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과 양민학살{머리말- 보도연맹사건- 거창양민학살사건- 인민군과 미군에 의한 양민학살- 그 밖의 미군에 의한 양민학살맺음말머리말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은 1950년 6월25일 이전인 48년부터 53년 정전 무렵까지 전국에 걸쳐 행해졌다. 제주와 여수·순천을 비롯해 경기도 고양·강화·남양주, 전북 순창·익산, 전남 나주·함평·화순, 경북 문경·대구, 경남 함양·산청·거창·충무, 부산지역, 충북 영동 황간면 노근리, 대전형무소 등에서 대량 학살이 자행됐다.민간인 학살을 주도한 장본인은 군인, 경찰, 미군, 서북청년단이나 자경단과 같은 민간단체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절제된 형식'을 취하긴 했으나 북한 인민군, 빨치산, 지방 좌익세력 등이 민간인 학살을 행한 경우도 있었다. 학살을 당한 민간인은 주로 좌익세력에 대한 통제와 회유를 위해 만든 조직인 `국민보도연맹' 회원을 비롯해 형무소에 수감됐던 좌익사범, 피난민, 부역혐의자, `공비' 또는 `통비' 혐의자, `작전지역내' 불특정 다수 민간인, `반동분자' 등이었다.민간인 학살은 야만적이고도 비인간적인 형태로 저질러졌다. 집과 재산을 파괴하고 사람을 집단으로 살해한 초토화 작전을 비롯해 미군에 의한 폭격과 기총사수, 보복 테러, 총살, 생매장, 강간 살해 등의 갖가지 잔혹하고 추악한 방법이 동원되었다.미군과 국군은 지난 1950년 한국전쟁당시 인민군의 반격에 밀려 38선 이남으로 후퇴하면서 양민학살을 감행했다. 미국 AP통신 보도를 통해 1950년 7월말 미군이 충북 영동군 노근리에서 4백여명의 양민들을 집단 학살한 사건이 확인된 데 이어 경남 마산시와 창녕, 사천시와 조치원 등 곳곳에서 미군에 의한 양민학살만행 증언과 진상규명 투쟁이 곳곳에서 전개되고 있다. 미군에 의한 학살사실을 입밖에 내지 못했던 사람들이 피해사실을 신고하며 증언, 투쟁을 벌이고 있는데, 노근리 양민학살 대책협의회만도 추가로 신고해온 사람은 1백여 명에 이른다고 한다. 초보적인 집계에 따르더라도 6.25전쟁 당시 미군에 의해 학살된 주민입시킨다. 보도연맹 결성목적은 전향한 좌익세력을 통제·회유하는 것이었으며, 활동목표는 대한민국정부의 절대지지, 북한괴뢰정권 절대반대와 타도, 공산주의사상 배격·분쇄 등의 강령으로 요약된다. 강령에 따라 보도연맹 참가자들은 전향의 진실성을 입증해 보이기 위해 좌익분자들을 색출하여 밀고하고 자수를 권유하는 등 반공활동을 하기도 했다.또 49년 11월부터는 미국의 협조를 얻어 본격적인 빨치산 토벌작전이 시작됐고, 이 과정에서도 무수한 사람들이 빨갱이 협조자·동조자라는 이름으로 희생됐다. 이승만 정권의 이같은 노력으로 한국전쟁 이전까지 한국의 좌익조직은 거의 와해됐다.7월 14일 맥아더에게 모든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이양한 후 이승만 정부가 취한 행동은 경찰과 CIC(특무대)를 중심으로 후방에서 정치적 공세를 취하는 것이었다.이런 정치적 공세는 전쟁 전부터 계속해온 좌익과 반대세력에 대한 억압의 연장이었고, 이 과정에서 또다른 희생이 초래됐다. 이에 따라 가장 먼저 일어난 사건이 서울을 제외한 남한전역에서 벌어진 보도연맹원 집단학살이다. 서울은 사흘만에 점령당했기 때문에 그럴만한 여유가 없었다는 것이다. 몇 명이 죽었고 몇 명이 살았는지는 아직도 알 수 없다.다만 전국의 보도연맹원이 30만명에 달했고, 그중 미처 학살이 이뤄지지 않았던 서울이 1만9,800여명이었다고 하는 기록(동아일보 50년 5월 5일자)으로 미루어 짐작해볼 뿐이다.왜 죽였는지도 알 수 없다. 다만 이승만 정권은 전향한 좌익이라 하더라도 믿을 수 없다는 인식에 따라 이들을 위협적인 존재로 생각했을 것이다. 특히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후 이들 보도연맹원이 적군에 대한 적극적인 협조자로 나선 것도 집단학살의 중요한 이유로 작용했을 것이다.이런 이유로 시작된 보도연맹원에 대한 학살은 7·8월을 거쳐 9월 하순 집단학살 금지령이 내려질 때까지 계속됐다.양민학살은 이 밖에도 전쟁 와중에 곳곳에서 벌어졌다. 50년 7월 군경에 의한 전남 방어작전이 실패로 돌아갔다. 전남 나주경찰서 소속 경찰부대, 이른바 ‘이 받아들여져 국회에서 ‘거창사건 등 관련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함으로써 전국의 양민학살 중 유일하게 해결의 실마리가 풀린 사건이다.거창사건의 진상규명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도 당시 를 비롯한 외국언론이었다는 것이다. 이는 최근 미군의 노근리 양민학살사건을 보도함으로써 진상규명의 계기를 마련한 을 떠올리게 한다.51년 당시 거창출신 신중목 국회의원이 국회에서 이 사건을 폭로한 이후 구성된 국회 특별조사단은 4월 6일 임시수도 부산을 출발, 거창 현지로 향하지만, 4월 24일 이승만은 “공비협력자 187명을 군법회의에 넘겨 처형한 사건이었다”는 담화문을 발표한다.그러나 이런 이승만 정권의 은폐기도는 의외로 외국언론에 의해 벽에 부닥치고 만다. 이 무렵 외국언론들은 거창사건을 대서특필 했다. 미국의 는 물론 파키스탄의 신문에까지 오르내린 것이다. 현장취재가 봉쇄됐기 때문에 어떤 외국신문에서는 희생자 수가 5만명이라는 오보까지 나올 정도였다.이승만은 이런 외국언론의 끈질긴 보도에 굴복, 신성모 국방장관과 조병옥 내무장관을 동시에 해임하고, 사건발생 5개월만에 책임자들을 군법회의에 회부한다.그러나 당시 이승만 정권은 오익경과 한동석, 김종원 등 책임자들을 1년만에 특사로 풀어주고 군·경 요직에 다시 등용했다. 사건 해결과정에서 유족은 철저히 배제됐다. 사건을 해결하려 한 게 아니라 적당히 덮으려 한 것이다.유족들은 4·19직후 다시 한번 진상규명을 요구했고, 5·16으로 된서리를 맞은 이후에도 끈질기에 진상규명 요구를 해 온 결과 마침내 95년 전국의 양민학살사건 중 처음으로 특별법을 쟁취하게 됐다. 이같은 거창사건의 교훈은 ‘역사의 진실은 끝내 밝혀지고야 만다’는 것이다.50년만에 전국 곳곳에서 터져나오고 있는 수많은 양민학살사건의 진실을 또다시 적당히 덮으려 한다면 현 정권도 끝내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인민군과 미군에 의한 양민학살인민군에 의한 양민학살도 곳곳에서 자행됐다. 인민군은 점령지역에서 이른바 ‘반혁명세력’ 숙청이란 우익인사 310명을 몰아넣고 9월27일 새벽 방공호 입구에서 무차별 사격을 가해 무려 295명이 사망했다.유엔군과 국군이 수복한 지역에서는 또다른 보복이 진행됐다. 50년 11월17일 새벽5시. 