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교회의 투쟁이슬람이 지구상에서 매우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간 것은 종교의 역사상 가장 놀라웠던 현상 중 하나이다. 등장 이래 수 세기동안 기독교는 그 스스로를 음지에 숨기고 있어야 했으며, 이교도들에 의한 흡수와 동화, 반-이교도들의 봉건제 하에서의 칙령과 명령을 통한 원조가 시작되기 전까지 기독교는 그 자신의 교리를 세계로 펼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슬람은, 선지자의 죽음이 있은 지 채 30년도 되지 않아서 수백만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찾아내었고, 1세기가 지나기 전에 Hira의 은둔자의 목소리는 3개 대륙으로 퍼져나갔다. 아랍에 전파된 새로운 민주주의의 진출을 막기 위해 노력했던 Caesar와 Chosroes의 부대는 사막의 아들들에 의해 분쇄되어 버렸다. 이슬람의 놀라운 성공과 인간의 정신에 대한 불가사의한 효과는 전도의 의무를 고취시켜, 칼의 종교로서 이슬람은 무력에 의해 전파되고, 무력에 의해 지지되었다. 따라서, 진술에 대한 어떠한 진실의 존재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이슬람의 부흥과 관련된 환경 및 사실을 확인하는데 있어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무함마드가 메디나에 출현한 때, Aus와 Khazraj 종족은 서로 화해할 수 없는 갈등을 벌여오던 중 공허한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다. 도처에 더욱 거친 전쟁의 조짐이 있었다. Jabala의 습격 이후 메디나의 아랍인들을 인정한 유대인들은 빠르게 세력을 회복하고 공개적으로 그들의 이교도-공존자들을 언제나 등장할 수 있는 것으로 기대하고 있는 메시아의 복수로 위협하고 있었다. Koreish가 가장 우월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주변 종족들은 메디나를 향하여 배치되어 있었다. 무함마드가 메디나에 등장하였을 때, 새로운 종교를 위협하고 있던 위험요소는 명백해졌다. 죽음을 무릅쓰고 그들의 정신적 지도자(무함마드)와 그가 가져다준 빛으로 인해 빈곤과 추방에 직면한 메카의 신봉자들은 소수이며, 약한 세력이었다. 메디나에서 무함마드의 신봉자들은 많지 않았다. 신봉자들은 내부에서 분열되었으며, 이는 종부터 보호하라. 그러나 먼저 공격하지는 말아라 : 신은 난폭한 자를 증오하신다” 였다. 무슬림들에게 있어서 자기 방어는 자기 보존의 질문이 되었다. 그들은 기꺼이 살육되기를 인정하거나 그들이 공격받았을 때만 싸워야 했다. 그들은 후자를 대안으로 선택하였으며, 장기간의 투쟁 끝에 그들의 적들을 정복하고 성공하였다.유대인들의 씁쓸한 적개심, 가장 신성한 약속에 대한 반복적인 위반, 지속적인 선동과 무슬림들을 우상숭배자로 배신시키려는 빈번한 노력과 같은 유대인들의 적개행동은 심각한 응징으로 이어졌다. 이는 약하고 작은 공동체의 안전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으며, 이는 보복적 응징보다는 장애에 대한 경고적인 성격이 짙었다.우리는 어떤 사실을 전제할 권리가 없으며, 이는 때때로 지구상에 나타나 반대 환경의 영향에 굴복하여 순교자가 된 위대한 선구자들, 미 실현된 유토피아에 대한 환상을 만든 다른 사람들, 몽상가들의 존재, 광신자들의 위협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함마드는 그들의 전례를 따라야 했으며 그가 복음을 완수하기 전에 세계를 떠나야 했다. 그는 그 스스로와 무언가를 수행한다는 이름하에 현재 “이데아”라고 불렸을, 그가 지배하도록 초대되었던 모든 세계를 희생할 필요가 없었다.이슬람과 유대인과 기독교인간의 소름끼치는 전쟁들, 조금 더 나았던 Parsis와의 전쟁까지, 그들의 투쟁을 자기방어와 자기 보존의 측면에서, 그리고 그들의 존경하는 신념의 전파의 측면에서 비교해보자. 유대인의 경우, 공격성과 몰살은 종교에 의해서 신성화되었으며, 그들은 관대하지 못하다고 모독 받았다.초기 기독교의 경우, 겸손과 굴종의 교리는 나사렛의 예언자에 의해 선교되었으나, 곧 힘의 자존심 앞에 잊혀졌다. 기독교가 사회 지배적 신념이라는 공인된 세력이 되던 순간부터, 기독교는 공격적이고 박해적으로 변하였다. 각기 다른 작가들에 의해서 예수와 무함마드 사이에는 평행선이 그려졌다. 예수의 신성한 죄에 대한 감동으로 가득한 사람들은 아랍의 예언자가 그의 사람들의 재탄생을 위해 인용한 “현세적”서는 매우 따스하게 이야기되었던 자기 보존의 동등한 본능은 박해받는 무슬림들이 그들의 적들로부터 공격받을 때는 무기를 들도록 하였다.점진적으로, 온화한 친절함과 에너지에 의해 아랍의 분리된 모든 파편들은 진정한 신의 숭배 하에 모이게 되었고, 대지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지구상에서 가장 불같은 사람들의 속에서 태어나, 그래서, 지금 격하고 충동적인 본성에 의해 사막의 타오르는 태양과 같은 열정을 가지고서 무함마드는 그들에게 자기 통제와 자기 부정의 습관이라는 것을 새겨 넣게 되었으며, 이는 그들의 역사의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무함마드의 세계적 의무로의 출현이 어느 시기였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국가 또는 종족들이 서로 전쟁을 하고 있을 때, 결과는 보통 학살이었으며, 죄 없는 자들의 노예화, 그리고 가정의 수호자들을 강탈하는 것들이었다.