신라나 고려시대의 문학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해석도 가능해지므로 문제가 된다. 따라서 한국문학 또는 국문학이라고 할 때의 그 '한국'을 나라의 개념으로 좁혀 잡아서는 안 된다는 점이 분명해진다.그렇다면 나라의 이름을 넘어서는 동질성을 확보하고 있는 '우리'는 무엇인가상에는 옛날의 것이 아닌 문학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어떤 문학이든 작가의 손끝에서 적혀 나오는 순간 옛날의 일이 되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옛날'이라는 말을 그렇게 현미경을 들여다보듯이 쪼개서 생각하지는 않는다.옛날이라고 하면 우리는 상당한 세월이 지난 옛적이라는 생각을 떠올린다. 그러니 우주가 처음 생기던 때가 언제인지는 몰라도 그 아득한 시절은 분명 옛날일 것이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고려나 조선조 때가 모두 옛날이리라는 것도 자명하다.문제는 옛날의 끄트머리가 언제까지냐 하는 것이다. 우리 문학에서는 그것을 20세기 초까지,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3 1운동이 일어나기 직전까지로 잡는 것이 보통이다.그 까닭은 3 1운동 이후부터는 '근대'라는 시대적 특성을 지닌 문학이 이루어졌다고 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판단이 사람마다 다 같은 것도 아니고, 실제로 문학이 어느 날 어느 시에 고전에서 근대로 일시에 변하는 그런 일도 있을 수 없음은 사실이다. 학교 수업시간이라면 종을 쳐서 수업을 시작하고 끝내고 하지만 역사의 단계라는 것은 그렇게 한 순간에 이루어질 수가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시간을 정해서 고전문학 시대의 끄트머리임과 동시에 새로운 근대문학 시대의 시작으로 보려고 하는 것은 문학이 보여주는 고전적 성격이 그 때까지 계속되다가 새로운 경향으로 변해 갔기 때문이다.앞에서 고전문학의 끄트머리를 3 1운동 이전까지로 본다는 말을 하면서 견해가 다르기도 하다는 말을 했는데, 상당수의 사람들이 1896년의 갑오경장을 그 분기점으로 보는 견해를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갑오경장은 그 당시 이러저러한 제도들을 새롭게 하고자 하는 정부의 조처였고, 따라서 그렇게 볼 경우 학교 종을 치듯이 문학도 땡땡 종을 울려서 바뀐 것처럼 생각하기 쉽다는 생각에서 그보다는 좀 더 나중이 1918년까지로 보는 경향이 있다.하지만, 고전문학이 이루어진 '옛날'의 끄트머리를 어디까지로 보거나 간에 그 끄트머리에 해당하는 시대에 오게 되면 무엇인가를 말하기 위해서는 예를 드는 것보다는 정의를 내려야 한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그러나 그처럼 어려운 일도 드물 것이다. 그 까닭은 문학이라는 것이 '연필'이라든가 '빵' 혹은 '지구'처럼 구체적으로 손에 잡히는 사물도 아닐 뿐더러, 그 지닌 속성도 다양한데다가 더욱이 시대에 따라서 그 개념이 조금씩 바뀌어 왔기 때문이다. 그만큼 문학은 복합적이고 다양한 성격을 지닌 것이어서 정의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 둘 필요가 있다.그러나 문학이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단념할 수는 없다. 이 세상 무엇이든 그 개념을 명확하게 하지 않고는 그것을 알았다고 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우선 쉽사리 떠오르는 방법으로 사전을 찾아서 문학의 개념을 알아 볼 수도 있다. 어떤 사전에 보면 문학을 정의해서 '사상 감정을 상상력에 의하여 언어로 표현한 작품'이라고 했다. 이쯤만 해도 문학의 모습이 상당히 드러난다.그렇지만 아직도 문제는 남는다. '상상'이라는 말이 뜻하는 바는 무엇인가? '실제로는 경험이 없는 사물 현상을 머리에 그려보는 것'이 '상상'의 뜻이라고 해 놓고 보면, "그러면 경험한 사실을 적은 것은 문학이 아닌가?"하는 의문이 금방 생기게 된다. 일기도 기행문도 우리는 문학에서 제외시키지 않는 점에 비추어보면 이 정의도 완전하지 않다.문학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아는 또 다른 방법은 그 방면의 책을 찾아 읽는 일이다. 그런 책을 가리켜 우리는 '문학개론' 혹은 '문학원론' 등의 이름으로 부르고, 실제로 그런 책은 서점의 서가를 가득히 메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그러나 그 책을 읽자고 들거나 혹은 읽거나 간에 머리만 혼미할 따름, 여전히 문학은 잘 모르겠다는 결론에 이르고 말게 될 것이다. 그 까닭은 책을 잘못 써서인가? 천만에 그렇지 않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문학이란 개념이 그 만큼 추상적이고 복합적이며 다양하기 때문이다.