전북 남원군 대강면 강석리에 들어온 11사단 205부대의 1개 대대병력이 강석마을 앞 논바닥에 주민과 마을로 피난 온 500여명을 모이게 했다. 한 장교가 “국군 수가 워낙 부족하니 남원부대로 가 군에 입대하라”며 17∼35살 사이의 남자를 나오게 했다. 60여명이 나오자 군인들은 이들을 3열로 세운 다음 뒷산으로 데려가 총살했다. 부녀자 7명을 끌어내 마을회관 뒤 으슥한 숲속에서 대검으로 난자했다. 또 19명을 마을회관 앞으로 데리고 가 수건으로 눈을 가린 다음 한사람씩 일본도로 목을 쳤다. 3시간 동안 이 마을에서 90여명이 살해됐다.충북 영동군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이 사건은 작년 9월 미국의 2건의 비밀 문서와 당시 만행에 참가했던 군인의 증언을 토대로 AP통신에 의해 공개 된 후 세간에 잘 알려진 사건이다. 1950년 7월 25일 미1기갑사단 7기간연대는 영동군 노근리 일대에서 마을사람들을 모두 끌어내고는 일본인통역을 내세워 "공산군이 내려오면 다 죽인다. 미군이 안전한 곳으로 피난시켜 줄 터이니 지금부터 남쪽으로 출발하라"고 명령했다.미군은 노인, 여성, 어린이들로 뒤섞인 피난민행렬을 얼마간 끌고 가다가 모두 도로 밑 강변에 내려가 엎드리게 하고는 머리를 드는 사람들은 가차없이 총으로 쏘아죽였다. 미군들은 그 다음날 또다시 피난민행렬을 끌고 가던 중 그들을 도로와 인접한 철길에 올라서게 하고는 비행기로 무차별폭격을 가함으로써 1,000여명을 학살했다. 여기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사람들이 폭격을 피해 철길 밑에 있는 굴다리 속에 모여들자, 이제 미군들은 굴다리가 내려다보이는 양쪽야산에 기관총을 설치하고 사흘간이나 사격을 퍼부어 무려 300여명에 달하는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는 양민학살을 감행했다.당시 학살 만행에 직접 참가했던 미군 병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미군은 있던 주민 1백여명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해 최소 80명이 숨졌으며 사천에서는 50년 8월 1일 미군기 4대가 마을 앞 곤양천 제방에 피해있던 양민에게 폭격을 가해 주민 54명이 숨지고 74명이 부상을 입었다.같은 시기 마산시 신포구 신장면에서도 학살이 자행되었다. 미군은 마을 뒷산에 피난해 있던 주민 100여명을 무차별 총격을 가해 83명을 살해했다. 1950년 8월 11일 마산시 진전면 곡안리에서는 제실에 피난했던 주민들을 향해 미군이 기관총을 쏴 83명이 숨졌다. 미군과 북한군의 전투가 한창이던 이 마을 근처에서 미군 1명이 총격을 받아 숨졌다는 이유로 이와 같은 학살만행을 저지른 것이다. 1950년 7월 8일 영동군 매천리에서도 무고한 주민을 피란시켜준다고 속여 산으로 끌고가서 학살했다.1950년 7월 17일에는 옥천군 군북면 자모리에서는 30분 내에 피하지 않으면 총살하겠다 고 위협하여 양민들을 산골짜기에 몰아넣고 기관총을 난사해 모조리 살해하였다.1950년 7월 첫째주 대전형무소에서 사흘간 정치범 1천 8백명이 집단 처형되었다. 미 에드워즈 중령은 "처형 명령이 의심할바 없이 최상층부에서 내려졌다"고 기록하였으며 "본인의 판단으로는 서울 함락 직후 적군에 의해 석방되지 못하도록 정치범 수천명이 처형되었다"고 밝혔다. 에드워즈 중령은 또한 [육군 헌병에 의한 처형]이란 문서에서 공산주의자들에게 협력한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고 복역 중이던 사람들이 51년 4월 대구 인근에서 처형되었다 고 썼다.1950년 9월 28일 경기도 고양시 일대에서는 두 달여동안 매일 40-50여명의 양민이 학살된 뒤 금정굴 속에 집단매장되어 1천여명이 넘는 주민들이 금정굴 주변에서 총창, 죽창등으로 학살당해 굴속에 버려졌으며 덕유동 산간마을에서도 50여명의 주인이 떼죽음을 당하였다.1950년 7월 초 포항에서는 미군의 명령을 받은 군경이 경주와 포항 영덕 일원에서 검거된 무고한 주민 2백여명을 세 척의 군함에 태우고 바다로 나가 무차별적으로 총살한 후 수장하였다.당시 미군은 이남다.
신해혁명과 중화민국의 성립신해혁명과 중화민국의 성립-----------------------------------------------------------머리말본 문1. 혁명운동의 출발3. 청왕조의 신정흥중회와 손문서태후의 신정2. 중국동맹회의 성립과 삼민주의입헌운동의 전개혁명의 풍조4. 무창봉기와 중화민국의 성립중국동맹회의 성립무창봉기와 중화민국의 성립삼민주의원세개정권의 성립무장봉기와 동맹회의 분열맺음말Ⅰ. 머리말좁은 의미에서는 1911년 10월 10일 호북성(湖北省) 무창(武昌)에서의 신군(新軍)의 봉기에서 시작되어 1912년 4월 원세개정권(袁世凱政權)의 성립에 이르는 시기의 변혁과정으로, 넓은 의미에서는 1895년(또는 1900년) 무렵에서 시작되어 1913년 이른바 '제2 혁명'이 실패로 끝나는 시기에 걸친 중국사회의 전반적이면서도 상당히 급속한 변화과정으로 이해되는 신해혁명(辛亥革命)은 흔히 만청왕조(滿淸王朝)의 이민족 지배와 2천여 년에 걸친 전통적 황제지배체제를 무너뜨리고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인 중화민국(中華民國)을 성립시켰다고 일컬어진다.그러나 이러한 성과로 이루어진 중화민국은 이른바 '반식민지 반봉건사회(半植民地半封建社會)'라 불리우는 근대 중국사회의 구조 자체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런 변화를 수반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신해혁명은 그 성공보다는 실패의 측면이 강조되면서 '실패'하거나 '불철저'한 혁명으로 평가되고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해혁명의 연구는 중국근대사 연구에서 가장 주목받는 분야의 하나이기도 하다. 이것은 신해혁명 자체가 20세기 중국사회의 변동이라는 거대한 '혁명'의 기원 내지는 출발점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간주되기 때문이다.Ⅱ. 본 문1. 혁명운동의 출발흥중회와 손문) 손문은 광동성(廣東省) 향산현(香山縣, 지금의 中山縣)의 농민의 아들로서, 청년기에 줄곧 하와이, 광주(廣州)에서 교육을 받은 서구적 지식인이었으며 태평천국에 나타난 것과 같은 전통적인 반만정서(反滿情緖)에도 강렬한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따라서 당시의 중국사사조(思潮)를 접하여 그의 삼민주의 사상의 기초를 닦을 수 있는 기회가 된다.1900년 의화단사건에 따른 청조의 어려운 처지를 틈타 혁명운동 세력은 홍콩흥중회를 통해 수천 명의 회당을 동원하여 광동성 혜주(惠州)에서 거병하였다.