일반적인 개념으로 올려질 만큼 포괄적인 법체계를 개발하는 데 약 13세기를 소요한 로마인들은 세계적 도덕성이나 인간성의 의무를 현실화할 수 없었다. 그들은 주변국을 정복하기 위한 하나의 목적으로만 전쟁을 수행하였으며, 그들이 성공하는 곳에서, 그들은 현지의 사람들에게 절대적으로 그들의 의지를 부과하였다. 이러한 조약의 신성성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계약은 상황에 따라 맺어지고 깨어졌다. 다른 국가의 자유는 그들에게 있어서는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니었다. 기독교의 소개는 국제적 의무를 다루고 있는 그들 스스로의 전문가의 관점에서는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지 않았다. 전쟁은 여전히 비인간적이고 파멸적이었으며, 포획자의 입장에 선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 없이 노예제를 행하였다. 조약이라는 것은 지배자의 목적의 변화에 따라 맺어지기도 하고 깨어지기도 하였다. 기독교는 국제적 윤리성을 다루지 않았으며, 따라서 그의 추종자들로 하여금 암중모색하게 만들었다.현대 사상가들은 이러한 것을 기독교 체계가 남긴 그대로의 자연스럽고 실질적인 단점으로 인정하는 대신, 이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인간 지성의 기묘한 타락이었다! 또한, 인 조건하에 있던 정복된 자들을 해방시켰다.”라고 말하였다.이슬람의 법에 의해서, 숭배의 양심과 자유의 해방은 무슬림 지배하의 모든 다른 교리의 추종자들에게 허가되고 보장되었다. 꾸란의 한 단락인 “종교에 있어서 강요가 없도록 하라”라는 구절은 이슬람에 의해 심어진 인내와 자비의 원리들을 증명하고 있다. “신이 만족했다면, 정말로 세상의 모든 이들이 함께 믿을 것이다.”, “신으로부터만 믿음이 온다고 할 때, 당신은 인간에게 믿음을 강요할 것인가?”, “당신을 져버린 자에게 충실하라; 당신의 마음에 진실만을 말하라; 당신을 해하는 모든 이들에게 선행을 베풀라” : 이러한 것들이 광신과 불관용으로 비판받은 위대한 설교자의 가르침이었다. 이것들은 완전함으로 기억될 것이며, 반대 세력의 무게에 의해 마비된 무력한 광신자 또는 철학적으로 몽상가의 것은 아닐 것이다. 이것들은 충만한 힘을 지니고, 충분히 강력하고 잘 조직된 국가의 수장의 것이며, 그의 명망 있는 칼날과 함께 그의 교리를 강요할 수 있는 자의 완전함이다.정치에서와 마찬가지로 종교에서, 개인 및 종파들은 인내를 설파하였고, 이러한 실제의 예를 그들이 무력하고 약할 때만 주장하였다. 그들이 넘고자하는 세력을 가진 자들에 맞설 충분한 힘을 획득하였을 때에는, 인내는 박해에 그 길을 양보하였다. Constantine의 Caesar의 왕좌의 승계와 함께, 기독교는 이러한 거짓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이후로부터는 유대인들의 잔인성과만 비견될 수 있는 종교적 박해의 체계가 시작되었다. Lecky는 “그 순간부터, 교회는 Constantine 밑에서 민간의 힘을 획득하였고, 강압의 원리가 유대인, 이단자, 무종교자들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인정되었다.” 그들은 잔인함으로 고통 받았으며; 그들은 기독교 교회의 자비와 인간성을 생각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서 천천히 타오르는 불에서 태워졌다. 성직자들은 박해의 성스러움에 대해 글을 썼고, 교회의 가장 위대한 성인중 한명인 “가장 온화하고 훌륭한 신앙심을 가죄는 예언자의 일생동안 벌하지 않은 채로 남겨졌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들은 이를 잊지 않았고, 무거운 형벌이 가해졌다.그리스 제국의 확장은 무슬림들로 하여금 기독교의 광대한 영역과 교전상태에 놓이게 했다. 게다가 비잔틴 통치자들의 쇠퇴하는 영주권하의 지방을 통치하고 있던 지배자들에 의한 일관성 없는 배치는 무슬림 지도자로 하여금 이러한 상황을 이들 중 누구와도 조약을 자극하는 방법으로는 끝을 낼 수 없도록 만들었다. 한 곳이 정복되어 대화가 오가기 전에 다른 곳에서 적대 행위가 발생하였고, 이는 무슬림들로 하여금 그를 벌하게 하였다. 게다가 이러한 경우가 시작되게 되자, 무슬림들은 거의 모든 기독교와 정당한 전쟁에 놓이게 되었다.기독교뿐만 아니라 무슬림들에게 있어서도 종교는 종종 고안한 지도자들에게 야망의 만족을 위한 핑계로서 갖춰져 왔다. 기독교 법학자 및 신학자와 마찬가지로 무슬림 궤변가들은 세계를 두 개의 지역으로 나누었는데 하나는 - Darul-Harb이고 다른 하나는 Dar ul-Islam으로서 이는 이슬람과 기독교의 한 쌍이었다. 그러나 무슬림 국가와 비-무슬림 국가의 관계에 기반을 둔 이 이론의 검토는 자유성에 있어 꽤 큰 차이의 정도를 보였다. 이는 최근의 것일 뿐이며, 비기독교 국가들이 “국가 간의 예의”에 들어가도록 인정되어 있는 환경이 강조된 상황 하에서이다. 무슬림 신학자들은, 반면에 교전상황과 평화의 상황을 분간하였다. Dar ul-Harb라는 표현은 무슬림들이 전쟁 중인 국가를 말한다; 반면에 평화에 놓여있는 국가는 Dar ul_Aman이다. Harbi는 Dar ul-Harb의 거주자로서, 외국인들이며, 순수하고 명료하다. 그는 명시된 허가 없이는 이슬람 국가에 들어올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일단 그가 가장 불우한 무슬림에게서라도 안정의 보장이나 aman을 받는다면, 그는 1년의 기간 동안 위해로부터 완전히 안전할 수 있다. 그 기간이 지나면, 그는 떠나야만 한다. Dar ul-Aman의 거주자는 mustamin이다. ama하였다.
