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의 창제에 대하여Ⅰ. 들어가며한글은 우리가 과거를 알게 해주는 중요한 통로를 제공해 준다. 이것은 문학을 공부하는 우리에게 여간 고마운 것이 아닐 수 없다. 나는 그렇게 고마운 훈민정음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그저 우리 나라의 국어라는 것 밖에는 별로 아는 것이 없어 스스로 내 자신을 반성하며 우리의 한글 즉, 훈민정음에 대해서 창제된 것부터 알아야 겠기에 여기 저기에서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한글은 다른 문자들과 다른 점이 많은 아주 독특한 문자이다. 여기서 한글의 어떤 점이 독특하고, 그런 특성들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에 대해 다시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그에 관한 연구와 해설이 수없이 이루어져 왔고, 그 결과로 지금은 한글의 과학성과 독창성이 전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본 과제에서는 먼저 한글을 창제하게된 동기와 배경을 샆펴 보고 그 창제원리를 설명하고 그 시대의 언어정책도 창제 과정에서 중요한 점으로 생각되어 간단히 언급하고자 한다.Ⅱ. 한글의 창제1. 한글 창제의 동기이 세상에는 약 400개의 문자가 있다. 따라서 약 3,000개의 언어 가운데 75퍼센트가 문자가 없는 셈이다. 우리는 이런 귀한 고유의 문자를 가지고 있다. 그것도 차용한 것이 아닌, 독창적으로 만든 문자다. 이는 세종대왕께서 친히 창제하셔 1446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훈민정음”을 통해 반포된 것이다.한글이 창제되기 전에 우리는 한자를 빌려 우리말을 적는 문자생활을 하였다. 향찰(鄕札)ㆍ이두ㆍ구결이 그것이다. 향찰은 향가를 적던 표기 수단이고, 이두는 주로 공용문서에 쓰인 것이며, 구결은 주로 한문에 조사(助詞)로 쓰인 것이다. 그런데 한자를 빌려 우리말을 적는다는 것은 매우 어렵고 불편한 일이었다. 이에 똑똑한 우리 민족은 한자를 배워 직접 한문을 쓰는 문자생활을 택하게 되었다. 이는 오늘날도 음훈법을 계속 사용하고 있는 일본과 다른 점이다. 이렇게 직접 한문을 쓰게 되고 보니 우리는 말과 글이 일치하지 않는, 언문불일치의 불편한 타나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다.첫째, 나라의 체면상 문자가 있어야 하겠다.둘째, 어리석은 백성으로 하여금 문자생활을 하게 해야 하겠다.셋째, 쉽게 배워 일용에 편하게 해야 하겠다.이렇게 훈민정음은 민족(자주)정신, 애민정신, 실용정신에 바탕을 두고 창제되었다. 요(遼)의 거란문자, 금(金)의 여진문자, 몽고의 파스파문자의 제정도 민족의식을 저변에 깔고 있는 것이긴 하나, 애민정신, 실용정신까지 반영된 것은 못 된다. 훈민정음은 이렇게 고상하고 분명한 창제의 동기를 지닌 문자다.2. 한글 창제의 배경한글 창제의 두드러진 동기의 하나는 민족 문자를 만들어야겠다는 민족적 자주정신이다. 이는 한자문화권에서 벗어나 문화적으로 독립을 해야겠다는 자주정신이 발로된 것이다. 한자문화권에 속해 있던 몇몇 민족은 이미 이 문화권에서 벗어나고자 민족문자를 만든 바 있다. 요나라를 세운 거란은 한자에 대항하여 920년 대소(大小) 거란문자를 만들었고, 금나라를 세운 여진은 1119년 대소 여진문자를 만들었다. 그리고 원나라를 세운 몽고는 1269년 파스파문자를 제정ㆍ반포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성공하지 못했다. 한글 창제도 이러한 일련의 탈 한문화(脫漢文化)의 한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이다.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의 정음창제 반대상소는 이 탈 한문화에 반기를 든 것이다. 최만리 등은 세종 26년 언문을 제작한 것이 지극히 신묘하여 만물을 창조하고, 지혜를 운전함이 지극히 뛰어나나, 좁은 소견에 의심되는 것이 있다 하며 6개조를 들어 장문의 언문 반대상소를 올렸다. 그 6개조는 다음과 같다.첫째, 중국과 동문동궤(同文同軌)의 때를 당하여 언문을 창제함으로 저들이 비난하면 사대모화의 도리에 부끄러운 일이다.둘째, 중국 본토에서는 지방에 따라 따로 문자를 만든 것이 없는데, 몽고, 서하, 여진, 일본이 문자를 만든 것은 모두 이적의 일이다.셋째, 언문의 사용은 학문을 돌보지 않게 하고, 사리판단을 못하게 할 것이니, 학문에 손해를 끼치고 정치에 이로운 것이 없는 언문의 제 것은 한글 창제자에 대한 이야기다. 흔히는 최항, 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등 집현전 학사들이 한글 창제에 참여하고, 세종을 보필한 것으로 일러진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른 것으로 보인다. 집현전 학사들은 한글 창제에 직접 참여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세종대왕을 비롯한 동궁과 진양대군(세조), 안평대군 등 왕자들이 참여하여 왕가사업으로 은밀히 진행되었다. 그러기에 세종실록에 한글 창제에 관한 기사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세종 25년(1443) 12월 30일조에 “是月上親制諺文二十八字... 是謂訓民正音”이란 기록이 보일 뿐이다. 이렇게 정음 창제가 은밀히 진행된 것은 최만리 등의 반대상소에 보이는 바와 같이 당시 수구파 문인들의 반발이 거세고, 명나라와의 유대관계가 불편해지는 것을 염려한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집현전 학사들은 창제에 직접 참여한 것이 아니라, 간접적으로 관여하였을 것이다. 이들은 오히려 정음을 반포한 정음과 같은 이름의 책 “訓民正音” 해례본 제작에 참여한 것이다. 세종실록에 세종 28년(1446) 음력 9월 29일조에 “훈민정음성”이라 보이는 것이 이것이다. 이 책의 말미에 실린 정인지 서문에는 연기(年紀)가 “正統十一年 九月上澣”으로 되어 있다. 오늘날 한글날을 10월 9일로 정한 것은 이 정인지의 서문에 따라 9월 10일을 양력으로 환산한 것이다.3. 한글의 제자 원리1) 창제 과정로마자와 일본의 가나(假名)는 기존의 다른 문자에서 파생된 것이다. 비단 이들 두 문자만이 그런 것이 아니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문자 대부분이 그렇게 생겨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한글만은 그렇지 않다. 한글은 15세기에 세종대왕이 창제한 문자이다. 그것도 대충이나 적당히가 아니라 과학적이고 독창적인 방법으로 만든 것이다. 한글이 다른 문자에는 없는 여러 가지 특징을 지니게 된 것도 이처럼 탄생 과정이 남다른 데 기인한다.한글을 만드는 과정에서 적용된 여러 가지 이론과 방법들을 통칭해서 보통 ‘제자 원리’라고 부른다.제자 원리는 아무 문자에서나 논의될창제했다는 사실조차도 거의 잊혀진 채로 오랫동안 내려왔다. 그래서 금세기 초반까지도 한글 역시 기존의 다른 문자에서 나왔을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지금까지 한글의 독특함을 지적하고 강조하는 논의는 아주 많았다. 그러나 그 독특한 내용을 어떻게 이해하고 기술해야 하는가에 관해서는 별로 주의와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고 생각한다.