따라서 이 글에서도 문학을 손에 쥐어주듯이 그렇게 선명하게 일러줄 방도는 없다. 다만 어렴풋한 뼈대만을 얘기해서 이해를 돕고자 할 따름이다. 그것을 미루어 짐작하는 힘도 있다. 우리의 정신세계가 겪은 것, 그것을 상상이라는 말로 바꾸어 말하기도 한다. 문학이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기도 하다.가령, 광해군 때 인목대비(仁穆大妃)가 당한 일을 궁인(宮人)들이 적은 것으로 보이는 {계축일기(癸丑日記)}가 문학이 되는 이치도 그러하다. 이것은 일기라는 이름 그대로 사실을 적은 것이지만, 그 사실이라는 것도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어서 주관적 판단을 가지고 그려낸 것이라서 우리는 그것의 문학성을 인정하게 된다. 만약에 '밥을 먹음' '잠을 잠'……. 이런 식으로 기록한 일기가 있다면 누가 그것을 일러 문학이라 하겠는가? 문학이 무엇을 '그려냈다' 고 말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넷째, 문학은 형상화다. 형상화라는 말은 그려낸 것이라는 뜻을 갖는다. 그러나 그려냈다고 해서 꼭 묘사만을 뜻하는 것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주관적으로 인식한 생각을 나타내되 그저 사실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 인식을 표현하는 쪽으로 나아간다는 뜻이다.그 한 예로, "춥다. 옷을 보내 다오."라는 말은 옷을 보내라는 당부를 전달하는 데에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이 달성되면 그만이다. 그러나 '삼동에 베 옷 입고 암혈에 눈비 맞아…….'라는 시조는 남더러 무엇을 어찌해 달라는 부탁이 아니라 자신의 인식을 그려낸 것이라는 점에서 문학이 된다. 문학의 이런 성격을 두고 '전환적 표현'이라는 말을 쓰기고 한다.다섯째, 문학은 그 자체로 완결되어 있다. 완결되어 있다는 말은 어디다 내 놓아도 그 처음과 끝을 보여주고 그럼으로써 뜻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을 가리켜 '구조'를 갖는다고도 한다.예컨대, "배가 고프다."라는 말은 그 말을 누가 했으며 누가 들으며 어떤 상황에서 말을 했는가가 밝혀져야만 뜻이 분명해진다. 이것이 짧아서 그런가 생각된다면 다른 예를 보자. "나는 배가 고프다. 그래서 나는 밥을 먹는다. 밥을 먹으면 배가 부를 것이다."같은 말도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다.따라서 이런 것을 문학이라추어 시를 쓰는 사람은 드물고, 한문으로 편지를 쓰는 사람도 드물다. 그것들은 이미 이 시대의 틀이 아니기 때문이다.고전문학은 오랜 세월에 걸쳐서 이루어진 작품들이기에 그 틀이 다양할 것도 충분히 짐작될 것이고 사실이 그러하다. 바지 속에 넣어서 입을 줄만 알았던 와이셔츠를 바지 밖으로 비죽이 내놓고 입고 다니는 유행이 생기는 것은 그 틀이 바뀌어서 그리된 것이듯이, 문학도 그 삶의 변화에 따라서 그 틀이 바뀌었을 것을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그 틀이 같거나 비슷한 유형끼리 묶어 놓는 것을 문학에서는 '장르'라고 한다. 문학의 장르를 나누는 것은 시험문제를 만들기 위해서거나 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을 골치 아프게 만들고자 해서 그러는 것으로 오해하면 곤란하다. 장르란 일종의 분류법인데, 분류라고 하는 것은 그 대상을 분명하게 아는 데 필요한 체계라서 그것을 신중하게 따지는 것이다.우리가 서점에 책을 사러 갔을 때를 생각해 보자. {심청전}을 구할 생각이라면 문학 작품이 진열된 서가로 갈 것이고, 그 중에서도 소설 혹은 고전으로 분류된 서가를 찾으면 거기서 원하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심청전]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장르를 나누어 묶어 보는 노력은 그래서 문학의 이해를 돕는 일이 되기도 한다.장르의 이해가 이렇듯이 문학의 이해에 필요한데도 고전문학을 대하게 되면 그 종류의 다양함에 우선 압도될 것이다. 서(序), 기(記), 발(跋), 논(論), 책(策), 명(銘), 행장(行狀), 소(疏) 등만 해도 우선 기억하기가 쉽지 않다. 더구나 고대가요, 향가, 고려속요, 경기체가, 시조, 가사, 잡가, 판소리, 전(傳), 가전(假傳), 몽유록(夢遊錄)……. 이런 식으로 늘어놓게 되면 머리가 어지러워지기까지 할 것이다.그러나 이런 장르들을 이해하는 것은 곧 그 개개의 작품을 보다 확연하게 이해하는 일이 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향가의 예를 가지고 생각해 보자. 가 향가에 속한다는 사실을 앎으로써 우리는 그것이 신라 하다.