칼릴 지브란(Kahlil Gibran) 소개시인이며 화가이고 '예언자'인 칼릴 지브란은 1883년 12월 6일 아름다운 삼나무 숲이 향기를 뿜는 예언자의 땅 레바논의 비샤리(Bsharri ; 베챠리)에서, 마론파(Maronite) 교회 목사의 딸인 어머니와 부유한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지브란의 아버지는 가산을 탕진하고 가정 불화가 심화되자, 그의 어머니는 남편을 남겨둔채 아이들을 데리고 1895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 보스톤의 빈민가에 정착을 했다.지브란은 1898년 8월 레바논으로 돌아와 베이루트의 Madrasat Al Hikmat(지혜의 학교)에 입학했다. 이 기간 중(1899)에 할라라는 여인과 이루지 못할 사랑을 경험한다.1902년 레바논을 떠나, 보스톤으로 돌아온 지브란은 그림을 그리며 아랍어 저술을 시작했다. 1904년 5월 그림 전시회 기간중에 Mary Elizabeth Haskell을 만나게 된다.1908년 M.E.H의 도움으로, 지브란은 미술 공부를 위해 파리로 떠났으며 그를 '20세기의 블레이크'라고 불렀다는 로댕을 만나기도 했다. 영국 작가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와 그림은 니체의 작품과 함께 그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1910년 미국으로 돌아왔다.귀국후 뉴욕으로 자리를 옮겨 그리니치 빌리지의 작업실, 즉 아랍 문인들이 '은자의 집'이라 부른 공간에서 창작에 몰두하였다.1923년, 지브란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준 [예언자]를 완성하였으며, 생애 대부분을 뉴욕에서 보냈다.젊은 시절의 지브란은 오토만 투르크의 압제와 착취에 신음하는 조국을 구하기 위해 '작은 화산'처럼 분노와 투지를 폭발시킨 '반항하는 정신'이었으며, 빈곤과 불의와 부패, 제도화된 폭력을 규탄하여 인권이 주목받지 못했던 시대에 인간의 존엄을 강조한 열렬한 인권옹호자였다.또한 이미 20세기 초에 오늘의 생태주의자들처럼 아름다운 지구의 소중함을 일깨우면서 자연을 경배하고 보호하며 자연과 교감하면서 자연으로부터 배워야 한다고 강조한 선각자였다.지브란은 1931년 4월.네번째는나의 영혼이 잘못을 행하고서도타인들도 잘못을 행하노라고스스로 합리화하였을 때입니다.다섯번째는유약함으로 몸을 사려 놓고는그것이 용기에서 나온 인내인 양 짐짓 꾸밀 때입니다.여섯번째는어떤 사람의 얼굴이 추하다고마음 속으로 경멸했을 때입니다.바로 그 얼굴이내 마음 속의 가면들 중 하나라는 것은 모르는 채.그리고 마지막으로나의 영혼이 아부의 노래를 부르고그것을 덕이라 여길 때입니다.[3] 내 안에 있는 生의 목소리는그대 안에 있는 인생의 귀에까지 미치지 못합니다.그럴지라도우리, 서로 외로워지지 않도록이야기 나누며 살아갑시다.[4] 타인의 실체는 그가 그대에게보여주는 것에 있는 게 아니라,그가 그대에게 보여줄 수 없는 부분에 있습니다.그러므로 그대여,타인을 진정 이해하고자 한다면그가 하는 말을 듣지 말고,그가 하지 않는 말에귀를 기울이십시오.[5] 내가 하는 말의 반은 무의미한 것입니다.그러나 나는 무의미하지 않은 그 나머지 반을그대에게 전하고자의미롭지 못한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6] 여인의 사소한 잘못을 용서할 줄 모르는 남자는그 여인이 갖고 있는 위대한 덕을누릴 자격이 없습니다.[7] 그대가 가진 가장 빛나는 옷은 타인의 솜씨로 지어진 것.그대가 먹는 가장 맛있는 음식은타인의 식탁에서 먹는 음식.그대가 누워 자는 가장 편안한 침대는타인의 집에 놓인 것.그러니 말씀해 보십시오.과연 그대가 그대 자신을타인으로부터 떼어 놓을 수 있는가를.[8] 그대의 친구가 어려운 상황에 있을 때그를 이해하지 못한다면,그대는 영원히 그를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9] 그대가 베풀 때, 그대의 모습은 진정 자비롭습니다.그러나, 그대가 무언가를 베풀 때면얼굴을 돌리십시오.그대의 눈에 받는 이의 부끄러워 하는 모습이비춰지지 않도록.[10] 한 번은 어떤 사람이 나의 식탁에 앉아나의 빵을 먹고 내 술을 마시고는나를 비웃으며 떠나갔습니다.훗날 그가 빵과 술을 먹으러 다시 나를 찾아 왔을 때,나는 그 사람을 쫓아버렸습니다.그러자 이젠 천사들이 나를 비웃었습니다.[11] 우리 모두는근하며바벨론의 포도주처럼 달았다네.나는 큰 소리로 외쳤네."사람들은 입술에 머무는 행복이나마음 속에 필요한 진실은 원치 않는구나.행복은 눈물의 딸이고진실은 고통의 아들이기에."그리고서 시간의 길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심겨진내 영혼의 외로운 나무 그늘에 돌아와 앉았네.3고요하여라, 나의 마음이여새벽까지 고요하여라.고요하여라하늘은 죽은 것들의 내음으로 무거워졌고네 살아있는 숨결을 들이쉬지 못한다네.고요하여라, 나의 마음이여나의 말을 들어보라.바로 어제, 나의 생각은 한 조각 배와도 같이대양의 파도에 흔들리며해변에서 해변으로 바람따라 다녔네.내 생각의 배는 텅 비어 있었고무지개 색의 물감으로 가득찬일곱 개의 유리병이 있을 뿐이었지.바다를 떠다니는 게 지루해지자, 난 말했네."내 생각의 빈 배와 함께내가 태어난 항구로 돌아갈 것이다."