‘문자’ 등의 용어는 한글에도 사용되고 다른 문자들을 대상으로도 사용된다. 그런데 같은 말이라도 다른 문자에 사용할 때는 용어의 의미가 비교적 명확한데, 한글에 사용하면 의미가 애매해진다. 한글 외의 다른 문자들은 문자가 곧 표기의 단위이다. 문자를 가로나 세로로 그냥 나열하여 단어와 문장을 표기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문자와 구별되는 다른 표기 단위가 존재하지 않는다. 즉 ‘문자’의 개념에 혼동의 소지가 애당초 없고, 그래서 그것을 ‘글자’나 ‘자’로 바꾸어 말해도 별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로마자를 뭐라고 하든지 그것이 가리키는 대상은 어차피 자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마자와 한자, 가나 등의 경우에는 그러하지만, 한글은 사정이 다르다. 같은 말을 자꾸 반복하기는 싫지만, 여기서 한글의 독특함을 또다시 말하지 않을 수 없다.한글은, 모두가 너무 잘 알듯이, 문자 단위(ㄱㄴㄷ 등의 자모)를 그냥 배열하지 않고 그것을 일정한 원칙에 의해 서로 결합시켜 단어와 문장을 표기하고 있다. 예컨대, ‘ㄱㅏㅇㅅㅏㄴ’이라고 적지 않고 ‘강산’으로 쓰는 것이다. 창제 당시부터 변하지 않은 그러한 원리 때문에 한글의 경우에는 문자 단위와는 다른 별개의 표기 단위가 존재하게 된다.한글의 두 단위는, 음운론에서 음소와 음절이 구분되듯이 엄격하게 구분될 수 있고 또 구분되어야 한다. 그런데 어찌된 까닭인지 아직까지도 그 구분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두 단위의 존재와 차이를 모르는 것은 분명 아닐 터인데도, 그것을 구분하는 용어도 없고 애써 구분하려고 하지도 않는 것이다.2) 제자 원리의 특성과 배경한글(훈민정음)의 제자 원리를 밝히는 작업ㅇ 초성과 중성 모두 약간의 기본자를 먼저 만들고 그것을 이용하여 나머지 문자를 만들었다.ㅇ 초성의 기본자는 발음 기관의 모양을 본따 만들고, 중성의 기본자는 천,지,인을 상형(象形)하였다.ㅇ 초성의 경우, 각 발음 위치별로 가장 약한 소리를 기본자의 대상으로 삼고, 나머지는 센 정도에 따라 거기에 획을 더하였다. 중성의 경우에는 어떻게 기본자의 대상을 정하였는지 드러나 있지 않다. 초성의 경우와 같은 원리가 아니었을까 추정해 볼 수 있을 뿐이다.ㅇ 중성의 글자꼴 결정에는 음양오행설 등의 철학적 원리도 반영되었다.ㅇ 실제로 글을 적을 때는 초성과 중성, 종성을 합해 적기로 하였다.위의 내용은 지금까지 확인된 제자 원리의 대강을 적어본 것이다. 위와 같은 내용에서 확인되는 주요 특징은 역시 ‘독창성’과 ‘과학성’이다. 제자 방법이 이론적이고 그 이론이 새로운 것이었다는 뜻이다. 이 두 가지 특성은 지금까지 수없이 언급되어 온 것이므로 여기서 다시 지적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내용과 수립 배경 등에 대해서는 좀더 면밀한 분석이 필요하다고 여겨진다.위에서 보듯이, 제자 원리의 핵심을 이루는 부분은 음에 관한 분석과 이론 수립이었다. 자세한 기록이 없어, 당시의 연구 방법과 과정 등을 소상히 알 수는 없지만, 완성된 문자 체계를 통해, 어떤 내용이 연구되고 결론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대강 파악할 수 있다. 주지하듯이, 음을 세 부분으로 분석하고, 각각의 목록과 체계 그리고 특징 등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그 내용을 제자(자형)에 그대로 반영했던 것이다. 그러한 작업은 분명히 550여 년 전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 음 분석의 수준은 현대의 그것에 못지 않은 것이었고, 그 방법이나 결론면에선 아주 새로운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조금도 주저없이 한글의 ‘과학성’과 ‘독창성’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물론, 음에 대한 분석과 이론만이 과학적이고 독창적인 것은 아니었다. 글자꼴을 정하는 과정에서 적용된 상형과 가획 등의 원리도 똑같은 평가를 받을 수 있.
프랑스에서의 이민자 문제와 이민자들과 관련된 사건 3가지 예Ⅰ. 들어가며2005년 기준으로 프랑스에 살고 있는 이주자 수는 4백 9십만 명에 달했고, 이는 프랑스 전체 인구의 8.1%에 해당하며, 전체인구의 7.4%가 이주민이었던 1990년보다 7십6만 명이나 늘어난 수이다. 1990년대 이후 이주민의 수는 18%나 늘어났지만, 전체 인구는 겨우 7% 증가에 그쳤다. 특히 1999년과 2004/5년의 증가율이 높았는데, 1999년 1월부터 2004년 중반 사이에 9십6만 명의 이주민들이 프랑스로 들어왔다. 프랑스는 유럽국가 중에서 외국인의 비중이 높은 국가에 속하며, 유럽국가들 중 독일 다음 가는 이민국가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이슬람 이민자들이 살고 있다는 점에서 프랑스 또한 미국, 독일 못지않은 대표적 이민국가, 다민족 국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프랑스 인구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은 현재 프랑스에 살고 있는 인구 중 적에는 1/4이상, 많게는 1/3 이상이 조부나 조모가 이민자였다는 점에 주목한다. 2012 현재 외국인은 372만 명, 이민자는 534만 명에 달하고 있다.오늘날 프랑스 이민문제는 북아프리카의 무슬림 국가들에서 온 이민자들 문제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히잡 이슬람권에서 여성들이 얼굴을 가리려고 쓰는 두건문제와 2005년 소요사태가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2003-2004년 사이에 표출된 히잡사건 그리고 2005년 가을의 이슬람 이민자들의 폭동사태는 프랑스 사회의 이민 정책, 사회통합 정책을 재고하는 계기가 되었다.본 과제에서는 프랑스에서의 이민자 문제를 살펴보고, 이민자들과 관련된 사건 3가지를 예를 들어 분석해 보는 것은 이민자의 비율이 급증하는 한국 사회의 이민 정책을 숙고함에 있어 큰 도움이 될 것이다.Ⅱ. 프랑스에서의 이민자 문제1. 이민의 역사낮은 출생률로 인구 감소를 겪던 프랑스는 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는 외국이민자를 통제하거나 통합시키기 위한 특정한 정책을 사용하지 않았다. 19세기와 20세기 초반 프랑스 제 법적 지위를 확인받기도 하는 것이다.3.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이민정책 현황프랑스의 헌법상으로는 외국인의 권리에 관해 명확한 규정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학자들에 따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헌법에는 이러한 권리를 인정할 수 있는 몇 가지 근거가 있다고 한다. 이러한 주장의 논거는 다음과 같다.