    인문/어학| 2007.05.03| 11페이지| 1,000원| 조회(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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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교논리에 놀아난 별주부-『별토가』를 읽고
    유교논리에 놀아난 별주부-『별토가』를 읽고이링 페쳐의『누가 잠자는 숲 속의 공주를 깨웠는가』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서양에 전래되는 옛날 이야기-「백설공주」,「신데렐라」,「개구리 왕자」등-를 각색한 것인데, 기존에 우리가 동화책을 통해 알고 있던 내용과는 너무도 달라서 무척 황당해 한 기억이 있다.「신데렐라」이야기가 가장 인상적이었는데, 이 소설에서의 신데렐라는 '유리구두'로 일약 왕비가 되어 행복한 삶을 누리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지 않다. 주인공, 신데렐라는 친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하녀의 위치로 떨어지자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청혼하는 왕자에게 계급사회의 모순을 일깨워주려고 노력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링 페처는 이것이 원래의「신델렐라」이야기라고 주장한다. 원래는 당파성을 가진 민중들의 전해지는 이야기가 그림형제가 다듬으면서 왜곡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바뀐 '동화'가 아이들에게 읽히면서 기존의 지배체제 이데올로기를 공고히 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별토가』를 읽으면서 이링 페쳐가 생각난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우리는 어렸을 때, '거북(이 작품에서는 자라이지만)과 토끼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지혜로움을 발휘하면 토끼처럼 위기의 상황에서도 쉽게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던 것 같다. 그러나 토끼와 자라, 용왕, 자라의 처가 만들어낸 이『별토가』는 위와 같은 도덕교과서가 아니라, 忠(君臣有義)과 長幼有序, 정절(烈女不更二夫)을 강요하는 유교사회를 희화화한 사회비판소설이었다.별주부가 자신의 부인을 다른 남자에게 내주고 결국 자결하게 되는 것은 '허벅지 살을 베어 임금 섬긴 개자추, 초나라 속이고 목숨을 잃어가며 임금을 살린 기신' 과 같이 君臣有義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정작 왕은 원기 회복하기는 왕배탕이 제일 좋다는 토끼의 꼬임에 빠져 별주부를 잡아먹고자 한다. 별주부는 결국 자신의 목숨보다도 자신의 아내보다도 왕을 먼저 생각하다가 화를 입게되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열녀정신을 장려하여 사회를 통제하고자 한 체제이데올로기가 실제로는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읽어낼 수 있다. 토끼를 잊지 못해 죽게 된 별주부의 처에게 열녀라 칭하고 이후 수궁인들은 그를 열녀라 숭앙하는 모습이 연출될 것이기 때문이다.육지의 여러 짐승들이 모여 상석을 차지하려고 좌석다툼을 하는 장면에서도 사람들의 의식세계가 얼마나 유교논리에 좌지우지되는 지를 볼 수 있다. 勇力이 절륜하고 職品이 높은 호랑이가 스스로 어른임을 주장하며 상석을 차지하고자 하니 나이많은 두꺼비가 나타나자, '조정에서는 벼슬만큼 높은 것이 없고 향당에서는 나이만큼 높은 것이 없다'며 자리를 양보해준다. 능력이 어떠한가는 상관없이 나이에 의해 상석이 넘겨지는 것이다.이렇듯 유교적 삶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은 '우생원(소)의 이야기'를 통해 가해진다."이 일은 답답한 일 아니겠소. 밭을 갈아 내 먹으며, 재물 실어 내가 쓰나. 용봉과 비간의 굳은 절개 생전에 어질기로 사후충신 거룩커든, 이내 팔자 무슨 일로 괴로이 지내다가 사후에도 그릇 죽나? 천자 왕후 대신들도 내 아니면 높다 하며, 영웅 준걸 그 누군든지 나 아니면 귀하다 하랴? 오복 중에 중한 것이 첫 번째 수명이요 두 번째 부귀라.(하략…)"