항해를 하면서나는 일곱 색깔로 배의 옆면을 칠하기 시작했네.지는 해처럼 황금 색으로하늘같이 푸르게진홍빛 아네모네처럼 붉게 빛났지.더불어 내 배의 돛과 키에도사람들의 눈을 끌 그림을 그렸다네.그리고서 보니, 내 생각의 배는바다와 하늘, 이 무한한 두 곳 사이를 떠도는예언자의 모습이었네.나의 배가 항구에 닿자보라, 모든 사람들이 나를 만나러 와 있구나.고함치고 즐거워하며 나를 환영하고도시 안으로 맞아들였네탬버린을 치면서 갈대피리를 불면서이 모든 것은 내 배가 그들에게매혹적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네.그러나 내 생각에 배에 올라온 이는 아무도 없었고또 내 배가 빈 채로 항구로 돌아왔음을아는 자도 없었다네.나는 혼자 중얼거렸네."나는 사람들을 현혹하고 있어.일곱 색깔 유리병으로그들의 눈과 마음 속의 눈, 모두를 속이고 있는 거야."일 년이 지나고서 다시금내 생각의 배에 올라 바다로 나갔네.동쪽 섬으로 배를 몰아서는몰약과 유황, 백단향을남쪽 섬으로 찾아가서는황금과 비취, 에머랄드와 모든 보석을복쪽 섬에서는보기드문 비단과 벨벳, 온갖 자수품을그리고 서쪽 섬으로 가서는갑옷과 창, 검을 구했다네.이렇게 내 생각의 배를지상의 값 비싸고 진귀한 것으로 가득 래하는 것이었네.문득 나는 뒤돌아서서근처의 바위에 앉아있는 세 형상을 보았네.안개에 가려 보일 듯 말 듯한 그들을.알지 못할 어떤 힘에 이끌려그들이 앉아있는 바위 곁으로 천천히 다가갔네.그곳에는 나의 환상을 휘저으며마음을 사로잡는 마력이 깃들어 있었기 때문에몇 발자국 떨어져서 그들을 바라보았네.그 순간 세 형상 중 하나가 일어나바다 깊은 곳에서 울려나오는 듯한 음성으로 말하였네."사랑 없는 삶은꽃이나 열매 없는 나무와 같다.아름다움 없는 사랑은향기 없는 꽃이나 씨 없는 열매와 같다.삶과 사랑과 아름다움, 이 세 가지는 한 몸인데바꿀 수도 나눌 수도 없는무한하고 자유로운 존재들이다."그때, 두 번째 형상이 일어나물결이 밀려오는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네."저항 없는 삶은봄 없는 계절과 같다.정의롭지 못한 저항은불모의 사막 속의 봄과 같다.삶과 저항과 정의, 이 세 가지는 한 몸인데그들과 바꿀 수도 나눌 수도 없는 존재들이다."또, 세 번째 형상이 일어나우레 같은 음성으로 말하였네."자유 없는 삶은영혼이 깃들지 않은 육체와 같다.사상 없는 자유는혼란스러운 영혼과 같다.삶과 자유와 사상, 이 세 가지는 영원한 한 몸인데끝내 사라지거나 지나가버리지 않는 존재들이다."마지막으로, 세 형상들이 일어나장엄하고 두려운 음성으로 말하였네."사랑과 사랑이 낳은 모든 것저항과 저항이 창조한 모든 것자유와 자유가 가져온 모든 것이 세 가지는 모두 신의 형상들이니???그 신은한정되 의식 세계에 살아있는 무한의 정신이다."그리고나서, 보이지 않는 날개들의 떨림과그 울림으로 가득한 침묵이 흘렀네.나는 들려오던 음성의 메아리에 귀 기울이며눈을 감았네.내가 두 눈을 떴을 때안개가 낮게 깔린 바다 뿐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네.그 바위 쪽으로 더 가까이 다가갔지만하늘 위로 떠오르는 향기로운 기작품 소개 - [눈물과 미소 (A TEAR AND A SMILE)]눈물과 미소 (A TEAR AND A SMILE)내 가슴의 슬픔을 저 많은 사람들의 기쁨과 바꾸지 않으리라. 그리고 내 몸의 구석구석에서 흐르는ow and the plains of joy to meet the breeze of death and return whence it came.To the ocean of Love and Beauty----to God.파도의 노래나와 해변은 연인들입니다.바람은 우리를 결합시키기도 하고 이별시키기도 합니다.내 은빛 물거품과 해변의 금빛 모래를 화합시키기 위하여나는 황혼 너머에서 왔습니다.나는 나의 물기로 해변의 타오르는 가슴을 차갑게 식혀 줍니다.새벽이 오면 나는 내 연인에게정열의 율법을 읽어 주고그는 나를 가슴에 끌어당깁니다.저녁에 나는 그리움의 기도를 읊조리고그는 나를 포옹합니다.나는 불평이 많고 휴식을 모르지만내 연인은 인내를 가지고 있습니다.썰물 때가 오면 나는 내 사랑을 껴안고물이 밀려오면 나는 그의 발치에 쓰러집니다.바다의 딸들이 바닷속에서 나와바위 위에 앉아별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나는 바다의 딸들의 근처에서 얼마나 춤을 추었는지요!그 아름다운 처녀들에게 그의 정열이 향하지 않도록얼마나 신경을 썼던가요.나는 한숨과 탄식으로 그를 거들어 주기도 했습니다.바위들이 춥고 적막할 때는나는 그들을 위안해 주기도 했고그들이 미소짓지 않을 때면나는 그들을 웃으면서 애무해 주었습니다!내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바닷속에서 건져그들에게 생명을 가져다 주었던가요!바닷속에서 얼마나 많은 진주들을 훔쳐아름다움의 딸들에게 가져다 주었던가요!모든 피조물들이 잠의 환영을 껴안고 있는고요한 밤이면, 나는 홀로 깨어나,노래 부르고 한숨짓기도 합니다.아, 깨어 있음은 나를 파멸시키지만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며또한 사랑의 진리는 깨어남은 것입니다.나의 생애를 바라보세요.내가 살아온 것처럼 그렇게 나는 죽을 것입니다.꽃의 노래나는 자연이 말한 하나의 낱말.그런 다음 그녀의 가슴속으로 회수되고숨겨져 버린다.금세 순간적으로 말해진다.나는 푸른 하늘에서푸른 양탄자 위로 떨어진 별.나는 자연의 딸.겨울에 옮겨져서봄에 태어나고여름에 자라나가을엔 휴식하러 눕혀진다.나는 연인들의 선물이며혼례용 왕관.죽은