즉 헌법의 일반원칙은 인간에 관한 것이고, 따라서 외국인도 이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탈리아에서와 마찬가지로 프랑스에서는 헌법위원회의 결정들이 외국인의 “헌법상지위”에 관한 진정한 의미에서의 “판례법”을 형성하고 있으며, “이민정책을 시행하기 위한 외국인 관련 입법의 영역은 전적으로 국가에 맡겨져 있지만” 이러한 판례에 따라 외국인들의 기본권이 보호되고 있음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또한 국제법, 보다 구체적으로는 유럽법 역시 외국인을 헌법영역에 “포함”시키는 데 기여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리하여 마스트리트 조약에 따라 프랑스 헌법 제88조의3은 프랑스에 거주하는 유럽연합 시민에게 지방선거의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하지만 헌법상 법문에는 외국인에 관한 구체적 규정이 전무하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법문상의 미비로 인해 외국인의 주요 권리는 정부부처 회람이나, 시행규칙, 시행령 또는 법률 등에 의해 간접적으로 규정될 수밖에 없는 결과를 낳고 있다. 어쨌든 프랑스에서는 이러한 법률과 시행규칙 등을 통해 이민정책과 외국인의 통합을 위한 방안들을 강구하고 있는 것이다.프랑스의 현재 이민정책은 이민인구의 ‘유동’과 ‘거주’에 대한 통제로 이행하고 있다. 원칙적으로 이민인구의 유동성 관리는 본질적으로 유럽 차원에서 이루어지는데, 특히 1995년 발효된 쉥겐조약 이후 더욱 그러하다.이민유동의 관리, 외국인의 법적 지위 조정, 귀화요건의 통제 등이 그러한 것들이다. 프랑스에서 이러한 유동성통제 정책을 취하게 된 것은 본질적으로 다음과 같은두 가지 요인에 기한다. 즉 유럽국가간 국경의 개방으로 인해 회원국의 실질적 관리를 받지 않는 외국인의 이동이 이루)라 부른다.CRA에 유치된 외국인은 프랑스에서의 체류가 허용되지 않거나 영토 내에 들어오는 것이 금지되었거나 격리절차의 대상이 된 이들이다. 영토 내에 들어와 망명신청 등의 방법을 통해 신분의 적법화를 기다리고 있는 외국인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유치소에 수용될 수 있다. 1975년 마르세이의 아랑(Arenc) 항구에서 경찰이 관리하던 감금소가 발견된 적이 있는데, 이 감금소는 법에 어떤 설치근거도 갖고 있지 않았으며 따라서 아무런 사법적 감독도 받고 있지 않았다. 이 감금소의 발견이 있고 나서 1981년 CRA가 합법적인 수용소로 설치된 것이다. 오늘날 CRA에의 수용은 매우 엄격하게 관리되고 있다. 특기할 만한 것은 프랑스 법제상으로는 미성년자에게는 격리조치가 적용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미성년자 역시 그 부모가 국경 밖으로 추방되는 절차의 대상이 되는 순간 그 부모와 함께 CRA에 수용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5) 집단추방의 금지추방조치를 사용하는 데에도 일정한 제한이 존재한다. 유럽에서는 ‘인권 및 기본권 협약’ 제4의정서 제4조는 집단추방을 금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원칙적으로 국가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집단추방을 금지하고 있는 것은 특정 인구에 대해 낙인을 찍을 위험성 또는 제2차 세계대전 시의 경험을 회상케 하는 변칙적 조치에 대한 우려 등에 기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최근 프랑스에서의 “집시족”에 대한 논쟁은 추방의 실제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에 대해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하고 있다. 집단추방이 사법기관에 의해 금지되고 있는 프랑스, 이탈리아, 벨기에 같은 유럽국가들에서도 실제로는 집단추방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위에서 우리는 프랑스가 어떤 식으로 국가 차원에서 이민유동을 관리하기 위한 수단들을 실시하고 있는가 보았다. 표적을 정하거나 특정 외국인들에게 영토 내에 정주하거나 노동할 수 있는 수단을 허여함으로써(“선택적 이민”) 이민을 관리하고자 한다. 그와 동시에 이 두 나라는 긴급한 상황에 처한 외국인들(난민, 미성년자등)을 계속에 관해 자신의 배우자를 속인 경우 “회색결혼”이라고 인정되는 것이다. 이 경우 형사제재와 무거운 벌금을 받게 된다.넷째, 프랑스 시민에 의해 입양된 자녀는 그 입양부모의 국가의 국적을 취득할 수 있다.다섯째, 외국인이 프랑스 영토 내에 최소한 5년 이상 상시적으로 또한 합법적으로 거주한 경우 프랑스 국적의 취득을 신청할 수 있다.2) 이중국적통합정책은 또한 “이중국적”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혈연에 의한 국적취득(“속인주의”)을 규정하고 있는 국가 출신의 외국인 부모의 자녀가 “속지주의”를 적용하고 있는 영토 내에서 태어난 경우 자연스럽게 이중국적이 생기게 된다. 프랑스는 이중,더 나아가 삼중 국적까지 인정하고 있다. 이는 서로 다른 이민사를 갖고 있긴 하지만 방어적 전술을취하고 있는 점에서는 같은 방향의 정책을 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다른 나라에 살면서 동시에 이 나라의 국적과 프랑스의 국적을 보유하고 있는 자가 프랑스 국적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대한 대책인 것이다. 특기해야 할 사실은 베송 법안에 대한 토의 중에 몇몇 의원이 이중국적제도를 폐지하는 수정안을 제출했다는 점이다. 취지는 국민통합의 증거제출을 강화하자는 것이었으나 이 영역에 있어서의 프랑스의 전통을 명목으로 채택되지는 않았다.5. 이민자의 사회통합위에서 보았다시피 프랑스에서의 이민정책은 영토 내에 들어오는 이민자들을 통제하는 수단을 지니고 있으며, 만약 이들이 불법적인 상황에 있는 경우에는 이들을 격리시킬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고 있다. 프랑스의 이민정책은 외국인들에게 다양한 지위를 부여하고 있는데, 이는 크게 취약한 처지에 있는 자들에 대한 수용이민과 통합이민으로 나눌 수 있음도 보았다. 단 통합이민은 이민국의 선택에 의존하는 경향이 점점 더 강해지는 경향에 있으며, 당해 이민국은 신입 이민자들을 선택하려는 경향이 있음도 보았다. 이러한 정책은 이민 문제에 있어 프랑스가 취하고 있는 문화적,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조치 등에서도 현저히 나타나고 있다.국가는 이민자들을 문화적, 는 성인 남성과성인 여성”에게만 투표권을 인정하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외국인에 대한 지방선거 투표권부여 논쟁이 정기적으로 벌어지고 있는데, 이는 1981년 당시 대선 후보였던 프랑소와 미테랑이 외국인들의 투표권을 유세계획에 포함시킨 이후 나타난 새로운 현상이다. 외국인 참정권 불인정은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경우 참정권 행사 및 주권, 시민권, 정체성을 연관시키는 전통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이로써 외국인의 정치적 통합이 한계에 부딪혔다면, 경제적 통합의 경우에는 많은 노력이 있었는데 노동 관련 선택적 이민이 프랑스의 최우선 정책 중 하나가 된것 그 이상이라 할 수 있다. 