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성발표자: 사학과 99 정혜은, 00 김현수민속학과 99 김은아, 00 남유진, 박진희1. 들어가며지금으로부터 600년쯤 전인 1394년(태조3년), 노쇠한 고려(高麗)왕조를 뒤엎고 새로이 조선(朝鮮)왕조를 개창한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는 새 왕조의 도읍으로 한양(漢陽)을 선정하여 이도(移都)하고 도성(都城)과 왕궁을 마련하는 대역사(大役事)를 일으켰다. 그로부터 꼭 400년 후인 1794년(정조 18년), 갖은 파란 끝에 왕위에 올라 왕권의 강화를 꾀하였던 조선 22대 임금 정조(正祖)는 한양 남쪽 100리에 있는 수원에 화성(華城:`수원성'은 일제 시대 이후 붙여진 별명이며 원래의 정식 명칭은 `화성'이다.)이라는 성곽을 축조하여 그에 둘러싸인 신도시를 건설하는 대역사를 일으키고 있었다. 정조(正祖)시대에 건설된 화성(華城) 즉, 수원성은 우리 민족 문화의 위대한 성과물 중 하나이다. 전장 6km에 달하는 성곽과 많은 부속건물, 도시 기반 시설과 생산 기반 시설들의 총화로 이루어진 자족적 계획도시 수원의 건설은 조선 역사상 서울 건설 이후 가장 대규모의 도시 건설 사업이었다.정조시대의 국력을 기울여 건설되어 현재 수원시의 모태가 된 이들 유적과 문화 유산은 조선후기 문화발전의 수준과 성과를 보여주는 역사 자료로서 국제적으로도 그 중요성이 높이 평가되고 있다.그럼, 먼저 우리 나라 성곽의 일반적인 특징에 대해서 알아보고, 준공한지 200여 년이 지난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우리민족문화의 위대한 성과물 중 하나인 수원성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2. 성곽이란?1) 성곽의 정의성곽이란 적군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흙이나 돌로 높이 쌓아올린 큰 담으로, 내성과 외성을 모두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성」은 내성만을 의미하고 「성곽」은 내·외성을 통칭하는 말인데 서로 혼용하고 있다.2) 성곽 건축우리 나라는 전체면적의 약 7할이 산지(山地)로 되어 있어 일정지역에 모여 사는 사람들은 예부터 자연적·인공적 외침에 대비하며, 스스로의 거서는 대부분 석성(石城)으로 개축하였다.한편, 세종, 성종 때에는 읍성의 축조가 활발하였는데, 과거 토축이었던 것을 석축으로 개축하여 방어력을 높이고 규모가 적은 것은 크기를 늘리는 등 현존하는 대부분의 읍성은 이 당시에 축조된 것이 많다.4) 성곽의 종류성곽은 머무는 사람 [居住主體]이나 목적, 지형, 입지와 축성재료, 그리고 평면의 형상 등에 의해 다양하게 분류된다.1 도성(都城)- 한 국가 권력의 상징인 왕이 평상시 거주하는 행정의 중심지에 내곽(內廓)인 궁성과 외곽(外廓)인 나곽(羅廓){) 나곽: 성의 외곽부분을 일컬음.을 갖춘 형태를 말하며, 경성(京城)이라고도 한다.2 궁성(宮城)- 왕이 거처하며 통치하는 곳에 짓는 궁궐과, 이에 부속되는 관청건물들을 중심으로 성벽이나 담장으로 둘러쌓은 것을 통털어 일컫는다. 따라서 궁성은 대개 도성 내에 위치하는 경우가 많고, 왕이 거처한다 하여 왕성(王城)이라 하기도 하고 황제(皇帝)인 경우는 황성(皇城)이라고도 불리웠다.3 행성(行城)- 왕이 거처하는 성인 궁성(宮城)과 대응되는 개념으로 평상시에는 왕이 상주하지 않으나 국방상, 행정상 중요한 지점에 국왕이 임시로 거주하는 성을 말한다.4 읍성(邑城)- 역대 선왕의 위패를 모신 종묘(宗廟)와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사직단(社稷壇)이 있는 곳을 도(都)라 한다면, 이것이 없는 곳을 읍(邑)이라 한다. 따라서 읍성은 왕이 아닌 군(郡), 현(縣), 주민(住民)의 보호와 군사적, 행정적인 기능을 위해 만든 것이다.5 산성(山城)- 유사시에 대비하기 위한 방어용, 도피용 성곽이며 한국의 대표적인 성곽의 형태이다.6 관문(關門)- 행성(行城)이나 장성(長城), 혹은 내지(內地)의 중요한 길목을 지키기 위한 것으로 임진왜란 이후 숙종, 영조대에 많이 만들어졌다.3. 