(혜주기의) 그러나 외부적 지원의 두절로 실패하고 말았다. 이후 다시 무장봉기를 계획할 수 있게 된 것은 1905년 중국동맹회(中國同盟會)가 성립된 이후에야 비로소 가능할 정도였고 이 기간 동안 손문은 그로서는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기를 거쳐 나가야만 했다.2. 중국동맹회의 성립과 삼민주의혁명의 풍조일본에 유학하는 중국인 학생들은 점차 그 수가 증가하게 된다. 그들은 조국의 위기에 민감하여 동향적(同鄕的) 유대관계를 통해서 활발한 활동을 개시한다.) 1902년부터 3년에 걸쳐서 《游學譯編》(호남유학생)·《湖北學生界》(호북유학생)·《浙江潮》(절강유학생)·《江蘇》(강소유학생) 등의 창간은 이러한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다.(掘川哲男저, 이양자 역, 《중국근대사》, 삼지원, 1994, p.180)이러한 민족적 위기의 자각과 거기에서 생겨난 민족주의의 심정에서 출발한 만주지배 타도의 혁명론이 드러난 최초의 사건은 1902년 4월 장병린(章炳麟) 등에 의해서 기획된 「支那亡國240年紀念會」이다. 漢人왕조가 멸망하고 나서부터 242년째의 기념회를 우에노(上野)정양헌(精養軒)에서 열고자 한다는 것이다. 결국 이 기획은 청국공사의 요청으로 일본정부가 개최금지조치를 취했기 때문에 실현되지 못했지만 참가예정자는 수백명에 달했다고 한다.일본유학생이 혁명화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 것은 1903년 4월의 거아의용대(拒俄義勇隊) 사건이다. '의화단전쟁'에 즈음해서 동북지방에 군대를 투입했던 러시아는 신축조약 체결 후에도 여전히 주둔을 계속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불만이 중국인 사이에 급속하게 높아져 갔다. 일본유학생들은 거아의용대를 조직하고 청조정부 및 민간의 여러 단체들에 러시아에 대해서 강경자세를 취할 것을 제안함과 동시에 자신들도 귀국해서 항의행동의 전열에 참라고 볼 수 있다. 1905년 7월 일본에 도착한 손문은 당시 혁명운동의 중심인물인 황흥, 송교인, 진천화, 장계 등과 만나 통일적인 혁명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함으로써 이들이 찬성을 얻었다. 당시 아직 유학생을 파견하지 않고 있던 감숙성을 제외한 18성의 대표(대부분 유일학생)와 각 혁명단체의 대표 70여 명이 참석한가운데 중국동맹회(中國同盟會)) 지금까지는 대체로 동맹회가 흥중회, 화흥회, 광복회라는 단체의 연합에 의해 성립되었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그러나 동맹회의 성립시기에서 사실상 흥중회나 화흥회는 이름만 남긴 채 해체된 상태나 마찬가지였고 광복회의 경우는 그 회원 중 일부가 가입하였을 뿐 조직의 독립성이 계속 유지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동맹회의 성립은 손문의 주도하에 기존 혁명단체에 소속되어 있던 혁명파의 활동분자들과 기타의 급진적 유학생들이 개인이 자격으로 가입함으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김형종, 〈신해혁명의 전개〉《강좌중국사》Ⅵ, 지식산업사, 1989, p.137)라는 공식명칭이 통과되고 구제달로(驅除 虜), 회복중화(恢復中華), 건립민국(建立民國), 평균지권(平均地權)) 평균지권의 개요는 ①토지소유자가 그 지가(地價)를 신고하고 그 신고 가격에 따라서 세금을 부과하는 것, ②국가가 필요하다고 인정할 경우 그 신고가격으로 우선적으로 매수할 권리(선매권)를 보유하는 것, ③장래의 지가상승분은 사회발전의 결과(불로소득)로 간주해서 매매시에 국가(사회전체)에 귀속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평균지권에 관해서는 이해되기 어려워서 그 철회를 요구하기도 하였으나 손문의 상세한 설명과 참가자 사이에서 널리 인망을 모으고 있던 황흥의 손문옹호에 의해 강령으로 삼기로 결정했다.(掘川哲男저, 위의책, p.186.)이라는, 손문이 1903년이래 사용해 오던 16자 강령이 채택되었다.중국동맹회 성립의 배경첫째는, 20세기에 들어온 다음부터의 혁명운동의 고양, 즉 손문이 말한 '혁명의 풍조'이다. 둘째는, 혁명운동이 계속 고양되어 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국가의 회복을 지향하는 민족주의, 이 민족주의에 의한 민족혁명과 동시에 병행함으로써 전제 지배의 타도와 민주국가의 수립을 지향하는 민권주의, 손문사상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것으로서 '사회경제조직을 개혁함으로써 미래의 사회혁명을 방지'하고자 하는 지권의 평균을 중심으로 하는 민생주의로 구성되고 있다.) 손문의 이러한 삼민주의는 반제(反帝)문제에 대한 명확한 방침의 결여, 민권주의의 구체성의 결여, 민생주의의 공상성(空想性)과 농촌토지문제에 대한 이해의 결여 등 여러 가지의 한계가 지적되기는 하지만 당시로서는 가장 체계적으로 정비된 혁명이론의 수준을 보이는 것이었으며, 혁명파의 입장을 대표하는 역할을 수행하여 혁명운동의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김형종, 〈신해혁명의 전개〉,《강좌중국사》Ⅵ, 지식산업사, 1989, p.138.)무장봉기와 동맹회의 분열동맹회는 성립이래 각지에서 본격적인 반청무장봉기를 추진하게 된다. 각지에서 회당과 신군출신의 회원들을 참여시켜 광동·광서를 점령한 다음, 양자강유역으로 진출하여 화중의 신군과 합류한다는 구상 아래, 1907년 광동·광서·운남에서 여섯 번이나 무장봉기를 시도하였다. 그리고 1911년 4월 황흥과 손문의 지도하에 광주에서 최대규모의 봉기를 감행하였으나 모두 실패로 끝났다.대중을 기초로 한 군사적 역량을 지니지 못했던 중국동맹회는 임시로 끌어 모은 병력에 대부분 의존하여 산발적 무장봉기를 되풀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계속된 무장봉기의 실패는 중국동맹회 내부의 모순을 한층 표면화시켰다. 실패가 겹침에 따라서 그 내부에서는 동맹회 본부, 특히 손문 등 주류파에 대한 불만이 증대하고 동향적 조직의 부활과 분파활동도 차츰 뚜렷해져 갔다. 또한 초조와 절망 때문에 아나키즘적 행동으로, 또는 정부요인에 대한 테러행위로 기울어져 갔다.3. 