사실 경제적 통합은 이민국의 이해관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2)경제적 통합프랑스 내 체류허가를 받은 외국인들이 모두 노동권을 보장받는 것은 아니다. 또 몇몇 직업은 프랑스 학위가 있어야 하거나, 국적을 필요로 한다. 첫번째 경우, 동등학력인정과정 등 특별허가를 취득하는 방법도 있다. 두 번째 경우, 非유럽공동체 출신 외국인은 사실상 공직에 정식임용자로 취직할 수 없다. 그러나 유럽연합 회원국 국민에 대해서는 외국인에게도 공직의 일부분이 개방되어 있음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직업활동 제한은 비단 공직에 한한 것만이 아니며, 공증인 등 주요 자유직과 같은 일부 법 관련 직업에도 마찬가지다. 취업조건 중 국적을 조건으로 하는 것은 공직뿐 아니라 사기업 내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폐쇄적인 직업 중 대다수가 공적 부문에 몰려있음은 주지해야 한다. 규정에 의해 보호를 받고 있는 자격증 필수의 직업군은 비유럽연합 외국인들에게 접근할 기회를 주지 않으며, 대표적인 세 분야는 국가, 의료, 국방 분야이다.일부 직업들의 외국인에 대한 접근금지는 국가라는 이유뿐 아니라 조합 및 경제적 원인으로도 설명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이해관계와 인적 혹은 경제적 필요성 간에 갈등이 생길 수도 있다. 이 같은 경우 당국이 프랑스 국적 소지의무를 상황에 맞게 맞추거나 재해석하게 된다.경제적 .
지난 70년의 남북한 관계의 성격과 특징 및 통일의 기반을 구축하고 바람직한 형태의 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남북 관계의 방향 변화와 그 방법Ⅰ. 들어가며현재 우리는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분단된 국가에서 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단을 비정상적인 상황으로 생각지 않는 경향이 늘어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아마도 그것은 분단이 우리의 삶에서 직접적으로 느껴지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는 통일이 과연 무엇인지 그리고 통일이 무엇을 가져다 줄 것인지에 대한 무감각이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조금만 눈 여겨 돌아보면 분단의 상처가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그 분단의 상처를 찾아서, 치유하는 과정이 곧 통일일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통일에 대한 무감각과 무관심은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한반도 분단이 없었다면 남북한 관계도 없었을 것이라는 의미에서 ‘남북한 관계’는 ‘분단의 다른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본 과제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감안하였을 때, 과연 지난 70년의 ‘남북한 관계’는 어떤 성격을 갖고 있으며, 어떤 특징을 보여 주고 있는지, 이제는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을 향해 나아갈 바를 진지하게 고민을 해야 할 때이므로 통일의 기반을 구축하고, 궁극적으로 바람직한 형태의 통일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남북한 관계를 ‘어떤 방향으로 변화시켜야’ 하는지, ‘그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에 대해서 다양한 의견들을 논리적으로 제시해 보기로 한다.Ⅱ. 한반도의 분단지난 70년의 ‘남북한 관계’는 어떤 성격을 갖고 있으며, 어떤 특징을 보여 주고 있는지, 그리고,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의 기반을 구축하며 궁극적으로 바람직한 형태의 통일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우리 민족이 어떻게 분단되었으며, 그 분단의 성격은 무엇인가를 먼저 살펴 볼 필요가 있다.1. 분단의 배경과 성격우선 우리 민족의 분열을 가져온 원인을 간단히 말하면, 조선 시대의 무능한 정치, 일제의 제국주의적 침략 정책, 우리 민족의 대응능력 부족, 일본 패망 후 강대국의 실리에 따른 한반도 문제 결정, 한반도의을 가져다주었던 것이다. 1960년대 후반 위기적 북한요인을 명분으로 해서 병영국가적 동원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1969년 10월 삼선개헌안을 공포하고 1971년 12월에는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마침내 72년 체제의 서막을 알리는 10월 유신을 단행한 것이다. 이시기 남북 모두 안보적인 요인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그러나 남북관계와 체제변동 간의 요인들 간의 연계는 다소 상이했다. 북한의 경우는 동맹관계의 변화가 먼저 초래됐고, 이는 남북관계로부터 파생되는 안보적 위협을 증폭시키는 상황을 불러 일으켰고, 이에 대한 정책적 대응으로서 국방-경제 병진노선이 추진됐으며 그 과정에서 후계구도를 둘러싼 쟁투가 벌어지면서 권력구조를 집중화, 단일화 시켜 나간 것이다. 반면에 남한의 경우는 북한의 대남대외 도발로 인해 동맹관계가 변화되고 이미 추진됐던 산업화에 자주국방이 더해짐으로써, 북한과 유사하게 “싸우면서 건설하는” 경제-국방 병진노선을 추구하였으며 이러한 전략을 효율적으로 추진하는 데 있어서 강력한 리더십의 위상을 공고화시키려는 시도가 발생한 것이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남한의 경우 박정희 자신의 집권 연장을 둘러싸고 정치사회 내에서 갈등이 벌어졌던 것이 직접적으로 작용하였다. 약소국인 남북한에게 남북관계와 동맹관계가 동전의 양면을 구성하는 것이었다.이렇듯, 남북한의 관게는 안보통일논리의 특수성으로서 남북은 상대를 동족이자 동시에 적으로 간주하려는 분단의 특수성 때문에 안보통일 논리는 정책적으로 항상 이율배반적 측면을 안고 있다.또한, 안보와 통일 문제의 이중적 성격으로서 안보와 통일은 동전의 앞뒷면 같은 이치로서 우리가 통일을 앞세우면 북한은 안보로 대응하고 반대로 북이 통일공세를 펼치면 우리는 경계심을 갖은 이중적 성격을 띄고 있다.이처럼 남북관계는 기존의 분단체제로부터 분단국(남북국)체제로 전환되고 있다. 국제사회에서의 협력과 남북관계에서의 직접적인 교류협력이 이루어짐에 따라 분단체제 하에서의 체제경쟁 효과는 덜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권위주의 시기에 선거철이 왔으나 1972년을 기점으로 그 이전과는 다른 체제로의 변동을 경험했다. 1970년대 이후 지금까지 우리가 목도하는 북한 체제는 그 이전과 비교했을 때 중요한 차이가 있다. 당-국가 사회주의의 제도적 틀이 어느 정도 작동하는 가운데 당의 집체적 지도의 요소가 존중받았던 데 반해 1970년대 이후에는 철저하게 지도자의 개인적 통치구조가 등장했다. 또한 사회경제적인 다원성은 말할 것도 없고, 권력엘리트내의 미약한 다원성조차 거의 완벽하게 제거됐다. 1967년 공표된 ‘유일사상체계’는 이를 잘 보여준다. 1970년대 이후 북한체제는 단순히 독재, 또는 귄위주의라고 표현하기 어려운 ‘수령’ 중심의 체제로 변화되었으며, 이는 스탈린이나 히틀러 치하의 소련과 독일의 정치구조와도 질적으로 다른 체제로 이행했다.