화성은 왜 쌓았을까화성은 조선후기 문예부흥의 상징이다. 지금으로부터 200여 년 전에 세워진 화성은 정조시대의 모든 국력과 기술, 역량이 집약된 대역사였다. 정조가 왕위에 올랐던 18세기 후반반 시설을 갖추었다. 농업생산 기반시설로 만석거(정자동 일왕저수지 현재 만석공원), 만년제, 축만제(서호)를 만들어 수리시설을 갖추고 국영농장인 둔전을 경영하였다., 이 넓은 농장에서 많은 생산을 하여 경제적 기반이 튼튼한 도시로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농업도시로서의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ex:농촌진흥청·서울농대 등)수원을 상업도시로 발전시키기 위하여 채제공의 건의로 시장도 열었다. 이것이 최초의 관설 시장인 영화시장이었다. 상설상가를 유치하기 위하여 관모와 인삼의 독점판매권을 주는 등 여러 가지 특혜를 주었다. 이러한 정책들은 상공업을 중시한 유형원·박제가 등 실학자들의 사상이 반영된 것이다.영화시장과 더불어 우시장이 형성되어 활발히 운영되었다. 당시 화성부는 둔전을 경영하는 농민들에게 농사를 잘 짓도록 종자와 소를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수확의 절반을 거둬들이고, 소는 잘 키워 3년에 한 마리를 갚도록 하였다. 따라서 농민들은 늘어난 소를 팔기 위한 장소가 필요하였고 자연스럽게 우시장이 형성되었다. 이렇게 풍부한 소의 공급으로 수원갈비가 지금까지 수원의 명물이 되었다.조선후기에 상업이 발달하면서 경기도 일대에 전문적인 상업도시가 발달하였다. 즉 개성, 안성, 강화, 산성들이 대표적인 상업도시였다. 그리고 화성 건설 이후 가장 나중에 수원이 상업도시로 발달하게 되었다.정조는 이처럼 새도시 수원을 건설하고 화성을 쌓는데 온갖 정성과 노력을 기울였다. 이는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효심뿐만 아니라 이 새도시에서 자신의 이상이 담긴 개혁정치를 펼치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정조는 화성이 완성된 지 4년 후인 1800년에 갑자기 죽고 말았다. 정조의 죽음으로 개혁정치의 꿈은 사라지고 말았다. 그 이유는 정조에 이어 즉위한 순조가 여덟 살에 불과해 대왕대비 정순황후가 나라 일을 맡아보았기 때문이었다. 정순왕후는 사도세자를 죽게 만든 노론 집권층인 벽파와 손잡고 있었다. 그래서 정조의 신임을 받았던 사람들을 천주교 탄압을 내세워 모두 제거하고 말았다.는 충분한 노임을 받았는데, 이것은 화성 축성 때부터 시작된 변화였다. 이러한 노임체계에 따라 공사기간이 2년 반으로 단축될 수 있었다.노임과 축성비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축성의 책임자들이 축성비를 줄이기 위해 계획적으로 성문밖에 주막을 차린 후, 노임을 받고 나가는 성역꾼들을 끌어 모아 술값으로 노임을 쓰게 했다. 그리고 이 돈을 거둬들여 다시 성역의 노임으로 주어 축성비를 줄였다는 것이다.》라는 책을 만들었다. 지금 우리가 화성을 원형대로 복원할 수 있는 은 《화성성역의궤》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화성성역의궤》는 1801년에 간행되었는데 10권 9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기본 성격은 화성 축성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한 토목공사보고서이다. 그러나 이 책은 단순한 토목공사보고서가 아니라 화성성역에 관한 모든 것을 빠짐없이 기록하여 후세에 남긴다는 투철한 역사의식을 지니고 작성되었다. 이 책은 아주 정밀하고 치밀하게 기록된 종합보고서로서 그 문화적· 역사적 가치가 매우 크다. 