    독후감/창작| 2007.05.03| 2페이지| 1,000원| 조회(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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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시가의 문학적 성격
    고려 시가의 문학적 성격1. 문학성의 문제문학을 업으로 삼는 사람을 가장 곤혹스럽게 하는 질문 가운데 하나가 '문학이란 무엇인가'하는 것이다. 누구나 대답은 할 수 있지만 그 어느 것도 만족스러울 수는 없음은 물론이다. 어떤 경우에는 '大道無門'과 같은 선문답이나 '笑而不答'과 같은 눈짓이 오히려 어울릴 수도 있다.이 발표는 그런 곤혹스러운 질문을 안고 출발하는 어려움이 있다. 더구나 이야기가 '문학성'이라는 말로 발전하게 되면 논의는 더 어려워지고 견해차 또한 상당한 현상을 보이는데 이 발표의 제목인 '문학적 성격'은 곧 문학성과 동의어일 것이므로 어려움은 더해진다. 이 점을 양해 사항으로 내 걸어 둔다.2. 문학적 공감의 원천⑴욕망과 갈등의 보편성[청산별곡]은 오늘의 관점에서 보아도 흥미롭다. 그 첫 연은 이렇게 시작된다.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머루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어리랏다.얄리얄리얄랑셩 얄라리얄라청산에서 살고 싶다는 이 첫 연 때문에 노래 전체의 제목도 [청산별곡]으로 굳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작품 속의 화자가 그리는 것은 청산만이 아니라 바다이기도 해서 제 6연은 '해초며 굴조개랑 먹고 바다에 살어리랏다'로 이어진다. 가서 살고픈 곳은 청산 과 바다라는 것이 이 노래의 핵심인데, 산과 바다를 상징으로 이해하면 곧 온 세상이 라는 말이 된다. 우리는 항용 '하늘과 땅'으로 온 우주를, '육지와 바다'로 온 지구를 뜻하는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결국 이 노래는 온 세상 어디든 가서 살고 싶다는 말이겠는데, 다만 거기 함축된 하나의 조건은 지금 자신이 발을 디디고 있는 곳만 빼고라는 뜻이다. 그러니 내 지금 사는 곳을 떠나 이 세상 그 어디엔가 저 먼 딴 곳에 가서 살고 싶다는 뜻이 된다. 이것이 뜻하는 바를 두고 매우 꼼꼼한 해석이 이루어져 있다. 어떤 이는 여기서 삶의 근거를 잃은 유랑민의 고달픈 삶을 읽어 내기도 했으며, 또 어떤 이는 고려 시대에 변방의 국방을 위하여 강제 이주를 단행했던 역사 기록에서 근거를 찾아 그런 실향의 결과라다. 거기에 비하면 오늘 우리의 말은 말을 너무 어렵게 빙빙 돌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⑵피안 지향의 공감 원리시 -혹은 노래라고 해도 좋겠는데- 그것은 본디가 거짓말의 세계라는 생각은 그런대로 설득력을 갖고 있다. 의사진술 운운하는 리챠즈 식의 설명을 추종해서가 아니라, 시는 사실의 세계가 아니라 말로 그러하다고 외쳐서 가라앉히고, 잠들게 하고, 편안하게 하며, 즐겁게 하려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시가 텅 빈 찻잔에 커피를 남실거리게 하지는 못하는 법이고, 아무리 간절한 초혼의 노래를 불러도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오게 만든 시는 있은 적이 없다. 그것은 다만 언어로 대신하게 하였거나, 아니면 언어로 그렇게 있게 하였을 따름이다. 우리의 논의를 분명하게 하기 위하여 시라는 말을 노래로 바꾼다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노래는 다만 흔들리는 마음을 고요하게 해 주기도 하고, 방황하는 넋을 길 찾아 잠들게 하는 힘을 가질 따름이다. 그것은 사실적 실재가 아니라 언어적 실재다.노래에 대하여 이런 생각의 축을 따라 가노라면 [청산별곡]과 다시 만나게 된다. 