요컨대 1970년대 초 남북한의 정치체제는 독재라는 측면에서는 연속적이면서도 과거와는 질적으로 다른 체제로 이행했다. 그로부터 40여년이 지난 지금 북한은 70년대에 등장한 체제가 그대로 온존 강화된 반면 남한은 1980년대 중반의 민주화시기를 거치면서 자유민주주의가 법적제도적으로 뿐만 아니라 내용상으로도 정착되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70년대 초 남북한의 정치변동이 그 이후 남북한의 정치적 흐름과 어떤 연관성을 갖는지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된다. 즉 외관상 유사한 듯 보이는 두 개의 정치체제가 등장한 이후 남북한 정치체제의 전개과정에 왜 전혀 다른 결과가 초래됐는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찰해 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 글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남북한의 국력 격차가 결국 정책적 선택, 즉 국가 발전의 전략의 차이에 따른다는 기존의 많은 연구들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지만, 이 글은 정책 또는 전략의 차이나, 체제나 이념의 차이가 아닌 정치구조의 차이에 주목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서 정치권력의 행사를 둘러싼 제도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두 제도의 차이가 결국은 그 이후의 정치적 전개의 차이를 노정했다는 데 관심을 기울인다.이처럼 적대적 공존관계를 최후 승패는 무승부로 인해 유예되었던 것이다.잠정성의 다른 한 표현은, 통일을 포기하는 않는 일방 자신들의 배타적인 중앙 정부성을 강조하려는 남한과 북한의 헌법 및 법률체계에서도 나타나 있다.지역성과 국제성지역성과 국제성은 정전체제의 본질을 새롭게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인일 것이다. 한반도 정전체제는 미소를 정점으로 하는 세계 및 동아시아 국제냉전체제의 초점이자 하위요소였다. 즉 그것은 세계 자본주의진영과 세계 사회주의 진영의 힘이 균형적으로 장기 대치한 국제 분단질서였다. 지역성과 세계성이 뚜렷한 안정성의 한 원인으로 주목할 만한 것은 미중대결의 완화, 소련의 해체, 한소한중수교로 이어지는 동아시아에서의 탈냉전은 한국, 지역, 세계의 3층 대결구도의 전면 해체가 아니라 단지 국제 수준 하나만이 제한적으로 해체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한반도 정전체제의 쌍생아는 남북대결과 함께 한미동맹-북미적대 구도였다. 동시에 중국분단과 중일패권경쟁 역시 한국분단 못지않은 지역냉전 요소였다.세계 최고 수준의 폭력성과 무력성세계 최고 수준의 폭력성과 무력성 역시 남북한 관계의 핵심특성이다. 한국전쟁에서 남한과 북한은 물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양 진영 모두 엄청난 희생을 들여 각각의 체제를 지켜낸 바 있었다. 전후 체제 하 남한과 북한은 각각 엄청난 규모의 병력을 갖게 되었고, 남한에는 부족한 병력을 메우고자 대규모의 미군이 주둔하였다.Ⅳ. 통일의 기반 구축 및 바람직한 형태의 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남북 관계의 방향 변화와 그 방법1. 통일의 의미와 당위성 통일은 다르게 표현하면 곧 분단의 극복이다. 그러나 통일이 단순이 '분단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이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가 이루어야 할 통일은 민족의 앞날과 관련되는 문제로서, 미래를 향한 역사의 창조작업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첫째, 지리적 측면에서 통일은 곧 '국토의 통일'이다. 통일은 민족성원 모두 한반도의 어느 곳이든 자유롭게 왕래하고 거주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정치적 측남한정부에 의해 거부되었으며, 5공화국 정부는 1982년 1월 ‘민족화합 민주통일방안’을 내놓았다. 이 방안은 남한 정부에 의해 제시된 최초의 체계적인 통일방안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이어 6공화국 정부는 국제질서의 급격한 변화와 남한 내부의 통일 열기 속에 1988년 7월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7.7 선언)을 발표하고, 이후 1989년 남북연합의 중간단계를 설정한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발표하였다.‘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에서는 통일 원칙으로 자주, 평화, 민주의 3원칙이 제시되었으며, 남북간의 과도적 통일체제로서 ‘남북연합’의 결성이 제안되었다. 그리고 이 남북연합에는 남북정상회의와 남북각료회의, 남북평의회를 두두록 하였다. 이후 문민정부에서는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과 궤를 같이 하는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이 제시되었다.냉전기 남북한 정부의 통일 논의는 한마디로 당대의 남북관계의 특징을 반영하는 반공주의와 반미주의반남한의 반영물로서 시대적 한계를 보여주었다. 특히 남북한 모두 적대적, 획일적 통일론을 기반으로 대결주의를 심화시켰다. 그러나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탈냉전적 국제질서의 변화 속에 보다 정교한 통일방안이 제시되었다.2) 탈냉전기간 동안 남북한 정부의 통일논의1991년 12월 13일 남북한 정부간 역사적인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남북기본합의서)가 채택되었다. 기본합의서는 그동안 남한측이 주장해 온 선 교류협력과 북한측이 주장해 온 선 불가침협정을 모두 포괄하였다. 남북화해(제1장), 남북불가침(제2장), 남북교류협력(제3장), 수정 및 발효(제4장) 등으로 구성된 기본합의서는 1992년 2월 19일 남북한에서 동시에 발효되었다.이를 계기로 남북한은 1992년 남북군사분과위원회와 교류협력분과위원회를 구성하는 등 보다 진전된 대화에 들어갔으나, 기본합의서는 합의 이후 북핵문제 등 외부적 요인의 등장과 남북한의 이행 의지 부족으로 인해 사문화되었다. 그러나 남북기본합의서는 남북한 화해, 불가침, 있다.