세계적으로 이처럼 철저하고 완벽하게 작성된 기록은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이처럼 화성이 완성되기까지 많은 인력과 경비, 자재 등이 투입되었다. 화성과 더불어 개혁의 중심도시가 될 수 있었던 수원은 정조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미완의 개혁도시가 되고 말았으나 축성 당시의 특성인 농업 및 상업도시의 전통을 현재까지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5. 화성 시설물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을까수원 화성은 조선 정조 18년에서 20년(1794∼1796)사이에 건설되었다. 화성은 우리 나라 성곽 사상 가장 완벽한 제도를 갖추고 있어 성곽 예술의 꽃으로 불린다.정조는 성의 이름을 짓기 위해 장자(莊子)의 고사인 華封三祝(화봉삼축)까지 인용하여 화성으로 명명했다. 왕조실록에 따르면 정조는 "사도세자의 능인 융릉이 자리한 花山이 花는 華와 통하고 華는 德을 길러 孝에 이름이니 화성이라 이름지은 것은 수원이 덕과 효를 펼치는 아름다운 도시가 되리라"는 깊은 뜻을향에서 접근하는 적과 성벽에 붙은 적을 방어하기 위한 요새로서 凸 모양으로 만들었다. 치성이란 이름은 꿩(雉:치)은 제 몸을 숨기고 밖을 엿보기를 잘하는 까닭에 이 뜻을 딴 것이다수원성 전체에 순수한 치성은 모두 10개소(서일치, 서이치, 서삼치, 남치, 동일치, 동이치, 동삼치, 북동치, 서남일치, 서남이치)이다. 보통 치성의 경우 돌출된 3면에는 여장을 두르고 遠銃眼과 近銃眼을 各面에 내고 성벽 정면에는 현안(懸眼)을 두었다.치성위에 지은 누각을 포루(鋪樓)라 하고 또 이와는 약간 다르나 대포를 장비한 것을 포루(砲樓)라 한다. 성벽이 휘어 돌아가는 모퉁이의 돌출부에 세운 누각을 각루(角樓) 라 한다. 또 성문의 좌우에 배치한 치성으로 성문을 수호하기 위한 것을 적대(敵臺)라 한다.{3 포루(鋪樓) 포루는 군사들을 엄폐하기 위하여 성밖으로 튀어나오게 만든 치성위에 설치한 건물이다. 누각은 2층으로 아래층에는 총구멍, 포구멍을 내고 위층 또한 총구멍을 냈다.{성체는 석축으로 하고 그 위의 여장은 전축으로 하였으며 성 안쪽으로 계단을 설치하였다.서포루, 북포루, 동북포루, 동일포루, 동이포루 등 5개가 있다. 동북포루는 각건대라고도 불리우며 성체의 중간부분까지 석축으로 쌓아 다른 시설물과 구분된다포루란 치성(雉城)위에 지은 누각을 말하며 성내에서 이동 왕래하는 아군의 동향을 적이 못 보게 한 것이 성가퀴인데, 포루는 그 곳에 설치한 초소나 군사의 대기소와 같은 곳이다.4 포루(砲壘)포루는 성곽에서 치성과 같이 돌출시켜 삼중층으로 축조하여 화포를 설치해 두고 위 아래에서 쏠 수 있게 되어 있는 성곽시설이다. 포루 하부3∼4단은 화강석으로 쌓고 그 위는 전돌로 축조하였으며 최상층에는{{목조건물을 세웠다. 성벽 아래 부분까지 구조물이 설치되어 있으나 외관상 단층 누각만 세운 것처럼 보인다. 층간에는 계단을 설치하였고 총구멍을 내어 중화기 진지화 했다. 남포루, 서포루, 북서포루, 북동포루, 동포루등 5개가 있다.{5{암문(暗門) 성의 정문이 아닌 사잇문으로 양식, 있다.
조선시대의 지방통치구조에 관하여...1. 여는 말1392년에 건국된 조선은 고려시대와는 다른 성격을 가지고 성립하였다. 고려말부터 성장하기 시작한 향촌사회와 민에 대한 인식으로 조선의 사대부 건국 주도세력은 귀족이 아닌 민에 기초한 국가를 성립시키려고 애썼다. 조선이라는 국호는 고려가 고조선의 후예라는 측면에서 민족의식이 한 단계 심화된 단계에 있었음을 말한다.조선은 고려시대와는 다른 중앙의 정치구조나 권력구조로 개편하였고, 또한 지방통치도 새롭게 개편하여, 고려와 달리 전국의 민을 일원적으로 지배하기 위하여 전국 모든 군현에 수령을 파견하였다.조선의 지방통치 제도는 태종대(1400∼1418)에 확립되어 세조대(1455∼1468)에 일부가 수정되었는데 그 내용은 《경국대전(1484, 성종 15》에 수록되었다. 그러나 지방의 통치 제도는 기본적으로 고려의 그것을 답습, 보완한 것이었다.