청왕조의 신정서태후의 신정청조가 의화단운동으로 열강에게 무참하게 짓밟히자 서태후를 비롯한 보수 세력은 서양의 군사력을 실감하고 이에 외국의 장점을 취하고 중국의 단점을 고쳐서 부강을 꾀하려는 때늦비는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정실시 이후 활발해진 정치개혁론의 전개 속에서 청말 이래 점차 지방분치(地方分治)와 지방의회(地方議會)에의 참여에 의해 제도적인 정치참여를 요구해 오던 신사층은 정치구조의 전면적 변혁을 요구하는 입헌론을 활발하게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04년경부터 장건(張 ) 등을 지도자로 하여 부르조아지나 개명적인 향신층으로 이루어지고, 일부의 개명적인 관료들로부터 지지받는 입헌파가 형성되었다.청조정부는 이들의 입헌군주제에 대한 요구에 응함으로써 1905년 헌정시찰단(憲政視察團)을 구미와 일본에 파견하였고, 1906년 예비입헌의 상유(上諭)가 공포되어 입헌제 시행에 착수한다고 표명했다. 1907년에는 의회제의 기초가 되는 중앙의 자정원(資政院), 지방의 자의국(諮議局)설치가 결정되어 입헌파 단체의 결성을 고양시키며 1908년 장래에 반포될 헌법의 기본방침인 헌업대강(憲法大綱)이 공포되었다. 그러나 광서제와 서태후가 잇달아 병사하고 부의(溥儀, 1906∼1967)가 선통제(宣統帝)로서 즉위하자, 아버지인 재례(載澧)가 섭정왕으로서 실권을 쥐었다. 그는 실력자인 원세개를 은퇴시키고 장건 등의 조기 국회개설 청원을 냉담히 거절하였다. 이러한 일들은 청조의 입헌이라는 것이 독재의 영속을 기하기 위한 연극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내주어 입헌파의 청조에 대한 절망은 한층 깊어졌다.청왕조가 '신정'과 입헌제의 준비에 착수하고 있던 시기에 각지에서는 창미( 米 ; 쌀소동)의 풍조가 빈발하고 있었다. 1907년부터 1910년의 3년 사이 장강(長江)하류 유역의 창미사건은 80∼90건에 달했다고 한다. 1910년의 장사창미(長沙 米)사건은 주목되는데, 그 쌀 부족의 원인은 지주·상인·외국인사인에 의한 살의 매점(買占)이었다. 이것이 민중이 처해 있던 비참한 상황이며 이 때문에 행동으로 일어서게 된 것이다. 이것은 호남성만의 문제가 아니라 신해혁명의 배경이 된 사회적 조건이었다.중국 내에서는 1905년 전후부터 이권회수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어 19세었다.
이태준의 농토 를 읽고1. 작가 이태준에 대하여...농토 의 작가는 이태준(李泰俊)으로 호는 상허(尙虛)이다. 이태준은 1904년 11월 4일 강원도 철원 구장면 산명리에서 태어났다. 8세에 고아가 되어 친척집에서 자랐고, 휘문고보, 동경상지대학에 입학했으나 모두 퇴학당하였다. 동경에 있을 당시 오몽녀 를 조선문단에 발표하여 입선하였다. 1933년 정지용, 이효석, 김기림, 조용만 등과 구인회(九人會)를 만들어 당시 좌익 계열의 카프문인들이 문학의 실천성을 주장하는 행태에 대응해 예술성을 중시하는 문학 분위기를 형성하였다. 1942년 이광수에 이어 제2회 조선 예술상을 수상했지만 1945년 해방이후 임화 김남천 등과 함께 조선문학 건설 본부라는 명칭의 좌익 문학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한다. 1946년 2월 민주주의 민족 전선 결성대회 대의원, 의장단의 일원으로 홍명희와 함께 38선을 넘어 북으로 갔다. 이후 소련기행, 농토, 고향길 등을 저술하며 그의 작품세계는 월북 후 현저하게 바뀐다.이태준의 소설에는 일제하 식민 자본주의에 의해 전통적인 공동체 삶이 형태를 빼앗기고 그 속에서 제대로 적을하지 못하는 불행한 사람들이 주된 인물로 등장한다. 그 인물들은 과거의 삶에 얽매여 변화된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인물이며 또한 그들이 살아가는 현실이 식민지 자본주의의 특수성으로 인한 부정적 현실이기에 일제와 일제에 의한 근대화에 반대하는 민족의식이 짙게 깔려 있다.2. 작품내용이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일제치하의 중엽부터 해방 직후로 되어 있고, 공간적 배경은 개성과 개성근처의 가재울이라는 농촌이다. 소설은 윤 판서네의 하인 억쇠 아버지의 처 팔월이가 죽어가고 있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팔월이가 죽어가고 잇는 그 순간에 주인 며느리의 출산은 시작되고 있었다. 억쇠와 억쇠아비는 주인 며느리의 출산에 혹시 부정이라도 탈까 울 수도 없는 처지다. 억쇠 어머니가 죽자 그들은 곧 주인집 농토가 있는 가재울로 옮겨오게 된다. 그러나 주인집 아들의 심한 낭비벽으로 인해 토지를 전부 빚에 넘기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에 억쇠 부자는 이제 윤 판서네를 영원히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동안의 대가로 노마님으로부터 얼마간의 돈을 받아 그 돈으로 하루갈이 농토를 사려고 했으나 동네의 친일 앞잡이인 달운의 농간으로 농토 구입에 실패하고 결국 소작농이 되고 만다. 지주들의 착취는 혹독한 것이어서 소작인의 생활은 여간 고달픈 것이 아니었다. 일 년 내내 피땀 흘려 농사를 짓지만 입에 풀칠조차 하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한국인 지주(권생원)의 착취에 견디다 못해 일본인들의 동양척식 주식회사의 땅을 얻어 부쳐보았으나 일본인들의 간교한 착취는 한국인 지주보다 더한 것이었다. 이들 소작농들은 성필이의 도움으로 소작쟁이를 벌이게 된다. 그럼에도 이들은 농장 관리인 가도오의 술수로 말미암아 정해진 소작료를 모두 물게 되며 점점 절박해지는 시국의 변화와 더불어 더욱 강화되는 황국신민화는 억쇠부자를 야마다 씨로 창씨개명하도록 만든다. 결국 소작쟁이를 모의한 혐의로 억쇠는 이십구 일의 구류를 살게 되고 이후 징병을 모면코자 도꾸지네 농업요원으로 들어가 노비와 다름없는 생활을 하게 된다. 그 사이 억쇠 아비는 보국대에 끌려가 급사를 하게 되고 이에 억쇠는 이를 갈자 , 미워하자! 며 민족의식 및 계급의식을 고취하게 된다. 한편 새로운 주인 도꾸지가 분이 오빠인 노마의 징용을 빌미로하여 억쇠가 마음에 두고 있는 분이를 겁탈하려고 하자 억쇠는 도꾸지를 늘씬하게 패주고 가재울을 떠나 버린다. 억쇠는 해방과 더불어 가재울로 돌아와 분이와 가정을 꾸미고, 곧 이북지역의 토지개혁이 시작되어 지주들의 땅이 몰수되고 모든 지주들의 땅이 몰수되고 모든 지주들은 그가 살던 곳에서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축출된다. 그 틈을 타서 억쇠는 오래전부터 탐을 내던 하루갈이 옥답을 차지하고 인민위원회의 승인도 받게 된다. 한편 성필이의 도움으로 안목을 넓히고 마침내는 마을의 농촌위원으로 선임되어 진다.3. 