레바논(Lebanon)1. 레바논 일반 개황위치 : 북위 33.°- 33.40°, 동경 33°- 36°길이 : 남북 약 213㎞ 폭 : 동서 약 55㎞기후 : 해안지방은 지중해성 기후. 대체로 겨울은 짧고 우리나라에 비해 온화하며 여름은 긴 편임. 여름에는 비가 거의 내리지 않으며 겨울철 우기는 11월 말에 시작되어 3월말까지 계속됨. 전반적으로 맑은 날씨가 많으며 베이루 트지방의 일조시간은 연평균 3,000시간. 베이루트지방의 년평균 기온은 20.7℃, 베카계곡 14.7℃년평균강우량 : 900-1,000mm민족 : 대부분 아랍족이며 기타 유럽등 혼혈계종교 : 기독교(마로나이트 카토릭, 아르메니아정교및 그리스 정교등), 회교(수니,시 아및 드루즈 무슬림등) 총17개 종파가 존재정체 : 의회공화제정부형태 : 대통령중심제 (임기 6년, 단임제)이나, 내전이후 TAIF협약에 의거 대 통령, 총리, 국회의장이 권력을 균점하는 TROIKA체제로 운영의회 : 단원제, 의원 128명(기독교 대 무슬림 동등배분), 임기 4년사법제도 : 3심제유엔 가입일 : 1945. 10. 24명목 GDP : 16,547백만불(98), 실질 GDP성장율 -1.0%(99)중앙은행 외환보유고(99.9) : 69억불 *보유금등을 포함 경우 95억불1인당 GDP(99) : 4,800불실업율(99) : 총노동인구의 20%회계년도 : 1.1∼12.31표준시간 : GMT +2 (4-9월간 하기일광절약제도 시행기간중 +3)사회제도 : 일찍부터 유럽과 접촉, 유럽적 경향이 강함.도량형 : 미터법 사용2. 레바논 소개레바논 공화국은 지중해 동부에 있는 국가이다. 이 나라는 이스라엘과 시리아로 둘러싸인 비옥한 산이 많은 나라이다. 과거 프랑스령이었으나, 17개의 종교 공동체 사이의 미묘한 균형을 기반으로 한 헌정체계를 가지고 1941년에 레바논은 독립 공화국이 되었다.-1-1948년과 1976년 사이의 팔레스타인 피난민의 대량유입으로 그러한 균형이 깨어졌으며, 내란을 불러왔다. 1992년 시리아 군대가 내놓은아인(人)이 해안지대에 거주하며 티레, 시돈, 바일 등의 많은 도시국가를 건설하였다. 그 후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로마 등의 지배를 받았고, 로마시대에는 그리스도교가 널리 퍼졌다. 그러나 7세기에 이슬람교도인 아랍인에게 정복당하자 아랍화, 이슬람화가 진행되었다. 그 뒤에는 셀주크 투르크와 십자군 쟁탈장이 되었으며, 16세기 이후에는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를 받았다. 제1차 세계대전 후, 1922년 시리아의 일부로서 프랑스의 위임통치령이 되었다가 1926년, 독립운동이 결실을 이루어 시리아에서 분리, 위임통치에서 자치권을 획득하였다.또한 프랑스 사이에 협정이 성립되었다가 완전 독립을 쟁취한 것은 1944년 1월이다. 그러나 독립 후, 정치는 친서구적(親西歐的)·보수적 그리스도교도와 아랍 민족주의 색채가 짙은 급진적 이슬람교도의 두 세력의 균형 위에 정부가 세워짐으로써 안정을 잃었다. 1957년 그리스도교도인 대통령 샤문이 미국의 아이젠하워 독트린에-2-따라 미국의 군사·경제원조를 받아들이고자 한 것이 이슬람교도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1958년 5월 샤문이 헌법을 개정, 재선을 꾀하자 대규모적인 내란이 발생하였다. 이에 샤문은 미국에 파병을 요청, 미해병대가 상륙, 샤문이 사임함으로써 내전은 끝났으나 정치적 혼란은 그대로 잠재하였다.1972년 베이루트에 본부를 설치한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는 레바논의 내전을 다시 격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당초 요르단에 있던 PLO는 국왕 폐위와 관련되었다는 이유로 많은 팔레스타인인이 학살된 ‘검은 9월’ 사건 이후 베이루트로 옮겨왔으며, 레바논 남부에 사실상 정부의 지배가 미치지 않는 세력권을 구축, ‘국가 속의 국가’로 활동하면서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였다. 이스라엘은 보복으로 레바논 영내에 전폭기까지 동원한 대규모 공격을 빈번히 감행하였고, 따라서 레바논 정부는 PLO를 탄압하게 되었으나 그 결과 다른 아랍 여러 나라, 특히 강경파인 시리아와의 관계를 악화시켰다.1970년 프랑제가 대통령에 선출된 뒤 사태는 하고 있다.4. 정치레바논은 1943년 11월 독립을 선언하고 1944년 프랑스로부터 통치권을 인수받았-3-다. 1943년 결정된 국민협약은 대통령, 총리, 국회의장, 국회의원을 각기 종파간 배분으로 규정하였다. 1926년 공포된 헌법에 의하면 행정권은 대통령, 입법권은 단원제 의회인 국민의회가 장악하도록 되어 있다.주요정당으로 그리스도교계 팔랑헤당, 국민자유당, 이슬람교계 국민블록당, 진보사회당, 레바논 공산당이 있다. 그러나 1970~80년대 지속된 내전과 전쟁 등으로 국민의회의 의원선거조차 불가능해지면서 정치공백과 생활수준 저하, 소유권의 무정부상태에 직면했다. 레바논 사태 해결을 위한 아랍위원회가 정치개혁안을 마련해 1989년 10월 레바논 의회의 정식승인을 받았다.합의개혁안은 1 국회의석을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동수배분, 2 군·정부의 그리스도교 독점개선, 3 대통령 권한축소, 내각권한 강화 등이다. 1991년 내전종식에 따라 옛 지위를 회복하려 노력하고 있다. 레바논은 그리스도교, 이슬람 양교도의 정규군 외에 각 종파 민병대와 외국군, 점령군 등 다양한 군사세력이 존재하는데, 그리스도교계 민병이 레바논 군단(LF), 남레바논군, 이슬람교계 민병은 친시아파로 친러시아의 아말과 친이란의 헤즈볼라, PSP파가 있다.