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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원 장승업(취화선) 평가A+최고예요
    목 차오원 장승업(吾園 張承業)그의 일대기와 성품그의 작품들 1. 산수화(山水畵)2. 인물화(人物畵)3. 화조영모화(花鳥翎毛畵)4. 기명절지화(器皿折枝畵)마치며...오원 장승업...장승업(1843-1897)은 조선시대 말기 한국 회화를 꽃피운 최대의 거장이다. 그의 자는 경유(景猶), 호는 오원(吾園) 또는 취명거사(醉瞑居士) 등이다. 그의 생애와 성품에 관해서는 장지연(張志淵)의 《일사유사》에 비교적 자세히 적혀 있다. 그는 일찍 부모를 여의고 몹시 가난하고 의탁할 곳이 없어서 이응헌이라는 사람의 집에서 살았다. 글은 배우지 못했으나 그 집 아이들의 글 읽는 것을 옆에서 듣고 글을 이해했다. 또 그 집에 소장되어 있는 중국 원,명대의 유명한 회화 작품들을 접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신이 통한 듯 그림을 능숙하게 그려 이름을 날렸다. 그 후 이름이 높아지면서 왕실의 초빙을 받아 궁중의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그는 성품이 호탕하고 어느 것에도 얽매이기 싫어하는 성격으로, 술을 매우 좋아하여, 몹시 취하여야 좋은 그림이 나왔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기질은 작품 곳곳에서 엿보인다. 그는 산수(山水), 인물(人物), 영모(翎毛), 기명절지, 사군자 등 여러 분야의 소재를 폭넓게 다루었다. 화풍은 그의 성격만큼이나 호방하고 활달하여 격조 면에서보다는 기량 면에서 뛰어나다는 평을 듣는다.이 정도가 보통 우리가 흔히 구할 수 있는 장승업에 관한 대략의 내용이다. 그러나 리포트를 작성하기 위해 자료를 모으는 과정에서 장승업이란 인물의 작품관이나 그가 살아온 파란만장한 인생에 대해서 더 많은 숨겨진 사실들을 알 수 있었다.그의 일대기와 성품조선 후기의 천재적인 작가로 추앙받는 장승업은 호방한 필묵법과 정교한 묘사력으로 19세기말 난세의 조선화단을 풍성하게 살찌운 주인공이다. 그러나 정작 그의 일생은 그리 화려하지도 편안하지도 못 하였다.최근 개봉된 취화선이라는 장승업에 관한 영화에서는 그의 유년시절에 대해서청계천 거지소굴 근처에서 매맞고 있던 소년을 어린시절 평생의 스승 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인물인 것이다. 이런 사정을 장지연의 『일사유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장승업은) 일찍 부모를 잃고 집도 무척 가난하여 의지할 곳조차 없었다. 총각으로 굴러다니다가 서울에 와서, 수표교(水標橋)에 있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 벼슬을 지낸 이응헌의 집에 붙어살고 있었다. 장승업은 어릴 때 글을 못 배웠으므로 글씨(文字)에는 캄캄하였다. 그러나 천성이 총명하여 주인집의 글 읽는 아이들을 따라서 옆에서 듣고 거의 이해하게 되었다.이응헌의 집에는 중국 원(元), 명(明) 이래의 이름난 사람들의 그림과 글씨를 많이 수장하고 있어, 그림을 연습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보는 일이 자주 있었다. 이럴 때마다 장승업도 함께 매번 유심히 바라보고는 하다가 하루는 마치 전생에 화가였던 듯이 문득 깨달음이 있어, 신(神)이 모이고 뜻이 통하였다. 평생에 붓 자루도 쥘 줄 몰랐는데, 하루는 문득 붓을 잡고서 손이 내키는 대로 붓을 휘두르고 먹물을 뿌려서 대나무(竹), 매화(梅), 난초(蘭), 바위(石), 산수, 영모 등을 그려보니 다 자연스레 하늘이 이루어 놓은 듯 하여 신운(神韻)이 떠돌았다. 이응헌이 보고 깜짝 놀래며 "이 그림을 누가 그린 거냐"고 하니 장승업은 사실대로 말하였다. 이응헌은 "신이 도우는 일이다"고 하며, 종이, 붓, 먹 등을 장만해 주고 그림에 전념하도록 하였다. 