전국을 경기·전라·경상·강원·황해·함경·평안의 8도로 나누어 각 도에 관찰사를 두고 도 아래 300여 고을에 부(府)·대도호부(大都護府)·목(牧)·도호부·군·현을 두어 부윤(府尹)·대도호부사·목사·도호부사·군수·현령 ·현감 등의 수령을 파견하였다.관찰사와 수령은 지방행정의 상위조직을 구성하는 핵심외관이었다. 따라서 조선시기의 지방행정 제도 및 지방통지 조직은 외관제나 군현제의 제도적 정비, 변화과정을 중심으로 향촌사회에 대한 중앙집권체제라는 전제에서 이해하는 것이 편하고 어떤 특징이 있는지 공부해보고자 한다.2. 몸 말1) 관찰사관찰사[감사]는 종2품 이상의 현직 및 퇴직 관료 중에서 임용하였다. 임기는 360일) 관찰사는 지방의 병권을 함께 통합하였으므로 지방세력화할 위험이 있어 360일 임기에 단임으로 제한되었다.로 규정되어 5도 및 경기도에 적용하였고, 함길·평안 양도는 2년이었다. 양도는 감사가 가족을 거느리고 부임하여 감영 소재지의 수령을 겸직하는 겸목(兼牧)이 이루어진데 반해, 6도의 감사는 단신으로 부임하여 임기 동안 감영을 중심으로 도내 군현을 순력(巡歷)하면서 업무를 수행하였다. 관찰사의 보좌관으로는 수령관(首領官)으로 통칭되는 경력(經歷) 도사(都事), 감사가 순력할 때 도내의 행정실무를 대행했던 판관(判官)이 있었다. 관찰사는 '감사총치군민(監司摠治軍民)'이라고 한데서 보듯, 한 도의 행정, 사법, 군사적인 기능까지 관할하는 막강한 기능을 갖고 있었다. 또한 수령을 비롯한 모든 외관을 고과(考課) 포폄(褒貶)하였다.3년마다 서울과 지방의 관원은 그의 출신과 경력을 자세히 기록하여 이조에 제출하여 정안(政案)에 기록케 한다. 경관(京官)은 그 관사의 당상관 제조 및 소속 조(曹)의 당상관이, 외관은 그 도의 관찰사가 매년 6월 15일과 12월 15일에 등급을 매겨 왕에게 보고한다. 수령은 관찰사가 병마절도사와 같이 상의하여 하고, 제주 3읍은 제주목사가 등급을 매겨서 관찰사에게 보고한다. 열번 고과(考課)에 열번 다 상(上)을 받은 자는 상(償)으로 1품계를 올려주고, 두 번 중(中)을 받으면 무록관(無祿官)에 서용하고, 세 번 중을 받으면 파직된다.5·3·2회의 고과에 한 번이라도 중을 받은 자는 현직보다 높은 직을 줄 수 없으며 두 번 중을 받은 자는 파직된다. 당상관인 수령은 한번 중을 받으면 파직시킨다.또한 관찰사 및 수령등 지방관들은 모두 자기 출신지역에는 부임하지 못하도록 하였으니 이는 상피(相避)라 하여 친족과의 연결을 막으려는 의도에서였다.2) 수령수령은 관찰사 아래에서 지방행정을 실제 담당하는 각 군현의 외관을 가리킨다.조선시기에는 고려의 군현제를 근간으로 지방제도를 정비하여 위로는 8도체제와 아래로는 면리제(面里制)) 군현의 하부행정구획으로는 새로운 촌락지배체제로서 면리제가 성립되었다. 이 면(面)은 고려의 촌의 후신으로 사(社)또는 방(坊)으로 편성된 곳도 있었다. 이들 면 아래에는 다시 리(里),통(統)을 두고 5가(家)를 1통(統)으로 편성하였다. 향촌 주민 중에서 그 책임자를 선임하여 수령의 정령을 집행하게 하였다. 따라서 국가의 통치권이 향촌의 말단에까지 미칠 수 있었다.그러나 아직도 면리제는 완전히 획일화된 구조를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를 확립시켜 나갔다. 지방통치는 군현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지방행정은 수령을 중심으로 행해졌다. 기본 행정구역인 군현은 그 고을의 크기에 따라 주 부 군 현으로 구획되었다. 이에 따라 수령은 품계상으로 최고 종2품에서 최하 종6품까지의 부윤[종2품] 대도호부사[정3품], 목사[정3품], 도호부사[종3품], 군수[종4품], 현령[종5품], 현감[종6품]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행정체계상으로는 모두 병렬적으로 직속상관인 감사(관찰사)의 관할 하에 있었고, 다만 이들 수령이 겸대하는 군사직으로 인해 상하관계가 형성되었다.수령의 임기는 《경국대전》이 완성된 성종대부터는 1,800일 임기로 고정되었으며 단신 부임한 경우는 900일이 지나면 이임이 가능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제대로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정도로 자주 교체되었다. 