작품분석농토 는 빈한한 농민인 억쇠의 삶에 대한 연대기적 기록이다. 해방전후 약 10년간의 기간을 황해도의 가재울이라는 농촌을 배경으로 그리고 있으며 전체가 17장으로 되어있다. 주인공 억쇠의 의식이 눈뜨기 시작하는 10대 중반에서부터 주체적 존재로 자리잡게 된는 20대 중반까지의 개인적 삶을 토대로 일제 말기와 해방직후에 이르는 시대사적 전환기의 실상을 동시에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이 글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배열은 억쇠를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펼쳐져 있다. 지나치게 작위적이라 할 만큼 이들 인물들의 행동은 억쇠를 부각시키는데 기능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두드러지게 부각될 수 있는 인물은 몰락 잔반의 아들인 사회주의자 최성필이다. 주체적 존재로 자리 잡게 되는 억쇠의 의식각성의 과정과 또한 이를 통해 제시되는 사회주의적 세계관에 입각한 역사적 전망은 바로 이같은 매개인물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들은 억쇠를 지도하여 그로 하여금 올바른 세계관으로 인도하고 있다. 낯선 사회주의자도 동양 척식 주식회사와의 소작쟁의 부분에서 성필과 같이 등장하여 농민들 싸움의 필요성을 역설하던 인물이고 실행위원들은 8.15이후 가재울 마을의 농민들에게 토지 개혁의 제반 법령과 그 역사적 의의를 설명하는 역할을 가지 인물들이다. 그리고 최성필은 억쇠가 긍정적 주인공으로 성장할 수 있게끔 영향을 준 인물이다. 그러나 최성필은 낯선 사회주의자, 실행위원들과는 달리 억쇠의 의식각성에 지속적으로 가까이서 영향을 끼쳤으므로 매개인물인 동시에 완결인물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시간이 흐름에 따라 토지를 매개로 하는 현실의 구조적 모순을 스스로가 몸소 체험하게되는 억쇠는 힘은 힘대로 들고 탐탁히 먹을 것도 떨어지지 않는 농사, 그나마 지주는 공치사를 하면 사람을 종부리 듯 하려 드니 이렇게 사는 것도 남의 신세란 말인가. 라면서 계급모순에 대한 자각을 서서히 이루어 나가고자 한다. 그리고 억쇠의 이러한 의지는 최성필 및 낯선 사람 으로 불리워지는 사회주의자의 적극적 도움에 힘입어 소작쟁의를 일으키는 데서 분명히 행동화된다. 낯선 사회주의자와의 만남을 통해 억쇠는, 역사의 진보를 믿게 되며 새로운 의식 양태, 즉 억쇠 어미 팔월이의 죽음에서 보여 주었던 반응과는 일정한 차이를 드러낸다. 억쇠의 점진적인 의식의 긴밀한 확산은 해방이후, 이 작품에서의 13장 이후에야 보다 더 구체성을 확보하게 되는데, 여기서 작가가 관심하는 바는 이전까지에서 보여 주었던 계급불평 등의 구조적 모순인 지배 예속관계가 현실변증법적으로 역전되는 양상에 놓이게 되며 또한 이를 통해 역사적 전망을 사회주의 세계관 속에서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억쇠는 현실 모순을 구적 불평등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인식하게 되며, 또한 나름대로 논리화된 토대 위에서 의식적으로 행동하는 인물로서 서서히 깨어난다. 변혁을 통한 새로운 사회의 도래를 위해서 계급 불평등 구조를 비롯한 제 현실모순을 타개해 나가기 위해서는 사회적 이익이 개인의 이익에 우선하여야 함을 자각하는 억쇠는, 이로써 자기계급의 한계를 극복하면서 역사적 전망을 제시하는 인물로 자리잡게 된다.이 작품은 전체가 17개의 짧은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작품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일제시대의 부분이 무려 10년에 걸친 것인 반면에, 나머지 3분의 1을 차지하는 해방직후 부분이 불과 반 년에 걸친 것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일제 시대의 부분은 해방 이후 부분의 전사에 해당하고 이작품의 핵심은 바로 해방 직후 농촌의 토지개혁과 그 속에서의 억쇠의 운명임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해방이후 북한의 농촌 현실과 토지개혁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이 작품에서 우리가 집중적으로 검토해야 할 부분은 농민의 이중성에 대한 문제이다. 농민의 이중성이란 농민의 노동자 계급의 동맹자로서의 성격과 소유자로서의 성격이라는 두 측면을 모두 포괄하고 있다. 이태준의 농토 는 이 농민의 이중성을 억쇠의 성격 발전과정 속에서 치밀하게 그리고 있다. 농토 에서 농민의 이중성을 가장 잘 형상화한 부분은 14장의 삼칠타작에 대한 억쇠의 태도 부분과 15장의 농민들의 토지매매 부분이다. 가재울에 삼칠타작 이란 말이 들어오자 억쇠는 누가 7할을 먹게 되는가에 대해 궁금하게 생각되어 성필이에게 달려가 물어 보게 된다. 성필은 억쇠에게 일방적으로 설명해 주는 대신 문답식으로 풀어 가면서 억쇠가 스스로 문제의 본질을 깨닫게 하고 있다.
昭和 軍國主義의 興亡{Ⅰ.경제의 대혼란Ⅱ.중국 문제 Ⅲ. 태평양전쟁1. 만주사변 1. 제 2차세계대전과 일본2. 군국주의의 등장 2. 태평양전쟁3. 중일전쟁 3. 일본의 패전4. 문화·사상의 통제 맺음말Ⅰ. 경제의 대혼란1926년(다이쇼 15년) 12월 25일 다이쇼 천황이 죽자 섭정으로 있던 히로히토가 천황으로 즉위하고 연호를 쇼와(昭和)로 개원하였다.이 무렵 일본경제는 제1차 세계대전 후 전후 공황·지진공황에 휘말려 만성적이 불황에 빠져있었다. 경제는 침체상태에 빠져 상품은 팔리지 않고 물가는 계속 하락하고 있었고, 이런 현상이 봉급생활자에게는 좋았으나 농민과 상인들의 생활은 어려워졌고 영세상공업자 가운데는 파산하는 자가 속출하고 있었다.이러한 일본경제의 불황과 모순은 금융공황이라는 미증유의 사태에 직면하게 되었다. 일부의 은행의 부실경영이 밝혀져 이것이 계기가 되어 각지에 중소은행이 신용을 잃고 휴업하는 은행이 속출하였다. 헌정회의 와카쓰키 레이지로(若槻 次郞)내각은 파산한 대상사인 스즈키상점(鈴木商店)에 3억 5천만 엔이라는 거액의 부실대출을 하고 있었던 대만은행{) 대만은행은 1897년에 대만의 개발과 그 자본주의 발전을 위해 설립된 국책은행이다. 본래 이 은행은 일본의 남방진출을 위한 금융적 지주였지만, 제1차 세계대전후 내지의 금융시장에도 스즈키상점에 융자도 시작했던 것이다.을 구제하기 위해 긴급칙령으로 일본은행이 비상대출을 하도록 했다. 그러나 추밀원이 이 칙령안을 부결시켰기 때문에 내각이 이를 책임지고 총사직에 직면하게 되었다. 