외국군으로 이스라엘군, 아랍평화유지군(ADF)으로서 시리아군, 유엔군(UNIFIL)이 있다. 레바논의 외교는 중동전에 참전하지 않는 온건아랍주의를 외교정책의 기본으로 하며, 팔랑헤당은 친서방, 이슬람은 반미 친러시아, 특히 이란추종 등 외교도 다양하다.5. 경제내전으로 레바논 경제규모는 2/3가 위축되었는데 실물경제통인 하리리(HARIRI)내각의 출범으로 착실하게 재건계획 추진, 레바논 파운드(POUND)화 가치가 25%증가하고 1992년 120% 이르렀던 인플레이션이 1997년 6%로 안정되었으며, 내국인 투자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내전 이전과 마찬가지로 레바논 경제는 독과점 체제(OLIGOPOLY)를 유지하므로써 경쟁과 효과적인 투자배분20%), 재정및 무역적자의 심화, 빈부격차 (20% 최빈민층은 총개인소득의 4%만을 차지)가 큰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6. 사회레바논의 정치관계와 마찬가지로 노동, 고용 관계도 개인적인 관계가 중시되며, 노동조합활동도 약하고 조직률도 낮다. 국내 노동시장이 좁기 때문에 국외로 유출하는 노동인구가 적지 않다. 노동력은 국외유출까지 포함하여 유동성이 높으며 미숙련 노동자일수록 수평이동의 비율이 높으나, 근년에는 전문직, 기술직, 숙련 노동력의 국외유출이 활발하다. 이유는 인근 여러 나라의 경제개발에 따른 인력수요와 이 나라의 높은 교육수준, 그리고 그리스도교 문화에 익숙해져 있다는 점등을 들 수 있다. 서아시아 여러 나라는 물론, 아프리카, 남·북아메리카에까지 레바논 이민이 활약하고 있다.레바논은 아랍 여러 나라 가운데서 가장 교육이 잘 되어 있다. 또한 100년이 넘은 역사를 가지고 있는 베이루트아메리칸대학(1886년 창립), 산조제프대학(1881년 창립, 프랑스계), 레바논 국립대학(1953년 창립), 베이루트아랍대학(1960년 창립)이 있어서 카이로와 함께 아랍세계의 학술의 중심지로 아랍 여러 나라와 동남아시아·아프리카 각지에서도 학생이 모여든다.온화한 기후의 혜택을 입은 데다가 경치가 아름답고 페니키아시대의 사적(史蹟)이 풍부하여 관광지로서도 볼 만한 것이 많다. 페니키아시대의 유적으로서 베이루트 북쪽에 있는 주바일의 신전(神殿) 유적과 시돈 교외의 묘지 유적이 알려져 있다. 또 로마시대의 유적으로서는 베카 고원에 있는 발베크의 주피터 신전, 바쿠스 신전이 유명하다. 십자군 관계의 유적도 많으며, 트리폴리, 주바일, 시돈 등의 해안 일대는 성새(城塞)가 남아 있다. 그 밖에 지중해안의 여러 곳에는 피한지, 휴양지가 발달하여 있으며, 레바논산맥에는 스키장(場) 설비도 갖추어져 있다.7. 문화레바논인들의 조상인 페니키아인들이 인류 문화에 공헌한 최대의 업적은 서구 문자의 기원 이 된 알파벳을 고안해 낸 것이다. 페니키아인들은 해상 무역의 발달로 상거래를 기 많다. 당원은 7000명. 서 기장은 죠르쥬 하위.6 아말당 : 1975년 설립. 친시리아인 시아파 정당. 민병조직 아말의 정치부문 이다. 92년의 총선거에 처음으로 참가했다. 당수는 나비 베리.7 히즈볼라(신의 당) : 1982년 설립. 친이란인 시아파 정당. 민병조직 히즈볼 라의 정치부문. 아말처럼 92년의 총선거에서 처음으로 참가했다. 당수는 핫산 나스라위.8 구제자당 : 1936년 창설. 수니파 정당. 당원은 3000명. 당수는 무스타하 하 킴. 친시리아적 경향이 강하다.9 무라비톤 : 수니파 정당. 당수는 이브라힘 크라야트.사 법 : 최고재판소, 고등재판소, 지방재판소가 있으며, 그 밖에도 국정과 국가의 안전보장 문제를 취급하는 특별 2법정이 있다. 최고형은 사형이다.-6-지방조직 : 베이루트현(베이루트), 남레바논현(사이다), 산악레바논현(파브다), 북 레바논현트리폴리), 베카현(자하레)의 5개현(괄호안은 각 현의 소재 지). 현지사는 내각이 임명.9. 외교이스라엘과의 평화교섭에서 중요한 쟁점은 레바논 남부의 영토·안정보장문제이다. 다국간회의에서는 시리아와 함께 보이콧트를 계속하고 있다.시리아군의 계속 주둔에 합의 : 9월 12, 13일의 이틀동안 시리아를 방문했던 하라위 대통령은 아사드 시리아대통령과 라타키아에서 회담을 가졌다. 89년 10월, 레바논 국회가 가결했던 국민화해헌장의 내용 속에 [2년후를 목표로 철군]이라고 명기했던 시리아군의 철군에 관해서 협의하여 당분간 주둔을 계속하는 데에 합의했다. 11월, 달루 국방장관은 시리아군이 철군한다면 레바논에 대한 이스라엘의 위협 강도가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고, 이에 레바논 정부는 시리아에 철군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세웠다고 밝혔다.미국방장관 방문 : 크리스토퍼 미국방장관이 93년 2월 베이루트를 방문하여 하라위 대통령과 회담했다. 미국측은 레바논 정부군의 권위확대와 국민화해의 추진을 추구하는 것과 함께 레바논군 장교의 미국측 훈련프로그램의 재개를 약속했다.2년만의 폭탄테러 : 베이루트의 기독루트 등