수령의 하부행정체계로는 읍사(邑司)를 중심으로 한 향리조직, 면리행정을 담당한 면 이임과 그 밑에 각종 천역을 담당하는 관노비가 있었다.수령의 임무는 수령7사(守令7事)라 하여 고을의 행정권, 사법권, 군사권을 가지고 있었으나 인구증가와 농업 장려, 공정한 조세부과, 조세·공납의 징수 상납, 치안유지와 주민교화 등이 주였다. 수령은 일반 행정뿐만 아니라 지방의 군사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반드시 문무를 겸비한 자로 선임해야만 했다.3) 향리조선왕조는 건국 초부터 속읍 및 향·소·부곡 등의 군현화와 향리의 권한 축소 및 신분·직역의 고정화정책을 추진하였다. 1414년(태종 14년)에는 감무의 명칭을 현감으로 개칭하고, 군현의 하부 행정 기구이던 향, 소, 부곡을 폐지하고 그곳에 현감을 파견시켜 모두 현으로 통일하였다. 이렇듯 지방관의 파견이 일반화되자 지방통치의 담당자로서의 향리는 독자성을 크게 상실되고 지방관 예하에서 향역(鄕役)을 부담한 자로서의 성격이 한층 강해졌다.향리의 조직은 호장·기관·장교·통인으로 조직되어있다. 호장은 고려 이래의 명칭으로 조선시대에도 향리직의 최고위이며, 또 기관은 일반향리직의 총칭이다. 조선시대 기관은 중앙의 육조조직(六曹組織)을 모방하여 이·호·예·병·형·공방(吏戶禮兵形工房) 6방으로 나누어 그 직무를 분담하고 있었다. 장교는 고려의 주·현·군 장교직을 겸한 향리이며 이들의 임무는 삼공형을 칭하여 향리를 대표하여 직무를 수행하였다. 통인은 지인(知引)이라고도 하였다. 향리가 집무를 보던 곳을 보통 작청(作廳)이라 하였다. 이 작청에는 6방이 분설되어 기관을 중심으로 한 호장 이외의 일반 향리가 각기 직무를 분장하였다.조선시대의 향리는 특별히 아전(衙前)이라고도 일컬어졌다. 이들은 이과(吏科)라는 일정한 대우를 받았던 조선초기와 달리 16세기 이후부터는 품관진출이 억제되고, 양반으로부터 천시를 받아 양반이나 양인과 구별이 되도록 특수한 복장을 입혔다. 향직과 산계의 품계를 가졌던 고려향리의 전통은 완전히 저하되어 노직(노인직;老人職)으로 종 6품에서 종 9품정도의 낮은 위계가 일반적으로 수여되고 있어 그들의 세력권이 완전히 사족에게 밀려났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향리들은 각지의 이족으로 고정화되어 그 신분 및 역(役)을 세습하고 동시에 상호통혼에 의하여 향리계층의 재생산이 이루어졌다.조선시대의 향리의 직무, 즉 향역은 국가로부터 부여받아 집단적으로 세습하는 것을 의무로 하고 있었다. 그 직무의 내용은 일반 서무로서 조세의 징수와 요역의 동원, 그리고 송사의 처리 등을 행했다. 또한 징집한 조세와 공물을 각 창고 관사에 납입하는 조운을 담당하였으며, 중앙 및 지방의 국가기관에 상번입역(上番入役)을 하기도 하였다.관리의 부정부패를 막기 위해 자기 고장의 수령을 임명하지 않는 상피제도(相避制度)에 따라 타지방 사람을 수령에 임명함으로써 임기가 짧은 지방관들은 임지의 사정에 어두워 그 지방의 사정에 밝은 향리(6방관속)들에게 행정 실무를 맡기니 이들은 지방관을 속이고 사복을 채우는 등 횡포가 심하였다.각지에서 큰 세력과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던 대표적인 지방세력으로서의 향리는 중앙집권체제의 강화에 따라 그 세력이 위축되고 신분과 역의 고정화가 되었지만, 실무행정 담당자로서의 내재적인 실태는 고려이래 계속 유지되어왔다. 향리들은 각지에서 독자적인 자치조직과 확고한 경제적 기반을 가지고 당시 지방 세력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왕조측에서는 지방지배를 추진하기 위해서 이러한 향리들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국가권력을 배경으로 한 지방지배의 실무담당자로서의 향리의 실태는 기본적으로 변하지 않았으며, 이러한 존재의 중요성에 따라 향리는 조선 후기까지 존속하여 기능을 유지하였다.