고객의 인출요소가 재차 확대되며 대만은행을 비롯한 대은행과 중소은행의 휴업, 도산하게 되었고 경제계는 대혼란에 빠졌다.이어서 성립한 입헌정우회의 다나카기이치(田中義一) 내각은 지불유예의 칙령을 발하고 일본은행의 비상대출을 행하는 등 긴급조치를 취하여 겨우 금융공황은 수습되었다. 이 혼란을 계기로 중소은행은 통폐합되어 재벌의 대은행에 대한 지배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미쓰이(三井), 미쓰비시(三菱), 스미토모(住友), 야스조정이 강행되어 300만면으로 추정되는 실업자가 발생하였다. 이로 인하여 노동쟁의와 소작쟁의가 빈발하게 되었다.Ⅱ. 중국 문제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 내각은 1927년(昭和 2), 제네바 군축회의에 참가하고 그 이듬해 부전조약(不戰條約)에 조인하는 등 종래의 협조회교의 방침을 계승하고 있었다. 일본의 경제를 부흥시키기 위해서는 중국시장개척이 필요하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또 일본의 자본을 중국에 투입하여 산업을 진흥시켜야 한다는 생각도 가지고 있었다.중국에서는 손문의 사후 장개석(藏介石)이 그 뒤를 이어 1927년에 남경(南京)에 반공의 정부를 세웠으며 이듬해 북방군벌의 타도를 위해 이른바 북벌을 개시하고 그 해의 말까지 중국 전지역을 거의 통일하였다. 그 결과 장개석은 1921년이래 만주에서 일본의 지지를 받아왔던 장작림(張作霖)과 충돌하게 되었다.국민정부군에 의한 북벌이 시작되자 일본은 산동성에 있는 일본인거류민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2천 명의 병력을 파견하고 1928년 4월 북벌재개와 함께 다시 4천 명의 군대를 증파하였다. 다나카내각은 장개석이 승리한다면 만리장성 북방에 있는 일본 진지 전체에 도전하게 될 우려하였다. 관동군의 일부 장교는 만주의 군벌 장작림이 반일적 태도를 취하려고 했기 때문에 그가 타고 있던 열차를 봉천(奉天)교외에서 폭파하였다. 이 사건은 일 본의 만주 개입을 유발하지는 못하였고, 다나카 내각은 그 진상을 은폐하려고 했으나 의회에서 만주모종대사건으로서 그 책임을 추궁당하여 결국 내각은 총사직하였다.1930년에는 런던군축회의가 영국·미국·일본 3국간에 보조함의 보유톤수를 협정하는 조약이 성립하였는데 이 조약에 군부·추밀원 등이 강하게 반대하였지만, 하마구치 오사치(浜口雄幸) 내각은 국제협조의 방침을 관철시키려 했다.1. 만주사변일본의 심각한 경제공황은 사회불안을 야기시켰다. 이러한 정세속에서 재벌의 독점적 지배체제는 강화되었고 정당도 재벌과 유착관계를 맺어 국민생활은 도외시한 채 당리당략만을 일삼았기 때문에 국민의 불심감은 높아갔 지위를 불안하게 느끼게 되었다. 1931년 9월 18일 봉천 북쪽 유조구(柳條溝)에서 폭파사건이 발생한 것을 계기로 관동군은 즉시 군사행동을 개시하였다.(滿洲事變) 정부에서는 전쟁 불확대 방침을 취했지만 군부는 이에 따르지 않고 즉각 전 만주를 점령하였다. 일본군부는 만주에 괴뢰정권을 조직하여 독립시킬 방침을 세웠다. 이리하여 1932년 3월 청조(淸朝)의 폐제였던 부의(簿儀)를 집정으로 맞아 만주국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이어 그해 9월에는 일만의정서(日滿議定書)를 체결{) 의정서를 조인하는 날 밤에 무순탄광을 습격한 항일 게릴라부대가 통과한 평정산촌(平頂山村) 을 게릴라와 내통하고 있다고 간주하여 일본군은 전촌민 3000여명을 학살하였다(平頂山事件).하고 만주국을 승인하였다.중국의 국민정부는 만주사변 직후, 일본의 군사행동을 참략이라고 비난하고 국제연맹에 제소했기 때문에 연맹은 리튼조사단을 현지에 파견하여 조사하였다. 그 결과 조사단 본군의 철병과 만주국의 승인의 취소를 권고하는 결의안이 1933년 2월에 연맹총회에 상정되었다. 이것이 42:1로 가결되자 일본은 3월에 국제연맹을 탈퇴하고 이제까지의 협조외교를 포기하고 고립외교로 나아가게 되었다.2. 군국주의의 등장국내정치의 혁신을 부르짖는 우익단체는 군부와 손을 잡고 잇따라 정계와 재계의 요인을 암살하는 테러를 감행하였다. 1932년 10월에는 전 대장상(大藏相 : 재무장관) 이노우에 준노스케(井上之助)가 암살되고, 3월에는 미쓰이재벌의 지도자 단타쿠마(團琢磨)가 암살되었다. 이 사건은 이바라기현의 농촌청년이 일련종의 승려 출신인 이노우에 니쓰쇼(井上日召)를 두령으로하여 조직한 혈맹단(血盟團)이라는 우익집단의 소행이었다. 5월 15일에는 해군장교와 육군사관학교 생도로 이루어진 한 무리가 한낮에 이노카이 수상을 그의 관저에서 사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 후 해군대장으로 전 조선총독이었던 사이토 마코토는 1932년 5월에 군부·정당·관료의 타협에 의한 거국일치(擧國一致) 내각을 조직하였다. 여기서 정당버리고 노동조합을 파괴하여 완전한 폭력독재 체제를 구축했다. 스페인 내란문제로 더욱 가까워진 나치독일과 이탈리아는 파시스트 국가로서 서구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고 공산주의를 탄압한다는 이유로 1936년 10월 베를린-로마추축을 성립시켰고, 일본은 독일과 방공협정(防共協定)을 체결하여 독일·이탈리아·일본의 3국 추축체제가 성립하게 되었다.3. 중일전쟁파시즘의 길로 내닫기 시작한 일본은 중국대륙의 진출과 함께 1936년(昭和 11년) 8월 히로타 태각 때에는 아시아 남방에 대한 진출계획도 국책으로 채택하였다. 그리고 더욱 군비를 확충하여 전국을 전시체제로 전환하였다.중국에서의 배일·항일이 날로 고조되는 가운데 1937년(昭和 12년) 7월7일 북경 교외의 노구교(蘆溝橋)에서 중국군과 일본군 사이에 사소한 충돌이 있었다. 일본군은 이 사건을 구실로 선전포고도 없이 곧바로 만주에 주둔해 있던 병력을 동원하여 중국전토에 대하여 침략을 감행하였다. 중국에서는 1936년 서안사건(西安事件){) 장학량이 서안에서 장개석을 감금하고, 내전의 정지, 항일을 요구한 사건. 공산당의 주은래(周 恩來)의 조정으로 장개석은 석방되고 내전정지는 실현되었다.을 계기로 이듬해 9월에 국민당과 모택동이 지도하는 공산당과 제휴하여(제2차 國共合作) 항일민족통일전선을 결성해 일본의 침략에 대항하였다.일본군은 1937년 12월 수도 남경(南京)을 점령하였다. 아쓰이 이와네(松井石根) 대장이 이끄는 일본군은 2개월에 걸쳐 수많은 중국인 포로·민간인을 무차별·무목적으로 살해하였다. 남경 성내외의 시가지와 농촌 등지에서 유아에서 노인에 이르기까지 강간·살해·방화를 자행하여 희생자는 20∼30만명에 이르고, 시가지의 30∼40%가 소실되었다고 한다.{) 당시 이 사건은 세계에 크게 보도되었지만, 일본에서는 극동재판에서 비로소 알려졌다. 