글부터 화명(畵名)이 세상에 날려 사방에서 그림을 청하는 이가 줄을 이었고, 수레와 말이 골목을 메웠다.이 글을 통해 고아 장승업이 이응헌 집안의 그림들을 통해 회화에 대한 숨은 재능을 발굴하게 되었고, 또 당시 통용되던 한문(漢文)에 대해사도 초보적인 지식을 가질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한편 고아 장승업이 한양으로 흘러 들어와 유명한 화가가 되기까지 큰 도움을 주었다고 전하는 인물로, 위에서 살펴본 이응헌 이외에 한성판윤을 지낸 변원규(卞元圭, 1837∼1894 이후)가 있다. 김용준의 『근원수필』에 의하면 장승업은 초년에 한성판윤 변원규의 집에서 고용 두고 그 그림을 끝내도록 분부해 주시기를 간청하옵니다"하니 고종이 허락하였다. 민영환 공은 바로 사람을 시켜 이런 뜻을 장승업에게 설명해주고, 자기 집으로 데려다가 의관을 벗겨 감추고 별실(別室) 안에 처소를 정해주었다. 그리고 하인에게 빈틈없이 감시하는 동시에 매일 술대접을 잘 하되 다만 너무 많이 취하지 않도록 하였다. 민영환 공이 이처럼 대우해주니 장승업도 처음에는 감사하는 마음이 들어 차차 정신을 차리고 조용히 앉아 그림에 전념할 듯 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되어 민영환 공이 입궐하고 감시하는 하인이 잠깐 자리를 비우자 장승업은 다시 다른 사람의 모자와 상복(喪服)을 바꿔 입고 술집으로 달아나 버렸다. 민영환 공은 여러 차례 사람을 시켜 장승업을 찾아 잡아 왔으나 끝내 그 일을 마치지 못하였다.위의 일화는 장승업의 진정한 예술적 기질, 즉 일체의 세속적인 가치와 법도는 그에게 있어서 하찮은 것이었고, 오직 예술과 창작의 영감을 북돋아주는 술만이 전부였다. 그런 진정한 예술혼이 있었기에 그의 파격적인 행동에도 민영환 같은 분의 지우(知友)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위의 궁중에서의 일화는 대개 40세 경의 일이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민영환이 고종을 가까이 모신 시기는 대략 그가 당상관으로 승진하여 동부승지가 된 1881년 이후로 생각되기 때문이다.장승업은 40대에 이르러 가장 왕성한 창작력을 발휘하는 동시에 그림에도 원숙한 경지에 도달한 듯 하다. 이점은 현재 전하는 기년작(紀年作)들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리고 김용준의 『근원수필』에 의하면 장승업은 40세가 넘었을 때 오경연(吳慶淵)의 집을 드나들기 시작하여 중국 그림을 많이 보게 되고, 이것이 새로 기명절지도를 그리게 된 동기가 되었다 한다. 오경연은 조선말기의 유명한 정치가이자 서화가였던 오경석(吳慶錫)의 네 번째 동생으로서, 위창 오세창(葦滄 吳世昌)의 숙부이기도 하다. 오경연은 형과 마찬가지로 서화를 좋아했으며 고람 전기(古藍 田琦)에게 산수화를 배우기도 했다고 한다. 오경연은 중국을 술집에서 "돈이 다 떨어졌다"고 하면, "나에게 술대접이나 할 따름이지, 돈은 물어서 무엇 하느냐"고 하였다.……… 성품이 또 여색(女色)을 좋아하여 노상 그림 그릴 때에는 반드시 미인을 옆에 두고, 술을 따르게 해야 득의작(得意作)이 나왔다고 한다.장승업의 기행(奇行)은 어떤 행동 그 자체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예술을 향한 순수한 열정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세속적인 권위와 명성, 그리고 금전과 행복 따위를 포기했을 때 비로소 진정한 예술의 경지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술을 좋아한 것은 술을 통해 현세를 잊고 예술적 영감의 세계로 비상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뛰어난 예술가와 술과의 관계는 장승업 이외에도 역사상 많은 예를 찾아볼 수 있다.장승업의 생애는 술과 예술, 그리고 방랑으로 일관되었다고 할 수 있다. 