팔레스타인 분쟁서 론팔레스타인 분쟁은 유태인들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성서의 2천 년 기록을 근거로 이 지역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면서 이스라엘 국가를 건립한 데서 비롯되었다. 팔레스타인 지역은 서기 135년경 이 곳에 거주하고 있던 유태인들이 로마에 의해 추방된 후 아랍인들에 통치되어 왔다. 아랍인들은 사라센제국의 건설 이후 동로마제국을 멸망시키고, 팔레스타인 지역을 장악하였으며, 예루살렘을 성도로 삼아왔다. 그 후 이 지역은 십자군 원정이 있었을 때 기독교도들에 의해 일시적으로 점령당한 기간을 제외하고는 아랍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지배되어 왔다.본 론1. 분쟁의 원인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원인과 시발점을 찾아볼 수 있다. 주전 13세기, 이스라엘 민족은 모세와 여호수아의 지도하에 이집트로부터 탈출하여 약속의 땅인 가나안(현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들어간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으로 들어간 비슷한 시기에 남부해안 지역으로 해양민족인 필리스틴 사람들이 이주하고 양 민족간에 영토 분쟁이 시작된다. 필리스틴은 영어로 Philistine이고 이 사람들이 현 팔레스타인(Palestine)이다. 따라서, 바로 이 시점이 팔레스타인 분쟁의 시발점으로 볼 수 있다.이후 주전 1020년경, 이스라엘 민족은 필리스틴을 비롯한 가나안 원주민들을 제압하고 다윗왕 영도 하에 통일왕국을 이룬다. 그러나, 이후 분열하여 주전 63년경 로마에 의해 점령당하고 주후 135년경에는 이곳에 거주하고 있던 유태인들이 로마에 의해 추방된 후 아랍인들에 통치되어 왔다. 아랍인들은 사라센제국의 건설 이후 동로마제국을 멸망시키고, 팔레스타인 지역을 장악하였으며, 예루살렘을 성도로 삼아왔다. 그 후 이 지역은 십자군 원정이 있었을 때 기독교도들에 의해 일시적으로 점령당한 기간을 제외하고는 아랍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지배되어 왔다.2. 분쟁의 발전그러나 19세기 후반 유럽에서 반유태인 운동이 전개되고 그에 대응하여 유태인들이 '조국의 건설'을 목표로 민족주의 운동을 확산시켜 나가면다비드 벤구리온을 수상으로 하는 이스라엘 국가를 수립하였다.이로써 아랍 측과 이스라엘 측의 지루한 전쟁이 잉태되었으며, 이후 네 차례의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이른바 '팔레스타인 전쟁'으로 불리는 제1차 전쟁은 이스라엘 건국 직후 이집트를 비롯한 7개 아랍국가들이 무력적 항쟁을 벌이면서 발생되었다. 이스라엘 측은 이를 독립전쟁 또는 해방전쟁으로 부르고 있다. 이 전쟁은 유엔안보리의 지속적인 중재로 1948년 11월 16일 중지되었으며, 1949년 2월 14일 이스라엘과 이집트간에 휴전협정이 체결되었고, 이스라엘과 레바논, 이스라엘과 요르단, 이스라엘과 시리아간에도 휴전협정이 성립됨으로써 종결되었다. 이라크의 경우는 이스라엘과 별도로 휴전협정을 체결하지 않았지만 다른 아랍 국가들의 휴전협정에 서명함으로써 전쟁의 종결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지역의 80%를 차지하는 전과를 성취하였고, 팔레스타인인들은 90만 명이 유랑민으로 전락하게 됨으로써 훗날 중동지역의 최대 골칫거리를 유산으로 남기게 되었다.그 후 1956년 10월 이른바 '수에즈 전쟁'으로 불리는 제2차 중동전쟁이 발생하였다. 이는 이집트의 낫세르가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함으로써 발생되었다. 이집트가 수에즈운하를 국유화시키자 영국과 프랑스가 이집트 공격에 나섰고, 이스라-3-엘도 이에 편승하여 이집트를 공격하는 데 참여하였다. 당시 이스라엘은 이집트가 찌란해협을 일방적으로 통제하였고 가자지구에서도 빈번한 무력 충돌이 발생하여 이집트에 대해 군사작전을 감행할 의도가 있었던 차였다. 이스라엘은 이 전쟁을 통해 시나이반도의 요충지를 점령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 전쟁은 미국과 구소련이 영국과 프랑스 및 이스라엘의 대이집트 군사공격을 비난하면서 군사력 철수 압력을 가하고, 그 국가들이 점령지에서 군대를 철수시키면서 중단되었다.1967년 6월 5일에는 시리아, 이집트 연합세력과 이스라엘간에 이른바 '6일 전쟁'으로 불리는 제3차 중동전쟁이 발생하였다. 시리아와 이집트는 각기 자신의태가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1994년 2월에는 유태인 정착민이 요르단강 서안 헤브론 사원에서 예배를 보고있는 신자들에게 총격을 가하여 최소한 29명이 사망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또한 1994년 4월에는 이스라엘 북부 아풀라에서 이슬람 과격파들이 차량 폭탄 테러를 자행하여 8명이 사망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측은 1994년 5월 4일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 내 예리코 지역에서 팔레스타인 자치권은 인정하되 유태인 정착민 보호를 위해 이스라엘 경찰을 주둔시킨다는 협정을 체결하였다. 그에 따라 이스라엘은 1994년 5월 13일 가자지구 내 군사기지를 팔레스타인 경찰에 이양하였다. 1994년 7월 1일에는 아라파트 의장이 가자 자치지구에서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마침내 7월 5일 아라파트 의장과 각료들이 예리코 자치지역에서 취임식을 거행하고 자치정부의 수립을 공식 선언하였다. 그 후 1995년 9월 28-5-일 양측간에 팔레스타인 자치 확대 협정이 체결되었으며, 1995년 11월 2일에는 이스라엘이 점령지 철수계획에 따라 요르단강 서안내 예닌 경찰서를 팔레스타인 측에 양도하였다.4. 