희생자 수는 판결에서 11만9천명, 최근의 중국측 발표는 34만명이라고 한다.중국정부는 수도를 중경(重京)으로 옮기어 항전하였으며 영국·미국 등도 무기와 군수물자를 지원했기도 강화되어 갔다. 국가총동원체제의 추진으로 통제는 더욱 엄중해지고 공산주의·사회주의에 대해 철저히 탄압하였으며 또 자유주의자에 대해서도 압박이 가해졌다. 1935년 미노베 카쓰키치(美濃達吉)의 천황기관설이 문제가 되어 그의 저서는 발매금지 처분을 받았다. 이밖에도 군부·우익의 공격을 받아 검거·대학추방 등의 탄압을 받은 학자도 적지 않았다. 더욱이 1940년에는 이 해가 일본기원(日本紀元)2600년이라고 하여 대대적인 기념축전이 개최되었고 이듬해에는 소학교를 국민학교로 개칭하는 등 학문·교육의 면에서 국가주의·충군애국주의를 강요하였다.Ⅲ. 태평양전쟁1. 제 2차 세계대전과 일본중일전쟁이 장기화되어 갈 무렵, 유럽에서는 독일의 노골적인 침략행위가 시작되었다. 1938년에 오스트리아를 병합하고 이듬해에는 폴란드까지 진출한다. 이탈리아도 1939년 알바니아를 점령하였다. 독일은 이해에 이탈리아와 군사동맹을, 소련과는 불가침조약을 맺었다. 여기에 이르러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여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독일군은 1940년 덴마크·노르웨이·벨기에·네덜란드를 침공하고, 이어 프랑스도 항복시켜 영국군을 본국으로 철퇴시켰으며 이해에 이탈리아도 독일측에 가담하게 되었다.중국과의 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극심한 물자부족에 봉착한 일본정부는 독일·이탈리아와 3국동맹을 체결한 것을 기회로 북부 인도차이나에 진격하여 중국에의 물자수송을 방지함과 동시에 남방진격을 위한 근거지를 마련코자 하였다. 그러나 이 남방진격을 감행할 경우 이 지역에 식민지를 소유하고 있는 미국·영국·네덜란드·프랑스를 모두 적국으로 만드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은 뻔한 일이었다. 중국과의 전쟁에서 지친 일본정부와 군부는 결국 1941년(昭和 16년)4월 일소(日蘇) 중립조약을 체결하고 과감히 남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진군하였다. 이에 대해 미국·영국·중국·네덜란드 등 4개국은 ABCD 라인을 결성하여 중국을 원조하는 한편, 석유 등 대일수출을 금지하고 일본에 대한 경제 봉쇄를 강화하였다. 국면을되었다.
고려청자에 대하여고대사연구회 `96 장미영1. 고려시대 도자(陶瓷)의 특징고려시대 도자(陶瓷)에는 청자·백자·흑자·도기 등 다양한 기명(器皿)들이 있으며, 이러한 고려도자 중에서 고려시대 전기간 동안 가장 많이 만들어졌고 고려시대의 특색을 가장 잘 반영하고 있는 것이 청자이다. 고려도자의 핵심은 청자이며 고려청자의 주류는 순청자와 상감청자이며 그밖에 청자들은 부수적으로 약간씩 제작되었을 뿐이다. 순청자는 10세기 후반인 광종·성종년간에 제작되기 시작하여 11세기는 숙련을 거듭하여 12세기 전반에는 비색청자(翡色靑瓷)로서 완성되어 발전해 나간다. 상감청자는 12세기 후반인 의종년간에 제작되기 시작하여 13·14세기에는 전성을 이루며 순청자에 대신하여 고려청자의 주류를 이루며 변청된어가다 조선시대 분청자(粉靑瓷)의 모체를 이루게 된다.고려청자의 특징은 비색(翡色), 상감기법, 무늬, 그리고 기형에 있다.비색은 청자의 푸른 색을 지칭하는 것으로 서긍(徐兢)의 『고려도경(高麗圖經)』에서 비색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 徐兢, 『高麗圖經』, 第32卷, 器皿 3, 陶尊條; 陶爐條 陶器色之靑者, 麗人謂之翡色… ;청자는 중국의 육조시대부터 만들어지며 송대에 와서 그 전성기를 이룩하고 고려청자는 송 청자의 영향으로 크게 발전하나 청자의 발색효과는 송 청자와는 다른 푸른색을 개발하였다. 중국에서는 도자기의 푸른색을 가리켜 비색( 色)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으나 고려인들은 독자적으로 비색(翡色)이라고 지칭함으로써 중국의 청자색과는 다르다는 긍지를 지니고 있었다. 청자는 철분이 약간 함유되고 청자는 철분이 약간 함유되고 곱게 수비(水飛)된 태토에 2∼3%의 철분이 함유된 유약을 발라 환원염(還元焰)상태에서 굽게 되면 청자가 된다. 비색청자는 상감청자의 시대가 되면 다소 비색의 아름다움을 잃고 있지만 고려자기의 가장 큰 특징은 역시 비색청자에 있다.상감기법은 12세기 중엽 인종 말년 내지 의종 초년경에 음각청자에 극히 일부에만 백토로 약간씩 상감기법이 시도되기 시작하면서 발생하였다그 절정을 이룬다.무늬는 기하적인 도안과 정서적이고 낭만적인 무늬로 나눌 수 있는데 어느것이나 고려인들의 사상이나 취향이 가장 잘 반영되어 있다. 기하적인 도안은 같은 무늬의 반복을 의미하며 이러한 종류에는 연화무늬, 모란무늬, 국화무늬, 당초무늬, 보상화무늬, 풀무늬 등이 있고 서정적인 무늬로는 운학무늬, 포류수금무늬, 송하탄금무늬, 포도동자무늬 같은 것이 있다.기형은 중국의 기형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해 고려 독자적인 형태로 발전하지는 못했으나 병의 유려한 어깨 곡선이라든지 매병의 당당하면서도 부드러운 굴곡은 중국의 병이나 매병과는 다른 고려적인 아름다운 선을 보인다.2. 청자의 발생과 변천1) 고려 초기 도자 - 성립기고려가 성립하는 10세기 전반은 동북아시아에 있어서 정치적으로 큰 변화의 시기였다. 중국대륙은 당말 오대의 변혁기를 맞이하였으며, 만주지역에서는 발해를 거쳐서 거란이, 그리고 한반도에서는 통일신라와 후백제를 대신하여 고려가 성립되는 새로운 시기였다. 고려의 새로운 지배세력은 통일신라 진골세력에 대신한 중앙의 6두품과 지방세력인 호족들로서 이들은 개경에 새로운 왕조를 이루었다. 태조 왕건을 중심으로 한 이들 새로운 지배세력은 중국에 다녀온 도당유학생, 선승(禪僧)들과 서해안지역을 통해 중국 문물에 익숙해 있던 호족들로, 당과 오대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으며 10세기 전반기의 혼란시기를 통일로 이끌었던 것이다.이 시기의 구체적인 청자 제작에 관한 문헌기록이나 유물자료로서 확인 된 것은 없다. 이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것은 통일신라 후기의 도기들을 이어받은 회청색 경질도기(灰靑色 硬質陶器)들로 울릉도 천부동고분이나 미륵사지 출토의 도기들을 닮았으며, 공통적으로 낮은 굽다리, 무문(無紋)의 경향, 반원병과 같은 새로운 기형의 등장으로 통일신라의 인화문도기들을 이어받고 있으나 점차 다른 모습으로 바뀌고 있다. 