지금 여기가 아닌 피안을 그토록 갈망하던 그 작품 속의 화자는 거기도 영원한 안식처는 아님을 이내 알아차린다. '올 이도 갈 이도 없는 밤은 또 어찌할' 것이며, '너처럼 시름 많은 나도 자고 일어 우니는' 그곳, 그래서 자신의 위안은 '사슴이 장대 끝에 올라 해금을 켜는 것을 들으며' 또 '살진 강술을 빚어 소매를 잡는' 술과 놀이의 세계에서 위안을 구하고 만다. '노세 노세 젊어서 놀아'의 고려판이라 할 만하다.[청산별곡]만 그런 것이 아니다. 절절이 간장이 타는 노래라고 극찬해 마지않았던 [가시리]의 세계는 무엇인가? 그것이 이별의 안타까움에만 머물지 아니하고 '설운 님 보내옵나니 가시는 듯 다시 오소서'라는 기원과 다짐을 둠으로써 잡은 소매를 놓을 수 있었던 것은 말을 통해 심리적 실재가 구축된 결과라 할 수 있다.[서경별곡]에서도 같은 모습이 확인된다. '구슬이 바위에 떨어진들 끈이야 끊어지리까'라고 다 그 보편적 상황이라는 것이 구체적으로는 이별의 상황이라고 지적할 수 있지만, 이별을 굳이 체험해 보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 상황은 충분히 공감된다. 그 까닭은 이별이라는 상황의 심리적 속성에 있다. 이별이란 결국 무엇인가? 갖추어져 있음으로써 평정을 유지할 수 있는 상황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앗아가 버림으로써 평정을 깨뜨리는 것이라고 추상화할 수 있다. 말하자면 결손에 의한 평정의 파괴다.결손에 의한 평정의 파괴는 이별로만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이루고자 애를 써도 이루어지지 않는 꿈도 결손의 모습으로 평정을 깰 것이고, 육체적 굶주림이나 심리적 굶주림도 또한 결손에 의해 평정을 깨는 일이다. 그리고 인간의 욕망이 무한하다는 점을 감안하고 본다면 인간은 늘 결손에 의한 평정 깨기를 반복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이별이라는 상황이나 거기서 촉발되는 온갖 경과가 공감을 널리 확보하게 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은가 한다. 그것은 결손에 의한 평정 깨기가 우리 인간의 보편적인 삶의 모습이라는 점에서 동질적인 공감을 얻게 마련이다.고려 시가의 상당수가 이러한 결손으로부터 유도되는 상황의 문제를 정서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음을 보게 된다. [청산별곡]이 그러하고, [서경별곡]이 그러하며 [동동]과 [정과정]이 그러하다. 다소 애매한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이상곡]조차도 이런 부류에 넣어서 크게 잘못은 없을 것이다.따라서 우리는 고려 시가의 정서적 유형 가운데 하나를 결손에서 유발되는 정서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고려 시가에는 결손에서 유발되는 정서와는 전혀 다른 출발점을 갖는 또 하나의 유형이 있다. 그것을 대표할 만한 것이 [쌍화점]이 아닌가 한다. 이 작품에 대해서도 우리는 많이 엇갈리는 평가를 마련할 수 있다. 그것은 이 노래가 지니고 있는 의사표시적 측면에 대한 윤리적 재단과 암시성에 대한 분석적 관점의 차이에서 비롯된다.그러나 그런 평가와 무관하게 이 노래의 동인이 무엇인가를 생각함으로써 앞서 살핀 것과는 상이한 정서의 모습을 확인할 수가 있다. [네 마하며, 비둘기를 노래한 [유구곡]이라든가, 방아 찧기와 효도를 연관시킨 [상저가]에서 그런 자취를 발견하게 된다.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이런 유형의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한림별곡]과 [만전춘]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한림별곡]을 말할 때는 이상스럽게도 그 제1연만을 거론하면서 작품의 특성을 설명하는 관습이 있는 듯한데, 그 작품의 진수는 제8연까지를 다 읽어야만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 다소 애매하다고는 하지만 조협나무에 홍실로 홍그네를 매고 정소년을 불러 그네를 밀라고 하는 것은 그러한 행위를 강하게 추구하는 정서적 동향을 보여주는 것이고, 그래서 이 노래는 결손이 아니라 잉여에 의한 평정 깨지기가 그 동기가 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퇴계가 [한림별곡]을 가리켜 지나친 호기와 방탕을 보여준다고 악평을 한 것은 그런 때문이 아닌가 싶다.