참고자료● 주요 일지1947년 11월 29일 유엔총회가 팔레스타인 분할 결정(유태인 국가와 독립 아랍국 가로 분할), 대립 본격화, 양측간 충돌로 1천 7백 명 사망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건국(독립 선포), 미국과 구소련의 승인 획득, 다음날 아랍군이 이스라엘 공격, 제1차 중동전 발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영토 70%를 차지, 8만 5천여 명의 팔레스타인 주민 강제 축출1949년 2월 14일 이스라엘-이집트간 휴전협정 체결1956년 10월 29일 제2차 중동전 발발, 이스라엘이 시나이반도 점령1964년 5월 28일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공식 출범1967년 6월 5일 이스라엘, 제3차 중동전(6일 전쟁) 전격 개시, 이스라엘이 시나이반 도, 가자지구, 요르단강서안, 동예루살렘 점령후 27일 동예루살렘 합병1967년 11월 22일 유엔안보리, 이스라엘의 점령지 철군 촉구레스타인인들 에게 무차별 난사, 63명 사망, 270명 부상, 이에 PLO는 유엔안보리의 긴급 소집을 요구1994년 3월 12일 아라파트 PLO의장, 헤브론 학살 사건 이후 중단된 중동평화회담 재개에 잠정 합의1994년 3월 31일 이스라엘과 PLO, 헤브론시의 팔레스타인 자치 실현을 위한 회담 재개와 국제감시단을 허용하는 협정 체결1994년 5월 4일 라빈 이스라엘 총리와 아라파트 PLO의장, 카이로에서 이스라엘 점 령지 내 예리코/가자지구에서의 팔레스타인 자치권을 인정하는 협정에 서명1994년 5월 13일 이스라엘, 요르단강 서안의 중심지인 예리코시를 팔레스타인 경찰 에 정식 이양(27년간의 점령 통치 종식)1994년 7월 아라파트 의장,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립 공식 선언1995년 2월 2일 이스라엘, 이집트, 요르단, PLO, 카이로에서 정상회담 개최1995년 9월 이스라엘-PLO, 팔레스타인 자치 확대 협정 체결 (서안 7개 도시 포함)1995년 11월 이스라엘, 예닌경찰서 PLO에 인계; 라빈 이스라엘 총리 암살1996년 1월 20일 팔레스타인 정부 수립을 위한 총선거가 요르단강 서안과 동예루살 렘 및 가자지구에서 동시에 실시1996년 1월 21일 아라파트 PLO의장, 총선거에서 초대 대통령 당선1996년 1월 25일 페레스 이스라엘 총리, 1995년 9월 체결한 자치협정에서 약속한 대로 PLO헌장에서 이스라엘 파멸 조항부터 삭제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팔레 스타인 독립국가 조기 창설에 반대1996년 5월 이스라엘 총선에서 네타야후 승리1998년 7월 15일 베들레헴 폭동 과정에서 35명의 팔레스타인 부상1998년 7월 22일 팔레스타인, 이스라엘과의 쌍무 협상 결렬 발표, 양측은 미국에 중 재 요청1998년 9월 9일 이스라엘, 웨스트 뱅크 지역으로 190가구 이주; 러시아 유대인 이주 희망자 증가-8-1998년 9월 10일 이스라엘군, 하마스 군 지도자(Adel Awadallah) 사살; 팔세스타인 수천명 가자지구에서 항의 시위1998년 10월 23,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관할하는 영토 안에서 가톨릭 교회의 활동을 승인하고 예루살렘의 지위를 변경시키는 일방적 조치 에 반대하는 내용의 협정 체결2000년 3월 15일 이스라엘 정부, 안보장관회의에서 지난해 체결된 알 셰이흐 평화 협정에 따라 요르단강 서안의 땅 6.1%에서 철군하는 계획 승인→팔레스타인 자치 정부 수락※ 철군이 이루어질 경우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요르단강 서안 40%지역 에 대한 부분 또는 완전 통제권 확보2000년 7월 3일 팔레스타인 국가회의 대변인, UN 결의안 242조에 따른 동 예루살-10-렘 전역과 서 예루살렘 지역 70% 이양을 주장2000년 7월 27일 미국에서 개최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간의 평화협상 실패. 팔레 스타인 9월 13일 독립선포 천명2000년 7월 30일 팔레스타인 경찰, 가자지구에서 하마스 지도자 중 하나인 란티시 (Abdel Aziz Rantisi)체포2000년 8월 10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정상의 평화협상 합의에 실패. 이스라엘의 바라크 수상은 Old City 일부분의 통치권을 포함한 동 예루살렘의 일부지역 통치권 이양을 제안. 단, 유대인 제일의 성지(아랍 제 3의 성지)인 Temple Mount의 지위권은 지속할 것으로 주장. 아라파트는 동 예루살렘 주변지역 의 유대인 거주지역의 예루살렘 시 합병에는 동의하였으나 동 예루살렘 전 역의 통치권을 주장. 아라파트의 이러한 주장은 강경파를 의식한 것으로 동 예루살렘 지위권을 이양하였을 경우 예견되는 암살을 우려.2000년 8월 23일 동 예루살렘에서 세금 징수와 관련한 폭동 발생. 팔레스타인 폭동 주동자 5명이 체포됨2000년 8월 27일 이스라엘 특공대, 하마스의 최고지도자 체포작전을 수행하였으나 실패. 후에 팔레스타인 경찰이 하마스 지도자 하누드(Abu Hanoud) 체포2000년 9월 17일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에서 이스라엘군을 상대로 한 투석 데모2000년 9월 27일 미주과학자협회에서 촬영한 위성 사진을 판독할 결과 이스라엘은 200기의 핵폭탄에 자 살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