임금의 명을 받드는 궁중 화사(畵師)로서의 명성도, 그림의 대가로 받은 금전도, 가정생활도 모두 그에게는 구속일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술집과 그림을 부탁하는 사람들의 사랑방을 전전하며 생활하였다. 당시에 장승업의 그림을 구한 사람들은 위로는 왕과 고위 대신들로부터 아래로는 중인, 장사치, 부호 등 아주 많았다. 그러나 장승업의 그림을 구하려면 권위나 금전보다도 좋은 술과 인격적인 대우가 필요했다. 장승업은 아름다운 여인이 따라주는 좋은 술을 실컷 마시고는 취흥이 도도한 가운데 기운 생동하는 명화들을 그려냈다.오직 술과 예술, 그리고 방랑으로 일관했던 장승업은 1897년 55세로 세상을 떠났다고 전한다. 그러나 장승업이 어디에서 어떻게 죽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래서 김용준은 장승업은 죽었다기보다는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하였고, 정규는 "어느 마을 논두렁을 베고 죽었다"고 하였고, 또 어떤 이는 심지어 신선이 되었다고 까지 하였다. 어찌되었든 간에 장승업의 죽음은 그가 일생을 세속적인 가치를 거부하고 오직 순수한 예술을 위해 살았듯이 죽음도 신비하게 맞은 듯 하다. 이와 관련하여 김용준은 『근원수필』에서 "오원(吾園)이 평사시에 말하기를 사 속에는 약간 쓸쓸한 기분도 포함되어 있지만, 가(假)없는 자연의 장관을 즐기기 위해서는 오히려 혼자일 필요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멀리 보이는 산들의 모습을 보자. 산들은 둥글둥글 한 모습으로 길게 연결되었고 또 중첩되어 있다. 산의 등성이들은 가늘고 다소 물기 없는 마른 붓질로 부드럽고 길게 표현하여 가을 기분을 주고 있다. 그리고 산의 전체적 모습은 마치 움찔움찔 춤을 추고 있는 듯 하다. 또 조각배 가까이 강변에 있는 바위들도 마치 두꺼비가 움츠리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무언가 내적인 생명력이 숨겨져 있는 듯 하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이 산수화는 조용한 가운데 내부적으로 활력이 가득 차 있으며, 차분하게 관찰하면 생동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2. 인물화(人物畵)는 장승업이 세밀한 필선과 화려한 채색을 한 인물화의 대표적인 명작들이다. 두 작품의 구도는 약간씩 다르나 모두 같은 소재를 표현하였다. 옛날 세 신선이 서로 나이를 자랑하였는데, 한 신선이 말하기를 "바다가 변하여 뽕나무밭이 될 때마다 나는 산(算)가지를 하나씩 놓았는데, 지금 꼭 열 개를 채웠다"고 하였다고 한다. 작품에서는 이야기에서처럼 신선이 산다는 바다 속의 봉래산 같은 산 속에 세 노인이 마주보고 있다. 그 옆에는 파도가 일렁이며 흰 구름이 피어나고 있다. 인물의 모습은 장승업의 다른 인물화에서도 자주 보았던 것이다. 즉 광대뼈가 튀어 나왔고 턱이 넓고 이마가 벗겨진 모습이다. 또 주변의 바위나 산, 나무, 파도의 묘사는 세밀하기 그지없는 필선으로 이루어졌으며, 다른 작품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진한 채색도 하였다.장승업의 인물화에서 특히 주목되는 점은 백묘법(白描法)이다. 백묘법은 채색을 사용하지 않고 필선만으로 그리는 방법으로서, 중국의 당대(唐代)에 화성(畵聖)으로 불렸던 오도자(吳道子)와 북송의 이공린(李公麟)이 잘 사용했던 방법이다. 백묘법은 필선만 사용하기 때문에 먹이나 채색으로 잘못 그어진 선을 감출 수 없으므로 아주 뛰어난 기교를 필요로 한다. 또한 필선만으로 인물많다.
    예체능| 2002.12.17| 13페이지| 1,000원| 조회(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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