이런 잉여의 연장선상에 놓인 것으로 [만전춘]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노래는 여러 작품의 혼성이거나 뒤늦은 조합일 가능성이 많이 지적되기도 하지만, 일단 한 편의 질서를 지닌 자체가 작품으로서의 완결성을 고려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으며, 그런 전제 위에서 본다면 얼음 위에 댓잎 자리를 보아서 얼어 죽기를 불사하는 정서의 기미가 확연하고, 그것은 분명 결손이 아닌 잉여적인 평정 깨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서 [정석가]까지도 이런 유형의 노래로 볼 수 있을 것이며, [정석가]야말로 이별의 노래로 보아서는 안 되며 잉여적 추구라고 볼 때 비로소 노래의 진의가 드러난다는 점은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이별의 노래로 볼 때 시적 가치가 타락하고 마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할 수 있다.이처럼 고려 시가에는 결손과는 정반대라고 할 수 있는 잉여적 추구가 빚어내는 평정 깨지기가 정서의 출발점으로서 뚜렷하게 한 유형을 이루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⑵ 질서화의 두 유형 - 표현과 전달심리의 평정 상태가 깨지고, 그것을 다시 평정의 상태로 돌려놓기 위한 노력 가운데 하나가 노래 행위라고 전제하고 보면, 그것이 어떻쌍화점]은 새끼광대를 위시한 여러 유형의 인물들에게, 그리고 [이상곡]과 [만전춘]은 아소 님하를 부르는 형태로 전달의 의도를 확연하게 하고 있는바 이는 [정과정]이 그 대표성을 지닌다는 점에서도 전달동기가 강화된 모습으로 판단된다.몇 편 남지 않은 고려 시가 작품들을 가지고 산술적인 계산을 통해서 무엇을 추론해 보려는 일은 무모할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에게 끼쳐진 고려 시가들 가운데서 상당수의 작품이 표현 동기보다는 전달동기를 겨냥함으로써 심리의 질서화나 평정의 회복을 기도하고 있다는 것은 그 나름의 의미를 지닐 수도 있을 것이다.표현 동기에 기반을 둔 노래들이 독백의 정서에서 평정을 구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전달동기에 기반을 둔 노래들이 지향하는 것은 내면의 독백보다는 관계의 형성에서 평정을 얻고자 하는 것이라고 해석하고자 한다. 감추어 두기보다는 알리고자 하는 욕구가 선행한다는 뜻도 된다. 그런 점에서 고려 시가는 민요의 모습을 많이 지니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민요에서 불러들이기나 관계의 형성은 아주 보편화된 방식 가운데 하나라는 점도 이 해석을 뒷받침하는 논거가 될 수 있다. 물론 고려 시가의 음악적 성격에 대한 해석은 그것이 민요일 수 없음을 입증하고 있음이 사실이지만, 우리에게 끼쳐진 악보의 모습이 그 노랫말의 원 출처를 고스란히 증명한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점도 고려할 만하다.또 이러한 판단에 관련해서 살펴볼 만한 역사적 기록들도 있다. 조선조에 들어와서 여러 가지로 박해를 받은 고려 시가가 있는데, 그것들이 공교롭게도 전달동기에 기반을 둔 노래들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서경별곡]이 성종실록에서 비판을 받고 있는가 하면, [만전춘][이상곡][쌍화점] 등이 성종에서 중종 연간에 화젯거리가 되고 개산되는 운명을 겪게 되는 것은 흥미롭다. 전달동기가 아닌 표현 동기에 기반을 둔 것으로 보이는 [동동]이 이런 대열게 끼이게 된 까닭은 짐작하기 어렵지만, 전달동기에 기반을 둔 노래들이 갖는 전달의 효과 또는 파급과 관계 형성이라는 국면.
    인문/어학| 2007.05.03| 8페이지| 1,000원| 조회(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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