위안화 평가절하의 배경과 그 영향(중국의 입장)과 우리나라에 미치는 영향Ⅰ. 들어가며최근 중국은 달러화에 대해 자국의 위안화 가치를 평가절하 하였다.2015.8.11.부터 3일간 계속해서 기습적으로 단행한 것이다. 이는 가히 전 세계적으로 충격적일만 하다. 중국 경제는 위안화 절하에 의존할 만큼 우려가 높아졌다. 인민은행이 예상을 깨고 이틀 연속 위안화를 평가절하면서 시장의 의구심이 확산됐다. 수출경기 회복을 이유로 들었지만, 중국이 환율전쟁을 하는 것은 아닌지, 더 이상 경기부양 수단이 없는 것인지에 대한 의심이 든 것이다.이에 본 과제에서는 2015.8.11.부터 3일간 계속된 위안화 평가절하의 배경과 그 영향을 중국의 입장에서 살펴보고 위안화 평가절하가 3우리나라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논하여 보기로 한다.Ⅱ. 중국의 위안화 평가절하의 배경중국인민은행은 위안화 고시환율을 8월 11일부터 3일간 연속 상향하여 달러당 6.1162위안에서 6.4010 위안으로 급격히 평가절하(4.66%)하고 고시방식을 변경헜다. 중국정부는 ‘기준 환율 고시제도’를 도입하여 전 날의 시장가격을 바탕으로 중앙값을 고시하고 하루 변동 폭을 2%까지 허용하겠다고 밝혔다.중국 인민은행은 최근 위안화 평가절하 조치가 단발적 조치라고 한다.중국 인민은행의 위안화 평가 절하 조치는 표면적으로 외환시장의 자율성 확대 등 위안화 국제화 정책의 일환이다. 인민은행은 향후 위안화 고시환율 결정에 전일 시장 종가를 반영하여 보다 시장 친화적인 환율제도를 운영키로 했다. IMF는 특별인출권(SDR) 평가보고서에서 위안화 고시 환율의 시장 친화적 운영, 비거주자의 역내 위안화 거래확대 등의 개방을 요구했다.특히 올해 4분기 예정되었던 위안화의 IMF SDR 편입 결정이 내년으로 연기되면서 중국의 위안화 국제화 정책이 위안화 수요 확대에서 거래 활성화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이전에는 주식 시장 등 시장 개방과 위안화 강세 기대를 통해 위안화 수요 확대에 매진했었다.중국이 위안화 평가절하를 기습 단행한 가장자본시장 개방으로 증권투자자금이 순유입을 나타내고 있지만 금융기관을 중심으로 자본유출이 더 빠르게 나타나고 있다.특히 미국이 금리를 인상하는 과정에서의 페그제를 유지하려면 의도하지 않은 긴축을 수용해야 한다. 고정환율제는 통화정책의 동조화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환율 안정을 택하는 동시에 통화정책의 독립성을 포기하는 조치이다.중국은 그동안 위안화가 기축통화 반열에 올라서기 위해 계속 노력해 왔다. 특히 위안화가 달러나 유로화처럼 아시아 시장에서 통용되길 희망해 왔다. 하지만 위안화는 중국 정부의 통제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기축통화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그동안 중국 정부는 위안화를 달러에 연동시킨 정책으로 상당한 이득을 누려왔다. 하지만 지난해부터는 큰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중국의 경기가 나빠지면서 위안화 가치는 떨어지는 반면 달러 가치는 상승, 달러 연동을 위해 환율 방어에 더 많은 돈을 쏟아 부어야 했기 때문이다. 특히 위안화 강세가 이어지면서 기업들의 수출 경쟁력이 떨어지는 현실적인 문제가 가장 큰 이유로 풀이된다. 달러 가치가 상승하면서 위안화 가치도 동반 상승하는 효과를 가져와 경기를 되살리는데 역효과를 낳았다.위안화 평가절하의 의미를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하면 다음과 같다.첫째, 고시환율의 시장화이다. 중국 위안화 고시환율이 상당기간 시장환율을 밑돌아 절하압력이 존재하였기 때문에 최근 평가절하 조치는 이에 따른 조정으로 시장친화적 정책이라는 평가이다. IMF는 지난 1년간 위안화 가치가 실질 유효환율 기준 약 10%가량 절상되어 있었고 평가절하조치이후에도 여전히 절상되어 있는 상태라고 지적였다.둘째, 수출증대를 통한 경기부양이다. 중국 경기둔화에 따른 경기 부양책으로 위안화 평가절하 조치를 단행한 것이다. 7월 수출이 큰 폭으로 감소(-8.3%)하고 산업생산 증가율도 시장 예상치를 하회하였다.셋째, IMF SDR 편입 추진이다. 위안화를 2015년 SDR SDR은 외화자산이 부족한 IMF회원국이 담보없이 자금을 인출할 때 쓰는 기준통화임. 5된 실질실효환율 절상을 만회할 만큼의 절하를 유도하기에는 여전히부담이 크기 때문이다.가격변수를 통한 수출진작에 의구심이 있기도 하고, 위안화의 추세적인 약세가 신흥국의 자금이탈을 부추겨 결국 수출감소로 되돌아 올 위험도 있다. 중국 내 자본유출이 계속되면 통화정책의 효과가 제한될 수 밖에 없다. 구조적인 과잉투자와 부동산경기 부진을 만회하기 위한 일대일로 프로젝트와 직접금융 육성에도 악재가 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외환시장이 정부의 통제 안에 있는 한, 일단 진정기에 접어든 향후 위안화 환율의 방향성은 급격한 약세전환보다는 완만한 약세 진행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향후 6개월간 위안화 환율은 7월말 대비 약 5~6% 절하된 6.5~6.6위안 수준을 예상한다.유로존과 일본의 양적완화(QE)가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미 연준(Fed)은 연내 기준금리 인상을 시작하더라도 이후 인상 속도를 천천히 할 것임을 여러 차례 시사하고 있다. 유동성 공급은 여전히 증가하고 있고 중국은 위안화 평가절하를 통해 경기부양에 나서겠다는데 왜 글로벌 금융시장은 변동성이 확대되는 것일까.첫째, 위안화 절하까지 의존해야 할 만큼 중국경제에 대한 우려가 높아졌다. 금융위기 이후선진국을 중심으로 한 부채축소(deleveraging)의 영향으로 글로벌경제 전반적으로 총수요는부진한 상태다. 결국 자국통화 가치를 절하시켜 여타 국가의 내수를 빼앗아오려는 경쟁, 즉‘환율전쟁’이 진행 중이다.그나마 미국이나 유로존, 일본처럼 중앙은행의 막대한 유동성 공급을 통해 자국의 통화가치를 절하시키는 양적완화(QE)는 글로벌 유동성 장세로 확대되면서 전세계 자산가격을 상승시킨다. 그러나 중국의 위안화 평가절하는 고시환율의 변경에 불과하다. 지금처럼 총수요가 부진할 때 수출은 환율에 상당히 민감할 수 밖에 없다. 제한된 총수요를 서로 차지하려는 중국발 가격경쟁이 심화될 것이다. 연초 엔화약세에 힘입은 일본업체들이 단가인하에 나섰고, 위안화 평가 절하 직후 중국의 철강업체들 역시 단가인하를 시작했다는 소식이 들려온기 이전 수준을 넘어섰다.단기적으로 볼 때 위안화 변동성은 진정될 것으로 예상된다. 중국 인민은행 역시 급격한 위안화 절하를 원하지 않는다고 밝힌바 있으며 최근 몇 일간 고시 환율을 통해 위안화 절하 기대를 낮췄다. 중국의 정책 당국은 환율 변동성이 확대되면 자본 유출이 빨라질 수 있는 부작용도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위안화 급락은 지양할 것이다.또한 중국이 유로와 일본의 양적완화와 같은 대규모 금융완화를 단행할 가능성이 낮고 정치적으로도 미국과의 통상 마찰 위험이 높다는 점도 위안화의 급진적인 변화 기대를 낮춘다. 9월말 중국과 미국의 정상회담이 예정되어 있다. 미국의 대 중국 무역수지 적자 규모는 글로벌 복합위기 이후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고 현재 미국 무역수지 적자의 50%를 차지하고 있다.그러나 장기적으로 보면 위안화는 점진적인 약세로 선회할 전망이다. 시장 친화적인 환율을 유지하겠다고 했는데 중국의 경기 여건이 위안화 강세를 뒷받침하기 어렵다. 계단식의 절하 보다 월 0.2~0.5% 이내의 완만한 약세가 이어질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위안화 변동성이 진정된다 하더라도 주요 통화 가치가 이전 수준으로 회귀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중국 역시 다른 신흥국들과 마찬가지로 경기 둔화와 자본 유출 위험이 장기화될 것으로 보인다.실물 경기를 보면 중국의 구조조정이 상당히 지체되고 있다. 