전환의 시기인 10세기 전반은 통일신라시대 질그릇의 양상이 변화를 보이면서 이어지고 있었으며, 고려청자의 제작은 아직 이루어지지 못하고 중국 문물에 익숙해 있었으며, 도당유학생·선승들 역시 중국문물을 이해하고 있었다. 광종(950∼975)과 성종(982∼997)년간을 통해 고려는 중앙집권화 정책을 추진하게 되고 이에 따라 중국의 제도, 문물이 크게 받아들여지며 새로운 정책을 추진해 가게 된다. 성종년간에는 최승로를 중용하고 당제를 받아들여 3성6부제도·전시과제도·국자감과 같은 정치·경제·교육의 제도를 확립하여 중앙집권적인 귀족국가의 틀을 마련하고 국가의 기반을 확립한 시기로 처음으로 중앙에서 지방관을 파견하게 된다. 당시 선종불교의 넓은 전파와 그에 따른 좌선(坐禪)에 필요한 차를 담는 다기(茶器)로서 청자의 필요성을 이해하게 되고 그것을 요구하게 된다. 처음에는 중국의 오월국(吳越國)으로부터 수입된 도자기로써 그들의 욕구가 충족되었지만, 차츰 새로운 지배층의 확대에 다른 수요를 감당하게 힘들게 되었다. 때마침 중국의 비색청자의 제작으로 유명한 절강성(浙江省)의 오월국과 교류하였고, 새로운 청자의 제작을 열망하는 고려의 지배층의 요구가 컷을 것이므로 중국 동남지방의 오월국으로부터 중국 도자공들의 왕래를 짐작할 수 있다. 이들로부터 고려의 도자공들은 새로운 청자 제작의 기술을 배우기 시작하여 고려청자의 제작이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이다.거란의 침입 이후 발전이 주춤하였으나 햇무리굼의 청자완들이 나타나고 11세기 후반의 청자는 문종년간을 통해 기형과 문양·유약에 있어 숙련을 거듭해가고 있었고 새로이 북송과의 문물교류에서 받아들인 중국도자의 기형과 무늬 등이 고려청자에 적용되기 시작하였다. 햇무리굽 청자는 11세기 후반까지 지속적인 발전을 거듭해, 녹색이 짙고 두꺼우며 맑은 청자유로 발전되고 그 모양은 작은 병, 주둥이 넓은 병, 호 등으로 다양해 졌다.이후청자의 제작 활동이 확산된 것이 이 시기에 보이는 가장 주목되는 점이며, 햇무리굽 청자완을 비롯해서 기형이 점차 다양해지고 음각·양각·철화 등 제작 수법도 다채로워진다. 그리고 이러한 양상은 12세기 전반까지 이어지며 그 기반속에서 고려 비색청자2세기 전반의 예종·인종년간에 이르러 완성을 보게 되며 고려의 문화는 황금기를 맞게 된다. 이들은 호문의 왕들로 관학을 진흥시키고 궁내에 청연각과 보문각 등의 학문연구기관을 설치하여 문풍이 크게 일어나고 유학이 발달하였다. 그리고 예의·격식 등 유학적인 제도를 정하고 내치에도 힘을 기울인 시기로, 《삼국사기》등이 편찬된 것도 이 때였다. 이러한 시기에 고려 청자 역시 발전을 거듭하여 비색청자로 대표되는 청자가 만들어지게 되었다.이 시기의 대표적인 청자로는 참외모양의 몸체를 지닌 청자호이다. 이는 인종 원년(1123) 송나라 사신의 수행원으로 고려의 개경에 한달 동안 머물다 본국으로 돌아가 인종2년에 저술한 서긍(徐兢)의 견문록인 《고려도경(高麗圖經)》의 다음의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도존(陶尊) 도기(陶器)의 색이 푸른 것을 고려인들은 이를 비색(翡色)이라고 한다. 근년에 들어와 제작이 공교해지고 광택이 더욱 아름다워졌다. 술병의 형태는 참외와 같은데 위에는 작은 뚜껑이 있고 연꽃 위에 오리가 엎드려 있는 모양이다. 또한 완·접시·잔·항아리·꽃병·탕잔도 잘 만들었는데 모두 그릇의 일정한 격식을 모방했으므로 생략하고 그리지 않겠으며, 술병만이 다른 그릇과 다르므로 특별히 이를 알려둔다.그리고 12세기 전반까지 널리 제작되었던 지방의 많은 요(嶢)들이 강진 사당리요와 부안 유천리요에 집중되기 시작되어, 해남·고장·서산·용인·인천 등지의 대부분의 요는 사라지고 있다. 아마도 고려의 중앙집권화 과정에서 대표적인 강진·부안의 요만을 집중적으로 키우려는 의도 때문으로 생각된다. 강진과 부앙에서 만들어진 도자들이 조운을 통해 배로 개경에 올려져 고려왕실과 관청·귀족 소용의 도자로 사용되었으며, 이들 요지들은 모두 조창이 있는 바닷가 가까이에 위치하여 도자토와 물과 나무가 무성한 곳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3) 12세기 후반부터 13세기 전반 - 절정기의종과 명종으로 이어지는 12세기 후반은 고려 귀족사회의 절정기이며, 몰락기였고 전환의 시기였다. 의종의 사치스러운 활동들과 려사에 있어서 하나의 큰 전환기였다. 문신귀족 중심에서 무신귀족 중심으로 지배세력이 바뀌면서 고려사회 전체적으로 동요를 일으킨 농민들의 난, 노비들의 난으로 이어지며 무신들의 권력쟁탈과정으로 점철되는 사회의 모습이 이루어진다.12세기 후반의 청자는 1927년 개성 만월대의 고려궁지에서 수습된 청자와편들과 1964∼65년 국립박물관에서 발굴·조사한 강진 사당리요지 출토의 다양한 청자와편들로 입증되었다. 이들 청자와편들은 靑瓷陽刻牡丹紋수막새, 靑瓷陽刻唐草紋암막새를 비롯하여 청자음각모란문이 꽉차게 시문된 청자와편들로 약간의 상감시법이 시문된 청자편과 함께 조사되었다.12세기 후반의 청자편년에 기준이 되는 자료로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주목된다.사치와 향락을 좋아했던 의종연간에 화려한 청자로서 음각·양각·투각·상형의 수법이채택되기 시작하였으며 청자수각상감칠보향로(靑瓷透刻象嵌七寶香爐) 등의 투각청자에 점이 백상감된 예가 있어 상감청자의 발생이 이 시기 전후에 시작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대체로 의종연간에는 음각·양각·투각·상형의 청자가 상감청자보다 훨씬 많이 제작되었으며, 고려청자의 창의적인 다양한 기형과 문양·비색의 유색들이 이시기에 나타나는 공통된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이 시기는 동아시아에서 몽고세력이 흥기하여 일대 변동이 일어나고 있었으며, 차츰 고려와의 관계에 불화가 감돌면서 고종 18년(1231)부터 몽고의 침입이 시작되었다. 이에 대해 최우정권은 고종19년 강화도로 도읍을 옮겨 고종46년 몽고와의 강화가 맺어질 때까지 항쟁은 계속되었다.특히 남송과의 단절로 인해 문화의 자극이 없어지고 그 때문에 고려청자 특유의 기형과 문양이 발전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12세기 후반에 이은 상감청자의 발전은 이러한 외부의 문화적인 자극이 없어지고 고려 자체내의 요청에 따른 발전의 양상으로 고려화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시기의 청자로 추정되는 부안유천리요지 고려청자편들은 12세기 후반의 청자를 포함하며 13세기 전시기에 걸치는 것으로 매우 다양한 기형과 문양을 보여주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