중국과 동남아시아 지역의 GDP대비 투자 비율은 여전히 다른 신흥국 대비해서 높다. 특히 한국과 마찬가지로 중국은 생산가능인구(15-64세)가 2015년을 정점으로 감소세로 전환하게 된다. 과거에 누렸던 인구보너스 효과가 사라질 것으로 보여 향후 성장 경로의 불확실성이 높아질 전망이다.적정한 위안화 가치를 평가하기는 어렵지만 장기적으로 10% 이상 위안화 가치가 하락할 것으로 예상된다. 2010년 위안화 절상을 단행할 때의 바스켓(약 유로 40%, 엔 40%, 원 10% 자체 추정)을 참고하면 현재 위안화 가치는 바스켓 추이보다 상당히 고평가된 상황이다. 실질실효환율 가치는 력이 달러 이외의 선진 통화로 전이된 측면도 있다.그러나 중국의 위안화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적다는 것일 뿐 선진 통화 시장에서 달러가 약세로 전환된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미국 연준의 9월 금리 인상 가능성이 여전히 높고 하반기 경제 성장도 다른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달러 강세로 인한 신흥국 위험은 금리 인상 시점 보다 금리 인상 속도로 완화시킬 문제로 보인다. 따라서 달러 약세는 일시적일 것이다.향후 중국의 위안화 절하 정책 속도와 경기전망 변화에 따라 글로벌 주식시장의 방향성이 결정될 것으로 판단한다. 다만 선진국에 비해 신흥국 시장에서 더 부정적인 영향이 불가피하다. 제한적 속도이라 할지라도 위안화의 추가 절하 가능성을 시장 참여자들이 예상하고 있고, 미국의 출구전략도 임박해 있어 신흥시장에서 글로벌 투자자금의 자금의 추가 이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특히 상품 수출비중이 큰 신흥국 중심으로 부정적 영향이 상대적으로 클 수 있다. 위안화가 관리변동 환율체제를 시작한 2005 년 7 월 이후 위안화 가치가 절하됐던 3 차례 사례에서도 브라질과 러시아 주식시장 등의 성과가 상대적으로 부진했다. 일각에서는 금번 위안화 평가절하 조치가 중국의 경기부양 목적이 있다는 점에 주목해 긍정적인 시각을 주장하고 있다. 위안화 평가 절하로 인해 중국의 취약한 수출부문의 어려움을 덜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당초 시장에서는 중국 정부가 추가적인 지준율 인하 등을 선택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는데, 보다 적극적인 경기부양 카드를 꺼내 들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종합하면, 단기적으로는 추가적인 위안화 절상 속도에 대한 시장 참여자들의 시각이 관건이다. 신흥 시장에서 단기적인 자본 유출심화와 주식시장 변동성 확대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중국의 경기회복 기대에 더 무게중심을 둘 경우 시장의 우려가 점차 완화될 것으로 예상한다. 일부 신흥시장에서 위험관리가 필요하지만, 글로벌 주식자산의 비중 축소를 고려할 상황은 아닌 이유다.Ⅳ. 위안화 평가절
에릭슨의 성격발달단계이론(성격발달 8단계설)과 그 교육적 시사점Ⅰ. 들어가며에릭슨은 프로이드와 마찬가지로 그의 탁월한 통찰력으로서 인간의 발달과정을 이론화했다.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적 개념이 실은 고대의 희랍신화에서 발생된 것이 많은 데 반해 에릭슨의 개념은 시, 민속 그리고 일상생활의 지혜를 참조하고 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프로이드의 이론을 바탕으로 하여, 그의 새로운 이론을 전개했다. 에릭슨은 인간의 발달은 개인의 세 가지 요소, 즉 생물학적 요소, 자아, 사회의 집단 구성원에 의해 일어난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 생물학적 과정, 자아과정, 그리고 사회적 과정 등과 같은 조직과정에 의해서 개체의 인성발달은 이루어진다고 보고 있다.본 과제에서는 발달의 개념과 함께 에릭슨의 성격발달단계이론(성격발달 8단계설)과 그 교육적 시사점들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Ⅱ. 발달의 개념발달(development)은 연령이 증가함에 따라 나타나는 신체적, 심리적 변화라 할 수 있다. 발달 심리학적 관점에서 발달은 수태에서 사망까지의 전 생애에 걸쳐 일어나는 모든 변화의 양상과 과정을 의미한다. 발달적 변화의 과정에는 신체, 운동기능, 지능, 사고, 언어, 성격, 사회성, 정서, 도덕성 등 인간의 모든 특성들이 포함된다.종래에는 흔히 아동기와 청년기의 발달은 긍정적인 변화인 반면 중년기 이후부터 노년기의 발달은 쇠퇴로 인한 부정적 변화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최근에 밝혀진 연구결과들에 따르면 노년기에도 분석, 통합, 추론, 문제해결 능력 등 여러 영역에서 긍정적인 발달이 지속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인간의 발달적 변화를 시기에 따라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으로 변화한다고 생각하는 단순한 증가와 감퇴의 도식은 발달 과정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는 것이다.발달과 밀접하게 관련되는 개념으로서 성장(growth)과 성숙(maturation)을 들 수 있다. 성장은 한 때 주로 신체적 특성의 긍정적인 변화를 뜻하는 개념으로 받아들여져 왔으나, 근래에 와서 발달과 같은 개념지는 일반적인 특성은 다음과 같다.①발달은 성숙과 학습의 상호작용의 결과이다.②발달은 일정한 발생학적 순서에 따른다.③발달은 계속적 과정이나 발달 속도는 일정하지 않다.④발달의 각 측면은 상호 관련된다.⑤발달에는 개인차가 있다.⑥발달은 분화의 과정임과 동시에 통합의 과정이다.⑦발달에는 결정적인 시기가 있다.2. 발달 단계발달 단계란 일정한 연령에 도달하면 그 전과 그 후 시기와는 구별되며, 그 시기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일반적인 발달 특징이 있는데 이것을 기준으로 인간의 생애를 몇 단계로 구분해 놓은 것을 말한다. 구체적으로 연령이 증가함에 따라 겉모양(체위의 크기, 각 부위의 비율 등)의 변화, 행동 목록 내용의 변화, 내재적 구조와 기능의 변화가 이루어지며, 이러한 기준에 의거하여 발달 단계가 구분된다.발달 심리의 분야에서 사용하는 연령별 단계는 출생 이전의 태아기, 출생 후부터 약 2세 경까지의 영아기, 2세부터 6-7세까지의 유아기 또는 입학 전 아동기, 6-7세 경부터 12-13세까지의 아동기, 12-13세경부터 22-23세경까지의 청년기, 약 40세까지의 성인전기, 40세에서 60-65세까지의 성인중기 또는 중년기, 60대 이후의 성인 후기 또는 노년기로 구분된다.발달 현상을 기술하는 또 하나의 방법으로는 심리적 특성별로 발달의 영역을 나누어 진술하는 것이 있다. 신체운동 기능 발달, 지각 발달, 인지 발달, 언어 발달, 기억 발달, 성격 발달, 사회성 발달, 정서 발달, 도덕성 발달 등은 대표적인 발달 영역들이다.Ⅲ. 에릭슨의 성격발달단계이론(성격발달 8단계설)1. 성격발달단계이론의 개 요에릭슨(Erik Erikson)은 프로이드의 제자이지만 프로이드와는 다르게 인성 발달에 있어서 사회적 상호작용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에릭슨은 심리 발달이 점진적 분화의 원리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가정하였다. 모든 성격 특성들은 (예컨데 자율성이나 성취감 등) 발달의 초기부터 어떤 형태로 존재하지만 이 특성들은 결정적 시기가 있고, 그것들은 단계적으로 나타난런 의미에서 각 발달 단계는 하나의 전환점 또는 위기라고 할 수 있다. 부정적 특성들이 모두 다 바람직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부정적 특성들이 긍정적 특성들을 압도할 때 발달 상의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2. 성격발달과정 8단계그는 생애주기를 8단계로 나누어 각 단계를 통하여 나타나는 자아의 특성에 초점을 맞추고 이러한 인간발달은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이라는 가정을 세웠다.인생주기의 각 단계는 이 단계가 우세하게 출현되는 최적의 시간이 있고 그리고 모든 단계가 계획대로 전개될 때 완전한 기능을 하는 성격이 형성된다고 하였다. 다시 말해 인생주기의 각 단계에는 그 단계에 따른 생리적인 성숙과 개인에게 부과된 사회적 요구로부터 발생하는 위기가 수반되며, 성격은 이러한 과업이나 위기가 어떤 식으로 해결되는가 하는 방법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에릭슨은 인간의 발달 단계는 유전적 요인에 의해 결정되지만, 유전적으로 결정된 단계가 현실화되는 것은 사회적 혹은 환경적 힘에 의해서라고 말한다. 인간은 각 발달단계에서 위기를 경험하며, 이 위기를 잘 해결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서 인생의 방향이 결정된다. 성격발달과정 8단계를 살펴보면,① 제1단계(0-1세): 기본적 신뢰감 대 불안감 약 1세(프로이트의 구강기)이시기 세상을 안전하고 믿을 수 있는 곳이라 생각하는 기본적인 신뢰감이 형성된다. 이것은 생의 의욕과 긍정적 세계관을 기르는데 기초한다. 그러나 아기를 다루는데 부적절하고 부정적으로 하면 아기는 세상에 대해 공포와 의심을 가진다.② 제2단계(1-3세): 자율성 대 수치심과 회의 2-3세 까지의 시기(프로이트의 항문기)자기의 요구에 따른 자율과 독립의 기초가 마련되면 어린이는 세계에 대해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신체 활동과 언어의 사용이 증가된다. 이를 자발성의 요구라고 한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면 심한 죄책감을 갖게 된다. 질문과 탐색활동이 잦아진다.③ 제3단계(3-5세): 주도성 대 죄책감 약 4-5세 까지의 시기(프로이트의 남근기)부모의 신뢰감을 얻게 되고 자신의 욕구를 처 열등감 약 6-12세 까지의 시기(프로이트의 잠복기)지적 호기심과 성취동기에 의해 활동이 유발된다. 성취기회와 성취 과업의 인정과 격려가 있다면 성취감이 길러진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면 좌절감과 열등감을 갖게 된다.⑤ 제5단계(청소년기): 정체감 대 정체감 혼미 13세경부터 사춘기(프로이트의 생식기)자신이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 된다. 그래서 심리적 혁명이 마음에서 일어난다. 끊임없는 자기 질문을 통해 자신에 대한 통찰과 자아상을 찾기 위한 노력을 하게 된다. 그 결과 얻는 것이 자아 정체성 이것이 형성되지 못하고 방황하게 되면 역할 혼란) 또는 자아 정체성 혼미가 온다. 이는 직업 선택이나 성 역할 등에 혼란을 가져오고 인생관과 가치관의 확립에 심한 갈등을 일으킨다.⑥ 제6단계(청년기): 친밀감 대 고립감 청년기를 지나 성인기에 이르는 시기청소년기에 자아 정체감이 확립되면 자신의 정체성을 타인의 정체성과 연결시키려고 조화시키려고 노력하게 된다. 자신의 고립을 배우자, 부모, 동료등 사회의 여러 다른 성인들과의 친밀감으로 극복하고자 한다. 그렇지 못하면 고립된 인생을 영위하게 된다.⑦ 제7단계(장년기): 생산성 대 침체성 인생의 중년기다른 성인들과 원만한 관계가 성취되면 중년기에는 자신에게 몰두하기보다 생산적인 일에 몰두하고 자녀 양육에 몰두한다. 이것이 원만하지 못하면 어릴 때와 마찬가지로 자신에게만 몰두하고 사회적, 발달적 정체를 면하지 못한다.⑧ 제8단계(노년기): 통합성 대 절망감 노년기통합성은 인생을 그래도 인정하고 받아들여 인생에 대한 통찰과 관조로 자신의 유한성을 인정하고 죽음까지도 수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 못하면 인생의 짧음을 탓하고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다른 인생을 시도해 보려고 급급하다. 급기야 생에 대한 절망에서 헤맨다.3. 에릭슨 이론의 특징에릭슨은 금세기 최고로 존경 받는 심리학자로서 이론적인 것과 임상적인 연구가 잘 조화를 이룬다는 데서 높이 평가 되고 있다.에릭슨의 인간 발달이론에 근거한 여덟 단계의 성공적으로 성취되면 그 결과가 누적되어 다음 단계에서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반대로 실패로 끝나면 그다음 단계도 누적된 실패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에릭슨은 인간의 후기 발달 단계에서 적극적인 결과가 생기면 전기 발달 단계의 부족한 측면을 재경험해서 새로운 자각을 경험 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둘째로 인간발달은 주기적인 과정을 밟는 다는 것이다. 이 주기적인 과정은 개인적이기 보다는 세대적(generation)이다. 이것은 마치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처럼 한 개인과 한세대가 맺고 있는 상호 연관성을 지칭하는 것이다.셋째는 인간발달과정은 대극적(bipolar)으로 전개 된다는 것이다. 이 대극적 발달은 동조적(syntonic)인 요소가 부조적(dystonic)인 요소를 능가함으로써 성장 지향적인 인간 발달을 이루는 것이지만 완전히 압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 이유는 긴장관계가해소됨으로써 그 다음 단계에서 정상적인 발달이 감소되기 때문이다.마지막으로 인간발달과정은 후성설적 근거 위에서 진행된다는 것이다.인간발달의 각 단계는 그 전 단계의 원인이며 동시에 경과가 되어 모든 단계는 체계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곧 각 단계는 그 형태를 들어내기까지 잠재적인 어떤 형태로 존재하다가 시간이 성숙해 지면 위기로 나타나거나 새로운 관점으로 발전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화이트헤드의 과정적 실재와 유사한 개념이다에릭슨은 그의 저서 “아동기와 사회”(childhood and society),“아이덴티티: 청년과 위기” (Identity: Youth and Crisis)등에서 인간 발달의 8단계를 논의하고 있다.에릭슨은 프로이드의 정신 분석이론을 발전시켜 자아정체감의 개념을 중심으로 통합적인 인격의 완성을 후성설에 의해 인생주기란 시점으로부터 설명하고 있다. 에릭슨의 입장에 따르면 인간의 전인격은 일정한 단계로 발달해 가는 것이며 사회는 이러한 발달을 자각하고 서로 작용해 가는 개인의 준비 상대의 증대에 맞추어 본래의 순서로 발달이 행해지도록 보호하고 원조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